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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로웨나 블루로즈
김아흔
Part 4 - (10)
이불을 뒤집어쓴 채 생각했다. 리들 교수는 레질리먼시로 나의 정신을 지배하고, 임페리우스로 내 육체까지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가 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지? 나는 단지 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인가? 무서운 상상들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그는 원한다면 나에게 얼마든지 임페리우스 저주를 걸 수 있었다. 그는 심지어 내 손으로 가족들을 살해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다음 날에도 기분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후플푸프 6학년 학생이 습격을 당했다는 소문을 들은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나는 하루 온종일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학교는 거의 폐교될 분위기였다. 세 명씩이나 희생자가 생겼는데 아직 그 이유가 무엇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리들 교수가 손을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제 나는 덤블도어 교수님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아직도 리들 교수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내가 해야 할 공부와 과제는 날이 갈수록 쌓였다. 나는 마치 기계처럼 꾸준하게 학업에만 전념했다. 정해진 루틴대로 매일이 반복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사를 하고, 수업을 듣고, 도서관에서 과제를 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조차 희미했지만 나는 그래도 꾸역꾸역 하루를 알차게 보내려 노력했다.
차라리 해야 할 것들이 있는 게 나았다. 나는 죄책감에 젖어 우울해지는 대신 내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배우거나, 외우거나, 읽을 때에는 내가 가진 모든 상념을 잊을 수 있었다. 나는 현실을 도피하기라도 하듯 공부에만 몰두했다.
정규 수업을 끝내고 아이작과 도서관으로 향했다. 우리는 별로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도서관 근처까지 도착했다. 그때 반대편 쪽에서 다가오고 있던 슬리데린의 6학년 버틀러가 그를 불렀다.
“아이작,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네. 버틀러 선배.”
그는 정중하게 그 자리에 서서 버틀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버틀러는 내가 옆에 있는 것이 대화를 나누기에는 다소 불편한 것 같았다. 나는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얘기하고 들어와. 난 먼저 도서관 들어가 있을게.”
나는 아이작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도서관 입구로 향했다. 종종걸음으로 입구까지 도착해 도서관으로 들어가려는 찰나에,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역시 도서관 앞에서 기다리니 볼 수 있군.”
나는 낯선 그들의 얼굴에 당황했다. 슬리데린 5학년인 애버리와 뮬시버였다. 저들이 왜 나에게 말을 거는 거지?
애버리와 뮬시버는 슬리데린 내에서도 악질적이기로 유명했다. 온갖 추문과 악행의 근원은 거의 대부분 그들이었다. 같은 기숙사가 아니기도 했거니와, 나와는 어울리는 부류 자체가 달랐다. 그들이 왜 내 앞을 가로막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들과 대화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소심한 머글 출신의 어린 마법사를 괴롭히는 것이나, 혹은 호그와트 내에서 매력 있다 싶은 마녀들을 건드리면서 희롱에 가까운 말을 건네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 애초에 나는 그들의 타겟 바깥의 사람이었다. 복도에서 지나가다 마주쳐도 눈길 한 번 주고받은 적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척 당당하게 물었다.
“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요?”
“네게 긴히 해야 할 말이 있는데.”
뮬시버가 특유의 진갈색 곱슬의 머리카락을 한쪽 손으로 꼬면서 능글맞게 대답했다.
“이 복도는 대화하기엔 조금 부적절한 장소처럼 보이는군.”
“전 여기서도 충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는 그들의 수상하기 짝이 없는 함정에 속아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내 대답을 듣던 애버리가 진득한 미소를 지으며 얄궂게 끼어들었다.
“시리우스 블랙에 관한 이야기라도?”
