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씻어야 하지?”
“어? 어.”
김한별에게 같이 있자고 한 목적이 분명하긴 했는데 막상 집에 도착하자마자 김한별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니 주춤했다. 그러다 자신이 주춤한 이유를 깨달은 해성은 머리를 쓸어 올린 후 욕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해성을 따라온 김한별이 욕실 문고리를 잡은 채 해성을 내려다보았다.
“같이 씻자고 하면 또 싫다고 할 거지?”
“욕실 두 개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
“응. 나는 너랑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으니까.”
“난.”
난 잠깐 떨어져 있고 싶은데, 하고 받아치려던 말이 목구멍이 턱 걸렸다. 해성은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알았어.”
그 모습을 어떻게 이해한 건지 김한별이 욕실 문을 열고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자 불안해진 건 되레 해성이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눈에 비친 간절함 혹은 절박함이 들킬까 곧장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밀폐된 공간에 들어오니 오히려 숨이 트였다. 벽에 기대 있던 해성은 훌렁훌렁 옷을 집어 던지고 샤워기 아래 섰다. 빨리, 어서 빨리 김한별과 있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해성이 아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러니 그 방법을 쓰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뒤엉킨 머리에 눈이 뜨끈해졌다. 해성은 찬물을 뒤집어써 혼란을 씻어 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먼저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니까. 늘 그랬던 것처럼.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김한별이 더 빨랐다. 침실로 들어선 해성은 침대에 앉아 있는 김한별을 보고 터지는 침음을 삼켰다.
해성이 멀뚱히 서 있자 허리에 타월만 두른 채 침대에 앉아 있던 김한별이 일어났다. 그러고는 해성에게 다가와 손을 잡고 이끌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해성을 침대에 눕힌 김한별은 허리에 두르고 있던 타월을 벗어 던지고 해성의 옆에 누웠다.
“샤워 가운도 잘 어울린다.”
곧장 이어질 행위에 긴장하고 있던 해성이 옆으로 누워 턱을 괴고 저를 보는 김한별을 약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내 사이즈라 너한테 약간 큰 것도 귀여워.”
평소처럼 나른한 목소리로 헛소리를 늘어놓은 김한별이 이불을 해성의 턱까지 끌어 덮어 주고 가슴팍을 토닥거렸다.
“뭐 해?”
“나해성 재우려고.”
“안 해?”
“응.”
“….”
“나야 당연히 하고 싶지. 언제나, 늘, 항상.”
해성이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자 김한별이 해성의 입술에 쪽, 키스했다.
“그래도 멘탈 탈탈 털린 나해성, 쉬게 하는 게 우선이니까.”
평연하게 이어지는 말에 해성은 뒤통수를 후려 맞은 기분이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섹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자신을 인지한 탓이었다.
대체, 자신은 뭘 하고 있는 걸까.
아니, 이동우는… 제게 무슨 짓을 했던 걸까. 무슨 짓을 했기에 자신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이동우를 좋아했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했다.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다 했다. 발을 디디고 있는 길이 끊어진 철로 위라는 걸 알면서도 뒷걸음질 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등신이라도 이동우와의 관계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좋아하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뭐, 뭐야.”
해성은 가운 안으로 들어와 가슴을 세게 거머쥐고 만지작거리는 손을 잡아 멈췄다.
“안 한다며.”
김한별이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말끝이 기어들어 갔다.
“아니, 내가 생각해 보니까.”
잠시 멈췄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손바닥 아래서 굴려지는 젖꼭지가 점차 단단해지는 느낌이 지나치게 선명해 해성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머릿속에 휘몰아치던 이동우에 대한 온갖 감정이 한여름, 뜨거운 길바닥 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힘없이 증발되었다.
“나해성이 그렇게 약해 빠진 남자도 아닌데.”
김한별이 가운을 헤집고 그 사이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 정도 가지고.”
젖꼭지를 강하게 흡입하고 혀로 그 위를 진득하게 핥았다.
“막, 하아, 기죽고, 그럴 리가, 없잖아?”
아예 해성의 몸통을 틀어쥔 채 가슴 전체를 물고 빠느라 김한별의 말이 뚝뚝 끊어졌다.
“이럴 거면서… 무, 읏, 슨.”
“그러게 이럴 거면서, 무슨.”
가슴 중앙에 얼굴을 묻은 김한별이 목을 울리며 웃었다. 그러다 해성이 다리를 벌리자 능숙하게 그 사이를 차지하고 앉았다. 무릎을 세운 채 팔꿈치로 상체를 든 해성이 저를 올려다보자 김한별이 혀로 제 입술을 핥았다.
“너 때문에 진짜 미치겠어.”
“마찬가지야.”
“….”
“어쩌다….”
아닌 게 아니라 해성은 정말 김한별 때문에 미칠 거 같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과 방식이 김한별에게는 맞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해성이 싫었다. 거부 반응이 일었다. 이동우와 했듯 김한별과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섹스를 수단으로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 수단에 순수한 열망이 스몄다.
한 손으로 김한별의 목을 끌어온 해성이 새까만 눈을 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너 같은 걸 만나서.”
