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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쫓는 밤
로웨나 블루로즈
김아흔
Side Story. “새벽을 쫓는 밤” - (4)
지난 며칠간 로웨나를 관찰하면서 시리우스는 대략적인 그녀의 동선을 파악했다. 계단 앞에서 알렉토 캐로우의 무리에 둘러싸인 로웨나를 발견한 것은 그 덕분이었다. 그는 한 번 문 것을 절대 놓지 않을 만큼 고집스럽고 끈질긴 구석이 있었다. 몰래 로웨나를 찾아다니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으나, 결국 그는 캐로우 무리들이 그녀를 괴롭히는 현장을 발각했다.
시리우스는 단번에 그들이 저와 로웨나를 떼놓게 만든 원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캐로우라면 충분히 이해가 가네. 그간의 의문이 절로 풀렸다. 그녀는 비열한 슬리데린 중에서도, 강한 사람에게는 약하게, 약한 사람에게는 강하게 구는 표본 같은 마녀였다.
시리우스가 캐로우들을 쫓아낸 후에도 그를 향한 로웨나의 시선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시리우스는 그녀가 창피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자존심이 강했고, 자신의 유약한 모습을 남들에게 드러내는 것을 싫어했다. 시리우스는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의 숨겨진 모습을 들켰다는 사실이 부끄럽다면, 저도 숨김없이 보여주면 해결될 일이다.
시리우스는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코 상처 입는 것이 두렵다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로웨나와 있는 시간이 즐겁다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물었다. 왜 나를 싫어하느냐고.
결국 로웨나는 자신이 진짜 시리우스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라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간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전보다 자신에게 좀 더 기댄 것 같기도 하고, 친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그게 고맙고도 좋으면서, 동시에 로웨나를 향한 책임감이 생겼다.
얘를 보호해 줘야겠다.
그는 옳고 그름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슬리데린 애들에게 괴롭힘을 받는 여자애라니. 시리우스는 저가 왜 그렇게 로웨나에게 신경이 쓰였는지 알 것 같았다. 머글 출신이라는 이유로 핍박받는 것은 정의에 반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캐로우가 그녀를 표적으로 삼은 것에는 자신의 탓도 일부 있었다. 로웨나가 혼자 이겨낼 수 없다면, 시리우스 본인이라도 나서서 도와주는 것이 옳았다.
* * *
그리핀도르 테이블 위의 호박 주스 잔을 바라보며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제임스였다.
“술이야.”
그가 말했다.
“술 취한 밤(Drunken Night). 내가 생각한 이번 크리스마스의 테마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 제임스가 지팡이를 한 번 휘둘러 잔을 띄웠다.
“무알콜 칵테일에 진짜 술을 타는 거야.”
시리우스는 그것이 제법 재미있는 발상이라 생각했다. 애들은 자신들이 술을 마시는지도 모르고 먹다가 만취하게 되겠지. 저마다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휘청이는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무알코올 칵테일은 꽤 맛이 강하므로, 거기에 술을 조금 탄다고 해서 그렇게 티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참 생각하던 시리우스가 지나가듯 말을 던졌다.
“집요정들을 또 섭외해야 하나.”
“이번엔 그렇게 쉽게 넘어올 것 같지는 않아.”
할로윈 때 맥고나걸 교수님이 꽤 단단히 단속을 시킨 모양이더라. 우리에겐 일감 하나 넘기지 말라고 당부했대. 리무스가 대답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마루더즈가 아니지.”
제임스는 신나게 떠들어대며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일 때 쓸 수 있는 다양한 마법을 알고 있었다. 주방에 몰래 침입해도 좋았고, 집요정을 살짝 잠재우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 그중에서도 제일 재미있으면서도 성공 확률이 높은 방법을 논의했다. 결국 마루더즈 네 사람은 술통 자체를 바꿔치기하는 마법을 쓰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한참 대화를 한참 나누다가 어느샌가 대화의 소재는 크리스마스 파티 파트너로 흘러갔다. 벌써부터 그리핀도르에서는 파트너 탐색전이 한창이었다.
“크리스마스 파트너는 결정했어?”
피터가 제임스에게 생각 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가 조금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글쎄, 릴리 에반스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시리우스는 마치 못 들을 것이라도 들었다는 듯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리무스는 쥐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렸고, 피터는 호박 주스를 마시다가 체했는지 캑캑댔다.
