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넌, 진짜.”
“너무 멋있지?”
온몸의 수분이 모조리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어디 수분뿐일까. 정액까지 탈탈 털렸다. 분명 소파에서 시작되었는데 어느새 해성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손끝에 힘조차 들어가질 않았다. 완전히 탈진한 해성과 달리 김한별은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해성이 저를 보며 눈만 끔뻑끔뻑하고 있자 김한별이 해성의 허벅지를 더듬으며 말했다.
“왜? 한 번 더 할까?”
“죽여라, 그냥.”
“좋으면서, 엄살은.”
끈적한 몸을 씻어 낼 기운도 없는 형편에도 해성은 김한별의 손을 슬쩍 밀어 냈다. 안 그러면 또 저 수작질에 말려들 것 같아서였다. 김한별은 옆으로 길게 누워 머리를 괴고 실실 웃고 있었다.
분명 웃고는 있는데. 그러니까, 쟤가 웃고는 있는데.
“있는 대로 성질났으면서 아닌 척하기는.”
웃는 낯 안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낮에 이동우를 만나고 뿌옇던 머릿속이 격렬한 움직임 후 오히려 맑아졌다. 그러자 김한별의 상태가 제대로 눈에 보였다. 하여튼 웃기는 놈이었다.
해성은 김한별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동우에 대해 아직 제대로 이야기해 주지 않았음에도 영특한 김한별은 이동우에 대한 모든 파악을 끝낸 모양이었다.
“너 혹시 나이 속인 건 아니지?”
“또 무슨 깜찍한 소릴 하고 있어?”
헛소리는 김한별 담당인데.
약간 신기한 마음에 떠오른 대로 주절거리던 해성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면 티가 나는 걸까? 이동우의 옆에 있으면. 아니다. 이동우가 나타나기 전에도 김한별은 저에 대해 제법 정확한 추측을 했었다. 그냥, 자신이 그런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그런 멍청한 선택을 했고 같은 실수를 반복했겠지. 저 같은 수준의 인간은 원래.
“나해성.”
한 칸, 한 칸, 습관적으로 저,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밟던 해성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아까 한 말 농담 아니야.”
“….”
“객기로 한 말도 아니고.”
“….”
“그 새끼가 나타나서 기뻐?”
기쁘냐고?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지쳐서, 도무지 더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나가떨어졌지만 그 후에도 계속 기다렸다. 그의 연락을, 그의 애원을.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그랬는데. 상상 속에서처럼 제 앞에 나타나 용서를 비는 그의 모습에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울면서 빌고 빌었던 모습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에게 다시 만나 달라 말하는 그가 어떻게 기껍지 않을까.
하지만.
해성은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게, 이 마음이 정상적인 것인지 모르겠다. 멍청한 저라서. 남자라면 환장을 하고 다리를 벌리는 저라서. 그의 말대로 남자에 눈이 멀어 가족이고 친구고 다 내팽개친 저라서 그런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나해성.”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해성을 건져 올린 건 이번에도 김한별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돼. 대신 한 가지만 알아둬.”
씩, 입꼬리를 올려, 예의 그 자신만만한 미소를 얼굴에 걸친 김한별이 해성의 입술을 검지로 톡 건드렸다.
“난 너 절대 안 뺏겨.”
“….”
“그 씹새끼든.”
“….”
“누구든.”
해성은 어느덧 제 마음을 가득 채운 그 얼굴을 하나하나 마음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뭘.”
“….”
“뺏기고 나발이야. 내가 물건이냐?”
해성의 말에 김한별은 시발, 물건이면 진작에 사서 내 집에 가둬 놨지, 하고 읊조렸다. 그러다 해성이 제 쪽으로 돌아눕자 김한별이 입을 다물었다. 해성은 뺨이 베개에 짓눌린 채 김한별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잘났다. 빈말로도 별론데, 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새삼스럽게 참 잘난 얼굴이었다. 그게 얼굴뿐일까. 저따위 때문에 이런 귀찮은 일을 감수하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다양하게 잘난 사람이었다, 김한별은.
“이동우랑은.”