정말 어쩌다 김한별 같은 걸 만났을까. 어느새 김한별에게 이렇게까지 마음을 줘 버린 걸까.
진심을 다한 말에 입술을 휜 김한별이 해성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고 속삭였다.
“좋지?”
그러고는 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달려들었다. 지금까지 여유를 부리던 것이 거짓인 듯 해성의 혀를 빨고 몸을 만지고 허리를 쳐올리는 동작은 난폭하기까지 했다. 단숨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해성 역시 김한별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혀뿌리가 뽑히기라도 할 듯한 힘에 허리를 들썩거리자 허벅지 안쪽을 주무르던 손이 위로 올라와 고환 아래를 죽, 긁었다. 이어 손가락이 구멍을 뚫는 것처럼 쑤시고 들어왔다.
파르르, 몸을 떠는 해성의 머리를 잡아 고정한 채 젖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타액과 숨을 모조리 빨아 마시며 김한별은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안으로 쳐들어온 손가락은 곧장 어느 한 지점을 짓이겼다.
해성은 고개를 돌려 밭은 숨을 급하게 내뱉었다.
“하, 하으, 하…으…!”
턱 끝까지 차오른 호흡을 감당하느라 김한별이 어떤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김한별의 어깨를 잡고 신음하던 해성은 다급하게 한 손으로 제 성기를 잡고 흔들었다. 쿠퍼액이 김한별이 물고 빨아 부은 가슴팍까지 튀었다.
사정감이 한계까지 차올랐다. 뿌리부터 기둥을 빠르게 훑으며 허리를 들썩이던 해성이 허겁지겁 부푼 귀두를 움켜쥐었을 때였다. 안을 후비던 손가락이 단번에 빠져나갔다. 상황도 잊고 어리둥절한 눈으로 김한별을 바라보던 해성의 달아오른 눈매가 와락, 구겨졌다.
손가락이 빠져나가자마자 다물린 입구에 귀두를 댄 김한별이 강하게 허리를 튕겼다. 쑥, 빨려 들어온 귀두 때문에 입구가 공기도 통하지 않을 정도로 틀어막혔고 해성은 그 순간 사정했다.
“읏!”
사정을 하며 그 반동으로 힘이 들어간 구멍이 성기를 죄자 김한별은 해성의 귓바퀴를 입에 머금고 흡입했다.
“쌀 뻔했어.”
고저 없는 목소리를 해성의 귓가에 흘려 넣은 김한별이 성기를 안으로 미끄러트렸다. 안을 억지로 벌리고 들어오는 성기에 해성이 하얀 이불만 움켜쥐고 벌벌 떨자 김한별이 그 손을 떼어 내 제 목덜미에 감았다. 성기가 턱에 걸리듯 덜컥거릴 때마다 김한별은 사납게 허리를 쳐올려 끝끝내 뿌리까지 안에 박아 넣었다.
맹렬한 추삽질이 이어졌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 같았다. 안을 짓이기는 성기에 팽창된 허벅지 근육이 덜덜 떨렸다. 사정 후 늘어져 있던 성기가 울컥 쿠퍼액을 뱉어 내며 기립하기 시작했다.
잠시 움직임을 멈춘 김한별이 시선을 내려 흥분으로 색이 진해진 해성의 성기에 시선을 못 박고 있다가 느릿느릿 성기를 빼냈다. 그리고 다시 뽑혀 나간 성기가 처박히고 또 처박히기를 반복했다.
“하악! 하아… 김, 김, 한별…아!”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발끝이 오그라든 채 경직되었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성기가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가는 느낌에 몸서리를 치다가, 다시 단번에 꽂혀 들어와 안쪽 도톰한 부위를 찍어 누를 때에는 물 밖으로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만 빠끔거렸다.
“나해성.”
나직이 해성의 이름을 읊조린 김한별이 갑자기 움직임을 빨리했다. 거칠고 과감한 허리 짓에 해성은 아랫배가 빼곡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결국 애처롭게 흔들리던 진분홍 성기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음에도 진한 정액을 울컥 토해 냈다. 그 순간에도 안에서는 핏줄을 퉁퉁 튕기는 성기가 거세게 용두질 쳤다.
축 늘어지는 해성을 받아 들어 눕힌 김한별이 해성의 턱을 잡아 고정해 억지로 저를 보게 만들었다.
“난 절대 너 안 놓쳐.”
무표정하던 얼굴 위, 입술이 뒤틀리는가 싶더니 안쪽에 뜨끈한 기운이 번졌다. 고집스러운 눈매가 사정을 하는 순간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이어 길게 숨을 내쉬고는 쓰러지듯 엎어졌다.
“울면서 사정해도, 절대 안 놔줘.”
경고하듯 낮게 중얼거린 김한별이 실실 웃으며 해성의 뺨에 제 뺨을 비볐다.
“입으로 사정해도 안 봐주고, 아래로 사정해도 안 봐주고.”
“미…친놈.”
“응. 난 나해성의 미친놈이야.”
“미, 친… 야!”
