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4)

외전 1.

이제 밤공기에서조차 서늘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 어깨보다 낮은 담벼락에 기대고 선 한별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어 유리문 너머를 살펴보았다. 아까 마지막 부 수업을 들은 성인부 관원들이 저 유리문을 밀고 나온 게 10분 전이었다. 슬슬 기다리는 이가 모습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계단실에서 나해성이 뽕 하고 튀어나왔다. 계단실에서 나오자마자 고개를 빼고 문밖에 있는 저를 확인하는 모습에 한별의 입술이 휘어졌다.

“김한별.”

유리문을 밀고 나오며 저를 부르는 모습에는 아랫배가 바짝 조여질 지경이었다.

“응.”

“오래 기다렸어?”

“아니.”

“마트에 있으라니까. 차에 있든가.”

다리 아프지 않냐? 하고 작게 투덜거린 나해성이 힐끗 한별을 쳐다본 후 걸음을 옮겼다. 한별이 재빠르게 따라붙자 느릿느릿하던 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1분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진심이 담긴 낯부끄러운 소리에 나해성의 귓바퀴가 착실하게 물들어 갔다.

“참나.”

그러면서도 헛웃음을 짓는 걸 잊지 않는다. 쑥스러워하면서도 아닌 척하며 허세를 부리는 모습이 미치게 귀여웠다. 당장이라도 입술을 물어뜯고 혀를 빨고 싶을 정도로.

“저기.”

머릿속에서 번쩍이는 빨간불을 진화하기 위해 애쓰던 한별은 조심스럽게 저를 부르는 음성에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당겼다.

“응?”

“오늘은 내가 데려다줄까?”

“….”

“아니. 어차피 네 차 타고 가긴 하겠지만 매번 너만 나 데려다주니까.”

진짜 나해성을 어쩌면 좋지?

“싫으면 말아라.”

한별이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자 민망해진 나해성이 목덜미를 문지르며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나 내일 학교 안 가도 되는데.”

“뭔.”

뜬금없는 말에 의아한 눈으로 한별을 올려다본 나해성이 금세 말속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나는 도장 나와야 되는데.”

“출근은 하게 해 줄게.”

“학교 빠질 생각 하지 말고 학생의 본분에 충실해라.”

“애기 같은 얼굴로 훈장질하는 거 존나 섹시해.”

“애…기.”

나해성이 씹어 먹고 싶게 귀여운 얼굴로 한별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놈의 애기 소리.”

힘 빠진 목소리마저 섹시해 미칠 지경이었다.

“데려다줄 거지?”

당장이라도 달랑 들어 집으로 가져가고 싶은 걸 참고 묻자 나해성이 또 흰 목덜미를 쓸며 답했다.

“어.”

“빨리 가자.”

한별이 서두르자 그런 한별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해성이 한별보다 앞서 걸었다.

“가자. 나도 급하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에 한별은 소름이 쭈뼛 돋을 정도로 짜릿해졌다.

하여튼, 사람 환장하게 하는 데 뭐 있다니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달려든 것은 한별이 아니라 나해성이었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한별의 목덜미를 잡고 입술을 겹친 나해성은 그를 벽으로 밀쳤다. 한별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입을 벌렸다. 나해성은 잠시 멈칫하다가 벌어진 입에 혀를 밀어 넣었다. 박력 넘치게 시작된 키스의 기세가 점점 꺾였다. 나해성은 제 혀로 한별의 혀를 톡 건드렸다가 입천장을 조심스럽게 핥고는 어쩔 줄을 몰랐다. 눈치를 보다 결국 스르륵 빠져나가려는 혀를 한별이 낚아챘다.

한별의 손이 매일 구르고 뒹굴면서도 늘 깔끔한 하얀 도복 아래를 파고들었다. 탄력 있는 부드러운 피부가 손에 착 감겨 왔다. 살살 한 손에 잡히는 늘씬한 허리를 문지르며 고개를 기울였다. 강약을 조절하며 혀를 빨자 손안의 허리가 흠칫 떨렸다.

한별은 볼 안쪽과 입천장을 차례로 쓸고는 좀 더 깊게 혀를 미끄러트렸다. 그러자 나해성이 앓는 소리를 냈다. 나해성의 몸을 어루만지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원나잇에는 거부감이 없는 나해성은 지독하게 키스를 못했다. 하지만 나해성이 키스보다도 더욱 면역이 없는 것은 따로 있었다.

한별은 천천히 혀를 빼내고 나해성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포갠 채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나해성이 기겁을 하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뒤로 휘어지는 상체에 따라 한별의 상체도 굽혀졌다. 나해성의 입술, 뺨, 눈가에 마구잡이로 입을 맞추자 나해성의 몸이 뜨끈할 정도로 달아올랐다.

고작 이따위, 어린애 장난 같은 접촉에 나해성은 어쩔 줄 몰랐다. 한별은 나해성의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뭐, 어찌 되었든 이제는 이런 거 저런 거 다 저와 할 테니 크게 상관없는 일이긴 했지만.

“야, 나 먼저 씻자.”

“와, 사람 좆 세워 놓고 튀네.”