그래서 더욱 이야기하고 싶었다. 일순 김한별과 있을 때마다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려서일지도 몰랐다. 그토록 김한별을 거부하고자 했던, 하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
김한별과 있을 때면 해성은 다시 그 열아홉으로 돌아가 버렸다. 지금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성숙해졌는지 따위는 다 사라져 버렸다. 그냥 미성숙한 열아홉 소년이 되어 버렸다. 그때의 마음이 얼마나 아물었는지, 그때보다 얼마나 성장했는지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은 여전히 서른둘의 어른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아직 한 뺨도 성장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죽어도 그런 척해야 했다. 시간이란 것은 그런 것이니까. 손으로 잡아 멈출 수 없는 것이니까.
해성은 마른침을 삼켜 버석하게 마른 목구멍을 적시려 시도했지만 역시나 부질없었다.
“동우 형이랑은.”
해성은 제 입에서 흘러나온 동우 형이라는 명칭에 팍, 일그러지는 김한별의 미간을 멀뚱히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때 다니던 입시 학원에서 만났어.”
김한별의 상상력과 기대에 맞게, 이동우를 설명하는 것은 해성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 *
해성은 자신이 이동우를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한 순간을 떠올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던 나날 중 하루였다. 학교를 마치고 학원 태권도장에서 훈련을 마친 후 위층 체육관으로 올라갔을 때, 그날도 이동우는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다. 늘 혼자인 적이 없던 그였다.
누군가 무슨 말을 하자 모두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다물린 입술 끝을 울려 웃던 이동우가 체육관 입구에 선 해성을 발견했다.
아.
운동으로 상기된 얼굴과 젖은 머리카락. 보기 좋게 벌어지는 입술과 잔뜩 휘어진 눈매. 이어 고개를 기울이고 저를 향해 손을 흔들던 그 모습. 반짝반짝 빛이 나던 그의 모습.
고통스럽고 후회스러웠던 나날들은 전부 흐릿한데 어째서 그때 그 모습만은 이토록 선명한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정말, 좋아했다. 이동우를. 자신과는 평생 상관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해낼 정도로 진심을 다해 좋아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뭐든 해 주고 싶었으니까.
마음 한 귀퉁이에서 솔솔 피어오르는 위화감이나 위기감 같은 것에서는 철저하게 등을 돌렸다. 아주 가끔씩 그가 제 옆에서 잠이 들면 그의 얼굴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훔쳐보고, 열 번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한 번 연락하고. 너무 보고 싶어서 몰래 찾아갔다가 돌아오고, 도저히 참지 못하겠어서 전화를 했다가 연결되지 않는 통화에 슬퍼하고.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외로워질 때마다 적선하듯 던져 준 친절을 부여잡고 버텼다.
그게 잘못된지도 모를 만큼. 그렇게 좋아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 만큼 신기할 정도로 아주 많이, 온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내가.”
해성은 고개를 돌려 김한별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김한별은 저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저 역시 김한별에게 호감이 있다. 이를 부정할 단계는 진작에 지났다.
“형을 많이 좋아했어.”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박재관에게도 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심지어 이동우에게도 첫 고백을 제외하고는 그가 부담을 가질까 싶어 자제하던 말이었다.
내내 저 혼자만의 것이던 그 처량한 고백에 김한별은 이렇다 할 표정을 떠올리지 않았다.
“내가 먼저 고백했고, 한 5년 정도 만났나? 내가 군대 갈 때쯤 헤어졌거든.”
제 입으로 하는 제 이야기가 꼭 남의 이야기 같았다. 해성은 다시 시선을 돌려 천장을 응시했다.
“그렇잖아. 스물 중반 넘은 시커먼 남자랑 무슨 재미로 만나 주겠어.”
해성의 입에서 희미한 웃음이 흘렀다. 스스로를 비웃거나 상황을 비아냥거리기 위한 웃음 따위가 아니었다. 순수한 인정이었다. 김한별의 눈썹이 꿈틀했다.
“어릴 때야, 좀 참고 만나 줄 수도 있었겠지만.”
