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4)

러브 어택(Love Attack) 2권

한산한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리던 택시가 도심 한복판에 있는 주상 복합 아파트 앞에서 멈췄다.

해성은 택시 기사에게 카드를 내미는 김한별을 두고 먼저 택시에서 내렸다. 찬바람이 목덜미를 스쳐 지났다. 다가오는 봄에게 쫓기면서도 여전히 맹렬한 추위는 달아올랐던 해성의 손을 단숨에 식혀 버렸다.

식은 손을 패딩 주머니에 꽂고 물끄러미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저 고층 건물의 가격을 정확하게는 몰라도 엄청나게 비싸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스물네 살의 김한별이 저 비싼 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그간 김한별이 보여 준 행동들로 미루어 봤을 때 그가 얼마나 돈이 많은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한밤중인데도 조명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아파트 입구와 그 주변이 환했다. 차라리 어두웠으면 좋았을 텐데. 도장 건물 주차장처럼. 자신의 집 앞 골목처럼. 그러면 지금 어쩔 줄 모르는 자신의 얼굴이 조금은 가려졌을 것이다.

“갈까?”

어느새 옆에 선 김한별이 제 어깨로 해성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해성은 그런 김한별을 바라보며 일부러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

“좋은 데 산다?”

“긴장해서 허세 부리는 거 너무 귀엽다.”

이 새끼가.

긴장이고 나발이고 순간 울컥했다. 하지만 여기서 진짜 울컥해 봐야 김한별에게 놀림감만 더 제공해 주는 꼴이었다. 해성은 돌아서 당차게 걸었다. 그러자 김한별이 틈 없이 따라붙었다.

“너무 부담스러워? 나 이사 가? 형 아랫집으로 갈까?”

“까분다.”

“이따가 더 까불 건데.”

“….”

“이해해 줘. 나 지금 너무 떨려서 그래.”

“떨리긴.”

언제나 여유가 넘쳐흐르는 김한별이었다. 씨알도 안 먹힐 엄살에 해성이 고개를 돌리려 하자 김한별이 해성의 손목을 잡아 패딩 주머니 속에 갇힌 손을 빼냈다.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위에서의 스킨십에 해성이 경직되어도 김한별은 반사적으로 굳은 손을 코트 안쪽, 제 가슴 위에 가져다 댔다.

“안 느껴져?”

“….”

“엄청 빠르게 뛰잖아.”

부드러운 캐시미어 니트 아래에서 쿵쿵거리는 심장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제 주인과 어울리지 않게 분주한 심장이 신기해 가만히 박동하는 심장을 느끼고 있던 해성은 불현듯 눈에 띈 김한별의 옷차림을 훑어 올렸다.

짙은 회색 슬랙스에 검은 니트와 롱 코트.

“그러네.”

“….”

“데이트한다고 꾸미고 나온 거 보면.”

“그걸 이제 알아본 거야? 나 진짜 섭섭해지려고 해.”

시선 안에 들어온 김한별이 무표정한 얼굴로 해성을 보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그 얼굴이 어째서인지 정말 섭섭해 보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해성이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자 김한별이 입술을 기울였다.

“먼저 반한 게 죄니까.”

또다. 덜컹하고 내려앉은 심장이 바스러질 것만 같은 기분.

해성은 눈을 내리깔고 여전히 김한별의 가슴 위에 닿아 있는 자신의 손을 멀뚱히 응시했다. 강하고 세차게 뛰는 심장.

이 심장이, 제게 향하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김한별.”

겨우 이름 하나 불린 것에 요동치는 까만 눈동자. 그 눈동자에 속절없이 시선을 빼앗겼다. 아니, 어쩌면 빼앗긴 것은 고작 시선 따위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렇게 발버둥 쳤으면서. 이렇게나 쉬웠다.

“한별아.”

왜 제 마음은 언제나 이토록 쉬운 건지.

김한별의 말이 맞다. 자신은 겁쟁이였다. 지금도 이렇게 하얗게 굳은 손가락이 덜덜 떨릴 정도로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다. 그럼에도.

“나 너랑 하고 싶어.”

김한별을 두고 도망칠 생각이 들지 않는 걸 보니.

“빨리.”

이제는 까마득한 지난날,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저는 정말 구제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조금이나마 머물러 있던 표정마저 완전히 지워 낸 채 해성을 바라보던 김한별이 쓱, 오연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하여튼.”

“….”

“사람 환장하게 하는 데 뭐 있다니까.”

