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4)

2.

남자의 요구에 해성은 헛웃음을 지었다.

데이트는 무슨 데이트. 섹스를 말하는 거겠지. 수리비를 받지 않는다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이제 겨우 몇 번 본 남자가 베풀기에는 과분한 처사였다.

그래, 뭐. 계속 오다가다 부딪칠까 걱정하며 피해 다니는 것보다 차라리 이렇게 관계를 정립해 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속이 쓰렸다. 결국은 몸으로 돈을 갚는 거니까.

낮게 한숨을 쉰 해성은 남자의 제안이 상황을 가장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 여기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좋아.”

“응. 나도 좋아.”

허락이 떨어지자 남자는 시원스레 웃으며 담벼락에 기대 있던 몸을 세우고 해성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섰다. 해성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려는 발에 힘을 주고 남자를 마주 보았다.

“…지금 갈래?”

순식간에 바짝 다가선 남자 때문에 약간 당황해서 한 템포 느리게 말하자 팔짱을 낀 남자가 검지로 자신의 턱을 문지르며 고민하는 척을 했다.

“흐음, 지금은 좀.”

“….”

“그럴 순 없지. 우리 첫 데이튼데.”

저놈의 데이트 소리. 남자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해성을 보며 피식거렸다.

“내일도 일해? 주말인데.”

“황금 같은 주말을 너랑 보내라는 거야?”

“응.”

삐딱한 물음에 남자가 당당하게 답했다.

도장에서 행사가 있거나 특별 수업이 있을 때는 주말에도 출근을 하긴 했지만 이번 주는 아니었다.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먹고 마시고 늘어져 있으려고 했는데.

“그냥 지금 해.”

“싫어어.”

말끝을 늘이는 목소리는 가벼웠고 입꼬리는 휘어져 있었지만 해성은 남자가 쉽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굳이 여기서 남자와 입씨름을 하며 시간 낭비, 에너지 낭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 그러면 내일 봐. 되도록이면 이 동네에서 멀리, 아주 머어얼리 떨어진 곳에서 봤으면 좋겠다.”

“데리러 갈게.”

“뭐?”

느긋한 말투에 해성의 반듯한 미간이 팍 구겨졌다.

“뭘 그렇게 놀라? 당연히 내가 모시러 가야지.”

“야, 됐어.”

“내가 안 됐어.”

“아, 뭔데. 진짜.”

“나, 김한별.”

해성은 일부러 딴소리를 하는 남자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어?

해성의 눈빛이 더욱 사나워졌다.

“존나 귀엽네, 진짜.”

더 들어 줄 것도 없었다. 해성은 그대로 등을 돌리고 걸었다.

“내일 2시까지 갈게.”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예쁘게 하고 갈게!”

웃음기가 담긴 신난 목소리에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갈 뻔한 걸 참았다. 대신 패딩 주머니 속, 손을 말아 쥐었다.

…진짜 미친놈인가.

해성은 전에 인터넷으로 구매한 회색 트레이닝복 세트를 입고 그 위에 검은 패딩을 걸쳤다. 어차피 모텔에서 뒹굴 거, 입고 벗기 쉬운 옷이 편했다.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며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2시.

아무래도 집 앞은 껄끄러워서 만날 장소를 다시 정하고 싶었지만 남자의 연락처를 알지 못해 그럴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별수 없이 정말 남자가 집 앞으로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안 오면 더 좋겠지만 어제 하는 꼴을 봐서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도장 갈 때 신는 운동화에 발을 끼워 넣으며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2시 2분. 지난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아마 한두 시간 만에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모텔도 조금 먼 곳으로 가야 하니 오가는 시간도 있을 거고. 7시 전에는 집에 올 수 있으려나.

현관문을 열고 나와 계단을 내려가면서 시간 계산을 했다. 저녁 메뉴를 고민하며 대문을 열었을 때, 해성은 멍하니 탄성을 내뱉었다.

“아….”

“뭐야, 귀엽게 또 첫 데이트라고 신경 쓴 거야? 안 그래도 되는데. 약간 체육 대회 컨셉인가?”

검은 차 앞에 선 남자가 평소의 캐주얼한 차림과 달리 고급스러운 검은 롱 코트를 입은 채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난 어때? 엄청 고민해서 골라 입었는데.”

“…가자.”

해성은 대강 대답하고는 대문 앞에 정차된 차의 조수석으로 가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이쪽만 빤히 보고 있는 남자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안 가?”

“와, 너무 멋있어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야? 간만에 꾸미고 나온 보람이 있네.”

대꾸할 말이 없어서 그냥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러자 남자도 운전석에 탔다.

“밥 안 먹었지? 딱 보니까 일어난 지도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사실이었다. 어젯밤, 침대에 누워 남자의 찻값과 수리비, 보험료 따위를 검색하다 보니 금세 자정을 넘겼고 휴대폰으로 이것저것 하다 보니 동이 틀 때쯤 잠이 들었다.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자.”

“야.”

“한별이.”

“…그냥 빨리 볼일이나 보고 끝내.”

“응. 지금 그 볼일 보러 가는 거잖아, 데이트.”

“뭔….”

“출발한다.”

해성은 부기 하나 없는 반질반질한 얼굴로 운전대를 돌리는 남자를 노려보다가 마른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트레이닝복은 입지 말 걸 그랬나? 어차피 모텔에 처박혀 있을 거, 왜 저렇게 과하게 입고 나온 건데.

해성이 패딩을 여며 목이 살짝 늘어난 맨투맨 티셔츠를 가리는 사이 차는 좁은 골목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 * *

“이런 데는 왜.”

차는 해성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멈췄다.

“일단 맛있는 걸 먹어야지.”

“….”

“내려.”

“뭐 하자는 건데?”

“데이트하자는 건데? 우리 오늘 하기로 한 거.”

“….”

“하기로 했잖아, 나랑. 데이트. 한 입 가지고 두말하는 그런 스타일이었어?”

“야.”

“가자. 여기 진짜 맛있어. 예약 잡기도 힘든 데야.”

차에서 내린 남자는 보닛을 빙 돌아 조수석으로 와 문을 열고 직접 해성의 안전벨트를 풀어 주었다. 어린애처럼 버티고 앉아 고집을 부리는 것도 웃겨서 해성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남자를 따라갔다.

식당 안에는 특이하게 테이블이 하나밖에 없었다. 직원과 짧게 대화를 나눈 남자가 테이블로 가 의자를 빼고 해성을 향해 말했다.

“앉아.”

