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4)

4.

“그…러니까. 좀 이르긴 한데. 그 아침은 먹고 나온 거야?”

호기롭게 지르긴 했는데 말없이 저만 빤히 바라보는 김한별 때문에 살짝 주춤했다. 그럼에도 해성은 제안을 무르고 싶지 않았다.

인정했으니까.

매일 늦은 밤 저를 기다리고 있던 김한별에 안심했고, 그가 없는 내내 김한별을 떠올렸고, 쉬는 날 만나자고 하지 않은 것에 섭섭했다는 걸.

그리고 또.

“아니… 그게, 매번 얻어먹기만 하기도 했고.”

얻어먹기만 했나. 숙박비에 매번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고. 분에 넘치게 황송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밥 먹었으면 카페라도 갈래?”

어째 말이 길어질수록 구차해지는 기분이었다. 목덜미부터 서서히 열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야….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을 좀. 너무 좋아서 그러냐? 막 설레서 대답을 못 하겠어?”

민망함에 괜히 허세를 부릴 때였다.

“응.”

“….”

“좋아.”

내내 굳게 다물려 있던 입이 가벼운 농담에 쉽게도 열렸다.

“근데 나 나해성 박력 때문에 설레서 심장이 너무 뛰어.”

“뭔.”

웃음기 담긴 목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진짠데. 만져 볼래?”

“됐다.”

김한별이 차에 기대 있던 몸을 바로 세우고 바투 다가서자 해성의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그럼, 만지는 건 둘이 있을 때 하는 걸로 하고.”

김한별은 움찔하며 주변을 살피는 해성을 보며 입술을 기울이고는 물러나 뒷문을 열었다.

“밥 먹기 전에 이것들부터 집에 가져다 놔야 할 거 같은데. 냉동식품도 있어서.”

김한별의 시선을 따라가자 열린 뒷좌석 문 안쪽에 가득한 쇼핑백이 보였다.

“저게 다 뭐야.”

“뭐긴 뭐야. 명절 음식이지.”

“설마 만든 거야?”

“그럴 리가. 우리 집에는 요리에 취미 있는 사람 없어. 맛보고 즐기는 것만 할 줄 알지. 다 산 거야. 명절은 싫어하는데 명절 음식은 좋아하거든. 자.”

멀뚱히 서서 뒷좌석에서 양손 가득 쇼핑백을 꺼내는 김한별을 구경하던 해성은 엉겁결에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갔다 와. 기다릴게.”

“…어.”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대체 뭐가 든 건지 안을 보려고 해도 포장이 되어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김한별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서두르던 해성은 대문 안쪽에 한쪽 발을 걸치고 뒤를 돌아보았다.

“추운데.”

“….”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한겨울에 구경도 힘든 모깃소리만큼 작게 중얼거린 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냉장고 앞에 앉아 쇼핑백에 든 물건을 꺼냈다. 마음이 급하긴 했지만 혹시 쏟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어 음식을 꺼내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이게 다 뭐야.”

하지만 하나둘 꺼낸 음식들을 확인하고는 놀라움에 감탄만 터트렸다. 각종 전부터 과일, 양념 갈비까지 딱 봐도 비싼 티가 흐르는 포장된 음식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김한별 집에서 쫓겨나는 거 아니야?”

해성은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걱정을 하며 텅 빈 냉장고를 값비싼 음식들로 가득 채우고 현관으로 뛰어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여전히 까만 SUV가 아까와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문을 열자 조수석 차창이 내려갔다.

“나 차에 타고 있었어. 말 잘 듣지?”

운전대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웃는 김한별을 보며 해성도 비식 웃음을 터트렸다.

“애냐?”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며 묻자 김한별이 목덜미를 감싸고 엄지로 귓불을 쓸며 말했다.

“나 진짜 좋아.”

“….”

“형이 먼저 밥 사 준다고 해서, 진짜 너무 좋아.”

웃음이 스민 눈매가 진심으로 신나 보였다. 별것도 아닌 일에 지나치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미안하기도 하고 심장이 간질거려서 툴툴거리는 말투가 흘러 나갔다.

“너무 좋아하면 안 되는데.”

그것에 혼자 움찔해 슬쩍 김한별의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이따 커피도 사 주려고 했거든.”

“해성아.”

“야. 형이라고.”

설레고 부끄럽고 쑥스럽고 약간은 민망한 와중에도 이름을 불리자 발끈하는 것이 우습긴 했지만 지극히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반듯한 미간을 우그러트리며 시선을 들자 입술에 부드러운 표피가 스치듯 닿았다가 떨어졌다.

“진짜 좋아서 미치겠어.”

해성의 동그란 코끝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린 김한별은 피식 웃고는 혼잣말하는 척을 하며 운전대를 돌렸다.

“나해성이랑 맛있는 거 먹고 빨리 둘이 있을 수 있는 데로 가야겠다.”

막상 밥을 사 준다고는 했는데 명절 당일인 데다가 이른 아침이라 근처에 문 연 곳이 없었다. 난감해하는 해성을 보며 ‘따끈한 거 먹으러 갈까?’ 하고 물은 김한별은 30분 정도를 달려 2층짜리 독채로 된 설렁탕 가게 주차장에 차를 댔다.

안으로 들어간 해성은 이 시간에도 꽤 많은 손님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며 김한별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또 어떻게 알았어?”

“우리 할머니 20년 단골집.”

미식가임이 분명한 건물주 할머니의 단골집이라니. 아직 음식을 주문한 것도 아닌데 그 맛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김한별은 별다른 미사여구도 없이 –설렁탕-이라고만 적혀 있는 메뉴를 두 개 주문한 후 물을 따른 물컵을 해성의 앞에 놓아 주며 말했다.

“우리 집은 명절에도 잘 안 모여. 모이더라도 양질의 음식과 술을 마시며 기분이나 내기 위해서 모이는 정도. 연휴에 여행을 가든 집에서 뭉개고 있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아까 봤듯이 모든 음식은 철저하게 맛이 보장된 곳에서 구매. 음식을 하기 위해 노동력을 제공할 필요도 없어.”

김한별이 갑자기 명절을 맞이하는 자기 집안의 가풍을 소개했다.

“어때?”

“어? 아, 좋네.”

눈을 반짝이며 묻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하자 김한별이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었다.

“그치?”

“어… 응.”

“손에 물 한 방울 묻히게 하지 않을 거니까.”

상체를 뒤로 물리고 의자에 기대 눈썹을 까닥이는 모습에 그제야 갑작스러운 가풍 브리핑을 한 의도가 파악되었다.

“하, 진짜.”

해성은 바람 같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계산대에 있던 박하사탕을 우물거리며 가게를 나온 해성은 건물주 할머니의 절대 미각에 다시 한번 찬사를 보냈다.

24시 영업. 설렁탕.

역시 진정한 고수는 가타부타 말없이 실력으로 승부를 보는 것인가.

