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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로웨나 블루로즈
김아흔
Part 4 - (3)
저녁 식사로 나온 치킨 스튜를 한 숟가락 입에 넣다가 혀를 데일 뻔했다. 식사를 하다말고 황급히 숟가락을 내려놓은 나는 열을 식힐 요량으로 혓바닥을 살짝 내밀었다. 알싸한 느낌과 함께 혀끝에서부터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치킨 스튜는 갓 끓인 듯 뜨거웠다. 테이블 반대쪽에서 이제 막 스튜를 한 숟가락 뜨고 있는 아이작이 보였다.
그가 나와 같은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 너무나도 명백해 보였기 때문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건너편으로 손을 내밀어 급하게 그의 팔목을 잡았다.
“됴금 히혀허 머거, 아이약.”
나조차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인데. 혀를 내밀고 있었던 탓에 의도했던 바와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아이작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
나는 혀가 아리는 것을 참으며 그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명확하게 말했다.
“식혀서 먹으라고.”
입안에서 느껴지는 뜨겁고 얼얼한 감각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혀를 길게 내밀어 열기를 식혔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혀하 흐거어……,”
아이작은 내 행동의 의미를 금방 파악한 것 같았다. 그는 피식 한번 웃더니 물컵 안에 작은 얼음 몇 조각을 소환해냈다. 아직 적당한 크기의 얼음을 만들어 낼 정도로 마법에 능숙하지 못한 나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이상한 발음으로 감사를 표하며 나는 얼음물을 입안 가득 머금었다. 혀에서 오르던 열이 식혀지며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살짝 녹은 얼음을 입안에서 굴리며 내가 중얼거렸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아.”
그래도 아직 따끔한 거 보니 하루 정도는 뜨겁거나 매운 건 먹지 못하겠구나. 폼프리 부인에게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런 사소한 것에까지 병동을 갈 필요가 있겠나 싶어 나는 관두었다.
아이작이 베이컨조각 몇 점을 자르며 나에게 물었다.
“머글 연구 수업은 어땠어?”
그가 머글 연구 수업에 관해 물었던 적이 있었나? 내가 전에 시리우스 이야기를 꺼내서 머글 연구에 수업에 대해 묻는 건가 싶기도 했다. 시리우스와 다시 관계를 회복했는지 궁금한 걸까.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오늘 수업 없었어. 빌헬름 교수님이 일이 있으신가 봐.”
“그래?”
그는 그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슬러그혼 교수님의 민달팽이 클럽 모임 이야기로 흘렀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슬러그혼 교수님이 1월 모임을 위해 대체 어떤 것을 준비했는가를 예상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마법약 만들기 콘테스트라도 하는 것 아니냐는 나의 추측에 아이작은 슬러그혼 교수님이 마법약만 생각하는 고지식한 사람은 아니라고 못 박으며 고개를 저었다.
식사를 마치고도 테이블에 앉아서 아이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멀리서 필리다와 요한이 이쪽 테이블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내 옆에 앉으라는 듯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룬 문자 과제, 같이 하기로 했다며?”
의자를 끌며 필리다가 내 옆쪽으로 앉았다.
“나도 끼워줘.”
“나야 찬성이지.”
승낙의 의미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 할 양이 상당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함께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빨리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작과 요한 또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므로 우리 공동과제의 인원은 네 명이 되었다.
우리 넷은 그때부터 머리를 맞대고 분량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해석해내야 할 책을 한 장 한 장 넘겨 가며 살펴보던 요한이 먼저 한마디 했다.
“3장은 둘이서 나눠 하는 것이 좋겠어. 혼자 하기엔 양이 너무 많아.”
“그럼 2장 부분이 너무 어중간하게 남게 되지 않을까?”
거기다가 아마 주술가가 쓸법한 표현이 많아서 해석하기는 제일 어려운 부분일걸? 아이작이 덧붙였다. 세 사람은 내용까지 따져가며 과제의 양을 공평하게 배분하기 시작했다. 지난 학기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을 혼자서 해결했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분량의 많고 적음이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지난번 해야 할 양에 비해 나아졌다는 것에 의의를 두는 거니까. 분배에 대한 불만이 있을 리 없었으므로, 나는 그들이 열렬하게 토의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한참을 토론하던 세 사람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럼 이렇게 배분하면 되겠지?”
