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4)

* * *

해성은 아직 컴컴한 새벽에 집을 나섰다. 아픈 사람을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밝은 아침의 집 안 풍경과 엄마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질릴 정도로 지겨운 비겁함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온 해성은 택시를 잡아타는 대신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둠이 물러가고 푸르스름한 새벽이 되었다. 버스가 다니기에 눈에 보이는 정류장으로 가서 노선표를 들여다보았다. 마침 집으로 가는 버스가 있어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이제 낮에는 제법 포근한 날씨였지만 이른 아침은 여전히 쌀쌀했다. 해성은 크게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쉬며 버스가 오는 쪽을 바라보던 해성은 마침 다가오는 버스에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시간 계산을 했다. 집에 가서 씻고 눈 좀 붙일 여유는 있었다.

가자, 집에 가야지.

집 생각을 하니 피로가 몰려왔다. 제 앞에 선 버스에 올라탄 해성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엄마 보니까 좋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에 해성은 자조했다. 비겁하기만 한 게 아니라 상상 이상으로 이기적이기까지 했다. 해성은 뜨거운 이마를 창에 대고 눈을 감았다.

텅 빈 도로, 텅 빈 벽, 텅 빈 방. 조금은 외로운 새벽이었다.

* * *

“해성아.”

해성이 도장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다가온 박재관은 굳은 표정으로 해성의 얼굴을 살폈다.

“뭘 그렇게 아련하게 봐, 부담스럽게.”

“어머님은 괜찮으시고?”

“어.”

박재관이 관장실로 가는 해성을 졸졸 따라갔다.

“넌 좀 어떻고?”

“죽을 맛이지, 뭐.”

“해성아.”

해성은 제 말에 눈가를 일그러트리는 박재관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잠 못 자서 죽겠어. 눈까지 뻑뻑해. 그렇게 불쌍하게 볼 거면 커피라도 한잔 사 주지 그래?”

“커피 마실래? 마셔! 뭐 마실래? 어떤 거?”

“믹스지, 뭐 어떤 거야.”

“있어 봐. 내가 타 줄게! 몇 개?!”

박재관이 부산을 떨며 정수기 옆 선반에 있는 믹스 커피를 한 움큼 집어 들었다.

“안녕하세요.”

그때 최지민이 도장으로 들어서며 인사를 했다.

“너는 이럴 거면은 복학을 왜 했냐?”

“저 누구보다 성실하게 학교생활 하고 있는데요?”

“그래, 그렇겠지.”

빈말 같은 건 모르는 최지민이었다. 네, 하고 당당하게 답한 최지민이 정수기 옆에 선 박재관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관장님은 무슨 믹스 커피를 세 개나 타세요?”

“해성이 피곤하다길래?”

“아, 좀….”

최지민의 말에 시선을 돌린 해성은 종이컵 하나에 믹스 커피 세 봉을 털어 넣고 물을 받는 박재관을 보다 커다란 손에 들린 작은 종이컵을 빼내 티스푼으로 몇 번 휘젓고 관장실을 나왔다.

“사범님, 그거 마시면 속 울렁거릴 텐데.”

“안 죽어, 인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돌아보지 않고 대꾸한 해성은 믹스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혀 위에서 뒤엉키는 달고 쓴 맛에 확실히 잠은 깨는 듯했다.

박재관이 타 준 커피 때문인지 그럭저럭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그래도 피로가 쌓이긴 했던 건지 오늘따라 퇴근이 기꺼웠다. 해성은 일부러 외면하던 휴대폰을 퇴근 직전에 확인했다.

점심때 김한별에게 오늘은 데리러 오지 말라고 연락을 해 두었는데 그것에 대해 불만이 가득한 메시지가 줄줄이 이어져 있었고, 이동우에게서는 내일쯤 시간이 되냐고 묻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해성은 김한별에게 내일 연락하겠다고 답장을 보낸 후 잠시 고민하다 그대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후드 집업을 걸치고 관장실을 나와 박재관과 최지민에게 인사를 하는데 박재관이 해성을 불러 멈춰 세우고는 뜸을 들이다 잘 가라, 했다.

잘 간다, 하고 대꾸한 해성은 손을 휘적거리며 도장을 나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해성이 빈 유리문 밖을 확인하며 건물 현관을 나서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여보세요.”

-상사병이라는 거 알아?

앞뒤를 다 잘라먹은 말이 답지 않게 뾰로통했다. 해성이 대꾸하지 않고 작게 웃자 김한별이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장난인 줄 아나 본데?

“너야말로 상사병이 뭔지는 알아?”

-보고 싶은데 못 보면 걸리는 거지, 뭐. 딱 지금 나 같은.

“며칠이나 못 봤다고.”

-난 나해성 하루만 못 봐도 병 걸려.

“치료를 받아.”

-나해성이 치료제야.

“야….”

해성은 소름이 쭈뼛 돋은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벅벅 문질렀다.

“너는 진짜.”

-이보다 더한 소리도 할 수 있어, 나는.

“그래, 그래 보인다. 믿어, 믿으니까. 좀 참아라.”

실없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집 안이었다. 운동화만 간신히 벗은 해성은 방 한가운데 벌러덩 드러누웠다. 긴장이 느슨해지자 억눌려 있던 피곤과 피로가 몰려들어 해성을 물고 늘어졌다. 차가운 방바닥 아래로 몸이 쑥 빨려 들어가는 기분마저 들었다.

“김한별.”

-응.

“나 좀 쉬자.”

-….

“와, 너무 졸려. 진짜.”

쉬고 싶다는 말에 저를 귀찮아한다 느낄까 봐 해성은 목소리를 살짝 띄워 엄살을 부렸다.

“나도 나이가 들었나.”

-그놈의 나이.

“억울하면 먼저 태어났어야지.”

-그건 좀 아쉽긴 하네.

“….”

-내가 먼저 나해성 발견해서 좋은 거 먹이고 좋은 데 데려가고 해야 했는데.

귓가에 흘러드는 목소리는 언뜻 그렇지 못한 과거를 가진 상대를 위로하거나 달래려 하는 듯했지만 그 아래에는 진득한 욕심이 빼곡하게 깔려 있었다.