해성은 그런 남자를 무시하고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그러자 남자가 귀엽기는, 하고 또 헛소리를 하고는 그 의자에 앉았다.

주문도 안 했는데 알아서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충 보니 코스로 요리가 나오는 것 같은데 해성은 코스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흐름이 끊기는 것도 싫고 식사하는 데 시간도 오래 걸렸다. 게다가 오늘은 남자와 마주 보고 앉아 느긋하게 음식 맛이나 음미하려고 나온 게 아니었다. 해성은 불편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놓인 샐러드를 바라보았다.

“어?”

하지만 식사가 이어질수록 해성의 젓가락질은 빨라지고 표정이 밝아졌다. …맛있었다. 처음엔 테이블이 하나인 걸 보고 이렇게 영업하면서 장사가 되나 싶었는데 이런 맛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디저트로 나온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맛있게도 먹는다.”

초코 파우더가 뿌려진 아이스크림을 반쯤 먹었을 때 들려온 목소리에 목덜미가 후끈 달아올랐다.

“뿌듯해.”

남자의 웃는 낯에서 시선을 돌린 해성은 아이스크림을 가득 퍼 올렸다.

식사를 하고 나온 남자가 ‘이제 몸 좀 풀러 가 볼까?’ 하기에 당연히 모텔로 가는 줄 알았다. 얼마나 해 대려고 하기 전에 밥부터 먹인 걸까, 생각하며 차에 탔다. 하지만 이번에도 차는 엉뚱한 곳에 도착했다. 남자는 황당해하는 해성을 끌고 볼링장으로 들어갔다.

볼링장은 해성이 두어 번 가 봤던 이전의 볼링장과는 전혀 달랐다. 입구 근처에는 술집에나 있을 법한 긴 바(bar)가 있었고 아케이드와 농구 게임기도 있었다. 어두운 실내 군데군데에는 화려한 조명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무슨 이런 볼링장이.

해성이 신기하게 둘러보는 사이, 직원이 해성과 남자가 앉은 자리로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첫 데이트에서 내기는 좀 그렇고. 소화나 시켜 보자고, 가볍게.”

얼음이 가득 든 콜라를 한 모금 마신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볼링공을 골라 들었다.

굳이 이렇게 시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는데 남자가 대뜸 레인 위로 올라가 공을 굴렸다.

모든 핀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한 번에 스트라이크를 성공한 남자는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하며 해성에게 다가왔다.

“쉽네? 볼링은 처음인데?”

실실거리는 얼굴을 빤히 보던 해성은 일어나 볼링공을 골라 들었다.

해성은 20년 넘게 운동을 해 왔고 심지어 운동이 전공인 사람이었다. 어느새 승부욕에 불이 붙어 집중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볼링장을 나오는 해성의 눈초리가 아주 매서웠다. 저 역시 볼링은 학교 다닐 때 교양 수업으로 맛만 본 게 다지만 그래도 남자보다는 나을 줄 알았는데 공을 굴리다 보니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너, 처음 맞아?”

“응. 역시 전공자는 달라. 순발력이며, 집중력이며. 나 같은 비전공자는 흉내도 못 내겠어.”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말투였다. 이겼는데도 기분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물론 졌다면 개운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겠지만.

볼링장을 나오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아, 이제 드디어 모텔에 가는 건가.

분명 남자가 제안한 일인데 마치 자신이 모텔에 가길 기다리는 모양새다. 어째 하루가 영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찝찝한 표정으로 차창 밖을 바라보던 해성은 점점 익숙해지는 풍경에 얼굴을 구기고 운전석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왜, 자꾸 보니까 정이 좀 들어?”

기가 차고 어이가 없는데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남자는 빤하게 느껴지는 해성의 시선에도 정면을 주시하며 입술만 끌어 올렸다.

골목으로 들어선 차는 이내 처음 출발했던 그 지점에 멈춰 섰다.

“야.”

“나도 더 놀고 싶은데, 첫 데이트에서는 약간 아쉬움이 남아야 다음 데이트가 더 기대되고 그런 거잖아.”

“…우리 집은 안 돼.”

“응?”

“난 집에는 사람 안 데리고 가. 하려면 모텔로 가.”

잠자리 상대를 집으로 끌어들이지 않는 건 해성이 반드시 지키는 철칙이었다. 싸구려 모텔을 갈지언정 집은 안 된다.

“내가.”

남자는 운전대를 잡은 손 위에 머리를 기대고 해성을 잠시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또 클래식한 매력이 있어서 말이야.”

“….”

“첫 데이트에서 침대까지는 좀 쑥스러운데.”

“너랑 나랑 원나잇으로 만난 건 기억하냐?”

“섹시하기는.”

“….”

“그건.”

해성의 시선이 서서히 기울어지는 입술에 한 번, 자신만만한 눈에 한 번 머물렀다.

“운명적인 만남 정도로 해 두고.”

“…운명은….”

“….”

“개뿔.”

잠시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던 해성은 느리게 중얼거리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다 턱이 잡혀 돌려졌다. 반사적으로 자신을 덮친 몸을 밀어 냈지만 그럴수록 해성을 붙든 손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지금까지의 여유가 거짓인 듯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가 성급하게 입 안을 헤집었다. 입천장, 볼 안쪽, 혀를 두서없이 스치고 긁고 빨아 댔다. 적막하던 차 안이 살이 맞붙는 젖은 소음으로 가득 찼다. 공기마저 축축하고 질척하게 느껴질 때쯤 입술이 떨어졌다.

“하아… 하….”

고작 키스 한 번에 숨이 차 헐떡거렸다.

“다음엔.”

남자는 오늘 내내 그랬듯, 눈으로 해성을 집요하게 핥아 내리며 속삭였다.

“더 재밌는 거 하고 놀자.”

* * *

해성은 어제 집으로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운 후에야 반나절을 남자와 시답잖은 짓을 하며 돌아다녔다는 걸 깨달았다.

‘뭐 하자는 거지? 아니, 그리고 나는 또 왜 말 한마디 못 하고 휘둘렸던 거지?’

곱씹을수록 어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방심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다음에 또 수작질을 하려고 하면 정확하게 차 수리값을 어떻게 받아 낼 생각인지 물어야겠다.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괜히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똑바로 말하라고.

과격한 기구를 사용한다거나, 이상한 옷을 입히거나 하는 짓만 아니면 어느 정도는 남자의 취향에 맞춰 줄 용의도 있었다. 차라리 그런 게 훨씬 쉬웠다. 이따위 되지도 않는 짓보다는.

해성은 패딩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군데군데 녹은 눈이 얼어붙은 골목길을 살금살금 걸었다. 어느새 머릿속은 남자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했다.

