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4)

3.

모퉁이를 돌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빗자루를 든 김한별이 씩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해성이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뭐 하냐.”

눈도 다 녹았는데 무슨 빗질을 한다고. 그나저나 저 빗자루는 대체…. 맞춤 제작한 건가?

슬쩍 눈을 피하던 해성의 시선 끝에 기성품 중에는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긴 빗자루가 걸렸다.

“해성이 기다렸지.”

왜인지 오늘따라 김한별을 마주하는 것이 껄끄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말투가 퉁명스럽게 나갔는데 역시나 김한별은 그런 것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형이라고 하랬지.”

“해성이 형아, 기다렸지.”

해성은 오늘도 한 치의 양보가 없는 김한별을 지나쳐 별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냉장 진열대로 가서 가장 싼 커피 세 개를 골라 들고 계산대로 가니 계산대 안쪽에 선 김한별이 해성을 보며 또 실실 웃고 있었다.

“생긴 거만큼 단 걸 좋아해?”

“계산요.”

“귀엽기는.”

“야.”

습관처럼 덧붙여진 김한별의 말에 또 발끈한 해성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김한별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무표정한 얼굴로 턱을 살짝 든 김한별이 해성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기울였다.

“여기서 그렇게 보면 곤란한데.”

“왜? 키스하고 싶어져서?”

굳이 듣지 않아도 이제 김한별이 할 말이 쉽게 예상되었다. 괜히 열을 낼 필요도 없었다. 알면서도 매번 말려들긴 했지만. 해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들고 있던 커피를 계산대에 내려두고 패딩 주머니를 뒤적거려 카드를 꺼냈다.

“빨리 계산이나….”

계산에는 영 관심이 없어 보이는 김한별을 재촉하며 고개를 든 해성은 어느새 코앞까지 뻗어 온 손에 흠칫 몸을 떨었다.

“아. 진짜 키스할 뻔했잖아, 형.”

허공에서 움켜쥔 주먹을 천천히 내린 김한별이 동그란 의자에 앉으며 해성을 올려다보았다.

“진짜로 키스했다가는 졸도할 거면서.”

무슨 졸도까지, 라는 말은 농담으로라도 할 수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생각만으로도 숨통이 죄다 틀어막혔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게 하지 않을 거니까 그렇게 쫄 거 없어.”

동그란 회전의자를 좌우로 움직이며 말하는 목소리가 태연했다.

“…쫄긴 누가 쫄아.”

“누구긴 누구야, 겁 많은 나해성이지.”

“까분다.”

“겁쟁이, 이따가 또 집에 데려다줘야지.”

김한별과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고 있으니 차갑던 손끝에 피가 돌았다. 해성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봉지에 커피를 담는 김한별을 지켜보았다.

“봉지는 서비스예요, 손님.”

그러다 싱글거리며 건네는 봉지를 받아 들고 돌아섰다.

“구청에 신고한다.”

등 뒤로 안 돼에,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이거 드실래요?”

“웬 초콜릿이야?”

아이들을 차량에 태워 보내기 위해 1층에 다녀온 최지민이 대뜸 초콜릿을 내밀었다. 해성은 의아해하면서도 착실하게 초콜릿 포장지를 까 입에 물었다.

“아래 내려갔다가요. 한별이가 먹으라고 주길래.”

“한별이?”

초콜릿을 씹던 해성의 눈초리가 가느스름해졌다.

“네.”

“많이 친해졌네?”

“친하다기보다는 그냥. 오다가다.”

간결하게 설명을 마친 최지민은 고개를 휘휘 젓다가 관장실에서 통화를 하고 있는 박재관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해성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별 마트 직원들이랑은 친해질 수밖에 없긴 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꼭 방문하게 되는 마성의 장소가 바로 별 마트였으니까. 게다가 김한별과 최지민은 비슷한 나이대이기도 하니 둘이 가까워진 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전 같았으면 그런 쪽으로 관련이 있는 김한별과 이런 쪽으로 관련이 있는 최지민이 인사를 나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겁을 했을 텐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심장이 철렁하긴 했지만 적어도 김한별이 저와의 일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리고 다닐 인물은 아니라는 걸 알아서인지 불안이 가지를 치지는 않았다.

해성은 초콜릿을 보고 환호하는 박재관과 그런 박재관을 두고 패딩을 벗어 행거에 거는 최지민을 보며 초콜릿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그러고는 이내 잡생각을 털어 버리고 레크리에이션에서 쓸 음악을 체크했다.

패딩 주머니에서 손을 빼는 것도 귀찮아서 어깨로 유리문을 밀고 나오자 매서운 겨울바람이 뺨을 때렸다.

“으, 추워.”

“추위도 많이 타고. 하여튼 손이 많이 간다니까.”

“그러면 손 안 가는 애들이랑 놀아.”

“그러면 손 안 가는 애들이랑 놀아.”

당연하다는 듯 옆에 붙어 걷던 김한별이 해성이 하는 말을 동시에 똑같이 따라 했다. 그러고는 기가 찬 듯 저를 보는 해성의 코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너랑 노는 데 미쳐서 다른 애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고 말 안 했나?”

“넌… 그냥 미친 거 같다.”

해성은 솔직한 소회를 밝히고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오늘따라 바람이 유독 찼다.

“초콜릿은 잘 먹었어?”

“초콜릿?”

“어. 지민이 형 통해서 보낸 거. 그거 마트에서 파는 거 아니다.”

김한별이 저 먹으라고 일부러 별 마트에서 팔지도 않는 초콜릿을 보냈다는 사실보다 지민이 형, 이라는 호칭에 더 신경이 쓰였다. 저에게는 아직 어린애 같은 최지민이 김한별에게는 형이었다. 최지민을 형이라고 부르는 김한별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장난삼아 저를 형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김한별.”

해성은 걸음을 멈추고 김한별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실실거리던 김한별이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네가 지금 나랑 뭐 하려는 건지 알겠어. 알겠는데.”

“….”

“그냥 다 집어치우고 하나만 생각해도 이건 아니야.”

해성이 무슨 말을 하건 김한별은 입을 굳게 다물고 해성의 입술만 응시했다.

“너랑 나랑 몇 살 차이인 줄은 알고 있지? 전에 말한 것처럼 잠깐 어울려 주는 거 정도는 할 수 있어. 그 정도는 일도 아니지. 근데 그 이상을… 너랑 나랑 뭘 하기에는.”

해성의 목덜미가 빨개졌다. 김한별이 저와 어디까지 가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는데 괜히 혼자 앞서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오버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그러면서도 이참에 제대로 말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민망함은 잠시 접어 두었다.

“넌 아직 너무 어리고. 세상 물정도 모르고…. 나 말고 네 또래랑 어울리는 게 맞지 않냐? 나는 이제 이런저런 감정 소모도 지겹고… 색다를 것도 없어.”

“우리 할머니 앞에서도 그럴 수 있어?”

머뭇거리며 중얼거리는 내용보다 그 말을 하는 입술에만 집중하는 것 같던 김한별이 뜬금없는 것을 물어 왔다.

“뭐를.”

“우리 할머니 앞에서도 그렇게 인생 다 산 척할 수 있냐고.”

“내가 뭘 또 다 산 척을 했다고.”

“고작 서른두 살인 주제에.”

“야….”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김한별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해성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등에 어깨 정도 높이의 담벼락이 닿았다.

“뭐, 뭔데.”

흡사 털어서 나오면 백 원에 한 대씩. 이라고 말할 것만 같은 분위기에 말까지 더듬었다. 해성은 급히 크음,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고작 서른둘이라니. 너보다 무려 여덟 살이나.”

“많지, 많아.”

애써 덤덤하게 이어지던 말을 단칼에 끊은 김한별이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모르는 것도 많지. 안 해 본 것도 많고.”

이번엔 해성이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그래서 좋아. 넌 앞으로 나랑 처음 하는 것들이 많을 테니까.”

“….”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실컷 분위기 잡아 놓고 그럼 뭐가 더 중요하다는 거지?

해성의 반듯한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나, 지금 너랑 키스 안 하면 죽을 거 같은데.”

“….”

“사람 하나 살린다 생각하고 키스 한번 하자. 지금 당장 네 입에 혀 쑤셔 넣고 싶은데 너 싫어하는 짓은 죽어도 하기 싫거든, 내가? 그러니까 내 차로 가.”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선 김한별은 답지 않게 아주 다급하고 초조한 눈을 하고서도 기어코 해성이 먼저 발걸음을 옮길 때까지 기다렸다.

손수 조수석 문까지 열어 해성을 차에 태운 김한별은 거칠게 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뭐 해? 벨트 매야지?”

다급하고 초조한 얼굴에 저도 모르게 시키는 대로 차에 타긴 했는데 운전대를 돌리며 웃는 낯은 평소와 다름없이 여유로웠다.

당장이라도 달려들듯이 굴기에 차에 타자마자 입술을 붙여 대는 건 아닌가 걱정하고 있던 해성은 세게 벨트를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아무리 차 안이라고 해도 별 마트가 코앞이었다. 도장이 그 위에 있었고 원생과 학부모가 언제든 근처를 지날 수 있었다. 해성은 이런 것조차 김한별이 저를 배려해서 하는 행동인 걸까 하고 고민했다. 껄끄러운 감정과 쓸데없이 세차게 박동하는 심장이 뒤엉켰다.

그래도 다행인 마음이 가장 컸다. 해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차는 매끄럽게 굴러 도장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한적한 길가에 멈춰 섰다.

어두운 이 차선 도로엔 오가는 차가 없었다. 가게도 없이 늘어진 가로수뿐이라 길 위엔 온통 어둠뿐이었다. 해성이 다시 긴장했다.

“난 분명히 얘기했어.”

시동을 끈 김한별은 여전히 운전대를 쥔 채였다. 손등 위로 불거진 핏줄에 머물러 있던 시선이 휘어진 입술을 스쳐 새카만 밤에도 반짝이는 눈으로 옮겨 갔다.

“네가 싫어하는 짓은 안 해.”

“….”

“너, 나랑 키스하는 거 싫어하지 않아. 그러니까 난 너한테 키스할 거야. 넌 겁쟁이지만 적어도 거짓말쟁이는 아니니까. 말해.”

“….”

“싫어? 안 싫어?”

일차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꼴이 딱 애새끼였다. 원하는 답을 기대하며 운전대를 부서져라 움켜쥐는 모습까지도.

해성은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가만히 김한별을 바라보았다.

저 질문의 수준에 맞게 답을 하자면.

“싫진 않아.”

싫지는 않았다. 그날 김한별과 술집을 나간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데. 그와의 키스가 싫었으면 애초에 그런 선택을 하지도 않았다.

해성의 시원찮은 대답에 김한별이 비식 웃음을 흘렸다.

“계속 빠져나갈 구멍을 두려고 하는데.”

목덜미를 감싸는 손이 델 듯이 뜨거웠다.

“뭐, 상관없어.”

코가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다물린 붉은 입술을 핥던 눈이 느리게 위로 기어 올라왔다.

“그 구멍, 내가 시멘트 부어서 막아 버릴 거니까.”

진지한 말투에 난데없이 웃음이 났다.

“하, 야… 넌 진짜.”

해성은 웃음기가 밴 눈으로 김한별의 고집스러운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대체 김한별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한순간의 호기심이든 관심이든 흥미든, 저에게 보이는 김한별의 이 태도와 감정이 얼마간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김한별은 제게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도 단지 섹스 때문만이 아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목적으로.

그게 당최 이해되지 않았다. 김한별의 말대로 그가 보이는 자신감은 탄탄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여러 가지로 꽤나, 아니 많이 잘난 축에 속하는 김한별이 대체 왜 저 같은.

만성적으로 이어지려던 자기 비하는 뜨거운 입술에 타서 증발해 버렸다. 김한별은 남은 손으로는 해성의 몸통을 휘감아 제 쪽으로 당겼다. 해성은 안전벨트를 풀고 김한별의 목을 감싸 안았다.

“읏!”