현관문이 닫히기도 전에 입술부터 부딪친 나해성이 제가 한 짓을 알긴 하는지 귓바퀴를 붉혔다. 한별은 그런 나해성의 입술에 한 번 더 쪽 소리가 나게 키스한 후 말했다.

“당연히 그게 싫다는 건 아냐.”

나해성은 아마, 차를 타고 오는 동안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도 내내 먼저 키스할 생각만 하고 있었을 거다.

한별은 시선을 피하는 나해성을 빤히 바라보다가 달아오른 뺨을 콱 깨물었다.

“야….”

그러자 나해성이 손바닥으로 뺨을 벅벅 문지르며 슬쩍 눈을 치떴다.

“이렇게 형이 먼저 좋다고 달려들면 난 더 좋아서 미치니까 당연히 환영이야. 그러니까 같이 씻자.”

“….”

“응?”

나해성의 허리를 끌어안은 한별은 애교를 부리듯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형, 해성이 형아.”

나해성은 질색을 하면서도 끝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하아….”

거품이 풍성한 샤워 타월이 허벅지를 훑자 나해성이 긴 숨을 흘려 냈다. 벽을 짚고 선 나해성의 복부를 한 팔로 틀어쥔 한별은 파들거리는 속눈썹을 응시하며 손을 좀 더 안쪽으로 옮겨 갔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길에 따라 물먹은 붉은 입술에서 새는 숨도 점차 가빠졌다.

한별이 도무지 손을 뗄 수 없는 피부를 정신없이 매만지고 있는데 나해성이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했다.

“내가 이럴 줄, 하, 알았다.”

“뭐가?”

한별은 그런 나해성의 귓바퀴에 입술을 대고 모르는 척 물었다. 그러자 나해성이 몸을 돌려 한별을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아무 말 없이 한별의 얼굴을 훑다가 발꿈치를 들고 입을 맞췄다. 작은 접촉에 한별은 답지 않게 얼빠진 얼굴을 했다. 나해성이 이런 낯간지러운 행동을 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발기해 핏줄을 튕기며 제 복부에 문질러지는 성기를 무릎으로 찍어 올렸으면 올렸지.

아니나 다를까 나해성은 얼굴과 귓바퀴뿐만이 아니라 목과 가슴팍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 한별의 어깨 너머로 무의미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모르고 들어온 것도 아니고, 뭐.”

애써 건조하게 중얼거리던 나해성이 한별을 힐끔거렸다.

“알면서 같이 샤워하자고 한 거긴 한데.”

“….”

“엄청나게 욕실에서 하고 싶은 거 아니면 그냥… 침대에서 할래? 아무래도 여기는 소리도 잘 울리고. 다른 집에 들릴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더 들어 줄 것도 없었다. 한별은 나해성의 입에 혀를 쑤셔 넣고 물을 틀었다. 샤워기에서 쏟아진 물이 두 사람의 몸을 덮은 거품을 쓸어 내자마자 나해성을 안아 들었다. 그러자 나해성이 반사적으로 두툼하고 단단한 허리에 제 다리를 감았다. 잔뜩 발기한 성기가 쿠퍼액을 뚝뚝 흘리며 나해성의 엉덩이를 툭툭 건드렸다.

조심스럽게 나해성을 침대 위에 올려놓은 것이 무색하게 한별은 돌덩이 같은 제 몸으로 나해성을 짓누르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나해성이 숨을 할딱이면서도 다리를 벌렸다. 그러다 움찔하며 한별을 힐끔 바라보았다. 한별은 말없이 나해성의 뺨에 입술을 붙인 채 성기를 구멍 입구에 문질렀다. 마른 입구가 한별의 체액으로 젖어 들어갔다. 한별이 성기로 입구를 깔작거리자 나해성의 몸이 경련하듯 잘게 떨렸다. 두 눈에 차오르는 건, 기대감이었다. 앞으로 한별이 가져다줄 쾌감에 대한 기대감. 습관적으로 걱정과 염려, 자기 비하로 채워지던 눈에 서서히 퍼져 나가는 본능을 두 눈으로 목격하며 한별은 그대로 귀두를 쑤셔 넣었다.

“하윽!”

나해성의 상체가 허공으로 떠오르고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흐물거릴 때까지 구멍을 손가락으로 풀고, 입으로 빨고 그 안에 혀를 쑤셔 넣는 것도, 한별에겐 기꺼운 일이었지만 한별은 나해성이 강압적인 섹스에 더욱 흥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게 그 씹새끼 때문인지 아니면 나해성의 본성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물론 그 새끼 때문에 발현된 성향이라면 속이 뒤틀리긴 하지만 어차피 나해성은 앞으로 평생 섹스는 저와만 할 테니, 원하는 대로 맞춰 주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뭐, 잠자리 사정이야 차차 맞춰 나가면 될 일이고 또.

한별은 입을 벌린 채 간신히 숨을 내쉬는 나해성을 보며 흥분으로 돋아난 젖꼭지를 세게 비틀었다. 그러자 나해성이 한별의 손목을 쥐고 눈물이 맺힌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성감에 지배되어 이성이 흐려진 나해성을 볼 때마다.