참을 수 없다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고 소리 없이 웃던 김한별이 해성의 손을 강하게 틀어쥐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자 무슨 호텔 로비 같은 곳이 나왔다. 정장을 입고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에 기겁해 해성이 손을 빼내려 하자 김한별이 천천히 손을 놓아주었다. 김한별에게 잡혀 있던 손을 주무르며 해성은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김한별은 그런 해성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다행히 엘리베이터에는 둘뿐이었다. 해성은 엘리베이터 안 보안 카메라를 힐끗 보고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서서 습관적으로 숫자판만 쳐다보았다. 도장 건물의 엘리베이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던 숫자가 55라는 숫자에서 멈췄다.

“높은 데 사네.”

차라리 입을 다물면 좋겠는데 긴장을 해서 그런지 자꾸만 입이 나불거렸다.

“높은 데 싫어해? 이사 갈까?”

해성은 진담처럼 농담하는 김한별을 두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내리긴 했는데 양쪽으로 쭉 뻗은 복도 중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자 해성을 따라 내린 김한별이 뒤에서 해성의 양쪽 어깨에 손을 얹고 이쪽으로, 하며 방향을 틀었다. 기차놀이를 하듯 걷던 둘의 걸음이 매끈한 검은 문 앞에서 멈췄다.

“들어가자.”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비밀번호를 눌렀다. 이어 문이 열리고 약간 세게 해성을 안으로 밀어 넣은 김한별이 문을 닫으며 말했다.

“번호 외웠지?”

네 집 비밀번호를 내가 왜 외워야 하냐는 말장난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해성이 입을 다물자 김한별이 미간을 구기고 검지로 제 뺨을 톡톡 두드렸다.

“아니다. 비밀번호 아예 바꿔야겠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척하던 김한별이 해성을 보며 씩 웃었다.

“우리 처음 만난 날로.”

그러고는 해성의 턱을 감싸고 엄지로 뺨을 쓸었다.

“난 상관없는데, 씻을 거지?”

“어.”

해성의 단답에 김한별이 상체를 기울여 입을 맞췄다. 워낙에 기습적이라 해성이 흠칫 몸을 떨자 김한별이 이번엔 뺨에 짧게 키스했다.

“진짜 왜 이렇게 귀엽냐. 미치겠다.”

김한별의 뺨 위쪽에 인디언 보조개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해성은 김한별의 목덜미를 잡아당기며 그 위에 입술을 붙였다 뗐다.

“너야말로 귀엽게 굴지 말고.”

“….”

“욕실 어디야?”

저보다 키도 덩치도 훨씬 큰 김한별이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어졌다.

벗은 옷은 가지런히 접어 세면대 옆에 올려 두었다. 샤워를 한 후 말끔하게 욕실 정리까지 마쳤다. 벽에 걸린 샤워 가운 앞에 선 해성은 빳빳한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 풀었다 했다.

김한별의 집에 와 있다. 흔해 빠진 모텔도 아니고 호화스러운 호텔도 아닌, 김한별의 집.

감히 자신이 김한별의 집에. 이래도 되나.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해성아.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네가 왜 내 집에 와. 네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이따 밤에 갈 수도 있으니까.’

마침내 독립을 한 그 몰래 준비한 집들이 선물을 감추고 조심스레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이었다.

해성의 눈이 질끈 감겼다.

“후우.”

일부러 길게 숨을 내쉬며 안개처럼 머릿속을 점령한 목소리를 내몰았다. 눈을 뜨고 가운을 몸에 둘렀다.

속은 불길이라도 치솟은 듯 뜨거운데 손은 눈 속에 파묻혀 있었던 듯 차가웠다. 손바닥으로 가볍게 뺨을 두드린 해성은 욕실 문 앞에서 다시 한번 멈춰 서 있다가 입술을 깨물고 문을 열었다.

“나해성.”

그러자 맞은편 벽에 기대서 있던 김한별이 나직이 해성을 불렀다. 젖은 머리가 이마에 흐트러진 채 해성과 같은 샤워 가운을 입고 있는 김한별이 너무나도 어려 보였다.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벽에서 등을 떼어 낸 김한별이 느릿느릿 다가와 해성의 앞에 섰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

“나는 너랑 섹스만 할 생각 없어.”

해성에게 뻗어 온 두 손이 각각 머리와 등을 옭아맸다.

“물론 너랑 하는 섹스가 환장할 정도로 좋긴 하지만.”

“….”

“내가 좋아하는 건 너거든.”

해성의 뺨에 닿았던 입술이 귀로 미끄러졌다.