그러자 김한별이 해성의 혀를 제 입으로 끌어가 깨물었다. 그 강도가 제법 강해서 주먹으로 어깨를 내려쳤지만 바위 같은 몸에 해성의 주먹만 아팠다. 이 와중에도 자존심이 상했다. 전공자가 일반인을 상대로 밀리다니. 하지만 도복 상의 안으로 들어와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솔솔 피어오르던 경쟁심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날갯죽지를 엄지로 살살 문지르던 김한별이 등줄기를 쓸어내리다가 옆구리를 한 손에 쥐었다. 난잡하게 입 안을 헤집는 혀와는 달리 신중하기 그지없는 손길에 허리가 저릿했다.

해성도 김한별의 목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려 김한별이 입고 있는 맨투맨 안으로 집어넣었다. 김한별처럼 한 손에 그 몸통을 거머쥐고 싶었지만 쓸데없이 두꺼워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김한별이 크게 튀어 올랐다. 혀가 얽히고 빨리며 나는 질척거리는 소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김한별은 공기를 빨아들이듯 흡, 하고 혀를 강하게 흡입한 후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러고는 잘게 입술을 부딪쳤다. 낯간지러운 짓거리에 뺨만 발그레하던 얼굴이 온통 시뻘게졌다. 이런 건 낯설었다. 해성은 슬쩍 돌덩이 같은 몸을 밀어 냈지만 역시나 밀리지 않았다.

“야… 야….”

“왜.”

말을 하면서도 김한별은 계속 해성의 입술과 뺨, 눈꼬리에 키스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키스하자고 했지, 이런 거, 야, 하자고는 안 했잖아.”

들러붙는 입술을 피하며 말하자 김한별이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너 말이야.”

김한별은 어쩐지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언짢다는 표현보다는 화가 난 것 같은데. 왜 화가… 나? 무슨 거슬리는 행동이라도 했나? 아니면 말실수라도 한 건가?

지금까지 해성이 무슨 짓을 해도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은 김한별이었다.

“왜…. 뭐가.”

해성은 빳빳하게 굳은 채로 저를 보는 눈빛과 저를 향한 표정을 조마조마하게 살폈다.

그러자 김한별이 쪽, 하고 노골적인 소리가 날 정도로 키스를 해 왔다. 반사적으로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실실 웃고 있는 오연한 얼굴이 보였다.

“해성이 형은 뽀뽀도 잘 모르는구나. 서른두 살이라면서 나이로 유세는 다 떨어 놓고 뽀뽀가 뭔지도 모르고.”

“내가 뭘 또 유세를 떨었냐….”

떨긴 떨어서 목소리에 자신감마저 떨어졌다. 근데 여덟 살이면 떨 만하지 않나?

슬그머니 맨투맨 속에 있는 손을 빼내는데 김한별이 해성의 아랫입술을 물고 웅얼거렸다.

“이제 아침 점심 저녁 꼬박꼬박 나랑 뽀뽀 연습해야겠다.”

“비켜… 아!”

어김없이 헛소리를 늘어놓는 김한별을 밀어 내다가 입술이 깨물렸다. 해성이 손등으로 아린 입술을 누르며 쏘아보자 몸을 뒤로 물린 김한별이 시동을 걸며 말했다.

“여기 근처에 죽이는 해장국집 있는데 먹고 가자.”

“술도 안 마셨는데 무슨 해장국이야.”

“그럼 술부터 마실까?”

“늦었어. 집에 갈래.”

지금쯤이면 씻고 나와 이불 속에서 휴대폰이나 하며 평화로운 퇴근 후 삶을 즐기고 있을 시간이었다.

“집에 가 봤자 휴대폰이나 하다가 새벽에 잘 거면서.”

안전벨트를 매던 해성이 뜨끔해서 쳐다보자 김한별이 한쪽 입술을 끌어 올렸다.

“너 내 손바닥 안에 있다니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김한별이 정말 자신의 모든 걸 꿰뚫어 볼까 봐 오싹해졌다.

“차라리 모텔을 가지고 해.”

“이제 너 모텔 안 데려가.”

그래서 적당한 주제로 말을 돌렸는데 제법 단호한 대꾸가 돌아왔다.

“난 호텔 감당 못 해.”

“너더러 돈 내라고 안 해.”

하여튼 한 마디를 안 진다. 해성은 시트에 늘어져 말없이 김한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여전히 시선은 정면에 둔 김한별이 손만 뻗어 검지로 해성의 뺨을 톡 건드렸다.

“그렇게 봐도 이제 싸구려 모텔 갈 일은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

김한별과는 아니겠지만 다른 상대와는 아마도 계속 모텔을 전전할 것이었다. 하룻밤 인연에 피차 굳이 돈을 들일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서 너 아니면 호텔 갈 일 없다고,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가시처럼 목에 걸린 말이 좀처럼 뽑히지 않았다.

그런 해성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한별은 이번에도 집이 아닌 24시 영업이라는 간판이 세워진 가게 앞에 차를 세웠다.

“나 믿고 한 숟가락만 먹어 봐. 그래도 싫다고 하면 바로 집에 간다.”

그러고는 해성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믿을 이유도, 서로 믿음을 주고받을 사이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저보다 한참 어린 남자의 얼굴이 꽤나 믿음직스러웠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 * *

“괜히 휴대폰 들여다보고 있지 말고 씻고 자.”

어린놈이 어르신 같은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휴대폰으로 확인한 시간은 밤 11시 17분. 집으로 향하다 엉겁결에 김한별의 차에 타서 으슥한 곳에 차를 세우고 격렬한 키스를 한 후 끌려가듯 해장국집에 가서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은 채였다.

말없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연 해성은 내리기 직전 김한별을 바라보았다. 시트에 머리를 기댄 채 저를 보는 김한별은 늘 그랬듯 입꼬리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김한별.”

그러다 제 이름이 불리면 저렇게, 기울어진 오연한 입꼬리에 무게를 실었다.

“맛은 있더라.”

해성은 짧은 감상을 끝으로 차에서 내려 차 문을 닫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껏 김한별과 먹은 음식 중 맛없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무심결에 TV 옆에 둔 탁상 달력을 본 해성은 새삼스러워졌다. 어느덧 1월이 끝나 가고 있었다. 벌써 한 달. 해성은 달력을 들고 침대 매트리스 위로 가서 앉았다.

어느 순간부터 시간에 무감해졌던 해성이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특색 없이 무난하게 보내는 것에 안도하고 안심했다.

그러고 보니 왜 그날은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했을까.

해성의 미간이 좁혀졌다.

한 살 더 먹는다고 뭐 달라지는 게 있다고 갑자기 조급해지고 초조해지고 안달이 나서는.

해성은 혀를 차고 벌러덩 드러누워 아직 소화되지 않은 배를 문질렀다. 탁상 달력은 매트리스 아래를 뒹굴었다.

해장국은 정말 맛있어서 늦은 시간임을 잊고 한 그릇을 다 비워 냈다. 그런 해성을 보며 김한별은 또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이없어.”

여덟 살이나 어리면서도 연장자처럼 구는 김한별이 떠올라 실없이 웃음이 샜다. 하지만 미풍 같은 웃음은 금세 허공으로 날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덟 살. 8년.

김한별보다 여덟 살이나 많은 자신이 정말 김한별보다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가만히 흘려보내기만 한 시간을 들어 어른 대우를 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 뭐 하냐.”

김한별 때문에 괜히 잡스러운 생각만 많아졌다. 어찌 되었건 8년 동안 김한별보다 더 먹은 밥그릇 수만 해도 셀 수 없었다.

“어른 맞지, 맞아. 이게 어른이 아니면 뭐야.”

혼잣말을 중얼거린 해성은 젖은 머리를 흐트러트리고 손을 더듬거려 베개 근처에 있는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웃긴 동영상이나 보다 자야겠다 생각하며 잠금을 해제한 해성은 깜짝 놀랐다.

“아, 진짜!”

휴대폰에는 해성이 형아는 먹는 것도 귀엽네, 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제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건 또 언제 찍은 거야!”

벌떡 일어나 앉은 해성은 씩씩거리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런 거 범죄인 거 모르냐?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즉각적으로 답장이 날아들었다.

김한별

그럼 너도 나 찍어

내가 왜?

김한별

찍어줘

싫어

김한별

새침하기는

지워라

김한별

아 설마 내가 다른 사람 막 보여줄까 봐 그래?

해성의 손이 멈칫했다. 남에게 보여 준다고 해도 딱히 이상한 사진도 아니었고 김한별이 그러지 않을 것도 잘 알았다. 그래도… 김한별은 친구도 많을 텐데. 혹시 친구들이 휴대폰을 보고 이 사람은 누구냐고 물으면…. 그러면. 그럴 리 없겠지만 김한별 주변에 저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래서 김한별이 알게 되면.

김한별

내가 미쳤어? 이런 귀여운 건 나만 봐야지 누굴 보여줘 감히

“하….”

말을 말자.

김한별

물론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귀엽긴 해

전투력을 상실한 해성은 그대로 매트리스 위에 엎어졌다.

김한별

뽑아서 이마에 붙이고 다니고 싶을 정도야 하지만 위험하지

“뭐가 위험해, 또.”

이제는 김한별의 말도 안 되는 소리가 기대될 지경이었다.

김한별

그랬다가 다른 놈들까지 널 넘보면 어떻게 해? 갑자기 빡치네?ㅋㅋ

“미친 새끼.”

욕설과 함께 헛웃음이 터졌다. 그러고는 휴대폰 속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 정도로 집중해서 먹었다고?”

이건 뭐, 며칠 쫄쫄 굶다가 겨우 첫 숟가락을 뜬 사람이 따로 없었다. 완전히 식사에 몰입한 사진 위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김한별

자?

잔다

김한별

와 자면서도 휴대폰하고 멋있어서 벗겨 먹고 싶음

…멋있다면서 왜 벗겨 먹어.

자라

김한별

응 형도

내내 장난기 넘치던 메시지에 툭 섞여 든 정상적인 말투에 해성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았다.

뭐지?

김한별

형도 잘 자 나는 형 생각하면서 한 발 빼고 자려고

그럼 그렇지.

즉시 휴대폰을 잠그고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머리까지 이불을 덮은 채 눈을 감고 있던 해성은 번쩍 눈을 뜨고 짤막한 답장을 보냈다

변태

그리고 또 무슨 참신한 헛소리를 할지 기다렸다. 그런데 분명 읽었는데도 답장이 없었다.

기분 상한 건가. 그냥 잘걸.

미약한 후회를 하며 입술을 깨물고 있을 때였다.

김한별

아 쌌잖아 또 귀엽게 굴고 난리야 내일 얼굴 보고 한 번 더 말해줘

“하아….”

긴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해성의 입꼬리가 잔뜩 휘어져 있었다.

* * *

“오늘 회식이다.”

“갑자기 무슨 회식이야.”

“지민이 이제 복학하잖아.”

“저 복학해도 도장 나올 건데요.”

박재관의 갑작스러운 회식 선언에 청소기를 든 해성과 물걸레를 든 지민이 동시에 박재관을 보며 말했다.

“뭐야. 형이 하고 싶어서 하는 거면서 무슨 지민이 핑계를 대?”

“그러게요. 저 어차피 학교 일주일에 두 번만 갈 거라 도장 나오는 데는 지장 없는데.”

“뭐, 인마? 내가 너 없이 이틀이나 혼자 형을 감당해야 한단 말이야? 그 얘기를 이제 하면 어떻게 하냐.”

“죄송합니다.”

버럭 화를 내는 해성에게 최지민은 자신의 불찰에 대해 진중하게 사과했다.

“이놈들이 어디 관장 알기를 우습게 알고.”

허리에 손을 올리고 콧김을 뿜는 모습에서 도장을 이끄는 관장으로서의 위엄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었다.

“네.”

“네.”

해성과 최지민은 건성으로 대꾸하고는 하던 일을 이어 갔다.

“아무튼 오늘 회식이니까 그런 줄 알아.”

“관장님. 아무리 관장님이라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하시는 게 어디 있습니까? 저희가 개인 약속이 있을 수도 있는데.”

“아… 그런가?”

최지민이 조목조목 따져 묻자 박재관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지민이, 오늘 약속 있냐?”

“아뇨?”

“….”

“전에 그 삼겹살집 갈 거죠?”

“어….”

“좋아요. 거기 맛있어요.”

박재관은 무덤덤하게 말하며 걸레질을 하는 최지민을 옆눈으로 보다가 해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 약속 없는 거 다 알아.”

