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웨나 블루로즈-34화 (3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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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로웨나 블루로즈

김아흔

Part 3 - (4)

이미 해가 졌음에도 호그와트 안마당에는 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눈이 올 것만 같았다. 밤이 되면서 날씨가 더 추워졌다. 멍하니 서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데, 저 멀리서 블랙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와 만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블랙과 마주치자마자 내가 대뜸 중얼거렸다.

“모두 다 싫어.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말을 꺼내다가 울 뻔했다. 하지만 참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고작 그런 애들 때문에 울 수 없었다. 블랙이 내 주변을 빙빙 돌면서 계속 나를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 말이 뜬금없기도 했거니와, 이 시간에 내가 여기 있는 것이 그에게는 다소 걱정스럽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게 어떻게 래번클로야? 지혜롭지도 않고, 전혀 개성적이지도 않아.”

그들은 슬리데린에 배정받았어야 했다. 결코 래번클로가 하는 행동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블랙에게 두서없이 그녀들이 한 악행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리고 반장 올리비아가 어떤 말을 했는지도.

“래번클로가 너무 싫어! 이렇게 싫었던 적은 없었어. 다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정말 머리끝까지 나는 화를 참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날씨도 춥고, 외투조차 입지 않았음에도 몸에서 열이 났다. 블랙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았다. 열을 내면서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를 측은하게 여기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내가 기숙사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듯 내 옷을 잡고 호그와트 성 쪽으로 당겼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절대 기숙사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지금 들어가서 안나나 데이지와 한방을 쓰라고? 싫었다. 이미 통금 시간도 한참 지났다. 나는 블랙에게 선언했다.

“호그와트 성 어디서든 밤을 지새울 거야. 학교는 넓으니, 어디든 가 있어도 상관없잖아.”

필치 씨의 눈만 잘 피하면 지하에 있는 교실에서 견뎌도 좋을 것 같았다. 순간 리들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가서 재워달라고 요청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지만, 곧 단념했다.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될지도 모른다.

블랙은 기숙사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하는 나를 억지로 보낼 마음은 없어 보였다. 대신 그는 정원 쪽으로 나를 밀었다. 어디론가 나를 안내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블랙은 천천히 걸어 정원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버드나무까지 향했다. 나는 걸음을 다소 늦췄다. 조금 불안해졌다. 블랙은 이 버드나무가 사람이 근처로 다가가면 난폭하게 변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놀랍게도, 블랙이 다가가자 버드나무가 갑자기 순해졌다. 어떻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블랙은 이 나무를 조용하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버드나무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약간 겁에 질렸다. 지금이야 버드나무가 얌전하다고 하더라도, 더 접근하면 갑자기 돌변해 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버드나무에 바짝 붙은 블랙이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머뭇거리는 나에게 ‘멍!’ 하고 한 번 짖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그의 근처로 천천히 걸어갔다.

버드나무에 이렇게까지 가까이 와본 적은 처음이었다. 나무는 생각보다 크기가 컸다. 게다가 가지에 가려져 있어서 몰랐는데, 블랙이 서 있는 나무 구석진 곳에 사람이 충분히 출입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입구가 있었다. 블랙이 입구 쪽에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들어가라고?”

조금, 불안한 데. 머뭇거리는 나를 내버려 두고 그가 먼저 구멍으로 들어갔다. 깜짝 놀란 나는 나지막하게 블랙을 부르며 그를 따라 안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들어가자마자 미끄럼틀을 탄 듯 몸이 쑥 내려가서 나는 순간 비명을 질렀다.

나는 바닥에 그대로 엉덩방아를 찍었다. 마른 잎사귀가 쌓여있어서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두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까맣게 어두운 방 같은 공간에 흐린 달빛이 어려 있었다. 조심스레 지팡이를 꺼냈다.

“루모스.”

지팡이 끝에 환한 불빛이 생겨났다. 나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오두막의 1층 같이 보였다. 내부는 난장판이었다. 벽 쪽에 있는 나무로 된 가구 몇 개는 무엇인가가 물어뜯은 것 마냥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오랫동안 불을 때지 않은 것 같은 벽난로 근처에는 흔들의자가 보였는데, 한쪽 다리가 없이 뒤집어져 있었다. 책장이나 서랍이 붙박이처럼 벽에 세워져 있었지만, 먼지만 수북이 쌓인 채였다.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블랙이 입에 담요를 두 개 물고 왔다.

“이거 쓰라는 거지?”

고마워, 라고 말하며 나는 담요를 받았다. 붙어 있는 먼지를 털어내니, 그럭저럭 덮고 잘 만한 것 같았다. 담요를 손에 쥐고 내가 그에게 물었다.

