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 / 0115 ----------------------------------------------
Part 4
로웨나 블루로즈
김아흔
Part 4 - (1)
“로웨나.”
아이작이 나의 상념을 깨웠다.
“수업 시작했어.”
“어? 어.”
언제 들어오신 거지. 깃펜을 물고 멍하게 앉아 있던 나는 교실 단상 위에 서 있는 슬러그혼 교수님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이작이 말을 걸어주지 않았더라면 강의 자체를 놓칠 뻔했다. 나는 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늘 여러분이 만들 약은 ‘머리를 좋게 하는 마법약’입니다.”
마법약 교재 56페이지를 펴라고 지시한 슬러그혼 교수님은 오늘 제조할 마법약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좋게 하는 마법약은 일시적으로 두뇌의 회전 속도를 증가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죠.”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돌아온 학생들은 연휴 동안 푹 쉬어서 그런지 전보다 더 힘이 넘치는 것 같았다. 여전히 날씨는 추웠지만, 호그와트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의 무거운 침묵 대신 떠들썩한 분위기가 교내를 채웠다. 초대받지 않은 파티에 온 손님처럼, 나만 그 분위기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연휴 내내 호그와트를 뒤졌는데도 결국 비밀의 방을 찾지 못했다. 호그와트 전체를 다 둘러본 것도 아니었다. 호그와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고 복잡했다. 한 층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다행히도 리들 교수는 내가 연휴 동안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는 남은 징계기간 동안 별로 말을 건 적도 없었다. 심지어 얼른 비밀의 방을 찾아내라는 재촉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 약을 시험 등에서 함부로 사용하게 된다면 시험 결과 자체가 무효화 된다는 것을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슬러그혼 교수님이 이쪽을 바라보자 나는 잘 이해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을 듣느냐 아니냐를 떠나 거의 반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슬러그혼 교수님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대견하다는 듯 빙긋 웃었다.
학기가 시작하는 날 중간시험 결과가 게시판에 붙었다. 기대하긴 했었는데, 이번 중간시험에서 나는 레귤러스는 물론 아이작에게도 압도적인 점수 차로 수석을 맡았다. 무관심한 척했지만 다들 시험 결과를 확인해 본 모양이었다. 몇몇 선배들은 지나가면서 나에게 축하를 건네곤 했다. 올리비아는 특히 더했다. 대연회장에 있을 때 그녀가 그리핀도르 6학년 반장에게 자부심이 넘치는 목소리로 이번 중간시험에도 4학년의 수석과 차석이 모두 래번클로에 나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그녀가 나를 호명하기라도 할까 봐 부끄러워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식사를 했다.
리들 교수도 이미 이 결과를 알고 있겠지. 징계가 끝난 이후로 그가 나를 따로 부르는 일은 없었다. 설령 만난다고 해도 딱히 시험을 잘 쳤다고 칭찬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내가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칭찬을 받을만한 일이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으니까.
실습을 시작하라는 슬러그혼 교수님의 말에 나는 장갑을 끼고 아르마딜로를 바라보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아르마딜로의 담을 꺼내야 하나?”
내가 황망스러운 어조로 아이작에게 중얼거렸다. 이건 뭐 마법약 수업이 아니라 해부학 수업이잖아. 칼을 대고 배를 가르기가 쉽진 않을 텐데. 생각만 해도 징그럽고 소름이 돋았다.
“어. 그래야겠지?”
아이작은 자연스럽게 아르마딜로를 자기 쪽으로 가져갔다. 담을 꺼내 손질하는 것은 그가 맡으려는 것 같았다. 무심한 척 나를 배려해주는 것이 고마웠다. 아이작이 아르마딜로의 배를 갈라 담을 꺼내는 동안, 나는 그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하며 생강 뿌리를 하나하나 가다듬기 시작했다.
“방학 동안 학교에서 뭘 한 거야?”
“호그와트 탐험. 평소에 안 다닌 곳까지 다녔어.”
딱히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생강 뿌리 중에서도 가장 신선해 보이는 부분들을 칼로 대충 뜯어냈다. 책에는 뿌리의 빛깔이 황금색일수록 신선하며, 신선한 뿌리를 사용해야만 머리가 더 맑아지므로 마법약의 효과가 배가 될 수 있다고 주석이 달려 있었지만, 나는 도무지 뿌리가 황금색이라는 말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생강들의 뿌리는 하나같이 힘 빠진 탁한 갈색이었다.
아이작이 꺼낸 담을 손으로 짜내며 말했다.
“방학 때 집에 내려가지 않을 정도로 네가 호그와트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지 않아?”