해성은 슬쩍 김한별의 눈치를 보았다.
“그… 형은 게이가 아니거든.”
“….”
“그게 형은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가 고백해서 좀, 여러 가지로 곤란했어.”
차분하게 이어지던 말이 점점 느려지더니 끊어졌다.
김한별 역시 게이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남자를 좋아했던, 남자를 보며 발정하던 저와는 달랐다.
만약, 김한별이 처음으로 경험한 남자가 자신이 아니라면,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제게 공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 처음. 처음이라서 호기심에 경험한 세계가 제법 그 입맛에 맞아서.
그러고 보니 이동우도 그랬다. 남자치고 같이 자 줄 만은 하다고. 해성이 자취방을 정리하기 직전까지도 이동우는 꽤 정기적으로 해성을 찾아왔다.
김한별도 그럴까. 그래도 나중에 진짜로 마음에 드는 상대가 나타나면 그때는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먼저 그만하자고 해 주면 좋을 텐데. 끝끝내 그런 말조차 하지 않아 마지막 선택마저 제게 맡겼던 이동우랑은 달랐으면,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으면 전처럼 몰래 집을 정리해야 하는데 이번엔 정말 갈 곳이 없었다.
“개좆같은 새끼가.”
케케묵은 구덩이가 또 해성을 빨아들이려 할 때였다. 해성은 고개를 돌려 제 쪽으로 누워 어느새 상당히 열 받은 표정을 짓고 있는 김한별을 바라보았다.
“뭣도 모르는 어린애 얼마나 가스라이팅하고 지랄을 떨어 댔으면 애가 이렇게 됐어?”
갑작스러운 격렬한 음성에 해성이 눈을 조금 크게 뜨자 김한별이 해성의 눈가를 검지로 문지르며 말했다.
“우선 넌 시커멓지 않아. 존나 뽀얗다고. 무슨 사람 피부가 이럴 수 있나, 어이가 없을 정도라고. 그리고 스물 중반, 뭐? 너 나 스물다섯 넘으면 안 만나 줄 거야?”
“….”
“왜 말이 없어? 진짜 그러려고 한 거야?”
해성이 입을 다물자 김한별이 발끈했다.
아니, 뭐라고 할 말이 없는데. 안 만나 주다니, 자신이 감히 누굴 만나 주고 말고 할 주제가 되나?
“진짜 그 새끼 죽이고 싶다.”
해성이 눈만 끔뻑이고 있자 김한별이 난폭하게 말을 씹어 뱉었다. 그러고는 해성을 제 쪽으로 훅,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김한별의 몸 위에 올라타게 된 해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세웠다. 그 바람에 김한별의 배를 깔고 앉은 꼴이 되었다. 김한별은 해성의 허리를 잡고 엄지로 그 위를 쓸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고등학교 때 무슨 군대 갓 제대한 선배도 뭣도 아닌 놈 하나를 좋아하게 됐는데 고백을 했더니 이 새끼가 나는 게이가 아니지만 네가 정 좋다면 내가 만나는 줄게, 뭐 이딴 식으로 개소리를 지껄였고, 어리고 순수하고 귀엽던 너는 그 말에 좋아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다가 그 새끼의 도저히 갱생이 안 되는 모습에 지긋지긋해져서 헤어졌다는 말이잖아.”
거침없이 이어진 요약본에 해성은 잠시 멍해졌다. 그러다 이내 입만 빠끔거렸다. 뭐라고 부정해야 할 것 같은데,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은 거야? 그렇게 쉽게 정리될 시간 같은 거 아니다, 뭐 그러고 싶냐고.”
무슨 독심술 같은 거라도 하는 건지. 저도 정리하지 못한 제 마음을 김한별은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잠시 김한별을 내려다보던 해성은 헛웃음 비슷한 걸 터트렸다. 길게 숨을 내쉬며 웃음을 갈무리한 해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
“그냥.”
해성의 눈이 느릿하게 김한별의 얼굴을 쓸었다.
여유롭고 똑똑하고 자신만만하고 또 저보다 돈도 훨씬 많은 김한별.