“블랙. 여기는 네 공간인 거야?”

블랙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를 긍정의 의미로 지레짐작했다. 나는 오두막집의 구조를 살피며 이리저리 추측하기 시작했다. 분명 나무 아래쪽의 구멍으로 떨어졌음에도 지하는 아니었으니 뭔가 마법적으로 연결된 다른 공간인 것 같기도 했다. 바깥이 어두운 관계로 자세히 확인해 볼 방법은 없었다.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바닥에 담요를 깔았다. 블랙은 다소 떨어진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담요 위에 앉아서 그를 불렀다.

“이리 와서 같이 누워있어.”

내가 담요가 깔린 바닥을 툭툭 치며 그에게 다가오라고 말했다. 블랙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가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못 들은 척 창밖의 달을 바라보며 딴청을 부리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얼른 와, 블랙.”

내가 그에게 애원하듯 말하자, 블랙이 내 쪽을 쳐다보더니 살며시 내 옆으로 다가왔다. 반쯤은 안심이 되어 나는 그 자리에 누웠다. 가만히 서 있던 블랙 또한 조심스레 엎드렸다. 나는 그의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블랙은 왜인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계속 창가 쪽만 쳐다보았다.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내가 말했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

나는 남은 담요를 끌어와 그와 함께 덮었다. 호그와트에서 기숙사 방이 아닌 곳에서 자는 것은 처음이었다. 열 받아서 기숙사를 나오긴 했어도 그들이 아니라 내가 나왔다는 사실이 갑자기 서러워졌다. 지금이라도 기숙사에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애들을 다시 마주한다면 이번엔 뺨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용서받지 못할 저주를 퍼붓게 될지 몰랐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렇게 말 없이 외박을 하게 되면 분명 벌점을 부과받겠지. 뭐,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런 것까지 걱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험도 잘 친 것 같으니 벌점 정도는 나의 성적에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리들 교수가 나에게 명한 것도 학년 수석이었지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갑자기 불안해져서, 나는 좀 더 블랙에게 다가가 바짝 붙은 채 누웠다.

한겨울이지만 그렇게 춥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마법이 걸린 방이라도 되는 것일까. 정체 모를 이곳에 대한 두려움이 일다가도 시야에 블랙이 보여서인지 금방 마음이 놓였다.

그에게는 항상 좋은 냄새가 났다. 나는 블랙의 보드라운 체취만 맡으면 노곤해졌다. 마치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오래지 않아 나는 잠이 들었다.

* * *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셔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열 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많이 늦었구나. 일어나보니 블랙은 자리에 없었다. 나는 옷을 추스르고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우울한 기분이긴 했지만, 그래도 자고 일어나니 어제보다는 꽤 나아진 것 같기도 했다. 담요를 대충 개 구석 자리에 올려놓고 들어왔던 구멍으로 다시 나왔다. 생각보다 구멍이 깊지는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올라올 수 있었다. 나는 래번클로 기숙사로 되돌아갔다. 다행히 기숙사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샤워까지 하고 나오니 열두 시가 넘었다.

오늘 파티에는 참석하지 못한다고 시리우스에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늦지 않게 말해둬야 그가 다른 파트너를 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인기가 많았으므로, 파트너를 구하는 것쯤이야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대연회장을 훑으며 시리우스를 찾았다. 다행히도 나는 입구 쪽에서 대연회장을 향하는 시리우스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를 불러 세우고 대뜸 말을 꺼냈다.

“시리우스.”

나는 조금 머뭇거렸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다소 부끄럽긴 했지만, 어떤 다른 지어낸 변명들도 궁색해 보일 뿐이었다. 내가 최대한 미안한 티를 내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오늘 파티는 못 갈 것 같아요. 드레스가 없거든요.”

“알고 있어.”

벌써 그리핀도르에까지 소문이 났나? 나는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약속해 놓고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요.”

시리우스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대체 내가 뭘 하는가 싶기도 하고 서럽기도 했다. 그가 어떤 식으로 나를 매도하든 감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어쨌든 나였으니까.

다행히도 시리우스는 나에게 화를 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잠시 뭔가를 고민하는 것 같았던 그가 나에게 말했다.

“잠깐 따라와 봐.”

그는 나에게 고갯짓하며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그쪽은, 슬리데린 기숙사 쪽인데? 나는 의아한 기분으로 그를 따라갔다.

* * *

“그러니까.”

코웃음을 치며 나시사가 말했다.

“나더러 요정 할머니가 되어 주라는 말이니?”

“…뭐, 틀리진 않군요.”