“오셨습니까?”

“어.”

도장에 도착해 지민의 인사를 받으며 관장실로 들어가던 해성은 멈춰 서 지민을 보며 물었다.

“지민아, 네가 올해 스물…다섯인가?”

말하고 나니 약간 동네 어르신들이 하는 질문 같아서 해성은 내내 주머니 속에 갇혀 있던 손을 빼내 뺨을 긁적거렸다.

“저 스물여섯이요.”

“와, 최지민. 언제 스물여섯 됐냐.”

해성과 박재관이 다니던 체대 입시 학원 출신인 최지민은 박재관의 제자이기도 했다. 박재관이 도장을 차렸다는 소식에 군 제대 후 도장에 놀러 왔다가 붙잡혀 그대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복학하면서 그만두었는데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하며 자연스럽게 다시 도장 일을 돕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가 스물두 살이었는데.

“사범님은 언제 서른두 살 되셨습니까?”

“…그래, 오늘도 힘내 보자.”

해성은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최지민을 향해 입꼬리만 올려 웃고는 관장실로 들어갔다.

패딩을 행거에 걸며 도장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매트 정리를 하는 최지민을 바라보았다.

3월에 복학한다고 했는데 복학 선물이라도 하나 해 줘야 하나. 1층 별 마트 알바도 대학생이겠지?

그렇다면 남자도 곧 바빠질 거고 자연히 이쪽에 대한 관심도 수그러들 것이다. 보아하니 돈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알바가 아니면 더 이상 이 동네에 올 일도 없을 테고.

섹스 몇 번 하다 보면 금세 3월이 될 거다. 본래의 삶으로 돌아간 남자에게 저와의 일은 조금 색달랐던 에피소드 정도로 남게 될 것이다.

…돈을 몸으로 갚는 일이 너무 자연스러워지는 거 같잖아.

해성은 별안간 심란해져서 심각한 얼굴로 도복을 점검하다가 최지민이! 오늘도 부지런하구만! 하고 쩌렁쩌렁 들려오는 박재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관장실 밖으로 나갔다.

“사범님.”

“할머님. 오셨어요.”

1부 수업을 준비하던 해성은 도장 입구에서 저에게 손짓하는 시율의 할머니에게 웃으며 다가갔다. 그러자 할머니가 빵이 가득 든 봉지를 건네주었다.

“이게 다 뭐예요.”

“아무리 사범님 친한 동생이라고 해도 차가 망가졌다는데 어떻게 모른 척해요, 미안해서.”

“아니,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에요.”

손사래 치는 해성을 귀엽다는 듯 보며 웃던 시율의 할머니가 가방에서 흰 봉투를 하나 꺼냈다.

“그거는 관장님이랑 사범님들 간식으로 드시고. 이거는 주유권인데. 별 마트 학생이 안 받을까 봐서요. 우리 며느리가 꼭 전해 주라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아….”

해성은 이러실 필요 없다고 말을 하려다가 차 주인도 아닌 자신이 거절하는 건 아니다 싶어 봉투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잘 전달할게요.”

“고마워요, 사범님. 아휴, 진짜 우리 사범님. 얼굴도 이쁘고 마음씨도 이쁘고. 이러니까 우리 시율이가 맨날 사범님, 사범님 하지.”

시율의 할머니는 매번 해성을 볼 때마다 인사말처럼 하는 칭찬을 했다. 해성은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는 웃었다.

시율은 습윤 밴드를 붙인 손바닥을 자신의 친구들에게 영광스럽게 보여 주며 사범님이랑 별 마트 갔다가 자빠진 거라고 자랑했다. 비록 저 멀리 날아간 초코빵은 맛도 보지 못했지만 해성과 둘이 마트에 갔다가 겪은 사고가 재밌는 기억으로 남은 모양이었다.

까진 손바닥이 쓰라릴까 봐 무리한 동작을 시키지 않으려고 했는데 시율은 오히려 평소보다 더 힘이 넘쳤다. 시키지도 않은 텀블링을 하다 넘어지고 민망한 듯 웃으며 반대편으로 뛰어가긴 했지만.

일단 수업이 시작되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쌓이다 보면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해성은 습관적으로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만져지는 봉투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전달해 줘야 하는데, 먼저 남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오늘만 해도 충분히 잠깐 짬을 내 내려갔다 올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했다.

“갈게.”

“들어가십시오.”

“어디 가! 너도 운동하고 가.”

“됐어.”

지치지도 않는지 박재관은 최지민과 함께 남아서 또 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요 며칠 딱히 하는 것도 없는데 퇴근할 때쯤만 되면 피곤이 쌓여 어깨가 무거웠다.

“서른 넘으면 더 관리해야 하는 법입니다.”

“…20대라 좋겠다, 인마. 노인네 상대로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적당히 봐줘 가면서 해.”

“야! 노인네라니! 너, 일로 와!”

쿵쾅거리며 저에게 다가오는 박재관을 무시하고 도장을 벗어났다.

진짜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해성은 딱딱한 어깨를 문지르며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오늘따라 괜히 얼굴이 더 까칠해 보이는 거 같기도 했다.

“됐다.”

거울을 보며 외모 점검을 하는 자신의 꼴이 웃겨서 해성은 핏, 웃고는 뒷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엘리베이터를 나오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건물 입구, 열린 유리문 사이로 바람이 숭숭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 추운 날씨에도 굳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

그래, 뭐. 주유권도 전달해 줘야 하니까.

“밤에 보니까 더 섹시한데?”

가까이 다가가니 남자가 또 헛소리를 지껄인다.

“시율이 어머님이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기에는 신경이 쓰이셨던 모양이야.”

해성은 가뿐히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주유권이라고 하시던데. 낮에 시율이 할머님이 전해 주고 가셨어.”

“어른 말도 잘 듣고 착하기까지 해.”

“…좀 받을래?”

남자가 봉투를 받아 가자마자 해성은 그대로 돌아섰고 남자는 그런 해성을 따라붙었다.

“…가라.”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이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다니려고 해?”

“이 골목에서 네가 제일 위험할 거 같은데?”

“내 아래가 좀 위험하긴 하지.”

실실 쪼개며 하는 소리에 해성은 할 말을 잃었다. 누가 들을까 무서워 발걸음을 빨리하려고 할 때였다. 패딩 주머니 안으로 무언가가 쏙 들어왔다. 깜짝 놀란 해성은 멈춰 서 미간을 우그러트리고 남자를 쏘아보았다. 그러다 이내 표정이 스르르 풀어졌다.