고장 난 기계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던 해성이 안에서 다시 팽창하는 성기에 아연해져 화급히 김한별을 불렀다.
“응.”
하지만 그런 해성과는 다르게 김한별은 태연한 낯으로 해성을 보며 허리를 쳐올렸다.
“미친놈은, 정력이, 좋다는 말, 들어, 봤어?”
허리 짓에 따라 끊기며 들려오는 말에 해성은 재빨리 팔을 뻗었다. 그러자 김한별은 기꺼이 그 품으로 뛰어들었다.
“쯧.”
한별은 지쳐 잠든 나해성을 보며 작게 혀를 찼다. 참았어야 했는데 자제가 되지 않았다. 나해성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자제가 되지 않긴 했다. 그중 그 쓰레기 새끼를 만나고 와서 헛발질을 하고 있을 때는 더 자제가 안 되었다.
충격받은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꼴을 봐 주고 있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 쓰레기와의 지난날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 뻔하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나해성이 저와 그 쓰레기를 동급 취급할 때에도.
특히나 그 쓰레기 새끼를 달래거나 붙잡을 때나 했을 행동을 제게 할 때에는 정말 이성이 모조리 휘발되는 기분이었다.
나해성은 그 쓰레기와의 관계가 꽤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쓰레기와의 연애사는 다 거기서 거기였다.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말은 즉, 그 쓰레기가 나해성을 어떻게 대했고 어떤 취급을 했는지 머릿속에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고 정확하게 그려진다는 말이었다.
시발새끼.
한별의 입술이 죽 찢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깜찍한 나해성은 그 빈약한 상상력으로 저와의 관계 역시 멋대로 점치고 있었다.
“난 네가 아니야.”
한별은 색색거리며 약한 숨을 흘려 내는 입술 위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실수가 객기 같은 게 아니라고.”
입술 위를 오가는 손길이 간지러웠는지 나해성이 눈가를 찌푸렸다.
그나마 나해성이 그 새끼와의 일을 끔찍해하는 건 다행이었다. 애틋한 추억이나 덕분에 더 성장할 수 있었다, 뭐 이런 위안을 하고 있으면 더 돌아 버릴 것 같았으니까.
한별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바라보다 일어났다. 침실을 벗어나 나해성이 사용한 욕실로 갔다. 세면대 위에 곱게 접힌 옷가지에서 휴대폰을 찾아낸 한별은 거리낌 없이 휴대폰 잠금을 해제했다. 나해성 휴대폰 비밀번호 따위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0000.
“귀엽기는.”
남의 휴대폰을 뒤지는 손놀림에는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다. 단출한 연락처 속에 이동우라는 이름은 없었다. 나해성이 그 쓰레기의 번호를 저장하지 않았다는 것에 기울어져 있던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연락처가 아닌 최근 통화 기록에서 쓰레기의 번호를 찾아내 제 휴대폰에 저장한 한별은 나해성의 휴대폰을 있던 곳에 되돌려 두고 화장실을 나왔다.
침실로 돌아가 여전히 곤히 잠든 나해성의 옆에 누워 빤히 나해성을 응시하다 해쓱한 뺨을 콱, 깨물었다.
“으…응.”
그러고는 눈을 감은 채 인상을 쓴 나해성에게 엄하게 속삭였다.
“깨자마자 내 번호부터 외우자, 형.”
* * *
“그만하라고 했다.”
해성은 지하철 계단을 오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저번 김한별의 집에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가 깼을 때 바짝 얼굴을 들이민 김한별은 대뜸 열한 자리의 숫자를 내뱉고는 해성에게 따라 하라고 했다. 잠이 덜 깬 눈을 찌푸리고 쳐다봐도 막무가내였다. 엉겁결에 세 번 정도 따라 했을 때 해성은 그게 김한별의 휴대폰 번호라는 걸 알았다. 그 이후로 김한별은 틈만 나면 해성에게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말해 보라고 시켰다.
지상으로 연결되는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선 해성은 오른쪽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왼쪽으로 옮기고 뜨끈거리는 오른쪽 귀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김한별이 도통 전화를 끊을 생각이 없어 보여 해성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반강제적으로 외우게 된 번호를 다시 한번 읊었다.
“됐어?”
해성은 응, 하는 만족스러운 목소리에 헛웃음을 지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김한별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사라지자마자 해성의 얼굴에서도 희미한 웃음이 사그라들었다.
걸음을 옮기려던 해성은 가만히 제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긴 패딩을 입을 수 없는 날씨였다. 괜히 입고 있는 검은 가디건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어 냈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카페에는 전만큼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1층에서 음료를 받아 이번에도 제일 꼭대기 층으로 올라간 해성은 저를 반기는 인물에 주춤했다.
“해성아.”
당연히 이번에도 늦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동우가 전에 해성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해성은 소리를 죽여 숨을 몰아쉬고 이동우에게 다가갔다. 1, 2층과 마찬가지로 3층에도 군데군데 혼자 공부를 하는 사람뿐이라 주변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사람이 많으면 많은 대로 신경 쓰이고 사람이 적으면 이동우와의 대화 소리가 다른 사람 귀에도 들릴까 신경 쓰였다. 이동우와 있으면 모든 게 다 불편했다.
