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4)

5.

‘안녕하세요!’

학교가 끝나자마자 체육관으로 튀어온 해성은 안으로 들어서며 활기차게 인사했다. 그러자 체육관 안에 동그랗게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해성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반겼다.

‘나해성 왔냐!’

그중 제일 목소리가 큰 사람은 당연히 박재관이었다. 해성은 활짝 웃으며 무리 지어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뭔데요. 뭐, 맛있는 거라도 있어요?’

답지 않게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선생님과 형들에게 다가가니 그 사이에 처음 보는 남자가 섞여 있었다.

짧게 자른 검은 머리. 살짝 그을린 듯하지만 화사한 피부. 분명 운동을 하는 사람 같기는 한데 선배나 친구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였다.

‘아. 해성이는 처음 보겠네.’

박재관과 함께 조교 노릇을 하던 선배 하나가 남자를 위아래로 쭉 훑어보며 말했다.

‘재관이랑 같이 입시 준비하다가 대학 가자마자 군대로 날라 버려서.’

‘나르긴. 그냥 될 수 있으면 빨리 해치워 버리려고 그런 거지.’

장난스러운 시선에 대꾸하는 말투가 느긋하다. 남자가 천천히 해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안녕.’

살짝 처진 눈꼬리에 웃음을 매단 남자가 해성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나는 이동우라고 해.’

“해성아.”

해성에게 다가오던 이동우는 두어 발자국을 남겨 두고 멈춰 섰다.

“잘 지냈어? 정말 오랜만이네.”

핑그르르, 세상이 한 바퀴 회전한 기분이었다. 눈앞이 암전되었다가 다시 밝아졌다. 해성은 휴대폰이 부서져라 세게 움켜쥐었다.

오랜만이라.

스물다섯. 이별이랄 것도 없는 이별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걸 이별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놓지 못해 붙잡고 있던 것을 놓았을 뿐인데.

“…우리가 안부를 물을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요.”

쥐어 짜낸 목소리가 볼품없이 덜덜 떨렸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성의 반응에 이동우가 눈매를 휘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의 투정을 보는 듯했다.

“넌 하나도.”

이동우의 시선이 느릿하게 해성을 훑었다.

“하나도 안 변했네.”

“….”

“그럴 줄은 알았는데 기대 이상이야.”

어딘지 야릇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요?”

안부를 물으며 회포를 풀 사이가 결코 아니었다. 안부는커녕 해성의 휴대폰 안에는 더 이상 이동우의 연락처조차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이동우가 어떻게 집 앞까지 찾아와 저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해성은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박재관은 아니었다. 박재관 역시 이동우와 연락을 끊은 지 오래였다. 설사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하더라도 절대 해성의 소식을 전할 리 없었다.

“어떻게….”

“세상 좁은 거 잘 알잖아.”

좁다… 좁다라. 해성은 저 말을 몸소, 뼈저리게 깨우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대로 된 설명은 아니었다. 설사 해성이 박재관의 도장에서 일한다는 것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다고 해서 해성의 집까지 알 수는 없었다.

“재관이 도장에서 일한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어.”

“….”

“원래 도장 근처에서 기다렸는데.”

휴대폰을 쥔 손등은 핏기 하나 없었다. 하얗게 질린 해성의 얼굴처럼.

“아는 동생인가 봐?”

봤다. 이동우가. 김한별과 함께 있는 저를. 그리고 김한별을.

단숨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많이 친해 보이던데.”

이동우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해성이.”

“….”

“여전하구나.”

언뜻 모호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해성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그 의미가 선명했다.

“그래. 허전했겠지.”

해성에게 시선을 고정한 이동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 수 있지.”

“….”

“속상한 마음에 내가 원망스럽기도 했을 거야. 밉기도 했겠지. 괜히 반항심 같은 게 들었을 수도 있고.”

이동우는 김한별을, 그리고 그간 해성이 견디고 버틴 시간을 멋대로 정의했다.

“하지만 해성아.”

“….”

“이제는 그러면 안 돼.”

해성을 보며 웃는 낯이 엄청난 관대함을 베푸는 듯했다.

개소리. 저거야말로 헛소리였다. 몇 년 만에 얼굴을 들이밀고 대체 무슨 자격으로, 무슨 권리로. 이동우에게는 그런 자격도 권리도 없었다.

황당할 정도로 뻔뻔한 요구에 가슴속이 새빨갛게 타올랐지만 해성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해 봐야 떨리는 입술을 말아 무는 것뿐이었다.

“해성아.”

“….”

“나 이혼했어.”

무슨.

불안으로 출렁이던 눈이 크게 동요했다. 이동우의 미소가 더욱 진해지는 것과 동시에 해성이 으스러트릴 듯 쥐고 있던 휴대폰이 작게 진동했다. 휴대폰이 끊임없이 울어 댔지만 해성은 시선 한 자락 주지 않았다.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이야 뻔했다. 아마 씻고 나왔을 시간까지 계산해 다시 전화를 했을 것이다.

“그래서요.”

해성의 목소리가 전보다 차분해졌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이동우가 고개를 기울인 채 입술을 휘었다. 해성은 작게 심호흡한 후 가까스로 말을 끄집어냈다.

“아까 말했듯이… 우리가….”

제 입에서 뱉어진 ‘우리’라는 말이 소름 끼칠 정도로 낯설었다.

“안부나 물을 사이는 아닌 거 같네요. 안녕히 가세요.”

돌아서야 하는데 땅에 들러붙은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어느새 휴대폰 진동이 뚝 끊긴 자리에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채워졌다.

“해성이, 마음이 많이 상했나 보네.”

낮게 한숨을 내쉰 이동우는 어깨를 들어 올렸다 내렸다.

“그래. 내가 노력해야지. 그래도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좋다.”

“….”

“쉬어. 또 보자.”

이동우는 해성을 향해 미소 짓고는 등을 돌려 차로 갔다. 차에 타기 전 해성에게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해성은 망연히 서서 이동우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멋대로 찾아와 놓고 멋대로 가 버렸다. 늘 그랬듯 해성은 이번에도 내동댕이쳐지듯 남겨졌다.

집으로 들어온 해성은 차마 김한별과 통화할 자신이 없어서 짧게 메시지를 남겼다. 씻느라 전화는 못 받았고 이제 자려고 한다고 하니 김한별은 사람 애태우는 데 뭐 있다니까 하고는 꼭 제 꿈을 꾸라고 강요했다. 메시지를 보며 피식거리고 있자니 조금 전 이동우와의 재회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패딩도 벗지 못하고 바닥에 웅크린 해성은 멍하니 어떤 꿈을 꿔야 하는지 알려 주는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하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면 정말 꿈에 김한별이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다 동이 틀 무렵 잠이 들었다. 겨우 몇 시간 뒤 눈을 뜬 해성은 멀쩡한 매트리스를 두고 찬 바닥에서 청승을 떨고 있는 제 꼴을 확인한 후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아직 좀 더 잘 수 있었지만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뭉그적거리며 일어나 패딩부터 벗어 던졌다.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와 트레이닝복을 걸쳐 입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고 싶었지만 이따가 도장에 출근을 해야 했다. 박재관과 아이들에게 퀭한 몰골을 보일 순 없었다. 억지로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몸을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해성이 조금 얇은 패딩을 걸쳐 입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새로운 메시지 알림 창이 화면에 떠올랐다.

허탈한 웃음이 해성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김한별 : 보고 싶어서 도저히 못 참겠어

김한별 : 일어나면 알려줘 나 집 앞이야

김한별 : 스토커로 신고하는 건 아니지?

저벅저벅 창가로 가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주차 라인 안에 쏙 들어가 있는 검은 SUV가 보였다.

서둘러 현관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집 앞.

어젯밤, 이동우 역시 집 앞에서 해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절대, 절대로 김한별에게 이동우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한심한 모습은 차고 넘치게 보였지만 이동우만큼은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이동우와 함께하던 시절의 자신 역시.

해성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당분간 김한별과의 퇴근길은 보류해야 할 것 같았다.

* * *

“역시 단 걸 먹어 줘야 돼. 이거 진짜 맛있다!”

“네. 빵 좋아하는 후배가 극찬하는 데서 사 온 거예요.”

“크림 예술.”