“내가 형 좋아해.”

‘형…. 제가… 형 좋아해요. 죄송해요…’

좋아한다는 말 뒤에 사과가 뒤따랐던 제 고백과는 다르게 김한별의 고백 뒤에는 담대한 입맞춤이 뒤따랐다.

* * *

‘알아 달라는 거는… 아니구요. 아, 그리고 형이랑 뭘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게… 그러니까…. 그냥 말하고 싶었어요.’

충동적인 고백은 참 멋없게 흘러나왔다. 무언가 제 마음을 설명할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달싹이던 입술은 서서히 다물렸다.

사실 조금만 들여다봐도 거짓투성이인 고백이었다.

알아 달라 하지 않으면서도 어쩌면 형이 알아주지 않을까 기대했고, 형과 뭘 하지 않겠다 말하면서도 형과 함께하는 일이 많기를 바랐다. 형은 친절하니까. 형은 상냥하니까. 이해심도 많고 누구보다도 어른스러운 형이니까.

옷이라도 제대로 된 걸 입고 있을 때 말할걸. 시선 끝에 학원 이름이 새겨진 운동복이 걸렸다. 제게는 교복보다도 익숙한 옷차림이었다. 그래도 이 옷을 입고 형과 보낸 시간이 많으니 나름 의미가 있는 걸까? 기대와 설렘으로 두 뺨이 발그레 달아오르던 참이었다.

‘해성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는 다정하기만 했다.

그래, 어쩌면 형도.

내내 아래를 향해 있던 고개를 들자 기이한 만족으로 일렁이는 얼굴이 보였다. 이상했다. 지금까지 저런 얼굴을 한 형은 본 적이 없었다.

‘너 보기보다 이기적이다.’

유려하게 휘어진 입술에서 이어진 말에 요란스럽게 맥동하던 심장이 모퉁이부터 얼어붙기 시작했다.

“나는….”

맞붙었다 떨어진 후에도 두 입술은 짤막한 입맞춤을 이어 갔다. 밀려드는 힘을 이기지 못해 벽까지 떠밀린 해성이 입을 열자 김한별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해성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어렴풋이 짐작만 하던 때와는 달랐다. 김한별의 마음의 무게나, 그 깊이가 어찌 되었건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이상 무언가 적절한 답을 내놓아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물론 이제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이나 학창 시절에 종종 이성에게 고백을 받은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마다 해성의 답은 늘 하나였다.

‘좋아해 줘서 고마운데 미안.’

그리고 처음으로 먼저 했던 고백에서 되돌아온 답은…. 그런 식의 답을 김한별에게 들려줄 수는 없었다.

“좋아해.”

할 말을 찾기 위해 분주하던 해성의 머리와 마음이 재차 이어지는 고백에 차차 가라앉았다.

“좋아해.”

“….”

“내가 형 좋아해. 내가 나해성 좋아해.”

쉬지 않고 좋아한다는 말을 쏟아 내며 김한별이 해성의 다리 사이로 제 허벅지를 들이밀었다.

“…야.”

“아, 진짜 큰일 났다. 형이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하지. 진짜 좋은데. 나 이제 어떡해?”

절절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중심을 문지르는 허벅지의 기세는 등등했다.

“해성아? 응?”

형이라고 했다가 해성이라고 했다가 아주 난리가 났다. 해성은 물끄러미 김한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한별이 또 좋아해, 했다. 희한하게도 그 순간 비식 웃음이 샜다.

“뭘 어떻게 해.”

해성은 김한별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미끄러트려 두툼한 상체를 감싸 안았다.

“하려던 거 계속해야지.”

짧은 웃음 뒤 이어진 무덤덤한 말투에 김한별이 하얗고 곧은 목덜미에 고개를 처박고 낮게 웃었다.

“하여튼.”

“….”

“섹시하기는.”

“야…!”

목덜미에 더운 숨이 퍼지며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는 순간 해성은 오금이 잡힌 채 들렸다. 반사적으로 김한별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매달렸다. 김한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기한 성기가 해성의 엉덩이를 퉁퉁 두드렸다.

“고백하면서 세우는 놈도 있냐.”

“무슨 소리야.”

김한별은 해성을 안은 채 침대 위로 조심스럽게 엎어졌다.

“고백하기 전부터 세우고 있었는데.”

역시나 웃긴 말도, 웃을 상황이 아닌데 웃음이 터졌다. 심장은 여전히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고 식은 손끝은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었음에도 자꾸만 웃음이 났다.

“이봐.”