“나와 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근데 안 물어봐?”
“네?”
시선을 내리깔고 기계적으로 답하던 해성이 살짝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이동우가 피식 웃었다.
“이 시간에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직장인은 몇 없을 텐데?”
“아….”
그제야 인식한 듯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딱히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이동우의 눈빛이 낮게 출렁거렸다.
“내 소식 어디까지 알고 있어?”
“그냥… 뭐.”
“결혼했다는 거 알고 나서 바로 마음 정리한 거야? 번호도 바꾸고?”
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해성이 자취방을 정리한 건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 군대까지 다녀오고 졸업을 하고 박재관의 도장에서 일을 시작하고. 해성이 버텨 낸 시간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네.”
“그랬구나.”
해성의 말에 이동우가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해성아.”
“네.”
“김한별이라는 애 때문에 그래?”
“네?”
뜬금없이 언급된 이름에 해성이 크게 동요했다. 이동우가 언젠간 김한별을 걸고넘어질 걸 알면서도 그랬다. 이 테이블 위에 김한별의 이름을 올려 두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동우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건 더욱 싫었다. 저도 저 이름을 부르는 데 꽤나 시간이 걸렸기에.
“걔도 게이는 아니지?”
해성은 벌어져 있던 입을 다물고 이동우를 빤히 응시했다.
“그래, 그런 거 같더라. 나이도 어리고 잘생겼고. 또 그때 보니까 집도 괜찮게 사는 거 같고. 해성이 너, 충분히 흔들릴 만해. 그런데 해성아. 그런 마음이 얼마나 가겠어? 1년? 아니, 길어야 반년 정도겠지. 너도 그걸 알아서 망설이는 거잖아, 그치?”
“….”
“굳이 결말이 뻔한 일에 시간 낭비할 필요 없잖아, 해성아.”
뭐 하나 틀린 게 없는 말이었다. 해성 역시 줄곧 그렇게 생각했고 김한별에 대한 마음을 인정한 후에도 계속해서 각오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맞는 말인데… 전부 다 맞는 말인데.
늘 그랬듯 저를 보는 눈빛은 자신감에 차 있었고 입가엔 나른한 웃음이 맺혀 있었다. 나긋하고 다정한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그런데 어째서지?
문득 의아해졌다. 그래서 이상했다.
어째서. 그런 이동우가, 그저 가지고 싶은 걸 얻기 위해 떼를 쓰는 아이같이 느껴지는 거지?
“괜히 시간 낭비, 감정 낭비 할 필요 없잖아. 너도 나이가 있는데. 그치, 해성아?”
“네.”
해성은 순순히 답했다. 제 처지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게 바로 자신이었다. 의도가 뻔한 이동우의 말에 새삼 타격을 받을 일도 없었다.
“할 말은 다 한 거예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힐끗, 이동우를 본 해성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한 말을 잊지 않고 전했다.
“앞으로도 할 말 있으면 오늘처럼 밖에서 따로 봤으면 해요. 도장이나 집 근처 말구요.”
차에 탄 이동우는 넥타이를 끌어 내리며 입술을 비틀었다.
“하, 시발. 나해성.”
처음 집으로 찾아갔을 때만 해도 이동우는 만족했다. 나해성의 반응은 딱 제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경악으로 크게 뜨인 눈과 서서히 촉촉해지는 눈망울. 하얗게 질린 얼굴과 달싹거리던 붉은 입술. 벌벌 떨면서도 나해성은 제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자신이 나해성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여전하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자 전율까지 일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당연히 나해성이 곧장 저를 받아 주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나해성이라도 어느 정도 고민하는 척은 해야 할 테니까. 그렇다고 그게 그리 오래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나해성이다. 자신의 숨소리 하나에도 어쩔 줄 몰라 엉덩이를 들썩이던 나해성. 거부나 거역이라고는 모르던 나해성.
그랬는데.
나해성이 저를 보는 눈이 점차 낯설어졌다. 나해성은 한 번도 저를 저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저렇게.
건물 지하 주차장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동우가 막 시동을 걸었을 때였다. 조수석에 던져 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 위에 뜬 저장되지 않은 번호를 힐끗 본 후 그대로 차를 출발시키려고 할 때였다. 진동이 멈추고 부재중 알림 아래 메시지 하나가 튀어 올랐다.
010-XXXX-XXXX
받지? 나 김한별인데
기가 찬 메시지에 운전대에 올려 두었던 손이 휴대폰을 낚아챘다.
“뭐야?”
-뭐긴 뭐야. 김한별이지.
“너랑 말장난할 시간 없어.”
-나도 너 같은 쓰레기랑 말 섞을 시간 없어.
늘 느슨하던 눈매가 짜증으로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내 저답지 않게 유치한 대응을 한 것 같아 호흡을 가다듬고 시트에 몸을 기댔다.
“왜? 불안해?”
-….
직설적인 물음에 건방진 놈이 입을 다물었다.
“해성이가 나 만나면 불안한 거야? 그래서 이래?”