“농담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에반스가 널 받아줄 것 같냐.”
물밀 듯이 동시에 튀어나온 부정적인 반응에 오히려 제임스가 당황했다.
“왜, 뭐가 어때서?”
시리우스가 고개를 휘저었다.
“절대 불가능해.”
릴리 에반스는 제임스를 단순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경멸했다. 설령 제임스가 무릎을 꿇고 빌어도 그녀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시리우스는 대체 그가 무슨 마음으로 그런 기발한 생각을 해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리우스의 단언에 제임스는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투정이라도 부리듯 그가 중얼거렸다.
“세상에 불가능한 게 어딨어.”
“있어.”
시리우스가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그게 바로 네가 릴리 에반스의 크리스마스 파티 파트너로 참석하는 거지.”
그들 사이에 폭소가 터졌다. 웃지 않는 것은 제임스뿐이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가 에반스의 파트너가 되면 어쩔래?”
“오. 내 어떤 것을 걸어도 좋아.”
시리우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어 줄 듯 양손을 내밀며 으쓱했다.
“진짜지?”
제임스는 거듭해 그들에게 되물었다. 그는 어쩐지 신나 보였다. 어떤 것이라도 걸겠다고? 그 말을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마루더즈의 심드렁한 반응이 오히려 그의 투지를 불태운 것 같았다. 그러나 시리우스는 세상에 투지로만 성공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제임스를 제외한 세 사람은 이미 이 내기의 승자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크리스마스 파티라. 순간 저도 모르게 시리우스는 로웨나가 있는 래번클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필리다와 조근 조근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로웨나의 크리스마스 파티 파트너가 시리우스 블랙 정도 되면 학교생활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는 본인의 이름이 가진 힘을 알았다. 설령 그가 블랙 가를 부정한다 하더라도, 머글 출신의 여자아이를 위해 제가 가진 가문의 권력을 이용하는 것이 그렇게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파티 드레스를 입히면 어떨까. 순수혈통 파티에서 보아왔던 여자들의 과감한 드레스가 떠올랐다. 로웨나는 분명 그런 드레스도 잘 소화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몸매가 부각되지 않는 옷을 주로 입었으나, 결코 볼륨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그는 가끔 그녀가 몸을 쭉 펼 때 드러나는 가슴 굴곡이나, 고개를 꼿꼿하게 들었을 때 부드럽게 내려오는 가느다란 목선에 눈길을 두곤 했다. 로웨나가 자신의 눈빛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적당히 시선을 분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정도면 O(Outstanding, 특출함)지. 시리우스는 아무도 찾지 못한 보물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나른하게 웃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아직 가다듬지 못한 원석에 가까웠다.
“시리우스, 넌 누구와 갈 건데?”
리무스가 그에게 물었다.
“난 같이 갈 사람 이미 정했어.”
“누구?”
“파티 당일 날 확인해.”
시리우스는 씩 웃으면서 리무스에게 대답했다. 그녀가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가장 놀랍고도 빛나는 사람이 될 것을 시리우스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호그와트에 첫눈이 왔다. 시리우스는 패드풋의 시선으로 눈이 쌓인 호그와트 정원을 보고 싶었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애니마구스로 변한 그는 리무스를 데리고 인적이 드문 호그와트 정원 뒤편으로 걸어 들어갔다. 매년 보는 광경이긴 해도 눈으로 뒤덮인 호그와트는 장관이었다.
그 자리에서 로웨나를 만난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그녀는 점심시간이 끝나는 이 시간대에 정원에 나온 적이 없었다. 제가 알기로 다음 수업의 교실이 다소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점심을 먹고 바로 교실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래서인지 시리우스는 로웨나가 리무스에게 먼저 말을 걸었을 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로웨나가 패드풋으로서의 그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시리우스는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
대화를 몇 번 나누는 것만으로 리무스는, 시리우스가 숨겨왔던 로웨나와의 관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평소에는 조금 무뎌 보이는 애가 꼭 이럴 땐 날카롭게 굴더라. 시리우스는 그의 장난기 어린 표정을 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리무스는 블랙에 관한 이야기를 그녀에게 캐묻기 시작했다. 시리우스의 앞이라 일부러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혹여 자신의 정체라도 들킬까 봐 시리우스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긴장을 느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원래의 모습으로 변신해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시리우스는 제가 로웨나의 앞에서 애완동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것을 들켰다는 것이 그렇게 창피할 수 없었다. 마침내 로웨나가 호그와트 성으로 돌아가자, 시리우스는 괜히 한 번 리무스에게 짖어 대고는,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정원 구석의 나무 그늘로 들어가 바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시리우스를 바라보며 리무스는 기다렸다는 듯 크게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제임스에게는 말하지 마.”