간결하기 그지없는 간판을 올려다보던 해성은 패딩 모자 아래로 불쑥 들어오는 손에 고개를 돌렸다.

“여기, 따뜻한 거 알아?”

“형, 잘 먹었습니다. 해야지.”

“해성이 형. 잘 먹었어요. 역시 형은 멋있어.”

엎드려 절을 받은 후 주차장으로 걸어가자 김한별이 패딩 모자 아래 손을 넣은 채 졸졸 따라왔다.

“형, 우리 이제 카페 가는 거예요? 너무 신난다.”

해맑은 목소리와는 다르게 조수석 안으로 해성을 밀어 넣는 손길은 거셌다.

“야.”

“너 사탕 먹지 마라.”

떠밀리듯 조수석에 앉아 불만스럽게 바라보자 김한별이 대뜸 엉뚱한 소리를 했다.

“뭔데, 또.”

김한별은 묻는 말에 답은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해성의 입술을 튕긴 후 문을 닫았다.

“아.”

손가락에 실린 강도가 제법 세 입술이 얼얼했다. 해성은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운전석에 올라타는 김한별을 어이없게 바라보았다.

“너, 설마. 사탕 먹는 모습이 섹…시하다느니 그런 말 할 건 아니지?”

“응.”

제 입으로 섹시 어쩌고 하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해성의 얼굴이 타오르듯 빨개졌다. 그에 반해 돌아오는 대답은 황당할 정도로 태연했다. 어이가 없어서 눈만 끔뻑이는 해성을 힐끔 본 김한별이 해성의 목덜미를 끌어와 입을 맞추고 안에 든 박하사탕을 낚아채 갔다.

“내가 너 때문에 고민이 많다.”

사탕을 씹어 먹으며 하는 김한별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누가, 할 소리를?

해성은 당연히 김한별이 카페도 알아서 데려갈 줄 알았다. 그런데 도로로 나온 김한별은 ‘어디로 갈까?’ 하고 물어 해성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해성은 이런 대낮에 카페 같은 델 가서 섹스까지 한 남자와 마주 보고 앉아 정답게 커피를 마신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김한별 앞에서 어리숙한 티를 내기도 싫었다.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봤지만 분위기 좋고 맛도 좋은 아는 카페 같은 게 떠오를 리 만무했다. 입술이 바짝 말라 갈 때쯤 횡단보도 너머에 2층으로 된 카페가 보였다.

“저기. 저기 가자.”

“오케이.”

해성이 안도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산뜻하게 답한 김한별이 카페로 차를 몰았다. 엉겁결에 고르긴 했는데 건물 뒤편에 따로 주차장도 있고 안으로 들어가니 내부도 깔끔했다.

“뭐 마실 거야?”

해성은 김한별이 계산할까 봐 얼른 카운터 앞으로 가서 물었다. 그러자 김한별이 검지를 턱에 대고 카운터 안쪽 벽면에 붙어 있는 메뉴판을 보며 고민하는 척을 하다 해성을 보며 씩 웃었다.

“형이랑 똑같은 거.

“아이스 아메리카노 라지 사이즈로 두 잔이요.”

김한별에게서 고개를 돌린 해성은 간결하고 정확하게 주문을 마치고 음료가 나오는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김한별이 따라붙었다.

“달달한 거 좋아하게 생겨 가지고.”

“네가 쌉쌀한 거 좋아하게 생겨서 배려한 건데 다른 걸로 주문해 줘?”

“달달, 쌉쌀. 완전 찰떡궁합.”

귀에 대고 속살거리는 목소리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해성은 음료 제조에 여념이 없는 알바생의 눈치를 보다 김한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김한별이 아예 몸으로 해성의 시선을 차단하고는 실실 웃으며 목소리를 더 낮췄다.

“더 찰떡궁합인 건 따로 있는데. 그치?”

해성은 당황했지만 갑자기 오기가 발동해 아무렇지 않은 척, 김한별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잘 맞긴 하지. 그 큰 게 끝까지 다 들어갈 정도였으니까.”

알바생이 틀어 놓은 음악 소리가 커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해성은 말을 덧붙였다.

“워낙에 커서 그냥 박기만 해도 안이 다 눌려서 자극이 엄청났거든.”

태연한 척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해성은 연신 음료를 만드느라 바쁜 알바생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도 노랫소리와 커피 머신 소리가 워낙 커 들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나는….”

그런 해성을 보는 김한별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자기가 먼저 시작했으면서?

의외의 반응에 해성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운동 얘기한 건데.”

“….”

“우리 그때 축구 할 때, 처음 한 건데도 호흡도 잘 맞고 그래서.”

젠장.

“역시 이것이 연장자의 여유인가? 밝디밝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에도 이런 끈적하고 노골적인 대화를 아무렇지 않게.”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나왔습니다!”

타이밍 좋게 발랄하고 친절한 목소리가 둘 사이를 갈랐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심각한 얼굴로 감탄하는 김한별을 두고 트레이를 받으려는데 김한별이 빨랐다.

“무거워. 넌 이런 거 들지 마.”

금세 장난을 집어치우고 하는 말이 어째 더 어이가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커피를 앞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사이에서 김한별과 커피를 마실 생각을 하니 왜인지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각자 식사에만 열중하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던 식당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냥.”

해성이 김한별에게 그냥 테이크 아웃 해서 차로 가져가자고 말을 하려던 차였다.

“어? 김한별?”

트레이를 들고 앉을 자리를 물색하던 김한별의 고개가 저를 부르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러곤 제 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을 보며 쓱, 입매를 끌어 올렸다.

“박찬기.”

“야. 이게 얼마 만이냐.”

“그러게.”

“잘 지냈… 지낸 거 같구나.”

“뭐, 나야.”

“군대에서 말뚝 박으라고는 안 하냐?”

“제안이야 받았지.”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대화가 스스럼없이 이어졌다.

“애들이 드디어 너 복학한다고 난리야.”

“난리 날 만하지.”

겸손이라고는 모르는 깔끔한 인정에 상대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튼, 여전하다. 빨리 복학해서 모두의 기대에 부응해라.”

“그러긴 힘들 거 같은데. 내가 계속 바쁠 거 같아서.”

“그래? 왜? 설마 벌써 공모전 준비하고 그런 건 아니지?”

화들짝 놀라던 상대가 뒤늦게 김한별의 옆에 서 있는 해성을 발견했다.

“아. 안녕하세요.”

갑자기 날아든 인사에 굳어 있던 해성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상대는 김한별에게 눈으로 누구냐 물었지만 김한별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가 볼게. 학교에서 보자.”

“어, 그래. 가라.”

상대는 웃으며 인사하고는 해성에게도 묵례를 하고 창가 쪽 자리로 갔다. 공부를 하고 있던 모양인지 테이블에는 두꺼운 책과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우린 저기 앉자.”