말없이 천장을 보며 눈을 끔뻑이던 해성은 나 씻는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장난일 수도 있는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이유는,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친 가정 때문이었다.

정말 그랬다면 어땠을까. 그때, 그때 다른 사람이 아닌 김한별을 만났더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가슴이 뛰어서, 그것에 어이가 없어서 해성은 황급히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진짜 이거 제대로 미친놈 아니야?”

헛웃음을 짓던 해성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하아….”

입 밖으로 새는 숨이 지나칠 정도로 뜨거웠다. 입고 있는 옷과 이불까지 밤새 흘린 땀에 젖어 버렸다. 씻자마자 누워 설핏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몸에 열이 들끓어 깨어났다. 언제 사 둔 지도 모를 감기약을 꺼내 먹긴 했는데 효과는 없었다.

해성은 이불을 걷어 내고 매트리스 위에서 굴러 바닥으로 내려왔다.

“뭐야.”

웬만해서는 감기가 잘 걸리지 않는 체질이었다. 그래서 해성은 이런 감기 증상에 더욱 면역이 없었다.

“왜… 이래, 갑자기.”

분명 멀쩡했는데 불시에 열이 들끓고 머리가 핑 돌더니 속이 뒤틀렸다. 차가운 바닥에 뺨을 대고 색색거리며 숨을 내쉬던 해성은 물먹은 솜 같은 몸을 일으켜 싱크대로 비적비적 걸어갔다. 남은 감기약을 입에 털어 넣고 벌컥벌컥 물을 마신 후 다시 바닥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손을 더듬거려 매트리스 위에서 휴대폰을 찾아내 시간부터 확인했다.

새벽 3시.

그래도 출근까지 여유가 있었다.

그전에만 괜찮아졌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정오까지 선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던 해성은 뜨끈해진 눈을 손등으로 누르며 박재관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도장에서 일하게 된 이후로 처음 하는 결근이었다. 당장 집으로 오겠다는 박재관을 말리려고 지금 병원에 가려고 나왔다며 거짓말까지 했다. 박재관은 병원에 가면 꼭 연락하라며 신신당부를 했고 해성은 몇 번이나 알았다고 말한 후에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병원에 가야 하나.

다른 것도 아니고 감기는 전염병이라 말끔하게 낫지 않으면 도장에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병원에 다녀오긴 해야 할 것 같았다. 가야 하는데, 병원에 가야 하는데. 무거운 눈꺼풀이 자꾸만 닫히려 했다.

조금만 자고 가야겠다.

결국 해성은 휴대폰을 쥔 채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덜커덩거리는 소리. 무어라 떠드는 말소리. 작은 발걸음. 열 오른 이마와 눈가를 어루만지는 손길.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굳게 닫힌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질 않았다. 무언가 말이라도 하려고 하는데 입술 사이로 정체 모를 소리만 흘러 나갔다.

“…해성….”

누구지. 누가 날 부르는 거지.

“나해성.”

좀 더 선명해진 목소리에 해성의 눈가가 잔뜩 일그러졌다. 집에는, 여기는 아무도 들어오면 안 되는데. 다른 사람은 절대로 들어오면 안 되는데.

아픈 것도 잊을 정도로 강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죽을힘을 다해 뜬 눈에 희미한 인영이 보였다. 흐릿한 시야 속에 갇힌 김한별이 무표정한 얼굴로 해성을 보며 말했다.

“정말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니까.”

아침까지 기다렸고 정오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여전히 나해성은 제 전화도 받지 않고 메시지에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흐음.”

한별의 입에서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침음이 흘러나왔다. 나해성이 그 쓰레기랑 있어서 제 연락을 무시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했다. 만약 그렇다면 당장 그 새끼를 찾아가서 그 잘난 면상을 뭉개고 아구창을 뜯어 버릴 거니까.

나해성이 그 새끼랑 밤새 같이 있었다는 가정만으로 눈앞에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시발.”

욕설과 함께 짧은 웃음을 터트린 한별은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저는 무언가에 대한 소유욕이나 집착이 강한 편이 아니었다. 나해성이 들으면 그 말간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개소리하지 말라고 하겠지만 진짜였다.

간절히 원하는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없었기에 괜히 힘을 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나해성은 예외였다. 나해성과 관련된 모든 것이 다 예외였다. 누군가에게 이토록 강렬한 욕구를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신중한 자신이 처음 본 누군가에게 이렇게 단번에 빠져 버리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누군가가 남자인 건 애초에 문제조차 되지 않았다.

어느새 무표정해진 얼굴로 휴대폰을 응시하던 한별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한별아.

이전과는 다르게 딱딱해진 목소리에 저를 못마땅해하는 걸 느꼈지만 그저 웃었다.

“해성이 형이 전화를 안 받아서요.”

-아, 해성이.

“네, 해성이 형이요. 새벽부터 연락이 안 되네요,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박재관이 말꼬리를 늘어트리며 뜸을 들였다.

아니면 뭔데?

가뜩이나 제가 모르는 나해성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도 머뭇거리는 꼴에 일자로 다물려 있던 고집스러운 입매가 뒤틀렸다.

“무슨 일이 아니면요?”

가까스로 존대를 하며 대꾸한 것이 소용 있었는지 박재관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해성이가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다네?

“컨디션?”

-어. 그래서 오늘은 집에서 쉬라고 했어.

나해성이 아프다고?

빠르게 통화를 마무리한 한별은 당장 집을 뛰쳐나왔다.

평일 오후, 그나마 한산한 골목길에 차를 세운 한별은 이미 수십 번째 제 전화에 응답하지 않는 나해성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지루할 정도로 같은 신호음을 흘려 대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차에서 내려 전에 나해성이 걸어 잠근 후 그 안으로 도피했던 문을 열어젖혔다.

나해성이 어느 층에 사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문제는 그 문을 여는 데 있었다. 당연히 열쇠도 없고 도어록을 열기 위한 비밀번호도 몰랐다. 하지만 한별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성큼성큼 계단을 오른 한별은 나해성이 사는 집을 지나쳐 제일 꼭대기 층의 현관문을 두드렸다.