시리우스? 갑작스레 등장한 그의 이름에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여기서 왜 시리우스가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나와 시리우스의 관계를 빌미로 그들이 무엇인가 협박이라도 할 참인가. 내 동요된 표정을 보고 애버리가 빙그레 웃으며 따라오라는 듯 저의 쪽으로 손짓했다. 마치 이미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되어 있다는 태도였다. 조금 머뭇거리다가 나는 느린 걸음으로 그들을 쫓았다. 도서관의 우측 복도 방향으로 걸어가던 애버리와 뮬시버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복도 구석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래 걷지 않아 직감적으로 나는 그들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더 이상은 따라가고 싶지 않아요. 여기서 말씀하시죠.”
내가 그들을 빤히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오, 여기서?”
저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나는 그대로 따를 생각은 없었다. 여기는 후미지긴 했지만 그나마 복도에 가까운 곳이었다. 대체 어떤 꿍꿍이인지는 몰랐지만 애버리와 뮬시버의 조합이라니, 결코 안전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들이 수만 틀린다면 어둠의 저주라도 퍼부을 수 있는 부류의 인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슨 일인지는 몰랐지만 여차하면 도망이라도 갈 수 있도록 퇴로를 확보해야 했다.
“할 얘기가 뭐죠?”
내가 싸늘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물었다. 샐쭉, 애버리가 웃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요즘 로웨나 블루로즈양이 장미처럼 활짝 개화했다는 이야기?”
그는 자연스럽게 내 볼 쪽으로 손을 가져다댔다. 나는 깜짝 놀라 그의 손을 쳐내며 사납게 소리쳤다.
“제 몸에 손대지 말아요.”
나는 위협하듯 지팡이를 그들에게 겨누었다. 사실 걸어올 때부터 어느 정도 지팡이는 꺼내놓은 상태였다.
“엑스펠리아르무스!”
방어마법을 채 발현시키기도 전에 뮬시버가 무장해제 마법을 썼다. 놀라우리만치 재빠른 시전 속도였다. 나는 그대로 지팡이를 빼앗겼다. 내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지팡이를 들다니. 앙큼한 구석이 있어.”
내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뮬시버가 능글맞게 말했다. 그는 동시에 지팡이를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내가 걸친 망토를 벗겨냈다.
“파티에서 보니 그간 몸매를 꼭꼭 숨겨왔었더군, 래번클로?”
나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 고개를 들어 그를 쏘아보았다.
“제게 무슨 일이 있으면 절대 가만히 입 다물고 있지 않을 거예요.”
“레귤러스가 모두 책임진다고 했어.”
번뜩이듯 레귤러스의 경고가 스쳐 지나갔다. 시리우스와 어울리지 말라는 그의 말이. 나는 지금 일어나는 사건의 전말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배후가 누구인지도.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별 효력이 없어 보였다. 뮬시버는 마치 우리에 갇힌 애완동물의 재롱이라도 본다는 듯이 비릿하게 웃었다.
“래번클로 범생이가 이렇게 좋은 몸매를 가지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그의 역겨운 말투에 소름이 끼쳤다. 애버리의 시선이 내 몸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그들이 그렇게 나를 농락해도 지팡이가 없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분했다. 나 자신이 무능하다는 것이 너무 화가 났다. 뺨을 때리려 손을 들어 올렸지만, 무참하게 잡혔을 뿐이었다.
“워워, 진정해.”
애버리는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내 한쪽 팔을 꽉 쥐었다. 그는 손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나를 제압했다. 열이 오르고 화가 났다. 그들의 앞에서는 내가 약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뮬시버는 능글맞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지팡이를 휘둘러 교복 스웨터를 벗겨냈다. 내 옷을 쥔 뮬시버는 일부러 음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저의 코에 스웨터를 대고 옷에 베인 내 체취를 맡았다. 나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려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지만, 본능적인 위협에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멍청아.”
애버리가 뮬시버를 비웃듯 말했다.
“옷은 지팡이가 아니라 손으로 벗기는 거야.”
나는 최대한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오는 애버리의 손을 쳐냈다. 그러나 애버리는 오히려 그게 재밌다는 듯 낄낄 웃어댔다.
“역시, 반항해야 제맛이지.”