“형… 너무하네. 내가 친구 없다고 막 그런 식으로 넘겨짚고.”

해성은 청소기 코드를 꽂으며 의기소침하게 말했다. 그러자 박재관이 펄쩍 뛰며 안절부절못했다.

“아, 야… 해성아. 그게 아니잖아. 내 말은 그게.”

그러자 최지민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켜지도 않은 청소기를 질질 끌며 걷는 해성을 향해 말했다.

“사범님, 친구 없으시잖아요.”

“그렇지?”

“네.”

“나도 오랜만에 삼겹살 땡긴다.”

“거기 김치말이 국수도 맛있는데.”

“크으, 미쳤지.”

해성과 최지민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메뉴를 정하고 있자 박재관이 흥, 하고 들으라는 듯이 콧방귀를 뀌고는 쿵쾅거리며 관장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거기 백김치도 맛있다! 했다.

하여튼 박재관은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해성은 소리 없이 웃고는 전원을 켜자마자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는 청소기를 밀며 도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박재관을 놀리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발차기를 하는 시율을 보던 해성은 순간 떠오른 얼굴에 아차 싶었다. 요즘 매일 김한별과 퇴근길을 함께하고 있었다. 오늘도 김한별은 유리문 밖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흐음.”

순식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음에도 능숙하게 시율의 발차기 자세를 교정해 준 해성은 이따가 김한별에게 미리 연락을 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시 후, 시비가 붙은 아이들이 멱살을 잡고 매트 위를 뒹구는 바람에 그만 까맣게 잊고 말았다.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오랜만의 회식에 신난 박재관과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가는 최지민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야 연락을 하지 않은 걸 깨달았다.

아, 그걸 까먹냐!

느릿느릿 움직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해성만 애가 탔다.

제발, 김한별이 없기를.

“어? 저거 건물주 할머니 손자 아니야?”

“김한별. 여기서 뭐 해?”

당연하게도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박재관과 최지민이 유리문 밖에 있는 김한별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다가갔다.

“퇴근하시나 봐요?”

김한별은 박재관, 최지민과 함께 나타난 해성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태연하게 반응했다.

“우리는 오랜만에 회식 갑니다!”

“삼겹살 먹으러 가.”

김한별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박재관은 존대를 했고 박재관보다 어린 최지민은 반말을 했다.

위계질서가 엉망이네.

해성은 이 상황에서 하등 쓸모없는 예의를 따지며 어두운 골목길 위에 심히 위협적으로 보이는 무리에게 다가가 충고했다.

“흩어져.”

김한별과 박재관만 해도 키가 190이 넘었고 최지민도 180 후반이었다. 게다가 셋 다 그냥 키만 큰 게 아니라 한 덩치씩 했다. 한 사람만 있어도 그리 편안한 광경은 아닌데 모여 있으니 분위기가 대단했다. 순찰을 도는 경찰차가 멈춰 설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해성이 이렇게 있으니까 완전 꼬마네, 꼬마!”

진심으로 한 충고에 박재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딴소리를 했다.

“뭔 소리야.”

저 역시 180에 가까운 키였다. 자기들이 쓸데없이 큰 거지 자신이 작은 게 아니었다. 해성은 은근슬쩍 허리를 곧게 펴며 박재관을 흘겨보았다.

“알바 끝났어?”

“어, 뭐.”

김한별과 최지민은 아예 말을 놓기로 한 건지 주고받는 대화가 편해 보였다.

그나저나 분위기가… 위험한데?

해성이 그래? 하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최지민을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을 때였다.

“아!”

박재관이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손뼉을 치며 눈을 깜빡였다.

“같이 갑시다!”

야!

방금 전까지 위계질서를 논하던 해성이 박재관을 보며 속으로 꽥 소리를 질렀다.

“그래. 약속 없으면 같이 가자.”

지민아, 너까지 왜 이러냐.

그러다 휙, 최지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장 식구들끼리 노는데 제가 끼기는 좀 그렇죠.”

이어 가늘게 좁혀진 해성의 눈이 답지 않게 발을 빼는 김한별에게 향했다.

“뭐, 우리 별로 말은 안 해. 어차피 먹으러 가는 거라.”

“얘네 진짜 고기만 먹어요. 식사 안 했으면 같이 갑시다!”

“저기 불편해하는 거 같은데 그냥 우리끼리….”

싫다는 사람을 물고 늘어지는 둘을 조용히 말리려 할 때였다.

“그럴까요, 그럼?”

권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김한별은 해성을 보며 답했다.

“저야 좋죠.”

씩 웃는 얄미운 얼굴에 심장이 크게 튀어 올랐다.

이게 무슨 조합이야.

해성은 지글지글 구워지는 삼겹살을 앞에 둔 채 4인용 테이블을 꽉 채우고 있는 세 남자를 차례로 훑어보았다.

“크으. 역시 이 집은 김치가 예술이야.”

오자마자 제주 생삼겹살 5인분을 시킨 박재관은 정작 김치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카운터에 기대서서 이쑤시개를 씹으며 그런 박재관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김치가 동날 때쯤에 맞춰 김치를 리필해 주었다.

“우리 관장님, 역시 김치 맛을 알아? 알지? 우린 보통 집이랑 달라. 우리 장모님이 직접 키운 배추로 내가 직접 담근 김치야. 백 프로 국내산.”

“아휴, 사장님.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건 김치가 아니라 예술, 뭐 그런 거? 이런 게 금치인가?”

주거니 받거니 한 둘은 크하하, 하고 가게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최지민은 그 사이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침착하게 상추와 깻잎을 겹친 후 그 위에 고기 두 점을 올려 쌈을 싸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면서 김한별에게 소주잔을 내밀었다. 턱을 괴고 박재관과 주인아저씨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김한별이 잔을 들자 박재관이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짠 합시다! 야, 해성아. 뭐 하냐.”

그러고는 멀뚱히 앉아 있는 해성을 보며 눈썹을 구겼다.

저, 불곰을 진짜.

해성은 이를 바득 갈며 마지못해 잔을 들어 올렸다. 박재관이 꾹꾹 눌러 담은 술이 찰랑이며 흘러 손등을 적셨다.

“짠!”

가볍게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고 박재관과 최지민이 즉시 목구멍에 술을 털어 넣었다. 술을 한 모금 머금은 김한별은 벽에 걸린 휴지 케이스에서 휴지를 뽑아 해성에게 건넸다. 해성은 휴지를 받아 들며 괜히 박재관과 최지민의 눈치를 보았지만 둘은 김치와 고기에 정신이 팔려 이쪽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김치 두 접시를 비워 낸 박재관이 집게로 바짝 구워진 고기를 해성, 최지민 그리고 김한별의 접시에 차례로 놓아 주며 말했다.

“나해성한테 무슨 신세를 졌다고 그랬나?”

“네.”

기습적인 물음에 김한별은 웃으며 답했고 해성은 집던 고기를 떨어트렸다.

“해성이 형한테?”

내내 고기와 쌈에만 집중하던 최지민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형은 웬만하면 남의 일에 상관 안 하는데.”

적지 않은 세월 동안 해성을 봐 온 최지민이 날카로운 지적을 했다.

“형?”

하지만 김한별은 전혀 다른 부분에 꽂힌 듯했다.

“어. 도장 밖에서는 그냥 형이라고 해.”

“아하.”

뭐가 아하, 야.

분명 실실 웃는 낯인데 웃는 것 같지가 않았다. 해성은 김한별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다들 친하신가 봐요. 단순한 직장 동료 느낌은 아닌데.”

“그렇지.”

김한별이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화제가 전환되었다.

“도장에서 일하기 전에도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인 건가 봐요.”

“네. 제가 이놈들 건사한 지 좀 됩니다.”

박재관이 허리를 펴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건사는 저희가 한 거 같은데요.”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최지민의 손에는 어느새 새로운 쌈이 들려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라 뭐라고 못 하겠지만. 그래도 인마, 어? 사람이 살면서 하얀 거짓말도 좀 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

“네, 뭐.”

건성으로 대답한 최지민은 박재관의 앞에 놓인 소주잔에 술을 채웠다. 그러자 씩씩거리던 박재관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잔을 최지민의 잔에 신나게 부딪친 후 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보던 김한별이 물었다.

“도장 생긴 지가… 한, 4년 정도 됐나?”

“어. 맞아.”

“오, 정확하십니다. 올해로 딱 4년 차.”

“무슨 정확하십니다야. 형보다 한참 어린 애한테.”

아무리 박재관이 허허실실, 속없는 사람처럼 웃고 있어도 김한별보다 훨씬 어른이었다. 어차피 이런 자리 오늘이 끝일 거라 무시하고 싶었는데 해성이 결국 한 소리 하고 말았다.

“네. 말 편히 하세요.”

해성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챈 김한별이 관대하게 하대를 허락하듯 말했다. 해성은 뾰족해진 눈으로 김한별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여전히 박재관을 보며 입꼬리를 휘던 김한별이 손으로 해성의 허벅지를 세게 쥐었다가 놓았다. 마치 달래듯이. 그 동작에 무심결에 머금은 술을 뿜을 뻔했다.

이 어린놈이, 진짜.

“그럴까?”

해성이 그러든 말든 박재관은 신이 나 물었다.

“네. 그,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

“풉, 연세.”

하지만 이어진 말에 최지민이 소주를 뿜었고 박재관은 새초롬한 눈으로 김한별을 보며 말했다.

“나, 그 정도는 아니다.”

“죄송해요. 뭐랄까. 뭔가 어른 같은 느낌이 들어서. 배울 점도 많아 보이고.”

“아, 그런가?”

불곰은 곰의 탈을 쓴 여우의 수작질에 쉽게도 넘어갔다.

“관장님이 많이 어르신같이 보이긴 하지.”

최지민이 쌈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거짓말 하라고 했다….”

“형이 무슨. 형 완전 동안이야.”

실제로 키와 덩치가 커서 그렇지 박재관은 피부도 좋고 순한 인상이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물론 상당히 오래 보고 있어야 했다. 꽤 오래.

해성이 진지한 얼굴로 위로하자 박재관이 역시, 나해성뿐이라며 또 좋다고 웃었다.

“두 분은 꽤 친해 보이시네요?”

“아. 우리는 인연이 좀 깊습니다.”

“인연이 깊다?”

박재관의 장난스러운 말에 김한별이 나직이 뇌까렸다. 그 목소리가 하도 낮아서 옆에 앉은 해성의 귀에만 들렸을 정도로.

해성은 불안한 눈으로 김한별을 예의 주시했다. 가뜩이나 헛소리, 개소리 전문가인 김한별이었다. 술까지 들어갔으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때 박재관이 손을 뻗어 해성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흐트러트렸다.

“아, 형!”

“내가 얘 처음 본 게…. 어디 보자… 나해성이 고1 때!”

해성이 몸을 뒤로 물리며 짜증을 내도 박재관은 해성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종종 저 눈빛을 마주할 때면 해성은 박재관을 처음 만났던 열일곱으로 돌아간 듯했다. 제 인생에 박재관 같은 인연을 만난 것은 기꺼운 일이었으나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일련의 일들은 달갑지 않아 해성은 빠르게 알싸한 술로 어수선해지려는 속을 식혀야 했다.

“고 1?”

“어!”

저게 자꾸 말 놓네?

비운 술잔을 든 채 김한별을 향해 눈가를 팍, 구기자 김한별이 그런 해성을 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나랑 해성이 형이랑 둘 다 관장님 제자야.”

“우리 최지민이는 내 제자가 맞는데, 나해성이는… 제자라기는 뭐하고?”

그런 김한별을 노려보다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형한테 배웠으니까 제자 맞지.”

“배웠다?”

겉만 뱅뱅 도는 대화였다. 해성이 제 술잔에 술을 채우려 하자 김한별이 소주병을 뺏어 가 따라 주었다. 그 행동이 워낙에 재빨라 됐다고 말할 새도 없었다.

“내가 다니던 입시 학원 출신이야, 재관이 형도.”

재관이 형이라는 말에 김한별의 입술이 삐딱해졌지만 해성은 집게로 괜히 불판 위 고기를 뒤적거리느라 알아채지 못했다.

“형이 입시 성공하고도 종종 학원 놀러 왔거든. 입시 전략이나 학교생활 얘기하면서 사기 북돋아 주고. 몰랐지? 형 OO대 출신인 거.”