휘어진 눈꼬리에 해성의 것과는 다른 뜨겁게 달궈진 손끝이 닿았다. 이어 그만큼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눈꼬리, 뺨을 거친 입술이 해성의 다물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렇게 좋아하면서.”

해성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가셨다.

“누구 좋아서 미치겠는 건 처음이야.”

그런 해성을 보며 김한별이 무던하게 지껄였다.

“아무래도 형이 네 첫사랑 같은데?”

“이게 어디서 약을 팔아?”

“우리 사이에 이렇게나 믿음이 부족하다니.”

김한별이 어설프게 몸을 가리고 있는 가운을 잡아 벌리고 손바닥으로 얕게 들썩이는 하얀 가슴 중앙부터 죽, 쓸어내렸다.

“읏!”

그러고는 발기하기 시작한 연분홍빛 성기를 가차 없이 움켜쥐었다.

“사랑은 차고 넘치는데.”

“하아….”

강약을 조절하며 능숙하게 성기를 주무르는 손길에 해성의 입에서 달뜬 숨이 터져 나왔다. 김한별은 해성의 머리맡에 팔꿈치를 대고 축축하게 젖어 들기 시작하는 제 손안의 성기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들어 흥분이 감돌기 시작하는 해성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해성이 차오르는 쾌감을 어쩌지 못해 왼쪽 눈을 찡그리자 순간 성기를 쥔 손에 악력이 거세졌다. 해성의 성기에서 줄줄 흘러내린 쿠퍼액이 거센 손짓 덕분에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혀가 보일 정도로 벌어진 입에서는 연신 억눌린 신음이 흘렀다. 자제하려 애쓰는 그 소리가 상대를 더 흥분시킨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질 나쁜 생각이 들게 한다는 것까지도.

마른 허리가 오르내릴 때마다 팽창된 근육이 드러났다. 벌어진 다리 안쪽 근육이 수축하며 경련했다. 이어 허공으로 쏘아진 정액이 하얀 가슴팍에 흩뿌려졌다.

길게 숨을 내쉬는 빨간 입술과 그 안의 혀. 그리고 성기와 같은 색으로 물든 뺨. 발긋하게 달아오른 눈가.

해성이 방금 뽑아낸 정액만큼이나 끈적하고 진득한 시선이 흥분의 흔적을 핥아 올렸다.

몸을 휘도는 사정감에 눈을 감고 있던 해성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멀거니 김한별을 바라보다 그의 어깨를 검지로 쿡 찔렀다.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거대한 몸이 미약한 동작에 밀려나 풀썩, 침대 위에 눕혀졌다. 해성은 천천히 그 위에 올라탔다.

해성은 풀어 헤쳐진 가운을 벗어 침대 아래로 던지고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정액이 묻은 가슴과 체액으로 엉망이 된 아랫배와 성기.

사정을 마치고 늘어진 성기 주변에는 체모가 하나도 없었다.

해성은 김한별이 체모가 없는 것에 대해 언제쯤 물어 올까, 또는 언제쯤 장난스러운 농담을 해 올까, 걱정했었다. 둘러댈 적당한 말도 고민했었다. 하지만 김한별은 그러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해성은 정말 김한별이 제 지난 일들을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마치 알고 묻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해성은 그것이 싫었다.

남자 성기를 조금이라도 덜 거북하게 만들려면 그 털 좀 어떻게 하라는 말 하나에 얼마 있지도 않은 털을 전부 없애겠다고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던 나날들 따위는. 그런 것 따위는 김한별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좋아해.”

제 위에 앉아 눈만 끔뻑이던 해성이 입을 떼자마자 김한별이 선수를 쳤다.

“그냥 좋아하는 거 아니고.”

“….”

“많이 좋아해.”

해성은 생글거리는 얼굴을 보며 몸을 숙이고 김한별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쪽.

그리고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인 소리가 나게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나도.”

“….”

“뭐, 너 싫지는 않아.”

언뜻 심드렁한 목소리였지만 그 목소리를 내기 위해 해성은 제 안의 모든 용기를 쥐어 짜내야 했다. 이런 말을 감히 해도 되는 건지 초조한 마음과 만성이 된 의심을 꾹꾹 누르고 간신히 고백에 대한 답을 들려주었다.

“아!”

그리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몸이 뒤집혔다. 어느새 해성의 위에 앉은 김한별이 거추장스럽다는 듯 가운을 벗으며 입술을 기울였다.

“쌀 뻔했잖아, 형.”

“넌 맨날 쌀 거 같냐?”