지나가듯 던진 말이었지만, 거기에는 강한 의문이 묻어났다. 내가 호그와트에는 별다른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이제 5학년 넘어가면 O.W.L이나 N.E.W.T 공부하느라고 호그와트 돌아다닐 시간도 없잖아. 그나마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뭐, 가족들이야 다음 방학 때에도 볼 수 있는데 호그와트는 한번 졸업하면 다시 오기 힘드니까.”
나는 준비해놓은 대답을 하며 풍뎅이 껍질을 떼어냈다. 어디까지가 껍질인지 잘 확인을 할 수 없어 풍뎅이를 들어 올려 유심히 살폈다. 고개를 든 순간 옆 테이블에서 스테이시가 나를 감시하기라도 하듯 이쪽을 흘끗거리는 것이 보였다. 또 시작이군. 처음에는 그녀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조금 성질이 났다.
나는 아이작이 담즙을 짜는 것을 도와주는 척 그에게 바짝 붙었다. 이제는 스테이시 무리가 저런 시선을 보낼수록 더 얄밉게 행동하고 싶어졌다. 서로의 팔뚝이 닿을 정도로 아이작과 가까워졌으나, 나는 스테이시에게 모든 신경이 집중되었다. 그가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이윽고 손질이 끝났는지, 아이작이 아르마딜로의 담즙을 물과 함께 섞어 끓이기 시작했다. 나 또한 다른 냄비에 뿌린 생강뿌리와 초록색 액체를 짜낸 풍뎅이를 반반 섞어 거품이 날 때까지 끓였다. 학기를 시작하는 첫 실습이라 오늘 만드는 마법약은 그렇게 어려운 편이라 할 수는 없었다. 비록 필리다와 요한이 있는 우리 옆 테이블에서는 냄비 위에 폭죽이 터지고 있었지만. 나는 대체 어떻게 하면 아르마딜로와 풍뎅이, 생강 뿌리라는 재료의 조합으로 폭죽을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우리가 재료를 다 넣고 냄비를 젓기 시작할 때쯤, 슬러그혼 교수님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역시 두 사람의 약은 흠 잡을 데 없군!”
그는 심지어 냄비 속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제대로 보고 평가한 것이 맞는지 궁금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어 묻지는 않았다. 그런 말을 해서 나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에 교란을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겸손한 자세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이번 달 있을 민달팽이 클럽 모임에 둘 다 참석할 수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슬러그혼 교수님은 마법약의 색깔을 보아하니 분명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한마디 하고 다시 다른 학생들의 테이블로 향했다.
아이작이 중얼거렸다.
“교수님이 이번 모임 굉장히 강조하신다?”
“6학년들이 뭔가 준비했다던데.”
“그래?”
슬러그혼 교수님이 레귤러스와 나를 불러 1월 모임에는 꼭 참석해 달라 일렀을 때 그는 없었다. 생각해보니 아이작은 당시 교환 학생으로 덤스트랭에 가 있어서 못 들었겠구나. 그 날의 레귤러스 블랙이 떠올랐다. 그가 나에게 처음 한 말은 내가 마음에 안 드니 시리우스와 어울리지 말라는 거였다. 두 번째 말을 걸었을 땐 반 협박조로 경고를 날렸지. 학기가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났으나 레귤러스는 별달리 나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마주쳐도 모른 척 그냥 지나갈 뿐이었다. 내가 근래 시리우스와 거의 다니지 않으니 정말 경고만으로 끝난 거 같기도 하고.
레귤러스에 대한 상념이 자연스럽게 시리우스로 옮겨졌다. 시리우스만 생각하면 가슴 한켠이 아리듯 불편했다. 연휴 내내 시리우스를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같은 기숙사도 아니었고, 나는 징계를 받거나 호그와트를 헤맨다고 계속 바빴기 때문이다.
그래도 연회장에만 가면 내 시선은 항상 시리우스를 쫓고 있었다. 혹여 마루더즈 무리 사이에 그가 없으면 나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리들 교수가 갑자기 시리우스를 잡아가 고문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나쁜 상상이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중에라도 시리우스가 연회장에 나타나면 겨우 안심하곤 했다.
시리우스를 걱정하긴 했지만 동시에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나는 될 수 있으면 그와 마주치는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시리우스의 행동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요즘 그는 나를 발견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가와 아는 척하거나 장난을 걸지는 않았다. 복도에서 가끔 우연히 마주칠 때에도, 그는 인사 정도만 건넬 뿐 별다른 사담 없이 그냥 지나가 버리곤 했다. 시리우스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했으나, 웬일인지 정말 그가 나를 피하며 평소와는 다른 태도를 보이면 묘하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게 또 신경 쓰여 나는 시리우스에게 여러 번 눈길을 두었다. 이제 나도 대체 이게 무슨 마음 상태인지 알 수 없었다.