“아으… 읏!”

저 역시 아찔해질 정도로 정신이 몽롱해진다는 것을.

단번에 성기를 반쯤 꽂아 넣자 한별과 나해성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한별은 참지 못하고 나해성의 머리를 감싸 안은 채 격렬할 정도로 거세게 키스했다. 게걸스러울 정도로 혀를 물고 빨아들이면서 허리를 강하게 추어올렸다. 고통이 섞인 신음이 두 사람의 입 속에 갇혀 울렸다.

기어코 뿌리까지 쑤셔 박은 한별은 손으로 구멍 입구를 더듬거렸다. 다행히 구멍이 찢어지지는 않았다. 일을 벌여 놓고 뒤늦게 안도하는 꼴이 우스워 한별은 그를 휘감은 혀를 빨면서도 입술을 비틀었다.

“형.”

입술을 떼고 이마를 맞붙인 채 부르자 고통과 쾌감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해성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별을 바라보았다.

“우린 정말 잘 맞는 거 같아.”

“또, 뭔, 하으, 헛소리를.”

“있어, 그런 게.”

나해성은 구멍만 좁아터진 게 아니었다. 안쪽도 어찌나 비좁은지 한별은 처음 그 안에 귀두를 처넣었을 때 귀두가 뭉개져 터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물론 동시에 당장이라도 정액을 싸지를 것처럼 사정 욕구가 치솟을 정도로 짜릿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런 나해성이 딱히 전희도, 구멍을 달래지도 않은 상태에서 제 성기를 뿌리까지 머금고 있으니. 이게 천생연분, 뭐 그런 거 아니면 뭐겠냐고.

한별은 실실 웃으며 느릿느릿 성기를 빼냈다. 한참을 빠져나온 성기가 다시 느리게 틀어박혔다. 성기가 나가려고 할 때마다 내벽이 성기를 물고 잡아끌었다. 그러다 다시 처넣으면 다닥다닥 달라붙어 조여 댔다.

나해성의 귓바퀴를 빨던 한별은 그 귓구멍에 대고 진득한 숨을 흘려 냈다. 그러자 제 손 아래 피부에서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천천히 안을 들쑤시던 움직임이 점차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해성이 허겁지겁 한별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이내 허리 짓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아…. 아으…. 아윽!”

한별은 물고 있던 귓불을 놓아주고 고개를 들어 온통 자신이 주는 쾌락으로 물든 얼굴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옆구리를 잡아 고정하고 있던 손이 위로 기어 올려와 곧장 가슴을 거머쥐었다. 손바닥으로 가슴을 문지르다가 톡톡, 걸리는 젖꼭지를 엄지로 찍어 눌렀다. 그러자 구멍이 성기를 잘라 먹을 듯 조였다. 한별은 벌어진 입 속에서 옴찔거리는 혓바닥을 보며 마찬가지로 옴찔거리고 있는 구멍을 제 성기로 마음껏 헤집었다.

“김… 김, 한별…!”

나해성은 한별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어깨에 제 뺨을 비비며 사정했다.

“시발.”

입술을 비튼 한별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허리를 치대기 시작했다. 결합부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체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한별은 한 손으로는 나해성의 머리를 잡아 고정하고 다른 손으로는 홀쭉한 복부에 튄 정액을 손바닥으로 모아 분홍빛 젖꼭지에 대고 문질렀다. 반질반질하던 젖꼭지는 곧 마른 정액으로 뒤덮여 굳었다. 한별은 그 젖꼭지를 꼬집으며 나해성의 입술 사이로 혀를 욱여넣고 사정했다. 사정하는 와중에도 허리를 추어올려 성기를 더욱 깊숙이 묻었다. 더, 끝도 없이 나해성을 저로 채우고 싶었다.

“야.”

나해성이 사정을 하고도 성기를 빼지 않고 제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한별을 불렀다.

“…김한별.”

“응?”

한별이 모르는 척 되묻자 나해성은 저를 덮치고 있는 어깨를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내려 뜨겁게 달궈진 등을 토닥거렸다. 한별의 시선이 느리게 이동해 울긋불긋 물든 얼굴로 향했다.

“계속 넣고 있고 싶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지 일부러 퉁명스러운 말투를 내는 게 씹어 먹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한별은 검지로 결 좋은 나해성의 눈썹을 쓸며 답했다.

“응.”

“설마 밤새는 아니지?”

어쩐지 지금 그렇다고 말하면 나해성이 정말 허락해 줄 것만 같았다.

“그러고 싶어?”

말없이 나해성을 응시하던 한별은 나해성의 머리 옆을 팔꿈치로 지탱하고 상체를 허공으로 띄운 채 천천히 성기를 빼냈다. 그러자 성기를 따라 안을 채우고 있는 정액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나해성은 그런 한별의 상박을 붙잡았다. 당장에 그렇다고 대답할 줄 알았는지 눈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음.”

한별은 서서히 다물리는 부은 구멍을 내려다보다 시선을 올렸다.

“일단은 몇 번 더 하고 나서.”