혹시 이동우가 박재관에게도 연락을 했을까 봐 걱정했는데 최지민이 사 온 빵의 크림을 입에 묻히고 엄지를 치켜드는 모습을 보아하니 괜한 걱정이었던 듯했다.

“나해성!”

“사범님, 오셨습니까.”

관장실 안으로 들어가 행거에 패딩을 건 해성은 박재관의 입 쪽을 보며 턱짓했다.

“그 크림은 내일 먹으려고 아껴 둔 거야?”

그러자 검지로 입가를 쓸던 박재관이 손에 묻어나는 크림을 보며 좋다고 웃었다. 해성은 그런 박재관을 힐끗 본 후 피식 웃고는 관장실을 나왔다.

박재관이 저 때문에 신경 써야 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박재관은, 도장은 지금처럼 평화롭고 무던하게 유지되어야 했다.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박재관과 도장에 폐를 끼치는 일이 생긴다는 가정만으로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가만히 도장을 둘러보던 해성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도장 곳곳을 살피고 수업 준비를 했다.

저녁 시간쯤에 김한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약속이 있으니 데리러 올 필요 없다고. 김한별이 이 조악한 임시방편을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메시지를 보내고 바로 데려다줄게, 라는 답장이 온 걸 보면 다행히 믿는 것 같았다. 어딘지는 알고 데려다준다는 거냐 물으니 상관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해성이 재차 괜찮다고 하니 김한별도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홀로 집에 돌아온 해성을 맞이한 건 어제 그 회색 세단이었다.

“해성아.”

차에서 내려 해성을 부르는 모습이 어제와 다르지 않게 여유로웠다.

“술이나 한잔할까?”

언뜻 상냥한 제안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상대의 안부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타.”

안다. 이동우가 왜 또 자신을 찾아왔는지. 뭘 하려고 하는지도 전부. 다 아는데. 이제 뭣 모르는 열아홉 어린애도 아닌데. 이동우에게 어떤 마음이 남아 있지도 않은데. 어째서 또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붙은 건지.

어느새 해성의 앞으로 다가온 이동우가 지퍼가 열린 패딩을 잡아 벌리고 그 안의 도복을 눈으로 쓸어 보았다.

“여전히 잘 어울리네.”

짝-!

그 순간, 참을 수 없어진 해성이 세게 쳐 낸 이동우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해성아.”

잠시 말이 없던 이동우가 다시 해성에게 손을 뻗어 오려 할 때였다. 불쑥 나타난 또 다른 손이 이동우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 아저씨는 뭐야?”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해성의 낯빛이 파리해졌다.

“아는 아저씨야?”

이동우의 손목을 쥔 김한별이 해성을 보며 죽, 입술을 끌어 올렸다.

* * *

나애기

부산

어딘지 알고 데리러 오냐는 말에 어디든 상관없다고 하니 돌아온 답이었다.

“하, 미치겠네.”

나해성은 정말 씹어 먹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정작 먹히는 건 저였지만.

나해성을 떠올림과 동시에 자동으로 몇 가지 이미지가 연상되었다. 살짝 올라간 한별의 입꼬리에 위험한 웃음이 걸렸다.

“한별아, 뭐 해?”

“김한별, 여자 생긴 거 아니야?”

술 먹으러 와서 내내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자 여기저기서 불만 섞인 말들이 터져 나왔다. 뭐, 그러든지 말든지 딱히 상관은 없었다. 나해성을 데리러 가기 전 애매하게 붕 뜬 시간을 때우고자 와 있는 자리였다.

군 제대 후 오랜만의 학교생활이었지만 한별에게는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온 저를 반기는 선배, 동기, 후배들과 하하 호호 웃고 떠들며 즐거운 캠퍼스 라이프를 즐겼겠지만 지금 한별의 모든 관심과 신경은 단 한 사람에게만 꽂혀 있었다.

나해성.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한별의 앞에 나타난 나해성에게 한별은 모든 시선을 빼앗겼다. 남자에게 성욕을 느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던 한별이 그에겐 성욕을 넘어선 애정까지 느끼고 있었다. 나해성은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한별에게 이런 건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나해성이 정말로 자신의 첫사랑, 뭐 그쯤 된다는 말이었다.

“오, 뭐야! 진짜 뭐 있어?”

그래서 여자가 생겼냐는 말에 한별은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여자는 아니지만, 저들이 생각하는 이성에게 갖는 감정을 가진 상대가 있긴 했으니까.

그러자 호기심 반, 의심 반이 섞인 시선이 한별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정작 한별의 시선은 작은 휴대폰 화면에만 박혀 있었다.

나애기

간만에 친구들 만나러 간다 왜

누굴 만나는 거냐고 추궁하듯 묻자 답한 답에 한별은 검지로 휴대폰 화면을 두드렸다. 한별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이 터졌다.

나해성은 미친 듯이 귀엽고 사람 환장하게 섹시했지만.

“흐음.”

너, 친구는 없잖아.

한별의 입술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그래, 나해성이 어떤 씹새끼를 만나 개고생을 했다는 건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등신이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나해성은 남들 다 하는 평범한 경험을 낯설어했다. 칭찬에도 약했고 누군가 제게 호감을 표하는 것에 겁을 먹었다. 지루한 일상을 해칠까 두려워했고 그러면서도 꿋꿋하게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나해성이, 이런 깜찍한 거짓말까지 하는 이유는 딱히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별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게 집중된 시선을 쭉 훑고 씩 웃었다.

“계산은 내가 하고 갈게.”

아쉬움과 환호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한별은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지루한 술자리를 빠져나왔다.

나해성도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거짓말을 했으니 자신도 도장 앞에서 기다리지 말라고 한 말을 지킬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래도 한별은 도장이 아닌 나해성의 집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나해성이 사는 다세대 주택 맞은편 빌라 지상 주차장 필로티 기둥에 기대서 있던 한별은 무표정한 얼굴로 해성에게 다가가는 남자를 차근차근 뜯어보았다.

꼴에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의 면상이 꽤나 반반했다. 저만큼은 아니지만 키도 컸고 코트 아래 몸 또한 잘 관리되어 있다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자세는 반듯했고 표정은 온화했다.

모르는 사람 눈에는 그저 친근한 형, 동생 사이 정도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웃음기가 스민 한별의 얼굴은 한없이 냉랭했다.

저 새끼가 분명했다. 그 개씹새끼.

안다. 나해성이 얼마나 겁쟁이인지. 제게 자신의 치부 따위 보이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도. 또 지금 저 개씹새끼와 저를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아 하리라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나해성의 과거는 한별에게 치부 따위가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기대 있던 몸을 바로 세운 한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성큼성큼 나해성을 향해 전진했다.

아니, 어딜 감히.

“이 아저씨는 뭐야?”

저는 아까워서 감히 손도 잘 못 대는 나해성에게 함부로 손을 대는 거지? 이 개씨팔놈이?

“아는 아저씨야?”

“아.”

갑작스러운 김한별의 등장에 잠시 당황하는 듯했던 이동우가 능숙하게 표정 관리를 했다.

“아픈데.”

하지만 이동우의 말에도 김한별은 해성만 빤히 응시하다가 이동우의 손을 내팽개치듯 놓아주었다.

“하여튼. 눈을 뗄 수가 없다니까.”

김한별은 해성과 이동우의 틈을 파고들어 이동우를 등지고 해성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동우의 모습은 그에게 가려져 털끝도 보이질 않았다.

“형이 너무 착하고 올바르니까 웬 바퀴벌레 같은 게 꼬이는 거 아니야.”

“김한별.”

“응, 해성이 형.”

“그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동우에 대해 설명해야 할까. 아니면 약속이 있다고 해 놓고 집으로 돌아온 자신에 대한 설명을 먼저 해야 할까. 머릿속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적절한 답을 찾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 김한별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함이라는 걸, 해성은 알아채지 못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신중하던 해성 대신 입을 연 건 김한별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던 이동우였다.

“바퀴벌레라.”

김한별의 도발에 일말의 동요도 없는 목소리였다.

“그것보다는 꽤 가까운 사이인데. 해성이랑은.”

해성은 저도 모르게 김한별의 손을 붙들 뻔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동우와 저는. 저는… 이동우에게.

해성이 다시 늪으로 아득히 빨려 들어가려 할 때였다.

“시발.”

거친 욕설과는 다르게 가벼운 웃음을 날린 김한별이 커다란 손으로 해성의 얼굴을 감싸고 엄지로 뺨을 쓸다 고개만 돌려 이동우를 바라보았다.