입술을 깨물었다. 수치스러운 기분이었다. 내 팔을 잡고 넥타이를 끌러낸 그는 목 위에서부터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이 징그럽게 느껴졌다. 비명을 지르려는 나의 입을 애버리가 거칠게 틀어막았다.
“비밀의 방도 열렸겠다.”
애버리가 단추를 끌어내며 천천히 중얼거렸다.
“너 같은 머글 잡종은…”
셔츠가 벌어지고 안쪽에 입었던 슬리브리스 속옷이 드러났다. 그는 내 한쪽 어깨를 잡은 채 끈으로 된 슬리브리스의 끝을 쥐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들을 막으려고 손을 들어 올렸지만, 뮬시버가 내 양팔을 잡아당겼다.
“가만히 있다간 슬리데린의 후계자에게 잡혀먹히기밖에 더하겠어?”
어흥! 그가 사납게 맹수의 흉내를 내면서 슬리브리스를 끌어내렸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속살이 드러난 순간부터 나는 잔뜩 겁에 질렸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두 사람의 얼굴은 탐욕이 가득 차 있었고 자비는 없어 보였다. 내가 마치 그들의 먹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손을 내질렀지만, 그들에게 닿지 못했다. 내가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애버리는 입을 막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허기진 동물이 음식의 냄새를 맡은 것처럼 애버리와 뮬시버는 욕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 무서웠다. 이미 그들에게 나는 인간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인격체라기보다는 그저 욕구의 대상일 뿐이었다. 뮬시버가 내 옷을 채 다 벗기기도 전에 상의에 남은 마지막 속옷을 급하게 끌어내려고 하자, 내 몸이 급격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엑스펠리아르무스!”
그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두 개의 지팡이가 공중에 띄워졌다. 순식간에 지팡이가 날아간 애버리와 뮬시버는 놀라서 하던 짓을 멈추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완전히 굳은 아이작이 서 있었다.
“에버테 스타툼!”
마치 무엇인가 그들 앞에서 터지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의 몸이 멀리 날아갔다. 몇 피트 날아간 그들이 뒤로 굴렀다.
“좋은 말 할 때 꺼져, 개새끼들아.”
아이작은 그 자리에서 회수한 그들의 지팡이를 동강 내며 경고했다. 그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둘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그는 마법에 있어서는 사실상 래번클로 원톱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5학년이고 둘이라 하더라도, 지팡이 없이 아이작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애버리와 뮬시버에게 저주를 퍼붓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에게 저주마법을 씀으로써 일을 크게 만드는 것이 나에게 그다지 좋은 영향을 미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애버리와 뮬시버는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자리를 떴다. 내가 저들에게 협박의 말을 던질 때와는 판이한 태도였다. 천천히 숨을 가다듬으며 떨림을 자제하려고 애썼다.
나는 옷을 추슬렀다. 아이작이 그 자리에서 망토를 벗어 반쯤 벗겨진 내 셔츠 위에 덮어주었다. 그는 애써 내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급격하게 설움이 밀려왔다. 나는 피해자였고, 나는 패배했고, 졌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덤벼들면 나는 이길 수 없었다. 이게 당연한 결과였을까. 주저앉은 채로,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한참을 참았다. 이런 것에 울 수는 없었다.
“괜찮아. 로웨나, 괜찮아.”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나를 아이작이 한참을 토닥여주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너무 분했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못했다. 그가 오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발생했을 수도 있었다.
“괜찮아, 내가 있어.”
참았던 눈물이 한 방을 떨어졌다. 나는 눈에 힘을 주며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런 일에 울 수 없다. 내 잘못도 아닌 사고에 불과하다. 여기에 울어버리기엔 내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인간이라고 취급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들의 명백히 부정의한 폭력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 화났다. 무엇보다도 내가 겁에 질렸다는 것이 치욕스러웠다. 아직도 그들의 생각을 하면 몸이 떨렸다. 그런 짐승도 못한 것들에게 겁에 질려 빌기라도 하고 싶었던 마음이 다시 떠올랐다. 나 스스로가 싫어졌다.