고작 몇 번 훑어 내린 손길에 성기는 금세 다시 발기했다. 체액으로 뒤덮여 매끈한 성기가 귀두로 회음부 위를 기어 다니듯 오갔다.

“그런 다음에.”

나해성의 귓불과 입술, 턱과 목덜미를 훑던 새까만 눈동자가 납작한 가슴 위 부어오른 유륜과 뾰족하게 선 젖꼭지 위에서 멈췄다.

“오늘은 젖꼭지 물고 잘래.”

“미친.”

“왜에.”

“윽!”

한별은 서운한 척 말끝을 늘이며 성기를 단번에 안에 쑤셔 넣었다. 그 반동으로 앙증맞은 젖꼭지가 파르르 경련했다. 뜨거운 손바닥이 젖꼭지를 굴리자 젖꼭지만큼 색이 예쁜 성기가 움찔거리며 튀어 올랐다.

뒤로 물러난 허리가 단숨에 앞으로 돌진했고 아래 깔린 몸이 그 힘을 견디지 못해 위로 밀려나며 젖꼭지가 손안을 벗어났다. 한별은 나해성의 몸통을 틀어쥐어 고정한 후 강하게 허리를 치댔다. 끈적한 침실 안 공기와는 다르게 살이 맞붙는 소리는 꽤나 과격했다.

퍽퍽, 성기로 좁디좁은 안을 후비던 한별은 근육이 들어찬 마른 복부를 치고 있던 성기가 부풀어 오르다 왈칵, 정액을 토해 내는 모습을 보며 사정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그리 색다를 것 없는 섹스가 이어졌다. 박고 박히고, 싸고, 다시 박고 박히고, 싸고. 단조로운 섹스에도 한별은 끊임없이 흥분했고 등골이 저릿할 정도의 쾌감을 느꼈다. 동이 틀 무렵까지 이어질 정도로, 그 단순한 행위에 한별은 완전히 몰입했다.

“말했잖아.”

그리고 결국 기절하듯 잠든 나해성의 귓가에 휘어진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넌 존나 대단한 남자라니까.”

존재 자체가 제게는 발정제인데, 나해성은 아직 그걸 몰랐다. 한별은 나해성에게 몰래 그 사실을 알려 준 후 손을 뻗어 사이드 테이블에서 나해성의 휴대폰을 가져왔다. 품에 나해성을 낀 채 휴대폰은 잠금을 해지했다.

비밀번호는 역시나 0000.

포털 사이트 앱에 들어가 최근 검색 내역을 살피던 한별의 입에서 웃음이 스민 욕설이 샜다.

“하, 시발. 나해성 진짜.”

데이트 코스.

00동 근처 맛집.

20대 남자 선물.

20대 남자가 좋아하는 것.

온통 저에 대한 고민투성이인 검색창을 보던 한별은 휴대폰을 있던 자리에 돌려 두고 나해성을 팔과 다리로 옭아매듯 끌어안았다.

“으, 응….”

그러자 나해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나해성이 마음을 여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한 달. 나해성은 그 유치한 수작질을 성가셔하면서도 착실하게 응해 주었다. 마치 누군가 저를 흔들어 주길 내내 기다렸던 것처럼.

아주 작은 손길 하나에도 쉽사리 흔들렸던 나해성을 생각하면 한별은 아찔해졌다.

자신이 아닌 다른 놈이 먼저였다면 아니, 하다못해 그 쓰레기 새끼가 조금만 덜 멍청했더라면. 상상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평생 무언가를 무서워해 본 적이 없는 한별은 그게 두려움이라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이젠 어쩔 수 없어, 해성아.”

어차피 모든 건 그 겨울,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쩔 수 없게 된 것들뿐이었다.

* * *

잠에서 깬 해성은 습관적으로 손을 더듬거렸다. 그러다 어딘지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눈을 떴다. 몇 차례 눈을 더 깜빡이자 흐릿하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졌다.

김한별의 집이었다. 고개를 돌려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오전 6 : 45 분

출근까지 한참이나 여유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늘어트리는데 김한별이 해성을 안고 있던 손으로 가슴팍을 토닥거렸다.

“더 자. 이따 데려다줄게.”

해성은 눈을 감은 채로 저를 어린애 달래는 듯하는 김한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자 닫혀 있던 눈꺼풀이 슬그머니 열렸다.

“아니면 모닝 섹스 한 판?”

입꼬리를 올리며 하는 말해 침대를 벗어나려던 해성은 이불을 잡은 채 멈췄다. 그러고는 입술을 말아 물고 새하얀 이불 어딘가를 노려보듯 바라보다가 옆으로 누워 팔로 상체를 지탱하고 있는 김한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꽤나 기습적인 접근이었는데도 김한별은 놀라는 기색 하나 없이 실실 웃으며 해성과 눈을 맞췄다.

쪽.

밤새 방을 채우고 있던 끈적하고 질척한 소음과 비교하자면 가볍고 경쾌하기까지 한 소리였다. 입술이 부딪히는 순간 눈을 감았던 김한별이 씩 웃으며 눈을 떴다.

“굿 모닝이다.”