여전히 웃음을 멈출 줄 모르는 리무스에게 시리우스가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다. 그는 리무스가 한참 동안 웃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제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고 있는지 본인도 잘 알고 있으니까. 시리우스 블랙이 귀여움받는 애완 강아지 흉내라니.
“걔가 알면 골치 아파져.”
“그 정도쯤이야 뭐.”
아직도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리무스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로웨나가 떠난 방향으로 고개를 흘끗 돌리며 그에게 물었다.
“새로운 여자 친구 후보야?”
“아니.”
“그럼 뭐야? 요즘의 관심녀?”
“절대 아냐. 그런 식으로 엮일 일은 없을 거야.”
시리우스의 곁을 지나쳤던 여자들은 많았고, 리무스는 로웨나가 그들 중 하나가 될 여자애냐고 묻고 있었다. 제임스를 필두로 요즘 마루더즈들은 은근히 로웨나와 저를 이어주는 장난을 치곤 했다. 시리우스는 그것이 부끄럽고도 싫었다. 로웨나가 내 여자 친구가 된다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리우스는 단칼에 부정했다.
“그래?”
리무스가 평소에 잘 보이지 않는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쟤 괜찮지 않아? 난 로웨나 꽤 마음에 드는데.”
“뭐?”
시리우스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무스가 여자에게 저렇게 강한 호감을 표현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니 네가, 저 애가 마음에 든다고?”
시리우스가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저 공부만 하는 애를?”
“공부만 한다니. 성격도 밝아, 싹싹해, 게다가 예쁘잖아.”
“예뻐?”
“응, 예쁘게 생겼는데?”
시리우스는 진심으로 놀랐다.
솔직히 그는, 처음 로웨나를 보았을 때 어떠한 매력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다 그녀를 그저 그렇다고 평가할 거라 생각했다. 로웨나가 피어오르기 직전의 꽃봉오리마냥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그녀를 한참 봐온 자신만이 알아챈 것이라 믿었다. 다른 누군가가 이를 단번에 발견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무스는 그녀와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스스럼없이 그녀가 예쁘다고 말했다.
시리우스는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렇다면 굳이 리무스가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그녀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었다. 로웨나의 가치를 아는 것이 시리우스 혼자만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 까닭 없이 그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시리우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무스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가 로웨나와 친해져도 상관없는 거지?”
“…뭐, 알아서 해.”
불안한 기색을 숨기며, 그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 * *
시리우스는 혼자서 마음이 심란했다. 리무스가 로웨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니. 그는 옆에 앉은 로웨나를 흘끔 바라보았다. 정원에서의 대화를 통해 추측하건대 그녀도 리무스를 좋게 평가하는 것 같았다. 리무스는 눈에 띄게 잘생긴 편은 아니었지만, 준수한 외모에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과는 달리 모범생인 데다가 친절하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꽤 잘 어울렸다. 아마도 다정한 리무스와 순진한 로웨나가 만나면 알콩달콩 사이좋게 지낼 것 같기도 했다. 그 점이, 그를 더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곧 머글 연구 수업이 끝났다. 빌헬름 교수가 나가자마자 로웨나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리무스가 개를 기르나 봐요.”
시리우스는 언젠가 이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것도 매우 드문 일인데, 그것이 리무스에 대한 것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고 책을 챙기는 척했다. 그러나 로웨나는 오히려 더 신이 나서 조잘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자주 마주쳤는데, 리무스의 개인 줄 몰랐어요.”
“아, 그 개.”
별로 흥미롭지 않다는 투로 대충 대답을 했다. 로웨나가 계속 말을 이었다.
“걔가 진짜 까맣거든요. 그래서 제가 블랙이라고 이름 붙여줬는데, 실제 이름도 블랙이지 뭐에요.”
신기하지 않으냐는 그녀의 말에 시리우스는 대충 응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 소재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와 패드풋에 대해 이야기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로웨나는 조금 주눅이 든 모양이었다. 서운해하는 모습을 보니 또 좀 마음이 켕겼다. 으,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못해요. 시리우스가 지나가듯 그녀에게 물었다.