해성은 은근슬쩍 박재관이 체대로는 대한민국 최고의 학교 출신인 것을 강조했지만 김한별은 딱히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 정도 가지고 스승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나?”

김한별이 해성의 말을 끊으며 해성에게서 집게를 빼앗아 갔다. 뭐에 심사가 뒤틀린 건지 입술을 휜 얼굴이 위험해 보였다.

“방학 때는 본격적으로 강사 일 했고 내가 형한테 배웠으니까 스승과 제자 맞지?”

“됐어, 인마. 무슨 스승이야. 그냥 형이야, 형!”

이쪽에서 넘실거리는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한 톨도 인지하지 못한 박재관은 그저 저를 스승이라 지칭한 것에 쑥스러워했다.

“하루라도 배웠으면 스승 맞죠.”

“야, 인마. 너까지!”

그러다가 제 편을 드는 최지민의 등짝을 퍽퍽, 두드리고는 크하하, 하고 웃었다. 그러자 다른 테이블에 상추를 리필해 주던 주인아저씨가 영문도 모르고 박재관을 따라 크하하, 하고 따라 웃었다.

두 분 행복해 보이세요.

그런 둘의 모습에 긴장이고 나발이고 다 풀어져 버렸다. 해성은 몸을 늘어트리고 벽에 등을 기댔다. 그러자 김한별이 집게로 고기를 집어 해성의 입에 가져다줬다.

“…됐어.”

“먹어요, 형. 이 굽기가 딱이야.”

“뭔.”

“맞아요. 형. 삼겹살은 속은 빈틈 없이 익고 겉은 바삭할 만큼 노릇해졌을 때가 딱이에요.”

해성이 김한별의 손을 쳐 내려는데 최지민이 한 손에 상추와 깻잎을 들고 말했다. 그 얼굴이 꽤나 진지했다.

김한별의 고기 굽는 솜씨야 진즉에 알고 있었다.

해성은 집게를 쥔 김한별의 손목을 잡고 끌어왔다. 김한별의 입술이 한층 더 기울어졌다.

역시.

입으로 고기를 가져간 해성은 별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김한별은 고기도 정말 잘 구웠다. 해성이 침통한 얼굴로 육즙이 팡팡 터지는 고기를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해성이 형, 십 대 때는 어땠어요?”

김한별이 박재관의 술잔에 제 술잔을 부딪치며 물었다.

“그때도 귀여… 이랬나?”

슬쩍 해성의 눈치를 보는 척한 김한별이 가증스럽게 말을 바꿨다.

“해성이?”

“과사 있으면 풀어요.”

“네 과사 구경부터 할까?”

소주를 두 병 더 주문한 최지민의 말에 해성이 눈가를 좁히고 말하자 최지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과거에도 잘생겼었는데.”

젠장. 할 말이 없었다. 최지민은 입시 학원 시절, 최지민 때문에 체대에 관심이 없는 여학생들이 학원에 등록할 정도였다는 얘길 이미 박재관을 통해 들은 터였다.

“나돈데.”

최지민의 말에 김한별이 수줍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박재관이 그럴 만하다면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고 김한별은 목덜미를 긁적이며 감사합니다, 했다.

…집에 갈까.

해성은 아까 골목길 위, 심히 위협적인 광경을 떠올리며 고민했다.

“그럼 지민이 형이랑 해성이 형이랑 같은 입시 학원 출신?”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내가 대학 졸업하고 선배가 차린 도장에서 일하면서 만난 게 최지민이고. 해성이는 그전에.”

“아아.”

이해를 한 건지 아닌 건지 김한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새 소주병을 따며 말했다.

“해성이 형, 그때도 이렇게 말 안 들었어요?”

장난스러운 물음에 박재관은 또 실없이 웃었다.

“우리 해성이 그때나 지금이나 말 너무 잘 듣지.”

제 술잔을 채우려다 멈칫한 해성이 마저 꽉 채우고는 단번에 들이켜 비워 냈다.

“하도 어릴 때 봐서 그런가. 나해성이는 서른 넘어서도 내 눈에는 애기야, 애기!”

김한별 못지않은 헛소리를 내뱉은 박재관이 껄껄 웃자 해성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뭔 소리야! 그러는 자기도 꼴랑 스무 살이었으면서!”

“애기야. 십 대랑 이십 대랑 같냐?”

“사장님. 저희 상추랑 깻잎이랑 김치말이 국수 4개 추가요.”

“자기?”

그렇게 걱정스럽게 시작했던 회식은 삼겹살 10인분, 1인당 1 김치말이 국수, 셀 수 없는 채소와 소주, 김치 리필을 해치우고도 끝날 줄 몰랐다.

거덜 낸 술병의 수가 테이블을 한 바퀴 두르고도 남았는데 누구 하나 취한 기색이 없었다. 그야말로 술술 들어가는 술 때문에 평소보다 고기도 더 많이 시켰다. 계산서를 들고 계산대로 가는 박재관을 따라가며 ‘많이 나왔어?’ 하고 묻자 박재관이 ‘애기는 그런 거 신경 쓰는 거 아니다.’ 하고 껄껄 웃었다. 그러자 계산서를 받아 든 주인아저씨가 ‘아이구, 뉘 집 애긴지 이쁘다, 이뻐!’ 했다.

슬쩍 뒤로 물러나 계산하는 박재관을 노려보다가 주인아저씨의 배웅을 받으며 밖으로 나온 해성은 저를 향한 박재관의 인사에 펄쩍 뛰었다.

“나애기. 잘 가라.”

“아, 뭐래. 진짜!”

“해성이 형 애기 아닌데.”

그러자 버럭 성질을 내는 해성의 옆에 선 김한별이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엉망진창이었다.

“어이구. 큰 애기 눈에는 완전 형아인가? 나해성 다 컸어. 완전 형아도 되고?”

저 인간이 진짜 미쳤나.

“큰 애기?”

김한별은 고개를 기울이며 방금 들은 말을 나직이 읊조렸고 해성은 주먹을 부들거렸다. 하지만 박재관은 그런 해성을 마치 재롱부리는 아이처럼 바라볼 뿐이었다.

좋아. 그렇게 늙은이 취급받고 싶으시다, 이거지?

“할아버님. 날도 추운데 어서 들어가세요. 그러다 넘어지면 뼈 부러지십니다.”

“오구오구. 애기가 어르신 걱정도 다 하고 기특하구먼.”

“아이 씨. 고마해라, 진짜.”

하지만 씨알도 안 먹히는 반응에 이만 바득 갈아야 했다.

“애기 형. 안 추워요?”

김한별이 그런 해성의 곁으로 바투 다가서 속삭이듯 말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아 경악한 눈으로 바라보자 김한별이 제 패딩을 벗는 시늉까지 했다.

“으하하! 애기 형!”

박재관은 그런 해성과 김한별을 보며 좋다고 웃음을 터트렸다.

“딱이다, 딱이야! 나해성 애기 형!”

“목소리 낮춰라….”

“나애기 형은 걸어가실 거예요?”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택시 앱을 보며 묻는 최지민까지. 누구 하나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다들 돌아 버렸다.

해성은 그대로 돌아서 걸었다.

“어이. 나애기! 혼자 집에 갈 수 있겠냐!”

아주 신나셨구만.

오늘 회식은 보통 때보다 좀 더 시끌벅적하긴 했다. 김한별 하나 끼었을 뿐인데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회식 때마다 조용히 고기만 입에 쓸어 담던 최지민조차 말을 많이 했다. 박재관이 저렇게 들뜬 게 이해가 되기도 했다.

“나애기!”

그렇다고 저 정도는 아니지 않아?

있는 대로 인상을 쓴 해성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아.”

무언가 커다랗고 단단한 물체에 코가 부딪쳤다.

“세상 무서운 걸 모르고. 어딜 이 밤중에 혼자 돌아다니려고 해?”

“비켜.”

이제 이 정도 헛소리에는 별 감흥도 없었다. 자신의 앞에 산처럼 버티고 있는 김한별을 밀어 버리고 박재관에게 집에 가서 씻고 잠이나 자라는 애정 어린 충고를 건네려고 하는데 김한별이 꿈쩍도 안 했다.

“야.”

성가신 얼굴로 고개를 든 해성은 멈칫했다.

“생각보다 친해 보여.”

“….”

“아주 가깝고. 알고 지낸 시간도 길어 보이고 말이야.”

여느 때처럼 입꼬리를 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김한별은 아무런 표정 없이 해성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어이없게도 웃음이 났다.

이 어린놈이.

“그걸 이제 알았냐? 나랑 형 사이에는 누구는 범접할 수 없는 엄청난 세월이 있단다.”

해성은 피식 웃으며 몸을 기울여 그 누구 씨 뒤로 손을 흔들었다.

“네. 할아버님도 밤길 조심하시고 손자분 택시비 하라고 용돈도 좀 주세요.”

박 씨 할아버지와 그 손자 최지민 군에게 인사를 마치고 다시 돌아서 걷기 시작하는 해성을 김한별이 익숙하게 따라붙었다.

잠깐.

이러면 박재관과 최지민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우뚝 걸음을 멈춘 해성의 귀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별 마트 앞에 차 대 놔서 나도 그쪽으로 가는 거라고 말해 놨으니까 안심해.”

고개를 들자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한 김한별이 보였다.

“대리 불러서 내 차 타고 이동할래, 아니면 적당한 데서 택시 잡을까?”

“….”

“묻고 싶은 건 많은데 어차피 넌 말 안 해 줄 거고. 난 지금 질투로 돌아 버려서 너 그냥은 못 보낼 거 같고.”

“….”

“아, 물론 네가 싫다면 눈물을 머금고 그냥 보내야겠지만.”

느릿하게 말을 잇던 김한별이 그제야 쓱, 입매를 끌어 올렸다.

“너도 하고 싶잖아.”

확신에 찬 어투에 반발심이 들었다.

“누가. 누가 하고 싶은데.”

“아아. 그렇다 쳐.”

삐딱한 대꾸에도 김한별은 역시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럼 부탁할게. 소름 끼치고 미치게 싫은 거 아니면 나랑 같이 있어 줘. 안 그러면 나 정말 슬플 거 같으니까.”

사뭇 애처로워 보이는 말과는 다르게 표정은 건방지게 느껴질 정도로 무덤덤했다.

“나 애원하는 거야.”

애원보다는 협박 같은 제안이었다.

대리 기사는 불편해서 택시를 잡아탔다. 밤거리를 내달리던 택시는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해성은 택시에서 내리며 한밤중에도 밝은 호텔 내부를 불편하게 바라보았다. 해성에게 섹스는 좁은 뒷골목 모텔촌에서 치러지는 행위였다. 저렇게 환하고 호화스러운 곳이 아니라.

그래서 오는 내내 그냥 모텔이나 가자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전에 김한별이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싸구려 모텔이 취향이면 맞춰 줄 수 있어. 근데 그런 거 아니라면 난 더 이상 너 그런 데서 벗겨 먹고 싶지 않아. 그동안 장단 맞춰 준 걸로 충분하잖아.’

싸구려 모텔. 싸구려 모텔만큼 제게 잘 맞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김한별은 아니었다. 딱 봐도 그런 곳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김한별이 저 때문에 굳이 거북한 곳을 드나들 필요는 없었다.

“설마.”

김한별이 불안한 눈으로 호텔 내부를 쳐다보고 있는 해성의 앞을 가로막았다. 짙은 눈썹이 우그러진 채였다.

“여기까지 와서 집에 간다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나애기 형, 그렇게 잔인한 사람은 아니잖아.”

“…가자.”

빠르게 체크인을 마친 김한별은 로비 한구석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는 해성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로 갔다. 다행히 엘리베이터에서도, 룸으로 이어진 복도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룸으로 들어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해성은 그제야 자신이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저번에 예기치 못한 비를 만나 엉겁결에 호텔로 갔던 때와는 달랐다. 이곳은 도심과 떨어진 외곽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야 이런 곳을 드나들 사람은 없지만 김한별의 사정은 다를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골이 다 오싹해졌다.

“야, 너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려면 어쩌려고.”