해성은 그 얼굴을 보며 아침 인사를 한 후 침대에서 내려왔다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제 모습에 펄쩍 뛰고는 욕실로 빠르게 걸어갔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로 직설적인 시선 하나가 해성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김한별은 집을 나오는 순간까지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된다고 헛소리를 해 댔지만 해성은 그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김한별이 제 베개 아래 숨겨 둔 도복을 찾아내 입고 소파에 던져 놓은 후드 집업을 집어 들자 트레이닝복 바지만 걸쳐 입은 김한별이 팔짱을 끼고 거실 입구에 기대서서 아주 불만족스러운 눈으로 해성을 바라보았다.

그런 김한별에게 ‘나 데려다준다며? 지금 출발해도 빠듯한데?’ 하자 김한별은 답지 않게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선 신속하게 준비를 마쳤다.

그러면서도 드라이브 스루가 가능한 카페에 들러 커피를 사서 해성의 손에 쥐여 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규정 속도를 완벽하게 유지하며 달린 차가 좁지만 여러 일이 일어났던 골목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다세대 주택 대문 앞에 차를 세운 김한별은 운전대를 잡고 해성을 뚱하니 바라보았다.

해성은 그런 김한별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상체를 기울여 고집스러운 뺨에 입을 맞췄다.

“차비다. 조심해서 가라. 공부 열심히 하고.”

여전히 웃음기가 밴 얼굴로 인사하자 김한별이 멀어지려는 해성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강하지 않은 악력이었지만 해성을 붙드는 데에는 충분했다. 손목 안쪽이 손가락으로 뭉근하게 문질러졌다.

“형도. 형도 수업 잘하고, 밥도 많이 먹고.”

“….”

“우리는 이따가 봐.”

해성은 제 얼굴을 훑어내리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

“그래.”

그러고는 잡힌 손목을 빼내고 깍지를 꼈다. 서로의 하루가 무사하길 바라는 인사로 시작하는 아침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이건 ‘설렘’이지 않을까 싶었다.

김한별

도장 가는 중?

막 대문을 밀고 나오자마자 도착한 김한별의 메시지에 해성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튼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혔다. 해성은 어 가는 중, 까지 쓰고 보내려던 메시지에 넌 밥 먹으러 가는 중? 하고 한 문장을 덧붙였다.

김한별

응 난 나해성이랑 밥 먹고 싶은데

-응 난 나해성이랑 밥 먹고 싶은데

습관과도 같은 투정에 식사해라, 하고 답하려던 해성은 걸음을 멈추고 휴대폰을 가만히 응시했다. 잠시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고민하던 해성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나도

얼결에 보내기 버튼을 터치해 전송된 메시지를 바라보던 해성은 서둘러 한 줄의 메시지를 추가했다.

나도 너랑 밥 먹고 싶다

고작 밥 먹고 싶다는 메시지 하나에 해성의 얼굴이 피를 토해 내기라도 하듯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해성!”

“악!”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부끄러움에 안절부절못하던 해성은 뒤에서 저를 툭 건드리는 손길에 펄쩍 뛰어올랐다.

“으악!”

해성이 내지른 비명보다 훨씬 큰 비명에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자 박재관이 두 손을 번쩍 들고 서 있었다.

“하… 놀랐잖아.”

“내가 더 놀랐다. 뭐에 그렇게 집중하고 있었는데?”

“뭐, 별로.”

해성은 짧게 진동하는 휴대폰을 잠그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박재관이 해성의 옆에 따라붙었다.

“뭐야? 너 얼굴은 왜 이렇게 빨개? 또 몸 안 좋아?”

뜨끈한 목덜미를 문지르다가 쉬지 않고 몸을 떠는 휴대폰은 아예 후드 집업 주머니에 넣어 버리며 답했다.

“형 때문에 놀라서 그렇잖아.”

“뭘 이 정도로 그렇게 놀라! 이거 몸보신 좀 하러 가야겠구만!”

“형이 소리 지른 게 더 컸거든?”

“아니거든?”

“맞거든?”

아씨.

서른이 넘은 성인 남성들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유치한 대화에 해성은 박재관을 말없이 쏘아보았다. 박재관은 또 좋다고 껄껄 웃었다. 그런 박재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성이 형, 하고 불렀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돌리고 응? 했다.

그날, 공원 주차장을 마지막으로 이동우의 연락은 완전히 끊긴 상태였다. 제게 생겨난 미묘한 변화를 박재관이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박재관은 늘 그랬던 것처럼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해성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박재관도 해성도 그게 서로를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배려라 믿었다.

“동우 형이랑은… 이동우랑은, 잘 얘기했어.”

하지만 이제 어쩌면 그건 배려를 가장한 외면과 회피였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누구보다 말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도장이랑 집에 찾아오지 말라고 했고, 연락도 하지 말라고 했어.”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해성은 터덜터덜 걸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어차피 찾아와도 안 만날 거고, 혹시 또 도장에 찾아와서 형 귀찮게 하거나 하면.”

후드 집업 주머니 안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땐 내가 가만히 안 있어.”

제법 강단 있는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진짜야.”

