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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로웨나 블루로즈
김아흔
Part 3 - (6)
아이작과 춤이 끝나자마자 후플푸프 4학년 여학생 한 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홍당무처럼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말을 더듬으며 아이작에게 춤을 신청하는데, 여자인 내가 봐도 너무 귀여워 보였다. 덕분에 그는 나와의 춤이 끝나자마자 그 여자애와 다시 홀 쪽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여하튼 인기들이 좋아요. 멀리서 그리핀도르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시리우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에게는 누가 다가와 춤을 신청해주지 않아서 적이 의기소침해졌다. 내가 외향적이지 못한 탓일까. 그나마도 아까부터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몇몇 선배들은 다 대화조차 나눠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도 나에게 말을 걸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주변을 훑어보며 아는 사람이 있나 살펴보는데, 방금 춤이 끝난 듯 멀리서 혼자 걸어오는 인영이 보였다. 리무스였다.
“리무스!”
나는 반가운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나를 발견한 그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해주었다.
“안녕, 로웨나.”
벌써 두어 번 춤을 추고 온 것이 분명했다. 지친 기색은 없었지만, 방금 춤을 춘 사람 특유의 유쾌함이 그에게서 묻어났다. 그는 내 드레스를 바라보며 감탄을 담아 말했다.
“오늘 정말 로웨나 래번클로인 줄 알았어. 너, 파란색이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고마워요.”
나는 리무스의 진심 어린 칭찬이 너무 기뻤다. 춤을 춘다고 약간 들어 올려진 소매 깃을 바로잡으며 그가 말했다.
“춤을 신청하고 싶지만, 너에게 춤 신청을 했다간 목숨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
그가 시리우스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시리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리핀도르 여학생에게 둘러싸여 바쁜 것 같았다. 특히 4학년 여학생들은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요? 저랑 춤추면 시리우스가 뭐라고 해요?”
“좋아하진 않지.”
나는 시리우스를 한 번 째려보았다. 내가 그에게 얼마나 나쁜 영향을 준다고. 여학생들의 이야기를 다소 귀찮은 듯 듣고 있던 그가 이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괜히 그가 미워져 나는 리무스와의 대화가 무척이나 즐거운 척 함박웃음을 날렸다. 멀리서도 시리우스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이 보여서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시리우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리무스에게 말했다.
“저랑 춤 한번 출래요?”
“뭐?”
“내가 신청하는 거예요. 그럼 시리우스가 뭐라고 못할걸요. 여자가 먼저 춤 신청하는 데 거절하면 예의에 어긋나는 거, 알죠?”
리무스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는 사소한 것에도 잘 웃는 사람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가식이라던가 예의의 일종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더욱이 호감이 갔다.
나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그를 홀로 끌고 갔다. 이전보다 더 빠른 템포의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리무스가 내 손을 잡고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리무스는 그렇게 춤을 잘 추는 타입은 아니었다. 나 또한 춤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이 가는 대로 즉흥적으로 몸을 흔들었다. 정해진 동작에 따라 절도 있게 추는 다른 학생들의 움직임과는 전혀 달라서인지 주변의 시선이 이쪽으로 꽂혔다. 그러나 그는 타인의 시선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역시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리무스는 마루더즈의 일원임이 틀림없었다. 누가 쳐다보든 말든 개의치 않는 그의 무심한 분위기에 휩쓸려 나는 그와 발동작을 맞춰 유치한 장난을 쳤다.
곡이 끝나고 우리는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홀 쪽에서 빠져나왔다.
“사교춤 좀 배우셔야겠는데요, 리무스.”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그의 대답에 나는 낮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때, 슬리데린 여자애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왔다. 리무스와의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내 바로 옆에 설때까지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덕분에 그녀가 가지고 있는 칵테일이 내 드레스에 살짝 쏟아졌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나를 괴롭히던 알렉토의 무리들 중 하나였다. 보지 않고서도 단언하건대, 이는 명백히 의도적인 접촉이었다. 그녀는 빈 칵테일 잔을 들고 하이톤의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어머, 미안해. 내가 실수를 했구나!”
어떻게 하면 좋지?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드레스 자락을 살폈다. 사실 남에게 무엇인가를 쏟는다 하더라도 알은척 하나 하지 않을 슬리데린의 습성으로 볼 때 그녀의 사과는 꽤 야단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리무스가 내 옷깃을 살피며 괜찮으냐고 물어왔다.