“따뜻하지?”

해성은 저도 모르게 주머니로 굴러들어 온 따뜻한 커피 캔을 감싸 쥐었다.

“손이 차갑던데.”

“….”

“손이 차가운 사람은 마음이 따듯하대.”

차가운 손끝에 퍼지는 온기 때문인지 남자의 무논리 때문인지, 힘이 쭉 빠져 버려서 입을 닫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너, 돈이 없는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왜 별 마트에서 일하는 거야?”

남자에게 이제 그만 꺼지라고 해야 하는데 따뜻한 손 때문인지 모든 의욕이 사그라들어서 마침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아아, 하고 해성에게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우리 할머니 마트거든.”

그러고는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웃음을 담은 낮은 목소리에 일순 뺨 위로 소름이 돋아났다. 해성은 어깨를 들어 귀를 문지르며 인상을 썼다.

잠깐.

“할머니?”

“응.”

별 마트 사장님이라 하면, 그 건물의 주인. 그 건물의 주인이라 하면,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 알짜배기 땅과 건물을 가지고 있다는, 베일에 싸인 전설의 그 건물주?

“아… 그래서.”

“응. 그래서 별 마트야. 내 이름이 김한별이니까. 이제 기억하지? 김한별. 24년 전에는 숙희 마트였지만.”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 입을 벌리고 고개를 끄덕이던 해성은 남자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숙희?”

“눈 동그랗게 뜨니까 존나 귀엽다.”

“….”

“우리 엄마.”

부자 할머니의 대단한 자식, 손자 사랑이었다.

“역시 어른 말을 잘 들어야 한다니까. 갑자기 마트에서 일하라기에 하루, 이틀 하는 척만 하다가 내뺄 생각이었는데.”

남자가 한 발 앞서가더니 몸을 돌려 해성의 앞에 섰다. 남자에게 휩쓸려 걷다 보니 어느새 또 집 앞이었다.

“그 덕에 나해성도 찾고.”

찾다니. 누가 들으면 원나잇하고 돈이라도 훔쳐서 튄 줄 알겠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확실히 할게.”

“응.”

“난 집에는 사람 안 데리고 들어가.”

“응, 그래.”

해성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웃으며 수긍하는 남자를 굳은 얼굴로 바라보다 휴대폰을 내밀었다.

“휴대폰 줘 봐.”

“드디어 번호를 알려 주네?”

“어.”

좋다고 휴대폰을 꺼낼 줄 알았던 남자가 빤히 해성을 응시했다.

“내 번호는 필요 없고 자기 번호만 알려 주겠다?”

“어.”

“나 하고 싶을 때, 그때나 연락하라 이거야?”

“어.”

“몸으로 갚는 게 꽤 능숙해?”

“싫으면 말든가.”

“그럴 리가.”

해성과 남자는 잠시 말없이 대치했다.

“좋아. 지금 가자.”

“그래.”

남자의 말에 해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쭙잖은 데이트 같은 거보다야 벗고 뒹구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근데 너 출근이 정확히 몇 시야?”

“그건 왜?”

“내일 일찍은 못 일어날 거니까?”

한쪽 입꼬리를 죽, 위로 당겨 웃는 얼굴을 보며 해성은 주머니 속 커피 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 * *

택시를 타 기사에게 목적지를 밝혔다. 이미 두 번, 남자와 가 본 적이 있는 모텔촌이었다. 술집이 즐비한 시끌벅적한 번화가에서 유일하게 조용하고 또 은밀한 곳이었다. 도로 위를 달리던 택시가 멈춰 설 때까지 남자도 해성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모텔 방으로 들어오자 남자는 침대에 앉아 해성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입매를 휜 채였다.

“씻어.”

안 그래도 하루 종일 몸을 쓰고 먼지를 뒤집어썼던 터라 씻고 싶던 참이었다. 해성은 말없이 패딩을 벗어 동그란 테이블 위에 던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하아.”

뜨끈한 물 아래 서 있자 상황에 맞지 않게 몸이 노곤해졌다. 섹스고 뭐고 다 귀찮았다. 집에 가서 이불 속에 들어가 잠이나 잤으면 하는 생각만 들었다.

항상 그래 왔다. 도장 일을 끝내고 집에 가서 TV를 보거나, 휴대폰을 하거나, 아니면 TV를 보면서 휴대폰을 하거나. 그러다 가끔은 혼자 술 한잔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느지막이 일어나 이불 위를 뒹굴뒹굴하다 출근 시간에 맞춰 씻고 집을 나섰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 오늘과 다르지 않을 내일이었다.

그렇게 해성의 하루는 쳇바퀴 돌듯 굴러갔고 그는 그런 자신의 하루가 마음에 들었다. 만족했다. 그걸 깨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남자와도 되도록이면 큰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일일이 날을 세우고 뻗대 봐야 귀찮은 일만 더할 뿐이었다. 괜한 오기나 덧없는 승부욕, 혹은 좆같은 정복욕 따위만 자극할 수도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건물주 손자라는 태생까지, 딱 봐도 원하는 건 다 가져 본 인생 아니겠는가? 적당히 원하는 대로 맞춰 주면 오히려 흥이 더 빨리 식을 것이었다. 그래야 했다. 해성은 진심으로 그러길 바랐다.

빨리하고 빨리 가자.

차라리 빨리 끝내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 해성은 뭉그적거리던 움직임에 속도를 더했다.

샤워를 마친 후 허리에 타월을 두르고 벗은 옷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일어난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타월을 잡아당겼다. 두르고 온 보람도 없이 맥없이 풀어진 타월이 바닥 위로 떨어졌다.

“야.”

“난 씻고 왔는데. 원하면 또 씻고.”

가만히 남자를 쏘아보던 해성은 들고 있던 옷을 놓고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매끄러운 혀가 뱀처럼 입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밀려드는 힘에 뒷걸음질 치다가 침대에 눕혀졌다.

해성을 다리 사이에 가둔 남자는 작은 턱을 한 손에 쥐고 입술을 더 깊게 겹쳤다. 점점 차오른 숨이 가빠진다 싶을 때쯤 두 입술이 젖은 마찰음을 내며 떨어졌다. 상체를 세운 남자는 입고 있던 검은 맨투맨 티셔츠를 벗어 침대 아래로 던졌다. 그러고는 해성의 손을 잡아 버클 위로 가져가 명령했다.

“풀어.”

그러면서도 한 손은 얕게 들썩이는 납작한 가슴팍을 쉬지 않고 어루만졌다.

“읏!”