출근길에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잡고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무슨 대단한 일인 것처럼 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주절주절 떠들어 댔는데 박재관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역시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걸까.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 못난 꼴을 다 듣고, 또 보기도 했으니.

해성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해성아.”

그때, 침묵을 유지하던 박재관이 해성을 불렀다. 해성은 여전히 바닥을 보며 답했다.

“…어.”

“잘했어.”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발걸음이 멈췄다. 고개를 들자 박재관이 웃으며 해성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주 잘했어.”

마치 아주 오래전, 체육관에서 그랬던 것처럼.

“굿이야, 굿.”

엄지까지 치켜드는 박재관을 보던 해성은 슬그머니 박재관의 손을 밀어 냈다.

“지민이 앞에서는 그러지 마라. 완전 할아버지 같으니까.”

“뭐? 인마! 나 어디 가면 아직도 20대 후반으로 봐!”

“시력 안 좋은 사람들만 만났나.”

해성은 구시렁거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빨리 가자. 또 지민이 혼자 청소하고 있겠다.”

해성의 말에 흥, 하고 콧방귀를 뀐 박재관은 곧 내가 먼저 가야지, 하며 해성을 앞질러 경보하듯 걸었다.

그 경망스러운 뒷모습을 바라보던 해성은 명치에 걸려 있던 돌덩이 하나가 쑥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뛰었다.

“박 할아버지한테 질 수는 없지.”

도장에 도착하니 역시나 제일 먼저 도착한 최지민이 환기를 위해 도장 창문을 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어. 왔냐.”

“지민이 월급 올려 줘라.”

각자 인사를 주고받고 하루 일과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후드 집업을 행거에 건 해성은 한동안 끊임없이 울리다 진동이 뚝 끊긴 휴대폰을 확인했다.

김한별과의 대화창 옆 새로운 메시지를 알리는 숫자가 45였다.

그 짧은 사이에 혼자 많이도 떠들었다 싶어서 웃음이 났다. 해성은 관장실 책상 의자에 앉아 메시지를 확인했다.

김한별

뛰쳐나갈 뻔했잖아.

지금 가봤자

나해성은 애새끼들 발차기 가르쳐 준다고

안 만나주겠지?

애새끼들은 오타ㅋㅋ

오타라고 우긴다고 오타가 되는 건 아닐 텐데.

줄줄이 이어지던 메시지는 강의가 시작된 건지 갑작스럽게 뚝 끊겼다. 그래도 강의는 열심히 듣는 모양이었다.

해성은 턱을 괴고 김한별과의 채팅 창을 스크롤 했다. 창이 위로 올라갈수록 자신이 김한별에게 보낸 메시지들이 점점 무뚝뚝해졌다. 그에 반해 김한별은 늘 한결같았다.

만나자. 보고 싶다. 귀엽다. 섹시하다.

일차원적이고 직설적인 메시지들로 과감하고 가감 없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해성의 입에서 한숨이 샜다.

지난밤,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해성은 이 채팅 창을 보고 심란해졌다. 김한별에게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내내 밀어 내기만 하는 저를, 도망치려고만 하는 저를 포기하지 않아서.

그래서 노력이라는 걸 해 보려고 하는데 쉽지 않았다.

이 나이가 되어서 어리숙하게 굴고 싶거나 청승을 떨 생각은 없었지만, 해성은 김한별에게 어떻게 잘해 줘야 하는지 몰랐다. 해성이 했던 한 번의 연애에서 배울 점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나쁜 새끼.”

해성은 일부러 입 밖으로 욕을 내보냈다. 이렇게 하면 이동우는 정말 그저 그런, 흔해 빠진 나쁜 새끼였고 저는 김한별의 말대로 그저 운 나쁜 연애를 했을 뿐이라는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쁜 새끼. 씨…발 새끼.”

하지만 흔한 욕설조차 익숙하지 않아 한두 마디 겨우 내뱉는 정도였다. 해성은 한 번 더 깊게 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한별이 보고 싶어졌다.

역시나 저를 기다리고 있는 유리문 밖 김한별을 보며 걸음을 빨리하던 해성은 불현듯 그가 처음 저를 기다렸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저는 무릎 아래까지 오는 두툼한 패딩을 입고 있었고 저를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리던 김한별에게서도 선명한 겨울 냄새가 났었다. 그리고 지금은.

해성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져 입고 있는 회색 후드 집업을 훑었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렀다니.

이제 곧 있으면 이 후드 집업조차 거추장스러워 도장 로고와 이름이 박힌 반팔 티셔츠를 입고 다닐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내내 김한별은 저기 저렇게 서서 밤마다 저를 기다리고.

그건 말이 안 되는데.

김한별이 놀고먹는 백수라도 귀찮을 일인데 김한별은 학생이라는 본분이 있었다. 게다가 승부욕도 있고 자존심도 세서 학교생활도 결코 대충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물론 오늘처럼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고집을 부리는 경우도 종종 있긴 했지만 그건 정말 결석을 해도 크게 지장이 없는 날일 확률이 컸다.

유리문으로 걸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해성의 머릿속에 소용돌이가 쳤다.

건축학과라고 했었지?