조심성 없는 김한별에게 한 소리 하려고 돌아섰는데 입술이 틀어막혀 애매하게 말이 끊기고 말았다. 한 손으로는 머리를, 다른 한 손으로는 허리를 감싼 김한별은 갈급한 사람처럼 혀를 빨고 입술을 깨문 후 목덜미에 코를 처박았다.

“나 칭찬해 줘.”

“뭘.”

불퉁한 대답에 김한별이 허리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야… 야…!”

그 힘이 심상치 않아 버둥거렸지만 몸을 옥죄는 힘은 되레 더욱 강해졌다.

“알아? 나 엄청 참았어. 질투 나는 거, 화나는 거, 너는 내 애긴데 자꾸 너한테 애기라고 부르는 거. 그 와중에 너는 또 존나게 귀엽고 섹시하고…. 넌 왜 술도 그렇게 마셔?”

‘너는 내 애긴데’라는 말에 정신이 혼미해지려던 해성은 이어진 말에 미간을 좁히고 자신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술 마시는 모습이 어쨌길래…. 턱에 흘렸나?

“고기는 먹지도 않고 술만 마시고. 속 버리게.”

그건 김한별도 마찬가지였다. 속이 타는 사람처럼 연거푸 맑은 술만 들이켰었다. 해성은 조금 억울해졌다.

“키스하고 싶고 너 만지고 싶고. 하, 너 몸은 탄탄한데 살은 존나 부드러운 거 알아? 시발, 가슴도 말랑거리고 자꾸 네 가랑이 사이로 손이 가려고 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고.”

김한별은 미친놈처럼 음란한 말을 해성의 귀로 밀어 넣었다. 그러다 종종 제 혀도 쑤셔 넣고.

“하, 김한별.”

이러면서 누가 누구더러 애기래.

“시발… 내가 먼저 만났어야 하는데.”

바람 같은 웃음을 날리며 단단한 어깨를 밀어 내려던 해성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내가 먼저 만났어야 했어.”

경직된 목덜미에 입술을 찍으며 뇌까리던 김한별이 고개를 들고 해성과 눈을 맞췄다.

“그랬으면 우리 해성이 형, 이렇게 겁쟁이도 안 됐을 텐데.”

어딘지 사나운 얼굴을 한 김한별이 할 말을 찾지 못해 달싹거리는 입술에 다정하게 키스했다.

“잠, 잠깐.”

부리를 쪼듯 입술을 부딪치는 김한별을 밀어 냈다.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밀어 낼수록 김한별이 몸으로 밀고 들어왔다. 해성은 김한별의 어깨를 잡고 뒷걸음질 치며 쏟아지는 입술을 피하려 애썼다.

“야…!”

“하, 시발. 너한테 단내 나. 너 맨날 이러고 돌아다녀? 미쳤어?”

단내는 개뿔.

하루 종일 아이들과 씨름하고 고깃집에서 연기까지 뒤집어썼다. 단내 같은 게 날 리 없었다. 그래도 김한별의 개소리에 덜컹거리던 심장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설마.

해성은 불현듯 든 생각에 뺨과 눈꼬리, 입술에 마구잡이로 입술을 붙여 대는 김한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

그러고 보니 매번 그랬다. 기습적으로 저를 찌르다가도 잔뜩 몸을 움츠리고 숨을 집어삼키면 숨통을 틔워 주기라도 하듯, 장난스럽게. 그러면서도 지금처럼 조심스럽게 저를 어루만지면서.

“왜 그렇게 봐. 내 좆 터트리고 싶어서 그래?”

아닌가.

김한별이 해성의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더니 손바닥으로 문지르다가 제 쪽으로 바짝 당기고 허리를 튕겼다. 해성은 경악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해성을 보며 김한별이 살짝 간격을 벌려 옷감을 뚫고 나올 듯 불룩 솟은 자신의 중심부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난 빈말 안 해.”

“….”

“무서워. 진짜 터지면 어떻게 해?”

김한별은 정말 겁이라도 먹은 듯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해성의 목덜미에 제 이마를 비볐다.

하, 하고 짧은 웃음을 내뱉은 해성은 조용히 숨을 내쉬고는 살살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에 손을 얽었다. 온몸이 뜨거운 김한별은 두피마저 뜨거웠다.

혈기 왕성한 나이라서 그런가.

실없는 생각을 하던 해성은 비식, 마찬가지로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엔 김한별과 있을 때면 대단한 어른인 척하는 저를 향한 자조가 섞여 있었다.

두피를 매만지던 손을 내려 널찍한 등을 쓰다듬다가 어깨를 밀어 냈다. 그러자 이번엔 커다란 몸이 저항 없이 뒤로 밀렸다.

“나 먼저 씻을게.”

“나해성.”

“그러니까.”

조급한 얼굴에 스민 불만을 읽은 해성은 손등으로 고집스러운 뺨을 느리게 쓸었다.

“좆 터트리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 그 좆, 오늘은 내가 먹어야겠으니까.”

이어진 말에 얼빠진 얼굴을 한 김한별을 만족스럽게 보던 해성은 살짝 벌어진 입술에 키스한 후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친 후 가운을 걸치고 나온 해성을 맞이한 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김한별이었다. 김한별은 기다렸다는 듯 해성의 혀를 낚아채 쪽쪽 빨아들이고는 해성을 세워 둔 채 욕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가 욕실 앞에 선 해성을 보며 물을 맞았다.

물기를 뚝뚝 흘리며 다가온 김한별은 해성을 안고 입을 맞추며 침대로 갔다. 델 듯 뜨거운 몸에 남은 물은 차갑기만 했다.

해성 역시 김한별의 목에 팔을 두르고 격렬한 입맞춤에 기꺼이 응했다. 몸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김한별은 해성의 몸을 가리고 있는 가운을 벗겨 던져 버리고 등과 옆구리, 엉덩이를 마구잡이로 더듬었다. 야릇한 분위기를 내길 원한다기보다는 그저 해성과 닿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몸짓이었다. 그 서툰 몸짓에 해성은 흥분했다.

등 뒤로 바스락거리는 이불이 닿았다. 그리고 김한별이 돌변했다. 어리숙한 행동 따위는 집어치운 김한별은 해성의 가슴을 거머쥐고 뾰족하게 튀어나온 젖꼭지를 집요할 정도로 끈질기게 응시했다.

“시발… 젖꼭지 색깔이 이게 뭐야.”

흡사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에 해성은 심장 귀퉁이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네 몸 보면서 느낀 거 없어? 위고 아래고 아주. 어떻게 하면 좆 달린 놈들 홀릴까 그 생각뿐인 거지?’

“…그래서.”

해성은 김한별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은 가슴을 제 손으로 쥐고 물었다.

“싫어? 다 좋아하던데.”

김한별의 앞에서 저를 거쳐 간 다른 사람들을 언급한 것은 오기이자 객기였다.

“환장해서 달려들던데.”

저를 향한 무표정한 얼굴에 덜컥 치솟은 두려움을 들키고 싶지 않아 더욱 허세를 부렸다.

그런 해성을 말없이 바라보던 김한별이 입술을 비틀었다.

“죽이고 싶다.”

“….”

“아, 형 말고. 형 여기랑.”

거대한 몸이 쑥 빨려 들어가듯 아래로 미끄러졌다. 이어 해성의 허벅지가 경련했다.

“여기 본 새끼들.”

해성의 성기를 쥐고 기둥을 혀로 핥은 김한별이 눈만 들어 해성을 보며 씩 웃었다.

“뭐,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긴 형을 탓하는 건 아니야. 형은, 성적, 자유 의지를, 가진, 성인이고.”

힘을 받기 시작하는 기둥에 입을 맞추느라 김한별의 말이 중간중간 끊겼다. 김한별을 도발한 주제에 흥분에 겨워 신음을 하는 게 싫어서 해성은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형이, 혼자, 술집에, 앉아 술만 홀짝이고, 있어도, 개시팔놈들이 좆물을 뚝뚝 흘려 댔을 테니까. 시발.”

나긋하게 이어지던 말끝엔 결국 욕설이 따라붙었다.

“근데. 이제 안 돼.”

“하읏…!”

결국 신음을 흘린 해성은 놀란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해성의 오금을 잡아 누른 김한별이 혀로 회음부를 파낼 듯 긁다가 흡입하듯 빨아들였다.

“아아…!”

결국 완전히 발기한 성기가 퉁 하고 아랫배를 쳤다.

사실 해성은 추잡스럽게 김한별을 도발한 것을 즉시 후회했다. 다른 사람들과 난잡하게 놀아난 자신에게 김한별이 흥미를 잃을까 염려했다. 멸시의 시선을 보내올까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발기해 쿠퍼액을 뚝뚝 흘려 대는 성기를 잡고 흔드는 저를 경멸했다.

그동안 스쳐 지나가는 인연 속에서는 느껴 보지 못한 생소한 감정들이었다.

대체, 왜.

김한별과 있을 때면 이런 감정이 드는 걸까.

충분히 김한별을 거부할 수도 있었고, 떼어 놓을 수도 있었다. 되지도 않는 수작질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그의 말처럼 김한별은 제가 싫다는 건 결코 하지 않을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웃음이 났다.

이제 겨우 한 달을 본 남자에게 이 무슨 믿음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김한별.”

발꿈치로 상체를 지탱한 해성은 입 안을 맴도는 이름을 흘려 냈다. 그러자 이름의 주인이 순순히 응답했다.

“응.”

복부에 뺨을 기댄 채.

“박아 줘.”

“….”

“네 거. 제대로.”

그러고는 수줍게 웃었다.

“원하신다면야.”

“뭐 하냐…. 하지 마.”

김한별은 얕게 오르내리는 복부에 입술을 대고 크게 숨을 내뿜었다. 그러자 입술과 피부가 맞붙은 곳에서 푸르르거리는 괴상한 소리가 났다. 해성은 식겁해 발로 김한별의 어깨를 강하게 내리쳤다. 하지만 맞은 사람은 멀쩡하고 때린 사람만 고통으로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전공자인데 이렇게까지 아무런 타격도 줄 수가 없단 말이야?

해성이 입술로 제 피부를 간지럽히는 김한별을 조금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넌 왜, 피부가 시발, 왜 이래?”

김한별이 대뜸 남의 피부에 대고 욕을 해 댔다.

“너 자꾸 욕할래?”

해성은 아까부터 욕설을 섞어 말하는 김한별을 향해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말없이 해성을 올려다보던 김한별이 별안간 옆구리를 세게 깨물었다.

“야…!”

엄살이 아니라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확인하니 피부에 잇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프잖아!”

김한별은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는 해성에게 눈을 고정한 채 잇자국 위를 혀로 핥다가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갔다.

“됐어.”

해성은 그런 김한별을 제지했다.

“그럴 필요 없어.”

그러자 김한별이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기울였다. 빤하게 쏘아지는 시선을 마주하며 해성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런 거까지 할 필요 없다고.”

굳이 성기를 빨아 흥분을 돋을 필요는 없었다. 싸구려 러브호텔이 아니니 러브젤 같은 것이 구비되어 있을 리도 없었고 윤활제로 쓸 만한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김한별에게 과한 짓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전에 성기를 빨린 적이 있었음에도 내키지 않았다.

김한별은 헤테로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남자의 성기를 보는 것에도, 빠는 것에도 거부감이 없었다. 심지어 능숙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해서 해성은 김한별이 저 말고 다른 남자와 성적인 경험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김한별은 헤테로였다. 그 사실을 해성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헤테로가 같은 남자 좆 빠는 걸 좋아할 리 없었다. 그래서 해성은 김한별이 자신의 성기를 빨 때마다 마음이 거북했다.

그냥 적당히 손으로 풀어 줘도 삽입은 가능할 텐데. 원래도 제대로 풀고 하는 것보다 그러지 않고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문제는 저 말도 안 되는 크기인데…. 이미 몇 번이나 들어갔던 것이니 괜찮을 것이다.

미간을 좁히고 전에 김한별과 삽입 섹스를 했을 때 어땠는지 떠올려 보고 있던 해성의 허벅지 근육이 긴장으로 곤두섰다.

“아…! 야, 야!”

해성은 제법 강하게 귀두를 잘근잘근 씹어 대는 김한별을 향해 눈을 치떴다.

“왜? 사까시 싫어해?”

위험천만한 짓거리를 해 놓고 묻는 목소리가 태연했다.