“기껏 해 봐야 사귀다 헤어진 사이 아니야?”

“….”

“….”

“헤어져 놓고 찾아와서 궁상떠는 주제에 있는 척하는 거 존나 웃겨.”

뒤를 돌아보던 고개가 다시 해성을 향했다.

“그치, 형?”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리며 묻는 말에 해성의 말문이 막혔다. 그와 반대로 틀어막혔던 목구멍은 트이고 숨이 내쉬어졌다.

* * *

“흐으으음~ 앗! 깜짝이야! 아니, 이 시간에 왜 남의 대문을 막고 있어!”

해성이 앞에 김한별과 이동우를 두고 기묘한 대치를 이루고 있을 때였다. 대문 안쪽에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안에서 나온 사람이 깜짝 놀란 듯 버럭 소리를 지르다 해성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우리 사범님 아니신가.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고 있으셔?”

맨 위층에 사는 주인집 할아버지였다.

“안녕하세요. 그게….”

해성은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지만 내놓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술만 달싹거렸다.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몸이 차게 식어 갔다. 작은 월세방이지만 지난 몇 년간 해성에겐 아늑한 안식처였다. 그런 집 앞에 이동우가 있었다. 이동우. 굳이 자취를 할 정도로 학교에서 멀리 살지 않았던 해성이 자취를 하게 되었던 것도 이동우 때문이었다. 이동우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내킬 때마다 해성을 찾았고 해성은 그런 이동우를 하염없이 기다릴 곳이 필요했다.

그런 이동우가 다시 제집을 찾아왔다. 당장이라도 이동우가 저벅저벅 집으로 들어갈 것만 같았다.

“안녕하세요. 해성이 형이랑 아주, 아주 굉장히 친한 동생인데 잠깐 볼일이 있어서 들렀어요.”

머뭇거리는 해성 대신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가벼운 목소리가 상황을 설명했다.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도 아니었다. 김한별의 입장에서는 저 말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해성은 소리 없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굳은 입술을 움직여 할아버지를 향해 물었다.

“이 밤에 어딜 가세요.”

“나는 영숙 씨가 막걸리 땡긴다고 해서 막걸리 사러 가요!”

주인집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내를 꼭 영숙 씨라고 불렀다.

대문 앞을 막고 선 이들이 해성과 해성이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인한 할아버지의 얼굴과 말투가 금세 부드러워졌다. 해성은 비켜서 할아버지가 지나갈 틈을 만들며 말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응, 응.”

그러자 할아버지는 해성과 김한별 그리고 이동우에게까지 손을 휘휘 흔들고 별 마트로 이어진 골목으로 걸어갔다.

할아버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 해성은 아까보다는 차분해진 눈으로 김한별의 어깨 너머에 서 있는 이동우를 바라보았다. 야밤에 치정극을 찍을 마음은 없었다. 그것도 집 앞에서.

해성은 김한별을 지나쳐 이동우에게 다가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김한별이 저를 따라 움직이며 앞을 막지만 않았어도.

“…비켜 봐.”

해성이 가만히 올려다보자 김한별이 뚱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싫어.”

“….”

“나는 형이랑 다르게 질투가 많단 말이야.”

김한별은 이동우 앞에서 해성의 단순히 친한 동생 노릇을 할 생각이 애초에 없는 듯했다.

해성의 입에서 결국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답답하거나 불안해서 나온 한숨은 아니었다. 오히려 안도에 가까운 한숨이었다. 김한별에게는 이 모든 게 정말로 헤어진 전 남친의 진상 정도로만 보이는 것 같았다.

“전에 만나던 사람 앞에서.”

해성의 목소리에는 이제 어떤 떨림도 없었다.

“너 하나 어쩌지 못하는 머저리로 보이게 만들고 싶지 않으면 비켜.”

빤히 부딪쳐 오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자 김한별이 입술을 기울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고 해성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어떻게 하나 지켜본다는 모양새였다. 해성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움직여 이동우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이동우는 묘한 눈으로 해성을 보고 있었다. 해성은 그 눈 속에 담긴 불편한 이동우의 심기를 쉽사리 알아챌 수 있었다.

“소란 떠는 거 싫어하잖아요.”

말없이 해성을 응시하던 이동우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가 주세요.”

“….”

“할 말이 있는 거면… 다음에, 다음에 해요. 제가 연락할게요.”

연락한다는 말에 뺨에 불만족스럽고 못마땅한 시선이 날아왔지만 우선은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번호 바꿨던데.”

번호. 이동우가 결혼한다는 걸 알게 된 다음 날, 해성은 휴대폰을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썼던 번호를 바꿨다. 번호를 바꾸기 전까지 이동우에게 연락이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네.”

“해성이, 정말 많이 속상했었구나.”

“연락할게요.”

김한별의 앞에서 추측을 불러일으킬 만한 대화는 이 이상 나누고 싶지 않았다. 해성이 제법 단호하게 말하자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던 이동우가 피식 웃었다.

“그래. 다음에 따로 만나자. 우리 둘이 나눌 이야기가 아주 많은 거 같으니까.”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대화에 해성이 급격한 피로감을 느낄 때였다.

“존나게 질척거리네.”

“….”

“….”

“아, 가시라구요.”

해성에게서 시선을 돌린 이동우가 빤히 김한별을 쳐다보았다. 다급한 마음에 이동우의 코트 자락을 붙잡으려던 손이 김한별에게 붙들렸다.

“우리 둘이 나눌 이야기도 아주 많은데 아저씨가 방해하고 있잖아, 지금.”

이제는 존대도 집어치운 김한별이 시큰둥한 얼굴로 어느새 깍지까지 낀 손을 붕붕 흔들었다.

“왜? 그렇게 뉘앙스만 풍기면서 떠들어 대면 내가 알아서 막 더러운 상상하면서 형한테 실망하고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

“그럴 리 없으니까 적당히 하고 꺼져.”

한없이 가벼운 말투였지만 목소리는 묵직했다.

“김한별.”

해성은 나직이 김한별을 불렀다. 그러자 다행히 김한별이 입을 다물어 주었다.

이동우는 자존심이 세다. 한참 어린 애를 상대로 유치한 반응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해성이 깍지를 풀려고 하자 김한별이 더 세게 손을 얽어 왔다.

“너… 진짜 사람 우습게 만들래?”

힘없는 목소리에 김한별은 즉시 손을 풀었다.

“다음에, 다음에 봐요. 그리고.”

거의 애원조의 말에도 미동 없이 선 이동우에게서 고개를 돌린 해성은 김한별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너도 이만 가 봐.”

제발.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은 목구멍에 걸렸다. 해성은 둘을 남겨 두고 돌아섰다. 삐걱거리는 문처럼 삐걱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안으로 들어왔다. 닫힌 대문에 기대고 선 해성의 온 신경은 문밖에 있는 두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다행히 말소리 대신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이어 똑똑,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와서 미안.”

미안하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무미건조했다. 해성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애초에 김한별이 미안해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누가 봐도 어설픈 거짓말이었으니까. 그 말에 의심을 갖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에도 비참한 마음이 드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쉬어. 갈게.”

차 소리도, 발소리도 모두 사라진 후 해성은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결국 드러난 자신의 은신처로 몸을 숨겼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토요일이라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비적비적 일어났던 해성은 다시 벌러덩 매트리스 위에 드러누웠다.

이동우가 결혼을 한 것은 해성이 박재관의 도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고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관장실 테이블에 내던져진 박재관의 휴대폰에 뜬 이동우라는 이름에 시선이 갔던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 아래 이어진 모바일 청첩장.

그때까지만 해도 해성은 평생을 써 온 휴대폰 번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동우의 번호는 지웠지만 그 숫자만은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화장실로 간 해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 번호를 다시 저장하고 프로필을 확인했다.

누구보다도 화사한 선남선녀의 웨딩 사진이 박힌 이동우의 프로필을 본 순간 느낀 것이 절망이었는지, 아니면 드디어 이 일방적인 관계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후련함이었던 건지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제게 결혼 소식도 전하지 않은 이동우는 이혼 소식부터 전했다. 자신이 이동우를 잘 알고 있듯 이동우 역시 저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해성이 차가운 손등으로 뜨끈하게 달아오른 머리를 식혔다.