타 과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는 해성은 건축학과에 대해 검색해 봤다. 무슨 야작인가 하는 밤샘 작업도 한다고 하고 과제도 많다고 하고, 아무튼 엄청나게 바쁜 과였다.

“무슨 생각을 또 혼자 그렇게 하고 있어?”

“별로. 근데 너 안 바쁘냐?”

“바쁘지.”

틈 없이 이어진 말에 해성이 역시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나해성 먹여야지, 재워야지, 씻겨야지. 그뿐인가? 뽀뽀도 해 주고, 안아도 주고.”

해성은 주절주절 이어지는 말에 고개를 돌리고 저벅저벅 걸었다. 발긋한 귓바퀴에 시선 하나가 따라붙었다.

“왜? 내가 벌써 귀찮아진 거야? 아까는 나랑 밥 먹고 싶다고.”

“아니.”

장난스럽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단칼에 끊겼다.

“아니야, 그런 거.”

제법 당차게 부정해 놓고 해성은 슬쩍 김한별의 눈치를 보았다. 기껏 데리러 와 줬는데 괜한 소리를 해서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그래서 한 번 더 부정한 후 다시 걸었다.

“우리 해성이는 이렇게 삽질하는 것도 참 귀엽고 매력적이야.”

“또 무슨.”

김한별을 보며 무어라 말을 하려던 해성은 둘의 곁을 지나는 여학생 무리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날이 따뜻해지면서 늘 해성과 한별뿐이던 골목에 오가는 사람이 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원한 밤바람을 느끼려고 창문을 열어 두는 집들도 많아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도 점차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김한별과 헤어지는 건 아쉬웠다.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같이 있었는데도 그랬다. 해성은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이렇게 불쑥불쑥 김한별에 대한 마음이 솟아오를 때면 해성은 불안해졌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제 모습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랬다.

“…이동우 개새끼.”

해성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입술만 움직이는 수준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저 나쁜 연애. 운이 좋지 않았던 연애.

홀로 다시 저를 집어삼킬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검은 파도를 진정시키려 하고 있는데 김한별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해성이 올려다보니 그가 팔짱까지 낀 채 눈썹을 까닥거렸다.

“뒤의 단어는 마음에 드는데, 앞의 단어는 마음에 안 드네.”

“들려, 그게?”

“응. 난 청력도 좋아.”

“그래.”

“그 새끼 욕이 하고 싶어? 아예 나랑 날 잡고 앉아서 그 새끼 잘근잘근 씹어 줄까? 그러고 나서 묻어 버리기 어때?”

아무래도 김한별이 오해를 한 것 같았다. 미련 같은 게 남아서도, 이동우가 떠올라서도 아닌데.

이렇게 되니 더욱 김한별을 보내기 싫어졌다. 오해도 지속시키고 싶지 않았고, 또.

해성은 어느덧 도달한 대문 앞에 멈춰서 김한별을 바라보았다.

김한별과 헤어지는 것이 많이 아쉬웠다.

“응? 어때? 내가 외국 욕까지 다 알려 줄게.”

“외국 욕도 아냐?”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정도?”

“대단하네.”

“칭찬받았다.”

고개를 기울이고 웃는 모습에 해성은 참지 못하고 툭 말을 내뱉었다.

“들어왔다 갈래?”

“….”

“우리 집에 잠깐….”

김한별이 빤히 저를 보고만 있어서 해성의 목소리가 점차 기어들어 갔다.

“왔다 갈래?”

김한별의 답을 기다리는데 골목에 차가 한 대 들어섰다. 해성은 김한별의 팔을 잡아 대문 쪽으로 바짝 붙었다. 차가 둘을 지나가자 저를 붙든 손을 내려다보던 김한별이 시선을 들었다. 고집스러운 입매가 서서히 휘어졌다.

“응. 갈래.”

“….”

“갈래, 형 집.”

그때그때 치우고 정리하는 편이라 집 안 꼴이 남에게 보이기 창피한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팔짱을 끼고 방 안을 죽 둘러보는 김한별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았다.

“흐음. 여전한 인간미.”

“편한 데 앉아.”

해성은 매트리스 근처에 널린 티셔츠를 집어 들며 말했다. 김한별이 그런 해성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형, 나 심장이 너무 뛰어.”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등에 닿은 가슴속 심장의 박동이 해성에게도 전해질 정도였다.

해성은 김한별에게 안긴 채 몸을 돌렸다.

“뭘 이 정도로.”

“아까 혼자 삽질하는 거 안쓰럽긴 한데 또 귀엽기도 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기특한 짓을 할 줄이야.”

“너는…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는 있냐?”

해성이 불퉁한 얼굴로 바라보자 김한별이 해성의 입에 쪽, 키스했다.

“나해성이 나 좋아하는 건 확실히 알지.”

씩 웃으며 하는 말에 하얗고 말간 얼굴로 화르르, 열기가 피어올랐다.

“뭘 그렇게 쑥스러워해. 아침에 내 얼굴 보자마자 나 좋아한다고 고백부터 날린 사람이.”