아이작은 이미 깔끔하게 각자가 할 부분을 지정해주었다. 그의 능력은 신임할만했으므로 나는 별반 검토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제 배분도 마쳤으니, 나와 아이작은 함께 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과제를 미리 끝내는 것이 좋겠다는 것에 의견의 합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과제를 분배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하다며 한쪽 팔로 테이블에 엎드린 필리다는 당장 도서관에 가서 해야 할 부분들을 끝내겠다는 우리의 말에 독하기 짝이 없는 애들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아이작과 나는 연회장을 나와 1층 복도를 걸었다. 거의 온종일 붙어 있음에도 어떻게 그렇게 할 말이 또 생기는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나는 그에게 질린다는 감정조차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한참을 아이작과 이야기하며 걷고 있는데, 몇 명의 그리핀도르 남학생들이 복도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별로 관심 없는 척했지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속에서 시리우스를 발견했다. 큰 키와 눈에 띄게 잘생긴 얼굴 덕분인지 그는 다수 무리 중에서도 유달리 부각되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쉽게 찾아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간 시리우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항상 그의 종적을 주시해왔던 탓에, 설령 그것이 뒷모습이라 할지라도 나는 바로 시리우스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핀도르 무리의 중심에는 장난감 폭탄처럼 보이는 동그란 물체를 든 제임스가 다소 건방진 자세로 서 있었다. 그는 반대편 바닥에 주저앉은 세베루스를 향해 얄미운 비웃음을 보내고 있었는데, 세베루스의 얼굴에는 옅은 초록색의 끈적해 보이는 이물이 잔뜩 묻어져 있었다. 그는 주저앉은 채 한쪽 손으로 눈 근처를 훔쳐냈으나, 이물의 점성이 높아서인지 제대로 닦이지도 않은 것 같았다. 세베루스의 옆에 서 있던 릴리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괜찮아, 세브?”
척 봐도 반쯤 사색이 된 것이 분명한 릴리는 황급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었다. 건네받은 손수건으로 눈부터 닦아낸 세베루스는 별다른 대답 없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한참 세베루스를 챙기던 릴리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분노를 숨기지 못하고 제임스 쪽을 노려보았다.
“뭐하는 짓이야!”
고개를 돌린 릴리가 앙칼진 목소리로 제임스에게 소리쳤다.
“아, 새로 만든 콧물 폭탄의 성능을 시험하고 있었어.”
제임스가 동그란 물체의 심지처럼 보이는 부분을 잡고 휘휘 돌렸다. 그럼 저게 콧물 폭탄의 참상이란 말인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세베루스와 제임스의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복도에서 대놓고 싸울 정도인 줄은 몰랐다. 나에게 보여주었던 친절한 태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의 대치를 지켜보기 시작하자, 아이작 또한 조용히 내 옆에 섰다.
얼굴을 대충 닦고 자리에서 일어난 세베루스가 느리게 말했다.
“이건 그저 나를 타겟으로 한 거 같은데.”
“오, 아니야. 스니벨루스.”
제임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비꼬았다.
“단지 시험용 폭탄을 던지려 하는데, 스니벨루스가 엄마에게 응석을 부리는 장면을 목격했을 뿐이야.”
제임스는 사과는커녕 적반하장격으로 세베루스를 조롱하고 있었다. 릴리와 세베루스의 사이가 엄마와 아들 같다는 뉘앙스였다.
크리스마스 파티 이후로 제임스는 릴리에게 집착하지 않았다. 릴리에게 열렬한 구애를 해왔던 것은 마루더즈 친구들과의 내기 때문이라는 자기합리화의 과정을 거쳤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신 그의 타겟은 세베루스로 바뀌었다. 원래 그렇게 친하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떤 다른 명증한 이유를 든다 해도 제임스가 저렇게 행동하는 것에는 세베루스를 향한 그의 질투가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내가 보기에 제임스는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의 티가 확실히 났다. 누구든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관계에 있어 이는 그대로 적용되었다. 애정을 받고 큰 사람답게 그는 자신감이 넘쳤고, 재치 있었으며, 매력적이었다. 그가 매료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제임스에게 수시로 징계를 내리는 맥고나걸 교수마저도 결국 그를 가장 아꼈다. 그래서 제임스는 애정과 관심을 주었음에도 그것이 되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한 릴리의 홀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갈팡질팡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본인이 어떤 잘못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그는 전혀 진지하지 못한 태도로 릴리를 대하고 있었다. 제임스의 장난스러운 말들을 진심이라고 믿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가 릴리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삐뚤어진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제임스는 릴리에 향한 저의 감정이 관심이라는 것을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듯 싶었다.
“그만 좀 해, 포터.”
릴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유치하게 굴지 좀 마.”
“오, 실례했군요. 미세스 스네이프.”