“걔 굉장히 착하고 온순하지 않냐?”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는데, 로웨나의 표정에 기쁨이 떠올랐다. 시리우스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녀가 패드풋으로서의 저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걸 저렇게 만면에 띈 미소로 확인하는 것은 또 달랐다. 블랙에 대한 칭찬에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로웨나가 자신을 떠올릴 때마다 저런 표정을 짓는다면 어떨까,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선연하게 일었다.
“맞아요. 역시 개는 주인의 성품을 닮는다더니. 리무스도 좋은 사람임이 분명해요.”
로웨나의 말에 시리우스는 좋았던 기분이 금방 상했다.
“그게 왜 그렇게 이어지나?”
“왜요? 리무스, 이상한 사람이에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시리우스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자신의 알 수 없는 심리상태가 혼란스럽기만 했다. 자신이 기분이 상한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패드풋의 성격이 리무스를 닮았다고 해서인지, 아니면 그녀가 리무스를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해서인지. 어느 쪽이든 시리우스가 기분이 나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이 이상했다.
“리무스와 친해져야 블랙을 좀 더 자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걘 진짜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거든요.”
리무스와 친해지도록 도와달라는 로웨나의 말에 시리우스의 기분이 더 내려앉았다. 이러 저러한 이유를 다 제하더라도, 그녀의 말은 리무스가 마음에 드니까 소개 좀 해 달라고 부탁하는 뉘앙스처럼 들렸다. 그는 명백히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난 리무스를 너에게 넘기지 않을 거야.”
“리무스가 무슨 물건이에요? 누가 보면 제가 소유권 양도라도 요구한 줄 알겠어요.”
그녀는 여느 때처럼 발끈해서 응수했다. 시리우스는 그녀의 격한 반응이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궤변을 늘여놓았다.
“리무스는 마루더즈의 마지막 남은 양심과도 같은 존재거든. 너랑 친해지면 나쁜 물 들어. 그래서 너와 알고 지내는 건 허락할 수 없어.”
“그렇게 치면 나야말로 시리우스랑 친해지면 안 되는 사람이죠!”
“넌 이미 나쁜 물 들어서 괜찮아.”
시리우스는 나쁜 물이 들었다는 그 표현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신이 로웨나에게 영향을 끼친 것만 같았다. 로웨나가 반쯤 씩씩대면서 얄밉다는 듯 그를 노려보고 있었으나 시리우스에게는 그렇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손 위에 있는 작은 토끼가 부리는 앙탈 같아 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시리우스는 로웨나를 여유롭게 지나쳤다.
* * *
마법약 교실에서 로웨나를 발견했을 때, 시리우스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가 인사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로웨나는 자신 앞에 서 있는 레귤러스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이 친했던가? 시리우스는 의아한 눈으로 로웨나와 자신의 동생을 살폈다.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사람의 싸늘한 표정 사이로 미묘한 적의가 흘렀다.
“난 시리우스에게 빌붙은 적 없어.”
시리우스가 서 있는 문가 근처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네 형이 나한테 집적대는 거야. 싫다는데 어찌나 쫓아다니던지.”
내가 집적댄다고? 시리우스는 그녀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레귤러스를 도발하려는 로웨나의 말투 하나만으로 금방 상황을 판단했다.
최근에 교내에는 시리우스와 로웨나가 친하게 지낸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는 그녀를 향한 괴롭힘을 막으려는 이유로 시리우스가 일부러 퍼뜨린 것에 가까웠다. 그런 소문을 듣고 레귤러스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분명 한마디 한 거고, 로웨나도 그에 응수한 듯했다.
시리우스는 직접 나서서 중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자신과 레귤러스 사이의 일인데 엉뚱하게 로웨나에게 불똥이 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마법약 교실로 들어가며 입을 열었다.
“블루로즈 말이 맞아. 내가 얘 쫓아다니는 거야.”
갑작스러운 시리우스의 등장에 두 사람의 시선이 교실 문가 쪽을 향했다. 로웨나를 옹호해주기라도 하는 듯한 그의 말에 레귤러스는 더욱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그가 분을 참지 못하고 시리우스에게 공격적인 어조로 말을 던졌다.
“형이 이런 잡… 머글 부모를 가진 시답잖은 여자랑 가당키나 해?”