그녀는 본인의 표현에 깔깔 웃어댔다. 시리우스는 슬리데린 7학년 나시사 블랙을 불러서 대뜸 오늘 밤 파티에 대비해서 나를 꾸며달라고 요구했다. 보고 있던 나는 당황했지만, 나시사는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재미있어 보이는구나.”

시리우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해 줄 겁니까, 말 겁니까?”

“좋아, 난 인형 놀이를 즐기거든.”

그녀는 시리우스 옆에서 입을 꾹 다물고 서 있던 나의 팔을 끌었다. 엉겁결에 나는 그녀 쪽으로 끌려갔다. 그녀는 나를 잡지 않은 나머지 한 쪽 손을 흔들며 시리우스에게 말했다.

“이따가 놀라지나 마, 시리우스.”

나는 깜짝 놀라 시리우스를 바라보며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가-도-돼-요?’ 시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녀오라는 듯 손짓했다. 나시사는 그대로 나를 끌고 호그와트 성 지하에 있는 슬리데린 기숙사로 향했다. 슬리데린 기숙사는커녕 이렇게 깊은 지하로 내려가는 길 자체가 처음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면 갈수록 습하고 차가운 기운이 더 강해졌다. 조금 두렵기까지 했다. 어떻게 슬리데린 학생들은 이렇게 무서운 길로 다닐 수 있는 걸까? 몇 층 아래로 내려가자 현관 크기의 넓은 공간 옆으로 슬리데린의 기숙사 입구 초상화가 보였다. 보기에도 근엄해 보이는 마법사의 초상화였다. 청동 독수리와는 달리 감정 변화도 없어 보였다. 그가 나시사에게 물었다.

“암호는?”

“타고난 고귀함(Nature's Nobility).”

돌벽처럼 생긴 문이 열렸다. 래번클로가 아닌 다른 기숙사는 처음이었다. 온통 파란색으로 수놓아진 래번클로가 우아한 느낌이었다면, 슬리데린은 다소 차가운 느낌이었다. 입구 앞에 휴게실이 있었고, 그 양옆에 네 개의 기둥이 있었다. 은빛 램프가 촘촘히 천장을 밝히고, 은색 실이 수놓아진 초록 실크가 그 아래 드리워져 있었다. 멍하게 그걸 바라보다가 나시사를 놓칠 뻔했다.

지나가던 슬리데린 학생들이 나를 흘끔 쳐다보았지만, 나를 이끄는 나시사를 보더니 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 주눅이 들어 그녀 뒤에 꼭 붙어 따라갔다. 다행히도 휴게실에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그녀는 휴게실을 지나 여자 기숙사 방 쪽으로 들어갔다.

래번클로의 기숙사와는 다르게 슬리데린은 가운데 복도를 두고 양옆으로 방이 나누어져 있었다. 한참을 걸어 나시사의 방에 도착했다. 그녀가 7학년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블랙이라서 그런 건지 몰라도 방을 혼자 쓰는 것 같았다. 세 명에서 한방을 쓰는 래번클로의 내 기숙사 방의 거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크기였다. 더욱이 놀라웠던 것은 창밖으로 호숫물이 넘실대고 있다는 거였다. 맙소사. 사람들이 슬리데린 기숙사에 배정받으면 대왕오징어를 볼 수 있다고 말한 것이 농담이 아니었구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나시사는 창가 왼쪽에 있는 화장대에 나를 앉혔다.

내가 화장대에 앉자마자 거울 양옆으로 길게 보조 테이블이 깔리더니, 아무것도 없었던 화장대에 화장품들이 길게 늘여졌다. 어렸을 적 봤었던 엄마의 수수한 화장대에 익숙해서 그런지, 마치 가게에서 진열되어 있을 법한 수많은 화장품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녀는 내 뒤에 서서 화장대의 거울을 통해 나를 바라보더니 볼을 살짝 꼬집었다.

“피부가 좋으니 베이스를 그렇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지팡이를 한 번 흔들었다. 밝은 살구색의 크림이 얼굴에 발라졌다. 마법사들의 화장품인 것 같았다. 색깔이 거의 피부색과 비슷해서, 대체 바른 것과 아닌 것의 차이를 알 수 없었다. 베이스가 대충 끝나자 솜뭉치 같은 소형 분첩이 허공에서 날아와 내 얼굴에 비벼졌다. 나는 머글식 화장에 익숙했기 때문에 나시사의 지극히 마법사스러운 화장법이 너무 신기했다.

“얼굴 톤이 희니까 조금 짙은 색조가 어울리겠어.”