갑작스러운 방문객에도 집주인은 당황하는 바 없이 문을 열었다.

“누구시오?”

“안녕하세요. 저 2층에 사는 태권도장 사범님 아는 동생인데요.”

한별은 집주인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런데요.”

집주인이 슬쩍 한별을 훑어보았다.

“아까 새벽에 형이 아프다면서 전화한 이후로 연락이 안 되어서요. 걱정돼서 왔는데 전화도 안 받고 문도 안 열어 주네요. 병원에 간 거면 이렇게까지 연락이 안 되진 않을 텐데….”

한별은 제 말에도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는 꼬장꼬장한 노인네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만들었다.

“안 그래도 요즘 계속 컨디션도 안 좋다고 하고, 감기 기운도 있다고 했는데 걱정했거든요. 괜히 혼자 있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

“관장님은 아무래도 도장을 비우실 수가 없어서 제가 오긴 했는데…. 아, 여기 해성이 형 사진하고 번호랑 관장님 연락처예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실까 봐. 전에 저기 문 앞에서 뵌 적도 있는데. 막걸리 사러 가실 때.”

“사범님이 연락이 안 된다고요?”

“네.”

한별의 갖은 노력이 먹혀들었는지 집주인의 의심 가득한 얼굴에 점차 걱정이 스며들었다.

“그럴 양반이 아니긴 한데. 도장도 안 나갔고?”

“네.”

“음. 있어 봐요.”

안으로 들어간 집주인은 마스터키를 가지고 나와 앞장섰다. 한 층 내려가 문 앞에 선 집주인은 잠시 망설이다 마스터키를 도어록에 댔다.

“아이고. 사범님.”

안으로 들어선 집주인이 바닥에 누워 있는 나해성을 보고 팔짝 뛰었다.

“쓰러지신 거 아닌가!”

현관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집주인을 지나쳐 나해성에게 다가간 한별은 불덩이 같은 이마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잠든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인사는 축객령이었다. 여기서 집주인이 더 이상 해 줄 것은 없었다.

“제가 옆에 같이 있다가 깨면 병원 데려가든가 할게요.”

“그래요. 무슨 일 있으면 꼭 알려 주고.”

“네.”

갑작스러운 방문객이 아니었다면 나해성이 정말로 집에서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집주인이 경계를 허물고 한별에게 그를 부탁한 후 자리를 떴다.

문을 잠그고 다시 안으로 들어온 한별은 나해성의 곁에 앉았다.

“해성아.”

속삭이듯 부르자 나해성이 눈가를 꿈틀거렸다.

“나해성.”

한 번 더 부르자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해성이 형.”

“…김한별?”

“응, 나야. 한별이.”

“네가 어떻게….”

서서히 정신이 드는지 초점이 되살아난 눈에 두려움이 번져 나갔다. 한별은 그 모습에 눈가를 좁혔다.

“왜, 왜 네가 여기 있어.”

“알아.”

한별은 열이 절절 끓는 뺨을 손등으로 쓸며 나해성을 달랬다.

“형이 절대 집에 사람 안 들이는 거 아는데, 싫어하는 거 아는데.”

나해성이 뻐끔거리던 입술을 다물었다.

“오늘만 봐줘라.”

“….”

“형 아픈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그러니까 오늘만. 형 괜찮아지는 것만 보고 갈게.”

애원하듯 말하자 가까스로 침착한 척하려 하던 나해성의 눈이 흔들렸다.

“재관이 형이, 알려 줬어?”

“응.”

“그래. 근데, 괜찮은데. 아까 약도 먹었고, 그냥 졸려서… 좀 자다가 병원 가려고 했던 거야.”

“응, 맞아.”

“….”

“형 말이 다 맞아.”

한별은 나해성이 연신 불안한 눈으로 제 등 너머 현관문을 힐끗거리는 걸 못 본 척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따가 형 병원까지만 데려다줄게.”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하며 위태롭게 몸을 일으키는 나해성을 부축하려던 한별은 제 손길에 경기를 일으키듯 놀라 몸을 피하는 나해성의 모습에 속으로 이를 갈았다.

자신의 공간에 사람을 불러들이지 않는 습성이 생긴 것도 다 그 새끼 때문일 거다.

좆같은 새끼.

“그게… 내가 땀을 많이 흘려서.”

“응.”

한별은 눈치를 보며 변명하는 나해성을 안아 들어 매트리스 위에 앉혔다. 반사적으로 저를 밀어 내려는 몸짓은 무시했다.

“김한별.”

아픈 사람 간호하겠다고 찾아온 사람을 과하게 거부하는 게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한별을 부르던 나해성이 입을 다물었다.

“일단, 수건으로 대충 닦자.”

한별이 화장실로 들어가자 안절부절못하던 나해성은 젖은 수건을 들고나와 매트리스맡에 앉은 한별을 애타게 바라보다 낮게 한숨을 내쉬고 수건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손끝으로 수건을 만지작거리다가 목덜미와 팔을 대충 닦았다.

“형.”

저를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와 이렇다 할 표정이 없는 얼굴에 나해성의 표정이 굳었다.

“형, 정리는 잘 못하는 편이구나?”

“….”

“음… 청소도 잘 안 하는 거 같고.”

한 칸짜리 방을 둘러본 한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간미까지 있어.”

진지한 음성에 나해성이 고개를 떨궜다. 그러고는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든 나해성은 전보다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깨끗한 거지, 뭐.”

잔뜩 굳은 목소리로 시큰둥하게 말하며 멀쩡한 척하려고 하는 모습이 미치게 귀여웠다. 한별은 실실 웃으며 붉어진 눈꼬리를 검지로 문질렀다.

“더 자. 한숨 자고 병원 가자.”

한별이 물러서지 않자 나해성은 체념한 듯 누웠다. 누워서도 좀처럼 잠이 들지 못하던 나해성은 갑자기 들이닥친 또 한 명의 방문객을 보고 새파랗게 질려 몸을 떨었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한별은 당연히 집주인일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상황에서 나해성의 집에 올 만한 사람은 박재관이나 최지민 정도인데 그러기에는 도장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시간이었다. 그 새끼는 당연히 지금 나해성이 도장에 있는 줄 알 테니 고민할 가치도 없이 제외였다.