“말조심해, 레그.”
“머글 출신이랑 시시덕거린다고 집에도 들어오지 않겠다는 거야?”
얘 좀 말이 심한데. 아무리 자신의 동생이고, 그가 저와 다른 가치관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시리우스의 표정이 절로 굳었으나, 레귤러스는 그것보다는 같은 공간에서 로웨나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이따 다시 얘기해.”
반쯤 화가 난 채 교실을 떠나는 레귤러스를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 자신의 잘못이 크다. 가문을 떠난다는 그의 말에 가장 스트레스를 받아왔을 사람은 바로 레귤러스였다. 그는 형이 떠넘긴 가주로서의 책임을 혼자 다 져야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정 상 레귤러스를 섬세하게 보살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형으로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자신의 형이 머글 출신의 마녀와 어울린다는 소리에 기분이 상했겠지.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로웨나가 아니라 나에게 와서 말을 하란 말이야. 하긴, 저의 동생이 와서 아무리 닦달해대도 시리우스의 성격상 이유 없이 로웨나와 거리를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장 잘 아는 사람 또한 레귤러스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형에게 직접 말하는 것보다 로웨나에게 시리우스 블랙과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판단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시리우스는 로웨나에게 미안해졌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그녀가 괜히 레귤러스로부터 비난을 들어야 했다.
“미안. 우리 집이 좀 그래.”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로웨나가 태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앞으로 레귤러스가 괴롭히면 나에게 말해. 시리우스의 말에도 로웨나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레귤러스가 이상한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레귤러스 때문에 지적하지 못했지만, 시리우스는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재밌는 말을 들었다.
“누가 누구한테 집적댄다고?”
“하하, 그걸 들으셨나 봐요…….”
로웨나의 얼굴에 떠오른 당혹감을 시리우스는 느긋하게 감상했다.
“정말 집적대는 게 뭔지 보여줘?”
한 걸음 다가가자 저도 모르게 벽 쪽으로 물러나는 로웨나를 보며 시리우스는 속으로 웃었다. 놀란 아기오리 같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는, 그녀가 이렇게 경직된 반응을 보일수록 더 짓궂은 장난을 치고 싶었다. 어디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측은해서 지켜줘야겠다 다짐하면서도, 당황했을 때 드러내는 반응을 보면, 더 심한 장난으로 괴롭히고 싶은 제 마음의 정체가 뭘까. 시리우스는 스스로도 궁금해졌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
그는 그녀가 신체 접촉에 매우 민감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함부로 건드리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었지만, 살짝 다가가는 것만으로 저렇게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면 더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다. 당황해 하는 로웨나의 얼굴을 감상하며 시리우스는 일부러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그녀를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가까이 선 시리우스를 의식한 듯 로웨나는 얼굴은 물론 귀까지 다 빨개진 상태였다. 왜 이렇게 귀엽냐. 그는 어쩐지 실없이 웃음만 나왔다.
그녀와의 거리는 시리우스가 생각해도 위험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가슴 근처에 그녀의 숨결이 닿기 시작하자, 태연하게 장난을 치던 시리우스의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맥박이 약간 빨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그녀의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이대로 키스라도 하면 어떤 반응일까. 시리우스는 궁금해졌다.
“……잘못했어요.”
그 순간, 저의 아래에서 로웨나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장난은 이 정도면 되겠지. 시리우스는 웃으며 그녀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기다렸다는 듯 로웨나는 자신과 조금 거리를 두었다. 애를 괜히 놀라게 한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면서, 냉큼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는 게 귀엽기도 하고, 저와 가까이 있는 게 그렇게 싫은가 서운하기도 했다. 한 사람에게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시리우스는 마치 지나가듯 이야기를 꺼냈다.
“크리스마스 파티 가냐?”
“어디 가든 다 그 얘기네요. 안 가요.”
“파트너 신청받은 거 없어?”
“있을 리가요.”
“그럼 나랑 크리스마스 파티 같이 가자.”
그녀의 표정을 보고 시리우스는 조금 놀랐다. 당혹스러워 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으나 그것과는 조금 핀트가 달랐다. 오히려 의문스럽다는 느낌이었다. 마치 못 들을 것을 들은 것처럼.
“저요? 제가 파티를 가라 구요?”
“어. 너.”
시리우스는 그녀의 반응에 약간 서운해져서 간결하게 대답했다.