리들 교수가 아직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그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으나 나는 시리우스를 살려둘 유인이 있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라도 안고 있는 듯 나는 항상 전전긍긍했다.
“요즘 너 무슨 고민을 그렇게 골똘하게 하는 거야?”
아이작의 물음에 하던 생각을 멈추었다. 내가 혹시 딴생각을 한다고 마법약을 제대로 젓지 않은 걸까?
“나 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세 번 돌리고 있었어.”
내가 틀렸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혹여 실수해 아이작이 제대로 된 점수를 받지 못하게 될까 봐 미안했던 까닭이었다. 마법약은 항상 조별로 진행되곤 했으므로, 내 실수가 우리 둘 전체의 감점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아니.”
아이작은 조금 서운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고작 마법약 못 젓는다고 내가 뭐라할 리 없잖아.”
“아, 네가 거기까지 일일이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닌 건 알아.”
내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내가 미안해서 그런 거야.”
“말 돌리지 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아이작이 완성된 마법약에 불을 끄며 물었다. 머리가 좋아지는 마법약은 살짝 밝은 보랏빛이 돌고 있었다.
“너 요즘 넋이 반쯤 나가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거 알아?”
“아, 그래?”
저 밝은 보랏빛이 탁한 색이 될 때까지 식히라고 했었지. 나는 그에게 건성건성 대답했다.
“요즘 피곤해서 그런가 봐…….”
오늘따라 수업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얼른 끝내고 나가고 싶었다. 아이작에게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나는 마법약이 식는 것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뭔가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가 한참을 깊게 생각하는 듯 침묵하더니, 뭔가 결심한 것처럼 나에게 바짝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크리스마스 파티 전날 여자애들이랑 크게 싸웠다며?”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기 때문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이작이 알고 있었구나. 그가 대답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머뭇거리다가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있으면 다 말해주기로 했잖아.”
아이작은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 너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
“…미안해.”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와 눈을 피했다. 인제 와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는 나를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했고, 무슨 일이 있으면 자기한테 꼭 말해달라고 몇 번을 당부하곤 했다. 나는 징계까지 받은 일을 그에게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당장 나라도, 만약 아이작에게 생긴 일을 다른 친구들에게 듣게 된다면 서운해할 것이 당연했다.
생각해보면 그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 사건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바보같이 그냥 말하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미뤄왔다.
불을 끄고도 뜨거운 김을 뿜어내던 마법약은 이제 대충 식은 것 같았다. 아이작은 말없이 유리병에 약을 담았다. 우리 둘 사이에 도는 공기가 급격히 무거워졌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그가 유리병에 마법약을 담고 있는 것만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약병을 단단히 봉해 나에게 내밀었고, 나는 그에게 건네받은 마법약을 슬러그혼 교수님께 제출했다.
실습을 빨리 끝낸 까닭에 다른 학생들에 비해 조금 일찍 교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우리는 지하 교실을 빠져나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거듭 생각해 보아도 이 상황에서 빌어야 할 사람이 나임은 명백해 보였다.
“먼저 말하지 않은 건 정말 미안해.”
나는 한 번 더 그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우리는 자주 다투는 편은 아니었다. 아니, 거의 말다툼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나에게 배려해주었고, 애초에 나와 아이작이 부딪힐 일은 없었다.
나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부분까지 그에게 구구절절 털어놓지 않았다. 특히 그것이 내 자존심에 관련된 부분일 경우는 더더욱 숨겼다. 보통 친구 사이라면 그런 비밀스러운 속내를 공유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나는 그것이 내밀한 영역일수록 오히려 아이작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작은 항상 그 점을 서운해하곤 했으나, 그런 나의 성격을 이해해주었으므로 모든 것을 말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내가 잘못한 것이 맞았다. 이건 내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다. 어차피 그가 알게 될 일인데 털어놓지 않은 탓에 내 자존심을 지키기는 커녕, 아이작의 기분만 상하게 된 것이다.
“요즘 스테이시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거야?”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아이작이 차분하게 물었다.
“흠, 어, 그러니까.”
그건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자신에게 진실하게 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또 거짓말을 하면서 속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말하는 것도 정답은 아니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머뭇거렸다. 아이작은 참을성 있게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뭐, 어쩌겠어. 나는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요즘 시리우스가 너무 신경이 쓰여.”
“뭐, 시리우스?”
아이작은 뜬금없이 나온 시리우스의 이야기에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 요즘 나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그였으므로, 이는 거짓말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요즘 나를 좀 피하는 것 같아서.”