“그냥 내가.”
“….”
“참, 나잇값 못 한다 싶어서 그런다.”
이동우보다 열 살도 더 어린 김한별. 그런 김한별만도 못한 저.
“그놈의 나잇값.”
해성은 비스듬하게 휘어지는 입꼬리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얼만데?”
“뭐? 아!”
김한별의 말에 어이가 없어 되묻는 사이 몸이 뒤로 나자빠졌다. 김한별이 해성의 머리와 몸을 감싸 골이 울리는 충격은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놀라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얼마냐고. 내가 살게. 내가 전부 살 테니까 넌 그냥 나잇값 하지 말고 살아.”
어지러울 정도로 가깝게 다가온 김한별이 나직이 속삭인 후 가볍게 입술을 부딪쳤다.
“응? 얼마야?”
“돈 많다고, 유세냐?”
“응. 나 돈, 많아. 유세 떨 만큼.”
“그래, 좋, 겠다, 야.”
해성이 부리로 쪼듯 연타하는 입술을 피하자 김한별이 뺨을 콱, 깨물었다. 꽤 세게 깨물어 강하진 않지만 미약하게 통증이 느껴졌다. 손으로 뺨을 감싸고 김한별을 쏘아보자 김한별이 그 눈을 마주하며 입매만 당겨 웃었다.
“난 분명히 말했어.”
“….”
“저울질해. 하고 싶은 만큼 마음껏.”
해성으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해성은 저토록 자신감이 넘치는 김한별이 진심으로 신기했고 또 부러웠다.
* * *
“안녕?”
도장을 들어서는 인물을 보는 해성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매트리스 정리를 하던 최지민이 의아한 눈으로 방문자에게 물었다.
“누구세요?”
“알바생?”
이동우가 되묻자 최지민은 대답 않고 빤히 이동우를 쳐다보았다.
“아아, 나는 여기 관장님 친구예요. 여기 해성이랑도. 오랜만에 다 같이 술이나 한잔할까 해서 왔지.”
미소를 띤 얼굴을 보며 해성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도장은 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저에겐 필사적인 그 부탁이 이동우의 귓가를 스치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해성이, 안녕?”
“잠깐 저 좀.”
“나, 진짜 재관이랑 다 같이 한잔하고 싶어서 왔어. 정말로. 오랜만에 재관이 보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성이 가까이 다가가자 이동우가 다정한 음성을 꾸며 냈다. 해성은 억지로라도 잡아끌고 나가야 하나, 아니면 애원해야 하나 고민했다.
“으아니! 누가 종이봉투에 또 페트병 넣어 놨어?! 이거 암만 봐도 5시 부 애들이.”
그때 재활용을 버리고 도장으로 들어오던 박재관이 이동우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일 끝났어? 일부러 맞춰서 왔는데.”
이동우는 그런 박재관을 돌아보며 반갑게 말했다.
“약속 없으면 해성이랑 같이 한잔할까 해서 왔는데.”
박재관은 물끄러미 이동우를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랑 따로 얘기 좀.”
“바쁘면 어쩔 수 없고. 오늘은 해성이랑 둘이 마시고, 다음에 셋이 보자.”
“…해성이랑 둘이?”
“어.”
둘의 대화를 들으며 해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우선, 이동우를 데리고 나가서 이번엔 제대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도장에 한 번만 더 찾아오면, 찾아오면….
해성의 어깨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해성에게 이동우를 위협하거나 겁줄 수 있는 무기 같은 건 없었다.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말없이 찾아오면, 그땐 나, 정말 너 만나는 거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해성은 눈을 질끈 감고 짧게 숨을 내쉰 후 고개를 들었다.
“형. 나가요. 오늘은 저랑.”
“그래. 가자. 오랜만에 셋이. 마셔 보자.”
“그래? 약속 있는 거 아니었어?”
박재관의 말에 이동우가 슬며시 입술을 비틀었다.
“있어도.”
박재관은 그런 이동우를 우직히 바라보았다.
“너랑 해성이 둘이 있게 둘 순 없으니까.”
“형….”