이동우. 이동우.

이동우의 이름으로 뒤엉킨 머릿속에서 정작 해성을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그때 머리맡에 둔 휴대폰이 징징 몸을 떨었다. 발신자는 역시나 김한별이었다.

“어.”

-….

“…여보세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기에 귀에서 휴대폰을 떼 확인했는데 통화는 연결된 상태였다.

“김한별?”

-….

“김…한별?”

-나 완전 쫄았어.

“뭔 소리냐, 또.”

-어제. 나 시건방 떨었다고 내 전화도 안 받고 이제 나 안 만나 줄까 봐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고.

“하나도 겁 안 먹은 거 같은데?”

-사람이 원래 극한의 두려움을 느끼면.

“고맙다.”

해성은 제 기분을 풀어 주려 들으나 마나 한 말을 주절거리는 김한별을 끊어 냈다.

“고마워. 어제 내 체면 살려 줘서.”

-….

“너 같은 애가 내 말에 꼼짝도 못 하니까 내가 좀, 면이 섰어.”

-….

“근데.”

이마를 달군 열이 눈까지 퍼져 나갔다. 해성은 손등으로 눈꺼풀 위를 세게 누르며 목구멍에 걸린 말을 끄집어냈다.

“거기까지 해.”

-….

“더 이상 내 일에 상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휴대폰 너머에서는 숨소리마저 들려오지 않았다.

싫겠지. 질렸겠지. 뻔뻔하고 염치없다 생각하겠지. 당연했다. 뭐 하나 내세울 것도 잘난 것도 없는 남자가 저 좀 좋아해 준다고 시건방을 떤다 생각할 것이다. 각오했던 일인데도 김한별이 침묵하자 울컥울컥 뜨거운 덩어리가 가슴에서 치솟았다.

-나해성.

잠깐의 침묵 뒤 김한별이 해성을 불렀다.

-형.

“….”

-삐졌어?

“….”

-어떻게,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까? 아니, 근데 형도 친구 만난다고 해 놓고 나한테 거짓말했잖아. 물론 내가 잘잘못을 따지자는 건 아니야.

벌떡 일어나 냉장고로 간 해성은 생수병을 꺼내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귀에 닿은 휴대폰에선 계속해서 잘잘못을 따지는 김한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 *

가운데 황동색으로 알 수 없는 무늬가 새겨진 검은색 문을 두드리는 손은 신중했지만 그 눈은 형형했다. 한별은 가만히 숨을 죽이고 문 안쪽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나해성에게 신경을 집중시켰다.

별 같잖은 새끼 앞에서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로 길고 빽빽한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도 악착같이 침착한 척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물론 그런 이성적인 마음과는 별개로 본능은 저와 나해성을 가로막은 대문을 뜯어낸 후 나해성을 들고 집으로 가 그 작고 동그란 머리통부터 새하얀 발가락까지 핥아 먹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가뜩이나 겁먹은 나해성이 더 음습하고 깊숙한 곳으로 달아나 숨어 버릴 걸 알기에 적당한 선에서 물러났다.

뭐, 조만간 핥아 먹으면 될 일이고.

한별은 대문 너머 색색거리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돌아섰다.

택시를 잡기 위해 골목을 빠져나온 한별의 입술이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차가 쌩쌩 달리는 대로변에 싸가지 없이 멈춰 선 차에서 아까 그 남자가 내렸다.

한별은 검은 항공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가오는 남자를 기다렸다. 손가락에 걸리는 담뱃갑을 딱 다섯 번 두드렸을 때 남자가 제 앞에 섰다.

“해성이 잘하지?”

이 시발놈이.

남자는 한별이 생각한 것보다 더 시발놈이었다. 담뱃갑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뚝 멈췄다.

생각보다 더한 개새끼라.

삐딱하던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과거의 나해성에게는 불운이었겠지만 그래, 현재의 나해성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나해성에게는 이 시발놈이 무슨 대단한 새끼처럼 박혀 있는 모양인데 한별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과거로 시간을 돌려 이 새끼보다 먼저 나해성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이참에 나해성의 마음에 박혀 있는 이 새끼를 뽑아내 아예 태워 버릴 참이었다.

“응.”

“….”

“형이 못하는 게 없거든.”

태연한 대꾸에 남자가 입매를 휘며 허세를 부렸다.

“맞아. 못하는 게 없지. 못 할 것도 없고.”

“….”

“날 위해서라면.”

개새끼의 개소리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진짜 미친놈인가?

“나해성 뒷구멍 맛보고 정신 못 차리는 건 이해해. 먹어 봐서 알겠지만 타고났잖아?”

“….”

“근데 나는 다른 사람이랑 구멍 같이 쓰는 취미는 없거든. 그래서 전에도 한 번만 빌려 달라는 걸 거절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남자는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미친놈이 맞았다. 아주 생쇼를 하고 있었다.

“해성이가 다른 사람은 싫다고 하도 사정을 하기도 했고.”

“….”

“뭐, 나랑 해성이 사이에 있었던 일을 네가 다 알 필요는 없지만.”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남자가 한쪽 어깨를 들어 올렸다가 내리며 말했다.

“적어도 너 같은 놈이 끼어들 사이는 아니니까.”

줄줄이 이어지는 참신하지 못한 이야기에 흥미가 떨어졌다. 말없이 남자의 얼굴을 응시하던 한별의 입에서 툭, 헛웃음이 내뱉어졌다.

“뭐래, 늙다리 이혼남 새끼가.”

“….”

“이혼하고 나니까 잘난 척하면서 까불다가 놓친 나해성이 아쉬워져서 찾아온 주제에.”

“….”

“왜? 나해성이 네가 돌아온 것만으로도 좋아서 다시 꼬리를 흔들면서 헥헥거릴 줄 알았어? 다른 사람들도 너처럼 발전이 없는 줄 알아?”

이 씹새끼는 생긴 거답게 하는 짓도 창의성이 없었다.

“개밥 쉰내 나는 영화는 너 혼자 찍고.”

한별은 남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죽, 훑었다.

“아저씨. 추한 꼴 적당히 보이고 집에 가서 주무세요. 보기 안 좋아요.”

고개를 좌우로 흔든 한별이 택시를 잡기 위해 남자를 지나칠 때였다.

“말이 안 통하면 행동으로 보여 줘야지.”

눈높이가 비슷한 사람은 박재관 외에 오랜만에 보았다. 한별은 가만히 남자의 눈을 마주했다. 시커먼 눈동자 아래 오만하고 난폭한 감정이 일렁거렸다.

“해성이한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말을 마친 남자는 돌아서 차로 갔다. 빠르게 튕겨져 나가는 차 뒤꽁무니를 보며 한별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하얀 장초를 입에 물고 이로 짓씹다가 가로수 아래 모여 있는 쓰레기봉투에 던지고 택시를 잡아탔다.

병신인가?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전부 소름 끼치게 느끼한 놈이었다. 나해성과는 무엇 하나 어울리는 것이 없었다.

한별은 택시 뒷좌석에 몸을 묻고 창을 열어 찬바람을 맞으며 휴대폰에 저장된 나해성의 사진을 화면에 띄웠다. 볼이 빵빵해진 채로 계산서를 보는 얼굴이 씹어 먹고 싶게 귀여웠다.

지금도 이렇게 귀여운데 어릴 땐 얼마나 귀여웠을지. 그러니까 저딴 폐기물 새끼가 꼬여 들었겠지.

화면 속 나해성에게 시선을 못 박은 한별은 혀를 끌끌 찼다.

뭐, 상관없다. 이제 말끔히 제거할 일만 남았으니까.

해성아. 박힌 가시 뺄 때 조금 따끔하겠지만 빼고 나면 아주 후련할 거야.

물론 그 가시가 빠진 자리는 저로 채울 예정이었다. 틈 하나 없이 아주 꽉.

* * *

김한별은 주말 내내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보고하듯 고해바치면서도 중간중간 만나자, 밥 먹자 하는 말을 농담처럼 툭툭 던졌다. 그럴 때마다 해성은 티 나게 못 들은 척했고 김한별은 딱히 그걸 걸고넘어지지는 않았다.

물론 해성도 김한별을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이동우에 대해 설명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에 만났던 사람이라고 별것 아닌 듯 설명이든 변명이든 하려면 이동우를 먼저 만나야 했다.