“전에 했을 땐 좋아했던 거 같은데. 엄청나게 싫은 거 아니면 그냥 받아 주면 안 돼?”

“….”

“나 아까 고깃집에서부터 네 이거 먹고 싶어서 뒈지는 줄 알았는데.”

어째 오늘따라 묘하게 말이 걸었다. 해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뭘 뒈져. 그런 걸로.”

“그럴 수도 있지. 안 뒈진다고 장담할 수 있어?”

김한별은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리면서 제 뺨을 반쯤 선 해성의 성기에 대고 고개를 흔들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피부에 부드럽게 마찰되자 성기가 꿈틀거리며 튀어 올랐다.

“이거 봐. 빨아 달라잖아.”

“걔가 말도 하냐?”

“말을 해야 아나?”

“너….”

올려다보는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불퉁했다.

설마.

“너 진짜로 질투해?”

뇌를 거치기 전에 튀어 나간 말에 해성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질투라니. 이게 무슨.

아무리 김한별이 귀찮을 정도로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귀엽다느니 섹시하다느니 하는 낯부끄러운 말을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해 대도 저보다 여러 가지로 잘난 놈이었다. 그런 김한별이 저 같은 거 때문에 진심으로 질투 같은 감정을 가질 리가. 아까 했던 말들이 진심일 리 없는데….

“그걸 이제 알았어? 말했잖아. 나 아까 많이 참았다고.”

“….”

“특히 너랑 관장 사이에 나는 범접할 수 없는 세월이 있다는 거. 그게 제일 속상했어. 눈물까지 날 뻔했다니까.”

기둥에 입술을 대고 ‘열 받아서.’ 하고 웅얼거린 김한별이 혀로 그 위를 죽, 핥았다.

“봐. 달잖아.”

“…말 같은 소리를 좀 해라.”

“진짠데? 난 언제나 진심이야.”

“….”

“장난인 적도 농담인 적도 없어. 너도 알잖아.”

김한별은 아무렇지 않게 사람 심란하게 만드는 소리를 던져 놓고는 본격적으로 좆을 빨아 대기 시작했다.

“하아….”

해성은 침대 위로 몸을 늘어트렸다. 어차피 말한다고 들을 김한별도 아니고 뜨겁고 축축한 혀와 매끈한 볼 안쪽 살에 성기가 닿자 본격적으로 몸이 달아올랐던 탓이었다.

질투가 났다는 사람치고 김한별은 아주 느리고 집요하게 성기를 빨아들였다. 음습한 기운에 성기가 감싸이고 차차 집어삼켜졌다. 성기는 제 아래 혀를 긁으며 점점 더 안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열린 목구멍이 귀두를 머금자마자 수축하며 압력을 가했다.

근육이 박힌 늘씬한 복부가 크게 튀어 올랐다. 새하얀 손이 아래로 뻗어 나가 검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동그랗게 오므려진 입술이 적당하게 기둥을 압박했고 목구멍이 귀두를 강하게 조였다. 해성은 결국 허리를 몇 번 쳐올리지도 못하고 사정해야 했다. 정액을 삼킨 김한별이 성기를 뱉어 내고 위로 기어 올라왔다.

“읍, 하지, 하지 마라….”

“내 말 자꾸 못 믿잖아. 봐, 단맛 난다니까.”

“단, 맛 같은 소리….”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피하는 해성의 입 안에 기어코 혀를 욱여넣은 김한별은 도망치는 혀를 휘감아 빨아들이며 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박았다. 그러고는 입술을 떼고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속삭였다.

“아파?”

“하… 아프면 뭐 어쩔 건데.”

“아프게 하기 싫어.”

“그럼 안, 할 거냐?”

아프게 하기 싫다면서 손가락의 개수는 왜 늘리는 건데.

“자위하면 되지. 대신 내가 원하는 대로 네가 자세만 좀 취해 주면.”

“김한별.”

해성은 저를 짓누르는 어깨에 얹고 있던 손으로 김한별의 목을 감싸 안았다.

“박아 달라고 했잖아.”

“….”

“네 거 제대로 박아 달라고 했는데. 자신 없어?”

손가락이 단번에 빠져나갔다.

“아으….”

그리고 허전함에 빠끔거리며 개폐하는 입구에 쿠퍼액으로 흥건한 성기가 쑤셔 박혔다.

“자신은 있는데, 네가 박아 달라고 하자마자 하, 쌀 뻔했어.”

역시, 익숙해지기 힘든 저 크기가 문제였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들키기 싫어서 해성은 김한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자 김한별이 성기를 뽑아내고 해성을 안은 채 일어나 앉았다. 그 바람에 졸지에 김한별의 허벅지 위에 앉은 꼴이 되었다.

“뭔데….”

“아프면 말을 하라니까. 안 박아 줄까 봐 이래? 하여튼 겁은 많아 가지고.”

고개를 든 해성은 가만히 김한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붉어진 눈매와 새까만 눈동자에서 김한별이 지금 얼마나 흥분한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살짝 상체를 뒤로 물리고 시선을 내리자 보이는 성기는.

“아픈 건 네가 아니라 너 같은데.”

터질 듯 발기한 채 핏줄을 튕기고 있는 흉흉한 성기는 보는 사람까지 고통스럽게 했다.

그러면서, 뭘 자꾸 아프면 안 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그럼 나 먼저 한 발 뺄게. 너 누워서 다리만 벌리고 있어. 그럼 금방 쌀 수 있거든, 내가.”

“그딴 걸… 자랑스럽게 말하지 말고.”

자부심마저 느껴지는 얼굴에서 슬쩍 시선을 돌린 해성은 천천히 허리를 들었다.

시…발. 왜 이렇게 큰 거야.

하도 길어서 성기를 구멍에 맞추는 것도 힘들었다. 허벅지가 다 후들거렸다.

“너.”

“네가 하도 꾸물거려서… 답답해서 못 기다리겠다. …읏!”

최대한 힘을 풀고 주저앉았는데도 귀두만 간신히 들어왔다.

“하… 돌겠네.”

“나해성.”

“너, 읏. 처음에는, 대체 어떻게 넣었냐?”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날 김한별은 고환까지 처넣을 기세로 맹렬하게 성기를 처박았었다.

“심지어 남자도, 하아, 처음이었던 놈이….”

어이가 없어서 그런가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까지 났다.

김한별이 어설프게 아래가 뚫린 채 실없이 웃고 있는 해성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야.”

하지만 이어진 몸짓은 전혀 조심스럽지 않았다.

“하으…!”

불기둥 같은 성기가 난폭하게 내벽을 긁으며 안으로 쳐들어왔다.

“네가 존나게 섹시했으니까 그렇지.”

언제 뜸을 들였냐는 듯 김한별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고 맹렬하게 해성을 자신의 것으로 채워 나갔다.

다음 날, 해성은 김한별의 손에 씻긴 후 침대에 누워 색색, 간신히 숨만 내쉬며 앞으로 섣부른 도발은 하지 말자 다짐했다. 누구와 달리 피곤한 기색은커녕 되레 평소보다 얼굴이 반질반질한 김한별은 삼계탕 제대로 하는 집이 있다며 그런 해성을 끌고 갔다.

그 집은 삼계탕뿐만이 아니라 섞박지까지 제대로 하는 곳이었는데, 집으로 돌아온 해성은 김한별에게 다시 그릇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굴욕적인 사진을 받아야 했다.

하루를 이불 위에서 요양하고 나니 근육통과 아래에서 느껴지는 둔통은 많이 나아졌다. 샤워를 하고 나와 도복으로 갈아입던 해성은 불현듯 빨리고 깨물린 자국들이 전부 도복으로 가려진 부위에만 나 있다는 걸 알아챘다.

“하여튼.”

피식, 웃음을 흘리며 패딩 지퍼를 턱 끝까지 올렸을 때 바닥을 뒹굴고 있는 휴대폰이 진동했다. 스팸 메시지겠거니 하며 휴대폰을 집어 든 해성의 얼굴이 와장창 일그러졌다.

“아, 진짜!”

섞박지 국물을 입가에 묻히고 심각한 얼굴로 계산서를 확인하는 제 모습이 담긴 사진 아래 딸려 온 환장할 메시지는 도장에 도착해서야 확인했다.

김한별

턱받이 멋진 걸로 하나 사다 줘?

마지막 부 수업을 마치고 매트 정리를 한 해성은 곧바로 관장실로 가서 패딩을 챙겨 나왔다.

“나해성 가냐.”

“어.”

패딩에 팔을 꿰어 넣으며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꺼내 던지듯 바닥에 놓았다.

“너도 운동 좀 하고.”

“어, 어. 그래.”

“…아직 말 안 끝났거든?”

“조심히 가십시오.”

“그래, 지민아. 고생해라.”

“최지민도 지가 운동하고 싶어서 남는 거거든?!”

“그래. 간다. 낼 봐.”

팔짱을 끼고 흥, 하고 콧바람을 부는 박재관과 몸을 푸는 최지민에게 손을 흔든 해성은 도장을 나와 1층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확인하고 계단으로 향했다.

빠르게 계단을 내려오다가 숨이 차 마지막 계단을 밟기 전 길게 호흡해야 했다. 계단실을 나와 모퉁이를 돌자 유리문 밖, 김한별이 보였다. 미처 가다듬지 못한 호흡 때문일까.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해성은 유리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음식 안 흘렸고?”

“넌 분유 안 흘렸고?”

그리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김한별과 함께 드문드문 가로등이 켜진 골목길을 걸어 집으로 향했다.

* * *

“하아… 하….”

숨이 차 뒤로 물러나는 입술을 김한별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해성의 머리를 감싸 당긴 김한별은 혀로 바삐 숨을 내쉬는 입술 위를 느긋하게 쓸었다.

“넌 어떻게 숨 쉬는 것도 귀여워?”

“넌, 하아. 어떻게 그딴 말을 그렇게, 하, 잘해?”

김한별처럼 태연하게 대꾸하고 싶은데 호흡이 엉켜 그러지 못하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나도 이런 사람이 아닌데 너랑 있으면 이런 말이 그냥 막 나오네?”

“남 탓, 하기는.”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된 후 해성은 김한별의 어깨를 밀어 내고 안전벨트를 맸다.

“뭐 해? 출발해.”

그러고는 조수석 헤드 레스트를 잡고 저를 빤히 보고 있는 김한별에게 턱짓을 하며 명령했다.

“와. 볼일 끝났다고 이러기야?”

“볼일은 피차 끝난 거 아니냐?”

“내 볼일은 아직 한참 남았지.”

김한별이 발갛게 달아오른 해성의 뺨에 쪽 소리가 나게 키스한 후 운전석으로 돌아가 운전대를 돌리며 말했다.

“설마 그 볼일이 섹스 정도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해성은 튀어 오르는 심장을 잡을 수 없어 안전벨트만 꼭 쥐었다.

퇴근을 하고 나와 집으로 걸어가는데 김한별이 자꾸 손가락으로 해성의 입술을 톡톡 건드렸다. 하지 마라, 하고 제법 사납게 말했는데도 계속 남의 입술에 대고 손장난을 했다. 해성은 고개를 휙휙 돌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김한별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러자 김한별이 아야, 하며 어깨를 늘어트리고 엄살을 부렸다. 해성은 그런 김한별을 두고 앞서 걸었고 김한별은 금세 따라와 귀여운데 눈치는 없는 편? 하고 속삭였다.

해성이 미간을 구기고 올려다보자 김한별은 상체를 숙이고 해성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키스하고 싶어.’

매끄럽게 호선을 그리는 입술을 멀뚱히 바라보던 해성은 아직 차 문 수리비를 다 갚지 못했다는 구차한 핑계를 들어 김한별과 그의 차로 갔다.

그렇게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 차를 세우자마자 입술부터 붙였다. 김한별은 거의 조수석으로 넘어올 듯 달려들었고 해성도 김한별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고개를 기울였다. 키스는 해성이 입고 있는 패딩 안이 후끈거릴 정도로 차 안의 공기가 달궈진 후에야 끝이 났다.

혹시 키스보다 더한 것을 요구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차가 향하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차는 경로를 이탈하지 않고 익숙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키스만 했는데.

해성은 왜인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손바닥으로 뜨끈거리는 뺨을 문질렀다.