뭐 이런 전형적인 괴롭힘이 다 있어? 나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졌다. 다행히 칵테일이 묻은 부분은 드레스 끝자락 정도에 불과했다. 크리스마스 파티 같은 곳에서 큰 소리를 낼 수는 없으므로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리무스 쪽으로 고개를 저었다. 뭐 마법을 써서 얼룩을 제거하면 상관없을 것 같았다. 계속 내 옆을 맴돌며 미안해하는 척하는 모습을 보기 불편해서 나는 몇 번이고 괜찮다고 대답하며 그녀를 보냈다.
그녀가 가고 나서도 나는 리무스와 블랙에 대한 이야기를 더 했다. 그에게 언제부터 블랙을 키웠느냐고 묻자, 1학년 때부터 키우기 시작했다고 익살스럽게 대답했다. 4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블랙을 학교에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다소 의아하긴 했지만, 리무스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리도 없었으므로 그대로 수긍하고 넘어갔다. 조금 격하게 춤을 추고 나서 그런가, 그와 대화를 하면서도 옷자락이 자꾸 쓸려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신경이 쓰여 대화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그의 파트너였던 클리어워터가 리무스에게 다가왔기 때문에 나는 금방 그를 보내줄 수 있었다.
리무스가 자리를 뜨자마자 나는 내 옷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무엇인가가 옷을 당기고 있다는 느낌은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뭔가 이상했다. 내가 드레스 자락이라도 밟고 있거나, 옷에 뭔가 걸려 있는 건 아닌지 한 번 더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드레스 끝이 스스로 움직이며 아래쪽으로 당겨지고 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캐로우 무리 중 하나였던 그 슬리데린 여자애가 필시 어떤 종류의 저주 마법을 걸었음이 분명했다. 칵테일을 쏟은 것은 속임수였던 것이다.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리무스와 내가 칵테일의 얼룩에 신경을 쓰는 사이 장난질을 친 것 같았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드레스가 벗겨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었다. 순간 슬리데린 여학생들의 비웃음 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드레스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이다. 진짜 벗겨지면 더 좋고. 나는 도저히 학생들 간의 장난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 슬리데린 여학생들의 악질적인 행동에 절로 소름이 돋았다. 내가 공개적으로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그들에게는 그렇게 재밌게 느껴지는 것일까?
반쯤 표정이 굳어서 알렉토 무리를 눈으로 좇았다. 저 멀리서 나를 살피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깔깔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 열불이 터졌지만 나는 애써 화나는 표정을 감췄다. 지금은 저들에게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연회장에 머물러 있다가는 진짜 창피한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나는 연회장 입구 쪽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급하게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나를 시리우스가 붙잡았다.
“무슨 일이야, 래번클로?”
언제 다가온 거지? 나는 조금 당황해서 둘러댔다.
“잠깐만요, 화장실 좀 다녀오려구요.”
시리우스는 화장실에 다녀온다는 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미 뭔가를 눈치챈 것 같았다. 알렉토 무리들과 내가 주고받은 시선을 우연치 않게 보았을 수도 있었다. 옷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나를 한 번 훑어보더니, 그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반동 마법이로군.”
시리우스는 나를 따라 연회장 밖으로 나왔다. 솔직히 지금이라도 당장 드레스가 벗겨질 것 같은 느낌이었기에 시리우스가 따라오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별말 하지 않았다. 복도에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래번클로 기숙사에 가서 지팡이로 마법을 해제해야 할 것 같았다.
홀 바깥쪽의 현관 복도에 도착하자, 시리우스가 먼저 지팡이를 꺼냈다.
“피니트.”
크리스마스 파티에서는 지팡이를 소지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데. 역시나 그에게 교칙 같은 건 단순한 글자에 불과한 모양이었다. 그가 주문을 외우자 아래쪽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흘러내리던 옷자락이 움직임을 멈췄다. 시리우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에게 물었다.
“요즘도 쟤네가 너 괴롭히냐?”
“아뇨, 최근엔 잠잠했는데…….”
역시 파티 때 한 방을 노리고 있었구나 싶었다. 분명 내 성격상 정해진 교칙대로 지팡이 같은 건 들고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겠지. 시리우스가 답답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깊은 한숨을 쉬더니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유가 뭐야? 나랑 파티 왔다고?”
“그럴지도 모르죠.”
그는 조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에게 먼저 파트너 신청을 한 것은 그였기 때문에 가책을 느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파티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들은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나를 골려 먹으려고 했을 것이다.
“원래 그런 애들이에요. 시리우스 탓이 아닌걸요.”