도장도 집에도 찾아오지 말라고, 이러는 거 불편하다고 말해야 했다. 어렵지도 과하지도 않은 요구였다.

자신에겐 이런 말을 할 권리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도장으로 향하는 해성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몇 년 만이던가. 정리한다고 하면서도 훔쳐보듯 몰래 살펴보고는 했던 지긋지긋한 마음을 마지못해 끊어 낸 후 군대에 입대하고 제대하고, 또 졸업을 하고 박재관의 도장에서 일을 하고 또 수년의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이동우는.

“후우….”

힘없는 숨이 해성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고개를 드니 어느덧 도장 건물 입구였다. 안으로 들어서려던 해성은 멈춰서 고개를 쭉 빼고 모퉁이 너머를 바라보았다.

한산한 길 위를 확인한 해성은 머쓱해서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오늘 김한별은 학교에 가는 날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괜히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 앱을 터치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주말 내내 줄줄이 이어진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하도 주고받은 메시지가 많아 대한민국에서 제일 느린 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때까지 반의 반절도 읽지 못했다.

고개를 휴대폰에 처박고 도장 안으로 들어선 해성이 신발장 앞에 서서 운동화를 벗으려고 할 때였다.

“…해성이 왔냐.”

평소와 다르게 경직된 박재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심결에 고개를 든 해성의 표정 역시 빠르게 굳었다.

“해성아.”

창틀에 기대앉은 이동우가 해성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운동복을 입은 저와 체육관 한가운데 있는 이동우.

“이런 데서 보니까 더 반갑네.”

‘안녕, 나는 이동우라고 해.’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렸던 나이지만 해성에겐 누구보다 어른 같았던 이동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눈앞을 어지럽혔다.

‘와. 해성이 진짜 운동 신경이 좋구나?’

다정한 칭찬에 어쩔 줄 몰라 목덜미까지 붉히던 제 모습과.

‘오. 잘했어. 축하의 의미로 형이 아이스크림 산다.’

학원 체력 테스트에서 1등을 했다고 슬쩍 자랑을 하면 머리를 두드리며 칭찬을 해 주던 그의 모습.

‘오늘 날씨 엄청 좋다, 그치?’

다 같이 먹을 과자와 음료수가 든 봉지를 양손 가득 들고 그와 함께 학원으로 돌아가던 길 보았던 초여름, 노을로 물든 하늘 같은 것들이.

끝까지 해성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던 그 찰나의 순간들이 다시 발끝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 * *

재관이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 간단하게 도장 청소를 끝낼 때쯤, 뜻밖의 인물이 도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관장도 되고 박재관 출세했네?”

장난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친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반갑다는 듯 보였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보았던 이동우의 모습은 재관에게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좋지 못한 정도가 아니었다. 운동 외에는 절대 주먹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철칙을 어기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

재관은 매트를 정리하느라 구부정하던 몸을 바로 세우고 이동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몇 번을 고사하다가 나간 학원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화장실을 다녀오다 들었던 대화가 아직도 재관에게 생생했다.

‘나해성 아직도 너한테 목매고 있냐?’

‘야. 이동우 불편하게 나해성 얘기는 왜 꺼내?’

‘뭐, 새끼야. 너도 궁금하면서. 박재관 보니까 나해성 생각나서 그런다. 저 새끼가 나해성 좀 예뻐했냐? 근데 나해성이 정작 꽂힌 건 이동우라니.’

‘입시 끝나고 박재관 군대 갔을 때 이동우한테 자기랑 안 만나 주면 죽어 버리겠다고 협박하고 난리 치고. 그게 몇 년 전이냐, 벌써.’

‘난 나해성이 그럴 줄 진짜 몰랐다.’

‘그 새끼 여자애들한테 인기도 많지 않았냐?’

‘근데 그때도 좀 묘하긴 했지. 땡볕에 굴러도 허여멀게 가지고.’

‘나해성 정도면 설 거 같기도 해?’

‘그럼 뭐 하냐. 자취방에서 이동우만 좆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데. 가족, 친구 다 내팽개치고! 아무도 안 만나고! 존나 소름 돋지 않냐?’

‘존나 편리할 거 같긴 하다. 필요할 때마다 가서 한 발 빼면 되잖아.’

‘시발. 야, 말 좀 해 봐. 남자랑 하면 어때? 하긴 했을 거 아니야?’

‘그냥 엎어 두고 박으면 가능할 거 같기도 한데? 나해성 피부도 존나 좋잖아.’

‘아, 미친 새끼야. 나해성 피부 좋은 건 왜 알고 있는데!’

해성을 두고 킥킥거리며 저들끼리 하는 저열한 이야기에 이동우는 낮게 웃을 뿐이었다. 재관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제대 후 해성에 대한 심상치 않은 소문을 듣기는 했다. 하지만 해성이 그런 추문 속 주인공이라는 것을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상상 자체가 되질 않았다.

그래도 혹시라도, 만약에라도 그 소문이 완전히 허황된 것이 아니라면 해성과 이동우가 제법 진지한 관계일 것이라 그렇게 믿었다. 재관이 알고 있는 평범한 연인 사이처럼, 해성도 이동우와 그런 사이일 것이라고.

재관은 처음으로 눈앞이 빨개질 정도로 화가 치솟았다.

제대를 하고 해성에게 전화를 했지만 반가운 목소리와는 다르게 만나자는 말에는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휴가를 나왔을 때도 매번 일이 있다며 저와 만나 주지 않았던 해성이었다.

그때마다 자취방에서 혼자, 언제 올지 모르는 이동우를 기다렸던 건가.

재관의 눈에는 아직도 체육관을 누비다 상기된 얼굴로 저를 보며 활짝 웃던 앳된 얼굴이 선했다.

고작 몇 년 사이에 알음알음 알고 지내던 이들 사이에서 해성에 대한 품평이 극단적으로 달라졌다. 재관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어쩌지 못해 문밖에 서 있기만 할 때였다.

‘그나저나 나해성은 군대 안 가냐?’

‘그러게. 지금 우르르 갈 때 아냐?’

‘미뤄야지.’

의아한 대화에 웃음기가 스민 목소리가 툭 끼어들었다.

‘미뤄?’

‘휴학.’

‘아. 그래서 나해성 1년 단위로 휴학하는 거야? 굳이 왜?’

‘스물다섯 넘은 남자 새끼 무슨 맛으로 안아?’

무미건조한 말투에 룸 안에 있는 이들이 환호했다.

‘이 새끼 이거!’

‘하긴. 지금이야 어린 맛에 그나마 놀아 주는 거지!’

‘오, 방금 존나 멋있었음.’

재관은 그대로 돌아서 술집을 나왔다. 서늘한 밤공기도 분노로 달아오른 재관의 뺨을 식혀 주지는 못했다.

그 후, 다시 몇 년이 지나고 만난 해성은 완전히 텅 비어 있는 채였다.

박재관은 현관에 서서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고 있는 해성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터트렸다. 도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동우를 본 저도 목덜미가 뻣뻣해질 정도로 놀랐는데 해성이라고 오죽할까. 저렇게 두 다리로 서 있는 것만으로도 대견할 지경이었다.

말없이 해성을 바라보던 박재관이 이동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하자.”

그러고는 관장실로 가서 패딩을 집어 들고 어깨에 걸친 후 저벅저벅 현관으로 걸어갔다.

“넌 들어가 있고.”

해성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고갯짓을 한 박재관은 여전히 창틀에 앉아 해성을 보며 웃고 있는 이동우를 재촉했다.

“일단 나가자.”

“아니.”

퍼뜩 정신이 든 사람처럼 해성은 박재관을 보며 말했다.

“내가.”

“….”

“내가 해, 형.”

박재관에게 이 이상 피해를 주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박재관은 고마운 사람이었지만 제 보호자가 아니었다. 이런 일에 엮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어요.”

김한별 앞에서만큼이나 박재관 앞에서도 한심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해성은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가까스로 움직였다.

“나가요. 볼일은 나한테 있는 거잖아요.”

이동우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탈 자신은 없어서 계단을 택했다. 해성이 앞장섰고 이동우가 그 뒤를 따랐다.

계단실을 나온 해성은 저도 모르게 유리문 밖을 확인했다. 해가 뜬 낮의 골목길은 환했고 그 위에 김한별은 없었다.