해성이 그런 박재관을 말리려 하자 박재관이 눈으로 해성을 제지시켰다.
“저.”
얼어붙은 분위기에 시큰둥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도 가면 안 돼요?”
해성과 박재관 그리고 이동우까지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손에 마포 걸레를 쥔 최지민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저도 오늘 술 땡기는데.”
“지민아.”
“그래, 지민이도 가자.”
해성이 최지민을 말릴 틈도 없이 박재관이 상황을 정리했다.
“여기는 나, 입시 학원 다닐 때 잠깐 알고 지낸 사이. 해성이랑도 그때 봤고.”
“네.”
최지민은 대충 대꾸하고 마포 걸레를 청소함에 둔 후 말했다.
“술만 먹는 건 아니죠?”
“형.”
“뭐, 인마.”
앞서 걷는 이동우와 최지민의 눈치를 보며 박재관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박재관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 그냥 별거 아니야. 내가 도장은 오지 말라고 제대로 얘기.”
“나해성.”
박재관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동우가 도장 찾아오든 말든 상관없어.”
“형.”
“근데 너랑 둘이 만나는 건 안 돼.”
“….”
“그건 내가 더 못 봐줘. 그러니까 너도.”
잠시 말을 망설이던 박재관은 표정을 풀고 해성의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씩, 웃으며 하는 말에 멍청하게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박재관에게만큼은 절대로 어떤 피해도 없게 해야 했다. 절대로.
“관장님, 사범님. 빨리 오세요.”
“오냐. 간다.”
박재관은 저를 부르는 최지민에게 손을 흔들고는 해성에게 고갯짓했다.
“가자. 배고프다. 술도 땡기고.”
해성은 다시 걷기 시작하는 박재관의 등을 보다가 저 앞에 선 이동우와 최지민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당장 집으로 가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동우가 박재관을 곤란하게 하는 말과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지켜봐야 했다.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차기라도 한 듯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늦었네?”
늘 회식을 할 때 가던 고깃집에 들어선 해성은 동그란 테이블 두 개를 붙여 만든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을 보고 놀라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빨리 왔네?”
“어.”
당황한 해성과 박재관과는 다르게 최지민은 익숙하게 김한별과 인사를 나눴다.
“아니? 건물주 손자분이 왜?”
“왜 또 건물주 손자분이에요. 말 편하게 하세요. 관장님이 그렇게 부를 때마다 해성이 형이 뒤에서 저 죽일 듯이 노려본다구요.”
“나해성이가 위계질서 하나는 확실하지.”
테이블 옆에서 김한별에게 삿대질을 하던 박재관이 피식,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뭐 해요, 형. 와서 앉아요.”
해성은 저도 모르게 제 옆에 선 이동우의 눈치를 보았다. 이동우는 김한별을 보며 웃고 있었다. 김한별은 그런 이동우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해성을 보며 집게를 짝짝, 부딪쳤다.
“해성이 형, 빨리 오라니까요.”
해성은 긴장한 눈으로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는 이들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김치가 담긴 접시를 들고 사장님에게 엄지를 치켜드는 박재관과 상추와 깻잎을 겹치고 그 위에 고개를 두 점, 아니 세 점 올린 후 야무지게 쌈을 싸는 최지민, 바삭하게 구워진 고기를 해성의 접시로 옮겨 주는 김한별과 그리고.
소주잔을 입에 대고 그런 모두를 관찰하고 있는 이동우.
이곳으로 오는 게 아니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보이고 분위기가 어색해지더라도 최지민에게 빠지라고 말했어야 했다. 박재관에게도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 냉정하게 말했어야 했다. 그런 후 도장에서 멀리, 최대한 멀리 갔어야 했다.
아니면 적어도, 생일인 사람이 있을 때나 원생이 늘었을 때, 도장 아이 중 하나가 작은 대회에서 상을 받았을 때, 혹은 날씨가 꿀꿀해서, 괜히 기분이 들떠서. 그런 크고 작은 이유나 핑계를 들어 먹고 마시러 오는 이곳에는, 이동우를 데리고 오지 말았어야 했다.