-….
“아직 어려서 참을성 없는 건 알겠는데.”
-끝까지 나이 타령은.
굳은 목소리로 욕이나 할 줄 알았던 놈이 웃음을 터트리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뭐, 그래요. 나이 많아서 좋겠어요.
“….”
-와, 근데 이거 기분 신선하다. 내가 학교에서는 형, 형 소리 들으면서 제법 괜찮은 선배 노릇을 하고 있거든. 근데 여기선 아주 신생아 된 기분이야?
“할 말이나 해. 할 말 있으니까 내 번호 몰래 훔쳐서 전화한 거 아니야?”
-응. 근데 딱히 할 말이 있어서 한 건 아니고.
재킷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던 이동우가 결국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식으로 낭비할 시간 피차 없다고 하지 않았나?”
-응. 그냥 너 짜증 나게 하려고.
“….”
-네가 해성이 형이랑 둘이 만날 때마다 너한테 전화해서 이렇게 짜증 나게 할 거야. 전화 안 받으면 메시지 보낼 거고, 차단하면 다른 번호 팔 거고.
“대단히 한가하시네? 보기보다 유치하고?”
-너처럼 정신 연령에 맞지 않게 어른인 척하는 것보다는 낫지.
“….”
-유치하고 미성숙한 열등감 덩어리 주제에 그걸 쉰내 나는 말투로 위장하려고 하는 거, 남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봐?
“….”
-그리고 난 네 말대로 유치한 어린놈이라 그런지 너랑 해성이 형 둘이 만나는 거, 속이 뒤틀려서 이렇게라도 풀어야겠거든.
“네 입장에서 굳이 이렇게 에너지 낭비할 일 아니지 않나?”
이동우가 조금은 진심으로 물었다. 고작 나해성 때문에?
“게이랑 뒹군 게 그렇게 재밌었어? 너 정도면 얼마든지.”
-쯧쯧.
김한별이 낮게 혀를 차며 이동우의 말을 끊어 냈다.
-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
-말해 줘도 이해 못 할 등신 새끼한테 낭비할 에너지는 내가 없고.
의도적으로 한 번 말을 끊었던 김한별이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삽질이나 계속해, 넌.
“….”
-아무리 삽질해도 건지는 건 없겠지만.
제멋대로 시작된 통화는 제멋대로 끝이 났다. 이동우는 즉시 차를 몰아 답답한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거슬리게 하는 것이 오만하고 시건방진 도발 따위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해성은 끝내 저에 대해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 * *
“오셨습니까.”
도장으로 들어서던 해성은 멈춰 서 저를 향해 인사하는 최지민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너, 복학한 거 뻥이지?”
“아닌데요.”
“학교 안 가냐?”
“가죠?”
“근데 왜 이 시간에 도장에 있어?”
“오늘은 강의 하나 있는데 그거 휴강 돼서요.”
“그러면 친구들이랑 놀지, 왜.”
“도장 오는 게 더 재밌어요.”
해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최지민의 말을 뒤로하고 관장실로 갔다. 도복 위에 걸치고 있던 후드 집업을 행거에 걸고 나가자 박재관이 도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이, 최지민 왔냐.”
“네.”
“복학한 애가 이 시간에 여기 있는데 너무 태연한 거 아니야?”
“헉! 그러네! 너, 왜 여기 있어!”
박재관은 해성이 지적하고 나서야 최지민에게 삿대질을 하며 깜짝 놀랐다.
“뭐 하냐, 진짜.”
도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출근을 하면 박재관이 꼬치꼬치 캐물을까 봐 일부러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는 수고를 했는데 저런 거 보면 도복을 입든 스키복을 입든 상관없었을 것 같았다.
“근데 관장님한테 그런 친구분이 있는지 몰랐어요.”
“…그런 친구분?”
최지민이 말하는 ‘그 친구분’이 누구인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박재관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해성은 믹스 커피를 타 매트리스로 가 앉았다.
“네. 그때 고깃집.”
“왜, 인마. 나도 친구 있어.”
박재관이 다시 목소리를 높여 말투를 가볍게 만들었다.
“네, 그쵸. 근데 그분 무슨 스포츠 에이전시? 그런 데서 일하더라구요?”
“아… 그게.”
박재관이 슬쩍 해성의 눈치를 봤다.
“그… 걔 아버님이 운영하시는 곳일 거야.”
“오.”
“뭐가 또 오, 냐. 그나저나 그거 어떻게 알았어?”
“그날 고깃집에서 명함 주던데요, 저한테?”
“명함?”
“네.”
“그거 어쨌어? 내놔.”
“버렸는데.”
“엥?”
최지민에게 손바닥을 내밀고 약간 험악하게 말하던 박재관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아, 죄송해요. 그때 테이블 기름 닦던 휴지랑 같이 버렸어요. 필요하신 거예요? 친구분한테 달라고 하세요.”
“됐다.”
“네.”