“응. 네가 내 이름만 불러 줘도 쌀 거 같아. 눈치 못 챘어? 엄청 참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기에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김한별의 눈이 좀 돈 거 같기는 했다.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싸지는 않을 테니까. 이름 좀 자주 불러 줘.”

상체를 둥그렇게 만 김한별이 응석을 부리듯 해성의 뺨에 제 뺨을 문질렀다.

“김한별.”

부르라고 지은 이름 못 불러 줄 것도 없었다.

“…한별아.”

성을 뺀 이름은 조금 주저하며 흘러나왔다. 고개를 든 김한별이 가만히 해성을 바라보았다.

“불러 달래서 불러 줬는데…. 뭐, 불만 있냐?”

그 빤한 시선에 민망해진 해성은 얼굴을 붉히고 툴툴거렸다.

“또.”

“….”

“또 불러 봐.”

“…김한별.”

“또.”

“김한별.”

“또.”

“김한별.”

한 번 더 시키면 성질을 내려고 했는데 다행히 김한별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씩 웃었다.

“와, 내가 원래도 내 이름을 좋아하긴 했는데 지금 한 오백 배는 더 좋아졌어.”

“그래…. 그거참 축하한다.”

이름 하나에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살짝 민망해졌다. 해성이 일부러 떨떠름한 얼굴로 말하자 김한별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눈꼬리까지 접고 웃는 모습이 정말 즐거워 보였다. 해성이 저도 모르게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을 때였다.

“나해성.”

“….”

“해성아.”

여덟 살이나 어린 남자의 아래 깔려 이름이 불리는데도 기분이 나쁘긴커녕 배 속이 간질거렸다.

“해성이 이름도 참 이뻐. 부를수록 입에 착착 감기고. 계속 부르고 싶고.”

웃음기가 어린 눈으로 저를 찬찬히 살피는 시선이 낯설었다. 김한별이 지금 저를 보는 눈 같은 건 해성이 겪어 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저렇게, 저런 눈으로 바라보면.

해성은 까만 눈 속에 담긴 자신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실제와는 다르게 저 눈 속에 담겨 있는 자신이… 아주 조금은,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안 이쁜 구석이 없는 나해성은 뭐가 그렇게 복잡할까.”

자신이 담긴 눈이 기울어졌다.

“뭐, 상관은 없어. 쓸데없는 걸로 고민하느라 심각한 모습도 존나게 귀엽거든.”

“너 말 좀. 존나가 뭐냐.”

습관적으로 격한 언어에 대한 지적이 나갔는데 내뱉고 보니 상황과 참 어울리지 않는 지적이었다.

발가벗고 뒤엉킨 채 네 이름이 이쁘네, 아니, 네 이름이 더 이쁘네, 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특히나.

살짝 민망해지려는 찰나 김한별이 발갛게 상기된 뺨에 입술을 찍어 누른 후 중얼거렸다.

“예의 바르기까지 하고 부족한 게 뭐야?”

장난스러운 어투였지만 김한별은 매번 해성이 어이없을 정도로 그에 대한 칭찬만 늘어놓았다. 김한별의 목소리와 눈빛에 담긴 자신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었다.

김한별의 집까지 쫓아와서도 여전히 머리 한구석에는 절대 녹지 않을 것만 같은 얼음덩어리가 굳건했고, 아주 오래전 뿌리를 내린 두려움이 가지를 뻗어 해성의 발목을 옭아맸다. 온통 제동을 거는 것들투성이였다. 그럼에도.

해성은 손을 뻗어 김한별의 단단한 뺨과 고집스러운 눈매를 매만졌다.

그런 것 따위 다 모르는 척, 그냥 이대로 또 멍청하고 미련하게 김한별에게 자신을 내던지고 싶은 마음이 계속해서 불씨를 지폈다.

“계속 입만 놀릴 거야?”

“응.”

묻는 말에 단호하게 답한 김한별이 가깝게 얼굴을 붙이고 해성의 입술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놀려야지, 계속.”

혀로 달뜬 숨을 내쉬는 입술을 핥은 김한별이 그 안에 혀를 쑤셔 넣었다. 머리카락에 손을 얽고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과는 다르게 입 안을 휘젓는 혀는 난폭했다. 해성은 김한별의 목에 팔을 두르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 혀를 더 깊게 머금기 위함이었다. 목구멍을 찌를 기세로 미끄러지던 혀가 쓱, 입천장을 훑었다. 야릇한 감각에 해성의 허리가 들썩거렸다. 혀를 거둬 간 김한별이 목덜미와 어깨, 쇄골에 불도장 같은 입술을 찍으며 아래로 미끄러졌다.