지금 이 가게 안 이동우는 특색 없이 무난한 하얀 벽 위에 툭 튀어나온 녹슨 못 하나 같았다.
“왜요? 소화 안 돼요?”
해성이 젓가락을 들고만 있자 김한별이 작게 속삭였다. 해성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몸을 피하며 제 앞에 있는 이동우를 힐끗 바라보았다.
“해성이 왜? 속 안 좋아? 사이다 시켜 줄까?”
“편의점에서 소화제 사다 드릴까요?”
그러자 박재관과 최지민도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평소와 다름없는 둘의 모습이었다. 해성은 둘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됐다. 괜찮아.”
그러고는 고기를 집어 들었다. 입 안의 고기가 모래알 같았다.
“그나저나 한별이는 여기 진짜 어떻게 온 건데?”
“제가 불렀어요.”
박재관이 김한별에게 묻자 최지민이 답했다.
“네가?”
“네.”
“한별이 이 주변에 있을 것 같아서.”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한 목소리에 해성의 심장만 덜컥 내려앉았다. 최지민의 말에 박재관이 의아한 얼굴로 김한별을 바라보았다.
“김한별이 아직도 별 마트 알바해? 개강했잖아?”
“저녁에 가끔씩만요. 할머니가 별 마트 청소 좀 하라고 해서.”
“후계 수업 뭐 그런 건가?”
“술 마실 거면 한별이도 같이 마시면 좋을 거 같아서 연락했더니 근처라기에 불렀어요. 술 마실 때 사람 많으면 좋잖아요?”
최지민이 박재관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김한별이 뭘 알고 작정하고 온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해성은 소리를 죽여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우리 셋이 마실 때는 안 좋았냐?”
“뭐, 그렇다기보다는.”
“배신자! 맨날 제일 많이 먹으면서!”
“뭘 그렇게까지.”
박재관이 옆에서 콧김을 뿜든 말든 최지민은 또 정갈하게 쌈을 쌌다.
“다들.”
해성이 살짝 누그러진 속에 찬물을 들이부으려던 때였다. 잔잔하게 시끌벅적한 테이블 위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친해 보이네. 재관이가 잘해 주나 봐.”
낮고 온화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해성의 손끝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음….”
“음? 으음? 음?!”
최지민이 뜸을 들이자 박재관이 손을 허리에 올리고 씩씩거렸다.
“나 같은 관장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네, 뭐.”
최지민의 떨떠름한 인정에 박재관은 턱, 제 목덜미를 잡았다.
“헉. 내가 이걸 제자라고.”
이동우는 박재관과 최지민을 보며 작게 웃고는 술을 머금었다. 이동우에게 맺혀 있던 해성의 시선이 느릿느릿 옆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집게를 든 김한별이 해성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응?”
해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술잔에서 찰랑이는 맑은 술을 바라보다 물 잔을 들었다.
아무리 미련하고 멍청한 저였지만 이 자리가 술에 기댈 자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찬물로 속을 조금이나마 달랜 후 고개를 들자 이번엔 이동우가 해성을 보며 웃었다.
아주, 즐겁다는 듯이.
겉으로는 나쁘지 않은 술자리였다. 김한별과 최지민은 간간이 술잔을 부딪쳤고 이동우는 박재관과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비록 피차 관심 없는 안부였지만 술자리를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 주기에는 적당했다.
한 발자국 떨어져 보면 그저 친한 선후배, 혹은 직장 동료들이 모여 갖는 술자리로 보일 만한 흔하디흔한 술집 풍경 중 하나였다.
하긴, 이동우는 저처럼 멍청하지 않았다. 이런 자리에서 함부로 지껄여 댈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알면서도. 그걸 다 알면서도, 불안하고 무서웠다. 박재관을 곤란하게 하는 말을 할까 봐. 최지민이 실망할 만한 말을 할까 봐. 그리고 김한별이 저를 경멸하게 만드는 말을 할까 봐.
술잔을 매만지던 손이 힘겹게 물 잔으로 이동했다.
“마시고 싶으면 마셔요.”