하지만 다시 불안해하는 나해성을 안심시키고 문을 연 한별은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드물게 당황했다.

오른팔 전체에 깁스를 한 중년 여성이 경직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누구…신지?”

“여기 나해성, 이라는 사람 집 아닌가요?”

중년 여성의 입에서 나온 나해성의 이름에 한별은 즉시 이 중년 여성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맞아요. 안녕하세요.”

“네. 근데 누구시죠?”

“아, 저는 해성이 형이랑 친한 동생이에요. 형이 아파서 잠깐 들렀어요. 들어오세요.”

“해성이가 아파요?”

“네, 뭐. 감기 몸살 같은…. 일단 들어오세요.”

한별이 몸을 틀어 공간을 만들자 중년 여성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고 현관에 올라선 한별은 목이 졸린 사람처럼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경련하는 나해성의 곁으로 가 한쪽 무릎을 꿇고 나해성을 불렀다.

“형.”

그러자 불안한 시선이 한별과 중년 여성을 쉴 새 없이 오갔다.

“엄, 엄마, 그러니까. 그게.”

“아.”

한별은 일부러 무심히 나해성의 말을 잘랐다.

“해성이 형 어머니시구나. 앉으세요.”

반가운 목소리에 두 사람 모두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집에 마실 게 없는데. 저는 커피 사러 다녀올게요. 커피 드시죠?”

“네, 부탁할게요.”

잠시 침묵하던 중년 여성이 답했고 더듬더듬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변명을 하려던 나해성은 태연히 행동하는 한별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네. 얘기 나누고 계세요.”

입꼬리를 올린 한별이 해성에게도 한마디 했다.

“약국 들러서 종합 감기약도 사 올게.”

현관으로 간 한별은 흰 손등 위로 뼈가 불거질 정도로 세게 이불을 잡은 채 애써 떨림을 가라앉히는 나해성을 보며 집을 나섰다.

먼저 약국에 들러 약을 산 한별은 카페로 가 포장한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자리에 앉아 정확히 10분 정도를 기다렸다가 일어났다. 골목으로 들어서 시간을 확인하니 나해성의 집에서 나온 후 20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이 정도면 적당히 자리를 피해 주었다 싶기도 했고 나해성을 이 이상 내버려 두기도 싫었다. 나해성은 또 혼자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이 상황을 감당해 내려 바득바득 애를 쓰고 있을 것이었다.

가뜩이나 열까지 펄펄 끓는데.

한별이 짧게 혀를 차며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였다. 안에 있어야 할 중년 여성, 나해성의 어머니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대화는 다 나누셨어요?”

그녀는 웃으며 다가와 묻는 한별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한별의 손에 들린 커피로 시선을 내리고 물었다.

“그 커피 내 건가요?”

한별이 캐리어에서 커피를 뽑아 건네자 그녀가 받아 들었다.

“괜찮으면 같이 걸을까요?”

힐끗, 나해성의 집 창을 올려다보자 창밖을 내다보던 나해성이 황급히 몸을 숨겼다.

“네, 그러죠.”

한별의 말에 그녀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골목을 벗어나 도롯가에 접어들자 그녀가 입을 뗐다.

“해성이가 어릴 때부터 스트레스받으면 저렇게 크게 앓곤 했어요. 평소에는 감기도 잘 안 걸리는 얜데. 마음 복잡한 일이 있으면 하루를 꼬박 앓았어요.”

한별은 앞을 보고 걸으며 혼잣말하듯 이야기하는 그녀와 보조를 맞춰 걸었다.

“날 만난 게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었나 싶어서 속상하기도 하고.”

“….”

“그래도 자식이 뭔지 한번 얼굴 보니까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사는 곳은 진즉에 알고 있었는데 올 엄두를 못 냈어요. 해성이가….”

걸음을 멈춘 그녀는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하다 다시 말을 이었다.

“또 상처받을까 봐.”

먼 곳을 응시하던 그녀가 한별을 올려다보았다.

“왜 이런 얘기를 나한테 하나 싶죠?”

그녀를 따라 멈춰 선 한별도 가만히 그녀를 마주 보았다.

“적어도 날 보고 도망치지는 않았으니까.”

“….”

“우리 해성이만 두고 달아나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래서 그냥 떠들어 봤어요.”

“도망칠 일 없어요.”

힘없는 주절거림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목소리에는 대단한 의지도 엄청난 결의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듯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그녀는 잠시간 말없이 한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요.”

“….”

“나 여기서 택시 타면 돼요. 커피는 잘 마실게요.”

“네. 조심히 가세요.”

간단한 인사가 끝이었다. 한별은 돌아서 성큼성큼 걸었다. 환자에게 커피는 좋지 않지만,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을 나해성을 위해 산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이 완전히 녹기 전에 어서 돌아가야 했다.

다시 내다본 창밖에는 김한별도 엄마도 없었다. 벽에 기대 있던 몸이 주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세운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해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일어났다. 순간 현기증이 일어 휘청거렸지만 화장실로 가 찬물로 세수부터 했다. 턱까지 흐르는 물을 손등으로 닦고 화장실을 나와 매트리스에 걸터앉았다.

“무슨 일이 이렇게 한 번에 터지냐.”

해성은 멍하니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찾아온 엄마는 말없이 해성의 얼굴만 보다가 일어섰다. 해성이 따라 일어나 김한별에 대한 변명 혹은 설명을 하려고 하자 단호히 말을 끊어 냈다.

‘엄마는 앞으로 너 보고 살 거야.’

‘….’

‘연락도 없이 찾아온 건… 미안해. 앞으로는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오는 일은 없어. 몸부터 추슬러.’

해성의 얼굴을 한 번 더 빤히 바라보던 엄마는 어지러운 방 안 풍경을 둘러보고는 집을 나갔다.

미안하다니.

미안해야 할 사람도 사죄를 해야 할 사람도 전부 저였다.

멀뚱히 앉아 눈만 끔뻑이던 해성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형.”