“바로 집으로 들어가.”

“지금 집 앞인 거 안 보이냐?”

“차에서 내리자마자 뛰어서 바로 집으로 들어가라고.”

농담기 하나 없이 엄격하게 말하는 꼴이 심히 의심스러웠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해성이 미간을 좁히고 바라보자 김한별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귀엽기만 하든가, 섹시하기만 하든가. 귀여운데 섹시하기까지 하면 어쩌라는 건지.”

“….”

“키스하고 난 후에 네 얼굴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더 들어 줄 것도 없었다. 해성은 차 문을 박차고 나왔다.

차 안과는 완전히 다른 찬 공기가 해성의 뺨을 스쳤다.

“으.”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차 문을 닫고 서 있자 김한별이 곧장 차창을 내렸다.

“뭐 하고 있어? 당장 들어가지 못해?”

못마땅한 얼굴이 하도 진지해서 지금 저게 진심인 건지, 장난인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해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차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빨리 가기나 해. 너 가는 거 보고 들어갈게.”

좁은 골목에 비해 김한별의 차가 지나치게 컸다. 일방통행도 아니고 그렇다고 쌍방으로 차가 오갈 수도 없는 골목에서 무사히 나가는 것만 확인하고 올라가려는데 김한별은 출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묘한 눈으로 해성을 보고만 있었다.

“야. 춥다.”

아닌 게 아니라 살짝 땀이 뱄던 등허리가 식어 오싹해질 정도였다.

“해성아.”

“….”

느릿하게 입술을 기울이며 저를 부르는 모습에 해성은 다른 의미로 오싹해졌다.

“…이름 부르지 말랬지. 내가 너보다 한참 형.”

그래서 일부러 나이를 거들먹거리며 유치한 대응을 하려고 했지만 김한별은 아주 천천히 그런 해성을 훑어보며 제 할 말을 했다.

“우리 나중에 놀이공원도 한번 갈까?”

“….”

“놀이공원에서 데이트는 안 해 봤지?”

“….”

“난 좋아. 나랑 하는 게 다 처음일 테니까.”

“…글쎄. 별로 그럴 거 같지는 않은데?”

“다 처음일 거야.”

“넌 남의 말을 좀 들을 필요가 있어.”

“네가 받아 보지 못한 것까지 다 내가 줄게.”

“돈 많아서 좋겠다.”

“뭐,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주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주고. 다 줘야지.”

“….”

“나애기 형.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오늘은 이만 갈게. 우리는 내일 또 봐.”

“썩 가 버려.”

김한별은 패딩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시큰둥하게 인사하는 해성을 향해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해성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수월하게 골목을 빠져나갔다.

차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해성은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쉬어 가슴에 들어찬 찌릿거리는 마음을 덜어 낸 후 집으로 들어갔다.

* * *

“벌써 구정이라니. 1월 1일이 어제 같은데!”

“나이 들면 원래 시간 가는 게 빠르대요.”

“나 아직 그 정도는 아니거든!”

탁상 달력을 들고 이번 달 일정을 체크하던 박재관이 최지민의 말에 콧김을 뿜으며 발끈했다.

“안녕하세요.”

매트리스 위에 앉아 믹스 커피를 마시며 그런 둘을 구경하고 있던 해성은 도장 입구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펄떡 튀어 올랐다. 그 바람에 커피가 크게 출렁거렸다.

“오, 건물주 손자분.”

“그건 뭐야?”

“괜찮으세요?”

앞의 두 물음은 김한별을 향한 것이었고 마지막 물음은 해성을 향한 것이었다.

“아… 어.”

“커피 뜨거운 거 아니에요?”

“아니. 식은 거야.”

뜨겁기는커녕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였고 손등에 겨우 몇 방울 튄 정도였다. 해성은 손바닥으로 손등을 대충 닦아 내고 커피를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은 후 종이컵을 구겼다.

“그거 명절 선물이야?”

구겨진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며 쭈뼛거리고 있는 해성을 바라보던 김한별이 최지민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네. 할머니가 세입자분들 드리라고 해서요.”

“아이구. 매번 뭘 이런 걸 다.”

“이번엔 뭘까?”

김한별의 손에서 쇼핑백을 받은 최지민이 바닥에 앉아 안에 든 내용물을 꺼냈다.

“대박.”

“고기!”

최지민이 해성을 보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한우. 투뿔이요.”

“역시 우리 건물주님! 화통하기도 하시지!”

박재관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크게 손뼉을 쳤다.

“할머니가 이 건물을 많이 아끼기도 하시고 또 여기 세입자분들이 워낙에 좋은 분들이라 신경 좀 쓰셨대요.”

“크으!”

박재관은 감동을 받은 눈으로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손뼉을 쳐 댔다.

“근데 이거 우리 냉장고에는 안 들어갈 거 같은데.”

그때 최지민이 심각한 얼굴로 고기가 든 상자를 감싸 안았다.

“신선하게 보관해야 하는데.”

“그, 그러네!”

관장실에 냉장고가 있긴 했지만 투뿔 한우를 담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음. 그럼 저희 마트 냉장고에 보관해 둘게요. 이따 퇴근할 때 찾아가세요.”

“아유, 역시! 그 할머니에 그 손자!”

듣기 낯부끄러운 찬양에 해성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려 할 때였다.

“해성이 형.”

김한별이 해성을 불렀다.

“이것 좀 같이 들어 주세요.”

방금 전에 잘 들고 올라와 놓고, 갑자기?

“올라올 때 힘을 빼서 그런가? 팔이 아파서.”

힘 빠진 미소를 지으며 주먹으로 팔뚝을 두드리는 모습에 박재관이 몹시도 안타까워했다.

“해성아!”

그러고는 허리에 손을 얹고 해성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저 불곰을 진짜.

불곰은 제 뒤에서 곰의 탈을 쓴 여우가 해성에게 윙크하는 것도 모르고 해성을 향해 다급히 손짓했다.

“뭐 하냐! 와서 들어라!”

최지민이 신중하게 상자를 다시 넣은 쇼핑백을 양손에 들자 팔짱을 낀 김한별이 삐딱하게 서서 말했다.

“패딩 안 입어요?”

“잠깐 내려가는 건데, 뭐.”

“오늘 영하인데?”

“괜찮아.”

“엄청 추운데, 지금, 밖에.”

어째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말투였다.

“감기라도 걸릴까 봐, 그래?”

그래 봤자 같은 건물 1층 잠깐 다녀오는 거였다. 해성이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묻자 김한별이 즉시 긍정했다.

“네.”

“….”

“요즘 독감이 유행이던데. 독감이면… 5일 격리던가? 그러면 관장님이랑 지민이 형이 완전 고생하는 거 아냐?”

“어? 어? 어?! 안 되지, 안 돼.”

온통 고기에 정신이 팔려 있던 박재관이 쏜살같이 관장실로 가 해성의 패딩을 들고 왔다.

“입어라, 해성아.”

“거참, 고맙수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최지민이 해성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가져가며 편히 입으세요, 사범님. 했다. 일자 눈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본 해성은 패딩을 입고 지퍼까지 채웠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오늘도 고생하세요.”

“건물주 손자분도 파이팅! 우리 고기 잘 부탁해요!”

“이따 찾으러 갈게.”

정겨운 인사를 나누는 셋을 뒤로하고 도장을 나오자 남은 쇼핑백 하나를 든 김한별이 따라왔다. 김한별이 타고 온 엘리베이터가 여전히 4층에 있어 해성은 버튼을 눌러 느릿느릿 열리는 문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김한별은 문이 닫히자마자 해성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모조리 거둬 갔다.

“뭐냐?”

어이없게 바라보자 김한별이 한쪽 어깨를 들어 올렸다가 내리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너랑 같이 있으려고 수작질한 거잖아.”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닌데?

“왜? 너도 나랑 있으니까 좋지 않아?”

“별로.”

“수줍어하기는.”

팔이 아파 보이기는커녕 제법 묵직한 쇼핑백 세 개를 들고도 실실거리는 낯짝에선 여유마저 넘쳐흘렀다. 더 말해 봐야 제 입만 아플 것 같아 해성은 김한별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옆에서 빤하게 쏘아지는 시선에도 해성은 고집스럽게 전광판만 응시했다.

“아쉽다.”

그러다 옆에서 들려오는 처연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김한별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 진지한 눈빛.

왜, 뭐지?

“여기 CCTV만 없으면 키스하는 건데.”

“….”

“고장 낼까?”

“내리자.”

시기적절한 순간,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고 해성은 한 뼘쯤 열린 엘리베이터 틈새를 비집고 나갔다.

별 마트에 들어가고 나서야 해성은 굳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필요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그대로 도장으로 올라가면 되는 건데.

해성은 냉장고 구석에 쇼핑백을 쌓아 놓는 김한별의 옆에 서서 휙휙 가게를 둘러보았다. 계산대는 비어 있었다.

“너 가게 비워 놓고 올라온 거야?”

“응.”

김한별이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답했다.

“뭐 도둑이라도 들겠어?”

“그렇긴 한데. 그래도.”

그리 오래 비워 둔 것도 아니고 가게 곳곳에 보안 카메라가 있긴 했다.

“가게에 사람 있어도 훔쳐 가는 애들은 다 훔쳐 가.”

“훔쳐 간다고?”

“응. 애들도 많이 훔쳐 가고. 어르신들도 그렇고.”

“그걸 그냥 둬?”

“할머니가 그냥 두래.”

“와.”

이것이 가진 자의 여유인가.

“가진 자의 여유나 뭐 그런 건 아니고.”

해성이 속으로 한 생각을 들킨 것 같아 뜨끔해하고 있는데 김한별이 해성의 손목을 잡아 패딩 주머니에서 빼냈다.

“이 건물이 할머니 행운의 건물이라서 웬만하면 시끄러운 일은 없도록 하는 편. 그래 봤자 과자 몇 개, 라면 몇 개 정도이기도 하고.”

나른하게 말을 이어 가면서도 김한별은 커피가 튀었던 해성의 손등을 꼼꼼히 살폈다.

“식었었다니까.”

지나치게 진중한 눈길에 민망해져 해성은 일부러 거칠게 잡힌 손목을 빼냈다.

“형 손이 얼마나 섹시한 줄 알아? 손가락도 길고, 특히 이불 움켜쥘 때 손등에 막 핏줄 돋아나서.”

“간다.”

“도장도 빨간 날은 다 쉬는 거야?”

김한별이 걸음을 옮기려는 해성을 막아서며 능숙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어.”

“그래. 조심해서 가. 아니다. 데려다줄게.”

“가게나 봐라.”

연휴에 만나자는 말 따위를 할까 봐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해성은 왜인지 허탈한 마음을 숨기고 김한별을 지나쳤다.

* * *

“드디어 내일부터 연휴의 시작이군. 모여 보거라.”

마지막 부 수업까지 끝낸 후 박재관이 뒷짐을 지고 근엄한 표정으로 해성과 최지민을 불렀다. 그러고는 흰 봉투를 내밀었다.

“올해에도 건강하고, 야, 야, 인마들아.”

한 뭉텅이 덕담을 늘어놓으려고 시동을 걸던 박재관은 봉투를 받자마자 안을 들여다보며 금액부터 확인하는 해성과 최지민의 등짝을 때렸다.

“오, 관장님. 올해 돈 좀 쓰셨네요.”

“그러게? 이래도 되는 거야? 어디 철봉 아래서 동전 좀 주웠나 봐?”

“가, 가. 새끼들아. 가 버려!”

날아드는 발차기를 피하며 봉투를 흔들던 해성은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박재관 때문에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집에서 폰 게임 하고 술만 마시지 말고.”

“그러라고 있는 휴일이야.”

“해성이 형은 정말 집 밖으로 아예 안 나올 거 같아요.”

“어떻게 알았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해성은 유리문 밖을 살폈다. 아까 김한별에게 오늘은 다 같이 퇴근할 거 같으니 기다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미리 보내 놓은 터였다. 막무가내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가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유리문 밖에 김한별은 없었다.

“으, 춥다!”

건물을 나오니 곧장 찬바람이 달려들었다.

“와, 한파 주의보 내렸다더니 진짜 춥네요.”

“빨리 가라. 형도 잘 들어가.”