“….”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 아아, 집 안에는 절대 안 들어가요. 약속.”
해성이 말없이 응시하자 김한별이 쓱,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왜? 오늘은 들어가게 해 주게?”
그러고는 해성에게만 들릴 만큼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됐다.”
해성은 김한별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반쯤 채워진 물 잔에 물을 따랐다. 물을 들이켜며 무심결에 들어 올린 시선 끝에 이동우의 웃는 얼굴이 걸렸다. 물 잔을 내려놓은 해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해성이, 어디 가?”
“화장실.”
곧장 저를 붙잡는 박재관에게 짧게 답한 후 해성은 조금 다급한 걸음으로 가게를 나왔다.
“하아.”
해성은 깊게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이제 밤공기도 한겨울처럼 시리고 차갑지는 않았다. 잠시만 방심해도 시간은 늘 어느새 훌쩍 지나 있었다.
이동우를 만나고 그저 좋아하는 마음에 충실했을 뿐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던 때, 해성은 처음으로 시간의 무서움을 알았다.
그러다 차차 그 흐름이 무섭지 않아졌다. 오히려 기껍기까지 했다. 가만히만 있어도 저절로 흘러 무뎌지고 무감각해졌으니까.
“해성아.”
하지만 그건 그저 자신의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제멋대로 등장한 이동우에게 이렇게 휘둘리는 걸 보면. 이런 자신에게 환멸이 나면서도, 학습이라도 된 것처럼 등신, 천치처럼 구는 걸 보면.
해성이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자 이동우가 가게 건물 모퉁이 근처에 서 있는 해성에게 다가왔다.
“나 때문에 불편해서 그래?”
“….”
“미안. 나는 그냥, 재관이랑 너랑 같이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 서로 쌓인 오해도 좀 풀고.”
“….”
“물론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말이야.”
“….”
“좋아 보이더라. 편해 보이고.”
이동우가 해성을 보며 옅게 웃었다.
“우리도 할 수 있는 게 많았는데.”
해성은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주먹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밖에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
“그러고 보니 새삼, 너도 나도 참 어렸어.”
어렸다고? 그래, 어렸다. 그도 저도 처음엔 어설픈 어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다음엔. 제가 참지 못하고 자취방을 뛰쳐나와 모텔을 전전하고 간신히 구한 고시원에서 은둔하고 있을 때는, 도피처로 군대를 선택했을 때는, 제대한 후 겨우 건진 졸업장 하나로 어떻게든 살아 보려 발버둥 칠 때에는.
그때는 어리지 않았는데. 이동우는… 형은, 언제나 저보다 어른이었는데.
“제가.”
해성은 다시 손끝에 힘을 주었다.
“도장에는 찾아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는데요.”
“그것도 미안. 네 말 무시한 건 아니야.”
이동우가 정말로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도, 마음이 좀 급했어.”
“….”
“네 옆에 신경 쓰이는 사람도 하나 있고.”
“….”
“해성아. 나, 그냥 예전 생각나서 너 찾아온 거 아니야. 이혼하고 충동적으로 이러는 것도 아니고.”
해성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는 이동우를 말없이 응시했다.
“많이 후회하고 있어.”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던 것들이 저 한마디에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미안해, 해성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미쳤었나 봐. 많이, 많이 후회하고 있어.
수백 번, 수천 번 상상하던 그의 모습이었다.
“쉽게 용서받을 생각은 안 해. 그냥 기회만 줬으면 해.”
“….”
“그리고.”
이동우가 슈트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낸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개비 뽑아 입에 물었다.
치익, 하고 필터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해성의 귓가에 들러붙었다.
“해성이 너, 그런 걸로 만족 못 하잖아.”
“….”
허공으로 내뿜어지는 연기가 해성의 시야와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저기, 저 가게 안의 어린애가 널, 만족시켜 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
“그런 건 나만 해 줄 수 있으니까.”
아가미가 뽑혀 나간 물고기처럼 입술을 할딱이던 해성은 지척에서 들려오는 취객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도장에는… 도장에는 찾아오지 말아 주세요. 부탁이에요.”