안으로 들어온 김한별이 두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을 싱크대 위에 올려 두고 그중 커피만 가지고 다가와 해성의 앞에 앉았다.

“자.”

그러고는 해성을 올려다보며 커피를 건넸다.

“약도 먹어야 하는데 빈속이라 지금은 안 될 거 같고.”

“빈속에 커피는 괜찮고?”

“딱 한 모금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는 말투가 장난스러웠다. 해성은 가만히 김한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엄마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혹시 상황을 오해한 엄마에게 심한 말을 들은 건 아닐까.

입 안을 맴돌던 여러 말들 중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고맙다.”

“뭘 이 정도로.”

“진짜 고마워. 너한테는 고마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그래?”

“어.”

진심이었다.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그러면 형.”

쓱, 해성의 얼굴을 느리게 훑은 김한별이 입꼬리를 위로 당겼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부탁?”

여전히 눈가는 뜨끈했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럼에도 해성은 김한별이 말하는 부탁을 듣기 위해 집중했다.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 주고 싶었다.

“형.”

연거푸 저를 부르는 김한별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증발했다.

“그 새끼 만나지 마라.”

“….”

“저울질이니 뭐니 떠들어 대긴 했는데 이제 싫어, 내가. 형이 그 새끼 만나는 거.”

늘 여유롭고 웃음이 배어 있던 얼굴이 완전히 무표정했다.

“형이 그래 주면.”

“….”

“난 정말 좋을 거 같아.”

김한별은 말을 마친 후에야 다시 웃었다. 마치 해성이 당연히 제 부탁을 들어줄 것을 확신한다는 듯이.

* * *

다음 날, 다행히도 열은 말끔하게 내렸다. 한번 앓고 나니 내내 저를 두르고 있던 안개가 걷힌 듯 마리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몸까지 개운했다.

화장실을 나온 해성은 매트리스 위에 앉아 오늘도 도장에 나오지 말고 쉬라는 박재관에게 출근할 거라 답장을 보냈다. 왜 연락이 되지 않냐는 이동우의 메시지는 지나치고 일어났냐 묻는 김한별의 메시지부터 확인한 후 전화를 걸었다.

-일어났어?

“어.”

-몸은 좀 어때?

“멀쩡해.”

-건강하기까지 하다니.

“이래 봬도 운동 전공자야.”

장난스러운 말투에 가볍게 대꾸했다.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까지.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김한별 때문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면 김한별과 있을 땐 매번 이랬다. 저도 모르게 휩쓸리다 보면 이렇게 웃고 있었다.

-출근하려고?

“어, 해야지.”

-하루 더 쉬지, 왜. 관장님이 쉬라고 했을 텐데.

“넌 진짜.”

-모르는 게 없어?

“그래. 대단하다.”

-응. 이렇게 대단한 내가 널 좋아하니까 자부심을 갖도록 해.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던 해성의 입이 차차 다물어졌다.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말이야.

그런 해성을 눈치챘을 텐데도 김한별은 어떤 동요도 없이 나른하게 말을 이어 갔다.

-넌 내가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입을 닫아 버리거나 시선을 피하거나 말을 돌리려고 하거든. 근데 그게.

“….”

-너무 좋아서 그러는 거 같아. 막 심장이 떨리고 두근거리고 그래서. 부끄러워서. 넌 수줍음이 많잖아.

귓가를 살랑이는 목소리에 심장까지 간지러운 건, 아마도 저 말이 사실이기 때문일 거다.

좋아서. 김한별이 저를 좋아하는 게 좋아서. 그리고 저 역시 그런 김한별이 좋아서.

알고 있었고 이미 인정한 감정이 문득 새삼스러워졌다.

-형.

수런거리는 제 마음과는 다르게 저를 부르는 김한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어.”

-우리 같이 저녁 먹을까?

“저녁?”

-응.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맛있는 거 먹고, 술도 마시고, 같이 자고, 음, 또….

하지만 말투는 금세 장난스러워졌고 해성은 입꼬리를 허물어트렸다.

“중간에 뭐 이상한 거 하나 껴 있는 거 같은데?”

-좋아하면서. 이 봐. 이렇게 수줍음이 많아. 아무튼 시간 좀 내줘. 우리 데이트한 지도 너무 오래됐어.

“데이트는 무슨. 문짝값이 아직 남았냐?”

-우리 관계에서 그런 세속적이고 계약적인 부분은 없어진 지 오래야.

해성은 건조대에 걸린 도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

“데이트하자. 맛있는 것도 먹고, 술도 마시고, 같이… 그러자.”

-중요한 부분 대충 얼버무리는 거 안 좋은 버릇이지만 귀여우니까 봐줄게.

“네가 더 귀엽다.”

-….

무심결에 던진 말에 휴대폰 너머로 쉬지 않고 들려오던 말소리가 뚝 끊겼다. 해성은 소리 없이 웃으며 일어나 건조대에서 도복을 걷었다.

“귀여운 놈. 형이 맛있는 거 사 줄게.”

-….

“근데 데이트는 내일 해.”

-사람 마음에 불 질러 놓고 내일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어. 기다려.”

해성 역시 김한별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예쁘게 입고 기다려라.”

-….

“나도 예쁘게 입고 갈 테니까.”

-오늘따라 사람 설레게 하네?

“내일 봐.”

-사실 당장 집으로 쳐들어갈까 했는데.

“….”

-참아 볼게. 내일까지 이런 기분으로 사는 것도 괜찮을 거 같거든.

“그래. 내일 보자.”

-….

“내일 봐, 한별아.”

통화를 마친 후에도 해성은 한동안 휴대폰 속 김한별의 이름을 바라보다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졌다. 도복을 입는 해성의 목덜미와 귓바퀴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루를 쉬고 등장한 해성을 누구보다 반긴 사람은 박재관도 최지민도 아니었다. 도장 문을 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안을 살핀 시율이 저를 발견하자마자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사범님!”

“이시율.”

“사범님! 악!”

꺅, 소리를 지른 시율과 그 친구들이 해성을 둘러싸고 방방 뛰었다.

“사범님! 이제 안 아프신 겁니까?”