김한별은 어느새 말이 없어졌다. 여유가 넘쳐흐르는 눈에는 조급함이 어렸다. 몸을 어루만지는 손이 안달을 부렸다.

마치 더 닿고 싶다는 듯이. 한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이.

하지만 그 미숙한 모습은 한순간에 자취를 감췄다. 김한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해성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하으….”

가슴을 모아 쥐고 튀어나온 작은 젖꼭지를 혀로 꾹 누른 김한별이 입을 벌리고 유륜 전체를 쑥 빨아들였다. 축축한 입 안으로 끌려간 여린 살이 뜨거운 혀에 짓눌리고 긁히고 빨렸다.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 이로 젖꼭지를 잘근잘근 씹었다. 두꺼운 허벅지가 해성의 다리를 갈랐다. 다리 두 쌍이 교차하며 맞물렸다.

다시 위로 올라온 김한별이 해성의 머리를 잡아 고정하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겹쳐진 두 성기는 이미 완전히 발기한 채였다. 김한별의 성기는 그 입술 못지않게 뜨거웠다. 뜨겁고 딱딱한 성기와 강하게 마찰되자 분홍빛 성기가 쿨럭거리며 쿠퍼액을 토해 냈다.

제 몸을 덮고도 남는 어깨를 잡고 신음하던 해성은 불현듯 제게 박혀 있는 시선 하나를 느꼈다. 배회하던 눈으로 정면을 보자 김한별이 한가득이었다.

“나해성.”

입꼬리가 올라간 입술이 비스듬해졌다. 치대는 허리 짓은 더욱 강력해졌다. 두 중심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체액으로 흥건했다.

“흣!”

이번에도 먼저 항복한 것은 해성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과 벌어진 입 속에서 옴찔거리는 혀에 끈적하고 새까만 눈이 따라붙었다. 김한별은 이제 마치 해성의 성기가 구멍인 것처럼 허리를 처박았다. 퍽퍽. 둔탁하고 질척한 소음이 울려 퍼지고 이어 얕게 들썩이는 복부에 뜨끈한 액체가 흩뿌려졌다.

사정을 마친 김한별은 해성을 보며 길게 숨을 내쉬고는 방싯 웃었다.

“넌 왜 좆도 이렇게 이뻐서는.”

“네 좆도… 하… 제법 귀여워.”

“귀엽게 봐 줘서 고마워.”

시선은 해성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어느새 손은 해성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허벅지 안쪽을 주무르던 손은 회음부로 옮겨 가 그 위를 죽죽 긁어내렸다. 점점 가빠지는 숨을 내뱉으며 해성은 벌어진 무릎을 세웠다. 그러자 손가락이 그 아래로 기어가 다물린 구멍 위를 더듬거렸다.

“넌 여기 색도 이뻐.”

‘하, 시발. 구멍 색도 이따위야.’

아아.

“김… 김한별.”

김한별의 목소리와 겹쳐진 어떤 목소리에 해성은 본능적으로 김한별을 찾았다. 그러자 김한별이 해성의 뺨과 입술에 차례로 키스하고는 응, 하고 답했다. 동시에 손가락이 푹, 안으로 꽂혀 들어왔다.

“응. 나 한별이야.”

“하아….”

“지금 여기, 이거는 내 손가락이고.”

해성은 자꾸 감기려는 눈을 떠 흐릿한 시야 속 김한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너를 나로 가득 채울 생각이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김한별은 섣부르게 성기를 구멍 안에 처박지 않았다. 해성이 안달이 날 정도로 구멍이 흐물흐물해진 후에야 손가락이 빠져나갔고 즉시 두툼한 귀두가 구멍을 억지로 벌리고 들어왔다. 쏙, 빨려 들어오는 귀두에 해성은 가슴팍까지 붉게 물들였다.

성기가 밀려들수록 내벽이 수축하며 성기에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조이고 물어뜯고. 구멍이 환장을 하며 침입자에게 달려들었다. 침이라도 질질 흘릴 기세였다.

‘싸구려처럼 굴지 마. 나까지 싸구려가 된 거 같잖아.’

온몸이 열감으로 지글거리면서도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스쳤다.

혹시, 김한별도, 김한별도 그렇게 느끼면 어떻게 하지.

해성이 떨리는 눈으로 올려다보자 한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싼 채 해성에게 시선을 못 박고 있던 김한별이 강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해성은 차마 신음도 내지르지 못하고 짧게 경련했다.