“어… 어.”

해성은 순식간에 뒤엉킨 머리와 가슴을 진정시키며 김한별과 함께 가장 구석 자리로 갔다.

버석하게 마른 목을 축이고 싶었지만 괜히 빨대만 뱅글뱅글 돌리게 되었다. 해성이 빨대를 잡고 창가 쪽 테이블을 힐끗거리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에 앉은 김한별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에 해성의 심장이 추락해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럴 때 참 난감해.”

그리고 이어진 말에 손끝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해성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저 같은 사람이랑 같이 있는 모습을, 아는 사람에게 보이는 건 별로일 것이었다. 아무리 김한별이 제게 상냥하게 군다 해도 그건 둘이 있을 때나 가능한 대우였다. 다른 사람들, 특히나 아는 사람 앞에서는.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나가자고.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

“….”

“알아. 아는 형이라고 소개해야 하는 게 맞지. 그래야 하는 게 맞는데.”

김한별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턱을 괬다.

“성에 안 차.”

“….”

“임시방편인 걸 알면서도, 너랑 고작 그 정도 사이인 게.”

해성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성에 안 찬다고. 빈말로도 안 나올 정도로.”

“….”

“아, 그렇다고 막 강요하고 그런 건 아니야. 절대로.”

시야에 꽉 들어찬 김한별이 예쁘게 입술을 기울였다.

“물론 애타게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

“그러니까 그냥 애새끼가 고집부린다고 생각해 줘.”

“….”

“알았지, 해성이 형?”

저를 보며 웃는 얼굴과 나지막하게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해성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장막을 서서히 거뒀다.

불안정하게 뛰는 심장은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았지만 카페에서는 금방 나왔다. 김한별은 굳이 길을 돌고 돌아 기어코 두 배는 더 시간을 들여 해성의 집 앞에 도착했다.

“내일은 저녁 먹자.”

해성은 안전벨트를 풀며 자연스럽게 약속을 잡는 김한별을 바라보았다.

“저녁 먹고 영화 보게. 심야 영화.”

심야 영화….

어차피 앞으로는 김한별이 만나자고 할 때마다 거절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낮보다야 밤에 아는 사람을 마주칠 확률이 적었다.

“그래. 보자, 영화.”

해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설렌다. 너랑 영화관 가는 거.”

“설렐 일도 많다.”

“심야 영화 본 적 없지?”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로 해성은 영화관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심야 영화는커녕 조조 영화도 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이랑 가끔 주말에 우르르 몰려가 인기작이나 보던 게 다였다.

“난 심야 영화 보는 거 좋아하거든.”

가까이 다가온 손등이 살살 뺨을 어루만졌다.

“내가 좋아하는 걸 나해성도 좋아했으면 좋겠어.”

나른하게 말을 잇던 김한별이 비식 웃었다.

“아, 그러면 나해성 나르시시스트 되는 건가?”

그것도 매력 있는데? 하는 김한별을 가만히 바라보던 해성은 운전석 헤드 레스트를 잡고 상체를 기울였다. 살포시 겹쳐졌던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급히 차 문이 열렸다.

“내일… 보자. 조심해서 들어가라.”

차마 김한별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인사한 해성은 차 문을 닫고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뽀뽀하고 튀다니.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김한별 앞에서는 매번 나잇값도 못 하고 자꾸 안 하던 짓을 하고 있었다.

“하. 진짜 뭐 하냐.”

닫힌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헛웃음을 짓고 있던 해성은 현관 문턱을 밟고 올라와 훌렁훌렁 옷부터 벗어 던졌다. 자신이 저지른 민망한 짓에 한겨울에도 온몸이 후끈거려서 목덜미에 땀이 밸 정도였다. 몸 안을 휘도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찬물이라도 뒤집어쓰려고 화장실로 향할 때였다. 옷 위에 던져 둔 휴대폰이 진동하며 불을 밝혔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해성은 속옷 바람으로 옷더미 옆에 앉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어.”

-잘 들어갔어?

미세하게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에 해성은 괜스레 널브러진 옷가지를 손으로 구겼다.

“어.”

-왜 이렇게 말이 짧아? 아까 키스한 거 부끄러워서 그래? 이렇게 수줍음이 많아서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는 건지. 기특하게.

“…까분다.”

-너 아까 도망가는데 귀여워 미치는 줄 알았어.

“끊는다.”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김한별은 실실 웃음만 흘렸다. 가차 없이 통화를 종료하려던 해성은 잠시 휴대폰 너머에서 흘러들어 오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김한별.”

그리고 조심스레 김한별을 불렀다. 이름이 불리자 즉시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조심해서 가고.”

멋없고 진부한 새해 인사를 건네놓고 해성은 제 입술만 깨물었다. 고작 몇 초의 침묵이 길게도 느껴졌다.

“가라.”

이제는 가슴팍까지 발갛게 물든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해성이 종료 버튼을 터치하려 할 때였다.

-해성이 형도.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휴대폰을 다시 귀로 가져가자 다정한 인사가 귀를 간질였다.

-해피 뉴 이어.

다음 날, 김한별과 함께 영화관에 갔고 해성은 자신이 갔던 때와 은근하게 많이 달라진 영화관의 모습에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색하게 이번에도 김한별이 다 알아서 했다. 표를 미리 예매한 것은 물론이고 팝콘과 음료까지 알아서 주문하고는 해성을 데리고 상영관으로 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모습에 마음이 놓이려 할 때, 에스컬레이터 한 계단 위에 올라선 김한별이 팝콘을 입에 넣어 주려고 해서 해성은 식겁해야 했다. 놀라 김한별의 손을 쳐 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다행히도 에스컬레이터에는 김한별과 해성뿐이었다. 괜히 오버했다는 생각에 해성이 팝콘을 한 주먹 잡고 입에 욱여넣자 김한별이 탄산음료가 든 컵을 내밀었다.

오늘 또 나잇값 못 했네. 하고 반성하며 상영관에 들어선 해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영관 안이 자신이 아는 영화관 풍경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었다. 좌석이 소파로 되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발 받침까지 있었다. 결국 와, 하고 감탄을 내뱉자 김한별이 벌어진 입으로 쏙, 팝콘을 밀어 넣었다.

심야라 그런지 극장엔 김한별과 해성, 그리고 한 커플뿐이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커플들을 보며 해성은 영화가 시작되면 김한별이 허튼짓을 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김한별은 가만히 영화에 집중했다. 그러다 중반 정도 영화가 진행되었을 때 슬쩍 손을 잡고 깍지를 꼈을 뿐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선 곧장 집에 데려다줬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김한별에게 전화가 왔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다가 오늘 놀아 줘서 고맙다는 김한별의 인사를 끝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김한별과 보낸 하루와 짧은 인사말이 계속 마음속을 맴돌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말도 없이 집 앞에 찾아온 김한별은 운동이나 가자고 해성을 불러냈다. 새벽까지 잠을 설쳐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가 그대로 강변 공원으로 끌려갔다. 점심을 걸고 내기 농구를 하다 보니 몸에 피가 돌고 정신이 맑아졌다.