시리우스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한참을 가만히 서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의 은회색 눈동자에 고민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도망가지 말고.”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나한테 와.”
“네?”
나는 그의 말에 살짝 놀랐다.
“이런 문제가 생기면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나에게 오라고.”
그는 나 혼자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대연회장을 나간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시리우스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말이 약간 당혹스러웠던 까닭이었다. 동정인지 뭔지는 몰라도 그는 충분히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에게 쪼르르 달려갈 만큼 우리가 절절한 사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왜 시리우스가 그러기를 요구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나와 관련된 거니까, 온전히 네 일이라고 볼 수는 없어. 알겠어, 래번클로?”
그가 장난기 하나 섞이지 않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하는 탓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알렉토 무리가 언급했듯, 그들이 나를 괴롭히는 것은 단순히 내가 ‘시리우스 블랙’과 어울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이 일종의 불씨가 되어주긴 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해도. 그가 굳이 책임의식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그것을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연회장 입구에 발을 내딛자마자 어쩐지 시리우스가 슬리데린 여자애들 무리를 찾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내가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오늘은 아니에요.”
나는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즐거운 날이어야 하잖아요. 누군가와 싸우고 싶지 않아요.”
다행히도 그는 지팡이를 꺼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못마땅해 보였으나 그는 내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한 것 같았다. 우리는 천천히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파티장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홀에서 춤을 추고 있었고, 일부의 학생들은 가장자리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내 시야에 칵테일을 엎지른 슬리데린 여자애가 들어왔다. 그녀는 나를 괴롭히던 다른 여자 한 명과 서서 나와 시리우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싸늘한 표정으로 시선을 맞받아쳤다. 이름도 모를 그 여자애는 내 눈길을 피하지 않고 웃었다. 무섭다.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 시리우스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는데, 오히려 내가 그의 지팡이를 뺏어서 저주라도 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놓고 나를 비웃던 그녀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연회장 홀 쪽을 향했다. 반대편 홀에 서 있는 슬리데린 남학생과 춤을 출 모양이었다. 얄밉다는 생각을 한 순간, 그녀가 발을 잘못 밟은 듯 삽시간에 미끄러졌다. 전혀 미끄러질 만한 것은 없었음에도 마치 얼음 위에 발을 내디딘 것마냥 한 번에 엉덩방아를 찍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시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왜?”
그는 내 옆에서 왜 쳐다보느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시리우스가 한 거 아니에요?”
아무리 봐도 자연스럽지 못하게 넘어졌기 때문에 나는 그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치마가 볼품없을 정도로 들렸다. 너무 우스꽝스럽게 넘어졌기 때문인지, 근처에 있는 그리핀도르 남학생들이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조금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설마. 나 지팡이도 꺼내지 않았는걸.”
그가 능청스럽게 미소 지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미심쩍었지만 그냥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뭐, 그의 짓이면 어때. 수치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그녀의 모습에 기분이 좀 풀렸다. 나아진 기분으로 그와 대화를 채 시작하기도 전에, 여학생이 한 명 다가와 물었다.
“저기… 춤 한 번 추지 않을래?”
이번엔 후플푸프 6학년 선배였다. 시리우스는 얼굴에 드러내놓고 싫은 티를 냈다. 그렇지만 차마 싫다고 대답하지 못하는 듯─적어도 그가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요구에 응했다. 시리우스는 정원에서 쫓겨나는 땅신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홀로 향했다.
홀 반대편에서 제임스가 플로어로 걸어왔다. 중간에 시리우스와 마주친 제임스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시리우스에게 하이파이브를 해대며 부산스럽게 굴었다. 만면에 미소를 띤 제임스는 곧 나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레빗양!”
그는 올리브그린의 따스해 보이는 턱시도에, 영국식 모자인 실크해트까지 갖춘 차림이었다. 방금 전까지 춤을 추고 왔는지 그의 동그란 안경이 코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제임스는 여느 때와 같이 나를 레빗이라고 부르면서 다가오다가 멈칫했다.
“오, 로웨나 래번클로 여왕님이 여기 계셨군요!”
그가 과도하게 예를 차리며 익살스럽게 모자를 벗고 나에게 인사했다.
“고마워요, 제임스.”
그의 반응이 부담스러웠으나 드레스를 살짝 들어 올리며 고전적으로 감사를 표했다. 제임스가 유난을 떨며 우아하기까지 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줄 것이 있다며 모자를 벗어들었다.
“자, 블루로즈양을 위한 파란 장미.”