“네, 형. 연휴 잘 보내시구요.”

“어, 그래. 너도.”

“밥 잘 챙겨 먹고!”

“어, 그래. 형은 너무 잘 챙겨 먹지 말고.”

“들어가십시오.”

“빨리 가! 추워!”

“형이나 빨리 가. 지민이 잘 데려다주고.”

해성은 건물 뒤편 지상 주차장으로 향하는 둘을 배웅하고 돌아섰다.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사라지자 골목 위에는 금세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 시간에 이 골목을 혼자 걷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해성은 패딩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을 빼냈다.

김한별은 집에 있으려나?

그러고 보니 별 마트에서 몇 시까지 일하는지도 안 물어봤다. 김한별은 매번 저를 기다리고 데려다줬는데 너무 무신경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 위에서 손가락이 머뭇거렸다. 그래도 연휴 잘 보내라는 인사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먼저 연락을 해도 되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입술까지 깨물고 고민하던 해성이 결국 다시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였다.

“워.”

해성은 사람이 너무 놀라면 소리도 지르지 못한다는 게 진짜라는 걸 몸으로 깨우쳤다.

“아, 미안.”

크게 떤 후 그대로 얼어붙은 몸이 너른 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미안, 미안. 이렇게 놀랄 줄 몰랐어.”

그리고 연신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

“미안해.”

놀란 마음을 달래는 나직한 목소리.

“많이 놀랐어? 미안.”

고개를 들자 김한별이 추위로 경직된 뺨을 감싸고 엄지로 쓰다듬었다.

“보고 싶어서.”

“….”

“내가 하루라도 형을 안 보면 입에 가시가 돋잖아. 그래서 기다린 거니까.”

“….”

“말 안 들은 거, 한 번만 봐줘.”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해성은 간신히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두 번만 더 보고 싶었다가는, 아주 기절하겠다.”

가슴을 뚫고 나올 듯 뛰는 심장이 놀라서만은 아니라는 걸 해성은 인정해야 했다.

* * *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 일어날 줄 알았는데 머리맡에 있는 휴대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하니 이제 겨우 오전 8시가 막 지나 있었다.

졸린데 잠은 오지 않는 심히 거슬리는 상태였지만 주말을 포함해 무려 5일이나 집에서 나가지 않아도 되었기에 억지로 자야 한다는 조급함은 없었다. 해성은 잠이 덜 깨 약간 몽롱한 상태로 휴대폰 속 메시지 앱을 터치했다.

그러자 광고 메시지가 즐비한 채팅 창 속 제일 위 칸을 차지한, 박재관과 최지민이 속한 채팅방의 읽지 않은 메시지 알림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퇴근할 때까지 같이 있어 놓고 무슨 할 말이 이렇게 많은 건지.

메시지를 확인하니 역시나 쓸데없는 말들뿐이었다.

“아… 재관이 형.”

특히 주방에서 애호박을 들고 찍은 박재관의 셀카라든가 하는 것들이.

어딜 가도 제법 준수하게 생겼다는 소리를 듣는 박재관은 셀카를 정말 끔찍할 정도로 못 찍었다. 오버 보태서 남이 찍어 준 사진이 5만 배는 더 나았다. 지금 해성이 보고 있는 사진만 해도 그가 들고 있는 애호박과 얼굴이 비슷해 보였다.

어느새 잠기운이 완전히 날아간 해성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사진에 집중했다.

“아니, 어떻게 찍으면 사진이 이렇게 나와?”

그러다 고개를 휘휘 젓고는 설렁설렁 메시지를 읽어 내려갔다. 최지민은 새벽부터 친구들과 등산을 간 모양인지 정상에서 찍은 제법 멋진 풍경 사진을 보내왔다.

최지민

관장님 사범님 만수무강하십시오.

칠순 잔치에서나 볼 법한 인사말과 함께.

이른 아침부터 분주한 이들에게 해성은 마음을 담아 답장을 보냈다.

채팅방 알람 끕니다.

그러자 1초 만에 박재관이 원래 껐잖아! 하고 메시지를 날렸다.

보기보다 눈치가 빠르시군요.

해성은 그런 박재관에게 칭찬을 건넨 후 휴대폰을 잠갔다. 팔을 늘어트리자 프레임 없이 깔아 놓은 매트리스 밖으로 손이 삐져나갔다. 그 상태로 한동안 눈만 끔뻑이다가 바로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어제, 골목길에서 김한별을 만나고 해성은 당황했다. 어두운 골목에서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거대한 물체에 놀란 것도 있었지만 김한별을 보고 느낀 반가움 때문이기도 했다.

집으로 가면서 김한별이 그 당황스러움을 눈치챌까 봐 걱정했지만 집 앞에 다다랐을 때 김한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헛소리를 섞어 인사했다.

‘네 얼굴에서 빛이 나서 이 동네는 가로등이 필요 없겠어.’

진짜 미친놈인가 싶었다.

내내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어깨 근육이 맥없이 풀어졌다. 손을 휘적거린 후 돌아서 대문을 들어가자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자. 잘 쉬고.’

뒤를 돌아보니 김한별이 한쪽 손을 흔들며 씩 웃었다.

‘내 생각도 많이 하고.’

‘…조심해서 가라.’

해성은 퉁명스러운 제 목소리에 목덜미가 벌게진 채 빠르게 계단을 밟았다. 목소리가 불퉁하게 나갔던 이유는 바로.

“미치겠네.”

해성의 입술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사실 해성은 김한별이 연휴에 만나자고 할 줄 알았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언제쯤 만나는 게 좋을까 고민까지 했다. 하지만 김한별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계획이었지만 해성은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미칠 거 같았다.

“으아!”

결국 괴성을 지르며 매트리스를 박차고 일어난 해성은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을 뒤집어썼다. 그래도 심장까지 번진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뜻하지 않게 이른 아침부터 찬물 샤워를 하고 나와 라면을 끓여 먹고 잠깐 누워 있는다는 게 깜빡 잠이 들었다. 눈뜨고 한 거라고는 뻘짓을 하다가 먹고 다시 자다 일어난 것뿐인데 벌써 오후 3시였다. 시간은 늘 이렇다. 정체된 것 같은 흐름 속에서도 끊임없이 흐르고 또 흘렀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저만치 떠밀려 간 후였다.

갑자기 집 안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져 창가로 가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으니 살 것 같았다. 찬 기운에 몸이 부르르 떨릴 때쯤 바닥을 뒹굴고 있던 휴대폰도 부르르 몸을 떨었다. 창문을 닫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아까 라면도 먹었고 방금 창문 열고 바람도 쐤다.”

-귀찮아도 밖에 나가서 동네 한 바퀴 돌고 그래라, 이놈아!

이렇다저렇다 별말도 없이 다짜고짜 대화가 이어졌다.

“형이나 나한테 전화할 시간에 전이라도 하나 더 부쳐.”

-안 그래도 몸에서 기름 냄새가 안 빠진다.

“열심히 부쳐라. 내 거도 챙겨 오고.”

-당연하지, 인마. 이번엔 송이버섯도 있다.

“오, 대박인데.”

-그치. 골고루 챙겨 가마.

“믿는다.”

-믿음!

불끈 쥔 주먹으로 허공을 가르는 박재관의 모습이 절로 상상되었다. 해성은 피식 웃으며 통화를 종료했다. 그러고는 이번엔 매트리스 대신 차가운 바닥에 드러누우려다가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패딩을 걸쳤다. 그래도 말을 잘 들어야 전 얻어먹을 자격은 있지 않나 싶었다. 양말까지 신기는 귀찮아서 맨발을 운동화에 욱여넣고 집을 나섰다.

대문을 밀고 나온 해성은 여전히 만만치 않은 추위에 양손을 패딩 주머니에 꽂고 되는대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박재관을 처음 만난 건 해성이 열일곱이던 때였다.

해성은 보통 체대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보다 조금 빠르게 체대 입시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열심히 준비해서 명문 대학을 들어가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그랬던 것은 아니고 해성이 워낙에 운동을 좋아하니 빙 돌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그냥 처음부터 원하는 분야에 몰두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부모님 덕이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해성은 체대 입시 학원에서 정말 물 만난 고기처럼 날아다녔다. 학원 가는 시간만 기다렸다. 같은 흥미와 목표를 가진 친구, 선배들 속에서 배우고 경쟁하고 즐기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의 즐거움과 기쁨이었다. 그렇게 세상이 온통 긍정적인 감정으로만 가득 차 있을 때 박재관을 만났다.

열일곱 해성의 눈에 스무 살, 대학생인 박재관은 엄청난 어른이었다. 박재관은 학원 후배들에게 자신이 입시를 하며 겪은 경험담과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수해 주었다. 체격도 좋고 실력도 좋은데 성격까지 둥글둥글하고 밝았다. 해성은 체대 선배들은 다 저렇게 멋진가 하며 감탄했고 저런 선배가 되고 싶다고 바랐다. 박재관이 여름 방학에 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는 신나서 거의 학원에서 살다시피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해성은 나중에야 고작 스물을 넘은 설익은 어른들 모두가 박재관과 같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저 역시 그러지 못했다는 것도.

“아.”

발길이 닿는 대로 움직이다 정신을 차리니 익숙한 간판이 보였다.

별 마트.

깜찍한 이름과는 다르게 하얀색과 파란색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간판은 심플하고 세련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흐음.”

눈을 가늘게 좁히고 가만히 간판을 관찰하던 해성의 눈에 별 마트 입구에 세워져 있는 말도 안 되게 긴 빗자루가 들어왔다.

절대 기성품은 아니야.

저런 길이의 빗자루는 본 적이 없었다. 해성은 나중에 김한별에게 대체 저 빗자루는 어디서 난 건지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하며 터덜터덜 별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산책을 하고 나니 그래도 뭔가 했다는 생각에 뿌듯해졌다. 별로 밥 생각은 없어서 매트리스 위로 가려는데 박재관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당장 저녁 식사를 하거라.

귀찮았지만 박재관이 가져올 명절 음식들을 생각하며 해성은 아까 별 마트에서 사 온 즉석 죽을 데워 먹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저녁이 오더니 세상엔 밤이 내려앉았다.

하릴없이 휴대폰만 보고 있던 해성은 메시지 앱으로 들어가 김한별을 찾아냈다. 메시지 창 속, 국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제 사진을 보는데 헛웃음이 흘렀다.

내일은 그래도 설이니까 새해 인사는 보내야겠지? 뭐라고 보내는 게 좋을까. 박재관이랑 최지민한테 보낸 거 복사해서 보내야겠다.

해성은 불 꺼진 방 안에서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으음….”

막상 휴일이 되었는데 자꾸 선잠을 잤다. 작은 소음에도 쉽게 잠이 깨 조금 짜증이 났다. 해성은 손을 더듬거려 수면을 방해한 방해꾼을 찾아냈다. 휴대폰에서 쏘아지는 밝은 빛에 인상을 쓰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김한별

일어나면 잠깐 나올래?

잠깐 나오라니…. 어디로?

이불을 걷고 흐물거리며 창가로 간 해성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저 아래, 대문 밖에 스크래치가 난 문짝이 달린 검은 SUV가 보였다.

김한별

읽었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부지런하기까지 하면 어떻게 해?

잠결에 잘못 누른 건가?

순식간에 주르륵 이어지는 메시지를 넋 놓고 보고 있던 해성은 화장실로 뛰어가 세수부터 했다. 양치를 하며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지고 빨래 건조대에 걸린 트레이닝복을 걷었다.

잠에서 깨어나 5분 만에 외출 준비를 마치고 현관으로 간 해성은 멈춰서 숨을 고르며 잠시 엉망으로 내던져진 운동화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상체를 숙여 제 앞에 가지런히 운동화를 놓고 한 발씩 끼워 넣었다.

차근차근 계단을 밟고 내려가 대문을 열자 김한별이 차에 기대서서 웃고 있었다.

“나 기다릴까 봐 서둘렀어?”

“김한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었다. 해성은 김한별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김한별의 웃음이 진득해졌다.

“바빠?”

“널 두고 내가 바쁠 리가.”

“그럼 밥이나 먹을래?”

“….”

“새해니까.”

“….”

“형이 살게.”

두 번째 새해, 해성은 이번엔 도망치는 대신 김한별을 붙잡는 걸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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