“그럼, 당연하지. 태권도로 단련된 육체는 바이러스에도 강하다.”

“역시!”

해성의 말에 감명을 받은 시율이 눈을 반짝였다.

“이시율! 뭐 해! 그거 드려, 빨리!”

그런 시율에게 친구들이 무언가를 재촉했다. 해성이 고개를 기울이자 시율이 손에 들고 있는 걸 내밀었다.

“사범님. 아프지 마십시오! 이제는 도장도 절대로 빠지시면 안 됩니다.”

“그래. 근데 이건 뭐야?”

“오늘 학교에서 꿈 그리기 한 거예요!”

대답은 시율이 아닌 시율의 친구가 했다.

“꿈?”

“네!”

“저는 커서 사범님이 될 겁니다!”

시율은 사범님처럼 되겠다, 도 아닌 사범님이 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해성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시율이 건네는 종이를 받았다. 곱게 접힌 종이를 펴자 갖가지 색연필로 탄생된 어떤 남자가 허리 위에 손을 얹고 활짝 웃고 있었다.

하얀 도복에 검은 띠를 한 남자의 주변에는 줄넘기, 한 발 차기 연습할 때 쓰는 발판, 파란색 매트리스, 탄산음료 그리고 조립식 로봇과 자동차가 두둥실 떠 있었다.

“와, 시율아.”

“네!”

“이거는… 사범님이야?”

“네!”

당찬 대답에 해성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진짜 사범님보다 훨씬 멋진 거 같은데?”

“아닙니다! 실제가 더 멋있어요!”

“쓰읍. 아무리 봐도 그림이 더 멋져.”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박재관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검지로 턱을 문지르며 눈을 가늘게 좁히고 그림을 뜯어보는 박재관을 향해 시율이 눈을 부릅떴다.

“아닙니다!”

“근데 시율아.”

박재관이 그런 시율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성은 그 모습을 불길하게 바라보았다.

저 인간이 또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려고.

“시율이 아버님은?”

“…네?”

“전에 아빠가 막 로봇도 뚝딱뚝딱 조립해 주셔서 아빠처럼 된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니었나?”

“허억!”

박재관의 말에 시율은 황급히 숨을 들이켰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에요! 아니, 맞아요! 근데 아니에요! 아니, 아니!”

“저런….”

해성은 시율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박재관을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허리를 굽혀 시율의 뺨을 톡 건드렸다.

“로봇 조립도 잘하는 태권도 사범이 되면 되지?”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시율이 아, 하고는 다시 방긋 웃었다.

“네!”

그러고는 친구들과 우르르, 오늘 레크리에이션을 위해 설치해 둔 트램펄린으로 뛰어갔다. 해성은 트램펄린 위를 방방 뛰는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박재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뭐 하냐, 진짜.”

“이시율… 나는 한 번도 안 그려 주고.”

흥, 하며 콧방귀를 뀌는 박재관의 엉덩이를 발로 찬 해성은 관장실로 갔다. 시율이 그려 준 그림을 벽에 붙이고 관장실을 나가려다 잠시 그 앞에 서서 그림을 감상했다. 총천연색의 그림 속 자신은 정말 멋진 어른으로 보였다.

어른, 어른이라.

그림 속 자신처럼 멋진 어른은 아니지만 그래도 더 이상 헛발질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내일 있을 데이트까지 만남은 잠시 보류했기에 오늘 퇴근길도 해성 혼자였다. 그럼에도 왜인지 허전하거나 쓸쓸하지는 않았다.

따끈한 물로 하루 동안 쌓인 먼지와 땀을 씻어 낸 후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들고 집을 나섰다. 조심조심, 맨 위층 주인 할머니 할아버지 댁을 지나 옥상으로 올라간 해성은 평상으로 가 앉았다. 조금 서늘하긴 했지만 이제는 밤에 야외에서 맥주를 마셔도 괜찮을 만한 날씨였다.

“크으.”

아직 까끌까끌한 목구멍에 탄산이 닿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맥주 맛은 좋았다. 한 번 더 맥주를 들이켠 해성은 고개를 뒤로 젖혀 별은커녕 뿌옇기만 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제 이동우를 만나지 말라 말한 김한별은 해성에게 어떤 답도 종용하지 않았다. 그저 해성을 보며 늘 그랬듯 씩, 웃을 뿐이었다.

해성은 반쯤 비운 맥주캔을 옆에 두고 휴대폰을 들어 이동우가 보낸 메시지를 빠짐없이 확인했다.

해성아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이러면 내가 재관이한테 연락할 수밖에 없잖아

-해성아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이러면 내가 재관이한테 연락할 수밖에 없잖아

이상한 노릇이었다. 걱정하는 척 저열한 협박을 하는 메시지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우습게 느껴졌다.

달라진 건 저일까, 그일까.

글쎄.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올려다본 까만 하늘 위에는 여전히 희뿌연 도시의 먼지가 흘러 다녔다.

‘아… 저는….’

그 위로 헐벗은 저를 두고 황급히 도망치던 그의 뒷모습이 번지듯 떠올랐다.

* * *

그때쯤 형은 무척 바빴다. 늘 바빴지만 그땐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눈 것이 까마득할 정도로 바빴다. 그래도 늦은 밤에 가끔 집에 들러 주어 고마웠다. 형이 떠나고 나서 느껴지는 비참함이나 자괴감 같은 감정에서 눈을 돌리고 귀를 틀어막는 건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날은 아침에 일어나서 몸이 평소와 다르게 무겁다고 느껴진 날이었다. 이미 과에서는 유령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렇다고 강의를 빠지고 싶지는 않아 학교에 갔는데 머리까지 어지러워 오전 강의만 겨우 듣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혹시 감기인가 싶어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감기약을 샀다. 발걸음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심장이 철렁했다. 요즘 들어 엄마나 아빠의 전화를 받을 때면 해성은 늘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어디냐 묻기에 억지로 웃으며 학교라 말했다. 오늘따라 엄마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느껴져 괜히 친구들과 밥을 먹으러 가는 중이라는 거짓말까지 덧붙였다. 그런 해성에게 엄마는 이번 주에는 집에 올 수 있냐 물었고 해성은 늘 그랬듯 답을 얼버무렸다. 주말에 혹시라도 형이 저를 위해 시간을 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언젠가부터 익숙한 대화 패턴이었다. 이럴 때 엄마는 뭐가 그렇게 바빠 엄마도 안 만나 주냐며 장난 섞인 투정을 부리곤 했는데 그날은 아니었다. 알았다며 전화를 끊는 엄마의 말투가 어딘지 냉담했다.