내기 농구에서 이기긴 했지만 어딘지 개운하지 않아 콩나물국밥집으로 향하는 내내 해성은 조수석에서 아주 미심쩍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김한별을 관찰해야 했다. 김한별은 그저 와, 형은 진짜 모든 운동을 다 잘하는구나. 하고 엄지만 치켜들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길다고 생각했던 연휴의 마지막 날이었다.

매트리스 위에 드러누운 해성은 팔을 벤 채 천장을 응시하다 한 손을 매트리스 아래로 뻗어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메시지 앱 속 박재관과 최지민은 여전히 쉴 새 없이 대화 중이었다. 지금 한창 진행 중인 대화의 주제는 ‘왜 명절인데 TV에 볼만한 프로가 없는가.’였다.

하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 끼어들기도 뭐할 정도였다.

아니, 90년대에는 명절에 특집 드라마까지 만들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데.

박재관도 아닌 최지민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에 해성은 감탄하며 천천히 채팅방 화면을 쓸어 올렸다.

그러다 팡, 하고 화면 위로 튀어 오른 이름에 힘이 들어가 있던 미간이 서서히 풀어졌다.

“어.”

-잘 쉬고 있어?

“어.”

-잘 쉬어야 돼, 꼭.

잘 쉬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말투였다. 풀어졌던 미간이 다시 좁혀졌다.

“…그래, 뭐.”

-꼬옥. 잘 쉬어야 된다. 꼭.

어째 하는 분위기가 왜냐고 물어봐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왜 꼭 잘 쉬어야 할까?”

천천히 몸을 일으킨 해성이 벽에 기대앉아 조심스레 묻자 김한별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내가 너 쉬게 하려고 오늘도 만나고 싶은 걸 꾹 참았으니까.

“하.”

위로 솟았던 해성의 어깨가 축 내려앉았다.

-연휴 마지막 날이니까, 혼자 재충전할 기회도 필요하겠다… 싶어서… 많이 아쉽지만… 오늘도 너랑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지만… 그래도.

“별로.”

해성은 알아주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질질 늘어지는 말을 끊어 냈다.

“별로 재충전할 만큼 방전되지도 않았는데?”

-….

“요 며칠 밖에 돌아다녔더니 오히려 더 활력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출발해.

방금 전과는 다르게 끝맺음이 확실했다. 해성은 고개를 저으며 소리 없이 웃었다.

결국 김한별과 근교로 드라이브를 가 장어를 먹고 산이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연휴 마지막 날을 마무리했다.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누워서 휴대폰이나 끼고 지내려던 계획과는 완전히 다른 연휴를 보냈다. 그럼에도 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마음 한구석에, 이제는 만성이 된 불안감이 얕게 퍼져 있을 뿐이었다. 경로를 이탈했을 때 울리는 경보음처럼.

며칠 만에 입은 도복이 그나마 그 불안을 희석시켜 주었다. 해성은 도복을 손으로 쓸어 옷매무새를 점검한 후 패딩을 걸쳤다.

집을 나서니 여전히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볕이 들지 않는 길가엔 녹지 않은 눈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나해성!”

익숙한 골목. 익숙한 풍경. 익숙한 공기에 안도감을 느끼는 해성을 역시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불렀다. 불안정하게 뛰던 심장이 속도를 늦췄다.

해성이 뒤를 돌아보자 박재관이 양손 가득 짐을 들고 해성을 보며 활짝 웃었다.

“왜 또 짐이 한가득이야.”

해성도 박재관을 따라 웃으며 다가갔다.

“나해성이 먹이려고 바리바리 챙겨 왔지.”

한쪽 손에 들린 짐을 받아 드니 아니나 다를까 집에서 만든 전이며 잡채, 과일이 잔뜩이었다.

“뭘 이렇게 많이 가지고 왔어.”

“너 잡채 좋아하잖아. 이번엔 또 유난히 맛있게 됐다는 거 아니냐.”

비범한 덩치와 거칠어 보이는 생김새와는 다르게 박재관은 웃는 모습이 유독 순했다.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해성이 처음 보았던 스무 살 박재관과.

“더 가지고 오지, 그러면.”

“야, 인마! 한 주먹만 남기고 다 가지고 온 거야!”

“그래, 뭐.”

“안녕하세요.”

억울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박재관에게서 돌아서 앞서 걷는데 이번엔 김한별이 반질거리는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어! 한별이!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네. 관장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근데 그건 다 뭐예요?”

예의 바르게 보이지만 어딘지 건성인 인사에 해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기다란 빗자루를 들고 다가온 김한별은 해성의 손에 들린 짐을 빼앗듯 가져가 검사하는 것처럼 안을 들여다보았다.

“우리 나해성이 명절 맛 좀 보라고 챙겨 왔지.”

“아, 명절 맛?”

“어. 해성이가 또 잡채 귀신이거든.”

“잡채?”

“어!”

“말이 짧다?”

“직접 만드신 거예요?”

해성이 쏘아보며 말하자 김한별이 박재관을 향해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러엄! 음식은 자고로 손맛! 나해성이가 또 내가 한 잡채를 좋아해서.”

“…관장…님이 직접 한 잡채?”

‘님’ 자는 거의 묵음처럼 들렸다. 해성의 눈이 더욱 뾰족해졌다. 그러자 김한별이 해성을 보며 눈썹을 으쓱했다.

저, 어린놈이.

“어! 한별이 너도 먹어 볼래? 이따 시간 될 때 도장으로 올라와!”

미묘한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박재관은 그저 뿌듯하게 웃었다.

“아주 맛이 기가 막혀!”

김한별은 진짜 도장으로 따라 올라왔다. 그 긴 빗자루까지 들고서. 해성이 작게 가게 안 보냐? 하고 물어도 실실 웃기만 할 뿐이었다.

엉겁결에 관장실에서 명절 음식 파티가 열렸다. 막 음식을 관장실 테이블 위에 펼쳐 놓았을 때, 타이밍 좋게 최지민까지 등장했다.

최지민은 관장실에 있는 김한별을 보고도 의아해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 후 자연스럽게 나무젓가락을 깠다. 박재관은 자신이 만든 잡채를 흐뭇하게 보다가 일회용 접시에 덜어 해성, 최지민 그리고 김한별의 앞에 차례로 놓아 주었다.

박재관은 자신이 만든 음식에 스스로 감격했고 최지민은 쉬지 않고 전과 잡채를 흡입했다. 그리고 김한별은.

뭐 하는데.

잡채 한 가닥을 들어 올려 면밀히 살펴본 후 입 안에 머금고 그 맛을 천천히 음미했다. 그 꼴에 기가 막힌 해성이 젓가락을 든 채로 어이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김한별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박재관을 향해 말했다.