그러다 비명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세게, 꼿꼿하게 선 젖꼭지를 꼬집었다. 해성은 입술을 깨물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입술을 비틀었다. 가슴에 닿아 있던 남자의 손은 한층 더 농밀해졌다.

그래, 처음부터 이런 걸 하려던 거였다.

해성은 저를 향해 돌진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버클을 풀고 드로즈와 함께 아래로 끌어 내렸다. 저번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성기가 퉁, 하고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하….”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는 비주얼이었다. 해성이 슬쩍 시선을 피하자 남자가 낮게 웃었다.

자신의 아랫배를 문지르던 남자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침대 헤드를 손으로 잡았다. 해성의 위로 짙은 그늘이 졌다. 남은 한 손으로는 자신의 성기를 쥔 남자가 성기 끝으로 기립한 젖꼭지 위를 훑었다. 성기에서 흐른 체액 때문에 젖꼭지가 금세 반질반질해졌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성기가 갑자기 퍽퍽, 젖꼭지를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뜨겁고 미끈거리는 성기가 여린 피부를 짓이기자 등골이 오싹했다.

섬세한 근육이 새겨진 얄팍한 허리가 들썩거렸다. 성기를 잡고 흔들어야 하는데 저를 깔고 앉은 거대한 몸뚱이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답답했다.

“하으…. 비, 비켜 봐.”

절로 애원조의 목소리가 흘러 나갔다. 얕게 요동치던 허리 짓이 점점 더 거세졌다. 그때 남자가 이불을 움켜쥔 해성의 손을 끌어와 단단하다 못해 딱딱해진 성기를 쥐게 하고 그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압박했다.

해성은 그 순간 멍청하게도 손바닥에 화상을 입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그 정도로 남자의 성기가 뜨거웠던 탓이었다. 남자가 손에 힘을 주자 그 반동으로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이 성기를 강하게 짓눌렀다. 굳은살에 성기가 긁히자 남자가 짧은 신음을 터트렸다.

“씨, 발.”

이어 손의 속도가 해성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그러면서도 남자의 시선은 내내 해성에게 못 박힌 채였다. 손바닥으로 맥동하는 핏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남자는 해성의 손으로 귀두를 압박한 후 사정했다. 농도가 진한 정액이 해성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하.”

남자는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불분명한 소리를 잇새로 흘려 냈다. 붉게 달아오른 뺨을 감싸 쥐고 엄지로 그 위에 튄 정액을 문지르던 남자가 벌어진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너, 사정했어.”

“…알아, 새끼야….”

“존나 섹시한 나해성.”

“하아…. 닥쳐.”

눈매를 찌푸린 해성이 숨을 몰아쉬며 손등으로 얼굴을 문지르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또 멋대로 혀를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어느새 남자 또한 알몸이 되었다. 턱, 목, 어깨, 가슴으로 입술이 도장을 찍으며 내려갔다.

“꿀을 처발랐나, 뭐가 이렇게 달지?”

남자가 해성의 가슴 중앙에 이마를 대고 키득거렸다.

“개소리, 좀.”

“개소리 좀 내 봐.”

“….”

“멍멍.”

“….”

“해 봐.”

해성은 즉시 남자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남자가 아야, 하며 엄살을 부리고는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다리 사이에 자리 잡는 남자를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기대감으로 허리가 떨렸다. 저번에 남자가 목구멍까지 성기를 빨아들였던 감각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입술이 닿은 곳은 성기가 아니었다.

남자는 해성의 무릎 뒤를 들어 올렸다. 저절로 엉덩이가 들리며 몸이 접혔다. 순간 해성은 남자가 준비도 하지 않고 성기를 처넣으려는 줄 알았다. 놀라서 지글거리던 몸 안의 열기가 식을 정도였다. 하지만 식은 열기는 예상치 못한 감각에 다시 삽시간에 타올랐다.

“하읏!”

늘씬한 허리가 허공에서 튀어 올랐다.

남자의 성기만큼이나 뜨거운 혀가 구멍에 닿았다. 구멍 입구를 핥던 혀는 금방이라도 파고들 것처럼 살 주변을 들쑤셔 댔다. 해성은 눈을 감고 고갯짓을 했다. 축축한 혀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쭈뼛 솟아났다. 구멍 입구에 잔뜩 침 칠을 한 남자는 엉덩이 살을 세게 깨물고 떨어져 나갔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반쯤 서서 흔들리던 성기가 움찔할 정도였다. 여기저기 멋대로 깨물어 대는 게 남자야말로 딱 개새끼였다.

“아, 미안.”

갑작스러운 사과에 베개에 고개를 묻고 있던 해성이 시선을 들었다.

“오늘도 콘돔은 안 해.”

기대도 안 했다.

“하… 네 마음대로.”

“네가 남자라서 안 하는 건 아니고.”

위로 기어 올라온 남자는 해성의 귀 옆에 한쪽 팔꿈치를 댔다.

“아…!”

그리고 이어 손가락으로 구멍을 찔렀다. 한 번에 안으로 들어온 검지와 중지가 천천히 안팎을 드나들었다.

“그냥, 뭐랄까.”

“…하으….”

느릿하게 오가던 손가락이 갑자기 푹 꽂히더니 가위처럼 벌어져 내벽을 누르고 또 갈고리처럼 휘어져 내벽을 긁어내렸다.

“우리, 둘 사이에, 다른 거 끼어드는 거 싫어.”

남자는 눈물이 맺힌 눈꼬리에 쪽, 소리가 나게 키스하며 지껄였다.

“미친, 새끼….”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해성이 사납게 노려보자 까맣게 가라앉은 눈이 느릿하게, 하지만 집요하리만치 샅샅이 해성을 훑어보았다.

“너.”

“….”

“뭐가 그렇게 겁나?”

해성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날아갔다.

“원래 그렇게 겁이 많아?”

남자는 그런 해성을 보며 쓱, 입술을 기울였다.

“읏!”

아래를 채우고 있던 손가락이 단번에 빠져나가고.

“걱정 마.”

완전히 달궈진 성기가 억지로 구멍을 벌리며 밀려들었다.

“난 겁이 없거든.”

기어코 성기를 뿌리까지 처박은 남자는 어느새 갈급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해성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허리를 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 정당히….”

벌써 몇 번째 사정인지 몰랐다. 힘이 빠진 다리가 자꾸만 허물어지려고 했다.