제임스가 특유의 과도한 연극적 태도로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아드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시느라 고생하십니다.”
그리핀도르 남학생들 몇 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릴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그와의 대화를 지속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릴리는 대놓고 제임스를 무시하며 세베루스 쪽으로 다가갔다.
“가자, 세브.”
그를 마마보이 취급하는 제임스의 표현이 세베루스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팔목을 잡으려는 릴리의 손을 살짝 피했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세베루스는 무표정하게 그리핀도르 학생들 반대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세베루스가 자신의 도움을 무시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릴리는 그가 여간 걱정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세베루스를 따라갔다. 어쩐지 분해 보이는 제임스의 시선이 릴리의 뒤를 쫓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다 시리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세베루스와 제임스의 대치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내 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그의 직설적인 눈길에 나는 조금 놀라서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했다. 시리우스는 손을 살짝 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우리는 다시 도서관을 향했다. 아이작이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을 괴롭히는 종류도 가지가지야.”
그가 평소 마루더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완전 자기 멋대로군.”
“세베루스와 사이가 많이 나쁜가 보지 뭐.”
그간 마루더즈와 친하게 지내왔으므로, 나는 그사이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전후 사정도 판별하지 않은 채 단순한 사건 하나만으로 그들을 폄하할 수 없었다. 아이작 앞에서 나는 괜히 제임스를 한번 옹호해놓고서는 내 말이 그렇게 설득력 있게 들리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작은 저게 사이가 좋지 않은 문제냐며 제임스를 비난했지만, 나는 평소와 같이 그에게 마냥 맞장구를 쳐주지는 못했다.
우리 둘의 대화는 거기에서 끊겼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불편하고 꺼림칙했던 적은 없었다.
* * *
밤이 되자, 나는 래번클로 기숙사를 몰래 빠져나왔다.
학기가 시작된 후에도 비밀의 방을 찾기 위해 나는 학생들이 없는 저녁 시간에 맞춰 한산한 호그와트 복도를 떠돌아다니곤 했다. 주로 기숙사 휴게실에 있는 아이작은 내가 외출할 때마다 어디 가느냐고 물어왔고, 나는 그때마다 어쭙잖은 변명을 지어내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도서관에 간다고 말하면 그는 항상 함께 나서곤 했으므로 나는 매번 아이작이 별로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 만한 장소를 생각해내야 했다.
다행히 오늘은 휴게실에 아이작이 없어서, 나는 비교적 마음 놓고 기숙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오늘부터는 그간 미뤄온 2층의 탐색을 시작하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구석부터 직접 만져가며 혹여 어떤 표식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면밀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복도 끝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기척의 장본인을 확인했다. 복도 반대편 끝에서 리들 교수가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연구실이 2층이므로 사실 같은 층에서 마주치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내 쪽으로 다가오는 리들 교수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교수님.”
그냥 지나가려는 그를 나는 굳이 붙잡았다. 걸음을 멈춘 리들 교수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요.”
그는 호그와트 외부로 외출했다가 방금 도착한 것 같았다. 검은 톤의 마법사 정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은 것을 보니 뭔가 중요한 자리에 다녀온 것 같기도 했다. 누가 보아도 완벽하다고 말할 만한 그의 복장에 잠깐 눈길을 주었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근래 들어 그가 나를 따로 부르는 일은 없었다. 나는 그것을 학업과 비밀의 방을 찾는 일을 병행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할 만큼 내 능력이 뒷받침되어 주지는 않았다. 이번 학기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비밀의 방’일을 얼른 끝내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다. 비밀의 방으로 추정되는 수상한 것이 있을 때마다 재깍재깍 보고하는 것의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이 일을 끝내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가 비밀의 방을 열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거기에서 무엇을 할지는 내가 생각할 문제도 아니고, 생각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연구실로 따라오도록.”
왠지 몰라도 리들 교수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그는 무심히 나를 스쳐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나는 그의 뒤를 조용히 뒤쫓았다.
리들 교수가 연구실의 문을 열자, 찬 기운이 방에서 흘러나왔다. 하루 종일 들어오지 않은 듯 리들 교수의 연구실은 온기 한 점 없이 서늘했다. 연구실에 들어가자마자 등불을 켠 그는 지팡이를 한 번 휘둘러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 벽난로 근처의 소파에 앉았다.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리들 교수가 목에 두른 흑청색의 머플러를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벽난로에서 피워져 나오는 불꽃의 움직임에 따라 낮게 내리뜬 그의 눈동자가 흐리게 일렁였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이 뭐지.”