스포츠 에이전시에서 일하고 있구나. 이동우의 아버지가 사업을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스포츠 관련 사업인지는 몰랐다. 그러고 보니 이동우는 대학을 다닐 때 종종 자신은 졸업을 하면 바로 일을 해야 한다며 귀찮은 티를 내곤 했었다. 하지만 그 말과는 다르게 대학 졸업 후 그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즈음 이동우의 기분이 좋지 않아서 덩달아 해성까지 저기압이었다.
“나해성.”
“어, 어?”
종이컵을 물고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해성은 갑자기 저를 부르는 박재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뭘 그러고 앉아 있어! 창틀에 먼지 안 보이냐?”
허리에 손을 얹고 눈을 부라리는 모습이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해성은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박재관의 노력이 고마웠지만 이상할 정도로 박재관과 최지민의 대화 속 이동우에 관한 이야기가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저녁 식사를 하기 전 관장실로 들어가 휴대폰을 확인했다. 오후 내내 김한별이 보내온 메시지 중간중간엔 이동우의 메시지도 끼어 있었다. 조만간 또 보자며 다음에는 꼭 식사를 하자는 메시지에 해성은 망설이다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곧장 김한별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별 시답지 않은 내용만 한가득이었다. 제가 왜 김한별의 학교 잔디 퀄리티에 대해 알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해성은 저도 모르게 메시지 창을 가득 채운 모든 메시지를 정독했다.
그러다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책상 의자에 앉아 고개를 젖히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저….”
휴대폰을 쥔 채 죄 없는 입술만 뜯고 있던 해성이 고개를 돌리자 박재관이 관장실 입구에 서서 조심스럽게 저를 불렀다.
“해성아….”
“어, 밥 왔어?”
“그게….”
해성은 느슨해진 몸을 바로 세웠다. 손끝이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박재관이 곤란해하는 모습 같은 건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는데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워 보여 심장이 철렁했다.
“형.”
자리에서 일어나 박재관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
“이동우야? 이동우가 형한테 뭐라고… 아니, 무슨 짓이라도.”
“아니, 아니야.”
혹시나 저에 대한 말을 동네에 흘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박재관이 그런 해성의 말을 끊고 어깨를 붙잡았다.
“나해성.”
“어.”
괜히 과도한 반응으로 박재관을 더 불편하게 할 수는 없었다. 해성은 주먹을 말아 쥐고 정신을 다잡았다.
“그… 어머님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하지만 이어진 말에 보람도 없이 다잡은 정신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 * *
‘어머님이 오늘 운전 중에 사고를 당하셨대. 심각한 건 아닌데. 아버님이 지금 해외 출장 중이시라….’
어떻게든 말을 고르려는 박재관의 노력은 부질없었다. 박재관의 입에서 나오는 ‘어머님’이라는 단어에 해성의 심장이 쥐어 뜯겼다. 고개를 떨군 채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저를 보며 박재관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알면서도 해성은 그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숨조차 잘 쉬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쉬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해… 해성아.’
‘…엄마가.’
간신히 한마디 내뱉은 해성의 입이 다시 굳게 다물렸다. 흔하디흔한 단어가 지독할 정도로 낯설었다.
‘나해성.’
박재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정신 차려.’
‘….’
‘당장 집으로 가. 네 눈으로 직접 상태 보고 보살펴 드려.’
그러고는 냉정할 정도로 단호하게 해성을 내쫓았다. 복도에 멍하니 서 있던 해성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계단을 밟고 뛰기 시작했다.
엄마가, 엄마가 다쳤다니. 얼마나, 왜.
길가로 나와 무작정 택시를 탔다. 중학교 때부터 산 아파트 주소가 무의식중에도 줄줄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오늘따라 택시가 느렸다. 길이 유난히 막혔다. 입이 바짝 말라 왔다. 아까 박재관이 한 말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형이 뭐랬더라. 아,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했지. 엄마, 엄마. 아빠는 왜 하필 이럴 때 출장을 가서.
하지만 그 다급함과 조급함은 막상 아파트 앞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멋대로 건너뛰었던 시간들이 다시 빼곡히 들어차 해성을 옥죄어 왔다. 그리고.
팔에 깁스를 한 엄마가 아파트 정문에 서서 해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재관이 엄마와 연락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 구실은 하고 산다며 1년에 두어 번 안부 인사 겸 대신 소식을 전했을 거다. 하지만 그것조차 박재관의 도장에서 일을 시작하고 난 이후였다. 그 이전에는 들을 수 있어도 듣기 싫었을 거다. 부모 마음에 대못을 박은 것으로 모자라 그 인연조차 저버린 아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았을 거다.
마치 발이 바닥에 박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다가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었다.
늘 저에 대한 신뢰와 애정, 그리고 기대가 가득했던 눈이 실망과 고통, 의심과 혐오로 일그러지는 걸 목격한 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해성아.”
짧게 깎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깊은 자국을 만들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고 버티던 해성이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들어가자.”
눈을 뜨자 어느새 한 발자국 정도만 남겨 두고 다가온 엄마가 저를 보고 있었다.
“들어가.”
들어가자니. 어딜. 자신이 어딜 감히 집에 발을 들일 수 있을까.
“아파트 입구에서 떠들 셈이야?”