“크리스마스 파티를, 누구랑? 당신이랑?”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로웨나가 물어왔다.
“내가 왜요?”
“같이 갈 사람 있어?”
“미안하지만 시리우스, 저 4학년이에요. 전 파티에 참석하지 않는다구요.”
“그건 알고 있어. 그래서 같이 갈 사람이 있느냐 물은 거잖아.”
“없긴 하지만,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럼 나랑 같이 가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경험해 봐. 뭐가 문제야?”
그녀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왜 하필 전데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데, 적당한 파트너가 없으니 너라도 데려가야지.”
“아, 그러니까 왜 저냐구요.”
왜냐고. 일단 로웨나와 있으면 자기가 재밌었다. 그게 제일 큰 이유였다. 그리고 자신과 친한 사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녀가 괴롭힘당하는 것도 막을 수 있을 테고. 드레스를 입고 크리스마스 파티에 등장한다면 그녀를 향한 평가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 또 뭐가 있더라. 시리우스는 그 세 가지가 분명하고 직접적인 이유는 아닌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이 로웨나에게 파트너 신청을 하는 것의 합당한 근거를 더는 떠올릴 수는 없었다.
속으로 어떻게 합리화하든, 시리우스는 이 모든 것을 로웨나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시리우스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넌 귀찮게 굴지 않을 것 같거든.”
“전 가기 싫어요.”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혔다.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시리우스가 물었다.
“왜 싫다는 거야?”
“그런 파티 별로 안 좋아해요.”
싫다는 사람더러 가자고 할 수는 없었다. 이걸 생각했어야 했는데. 자신이 준비조차 하지 않고 그녀에게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졸라댔다는 점을 그는 인정했다. 보통 파트너 신청을 단번에 성공하는 사람은 잘 없었다.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면서 구슬렸어야 했는데. 그렇지만 뭔가 생각할 시간은 부족했다.
조금이라도 일찍 승낙을 받아두어야 했다. 로웨나에 대한 리무스의 호감을 통해 시리우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 어떤 남자라도 파트너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이 맹한 여자애는 저가 좋다는 말에 그대로 냉큼 제의를 받아들이게 될지도 몰랐다. 자신이 먼저 선수를 쳐야 했다.
어떻게 구슬릴 수 있을까. 시리우스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블… 아, 리무스의 개 말이야.”
“블랙?”
“보고 싶어 하지 않았어?”
이거군. 왜 갑자기 블랙 이야기를 하느냐는 표정을 짓는 로웨나를 쳐다보며 시리우스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블랙은 그가 쥐고 있는 가장 강력한 유인이었다. 미끼 주변을 뱅뱅 도는 물고기를 관찰하는 낚시꾼이라도 된 기분으로, 시리우스가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너 연휴 때 학교에 남아 있겠다며? 크리스마스 파티에 같이 가주면, 리무스에게 부탁해서 크리스마스 연휴 2주 동안 블랙을 계속 볼 수 있게 해줄게.”
“정말요? 2주일 동안? 계속?”
그녀가 고민하는 것이 느껴졌다. 로웨나가 대답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리우스는 더욱 긴장했다. 이 정도면 정말 확실한 미끼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가진 패가 이거 말고 더 있나? 또 어떤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를 꾀어내야 하는 거지? 얘가 좋아하는 게 뭐였더라?
점점 더 궁지에 몰리는 느낌이 들 때쯤, 로웨나가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그래요.”
그녀의 승낙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 없었다. 시리우스가 로웨나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좋아, 계약 성립한 거다?”
* * *
중간시험이 끝났다. 열심히 준비해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험 하나가 끝나니 개운했다. 드디어 내일이 크리스마스 파티였다. 시리우스는 집요정들이 주방에 준비해둔 무알코올 칵테일을 모조리 알콜이 든 것으로 교체하고 오는 길이었다. 분명 모두가 만취할 테고, 내일 파티에서는 예상치도 못한 재밌는 일이 벌어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속으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날씨는 왜 이렇게 춥지. 그리핀도르 기숙사로 향하던 시리우스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12월 말이 되면서 호그와트는 이전보다 더 추워졌다. 심지어 성 내부인 복도를 걸을 때도 몸이 으슬으슬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복도 근처의 열린 창 때문이겠지. 유리가 없으니까. 시리우스는 저도 모르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3층 복도 아래에는 안마당이 내려다보였다. 그러다가 익숙한 인영을 발견한 그는, 순간 제가 잘못 본 줄 알았다. 드레스 자락을 든 로웨나가 안마당에 서 있었다.