“블랙이랑 싸우기라도 했어?”
“아니, 뭐 얘기도 하고 그러는데… 느낌상, 이전과 같지 않다는 거지.”
복도를 걷던 아이작이 갑자기 그 자리에 섰다. 나는 엉겁결에 그를 따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이작은 나를 복도 벽 쪽으로 끌었다. 무엇인가 긴히 할 얘기가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복도 벽 쪽에 선 그가 나를 자신의 앞에 세우더니, 시선을 마주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너 블랙 좋아해?”
그의 질문에 깜짝 놀랐다. 시리우스를 좋아하냐고? 아, 그렇게 들릴 수 있겠구나. 나는 그냥 솔직히 신경 쓰인다고 말한 것뿐인데. 이성으로서의 호감 때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고 아이작이 생각할 만했다.
“아니! 절대 아냐.”
나는 이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요즘 들어 시리우스와의 관계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에게도 사람들이 이렇게 물어볼까. 순간 나는 시리우스가 그럴 때마다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해졌다.
나는 아이작에게 설명하듯 덧붙였다.
“그저 이전과는 태도가 다르니까 신경 쓰이는 것뿐이야.”
“난 너에게 항상 진실되게 대하고 있어, 로웨나.”
아이작의 호수 빛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가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
“너도 그런 거라고 생각해도 돼?”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나에게 진심을 털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에게 거짓말이라도 한다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말리라는 것처럼. 그에게 숨긴 여러 가지 비밀들을 생각하니 옅은 긴장이 일었다.
나 자신에게 물었다. 정말 시리우스에게 마음이 없는 것이 확실하니? 혹시 시리우스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
그를 좋아하냐고? 좋아한다는 게 뭐지? 그와 연인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손을 잡고, 키스하기를 바라는 건가? 갑자기 크리스마스 파티 날 밤에 있었던 일들이 스쳤다. 목덜미가 조금 뜨거워지는 것 같아 나는 고개를 휘저었다. 내가 원하는 게 그런 것일 리 없었다. 나는 그가 걱정되는 것일 뿐이다.
“응. 난 정말 시리우스에게 마음이 없어.”
아이작과 눈을 마주치며 내가 대답했다.
“사실 시리우스가 이것저것 챙겨준 것도 많고, 친하게 지내왔잖아. 그냥 평소와는 다르니까 걱정이 되는 거지. 혹시 내가 그에게 잘못한 것이 있나 해서.”
아이작이 여전히 의심의 기색을 지우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생각해봐, 내가 시리우스랑? 너 상상이 돼? 사람들이 네 깟게 무슨 시리우스 블랙이랑, 가당찮기라도 하냐고 그러지 않겠어?”
“네가 뭐가 어때서 그래.”
아이작은 나보다 더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꾸중이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사려 깊은 마음이 느껴져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블랙보다는 네가 훨씬 아까워, 로웨나.”
아이작이 주저하지도 않고 딱 잘라 말했다.
“시리우스 블랙에게 너를 주느니 차라리 내가 너랑 사귀겠어.”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설령 농담이라 할지라도 그의 말은 위안이 되었다. 나는 가볍게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아이작은 자긴 진심이라고 우겼지만, 나는 그가 딸의 결혼을 반대하는 아빠라도 되는 것 같다고 놀려댔다. 내 장난스러운 어조에 아이작은 한숨을 푹 쉬었다.
“어쨌건 시리우스 블랙에게 그렇게 마음 쓰지 마. 내가 말했듯 그의 성정은 딱히 믿을 게 못돼.”
“알겠어.”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굳이 부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지난 스핀오프 올려놓고서 후덜덜 했는데 의외로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능력이 부족한 관계로 본편에 그 설정을 넣게 되면 감당 못할 것 같아요. 그래도 좋아하시는 독자님들을 위해 이라임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완결 후에 이야기를 조금 더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로웨나 블루로즈의 평행세계쯤 되겠네요.
블리블리혜님, 후원 쿠폰 감사드립니다. 항상 긴긴 리플도 감사드려요...:)
@삼팔상만님, 그 표현은 뒤에 코멘 다신 수언님처럼 고등학교 때 근대 문학 읽다가 알게 되었어요. 남자가 남자에게 보내는 아주 진중한 편지였는데 마지막이 이만 총총(悤悤)으로 끝나서 혼자 빵 터졌거든요. 총총거리면서 뒤로 물러나는 듯한 느낌에, 심지어 바쁠 총(悤)자는 한자도 귀엽게 생겨서.. 언x의 x술은 뭔지 잘 모릅니다 T_T.. 공유하지 못해서 아쉽네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