무릎을 꿇고 앉은 해성을 뒤에서 끌어안은 남자가 묽은 액을 질질 흘리며 홀쭉한 배를 때리고 있는 성기를 가볍게 쥐고 난폭하게 허리를 치댔다. 뜨끈하고 부드러운 손바닥에 달아오른 성기가 문질러지자 허벅지 근육이 파르르 경련했다. 갈수록 깊어지는 자극에 해성은 드문드문 뱉던 말을 잇지 못하고 달뜬 신음만 터트렸다.

가벼운 목소리로 장난을 치면서도 날카롭게 해성을 들여다보던 남자는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길게 뻗은 하얗고 곧은 목덜미에 입술을 붙인 채 연약한 피부를 깨물고 빨고 혀로 핥는 것에만 열중했다. 그러면서도 손은 끊임없이 해성을 어루만졌다.

가슴을 모아 쥐고 손바닥으로 단단해진 젖꼭지를 굴리다가 검지로 그 위를 후벼 파자 색이 짙어진 귀두가 옴찔거리며 몇 번째인지 모를 희뿌연 정액을 뱉어 냈다.

남자는 결국 앞으로 고꾸라지는 해성을 손으로 받아 눕히고 세게 허리를 쳐올리더니 단번에 성기를 빼냈다. 굵직한 성기에 튀어 오른 핏줄이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갔다. 그 감각에 몸서리치며 얕게 들썩이는 몸이 뒤집히고 곧장 성기가 다시 뿌리까지 처박혔다. 맥없이 옆으로 돌아갔던 고개는 턱이 붙잡혀 고정되었다.

남자의 진득한 눈이 눈물로 짓무른 눈꼬리와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 그리고 물기를 머금은 채 연신 할딱거리며 숨을 흘려 내는 촉촉한 입술 위를 기어 다녔다.

해성은 지난 두 번의 섹스에서 남자가 나름 저를 배려해 줬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도 한두 번의 사정으로 그치지는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남자는 해성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검지로 늘어진 분홍 성기를 위에서 아래로 세게 그었다. 이미 지나친 사정으로 인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성기였다. 그러자 탄탄한 허벅지가 그 사이에 들어찬 남자의 허리를 감고 압박했다. 내벽 또한 다닥다닥 성기에 달라붙어 마치 더 쑤셔 달라는 듯 꿈틀하며 한 번 더 몸집을 불리는 성기를 죽죽 빨아들였다.

“하.”

짧은 헛웃음 같은 걸 터트린 남자가 이내 쿵쿵, 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느리면서도 포악하게 성기를 처박았다. 두툼한 귀두가 안쪽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위만 집요하게 찍어 댔다. 가슴팍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부어오른 젖꼭지가 파들거렸다. 남자는 홀쭉한 배 위로 튀어나온 윤곽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아, 하, 하지 마…!”

의지할 곳이라고는 싸구려 이불뿐인 사람처럼 온 힘을 다해 이불을 움켜쥔 손등이 새하얬다. 남자는 그런 해성의 손을 이불에서 뜯어내 제 목을 감게 했다. 입술이 겹쳐지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온 혀가 어쩔 줄 몰라 파르르 떠는 혀를 휘감았다. 혀와 타액뿐만 아니라 두 입술 사이에 갇혀 버린 숨마저 모조리 흡수하려는 듯 남자는 맹렬히 흡입했다.

그리고 기어코 한 번 더 허리를 추어올려 손톱만큼 남은 뿌리마저 처넣은 남자가 정액을 흩뿌렸다.

“나해성.”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감고 정신없이 모자란 숨을 채우던 해성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하지?”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붉어진 뺨에 키스한 남자는 다시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미치게 좋은데?”

그 순간 전기가 오르는 것 같은 찌릿한 감각이 남자의 입술이 닿았던 뺨 위를 스쳤다. 그러면서도 피가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손끝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남자의 어깨를 밀어 내려던 해성의 입에서 다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읏!”

“겁쟁이한테는, 겁먹을 틈을 주면, 안 된다니까.”

남자는 휘청거리는 짙은 갈색 눈을 한 치의 틈 없이 직시하며 온몸으로 해성에게 달려들었다.

한 번 더 하면 혀라도 깨물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쯤 성기를 빼낸 남자가 해성을 안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해성이 더 하면 진짜 죽여 버린다, 하고 웅얼거리자 남자는 유혹하지 말라는 개소리를 지껄이고는 따뜻한 물로 해성의 몸에 묻은 정사의 흔적을 씻겨 주었다.

마른 듯 보이지만 근육이 들어찬 몸은 결코 만만한 무게가 아닐 텐데 남자는 마치 인형을 들듯 달랑 해성을 들어 침대로 옮긴 후 꼼꼼하게 물기까지 닦아 주었다.

볼일도 끝났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손끝, 발끝에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옆에 누워 턱까지 이불을 덮어 주는 남자를 쏘아보던 해성은 결국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밥 먹고 가자.”

모텔을 나온 해성은 뒤에서 들려오는 말을 무시하고 길가에 정차해 있는 택시에 올라탔다. 재빨리 문을 닫으려는데 남자가 힘으로 문을 열고 택시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야박하기는.”

그러고는 시트에 머리를 기대고 해성을 보며 피식 웃었다. 택시 안에서 또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닌가 해서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다행히 남자는 별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택시에서 내려 골목 안까지 따라 들어온 남자가 다시 주둥이를 놀리기 시작했다.

“출근 안 늦었지? 너 출근시키려고 막판에 참느라 엄청 힘들었어.”

“야.”

“응.”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언제까지 이럴 건데.”

“음…. 주유권 다 쓸 때까지는 나랑 놀아 줘야지?”

남자의 ‘논다’는 말이 단순히 섹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입을 다문 해성이 굳은 얼굴로 쳐다만 보고 있자 남자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섹스 한 번 했으니까 이제 데이트할 차례.”

“….”

“넌 네 방식대로 갚고.”

남자가 찬 공기에 그새 빨갛게 언 해성의 귓바퀴를 손으로 감쌌다.

“난 내 방식대로 받고.”

“….”

“공평하게.”

해성이 거칠게 손을 쳐 내는데도 남자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러다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너 나 안 싫잖아.”

해성의 눈이 남자를 빤히 보았다.

“적어도 섹스는?”

이어진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해성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떼어 냈다.

“자신감이.”

“….”

“과하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나?”

대꾸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해성은 남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밟다가 무의식적으로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대문 밖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던 남자가 해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휙, 고개를 돌린 해성은 빠르게 걸어 집으로 들어갔다.

* * *

오랜만에 저런 놈을 만나서 그런 거다. 그래서.