그가 모자에서 마술을 부리듯 장미를 꺼냈다. 마법은 아닌 것 같았으므로, 나는 조금 신기해졌다.
“어디서 난 거예요?”
“연회장 바깥에 인공 정원을 조성해 놓았더라고.”
제임스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시간 나면 가봐.”
나는 그에게서 장미를 받아들었다. 코끝에서 진하게 퍼지는 장미 향기를 맡으며 내가 물었다.
“릴리와의 춤은 어땠어요?”
“말로는 표현 못 하지!”
그는 환상이라도 본 것 같다는 듯 과장해서 말했다. 장난기 어린 표현을 사용했지만 나는 거기에 진심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작 본인은 과장된 농담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긴 했지만.
제임스는 내 앞에서 한참을 릴리에 대해서 떠들다가, 다른 그리핀도르 남학생과의 춤을 끝내고 걸어오는 릴리를 발견하고는 나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마치 돌아온 주인을 맞이하는 강아지 같아서 나는 뒤에서 한참을 웃었다. 시원하게 웃고 나니 긴장감이 살짝 풀리면서 허기가 졌다. 그러고 보니 메이크업이니 뭐니 한다고 저녁조차 먹지 못했다. 간단한 디저트 류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식사로 삼을 만한 것은 없었다. 나는 조용히 서서 칵테일을 비웠다. 이거라도 마셔야지. 마실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역시 마법약의 힘이란. 나는 조용히 칵테일을 홀짝이고 있었다.
두 곡쯤 끝났을까, 춤을 추고 시리우스가 내 쪽으로 돌아왔다. 그새 기분이 좋아진 나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내 옆에 늘여져 있는 빈 잔을 보더니, 시리우스가 기절할 듯 놀래며 물었다.
“이, 이거 혼자 다 마셨냐?”
“왜요? 제가 너무 잘 먹어서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시리우스는 반쯤 당황한 것 같았다. 그는 빈 잔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물었다.
“괜찮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칵테일 몇 잔 마신다고 체하기라도 할까 봐. 그러고 보니 몸에 약간 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고작 무알콜 칵테일 마시는 것만으로 이렇게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이 맞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뭐. ‘기분이 좋아지는 묘약’ 덕분이겠지.
내가 시리우스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지금 기분이 엄청 좋아요.”
“당연하지.”
그가 헤헤 웃는 나를 조금 한심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나는 시리우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방긋방긋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뭔가 행복했다. 이런 기분은 당연한 건가? 내 쪽으로 살짝 다가온 시리우스가 남들은 알면 안 되는 비밀이라도 가르쳐주는 것처럼 내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가 칵테일에 술을 탔거든.”
이럴 수가. 이 알딸딸하게 열이 오르는 기분이 단지 파티와 마법약 때문은 아니었구나. 어쩐지 오늘 마루더즈들이 조용하다 했는데, 그들이 꾸미는 장난이 이런 종류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 * *
크리스마스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제임스는 킬킬대면서 계속 칵테일을 마셨고, 시리우스 또한 제임스와 속도를 맞췄다. 나는 온몸이 뜨거워졌다. 마루더즈들이 짓궂은 장난을 쳤다는 사실을 교수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제임스는 그 사실을 밝히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지만, 시리우스는 그의 입을 틀어막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조용히 표현했다.
멀리서 반쯤 취한 제임스가 릴리의 드레스 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칭얼거렸다. “이 비싼 여자 같으니라구. 진작에 파트너 신청에 응해줬으면 좀 좋아.” 혼자서 중얼대는 그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릴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아직 칵테일의 실체를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세베루스가 건너편에서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단박에 어떤 관계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세베루스는 슬리데린 4학년 여학생을 파트너로 데려왔지만 둘은 그다지 친한 사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모른 척 지날 일이 왜 이렇게 웃기게 느껴지는지 몰랐다. 나는 숨이 넘어가라 깔깔거리며 시리우스에게 말했다.
“제임스 봐요, 너무 웃겨요.”
“뭐야, 너 취했어?”
시리우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휘청거리는 나를 잡아주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기도 했고 취기가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 졸려서 기숙사 방에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그를 뿌리치고 혼자서 기숙사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근데 내 방이 어딨더라? 생각보다 찾기가 어려웠다. 멀찍이 작은 방문이 보였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홀 구석으로 다가갔다. 이게 딱 내 기숙사 방문인데? 나는 벌써 혼자서 기숙사에 도착한 스스로의 능력에 감탄하며 방문을 열었다. 어둡고 작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왼쪽에는 작은 벽난로가 있었고, 반대쪽 벽에서는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아늑했다. 여긴 내 기숙사 방이었다.