아이작은 말없이 한참을 나를 토닥여주었다. 풀 데 없는 분노와 무력감은 더 무거워졌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적어도 지금은 안전했다.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들에게는 교수님께 말씀드릴 거라고 호기롭게 소리쳤으나, 방금 나에게 있었던 일을 누군가에게 말할 용기는 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피해자가 나라고? 그럴 리 없었다. 이런 일이 알려졌을 경우 피해자는 내가 아니었다. 머글 출신 마녀의 스캔들로 취급받고 온갖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겠지.
일이 커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는 것이 나았다. 온몸에 힘이 빠져 자리에 서기 힘들었지만 나는 억지로 일어났다. 머릿속에 거듭 이는 복잡한 설움을 애써 지우려고 노력했다.
“나 오늘은 기숙사에 먼저 들어가서 쉴게.”
“……로웨나.”
“고마워, 아이작.”
나는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러나 그가 설령 나를 위로해준다 하더라도 내 마음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이작이,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상황에 닥친 것처럼 연민이 가득찬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나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이기적이라고 말할지 몰라도,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을 아이작에게 들킨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끄러웠다. 물론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정말 최악이었을 것이다. 그가 어디 가서 이런 얘기를 떠들고 다닐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장면을 아이작이 본 것이 나에게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그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래.”
지금 나에게는 아이작과 함께 있는 것조차도 껄끄러웠다. 그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상황을 이해해주는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나는 지팡이를 쥐고 혼자 복도를 걸었다. 몸도 마음도 너무 피곤했다. 도서관이고 뭐고 침대에 누워 쉬고 싶었다. 기숙사 방향으로 걸어가며, 나는 더 이상의 최악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섣부른 예단이었다.
3층 복도에서 그대로 리들 교수와 마주쳤다. 감정을 채 추스르지도 못한 상태였다. 우울한 기분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평소처럼 인사했다. 그는 나의 인사를 제대로 받아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나를 유심히 살펴볼 뿐이었다. 그대로 스쳐지나가려는 나에게, 리들 교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너, 뭔가 있군.”
그에게서 나와 있을 때만 풍기는 싸한 냉기가 흘렀다. 내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리들 교수는 여전히 의문스럽다는 기색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그가 예리한 것인지, 내가 제대로 숨기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
“……싫어요.”
나는 처음으로 그의 명령을 거부했다.
사실 이성적으로 내린 판단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인 결단에 가까웠다. 지금의 나는 무엇인가를 깊게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고, 이 상태에서 내 부끄러운 기억까지 그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 진저리나도록 싫었다.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안색이 차게 식었다. 리들 교수가 저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을 얼마나 불쾌해 하는지 알고 있었다. 순식간에 주변에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그를 바라보고 싶지 않아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거칠게 내 턱을 움켜쥔 리들 교수는 억지로 내 얼굴을 자신의 쪽으로 향하게 했다.
“지금.”
그의 서늘한 시선이 압박하듯 나를 내리눌렀다. 내 뺨을 쥔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잡혔다. 리들 교수의 손아귀를 쳐내려 손을 들었으나, 그는 가볍게 내 손목을 쥐었다. 그의 태도에서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절로 연상되었다. 몸이 떨리며 또다시 두려움이 나를 압박했다.
“싫다고 말했나?”
그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리들 교수와 시선을 마주했다.
레질리먼스.
주문의 영창과 동시에 그의 의식이 억지로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 여느 때와 같이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침입이었다. 나는 기억의 통제권을 뺏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의 움직임을 방해하기 위해 모든 집중력을 쏟아 붓고, 온전한 방어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오늘만큼은 리들 교수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약해져 있는 상태라 평소보다 더 버겁게 느껴졌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심약해진 부분만 골라서 치고 들어왔다.