그때는, 그 말을 너무나도 하고 싶었다. 채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 너무 많아 신경 줄이 너덜너덜해질 정도였음에도 김한별에게 제 마음을 꼭 들려주고 싶었다.

가만히 김한별을 바라보던 해성은 단단한 등에 팔을 두르고 여전히 거세게 맥동하는 심장을 담은 가슴에 뺨을 기댔다.

“그래. 좋아한다. 많이. 내가 엄청나게.”

“응. 날 너무 좋아해서 나해성이 생각이 많아졌지.”

어수룩하게 굴고 싶지 않았는데 다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

“나는 너한테 잘해 주고 싶어. 그것도 아주 많이. 근데 이 나이 먹고도 내가 많이 서투르다. 네 말대로 겁도 많고.”

해성은 고개를 들어 김한별과 눈을 맞췄다.

“그런데도 이렇게, 어떻게든 너랑 있으려고 하는 거 보면. 내가 너를 진짜 좋아하나 보다.”

“진짜?”

“어.”

“정말로?”

“어.”

“나도.”

만족스럽게 웃으며 해성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비비던 김한별이 입술을 붙인 채 속삭였다.

“나도 나해성이 진짜 좋아.”

샤워를 하고 나온 해성은 검은 드로즈만 입고 매트리스 위에 앉아 있는 김한별을 힐끗 보고는 냉장고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연 채로 나란히 놓인 맥주와 생수를 두고 잠시 고민하다가 생수를 골랐다. 시원한 물을 들이켜자 샤워 후 개운함이 배가 되었다.

“형. 빨리 와.”

머그 컵을 싱크대에 두고 돌아보자 어느새 매트리스에 길게 누운 김한별이 머리를 괴고 있었다.

“오늘 자고 가도 된다면서.”

아까 내가 널 많이 좋아한다, 아니다 내가 널 더 좋아한다 하며 낯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김한별의 품을 벗어나려는데 김한별이 팔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러면서 나 가? 진짜 가? 자고 가면 안 돼? 하고 물어 댔다. 귓바퀴며 뺨, 입술, 눈꼬리 할 것 없이 입맞춤을 퍼부어 대며 조르는 통에 해성은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굳이 그렇게 정신을 빼놓으며 허락을 종용하지 않아도 해성은 김한별이 있고 싶은 만큼 있게 할 생각이었다.

해성은 머리에 얹어 둔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고 매트리스로 가 김한별의 옆에 누웠다.

그러고는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구옥이긴 하지만 이 다세대 주택은 방음이 꽤나 잘 되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안하긴 했다. 김한별과 하다 가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낼 때가 있었다.

해성이 슬쩍 김한별을 쳐다보는데 김한별이 해성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코 자자.”

“….”

“나는 요즘 형이 옆에 있어야 잠도 잘 와.”

허벅지에 슬쩍 딱딱한 무언가가 스치는 것 같았는데 김한별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눈을 감고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굴던 김한별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근데 형.”

“어.”

무슨 말을 할지 감도 오지 않아 해성은 미간에 힘을 주었다.

“그 새끼 이름은 안 불렀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이어진 말에 맥없이 풀어져 버렸다.

“싫어. 싫단 말이야.”

낮았던 목소리가 금세 가벼워졌다. 해성은 장난스럽게 고개를 젓는 김한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김한별.”

“응?”

이름을 불러 놓고 잠시 망설이던 해성은 천천히 몸을 돌려 김한별을 마주 보았다.

“미련 같은 거 없어.”

“….”

“믿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정말 생각도 안 해.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그 사람한테,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 거야.”

김한별을 달래려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해성에게 이동우는 질기디질겼던 악연, 그것도 완전히 끝난 악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아까 그랬던 건.”

“이동우 개새끼라고 한 거?”

“…어, 그래. 그거.”

김한별은 해성이 이동우의 이름을 부른 것이 진짜로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대충 얼버무려 넘어가려는 수작질을 봐주지 않고 콕 집어 말했다.

“그거는.”

또다시 못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지만 그래도 김한별이 오해하는 건 더욱 싫었다.

“내가 좀 너한테 못난 모습을 보일까 봐… 걱정이 될 때가 있어.”

김한별은 두서없는 말을 재촉하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렸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 내가, 좀, 별로여서. 괜히 널 불편하게 할까 봐 걱정도 되고.”

“….”

“그럴 때마다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으면, 약간… 편해져. 그러면 네 말대로 내가 전에 했던 건 그냥, 뭣도 아닌, 그저 그런, 흔해 빠진, 운 나쁜 연애 정도로만 느껴져서. 그래서 그런 거야.”

“그랬어?”

“어.”

김한별이 손등으로 해성의 발긋한 뺨을 쓸었다.

“그러면 우리 말을 바꿔 볼까?”

“말을?”

“응.”

“어떻게?”

“내 말이 맞는 거니까. 음.”

김한별은 짐짓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입매를 휘었다.

“김한별 멋진 놈.”

“….”

“어때?”

당당한 얼굴을 조금 멍하니 주시하던 해성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완전 마음에 드네.”

진심으로 마음에 쏙 드는 주문이었다.

<러브 어택(Love Attack)> 외전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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