유리문을 밀고 나온 해성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시 부 수업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남짓. 최대한 도장에서 멀어지고 싶었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그럼에도.

“차 가지고 왔죠?”

이동우가 이곳, 이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이 몸서리쳐질 만큼 견딜 수 없었다.

“응. 갈까?”

해성의 말뜻을 어렵지 않게 이해한 이동우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해성은 습관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동우를 따라갔다.

해성이 차에 타자 이동우는 지체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고 보니 이동우가 모는 차를 탄 것은 처음이었다. 그가 운전을 할 줄 안다는 것도,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부터 줄곧 자기 차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알았지만 해성은 한 번도 그 차에 타지 못했다. 조수석은 늘 다른 사람의 차지였다. 그토록 앉아 보고 싶던 그의 옆자리였지만 기대만큼의 감흥은 없었다.

카페에 앉아 대화를 나눌 사이도 아니었고 그럴 만한 주제도 아니었다. 해성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을 때였다. 부서져라 쥐고 있던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살짝 손을 떼 확인한 화면에는 역시나 김한별의 이름이 주르륵 떠올라 있었다. 해성은 손바닥으로 화면을 가려 이동우에게서 김한별의 이름을 차단했다.

좀 더 달리던 차가 인적이 드문 길가에 멈춰 섰다. 길게 이어진 회색 벽을 따라 불법 주차된 차들이 가득했다. 그와 동시에 짧게 이어지던 진동이 길게 바뀌어 지치지 않고 울려 댔다.

“그때 그 아는 동생이야?”

“….”

“받지 그래?”

이동우가 천천히 조수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왜? 나랑 있다고 하면 싫어할 거 같아?”

불안으로 흔들리는 눈이 이동우를 향했다.

싫어한다. 김한별이 저를 싫어한다.

김한별이 제게 실망할 일이야 수도 없이 많다. 한순간에 돌아선다 해도 붙잡을 자격 따위는 없었다.

몰랐던 사실도 아니었다. 누구보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해성의 간절한 눈이 저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아챈 이동우가 해성의 손에서 거칠게 휴대폰을 빼 갔다.

“혀… 형!”

통화를 연결하는 손이 서슴없었다.

-….

해성은 숨이라도 새어 나갈까 입을 딱 다물었다.

제발, 제발.

-나해성.

이동우가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해성을 냉담하게 지켜보았다.

-해성이 형.

이러자고 이동우와 나선 것이 아닌데. 대체 왜. 저는 왜 항상 이런 식인 걸까.

해성이 또다시 자기혐오에 저를 가두려 할 때였다.

-시발.

“….”

-이 스토커 새끼가.

“….”

-또 무슨 수작질이야?

뜨문뜨문 끊겨 나오는 고저 없는 목소리가 아주 사나웠다.

해성은 질끈,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뜬 후 이동우의 손에서 휴대폰을 도로 가져왔다. 이동우는 딱히 그런 해성을 제지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해성은 살짝 시선을 내리깔아 이동우의 눈을 피하고 휴대폰을 귀로 가져갔다.

“나야.”

그러곤 무의식중에 나오려는 김한별의 이름을 꾹 눌러 삼키고 말했다. 되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해성은 한 번 더 세게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잠깐 볼일이 있어서 밖에 나와 있어.”

-나해성.

휴대폰 너머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눈치 빠른 김한별에게 이 상황이 어떻게 비칠지 뻔했다. 그런 김한별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도. 콱, 하고 숨통이 조이는 기분이었다.

“일 끝나면 바로 도장으로 들어갈 거야.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일단은 최대한 빨리 통화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런 후 이동우와의 볼일을 끝내고 김한별에게 전화해 사정을 설명할 생각이었다.

“별일 아니니까.”

별일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 말하며 김한별을 안심시키려는데 손목이 서늘한 손에 감싸였다. 해성은 시선을 들어 이동우를 바라보았다. 해성의 시선을 받아치며 이동우가 엄지로 손목 안쪽을 쓸어내렸다. 결국 해성은 뒷말을 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어야 했다.

잡힌 손목을 거둬 가는 동작은 다급했고 조금은 거셌다. 이동우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가 돌아왔다.

해성이 그 곪아 터진 마음과 함께 자취방을 정리한 후 입대를 하고 제대를 할 때까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연락 한번 하지 않았던 이동우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더해 가는 해성을 보며 안타까워하던 이동우였으니까. 군대까지 다녀온 시커먼 남자 새끼랑은 놀아 줄 마음 없다면서.

혼자 이동우를 정리하는 사이 해성은 이동우가 ‘놀아 줄 수 있는 남자 새끼’의 기준을 넘어섰다. 심지어 이제는 서른을 넘겼다. 미련을 논하기에 자신은 그에게 볼품없어진 지 오래였다.

이제 와서 뭘 어쩌자고.

“해성아.”

제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 저 목소리 이후에 이어질 내용이 무엇이든 해성을 부르는 저 목소리만큼은 언제나 다정했다.

“내가 너한테 잘못한 게 많다는 거 알고 있어.”

“….”

“하지 말아야 할 짓도 많이 했고.”

“….”

“미안하게 생각해.”

빠끔거리던 해성의 입술이 서서히 다물렸다. 순순한 인정과 말끔한 사과에 심장은 오히려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다.

고작 저렇게 몇 가지 문장으로 정리될 그런 시간들이었던가. 저렇게 쉽게.

“많이 후회했어.”

이동우는 다시 손을 뻗어 해성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해성이 뒤로 몸을 물려 피했다. 그러자 그는 허공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쉽게 마음 풀 거라고는 나도 기대 안 했어.”

엉킨 것이 있어야 풀 것도 있는 것이 아닌가. 제 마음은 진즉에 타서 재가 되어 버렸는데.

“내가… 내가 더 성숙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널 향한 마음을 인정하는 게 무서웠어.”

무서웠다. 무서웠다라.

“남자를 좋아하는 마음을 인정하는 게 쉬웠을 리 없잖아.”

‘해성이 네가 나한테 그런 말만 안 했어도 내가 이런 혼란을 겪을 일은 없었을 텐데.’

고등학교 졸업식 후, 대학교 입학을 앞둔 왁자지껄한 술자리에서 조용히 해성을 불러내 혼잣말하듯 말하던 그의 얼굴이 지금의 그와 겹쳐졌다.

그렇지. 맞다. 그때 제가 욕심만 내지 않았더라면, 상냥한 그가 제 마음을 받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이기적인 고백 따위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니 그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해 줘야 했다. 곁에 있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으니까.

맞아, 그랬었다.

“저는….”

“한 번만.”

겨우 트인 말문을 이동우가 막아 세웠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매달리는 이동우라니. 해성에게는 한없이 낯선 모습이었다. 저런 건 다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이 아니었던가.

과거와 현재가 제멋대로 얽혀 들기 시작했다.

해성이 그저 이동우를 바라만 보고 있는데 잠잠하던 휴대폰이 다시 몸을 떨었다. 이번엔 김한별은 아니었다. 해성은 이동우에게서 시선을 돌려 차에서 내렸다. 문을 닫기 전 눈을 내리깐 채 운전석에 앉은 이동우를 향해 당부했다.

“도장이랑 집으로는,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부탁드릴게요.”

“글쎄.”

“….”

“노력은 해 볼게. 대신.”

이동우는 고개를 기울여 해성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내가 한 말 진지하게 생각해 줬으면 해.”

힐끗 본 그 얼굴이 마치 해성이 들려줄 답을 알고 있다는 듯 보여서 해성은 문을 닫고 돌아섰다.

다행히 회색 벽 끝에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가 보였다. 도로로 가 택시를 잡아탄 해성은 이미 끊겨 부재중 통화로 넘어간 이름을 터치했다.

“형. 나, 택시. 지금 도장 가는 중이야. 1시 부 수업에 좀 늦을 수도 있을 거 같아.”

담담한 말투에 잠시 말이 없던 박재관은 월급에서 까기 전에 당장 튀어오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그 뒤에 섞여 있는 까르륵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해성은 뒷좌석 시트 위에 늘어져 눈을 감았다.

도장에 도착하니 막 수업을 시작한 아이들이 해성을 보며 좋다고 팔짝팔짝 뛰었다. 왜 이제 오시냐며, 정말 자신들이 말을 안 들어서 도망갔던 거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들은 해성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리며 이제부터 말을 잘 듣겠다고 맹세까지 했다.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기습적으로 얻어맞은 사람치고는 그럭저럭 하루를 잘 보냈다. 늦은 오후엔 학교를 끝내고 온 최지민까지 합류했다.