해성이 처음 게이 바를 드나들 때에는 적당한 상대를 찾는 방법도 몰랐고 기준도 없었다. 그냥 얼굴 반반하고 몸 좋으면 합격이었다.

그러다 점차 기준이 생겼다. 얼굴이고 몸이고 일단 뒤끝이 깨끗해야 했다. 그래서 자존심이 강해 보이고 주변에 사람이 많은 사람을 골랐다. 자존심이 강하니 먼저 매달리는 일도 없을 거고, 주변에 사람이 많으니 한 사람에게 얽매이지도 않을 테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해성은 한 번 갔던 게이 바는 반년 이내에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한정된 사람들이 드나드는 폐쇄적인 곳이다 보니, 거의 가는 곳만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해성은 누군가와 친분을 쌓거나 안면을 트는 일은 절대적으로 사양이었기에 늘 뜨내기처럼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어차피 게이 바를 자주 가는 게 아니라 크게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해성이 나름 구축해 둔 방법과 기준이 남자와 얽히면서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처음 간 게이 바에서 만났고, 자리를 잡고 앉아만 있어도 함께 나가자는 사람이 한 트럭은 될 것 같은 남자가 해성을 성가시게 만들었다.

“하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한 번 더 샤워를 한 해성은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뭐가 그렇게 겁나?’

“겁은 개뿔….”

겁이라니. 남자 때문에 자신이 겁을 낼 이유는 없었다. 저런 말에 동요할 정도로 어리숙하지도 않았다.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미치게 좋은데?’

멍하니 천장에 매달린 전등을 보고 있던 해성은 벌떡 일어나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지고 도복을 입었다.

“미친놈.”

패딩에 팔을 껴 넣으며 하는 말이 남자를 향한 것인지, 저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후가 되니 몸이 나른해졌다. 아침에 가까운 시간까지 시달린 후폭풍이 스멀스멀 몸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체력이라면 어디에 가도 뒤지지 않는데 남자 앞에서는 이상하게 맥을 못 췄다.

아니다. 그나마 저니까 남자의 그 무식한 힘을 견뎌 낸 거지. 그럼, 그렇고말고.

어쨌거나 아무래도 퇴근 때까지 버티려면 카페인이라도 들이부어야 할 것 같았다. 때마침 북적거리던 도장도 잠깐 한산해진 참이었다.

“나 커피 사러 갈 건데. 지민이 커피 마실래?”

“전 괜찮습니다.”

“어, 그래.”

“야, 인마! 너는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냐?”

“관장님, 사다 드려요?”

“아니?”

“…왜 저래, 진짜.”

해성은 좋다고 깔깔거리는 박재관을 지나쳐 관장실로 가 패딩을 가지고 나왔다. 1층에 머물러 있는 엘리베이터를 확인하고 계단으로 갔다. 계단을 내려가며 패딩을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도장 안과 밖이 마치 다른 나라처럼 온도가 극명했다.

건물을 나와 아무 생각 없이 별 마트로 걸어가던 해성은 멈춰 서 맞은편에 주차된 검은 SUV를 노려보았다. 정확하게는 그 SUV 문짝에 난 스크래치를. 그러다 별 마트 안으로 들어가 냉장 진열대에서 눈에 보이는 커피 중 아무거나 골라 계산대로 갔다.

“저거 왜 수리 안 하는데?”

밑도 끝도 없는 물음에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계산대 밖 해성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안 할 건데?”

“뭐? 왜?”

“나한텐 뭐랄까, 영광의 상처 그런 거?”

입만 열면 헛소리였다. 해성의 반듯한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자 피식 웃으며 일어난 남자가 해성에게 손을 뻗었다. 서늘한 손가락이 그 위를 쓱, 스쳐 갔다.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반 발자국 물러섰던 해성은 카드를 내밀고 태연한 척 말했다.

“계산요.”

“네, 손님.”

마치 어린애와 어울려 주기라도 한다는 듯 과장된 어조로 장단을 맞춰 주는 남자 때문에 해성의 미간에 팬 주름이 더 깊어졌다.

“수리를 안 할 거면 굳이 수리비를 받을 이유도 없는 거 아닌가?”

“그건 아니지.”

혹시나 하는 기대로 찔러 봤는데 역시나 먹히지 않았다. 남자는 리더기에 카드를 긁으며 해성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나해성 씨. 생각보다 되게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구석이 있어.”

“어, 맞아. 나 되게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야.”

“그런 부분이 굉장히 내 스타일이야. 상당히 매력 있어.”

남자의 무논리에 그러니까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놀아, 라는 말은 입 안에 갇혀 버렸다. 입을 꾹 다물고 쳐다보자 남자가 무덤덤하게 지껄였다.

“뭘 그렇게 빤히 봐. 키스하고 싶게.”

남자가 정말 입맞춤이라도 할 기세로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서 해성은 결국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야.”

동그란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해성이 무어라 쏘아 대려고 할 때 마트 안으로 손님 한 명이 들어왔다. 남자는 싱긋 웃으며 흠칫 놀라는 해성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손님.”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해성은 별수 없이 남자가 내미는 카드를 받아 들고 별 마트를 나와야 했다. 잠시 입구에 서서 안쪽을 흘겨보던 해성은 저벅저벅 걸어 SUV 앞으로 가 허리를 숙이고 스크래치를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니 차에 난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다.

“이 씨….”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린 해성은 커피에 빨대를 꽂고 쪽쪽 빨아들여 홧홧한 속을 달랬다.

이제는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해성은 유리문 밖에 선 남자를 보며 밖으로 나갔다.

“넌 친구도 없냐?”

“이 얼굴에 이 재력에, 없을 리가 있겠어?”

해성은 말없이 고개만 좌우로 흔들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남자가 당연하다는 듯 해성과 나란히 걸었다.

“나 머리도 좋은데 말했나? 학벌도 좋아, 심지어.”

머리는 좋아 보였다. 겉보기에는 동네 양아치같이 생겼는데 말하는 거나 가끔 허를 찌르는 행동 같은 것들에서 호락호락하지 않은 기운이 느껴지곤 했다.

“장난 아니지?”

모퉁이만 돌면 집 앞이었다. 지금이야 겨울이니까 다들 창문을 닫고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창문을 아주 조금만 열고 있어도 작은 대화 소리마저 안방까지 생생하게 들려오는 곳이었다.

“그래… 뭐.”

성의 없이 대꾸한 해성은 걸음을 멈추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드디어 인정받았어, 하며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체격 차에서 느껴지는 압도감에 해성은 발끝에 힘을 주고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를 모른 척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물 건너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남자와 자신의 집, 그리고 도장을 함께 오가는 것은 싫었다. 껄끄러웠다. 집과 도장은 절대 방해받아서도 흔들려서도 안 되는 장소였다. 그곳들만은 늘 같은 모습으로 아무 일 없이 유지되어야 했다.