해성이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하자 차가운 음성이 더욱 경직되었다.
“…괜찮은 거면.”
“나해성.”
엄마의 상태가 다행히 그리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미친놈.
해성은 스스로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할 수만 있다면 침도 뱉고 싶었다.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팔 전체에 깁스를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해성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감히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그런 해성의 시야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오는 슬리퍼를 신은 두 발이 보였다. 작은 발에 비해 지나치게 큰 슬리퍼. 해성은 저 슬리퍼의 주인을 잘 알고 있었다. 저 슬리퍼의 주인은 끝끝내 버티는 아들의 뺨을 치고 돌아섰었다.
“안 괜찮아.”
“….”
“하나도 안 괜찮아. 들었을 거 아니야. 오늘 엄마.”
줄곧 딱딱하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너무 아프고 무서웠어. 무서워 죽겠는데, 너무 아픈데.”
“….”
“네 생각밖에 안 났어. 우리 해성이 생각만 났어. 정말 너무 보고 싶어서.”
시선을 들자 어느새 온통 젖은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왜 이렇게 말랐어.”
저를 보는 눈이 마치 아직 어린 아이를 보는 듯했다. 해성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가요. 일단 들어가요.”
겨우 걸음을 떼고 다가가 조심스럽게 엄마를 부축했다. 일단 뜻하지 않은 사고로 놀란 사람을 안정시키고 다친 몸을 쉬게 하는 게 우선이었다. 자신의 비겁하고 저열한 감정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러자 엄마가 해성을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해성은 저를 향한 시선을 피하며 정면만 보고 걸었다.
수년 만에 집에 들어선 해성은 의외로 담담했다. 불도 켜지 않고 곧장 안방으로 향했다. 엄마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앉히고 주방으로 가려다 붙잡혔다.
“물 가지고 올게.”
존댓말을 해야 하는지, 이전처럼 편하게 말을 해야 하는지 짧은 순간 고민하다 내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뭐라 말을 하려던 엄마가 입을 다물고 해성을 놓아주었다.
해성은 주방으로 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곧장 안방으로 갔다. 의식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려 하지 않았다
“약은 없어?”
해성이 묻는 말에도 엄마는 대답하지 않고 해성을 바라만 보았다. 해성의 얼굴을 배회하던 시선이 해성이 입고 있는 도복을 맴돌았다.
“약, 먹어야 하잖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거듭 말하자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해성은 그런 엄마를 도로 앉히고 말했다.
“내가 가져올게.”
“식탁에 있어.”
“응.”
방을 나온 해성은 이번에도 정면만 보며 주방으로 가 식탁 위에 놓인 약봉지를 들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해성이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굳게 닫힌 어느 방문 하나를 무심히 바라보다 돌아섰다.
“갈 거야?”
침대에 누운 엄마는 많이 지쳐 보였다. 해성은 약봉지와 빈 물컵을 들고 침대맡에 서서 답했다.
“가야지.”
“나해성.”
“자는 거 보고 갈게.”
갑작스러운 재회를 했다고 해서 어떤 극적인 변화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그간의 시간과 감정이 불현듯 녹아 없어지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걸 기대할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았다.
“자.”
엄마는 아무 말 없이 해성을 보고 또 보았다. 그러다 피로를 견딜 수 없었는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해성은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엄마를 지켜보다 방을 나왔다.
약봉지는 식탁 위에, 컵은 싱크대에 두고 안방 문 앞에 앉았다. 그러자 긴 복도를 두고 마주한 거실과 주방, 그 너머 방문들과 현관까지 집 안이 한눈에 보였다. 어둠이 눈에 익어 아까보다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이 더욱 선명해졌다.
가족사진이 걸려 있던 소파 위, 빈 벽에 멍하니 시선을 두고 있던 해성은 제 바지 주머니에서 윙윙거리며 몸을 떠는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에서 쏘아진 빛에 한쪽 눈을 찡그리다가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벅터벅 걸어 어느 방 앞으로 간 해성은 안방 문을 한 번, 제 앞에 선 방문을 한 번씩 번갈아 보고는 조심스럽게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문은 쉽게 열렸다. 그러나 해성은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열린 문틈을 잠시 물끄러미 응시했다.
“여보세요.”
-형.
해성은 그 목소리가 마치 등이라도 떠민 듯, 그제야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떤 가구도, 물건도 없이 텅 비어 있는 방 한가운데 서서 답했다.
“어.”
-지금 갈까?
맥락 없는 말에 웃음이 났다.
“내가 어디 있는 줄 알고?”
-왜, 또 부산 갔어?
제 목소리가 생각보다 무덤덤해서였을까? 저를 부르던 낮은 음성이 슬쩍 장난스러워졌다.
-난 어디든 상관없는데.
“됐다.”
-내가 안 됐는데.
“한별아.”
-….
툭툭, 말장난을 치던 김한별이 정작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는 응답이 없었다.
“다음에.”
-….
“다음에 말해 줄게.”
김한별을 실망시킬 일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지만, 이미 대강 상황을 파악했을 김한별에게 숨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남의 입으로 듣는 것보다야 저에게서 듣게 하는 게 나았다.