쟤가 정신이 나갔나.
그녀는 심지어 이렇게 추운 날에 외투나 목도리조차 걸치지 않았다. 잠깐 바라본 정도였지만 그는 바로 알아차렸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누구인지.
그는 바로 자신의 애니마구스로 변해 1층으로 내려갔다. 마음이 조금 급했다. 쟨 왜 항상 뭔가 측은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저렇게 얇게 입고 떠돌아다녔다간 얼어 죽겠다.
그를 마주친 로웨나가 대뜸 말했다.
“모두 다 싫어. 엄마가 보고 싶어.”
시리우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툭, 건드리면 눈물을 한 움큼이라도 흘릴 것 같은 서러운 표정을 하고서 이를 악물고 서 있었다.
“그게 어떻게 래번클로야?”
그녀는 두서없이 시리우스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래번클로 여자애들이 괴롭힌 게 틀림없다. 으, 항상 여자들이 문제다. 시리우스는 그리핀도르 내에서도 자신을 두고 서로 견제하는 여자들의 무리를 겪어보았다. 로웨나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어떤 상황이었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래번클로가 너무 싫어! 이렇게 싫었던 적은 없었어. 다 마음에 들지 않아!”
시리우스는 로웨나가 화를 내는 것보다도, 이렇게 추운 날씨에 바깥에 있는 것이 너무 신경 쓰였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나. 안 그래도 배척당하고 있는데 혼자인 그녀를 돌봐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시리우스는 로웨나의 옷자락을 물고 그녀를 래번클로 기숙사 방향으로 당겼다. 기숙사로 돌아가라는 의미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로웨나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절대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을 거야. 호그와트 성 어디서든 밤을 지새울 거야. 학교는 넓으니, 어디든 가 있어도 상관없잖아.”
시리우스는 그녀의 호기 어린 말에 어이가 없어졌다. 이렇게 추운 날 난방도 되지 않는 학교에서 하룻밤을 보내겠다고? 쟤는 밤에 복도를 거닐기라도 해보고 저 소리를 하는 건가?
결국, 시리우스는 로웨나를 억지로 끌어 비명을 지르는 오두막까지 안내했다. 그녀를 이 장소에 초대하는 것이 조금 위험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뭐 어때. 로웨나는 버드나무를 어떻게 하면 얌전하게 만들 수 있는지 몰랐다. 시리우스는 로웨나가 이 장소를 가보는 것만으로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루모스.”
비명을 지르는 오두막에 들어온 로웨나가 마법을 써서 내부를 밝혔다. 그 사이 시리우스는 오두막 구석으로 걸어갔다. 저기 어딘가에 미리 챙겨놓은 겨울용 담요 몇 개가 있을 텐데. 이 오두막은 몇 년간 마루더즈의 기지처럼 사용되어왔던 곳이었다. 웬만하면 필요한 것들을 찾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곧 그는 담요를 발견했다. 올해 들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아 조금 먼지가 있었지만, 그래도 이것만 털어내면 오늘 당장 사용하기에 그렇게 나쁘지 않은 상태였다. 담요를 입에 물고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엷게 미소 지었다.
“이거 쓰라는 거지?”
로웨나는 담요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더니, 이를 바닥에 깔았다. 시리우스는 그녀가 자리에 앉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오두막에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그렇게 춥지 않아 다행이었다.
바닥에 담요를 깐 로웨나가 신발을 벗고 그 위에 앉았다. 기숙사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해서 억지로 데리고 오긴 했는데 이런 곳에서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시리우스는 괜히 그녀의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온몸을 담요로 두른 그녀가 시리우스에게 말했다.
“이리 와서 같이 누워있어.”