“확실히 맛은 있네요.”

건조한 말투에서 마지못해 인정하는 티가 대놓고 나서 해성은 결국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맛있는 정도가 아니지. 이 정도면 팔아도 될 정도지.”

김한별을 놀리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음식 맛을 더 칭찬하자 박재관이 어깨로 해성을 밀며 야, 뭘 그 정도는 아냐, 인마. 했다. 그러면서도 해성 쪽으로 잡채가 담긴 접시를 밀어 주었다. 그러자 김한별이 하하, 웃으며 종이컵에 담긴 물을 단숨에 비웠다.

그렇게 한바탕 파티를 하고 정리까지 끝냈을 때였다.

“맛있는 음식 대접해 주셨는데 커피는 제가 대접할게요.”

“아휴, 뭘 또.”

박재관은 손을 휘적거리며 거절하는 척을 하다가 최지민을 보며 다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역시 센스가 있어, 한별이가?”

“난 아무거나 달달하고 양 많은 거.”

최지민은 그런 박재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간결하고 명료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밝혔다.

“그럼, 나도 최지민이랑 똑같은 거!”

“음, 네. 적당한 거 골라 볼게요. 가죠, 해성이 형.”

해성이 형은 뭘로 할래요? 도 아니고 가죠, 라니.

해성은 냉장고 옆 선반에서 칫솔이 든 양치 컵을 들고 물었다.

“내가 어딜 가?”

“저랑 별 마트요. 마트 너무 오래 비워 둬서 커피 가지고 또 올라오진 못할 거 같아서.”

“나 양치해야 돼.”

무심히 대꾸한 후 관장실을 나간 해성은 김한별을 향해 돌아섰다.

“기다리든가. 먼저 내려가 있든가.”

잠깐이라도 같이 있겠다고 수작질을 하는데 장단을 맞춰 주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김한별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휘어졌다.

“기다릴게요.”

해성이 커피와 초콜릿, 과자, 아이스크림까지 듬뿍 챙겨 올라오자 박재관과 최지민이 열렬히 환호했다.

커다란 봉지 안에서 커피만 골라 꺼내 쌓아 놓은 매트리스 위에 앉자 박재관이 아이스크림을 들고 와 옆에 앉았다.

“나해성이 하루에 한 번 외출했냐, 안 했냐.”

하루에 한 번 외출.

“했어.”

“….”

“뭐야. 그 불순한 눈빛은?”

“진짜?”

해성은 눈가를 좁히고 예리한 척하는 박재관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 진짜.”

“잘했네.”

“어.”

“그나저나 별 마트 손자랑은 꽤 친해진 모양이네.”

해성의 입에서 빨대가 툭 뱉어졌다. 해성은 가만히 일회용 플라스틱 컵 표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어.”

어느새 아이스크림을 다 먹은 박재관이 껍데기를 곱게 접어 들고 해성을 보고 있었다.

“형. 나 걔랑 친해졌어.”

잔뜩 긴장해 하는 말에 박재관이 다문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해성의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기특하네. 잘했어.”

“형.”

정말 잘하는 걸까. 이래도 되는 걸까. 박재관에게 묻고 싶고 확인받고 싶고 허락받고 싶은 게 한가득이었지만 전부 콱 조여진 목구멍 아래 갇혀 버렸다.

“우리 나해성이가 동생들한테 인기 터지는 스타일이긴 하지.”

“별로 그렇게까지는.”

“동생뿐이야? 친구, 형들한테도, 아이구! 이든이 어머님! 결제하러 오셨어요! 들어오세요!”

다짜고짜 해성을 추켜세우던 박재관이 매트리스에서 벌떡 일어나 도장 현관에 서 있는 학부모에게 다가가 카드를 받아 들었다.

그 모습에 해성도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웃으며 현관으로 다가갔다.

“어머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이상한 일이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김한별이 도장으로 찾아올까 봐 두려워했었는데, 박재관과 김한별이 속한 세계가 섞이지 않길 바랐는데, 여전히 불안으로 입이 마르고 손끝이 차가워졌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김한별이라는 예기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도 해성을 지탱해 주는 무료한 일상은 고요하고 잔잔히, 제 할 일을 하며 흘러갔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 * *

“갑니다.”

“들어가십시오.”

“너도 운동 좀 해!”

정겨운 인사를 나눈 후 오늘도 남아서 운동을 하겠다는 두 운동 중독자를 두고 해성은 먼저 도장을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휴대폰으로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니 전국에 한파 주의보가 내려졌다는 기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기사를 읽는 해성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차라리 차에서 기다리라고 할까.

해성은 휴대폰을 잠그고 패딩 주머니에 양손을 넣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숫자판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대충 퇴근 시간을 알아서 김한별이 저를 한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다. 오늘처럼 유난히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에는 더더욱.

차라리 별 마트에 있으라고 할까. 일 끝나고 별 마트로 가면.

“하….”

거기까지 생각한 해성은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기다리지 말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그 말을 김한별이 들을지 듣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해 볼 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자꾸 어떻게 하면 춥지 않게 기다릴 수 있는지만 골몰하는 자신이 황당해 웃음이 났다.

해성은 마른세수를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유리문 밖을 바라보았다. 유리문 밖의 김한별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안에 들어와 있든가 하지, 날도 추운데.”

툴툴거리면서도 내딛는 걸음은 점차 빨라졌다. 유리문을 밀고 나가 웃는 얼굴을 보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안 춥냐.”

두근거리는 심장과 다르게 말투는 건조했다.

“네 생각만 하면 뜨거워져서 괜찮아.”

“와.”

저런 말을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하는 김한별에 해성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자.”

해성이 그러든 말든 김한별은 왜인지 기대에 찬 눈으로 해성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보온 백이었다.

“뭐야?”

“열어 봐.”

“뭔데, 또.”

해성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김한별을 훑어보고는 지퍼를 열었다.

“맛도 보면 좋겠는데. 길바닥에서는 좀 그렇지?”

잠시 그 상태로 굳어서 김이 서린 투명 도시락 속 잡채를 바라보던 해성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 단골 한정식집에서 레시피 받아서 만든 거야. 원래 음식집에서 함부로 레시피 유출 안 하는 거 알지?”

해성은 턱을 치켜들고 입술을 기울이는 김한별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러다 점점 표정이 느슨해지고 이어 눈매가 잔뜩 휘어졌다.

“풉.”

한번 터진 웃음이 그칠 줄 몰랐다. 해성은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꼬리를 접고 빨간 혀가 보일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야, 너 진짜.”

조만간 잡채를 만들어 오겠거니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얼마나 웃었는지 눈에 눈물이 맺힐 정도였다. 하, 하고 숨을 고르며 손가락으로 맺힌 눈물을 닦아 낼 때였다. 목덜미가 잡혀 그대로 끌려갔다. 입술이 닿기 직전에 당기는 힘이 멈췄다.