유난히 굳은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지만 자취방에 들어서 형을 발견했을 때 그 목소리는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형!’

반가워하며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묻자 형은 안 그래도 집으로 오라고 하려던 참이라 말했다. 해성이 학교에 있든 다른 약속이 있든 그런 건 전혀 상관하지 않는 무심한 어투였다.

‘형, 밥은 먹었어요? 아직이면 우리 뭐라도 시켜 먹을까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점점 뜨끈해지는 몸 상태도 인지하지 못한 해성이 그저 신이 나서 말하자 형이 해성의 얼굴을 빤히 보다 손에 들린 편의점 봉투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건 뭐야?’

‘아… 이건 감기약인데, 그냥 상비약으로 사 두려고.’

‘해성이 어디 아파?’

‘네? 별로 아프진 않은데.’

해성이 우물쭈물거리자 형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오늘은 그냥 입으로만 해야겠다.’

‘네?’

‘갑자기 휴강 돼서 잠깐 들렀어. 이따가 약속 있어서 밤에는 못 와.’

‘아….’

그러니까 약속 시간까지 애매하게 남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 들렀다는 말이었다. 해성과 식사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며 때우자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왜, 싫어? 몸이 많이 안 좋아?’

‘아, 아니에요.’

해성은 언뜻 걱정하는 듯한 얼굴을 보며 손을 휘저었다.

‘그래. 그럼 이리로 와서 앉아.’

침대에 걸터앉은 이동우가 다리를 벌리며 말했다.

‘티 벗고.’

그날따라 유독 내키지 않아 쭈뼛거리며 다가가던 해성은 형의 말에 입고 있던 후드티를 벗었다. 형은 해성이 성기를 빨아 줄 때 늘 해성의 몸을 더듬거리다 젖꼭지를 비틀며 사정했다.

후드 티를 벗은 해성은 형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동우가 버클을 풀자 해성이 지퍼를 이로 물었다. 손을 쓰지 않고 입만으로 지퍼를 끌어 내린 해성이 막 형의 드로즈 위를 혀로 핥으려 할 때였다.

형이 해성을 거칠게 밀쳤다. 벌러덩 뒤로 자빠져 영문을 모르는 눈으로 형을 올려다보던 해성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경악에 찬 눈이 향한 곳으로 해성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아, 내가 문을 안 잠갔던가.

현관에 서서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엄마를 본 순간,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아… 저는….’

무어라 말을 하려던 형은 흐트러진 옷차림을 빠르게 수습하고 침대 위에 올려 두었던 제 가방을 챙겨서 그대로 집을 빠져나갔다.

도망치는 이의 마음처럼 허겁지겁 닫히는 문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해성이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엄마를 바라보았다.

‘어… 엄마.’

무작정 엄마를 부르긴 했지만 해성은 이내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런 얼굴을 한 엄마는 처음이었다. 차라리 분노와 혐오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면 어떻게든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싸늘하게 식은 엄마의 창백한 얼굴에는 온통 고통뿐이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해서인지, 믿었던 아들의 배신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수년간 부모까지 속이게 만들고 밝고 반짝이던 아들의 삶마저 잔뜩 흐려 놓은 그 남자가 아들만 두고 도망쳐서인지, 해성은 끝내 알 수 없었다.

‘….’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방에 홀로 남겨진 해성은 웅크리고 앉아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눈을 질끈 감았다.

반복되는 휴학. 온갖 이유와 핑계를 들며 기어코 자취를 시작한 아들. 그리고 그 자취방 계약일이 아들이 말한 날짜보다 훨씬 이전이라는 점. 서서히 커지는 아들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

아마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을 거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이렇게 들킬 필요는 없었잖아.

한번 터져 버린 울음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도 모르겠고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도 몰라서 그냥 스스로에게 모든 화살을 돌렸다.

제가 겨냥한 화살에 심장이 푹푹 찔려 가며 해성은 홀로 남겨진 자취방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렇게 또 혼자 밤을 보낸 후, 푸르스름한 새벽에 이동우가 찾아왔다. 퉁퉁 부은 해성을 안고 달래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집에 남자와의 관계가 들키면 우리도 더는 만나지 못하게 된다며 걱정했다.

해성은 이번에도 그런 형을 이해했다. 비록 형의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저에 대해 알고 있지만, 그들이 저에 대해 어떻게 떠들고 다니는지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부모님께 들켜 아예 만남을 차단당하는 건 다른 문제였으니까.

‘해성아.’

‘….’

‘그럼 우리 이제 못 봐?’

저를 바라보며 짓무른 눈가를 쓰는 손길이 퍽 다정스러웠다.

‘이제, 너희 부모님 아셨으니까. 우리 이제 못 보는 거야?’

아, 그제야 해성은 정작 들킨 사람은 저라는 걸 깨달았다.

‘아뇨…. 아니에요. 우리가 왜 못 봐요. 형을 못 보면 내가, 어떻게 해요.’

‘그치?’

울먹거리는 해성을 보며 웃는 얼굴이 기이했지만 차오른 눈물에 가려져 버렸다.

저도 그도 멍청하고, 아둔하기 그지없는, 그런 어른이었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해성은 휴대폰을 귀로 가져갔다. 짧은 신호음 후 상대의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해성아.

“네.”

해성은 희뿌연 하늘을 보며 대답했다.

-무슨 일 있었던 거야?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해성이 자신의 연락을 이렇게 오래 무시할 리 없다는 확신이 담긴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라. 있었다. 여러 일이 있었다. 7년 만에 엄마를 만났고, 집으로 찾아온 엄마가 김한별을 만났고, 김한별은 제게 이동우를 만나지 말아 달라 부탁했다.