그녀가 지팡이를 휘두르니 다양한 색상의 아이섀도가 화장대에서 날아와 내 눈가를 날아다녔다. 그녀는 거울을 통해 색깔 하나하나를 비교하면서 나에게 어울리는 색을 찾는 듯했다. 그 작업이 끝나고 나니 다음은 립 메이크업이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색깔인데 그게 많이 다른 건지, 조금 연한 핑크색과 조금 더 연한 핑크색 립스틱 두 개를 가지고 나시사는 한참을 고민했다.

거의 두 시간가량을 화장하는 것에 쓴 것 같았다. 사실 나는 3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이미 혼이 나간 상태였다. 그녀가 눈썹을 가다듬기 시작했을 때에는 반쯤 졸기까지 했다. 그녀가 얼마나 집중해서 눈썹을 깎던지, 눈을 감은 내가 졸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 같다.

메이크업을 대충 완성한 듯 나시사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이제 끝난 건가, 싶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나시사는 반대편 벽면에 있던 트렁크를 향해 지팡이를 한 번 휘둘렀다. 트렁크가 열리며 안쪽에서부터 행거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행거는 거의 벽 끝에서 끝까지 닿을 정도로 길었고, 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드레스가 걸려있었다.

그녀는 멍하게 서 있던 나에게 망토와 교복 스웨터를 벗으라고 명했다. 몸매를 드러내는 얇은 티와 교복 치마만 입은 나를 보며 나시사가 흡족하게 웃었다.

“다행히 네가 내 체형과 비슷하구나.”

그녀는 마법으로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앉은 채로 지팡이를 부드럽게 휘두른 나시사는 마법으로 몇 가지 드레스를 내 얼굴에 댔다. 우선 나에게 맞는 색깔을 찾는 것 같았다. 마법을 사용한 듯 드레스들이 마치 공장에서 나오는 것처럼 일렬로 둥둥 떠 내 앞을 지나갔다. 그녀는 모든 드레스를 꺼내 내 얼굴에 대보고 괜찮은 것과 별로인 것들을 구분했다. 그리고 마음에 든다 싶은 드레스를 하나하나 나에게 입혀보기 시작했다.

나는 나시사가 인형 놀이를 좋아한다는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님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까지 입었던 것보다 더 많은 옷을 나시사의 방에서 입어본 것 같았다. 이러다가 파티를 가기도 전에 쓰러질 것 같았다. 다행히도 이제 그만 입으면 안 되느냐는 말이 목구멍에 튀어나오기 전에 그녀는 마음을 결정한 것 같았다.

“이 블루 드레스가 제일 잘 어울리네.”

옷 갈아입는 것을 끝낼 수만 있다면 갑옷이라도 입고 파티를 나갈 마음이었지만, 그녀가 마지막으로 고른 드레스는 내가 보기에 조금 노출이 심했다.

“저, 이거 너무 파인 거 같은데…….”

“어머, 래번클로. 너 파티 한 번도 안 가봤니? 이 정도는 얌전한 거야.”

그녀가 웬 호들갑이냐는 듯 핀잔했지만, 내 기준에는 부담스러웠다. 튜브 드레스라 어깨가 그대로 노출되었고, 거울을 통해 보니 가슴골이 그대로 드러났다. 한여름에 슬리브리스를 입는 것도 부끄러운 나에게는 좀 과한 디자인이었다. 게다가 드레스 자체가 몸에 달라붙어 허리 아래로 몸매의 라인이 그대로 부각되는 것 같았다. 내가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자, 나시사는 옷장에서 얇은 흰 숄을 꺼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두르지 않은 게 더 예쁘긴 하지만, 뭐. 네가 불편하다면.”

레이스가 달린 숄은 반투명한 재질이라 안이 살짝 비치긴 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내 머리를 올려 고정하고 작은 사파이어와 큐빅─처럼 보였지만, 다이아몬드일지도 모를─이 촘촘히 박힌 작은 티아라를 머리에 씌운 다음, 작은 진주 귀걸이를 하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나에게서 약간 떨어져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 훑어보았다. 내가 마치 마네킹이라도 된 것 같았다.

마침내 나시사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로웨나 래번클로의 재림 같아. 마음에 들어.”

============================ 작품 후기 ============================

1. 저는 항상 업로드 전에 맞춤법 검사기를 한 번 돌리는데, 검사기가 자꾸 나시사를 민소매사로 고쳐 대서 혼자서 빵빵 터졌어요. “마침내 민소매사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렇게 교정해줌.....

2. 블리블리혜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

3. 한유주님 질문에 대해서는 스포될 것 같아 쪽지로 따로 답변 드렸어요. 확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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