“우린 진짜.”

“하으! 하아….”

뒤늦게 숨을 터트리는 해성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김한별이 해성의 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살거렸다.

“속궁합도 잘 맞고.”

“….”

“운명인 건가? 형이랑 운명이라고 생각하니까.”

귓가에 나직한 웃음이 내려앉았다.

“존나 설렌다.”

김한별의 허리가 뒤로 물러나며 성기가 귀두만 남겨 두고 모조리 빠져나갔다. 하지만 허전함에 벌름거리는 구멍에 아찔해지기도 전, 다시 뿌리까지 처박혔다. 강약 조절 따위는 집어치우고 허리 짓을 하던 김한별이 어느새 발기한 해성의 성기를 낚아챘다. 안팎을 오가는 성기에 따라 구멍 안을 채우고 있는 체액이 밖으로 튀었다.

빠듯하게 내벽을 벌리며 들어와 치대는 것만으로도 눈을 뜰 수 없이 자극적인데 어느 순간 성기가 안쪽 부푼 부위를 쿡, 찍어 눌렀다. 그 순간 커다란 손에 감싸여 있던 성기에서 정액이 쏘아졌다.

“아읏…!”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내벽이 성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흡착이라도 하는 듯했다.

“시발.”

강렬한 쾌감으로 인해 눈앞에 빛이 번쩍이는 와중에도 나직한 욕설이 귀로 날아와 꽂혔다. 애가 타서 매달리던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욕 나올 정도로 좋아서 그래.”

그러자 김한별이 해성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해성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이마, 눈꺼풀, 콧잔등, 뺨, 턱과 입술까지 김한별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나해성이 너무 좋아서.”

해성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왜.”

대체 왜.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이런 한심한 모습까지 내보였는데도 김한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말했잖아.”

“….”

“첫눈에 반했다고.”

매력적인 입꼬리가 위로 당겨짐과 동시에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안을 뚫고 들어온 성기가 사정없이 방금 그 부위를 짓이기기 시작했다.

몇 번 사정을 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해성을 저로 채우겠다는 김한별의 말은 어느 정도 맞았다. 적어도 해성의 구멍은 김한별의 정액으로 차다 못해 넘쳤다. 얼마나 싸질렀으면 색색거리며 누워 있는 해성의 배를 김한별이 손바닥으로 누르자 실금을 하는 것처럼 구멍에서 정액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어느새 기절했던 건지 불명확한 시야를 회복하기 위해 눈을 끔뻑이던 해성은 제 가슴팍에 얹어진 무거운 팔을 내려다보다 그 팔의 주인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때문인지, 자고 있는 김한별이 유독 어려 보였다. 그 모습에 문득 갈증이 났다. 해성이 살살 팔을 치워 내려고 할 때였다.

“여덟 살이나 어린 나를 먹고 튀려는 건 아니지?”

“…이미 먹고 튀려다 잡힌 거 아니냐?”

먹고 튄… 것은 아니지만 처음 섹스 후 김한별을 두고 도망친 건 맞았다.

“난 한번 물면 절대 안 놓쳐.”

“그래 보여.”

해성의 말에 김한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 모습에 해성은 갈증도 잊고 물었다.

“씻겼어?”

온갖 체액으로 뒤덮였던 몸이 보송했고 부드러운, 제게는 큰 잠옷까지 입혀져 있었다. 자신은 거의 기절하듯 잠이 들었으니 씻기고 입힌 건 김한별일 터였다.

“어. 나해성은 깔끔한 거 좋아하니까.”

“뭐 하러.”

“씻기면서 보니까. 넌 진짜 안 이쁜 데가 없더라.”

농담기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진지한 얼굴로 하는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해성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김한별이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에 키스했다.

“좋아 죽겠다고, 진짜.”

거듭된 고백에 해성은 멀거니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손으로 꽁꽁 감싼 심장이 남자를 향해 날아가고 싶어 팔딱거렸다.

“죽지는 마라.”

고집스러운 새까만 눈동자를 보며 중얼거리자 목을 울리며 웃던 김한별이 키스를 퍼부었다.

* * *

고백을 하고 고백을 받았지만 그 후 둘의 관계에 어떤 급진적인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저 역시 김한별에게 짐작 가능한 형태의 어떤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한별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런 것은 아직 해성에게 너무 무겁고 벅차고 또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김한별을 밀어 내거나 거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해성 본인도 알아채지 못한 엄청난 변화였다.