“나해성.”

해성은 여전히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김한별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키스하면 다시는 나 안 만나 줄 거면서.”

“….”

“사람 미치게 한다니까.”

“차로 가.”

목덜미를 세게 쥔 손을 풀어낸 해성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가자. 나도 하고 싶어.”

진심이었다. 해성은 김한별에게 키스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런 해성을 향한 김한별의 새까맣고 진득한 눈이 어두컴컴한 골목길 위에서도 반짝이며 빛을 냈다.

늘 별 마트 맞은편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얼마 전부터 보이지 않아 드디어 수리라도 맡긴 건가 했는데 문짝에 여전히 스크래치를 단 차는 건물 뒤편 주차장 구석을 지키고 있었다.

가뜩이나 어두운 밤, 건물 그림자에 가려져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주차장 구석으로 간 김한별은 손을 더듬거리며 조수석 문을 열려는 해성을 낚아채 뒷좌석으로 밀어 넣었다. 갑자기 던져진 해성이 인상을 쓰며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하는데 차 문이 닫히는 묵직한 소리가 차 안을 울렸다.

“차가… 넓다?”

“응. 이런저런 재밌는 거 많이 할 수 있을 만큼 넓지.”

키스하자고 덤비긴 했지만 느릿느릿 저를 올라타는 김한별의 모습이 심히 위압적이라 해성은 살짝 주춤했다.

“굳이 이 자세로 키스를 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키스를 좀 역동적으로 하는 편이라.”

“그래. 그렇구나.”

해성이 떨떠름하게 대꾸하자 김한별이 긴장으로 뻣뻣해진 흰 목덜미에 고개를 처박고 낮게 웃었다.

“겁쟁이.”

살랑거리는 숨이 피부를 간질거렸다. 해성은 목을 움츠리며 김한별을 슬며시 밀었다.

“내가 겁이 많은 게 아니라 네가 위협적이라는 생각은 안 드냐?”

“내가 좀 위협적이긴 하지. 여러 가지로. 특히.”

“….”

“이쪽이.”

은근하게 중심을 마찰시키던 김한별이 별안간 움직임을 뚝 멈추고 해성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잘못 생각했어.”

“뭘?”

해성은 고개를 기울여 김한별이 제게 했던 것과 비슷하게 입술을 부딪치며 물었다. 그러자 김한별이 표정을 지운 얼굴로 말없이 해성을 바라보았다.

“뭔데. 지가 먼저 해 놓고.”

“네가 이럴 때마다 진짜 미칠 거 같아.”

“미칠 정도로… 그렇게 좋냐?”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차마 김한별을 마주 보지 못하고 괜히 그의 어깨쯤을 노려볼 정도로 긴장하며 장난스레 던진 말이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 깔린 기대가 김한별에게 들킨 것만 같아 해성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응. 좋아서 미칠 거 같아.”

그런 해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역시나 즉각적인 대답이 이어졌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흘러나온 목소리가 해성의 가슴을 짓눌렀다.

해성은 입술을 씹으며 김한별의 어깨를 쥐었고 김한별은 그런 해성의 이마에, 눈꼬리에, 콧잔등에, 뺨에 그리고 입술에 차례로 키스했다.

“여기서 섹스하면 나 죽일 거지?”

“김한별.”

해성의 눈이 불안으로 덜컹거렸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도장이 있었다. 지금 여기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있는데. 애초에 키스하겠다고 여기 이러고 있는 주제에 몸을 사리는 것도 웃겼지만 그럼에도 눈은 연신 김한별의 등 너머 차창을 살폈다. 그래 봤자 까만 밤뿐이었지만.

“그러니까 잘못 생각했다는 거야. 멀리 갈걸.”

“….”

“단순히 키스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벌써 아래는.”

“키스만 할 거 아니면 비켜. 나 가게.”

“참아 볼게.”

어깨를 밀치려 하자 김한별이 신속하게 말을 바꿨다.

“내가 또 인내심이 강한 편이거든. 자제력도 좋은 편이고.”

금시초문이었다.

그동안 김한별과 보낸 몇 번의 밤 중 김한별의 인내심이나 자제력을 엿볼 수 있는 순간은 없었다.

“저번에 봤잖아. 너 옆에 있는데도 내가 손 하나… 안 댄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 안고 자는 것만으로도 뜨거워져서 힘들었어. 어디가 뜨거워졌는지는, 알지?”

제 뺨을 해성의 뺨에 비비며 엄살을 부리는 말에 과거의 망령, 말 그대로 망령에 사로잡혀 김한별의 앞에서 굳어 추태를 부린 날이 떠올랐다.

눈치 빠르고 영리한 김한별이 베풀었던 배려도.

해성이 어깨를 밀자 김한별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해성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오락가락, 줏대도, 주관도 없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키스하자고 했다가 비키라고 했다가 다시 뺨을 잡고 매달리는 자신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 것인지도. 그럼에도.

해성은 두 손으로 제 주인을 닮아 부드럽고 단단한 두 뺨을 감쌌다. 그러자 김한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그러더니 명령 같은 부탁을 했다.

“키스해 줘.”

입술이 맞닿기 직전까지, 집요하리만큼 끈질기게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김한별을 감당할 수 없어서 해성은 눈을 감아 버렸다.

그렇게 작은 풍랑을 매단 해성의 일상이 어느덧 겨울의 끝자락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최지민, 저거 학교 가면 애들이 놀아 주려나 몰라.”

관장실 책상에 앉은 박재관이 심란한 눈으로 최지민을 걱정스럽게 보며 말했다.

“파릇파릇한 새내기들 속에서, 에휴. 최지민, 어떻게 하냐, 증말.”

“도장은 화목금 나온다고?”

“네. 근데 월수도 나올 수 있으면 오려구요. 운동도 좀 하고.”

해성과 최지민은 테이블 옆에 서서 그런 박재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믹스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너는 학교에서도 운동하면서 뭘 도장까지 와서 하냐.”

해성은 약간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 운동은 나랑 해야 하지? 그래야 근육이 적절하게 움직이면서 아드레날린이 폭발하지?”

“아, 밥 왔다.”

최지민이 때마침 저녁 식사를 싣고 도착한 배달 기사를 맞이하러 관장실을 나가자 박재관이 그런 그를 흘겨보며 카드를 들고 따라 나갔다.

관장실에 혼자 남은 해성은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다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던 몸을 바로 세우고 빠르게 휴대폰 키패드를 터치했다. 그사이 최지민과 박재관이 배달 음식을 들고 돌아왔다.

“안 그러셔도 된다니까요. 무슨 깐풍기까지. 아까 용돈도 주셨잖아요.”

“우리 최지민이 새내기들 속에서 고군분투할 생각에 눈물이 나서, 내가, 어? 좋은 거라도 먹여야.”