리들 교수가 머플러를 쥔 손을 살짝 들어 올리자, 머플러는 자동적으로 개어져 옷장으로 들어갔다.
“2층 여자 화장실 수도꼭지에서 뱀 모양의 장식을 발견했어요.”
나는 그에게 뱀의 모양에 대해서 설명했다.
“2층 여자 화장실?”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별 기대감이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아, 네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리들 교수는 낮게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그에게서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짙은 피로감 비슷한 것이 흘러나왔다. 그는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에게 말했다.
“안내해.”
이전에 그랬듯, 지금 당장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그는 앞장서라는 듯 나에게 고갯짓했다. 나는 천천히 연구실 복도 밖으로 향했다.
어둡고 한산한 복도는 겨울 특유의 차고 싸한 공기가 흘렀다. 나는 내 뒤를 따라오는 그의 기척을 느끼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 둘 사이에 익숙한 짙은 침묵이 깔렸다. 조금 불안해진 나는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2층 여자 화장실은 리들 교수의 연구실에서 그렇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화장실 내를 둘러보았다. 당연히도, 이 시간에 화장실에 있는 사람은 없었다.
화장실에는 당장에라도 꺼질 것 같은 낮은 조도의 작은 등불이 아슬아슬하게 켜져 있었다. 이래서야 달빛이 더 밝을 지경인데.
리들 교수는 마치 이곳이 공용의 공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스레 뒤따라 들어왔다. 낮에도 음산했던 화장실은 밤이 되자 괴기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당장 뭐가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에 나는 리들 교수에게 바짝 붙었다. 그가 싫기는 했지만, 어쨌든 리들 교수 옆에 있으면 어떤 외부의 불시 공격에라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자연스럽게 세면대 근처로 걸어갔다. 나는 천천히 리들 교수의 뒤를 따랐다. 벽면 한쪽을 채운 거울에 나보다 한 뼘 반 정도는 큰 듯한 리들 교수의 얼굴이 비쳤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수도꼭지를 훑었다. 나는 리들 교수의 옆에 서서 그가 하는 행동을 거울을 통해 흘끔 바라보았다.
수도꼭지만 한참을 바라보던 그의 표정에 흥미롭다는 기색이 일었다. 세면대 바로 앞으로 다가간 그는 양각되어 있던 뱀의 문양을 살며시 손으로 쓸었다. 일순 에메랄드 빛 뱀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 같았다.
갑자기, 그가 낮게 뱀의 언어를 내뱉었다. 인간의 육성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숨소리가 화장실에 낮게 울렸다. 나는 리들 교수가 무엇인가 느꼈음을 알아차렸다. 그와 함께 수도꼭지의 뱀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명령을 따르기라도 한다는 듯, 뱀 문양은 복종의 의미로 몸을 꼬았다.
순간, 건물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거대한 진동이 화장실 전체에 느껴졌다. 깜짝 놀란 나는 무의식적으로 리들 교수의 옷깃을 붙잡았다. 땅이 꺼질 듯한 굉음과 함께 세면대 전체가 반으로 갈라졌다. 나는 긴장감을 숨기지 못한 채 시선을 고정했다. 열린 세면대 너머에는 사람 하나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만한 크기의 터널이 모습을 드러냈다. 터널의 끝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꽤 오랜 세월을 머금어온 듯 깊은 어둠이 주변의 빛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조금 두려워진 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흔들림이 멎고 고요가 찾아왔다. 터널의 어둠 속을 말없이 응시하던 리들 교수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비밀의 방을 찾았군.”
============================ 작품 후기 ============================
요즘은 머리에 있는 걸 누가 그대로 타이핑해서 옮겨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간의 칼 업데이트는 비축분이었고, 오늘부터는 실시간 업데이트랍니다. 저에겐 순차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에피소드가 정리된 파일만 있을 뿐... 여유만 있으면 비축분을 쌓고 싶은데 요즘 본업이 너무 바빠서 글쓰기에 몰두할 수 없네요.
여러분께 다음 회차의 업데이트 날짜를 미리 고지 드리는 것은 여러분과의 약속을 이용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시간을 쥐어짜내서 어떻게든 글 쓸 여유를 확보하게 되거든여..
다음 회차는 31일(금) 새벽쯤 업로드 됩니다. 언제나 읽어주시고, 추천주시고, 코멘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 표지는 원작에서 창립자 로웨나 래번클로가 했던 말입니다. Wit beyond measure is man's greatest treasure. 책정할 수 없는 지혜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보물이다, 쯤 되겠네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