그렇게 해성은 몇 년 만에 새로운 봄을 맞이하게 되었다.

“넌 복학한 거 맞냐?”

“네.”

어느새 도복으로 갈아입은 최지민이 스트레칭을 하며 답했다.

분명 월요일에 개강한 게 맞는데 최지민은 하루도 빠짐없이 도장 출근을 하고 있었다.

“원래 첫 주는 널널하잖아요.”

“개강 파티 같은 건 안 하냐? 동기들과의 술자리나 뭐, 그런 거.”

“내일 개강 총회 한다고 그래서 거기만 잠깐 갔다가 오려구요. 귀찮긴 한데 후배가 꼭 와 달라고 사정을 해서.”

“으아! 몸 좀 풀어 볼까?”

3월임에도 아직 패딩을 포기하지 못한 해성이 패딩 주머니에 한 손을 꽂고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내는데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박재관이 관장실에서 나왔다. 해성은 박재관에게 잔소리를 듣기 전에 서둘러 도장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를 내려 모퉁이를 돈 해성은 저도 모르게 유리문 밖을 확인했다가 목덜미를 긁적였다.

김한별도 월요일부터 학교를 갔다. 그럼에도 해성의 퇴근 시간에 맞춰 기다리는 건 여전했다. 하지만 오늘 유리문 밖은 텅 비어 있었다. 해성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유리문을 밀었다.

김한별

애들이랑 잠깐 한잔하는데 일이 생겨서 데리러 못 갈 거 같아

별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까 퇴근 한 시간 전쯤 김한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무슨 일이냐 물을까 하다 말았는데 후회가 되었다. 김한별의 말처럼 무슨 별일이 있겠냐 싶으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지금이라도 물어볼까 고민하고 입술만 깨물고 있을 때였다. 휴대폰 위로 떠오른 이름에 근심 가득하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여보세요.”

-도장 나왔지?

“어, 나왔지.”

휴대폰 너머 목소리를 들으며 해성은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갈 수 있으면 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좀 걸리네.

“…무슨 일인데?”

-술 먹는데 시비가 붙어서.

“시비?”

해성이 놀라서 묻자 김한별이 별거 아냐, 했다.

-옆 테이블에서 우리 테이블 여자애들한테 장난질 쳐서.

“아….”

-지금 경찰선데. 여자애들만 두고 가기 좀 그래 가지고.

“당연히 옆에 있어야지.”

-응. 질투 같은 건 안 해?

“하. 넌 이 와중에.”

약간 기대에 찬 물음에 해성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이런 농담을 하는 걸 보면 심각한 건 아닌 것 같다 싶어 안도도 되었다.

-좀 열 받아.

“왜? 질투 안 해서?”

-아니. 저 새끼들 때문에 너 데리러 못 가서.

“됐다.”

자신이 애도 아니고 별걱정 다 한다 싶던 때였다.

-보고 싶단 말이야.

진득한 목소리가 귀에 스몄다.

-늦게라도 가고 싶은데 안 되겠지? 그때쯤엔 해성이는 꿈나라겠지?

“까분다.”

-너무하네. 사람 진심도 몰라주고.

“잘 마무리하고 문자라도 남겨 줘.”

-와, 나해성이 내 걱정 해 줬다. 근데 난 하나도 안 다쳤으니까 걱정 마.

“너 말고 상대방이 걱정돼서 그래.”

해성의 말에 김한별이 목을 울리며 웃었다. 통화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도착했지?

“어.”

-쉬어. 오늘도 고생했어.

“너도 잘 들어가고.”

-응.

대화는 끝났는데 통화는 끊길 줄을 몰랐다. 해성은 머뭇거리며 먼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올 수 있으면 오라고 할 걸 그랬나. 아니다. 피곤할 텐데.

휴대폰 화면을 보며 실없는 생각을 하다 대문으로 걸어가는데 주차 라인도 없는 전봇대 뒤에 비스듬히 주차된 짙은 회색 세단이 눈에 띄었다. 차 하나가 지나가기도 빠듯한 골목에 저딴 식으로 주차를 하다니.

아니, 어떤 미친놈이.

미간을 구기고 그 차를 보며 혀를 차던 해성이 막 돌아서려 할 때였다.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은 줄 알았던 차의 운전석 문이 열리며 안에 있던 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해성은 발에 족쇄가 채워진 사람처럼 멈춰 섰다.

“해성아.”

스리피스 정장에 롱 코트를 갖춰 입은 남자가 해성을 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오랜만이야.”

족쇄가 채워진 발이 쑥, 늪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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