누워 있자고? 그는 로웨나의 말에서 느껴지는 묘한 어감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시리우스는 괜히 창밖을 바라보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네가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얼른 와, 블랙.”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약간의 애원기가 담겨 있었다. 애가 안 그래도 힘들어 보이던데. 시리우스는 그 말을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 혼자서 잠드는 것이 무서울지도 모른다. 그는 로웨나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마침내 시리우스가 제 옆에 엎드리자, 마음을 놓은 듯 로웨나가 자리에 누웠다. 시리우스는 괜히 그녀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로웨나가 입고 있는 티는 조금 헐렁했다. 옆으로 누운 그녀의 티 위로 드러난 속살이 달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그녀의 모습이 평소와는 다르게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어쩐지 시리우스는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저 옆에 엎드려있는 것뿐이었는데도, 그는 마치 그녀와 자신이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
로웨나가 그에게 바짝 붙어왔다. 시리우스는 잔뜩 굳은 상태에서 자신의 등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을 느꼈다. 그는 어쩐지 이 상황이 제가 가진 상상력의 한계를 시험한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린애라고 느껴졌던 로웨나가 다르게 보였다. 자신의 눈길을 멈추게 했던 그녀의 흰 목선과 옆으로 누웠을 때 살짝 드러났던 가슴골이 그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시리우스는 로웨나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곧 그녀가 잠들었다. 시리우스의 귓가에 로웨나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그는 담요에서 나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애초에 시리우스가 그녀의 옆에서 편히 잠들 수 있을 리 없었다. 조금 뒤척이기만 해도 잔뜩 긴장되는데. 시리우스는 평소와 다른 자신의 반응에 뭐라 표현도 못 할 만큼 머릿속이 뒤죽박죽 했다.
그는 이마에 손을 얹은 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 진짜 답이 없는 애다. 처음 오는 곳에서 어떻게 저리 잘 잘 수 있는지 모르겠다. 겁도 없이. 담요 가장자리에 선 시리우스는 로웨나가 누워 있는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 어깨 위에까지 올려 덮었던 담요가 살짝 내려가 있었다. 추울 텐데. 그는 그녀의 담요를 덮어주기 위해 로웨나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어깨에 살짝 닿았다. 전류라도 흐르는 것처럼 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시리우스는 자신의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비슷한 감정을 유추하려 해도 쉽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는 여태껏 여자를 꽤 만나보았다. 그녀들은 먼저 자신에게 다가왔고, 일부 여자와는 밀도 있는 스킨쉽을 나눈 적도 있었으며, 시리우스는 그때그때 책임감 있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확신하건대 결코 로웨나를 향한 감정은 그와는 달랐다.
로웨나를 볼 때마다 ‘소중히 하고 싶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도 그랬다. 누가 로웨나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힘들게 만드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 감정의 양면에는 로웨나를 건드리고 싶다는 욕망이 존재했다. 그녀를 건드려 감정에 파문이 일게 하고, 자기 때문에 걱정하고, 의기소침해 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좋아하나?
시리우스는 고개를 휘저었다. 지금까지 좋아했다고 생각한 여자는 여럿 있었지만, 그녀들에게 느꼈던 감정과는 상이했다. 무엇보다도 로웨나는 그가 지금껏 만나왔던 여자들과 전혀 달랐다. 그녀는 시리우스에게 여자라기보다는 지켜줘야 할 작은 동물이나 어린아이 같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여동생이라고 해야 하나. 왜인지 시리우스는 그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레귤러스 대신 자신에게 여동생이 있었더라면 로웨나에게 대하듯 했을지도 모른다.
시리우스는 자신을 뒤흔드는 감정에 가볍게 결론을 냈다. 이제야 납득이 간다. 로웨나를 생각할 때마다 뭔가 속에 결린 듯 느껴지는 이 불편한 기분은 분명 동생을 향한 심려 같은 것 아니었을까.
하여튼 쟤는 사람을 신경 쓰이게 하는 데는 뭐가 있다니까. 시리우스는 그녀를 흘끔 바라보았다. 창문 가에서 쏟아져 내리는 달빛에 그녀의 잠든 모습이 환하게 빛났다. 시리우스는 홀린 듯 로웨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로웨나의 첫인상을 기억했다. 그땐, 공부만 할 것 같은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왜 이렇게 눈을 뗄 수 없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 작품 후기 ============================
1. 시리우스 이 바보 멍멍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
2. 사실상 본편의 리와인드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좋게 평가해주시고 따라와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외전 특성상 모두 보여드리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생략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 탓에 전개가 다소 부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웨나 시점으로 이미 짚었던 부분들이니 이해해 주시길...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빛과 소금님들. 저는 항상 클라이막스를 향해 열심히 달려갑니다.
3. 많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T_T 용량이 많다보니 맞춤법 검사에도 한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