그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인 사람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 후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려던 발에 제동이 걸렸다. 가게 안에 박재관이 걱정스럽게 휴대폰을 보고 있는 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해성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가까스로 가라앉힌 마음이 비어 있는 자리 하나를 보고 다시 요동쳤다.
“김한별은요?”
“아, 김한별이?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편의점 갔어.”
당황한 해성이 뭐라도 더 물으려는데 최지민이 박재관을 불렀다.
“관장님.”
“어.”
“저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거 있는데요.”
“물어봐.”
“왜. 최지민이, 김한별이, 나해성이. 이렇게 불러요?”
“그게 왜?”
“그렇게 부르니까 더 아저씨 같아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박재관이 와장창 인상을 구기고는 팽 최지민에게서 돌아앉았다. 씩씩거리던 박재관이 메시지라도 보내는 듯 휴대폰에 집중하고 있는 최지민을 힐끗 보고는 해성에게 물었다.
“밖에서 이동우랑 만난 건 아니지? 통화한다고 나갔는데.”
가게 문을 보고 있던 해성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잔을 들어 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응, 못 봤어.”
나해성은 결국 도망치지도 못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무르고 또 멍청했다.
그 모습에 만족스럽게 웃은 이동우가 반쯤 타들어 간 담배를 길바닥에 내던졌을 때였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 내가.”
모퉁이 너머에서 웃음기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가게에 앉아 고기나 굽고 있는 줄 알았던 건방진 놈이 천천히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아니, 그렇잖아. 저렇게 잘난 남자가 대체 왜, 뭐 때문에 저를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일까.”
“….”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맞았네.”
이동우는 피식 웃으며 새 담배를 뽑아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순식간에 다가온 김한별이 담배와 담뱃갑을 한 번에 낚아챈 후 이동우의 슈트 재킷을 열어젖혀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너, 전에도 그랬어?”
이동우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완전히 가셨다. 하지만 김한별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여전히 실실 웃고 있었다.
“전에도 나해성 앞에서 담배 피워 댔냐고.”
이동우가 차갑게 노려보자 한 걸음 물러선 김한별이 혀를 찼다.
“운동하는 사람 앞에서 담배라니. 생각이라는 게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스스로가, 대단히 똑똑하다고 생각하나 봐?”
“내가 똑똑하기도 한데, 네가 멍청하기도 하고.”
“….”
“난 사실 이해가 안 가. 대체 나해성이 왜 이렇게 심각한 건지.”
김한별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동우를 바라보았다. 뜯어보는 시선에 여유를 되찾은 이동우가 입술을 기울였다. 앞에 선 남자는 장난감 뺏길까 봐 허세를 부리는 어린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 봤자 개쓰레기 같은 놈 만났던 흑역사일 뿐인데 뭐가 그렇게 무섭고 겁이 나는지.”
“글쎄. 해성이한테는 고작 개쓰레기 같은 놈 만났던 흑역사 정도가 아닌가 보지.”
“아니, 맞아.”
자신만만하게 단언하는 꼴에 이동우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맞는데, 나해성이 아직 모르는 거 같아서 제대로 알려 주려고.”
“….”
“나해성은 너랑은 다르게 머리까지 좋아서 금세 알아차릴 거거든.”
가만히 김한별을 응시하던 이동우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그러시든가.”
“어. 그리고 너도 알게 될 거야.”
김한별이 자신이 입고 있는 항공 점퍼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길게 머금어진 연기가 다시 입 밖으로 흘러 이동우의 얼굴 위에서 흩어졌다.
“그때 나해성을 만난 게 네 유일한 행운이었다는 걸.”
“….”
“나해성이 한 살만 더 나이가 많았어도.”
오연한 얼굴에 명백한 비웃음이 스몄다.
“너 같은 쓰레기는 거들떠도 안 봤을 테니까.”
“….”
“뭣도 모르는 어린애 꼬셔서 휘두른 게 네 인생의 유일한 업적인 거 같은데.”
타고 있는 장초를 이동우의 발치에 던진 김한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업적 존나 후져요,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