“넌 진짜, 친구 없냐?”

“저 인기 많아요. 아시잖아요.”

해성이 저녁으로 시킨 짜장면을 젓가락으로 들어 올린 채 반기자 최지민이 무덤덤하게 화답했다. 틀린 말은 아니라 해성은 하던 식사나 마저 했다.

퇴근 시간이 되자 내내 별다른 말이 없던 박재관이 관장실 문 앞에 서서 패딩을 껴입는 해성을 힐끔거렸다.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시지?”

“술 사 줄까?”

묻고 싶은 말은 죄다 뒤로하고 고작 한다는 말이 ‘술 사 줄까?’였다. 해성은 비식, 웃음을 터트렸다.

“됐다.”

“나해성.”

“형.”

해성은 패딩 주머니에 손을 꽂고 박재관의 앞으로 가서 섰다.

“절대 형이랑 도장에 피해 가는 일 없게 할게.”

해성의 말에 박재관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야, 인마.”

“그리고 나도 이제 열아홉 어린애 아니고.”

그러다 이어진 말에 묵직한 숨을 터트렸다.

“해성아.”

“그럴 체력도 안 된다, 이제.”

“….”

“비 오면 뼈마디도 쑤시는 거 같고. 무릎도 아픈 거 같고. 나도 이런데 형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자 박재관이 허리에 양손을 얹고 콧김을 내뿜었다.

“나 아직 한창이거든?!”

“그래, 뭐.”

박재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나와 줄넘기를 정리하는 최지민에게 인사했다.

“간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래. 적당히 해라, 적당히.”

“재밌어서 하는 건데요?”

해성은 정리하던 줄넘기 중 하나를 펼쳐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갑자기 줄넘기를 하는 최지민을 잠시 구경하다 도장을 나왔다.

한 칸, 한 칸,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해성을 따라 센서 등이 켜졌다. 아주 천천히 1층에 도달한 해성은 마찬가지로 느릿느릿 계단실을 나왔다.

환했던 대낮, 비어 있던 골목길은 어두워졌고 그 위에 김한별이 있었다. 해성은 멈춰 서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 유리문 너머 뿌연 김한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때는 바랐었다. 매일 꿈꾸고 빌었었다. 제발 이동우가 돌아오길. 사실 제게 머무르지도 않았던 이동우는 떠난 적도 없는데 그때는 그것도 모르고 무작정 빌었다. 컴컴하고 차가운 자취방 문을 열고 들어와 두 팔 가득 저를 안아 주며 다정하게 달래 주기를 빌고 또 빌었다.

한때는 그토록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는데, 왜 이런 기분인 거지? 심장은 왜 모래 위를 뒹군 것처럼 이토록 까슬거리는 건지.

그건 아마도.

해성의 발이 다시 움직였다.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박동했지만 해성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유리문을 열고 나가자 김한별이 해성에게 다가왔다.

“가자.”

목적지를 밝히지 않은 말에도 해성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김한별을 따라갔다. 건물 뒤 주차장으로 간 김한별은 조수석 문을 열어 해성을 태우고 자신도 운전석에 앉았다.

“저기, 김한별.”

김한별을 부르던 해성이 갑자기 훅 하고 끼쳐 오는 청량한 향에 흠칫 몸을 떨었다. 키스라도 할 듯이 해성에게 몸을 기울였던 김한별이 까만 눈으로 해성을 훑어보다 멀어졌다.

“벨트 해야지, 형.”

해성은 어느덧 몸에 채워진 안전벨트를 잡고 눈을 끔뻑거렸다.

“출발할게.”

입꼬리만 끌어 올려 웃은 김한별은 조금은 성급하게 운전대를 비틀었다.

도착한 곳은 김한별의 집이었다. 조용히 얘기하기에 나쁜 장소는 아니었다. 해성은 빠르게 솟구치는 엘리베이터에 먹먹해진 귀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김한별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정면을 보고 있던 김한별이 해성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싱긋, 웃었다. 누가 봐도 심기가 불편한 모습이었다.

해성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적당히, 김한별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의 사실만 걸러서 말해 줘야 하는데 그게 어느 정도 선인지 감이 오질 않았다.

해성이 한참을 골몰하던 차였다.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던 다리가 멈추고 등 뒤에서 둔탁한 소음이 들려왔다.

“어?”

어느새 김한별의 집 안이었다.

“아….”

멍청한 소리만 흘리고 있던 해성의 몸이 단단한 팔에 감싸였다. 이어 입술이 틀어막혔다. 뱀처럼 미끄러져 입 안을 헤집던 혀가 경직된 혀를 휘감아 빨아들였다. 반사적으로 김한별을 밀어 내기 위해 어깨에 얹었던 손이 어깨를 강하게 틀어쥐었다가 위로 올라가 김한별의 목덜미를 세게 끌어안았다.

김한별에게 안긴 채 떠밀리듯 뒷걸음질 치던 해성의 등에 부드러운 가죽이 닿았다. 김한별이 고개를 뒤로 물리자 젖은 표피가 질척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주차장에서 했다가는 나해성한테 뺨 맞을까 봐 얼마나 참았는지 몰라.”

다리 사이에 해성을 가두고 상체를 세운 김한별은 가쁜 숨을 고르는 해성을 내려다보며 해성의 한쪽 다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운동화를 벗겨 내 아무렇게나 던졌다.

“내가 이렇게 참을성이 좋은지 나해성 만나고 알았다니까?”

“하… 김한별.”

“아까 낮부터 도장에 쳐들어가서 너 데리고 나오고 싶은 거 참느라 좆이 다 터질 뻔했어.”

“그거랑… 좆 터지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

“있더라고.”

검은 맨투맨과 그 안에 겹쳐 입은 흰 티셔츠까지 한 번에 벗어 던진 김한별이 느리게 상체를 기울였다. 어느새 도복 상의 안으로 들어온 손이 가슴 위를 어루만졌다. 은근한 자극에 기립한 젖꼭지를 김한별이 검지로 툭툭 건드렸다. 불도 켜지 않은 채였지만 거실 통창을 통해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 덕에 둘은 어렵지 않게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해성은 옆으로 길게 난 눈꺼풀 아래 일렁이는 눈동자를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니까… 그게.”

“나랑 그 새끼를 두고 저울질하고 싶어?”

하지만 이번에도 김한별이 한발 빨랐다. 해성은 흡사 뒤통수라도 후려 맞은 사람처럼 경악했다.

“무슨.”

“그래. 그래도 좋아. 아니, 나는.”

그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 김한별이 혀로 해성의 목덜미와 턱을 핥은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형이 그랬으면 좋겠어.”

김한별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 해성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김한별의 눈을 바라만 보았다. 하지만 짙은 까만 눈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방금 전 김한별이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김한별은 저를 좋아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저에게 돌진했고 직접 좋아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그런 거라면 저런 말을 할 수 없는 거 아닌가? 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적어도 해성이 아는 것으로는 그랬다.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과 저를 두고 저울질하라는 말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

혼란스럽던 눈이 차차 가라앉았다. 그걸 지켜보는 김한별의 눈이 일순 날카롭게 반짝였다.

“별로, 그렇게까지. 그럴 필요는 없어.”

해성의 속눈썹이 실망한 눈빛을 숨기기 위해 분주하게 깜빡였다.

김한별의 입장에서 굳이 이런 추잡한 일에 발을 담글 필요는 없었다. 제게 고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곤란할 수 있었다. 적당히 운을 뗐으니 알아들으라는 말일지도 몰랐다.

그냥, 알아서 떨어져 나가 주는 게.

그것도 모르고 하루 종일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김한별에게 잘 설명할 수 있을까.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헤어진 연인이 불현듯 옛 생각이 나 가벼운 마음에 연락을 해 온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면 될까? 그와 둘이 만난 것에 김한별이 화를 내지는 않을까 하는 엉뚱한 기대도 했다. 왜, 그 사람을 만난 거냐며 다그치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도 했다.

그랬었는데.

“또, 또.”

차마 김한별을 보지 못한 채 시선을 떨구고 있던 해성의 눈이 크게 떠졌다. 벌어진 입술이 다급히 달싹거렸다.