리들 교수가 강압적으로 정신을 각성시킨 탓에 기억의 파편들이 의식 위로 이끌려 나왔다. 의식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두텁게 쌓은 모래성이 허물어져 내리듯, 방금 전에 있었던 일들이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쉽게 드러낼 거면서.”
그가 레질리먼시로 내 기억을 하나하나 파헤치며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나에게 반항이라도 하겠다고?”
그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끌어낸 기억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에 의해 억지로 끌려 나온 끔찍한 기억들이 내 의지를 떠나 반복되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 치욕스러운 순간들을 그가 들춰보려고 하고 있었다. 절망감이 켜켜이 쌓였다. 울컥 올라온 눈물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며 나는 그에게 겨우 내뱉어냈다.
“…그만 해요.”
너무 수치스러웠다. 리들 교수에게 거부의 말을 내뱉어내자마자, 잠긴 둑이 무너지기라도 하듯 눈물이 절로 터져 나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절대 리들 교수의 앞에서 눈물 따위 보이지 않겠다고, 내 가장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의 레질리먼시가 멈췄다.
한 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나를 향한 리들 교수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나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 걸까. 나는 여전히 그의 머릿속을 알지 못했다. 그게 더 화가 났다. 리들 교수는 내 모든 것을 읽고 제어할 수 있는데 나는 그의 의중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내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을 읽어내고도 무덤덤해 보였다.
눈물이 계속 나서 숨이 턱 막혔다. 흠뻑 젖은 눈동자로, 나는 그를 응시했다.
그래서, 이제 절 죽이기라도 할 건가요?
“…….”
리들 교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 생각을 읽어 내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여전히 깊이를 알 수 없는 흑안이 고요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의 표정을 보자 더 설움이 복받쳤다.
눈물이 계속 나왔다. 엿 같아. 개자식들. 정말 욕이라도 한 바가지 뱉어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를 제멋대로 농락한 그들도 싫었고, 그러도록 조장한 레귤러스도 싫었고, 나의 치부를 이렇게 드러내려고 하는 리들 교수도 싫었다. 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내 모습도 싫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삶에 대한 희망도 미련도 없었다. 그냥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나는 그를 노려보면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차라리 나에게 살인 주문이라도 쏴요.
그냥 그가 나를 죽여 버리고 여기서 다 끝났으면 좋겠다. 눈물은 이제 넘칠 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참아가며, 흐끅거리며 울면서도 그와 마주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독기를 품은 눈으로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이것이 가장 원하는 결말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가 나를 죽이길 바라고 있었다.
그 순간, 리들 교수가 나를 망토 안쪽으로 당겨 품에 안았다.
그는 그대로 복도 구석의 벽 쪽으로 나를 밀었다. 등을 붙인 벽 쪽에서 차가운 한기가 흐르고 있었지만, 머리맡으로는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먼 복도에서 낯선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리들 교수는 혹여 자신과 나의 모습이 들킬까 봐 나를 품속에 그러안고 빛이 비치지 않는 복도 구석에 바짝 붙었다. 헐떡이며 우는 내 숨소리를 감추기 위함인지, 리들 교수는 망토를 추슬러 품속 깊게 나를 껴안았다.
“그러니까 이번 민달팽이 클럽 모임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진행한다는 거지.”
“비밀의 방 때문에 모임이 진행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슬러그혼 교수님의 목소리가 멀리서 윙윙거렸지만, 나는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의 품에 안긴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차가운 눈빛과 다르게 그의 가슴께가 따뜻하다는 것이 이상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옷깃에 눈물이 닿지 않도록 안간힘을 다해 눈물을 참았다. 슬리데린 무리들이 신나게 대화를 나누며 지나가고 있었다. 나의 상황과 비교되어서 그런지 더 눈물이 났다.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지만, 그는 오히려 내 허리를 꽉 잡아챘다.
“넌 꽤 쓸모 있어.”
나를 품에 안은 채 그가 낮게 속삭였다.