“사범님. 식사하시죠.”

해성은 막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고 한 상 거하게 차려진 테이블로 갔다.

김한별

와 나해성이 먼저 데이트 신청? 나 잠깐 기절했다가 깨어남 오늘 시간 되지 완전 되지

다음 주면 김한별도 복학이었다. 아무래도 복학을 하면 지금보다야 바빠질 테니 그냥 그전에 술이나, 밥이나 같이할까 싶었다. 주말에 만나자고 하는 건 왜인지 내키지 않았다. 적당히 먹다가 헤어지기에는 퇴근 이후 밤 시간이 나은 것 같아 물었는데 김한별은 흔쾌히 수락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해성은 휴대폰으로 갈 만한 곳을 검색했다. 어차피 원생들과 학부모들 사이에서 둘은 아는 형, 동생 사이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래도 좀 떨어진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렇다고 술집을 가고 싶지도 않고. 고깃집도 별로고.

휴대폰에 고개를 처박고 걷다가 유리문을 밀려고 하는데 손도 대지 않은 유리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시선을 들자 김한별이 유리문을 잡고 있었다.

“아, 고맙다.”

“뭘 이 정도 가지고. 나 먹고 싶은 거 있는데 거기로 갈까?”

김한별의 말에 해성은 핏, 웃고는 휴대폰을 잠가 주머니에 넣었다.

“좋지.”

김한별이 데려간 곳은 도장에서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역 근처 기계 우동집이었다.

“여긴 우동만 먹으면 안 돼. 불법이야.”

어묵 우동 2인분과 돈가스, 그리고 소주를 주문한 김한별이 해성의 앞에 숟가락, 젓가락, 포크를 줄 맞춰 놓아 주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말에 반박을 하기에는 주변 테이블도 전부 돈가스를 먹고 있었다.

“이 시간에도 사람이 많네.”

“여기 유명해. 24시간 영업이라 나는 애들이랑 술 먹고 해장하러 새벽에 종종 오고.”

“여긴 할머님 단골집은 아니야?”

“실망하는 거야, 지금? 굉장히 서운한데?”

“뭐가.”

저도 모르게 말투에서 티가 난 모양이었다. 해성은 괜히 물 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점원이 가져다준 소주병을 땄다. 그러자 김한별이 잔을 내밀며 말했다.

“너 나랑 가야 되는 식당 아직 많아.”

김한별의 잔에 술을 따라 준 해성은 소리 없이 웃으며 제 잔에도 술을 따랐다. 그 식당을 다 가 볼 때까지 김한별이 저를 만나 줄까 싶었다.

“그러니까 나 복학한다고 불안해할 거 없어.”

해성의 얼굴 위에 스며 있던 옅은 웃음이 서서히 증발했다.

“봐.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어딘지 무미건조한 목소리.

“전에 어떤 씹새끼를 만났는지는 모르겠는데.”

천천히 들어 올린 시선 끝에 예리한 눈으로 저를 샅샅이 핥아 보는 김한별이 걸렸다.

“날 그딴 개 호로 새끼랑 비교하면.”

“….”

“내가 많이 섭섭해, 형.”

넘칠 듯 찬 술잔을 들고 씩 웃는 얼굴에 해성은 울고 싶어졌다.

낮은 숨과 함께 울컥 치밀어 오른 감정을 뱉어 낸 해성은 술잔을 들어 김한별이 들고 있는 잔에 부딪쳤다. 찰랑이는 맑은 술을 단번에 털어 넣고 쓴 술맛에 왼쪽 눈을 살짝 찌푸리는 해성을 보며 김한별 또한 술잔을 비웠다.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하냐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 새끼는 씹새끼가 맞고, 개 호로 새끼도 맞았으니까. 차마 부정할 수도,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그냥 사람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게 거기서 거기지, 뭐.”

고르고 골라 겨우 무난하고 평범한 변명을 찾아냈다. 때마침 나온 우동과 돈가스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해성이 손을 쓸 새도 없이 김한별이 나이프로 돈가스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상황도 잊고 웃음이 났다.

해성은 열없이 웃으며 우동 국물을 떠 마셨다. 쓰린 속과 입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건물주 할머니 단골집 못지않게 국물 맛은 훌륭했다.

“맛있네.”

“난 너 맛있는 것만 먹일 거야.”

제 앞에 빈 잔을 채우던 해성이 시선을 들었다.

“맛있는 것만 먹이고, 좋은 데만 데려갈 거야.”

돈가스가 매달린 포크를 든 김한별은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해성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랑 다른 사람을 비교하면서 겁먹는 일은 그만둬.”

“….”

“그리고 우리 할머니 단골집이랑 내 단골집 비교하는 일도.”

“….”

“하, 내가 할머니를 상대로 승부욕을 느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계속 느끼지 마라. 꿈에도 느끼지 마라. 제발.”

전국 팔도에 있는 숨은 명인까지 찾아낼 기세인 김한별을 보며 해성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어깨를 늘어트렸다.

아무래도 메뉴가 메뉴이다 보니 테이블 회전이 빨랐다. 해성과 김한별도 마냥 한곳에 뭉개고 있기는 좀 그래서 식사를 마치고 바로 일어났다. 적당히 먹고 헤어질 요량으로 퇴근 후에 만나자고 한 건데 막상 자리가 일찍 파하니 아쉬웠다.

김한별도 술을 마셨으니 대리를 불러야 하나.

“잘 먹었어.”

“어.”

산뜻한 인사에 헤어짐을 아쉬워했던 것이 민망해져 해성은 휴대폰을 쥔 손을 패딩 주머니에 꽂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김한별을 바라보았다.

“대리 기사.”

“이 근처에 포장마차.”

동시에 말을 꺼냈는데 그 내용은 극명히 달랐다. 그러자 김한별은 과하게 실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와. 그렇게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아니, 야. 그게 아니잖아.”

김한별이 연기를 하고 있는 걸 알면서도 해성은 당황해 한 발자국 가까이 그에게 다가갔다.

“시간도 늦었고.”

“그래. 뭐, 너 피곤하면 어쩔 수 없지. 나는 그냥… 네가 뭐 사 준다길래. 좀 약간 기대하고 나온 건데. 괜찮아.”

말은 축축 처지는데 표정은 무덤덤하기 그지없었다. 삐딱하게 선 김한별은 해성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지, 괜찮아. 나는 괜찮.”

“계속해라. 포장마차 안 간다.”

“가자. 여기서 별로 안 멀어.”

김한별은 금세 신난 얼굴로 제 어깨로 해성의 어깨를 슬쩍 밀며 재촉했다.

“거긴 누구 단골집인데? 할머님? 아님 너?”

“자꾸 할머니랑 비교하네? 비교는 나쁜 건데?”

농담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실없는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둘은 늦겨울, 사람들이 오가는 밤거리를 걸었다.