“혼자 어디까지 땅을 파고 들어가시려는 건지.”

해성의 고환과 성기를 한 번에 움켜쥔 김한별이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며 말했다.

“김한, 별.”

싫었다. 지금 상황에서 김한별의 아래 깔려 흥분해서 짐승처럼 헐떡이고 싶지 않았다. 해성은 다급하게 김한별의 손목과 어깨를 각각 잡고 밀어 냈다.

“하지, 마라.”

“왜? 내가 그 새끼한테 질 것 같아서 그래?”

“….”

“말해 봐.”

해성이 입을 다물자 김한별이 성기를 쥔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해성은 입술을 깨물고 소리를 참아 냈다.

“내가 그 새끼한테 질 거 같냐고. 대답해, 나해성.”

“읏!”

하지만 순간적으로 강해진 악력에 해성은 결국 참지 못하고 응축된 신음을 터트렸다.

“내가, 널 다른 사람한테 순순히 보내 줄 거 같냐고.”

입술 위로 비스듬히 기운 폭신한 입술이 닿았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사람 잘못 봤어, 너.”

입술을 맞댄 채 숨처럼 이어진 말을 끝으로 혀가 입 안으로 침범했다. 경직된 혀를 낚아채 그대로 강하게 빨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성기를 쥐고 흔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뜨거운 손바닥의 열기가 성기를 감싼 천을 통과해 느껴졌다. 반강제적으로 느껴지는 쾌감에 해성의 성기에서 흐른 쿠퍼액으로 바지 안이 온통 엉망으로 젖어 들어갔다.

해성이 발버둥 치자 김한별이 고개를 뒤로 물렸다. 입 안을 헤집던 혀가 뱀처럼 스르륵, 미끄러져 나갔다.

“싫어? 하지 마, 형?”

“무슨, 하아, 무슨 자신감인데?”

“나?”

“하, 그래, 너.”

해성이 거듭 묻자 김한별은 흐음, 하고 고민하는 척을 하며 슥슥, 해성의 성기 위에서 손을 움직였다.

“야.”

“음.”

“알, 알아.”

뿌리와 기둥을 뭉근하게 문지르는 손길에 해성은 신음을 흘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말했다.

“너, 잘났지. 잘, 났어.”

해성의 말에 김한별이 한쪽 입꼬리를 위로 당기며 해성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잘났는데?”

“아으!”

기습적으로 허리를 튕기며 제 발기한 성기를 해성의 성기 위에 처박는 바람에 해성은 꼴사나운 비명까지 내지르고 말았다.

“응? 형, 나 어떻게 잘, 났어?”

허리 짓을 할 때마다 김한별의 음성도 뚝뚝 끊어졌다.

“잠, 잠깐.”

“왜, 말, 해 줘.”

“잘났어…! 잘났다고! 그래도, 하, 대체 이건 무슨 자신인데. 만약에, 만약에, 내가.”

만약에 자신이 또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면, 겨우 발을 뺀 과거에 다시 파묻히게 되면, 그러면 김한별과는 이대로 끝이었다.

“나해성.”

가까스로 올려다본 시선에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이 들어왔다. 반듯한 이마와 미간 짙은 눈썹과 쌍까풀 없이 긴 눈. 얼굴 중앙을 가르는 우뚝 선 콧대와 평소와는 다르게 일자로 다물린 입술.

“네가 그 새끼랑 한 건 그냥 운 나쁜 연애였을 뿐이야.”

그냥, 운 나쁜 연애?

“좆같은 새끼 만나서 고생하다 정신 차리고 헤어진 더럽게 운이 나빴던 연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김한별이 하얗게 질린 두 뺨에 피어오르는 열기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어느새 해성의 바지 안으로 들어온 손이 흥건하게 젖은 성기를 꺼내 이미 완전히 발기해 퉁퉁 핏줄을 튕기는 것과 맞잡았다.

“그 새끼가 대단해 보였어?”

당연한 거 아닌가. 형은, 형은 남자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저를 가엽게 여겨 치가 떨리는 걸 참고 만나 주었다. 이성들에게도 언제나 인기가 많았던 형이. 그뿐만이 아니라 형은 운동도 공부도 못하는 것이 없었다. 어떤 것을 물으면 답을 망설인 적도 없었다. 실력에 비해 좋지 못한 학교를 간 건 형 탓이 아니었다. 그저 운이 따라 주지 않았을 뿐인데…. 제가 형보다 좋은 학교를 갈 수 있었던 건 형보다 운이 좋았을 뿐이었던 거고.

‘해성아, 네 실력에 그 학교 들어간 건 천운이야, 알지?’

“그래, 그럴 수 있어. 사랑, 시발, 사랑에 눈이 돌면 그럴 수 있지. 근데 형.”

“아!”

불기둥 같은 성기가 고환과 뿌리가 연결된 부위를 푹푹 찍어 눌렀다.

“이번엔 똑바로 봐. 과연 그 대단하셨던 분이, 하, 여전히, 대단하신지. 정말 대단했던 건지. 응?”

해성이 사정하자 김한별이 발갛게 익은 해성의 귀두에 맞춰 정액을 쏟아 냈다. 진득한 정액이 해성의 성기를 타고 흘렀다.

“그건 그렇고. 형, 좀 혼나야겠어.”

쑥, 하고 바지와 속옷이 허물 벗겨지듯 탈의되었다. 도복 상의를 해성의 목까지 끌어 올린 김한별은 낮게 들썩이는 가슴팍 위, 단단해진 유륜과 그 중앙에 기립한 젖꼭지를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체액에 어지러운 손바닥으로 살살 문질렀다. 손바닥 아래에서 젖꼭지가 굴려지는 감각에 해성은 소파 가죽을 긁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나쁜 아저씨 함부로 따라가래?”

해성의 왼쪽 무릎 아래 손을 넣어 위로 든 김한별은 어느새 반쯤 선 제 성기를 도톰하게 부어오른 회음부에 대고 허리를 흔들었다.

“혼나야겠지?”

“그냥, 할 거면 그냥.”

“안, 되겠네. 아직도 자신의.”

“읏!”

“잘못을, 몰라?”

김한별이 대뜸 귀두부터 처넣었다.

“읏! 너는, 지금 그걸 그냥.”

“괜찮아. 들어가.”

“무슨 미친, 으, 소리를.”

“우리 처음 할 때도 그랬잖아?”

빨려 들어온 귀두가 입구에서 얕게 추삽질을 했다. 조금만 기회가 되면 그대로 꽉, 다물어지려는 입구에 김한별의 이마에도 땀이 맺혔다.

“그런, 다고, 안 들어가!”

제 딴에는 입구를 늘려 보겠다고 하는 거 같은데 그게 될 리가. 고개를 젓던 해성의 눈이 크게 띄었다.

“된, 다니까.”

귀두에 이어 기둥이 쑥,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왜인 줄 알아?”

김한별은 해성의 입술을 혀로 핥으며 뇌까렸다.

“우리는, 하, 시발, 속궁합도 존나게, 좋거든.”

언제 조심스러웠냐는 듯, 약간의 틈이 생기자마자 김한별이 단번에 뿌리까지 처박았다. 내벽 전체를 압박하는 성기 때문에 해성은 다시 발기했다. 김한별이 그런 해성의 상태를 확인하고 비식, 웃었다.

“아, 이거 벌인데.”

퍽-!

귀두만 남기고 빠져나간 성기가 다시 안을 찌르고.

“벌, 받는 사람이, 너무 좋아하잖아.”

다시 빠져나갔다 찌르는 것을 반복했다.

상체를 세운 김한별은 해성의 두 다리를 어깨에 걸치고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 귀로 흘러 들어오는 학학, 거리는 안달이 난 숨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분명했다. 해성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자 김한별이 어깨에 걸친 다리를 내려 제 허리를 감게 하고 상체를 숙였다. 턱을 잡아 돌리는 동작이 빠르고 거침없었다

“얼굴 돌리지 말고.”

흐릿한 해성의 시야에 소유욕과 정복욕으로 안달이 난 김한별이 잡혔다.

“난 절대, 지는 내기는 안 해.”

“….”

“그러니까 형도, 허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표정 따위는 다 날려 버린 얼굴과 사나운 목소리에 어째서 안심이 되는 건지.

해성은 저야말로 미친놈이 아닌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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