“아뇨.”

하지만 그런 건 이동우에게 별일이 아니었다.

-그래. 근데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됐어?

“그냥….”

-…그냥?

무덤덤한 어투에 이동우의 목소리가 언뜻 날카로워졌다.

“그냥 이래저래 바빴어요.”

-…그래.

“네.”

-그럼 이제 바쁜 건 끝난 건가?

“뭐, 그럭저럭이요.”

해성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낀 건지 이동우가 잠시 침묵하다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 그러면 우리 언제 볼까?

우리 언제 볼까?

저 말이 해성에겐 몹시도 낯설었다.

이동우와 맛있는 걸 먹으러 가고, 함께 술잔도 기울이고, 여기저기 여행도 가길 바랐다. 둘 사이를 밝힐 수는 없겠지만 서로의 친구들을 만나 소개하고 신나게 노는 것도 기대했다.

그러던 때가 있었다.

“형.”

하지만 그건 다 지루한 과거 속에 갇힌 바람들이었다.

-응, 해성아.

“저는 이제 형, 안 보려구요.”

담담한 시선 끝에 반짝이는 작은 별 하나가 걸렸다.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

“그만할래요.”

해성은 그 별을 멀거니 응시하며 형에게 많이 늦은 이별을 고했다. 해성의 말에 잠시 아무 말 없던 이동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성아.

“네.”

-그게 무슨 말이야.

“형.”

저를 어르고 달래는 말투가 이전처럼 어른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저 찾아오지 마세요. 도장으로도 집으로도.”

-….

“찾아와도 안 만나요.”

-…이런 식으로 하겠다고. 얼굴도 안 보고? 전화로 통보하듯이?

상냥한 척하던 목소리가 비틀렸다.

“네.”

-나해성.

“형 만나는 거, 싫다고 해서요.”

-….

“그리고 나도.”

-….

“나도 이제 진짜 형 안 보고 싶어요.”

-…사람을.

낮게 깔린 목소리에서 지금 이동우가 얼마나 화를 참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지. 날 이런 취급 해?

하지만 그래도 초조하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가 떼를 쓰는 아이같이 느껴질 뿐이었다.

“형.”

-….

“잘 지내요.”

용건은 이걸로 끝이었다. 더 이상 이동우와 나눌 이야기는 없었다. 해성은 이동우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가 해코지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던 게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마무리였다.

해성은 남은 맥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이별이라는 건 아련하지도 애달프지도 않았다. 직설적이고 또 너저분했다.

어쩌면 김한별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한 건 그냥 지독하게 운 나쁜 연애였을 뿐이었다. 그리 대단치 않은, 추접스럽고 지지부진한 연애.

“별거 아니네.”

비식, 힘없는 웃음을 흘린 해성은 빈 맥주캔을 들고 일어났다.

내일은 김한별을 만나는 날이었다. 그 데이트라는 걸, 이제부터 제대로 해 볼 생각이었다.

* * *

-시간 너무 안 간다.

전화를 건 김한별이 대뜸 하는 말에 해성은 웃음을 터트렸다.

-웃어? 난 심각해.

“이제 음, 두 시간 정도 남았네.”

-아직도 두 시간이나 남았다니. 오늘은 식당도 형이 정했다고 해서 엄청 기대하고 있어.

“…기대는 하지 마.”

만날 때마다 늘 김한별이 해성을 모시고 다니듯 했다. 그래서 이번엔 해성이 식당과 메뉴를 정했는데 딱히 자신은 없었다.

김한별은 엄청난 미식가였고 데려가는 곳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맛있는 식당들이었다. 하지만 해성이 고른 곳은 기껏 해 봐야 인터넷에 치면 나오는 맛집 수준이었다.

-형 그거 알아?

“뭘?”

-음식 맛을 결정하는 건 음식 맛이 아니야.

“또 뭔 소리를 하려고.”

-같이 먹는 사람이야.

“….”

-형이랑 먹으면 난 다 맛있어.

“….”

-물론 나한테 제일 맛있는 건.

“이따 보자.”

쑥스럽고 민망하지만 살짝 밀려들던 감동이 나른하게 이어지는 말에 다시 물러났다. 끝맺지 못한 문장의 뜻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그런데도 김한별은 굳이 ‘형이야’ 하는 메시지를 보내 그 의미를 떠먹여 주었다.

휴대폰을 보며 고개를 젓던 해성은 대자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몇 년을 평범하게 굴러가던 하루하루였다. 그런 하루에 안도했고 또 안주했다. 굳이 무언가를 해 앞으로 나아갈 시도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어떤 어린놈 하나가 해성을 뒤흔들었다. 그러다 말 줄 알았는데 지치지도 않고 흔들고 또 흔들었다. 들러붙어 있던 죽은 잎사귀들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막무가내로 흔들어 댔다.

해성은 가만히 그 겨울밤을 떠올렸다. 한 해의 마지막이라 들뜬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그 밤. 저 역시 불쑥 솟아난 충동과 조바심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섰었다.

왁자지껄하고 분주하던 그 겨울 밤거리를 떠올리던 해성의 휴대폰이 길게 진동했다. 해성은 화면에 뜬 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휴대폰을 귀로 가져갔다.

“어.”

당연히 김한별이라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들려오는 상냥한 목소리는 다른 이의 것이었다.

-해성아.

해성이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내가 아주 재밌는 걸 발견해서 말이야.

웃음이 밴 목소리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우리 추억이 깃든 재밌는 영상들이 있더라구.

“….”

-올래? 나 지금 우리 처음 했던 그 모텔에 있는데. 여기면 내가 아는 사람 절대 만날 일 없을 거라고 네가 장담했던 곳이잖아.”

“….”

-어떤 스킨십도 안 해도 괜찮다고, 사귀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하더니, 내가 용기 내 보겠다니까 좋아서 환장하면서 알아본 곳.

“….”

-바쁘면, 음… 이거 좋아할 만한 사람한테 보내 볼까?

“…기다려요. 지금 가요.”

전화를 끊은 해성은 서늘한 눈으로 휴대폰을 응시하다 집을 나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