대체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 거냐, 묻고 싶을 때쯤 생각지도 못한 외진 곳에 가게가 하나 나왔다. 그 가게 앞마당에 천막을 쳐 만들어 놓은 야외 포차가 있었다.

“넌 이런 데는 어떻게 아는 거야?”

“대단하지?”

대단하긴 했는데 대단하다고 말해 주기는 싫었다. 해성이 입을 꾹 다물자 김한별이 웃으며 검지로 해성의 입술을 톡, 쳤다.

“여기는 오돌뼈가 예술인데. 너는 애기니까 오돌뼈 같은 거 못 먹으려나? 그럼 계란말이로?”

해성은 진지한 얼굴로 헛소리를 하는 김한별을 지나쳐 천막을 거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적당한 자리로 가 앉아 조리대 앞에 서 있는 아저씨를 보며 말했다.

“오돌뼈 하나랑 소주 한 병이요.”

입구에 서서 해성을 지켜보던 김한별이 비식 웃으며 해성의 맞은편에 와 앉았다.

“어른스럽다. 너무 섹시해.”

“넌 너무 까불고.”

“난 안 섹시해?”

오가는 대화가 아슬아슬해 해성은 슬쩍 조리대 너머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아저씨는 막 주문받은 요리에 열중하고 있었다. 포차 안에는 대화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의 음량으로 틀어 놓은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나머지 테이블은 전부 비어 있었다. 다른 손님들은 아마도 실외 포차가 아닌 가게 안에 있는 듯했다.

“어린 게 섹시 같은 소리 하네.”

“그래서 안 섹시하다는 거야?”

적당히 말을 돌리려 했는데 김한별은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해성은 가만히 김한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자 턱을 괸 김한별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눈을 깜빡였다.

“더 크고 와라.”

“여기서 더?”

해성의 말에 김한별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입술을 기울였다.

“감당할 수 있겠어?”

김한별이 의미하는 바를 해성이 모를 리 없었다.

어떻게 대화가 순식간에 저렇게 튈 수 있는 거지?

해성이 고개를 흔들고 있을 때였다. 소리 없이 다가온 아저씨가 테이블 위에 오돌뼈와 쌈무, 깻잎, 상추. 그리고 맑은 콩나물국을 세팅했다.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이었다. 마지막으로 소주잔과 소주까지 각 맞춰 놓아둔 아저씨는 필요한 게 있으면 종을 울리라며 테이블 구석에 있는 종을 가리켰다. 오돌뼈에서 나는 불 향을 감상할 틈도 없었다.

아니, 웬 종?

플라스틱 테이블 위에 산타가 흔들 법한 종이 있는 것도 신기한데 그걸 이제야 알아챈 것도 기가 막혔다. 할 일을 끝낸 아저씨는 바람같이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자, 한잔할까?”

아저씨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눈만 끔뻑이던 해성은 태연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이를 악물었다.

“야.”

뺨에 꽂힌 손가락을 쳐 낼 생각도 못 하고 김한별을 쏘아보자 그가 손가락 끝으로 방금 찔렀던 곳을 살살 문질렀다.

“넌 어떻게 볼따구도 이래?”

“볼따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해성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김한별은 좋다고 웃었다. 해성은 그런 김한별을 잠시 바라보다 어느새 채워져 있는 술잔을 비워 냈다. 비운 술잔을 내려놓자마자 입 앞에 무언가가 쑥 다가왔다.

“무… 뭐?”

“아, 해.”

적당한 크기의 쌈이었다. 해성이 고개를 뒤로 물리자 동그란 쌈도 해성을 따라왔다.

“아아.”

실실 웃는 낯과 다르게 행동은 고집스러웠다. 결국 소리 없는 웃음을 흘린 해성은 김한별의 손목을 두 손으로 잡고 입을 벌렸다.

“맛있네.”

“갑자기 열 받아.”

맛있다는 말에 대한 반응치고는 조금 격했다.

“왜, 뭐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꿀꺽, 쌈을 삼킨 해성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김한별이 해성에게 잡혀 있는 손목을 스르륵, 미끄러트려 해성의 손을 맞잡았다.

“모르겠어.”

김한별이 모르는 것도 있다니. 해성은 조금 놀라서 숨을 들이켜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새끼랑 이러고 놀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때문에 열 받는 건지, 아니면 이런 짓도 안 해 봤을까 봐 열 받는 건지.”

해성의 눈이 까맣게 가라앉았다. 진심으로 화가 난 얼굴을 한 김한별을 바라보던 해성이 침착하게 그를 불렀다.

“김한별.”

“응.”

해성은 차분히 숨을 내쉬며 숨을 골랐다.

“너.”

“응.”

김한별은 그런 해성을 느긋하게 기다려 주었다.

“너… 뭔가 게이들은 특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

“그냥 사귀다 헤어지고, 상처도 받고, 극복도 하고 그러면서 살아. 똑같이.”

차마 김한별의 눈을 마주할 수는 없어서 해성은 시선을 떨어트렸다.

거짓말이었으니까.

해성에게는 죽을 만큼 힘든 상처였고, 그 상처를 극복했는지도 아직 확신할 수 없었고, 적어도 다들 그러고 살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한별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곪아 터진 마음을 사랑이라 믿었던 어리석은 지난날들 따위는. 할 수만 있다면 지금처럼 고작 몇 년 먼저 태어났다는 허술한 구실로 어설픈 어른 노릇을 하며, 그렇게 지내고 싶었다.

나름 평연히 목소리를 냈다 생각했는데 맞잡은 손의 악력이 거세졌다.

그래, 이 정도로는 기민한 김한별을 속일 수 없겠지.

해성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진중한 눈으로 저를 살피는 김한별이 보였다. 정말 제게 어떤 상처도 주지 않을 것 같은 눈이. 그래서일까. 내내 궁금했던 마음을 묻고 싶어졌다.

“왜….”

“….”

“그때, 연휴 전에는 왜 만나자고 안 했어?”

입이 멋대로 주절거린 말이 제 귀로 흘러들어 오자마자 후회했다. 답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아서.

해성이 입술을 깨물자 김한별이 마치 달래듯 엄지로 해성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싫어할까 봐.”

“….”

“내내 집에 있는 널, 나한테 들키고 설명해야 하는 걸 싫어할까 봐.”

김한별은 차갑게 식은 하얀 손을 더욱 세게 붙들었다.

“근데 보고 싶어서 못 참겠더라고.”

늘 그랬듯 자신만만하게, 모든 일이 별것 아닌 듯 웃는 얼굴을 보며 해성은 마음 한 귀퉁이가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오늘.”

동시에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일었다.

“같이 있을래?”

김한별이라면, 어쩌면 정말 괜찮지 않을까 하는, 부질없는 기대와 함께.

“괜찮으면… 나랑.”

“우리 집으로 가.”

김한별은 해성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우리 집에 가자, 형.”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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