-무슨 소리야?
잠시 침묵하던 김한별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뭘 말해 줘?
“….”
-너 보고 싶어서 잠이 안 와 가지고 전화한 건데.
“….”
-하여튼 사연 많은 나해성.
“….”
-매력 있어. 섹시해.
해성은 귓가로 흘러드는 나른한 목소리를 들으며 창밖의 까만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맙네. 좋게 봐 줘서.”
진심이었다. 말도 안 되게 좋게 봐 줘서, 과분할 정도로 좋게 봐 줘서, 고마웠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가고 싶지만 참을게.
“그래. 그것도 고마워.”
-차라리 욕을 하는 게 어때?
해성은 피식 웃고 통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먼지 하나 없는 빈방을 빙,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전화를 끊은 한별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건물 벽에 기대선 한별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다는 걸 느낀 건 하루 동안 보내 놓은 메시지를 확인한 나해성이 답장을 보내지 않았을 때였다. 나해성은 은근히 무른 구석이 있어서 의미 없는 메시지에도 꼭 답장을 보냈다. 일을 하느라 늦게 답장을 보낼 때에는 항상 일하느라 지금 봤어, 같은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한별은 더 시도 때도 없이 메시지를 보내 두었다. 어차피 나해성이 언제 쉬고 언제 식사를 하는지 다 알고 있어서 시간에 맞춰 답장을 기다리면 되었다.
그런데, 오늘 메시지를 확인한 나해성에게서 한 시간이 지나도록 어떤 연락도 없었다.
나해성이 퇴근할 때까지 시간이나 때울 겸 동기들과 학교 근처 술집에 와서도 계속 휴대폰만 주시하던 한별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대상은 나해성이 아니었다.
형 이따가 관장님이랑 해성이 형이랑 다 같이 맥주나 한잔할까? 내가 쏠게
-형 이따가 관장님이랑 해성이 형이랑 다 같이 맥주나 한잔할까? 내가 쏠게
나해성과 다르게 최지민은 곧장 답장을 보내왔다.
최지민
사범님 일 있어서 먼저 퇴근하심 담에 마시자
-사범님 일 있어서 먼저 퇴근하심 담에 마시자
일, 일이라.
해성이 형이? 무슨 일?
최지민
집안일인 거 같던데 나도 잘 모름
한별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최지민이 이 이상 무언가를 알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안다 한들 남 얘기를 떠벌리고 다니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대신 한별은 도장 마지막 수업이 끝났을 무렵 술집에서 나와 박재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갑게 전화를 받은 박재관에게 한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해성 지금 어디냐고.
나해성의 보호자 노릇을 자처하고 있는 박재관이 저와 나해성 사이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겁 많은 나해성을 위해서 끝까지 아닌 척할 수도 있었지만 은근슬쩍 떠보거나 적당히 돌려 말할 여유가 한별에겐 없었다.
그 ‘집안일’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해성이 오랜만에 집에 갔으니까 급한 일 아니면 다음에 연락하라는 박재관의 말에 한별은 제 짐작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시발.”
입매만 끌어 올려 웃으며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을 붙인 후 다시 휴대폰을 귀로 가져다 댔다.
-늦은 밤에 통화할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태연한 척하는 목소리가 같잖았다.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누구보다 안달이 나 있으면서 어떻게든 여유로운 척, 유리한 척하는 꼴이 역겨웠다.
“너, 나해성 가족이랑 인연도 끊게 만들었어?”
침묵하는 상대에 한별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그래서 만족했어? 우월감 느끼면서?”
-아니라고는 못 하지. 해성이가 날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그 정도까지 할 줄은 몰랐거든.
“지랄하네. 이 씹새끼가.”
-….
“네가 그렇게 시켰겠지, 교묘하게. 불쌍한 척, 초연한 척, 갖은 척을 다 하면서 또 가증을 떨어 댔겠지.”
-….
“이거 진짜 상종 못 할 좆같은 새끼네.”
실실 웃으며 말을 씹어 뱉은 한별은 깊게 연기를 빨아 마셨다.
“잘 들어. 이 쉰내 나는 이혼남 새끼야.”
-….
“넌 앞으로 나해성 그림자도 못 밟아. 얼굴 들이밀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좋아. 도장이든 나해성 집이든 한 번만 더 그 냄새 나는 낯짝 들이밀면 내가 그대로 뭉개 버릴 거니까.”
-….
“아무리 멍청해도 이 정도는 알아듣겠지.”
-글쎄. 이건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닌 거 같은데.
시발 새끼가 끝까지 허세를 부렸다.
“아니, 내가 끼어들 일이야. 그러니까 귓구멍 열고 잘 들어.”
-너.
“다시는 나해성 앞에 나타나지 마.”
간단하게 용건을 전한 한별은 전화를 끊고 길바닥 위, 얕게 고인 물웅덩이에 담배를 던졌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대기를 떠도는 먼지로 뿌연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울질? 시발, 좆까. 그 저울 내가 부쉈어.
저딴 새끼랑 같은 저울에 올라가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