“네가 아무리 죽여 달라고 애원해도, 난 절대 너를 죽이지 않을 거다.”
복받치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내 생명을 걸고 협박해왔으면서.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으면서 왜 이 고통을 끝내려는 내 부탁은 들어주지 않으려 드는 거지. 뻔했다.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마음에 안 드는 거다. 그는 내가 원하지 않는 행동만 골라서 강제하지 않았던가. 리들 교수가 너무 싫었다. 울기밖에 할 수 없는 나 자신도 싫었다. 그냥 전부 서럽고 너무 눈물이 났다. 이제 내가 왜 우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슬리데린 학생들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나를 꽉 붙잡았던 리들 교수의 팔에 힘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의 옷이 내 눈물로 다 젖었지만, 리들 교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억지로 울음을 참는 내 숨소리가 복도 사이에 거칠게 울렸다. 호흡을 억제하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품속에 안긴 채 히끅거리는 나를 내려다보더니, 리들 교수가 차분한 어조로 나지막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그 정도로 울어서 뭔가 풀리기라도 하나?”
그의 말에 더 서러워진 나는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정말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모든 고난과 분노와 화를 다 쏟아내었다. 너무 외롭고, 힘들고, 싫었는데도 지금껏 어떻게든 참아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만 끙끙 앓아왔던 것들이 다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주변 모든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던 억하심정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왔다. 비밀의 방, 엄마의 드레스, 저주마법, 시리우스, 레귤러스, 스테이시, 뮬시버, 알렉토 그리고……
리들, 톰 마볼로 리들.
이 모든 괴로움의 시작은 그였다. 그를 떠올리니 눈물이 더 격하게 흘렀다. 내가 참아왔던 것들이 언젠가 터질 줄 알았지만, 그것이 리들 교수의 앞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정말 목이 쉬도록 실컷 울었다. 나는 그가 내 입이라도 막거나, 침묵 마법을 걸거나, 혹은 그 자리에서 고문을 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나치게 크게 울고 있었고 내가 생각해도 그의 신경을 거스를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리들 교수는 내가 스스로 울음을 그치길 기다려주는 것 같았다. 그는 그 이상으로 나를 압박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목 놓아 울었을까, 격해졌던 감정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여전히 훌쩍이며 숨을 겨우 삼키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약간 안정이 되는 듯했다.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너무 큰 소리로 한참을 울어서 그런지 탈수 증세가 있는 것 같았다. 겨우 숨을 삼키고 나는 고개를 들어 젖은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자마자 리들 교수와 눈과 마주쳤다. 그는 품속에 안긴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처음으로, 그의 흐린 눈에서 무엇인가 분명한 감정을 읽었다. 아무 것도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던 어두운 흑안에서 조금이나마 흔들림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는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에 눈을 깜빡였다.
============================ 작품 후기 ============================
뜰에 지금 표지를 그려주신 한유주님께서 그리신 리들겨슨님 팬아트가 올라와 있습니다. 하, 영국 남자의 시크함이 풀풀 풍겨용.. 저는 또 폰으로 다운로드해서 열심히 살펴보고 있습니당ㅋㅋㅋㅋ 공지사항에서도 업로드해 두었으니 다들 구경하러 오세여!
@o은유님 질문에 답변 드립니다. 로웨나는 리들에게 교습 받는 거 래번클로 학생들한테 들키진 않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밤에 돌아다닌다 해도 로웨나는 기본적으로 통금시간을 지키고, 평소에도 도서관을 밤늦게까지 다니는 타입이라 애들이 별로 신경 안 씁니다. 비밀의 방 열린 이후로 저녁 시간에 혼자 나오는 것이 교칙상 금지되어 있다 하더라도, 로웨나만 하루종일 쳐다보고 있지 않는 이상 혼잔지 여럿인지 사람들은 잘 모른답니다!!
+ 다음 업데이트는 내일입니다! 아마 새벽중에 업로드될 것 같아요 :) 코멘을 통해 미리 고지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