“혼자 어딜 가냐, 또.”
문을 열고 멍하게 방 안을 바라보는데 시리우스가 내 뒤로 따라왔다. 열렸던 방문이 절로 닫혔다. 나는 뒤를 돌아 그와 마주했다.
“시리!”
기분이 좋아져서 시리우스를 한 번 불러보았다.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평소와 달리 내가 친근하게 부르자, 그는 조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얘, 왜 이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는 친절한 사람이니까!
나는 시리우스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그에게서 좋은 체취가 났다. 뭔가 익숙했다. 이건 블랙의 냄새였다!
기분이 매우 좋았다. 블랙이 여기 있었구나. 나는 그의 검은 털에 볼을 갖다 대며 칭얼거렸다.
“블랙 냄새! 너무 좋아. 안아줘, 블랙.”
그의 털이 너무 폭신폭신해 나는 절로 위안이 되었다. 맨살에 닿는 감촉이 부드러워 나는 어깨를 둘렀던 숄을 벗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야, 래번클로. 정신 나갔어?”
블랙이 말을 할 줄도 아는구나. 조금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까칠한 블랙이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그가 나의 말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린 친하니까. 블랙은 나를 좋아하니까. 나는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얼른! 안아줘!”
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치자, 블랙이 많이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내가 왜 블랙이야? 정신 차려!”
블랙이 왜 이러지? 내가 요구하는 것은 말없이 수긍해주는 그답지 않았다. 나는 어쩐지 서러워졌다. 믿었던 블랙마저도 나를 홀대하다니. 그가 미워하다니. 나는 그 자리에서 거의 울어버릴 기세로 보채기 시작했다.
“나 요즘 힘들단 말이야! 너마저 날 버리기 있어?”
나는 말도 안 되는 떼를 쓰며 그에게 칭얼댔다. 블랙은 나에게 잘해줘야 해. 너마저 그러면 안 돼. 그에게 계속 매달리자, 블랙은 조금 머뭇거리는 듯싶더니 조심스럽게 나를 안아주었다.
편안했다. 나는 그의 품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기운에 더 나른해졌다. 나는 그의 가슴께에 바짝 붙어 노곤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블랙의 볼에 뽀뽀를 해주고 싶었지만, 살짝 높았다. 평소보다 키가 더 커진 것 같은데. 게슴츠레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내 쪽을 내려다보는 블랙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황급히 고개를 들며 크게 한 번 숨을 내쉬었다. 나는 싱긋 웃었다. 블랙, 귀여워. 얼굴이 빨개졌어. 귀까지, 전부.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그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문틈으로 잔잔한 무곡이 흘러들어왔다. 우리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 근처에서 터질듯한 심장박동 소리가 느껴졌다. 조용히 품에 안겨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블랙을 살폈다. 그는 조금 굳어있는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들어 블랙의 볼을 만져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여전히 미열감이 느껴졌다. 왜일까. 이번엔 내가 그를 위로해줘야 할 것 같았다.
“블랙, 괜찮아.”
내가 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긴장 풀어.”
그와 내가 눈이 마주쳤다. 블랙의 은회색 눈동자가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낮게 가라앉은 그의 눈에 알 수 없는 열기가 어려 있었다. 그가 조금 떨리는 듯한 손으로 내 볼을 부드럽게 쥐었다.
============================ 작품 후기 ============================
1. 로웨나는 본인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는지 자각이 없나 봅니다^_^!
2. 퇴고하면서 자우림의 ‘Girl, You'll be a Woman, Soon.’을 반복재생 했어요. 닐 다이아몬드의 동명의 곡을 편곡한 곡인데, 이번 편과 제목과 노래 가사가 너무 잘 어울리네요.
3. 코멘트는 신나게 보고 있습니다. 한 글자라도 놓칠까봐 열심히...저는 여러분의 피드백과 의견과 스쳐지나가듯 남기시는 한 마디 말들까지도 너무 재밌어요!_! 그 중 길게 남겨주시는 분들은 특히 눈여겨 본답니다ㅎ_ㅎ
4. 내일은 연재가 힘들 것 같습니다! 낼 모레인 13일에서 14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담 편 업데이트 될 거예요. 죄송스러워서 일부러 용량도 빠방하게 채워왔습니다. 그때 봐요 빛과 소금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