남자가 원한다면 당분간 어울려 줄 용의가 있었다. 자신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만. 만약 그걸 어그러뜨리려고 한다면….

“걱정 마.”

하지만 이번에도 남자가 빨랐다.

“뭘?”

되묻는 목소리가 차분했다.

“어차피 나는 네 친한 동생이고, 친한 동생이랑 밤에 골목길 걷는다고 이상하게 볼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남자는 굳은 해성을 보며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안 그래, 해성이 형?”

…뭐?

“내 말이 맞잖아, 해성이 형.”

“…미친.”

“왜 욕을 하고 그래, 해성이 형.”

“…돌았냐….”

“말이 심하잖아. 나 상처받아, 해성이 형.”

“…가라.”

남자를 상대로는 진지한 대화가 불가능했다.

“잘 가, 해성이 형.”

해성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무시무시한 호칭에 몸을 부르르 떨며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해성이 형, 안녕.”

미쳤나, 진짜.

박재관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해성은 빗자루를 들고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남자를 험악하게 쳐다보았다.

“뭐야? 둘이 벌써 이렇게나 친해졌어?”

그런 해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재관이 하하, 웃으며 솥뚜껑만 한 손으로 해성의 등을 팡팡 내리쳤다.

아, 진짜 아파.

“…안 친하거든?”

“형이 부끄러움이 많잖아요.”

“나해성이 생긴 거랑 다르게 좀 그렇긴 하지?”

당사자를 세워 두고 둘이 신나서 떠들어 댔다.

“아니, 근데 해성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인 거예요?”

“전에 신세 진 일이 있어서요.”

“신세? 무슨 신세?”

그냥 두면 자리라도 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눌 기세였다.

“나 먼저 간다.”

“야, 새끼야. 같이 가.”

먼저 도장으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불곰에게 패딩 모자가 붙잡혔다.

“…놔라.”

“근데 정말 여기 건물주 할머니 손자예요?”

박재관의 손목을 잡고 떼어 내려고 버둥거리던 해성이 움직임을 멈췄다.

“아,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어요?”

“어떻게 알았어?”

남자와 해성의 질문이 동시에 박재관을 향했다.

“시율이가 별 마트 형아가 알려 줬다던데?”

“시율이가?”

“어! 형아한테 차 망가뜨려서 미안하다고 쓴 편지 주러 갔다가 들었다고. 형아한테 왜 별 마트에서 일하냐고 하니까 할머니 가게 봐주는 거라고 했다고…. 맞아요?”

“뭐, 네.”

“와!”

대수로울 것 없다는 듯 답하는 남자와 다르게 박재관은 크게 감탄했다.

“건물주 손자!”

“네. 제가 바로 건물주 손자입니다.”

호들갑을 떠는 박재관에게 남자가 공손히 인사했다. 둘이 하는 꼴을 더 봐 줄 수가 없어서 불곰의 손에 볼모로 잡힌 패딩을 포기하고 먼저 도장으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해성이가 이렇게 어린 동생이랑 스스럼없이 어울리니까 너무 좋네.”

여전히 크고 쩌렁쩌렁한 목소리 끝에 안도가 따라붙었다.

“앞으로도 해성이랑 잘 놀아 줘요.”

“그럼요. 근데 저 그렇게 어린 동생은 아닌데.”

박재관의 말에 남자가 빗자루 막대 위에 팔을 올리고 입술을 기울였다.

“건물주 손자분, 대학생 아니에요?”

“네, 맞아요.”

“몇… 살?”

“스물넷.”

말꼬리를 잘라먹은 건방진 대답에 해성의 눈이 사나워졌다.

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디 어른한테.

“아이구, 우리 나해성이는 서른둘인데. 어린 동생 맞네! 애기 동생, 애기!”

정작 박재관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호탕하게 웃으며 갈게요, 오늘도 파이팅! 하고는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애기…?”

그리고 해성은 처음으로 남자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남자는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인상을 쓰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어 시선을 든 남자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날아갔다.

“애기? 풉. 미친 거야?”

제 얼굴에 다닥다닥 들러붙은 집요한 눈을 알아차리지 못한 해성은 세상에서 남자와 제일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작게 소리 내 웃으며 박재관을 따라갔다.

* * *

세면대 앞에 선 해성은 멀뚱히 거울 속 자신을 보다가 길게 숨을 내쉬고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제, 금요일 밤. 남자는 또 해성을 기다렸다. 그리고 해성의 집 앞에서 해성이 형, 잘 가, 하고는 돌아섰다. 저번 모텔에서의 섹스 이후로 남자는 해성에게 어떤 성적인 요구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자면 그날도 몸으로 갚는다느니 뭐니 했던 말은 다 해성이 먼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그저 담백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형, 형 거리며 말도 안 되는 호칭으로 해성을 부르면서도 까만 눈 아래에 깔린 욕망이 적나라했다. 해성을 바래다주고 돌아서기 직전 해성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빛은 형형하고 또 끈적했다. 그것이 해성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남자는 분명 해성과 자고 싶어 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해성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저번에 별 마트에서 손가락으로 미간을 스치듯 만졌던 것이 다였다.

그리고 어제, 남자는 다시 빚을 받아야겠다며 데이트를 하자고 했다.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수리비를 청구하라고 해야 했다. 아무리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더라도, 그가 몇 번 자 준다고 떨어질 놈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지금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만약에 남자가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게이 따위에게 거부당한 것에 기분이 상해 분풀이라도 하려고 한다면? 몇 대 친다면 맞아 줄 것이고, 욕을 한다면 들어 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안 된다. 도장과 집이 있는 곳에서는.

‘넌 네 방식대로 갚고. 난 내 방식대로 받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꽤나 그럴싸하게 지껄여 대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너 나 안 싫어하잖아.’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말도.

해성은 짝, 하고 날카로운 마찰음이 날 정도로 세게 자신의 뺨을 때렸다.

대체 이게 뭐 하자는 건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해성은 현관으로 가 무의식적으로 출퇴근용 운동화를 신으려다 멈칫했다. 잠시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죄 없는 운동화를 노려보다가 사 두고 신을 일이 없어서 처박아 두었던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회색 슬랙스와 하얀 운동화가 잘 어울렸다. 검은 니트 위에 올겨울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패딩을 걸쳐 입은 해성은 차가운 손바닥으로 마른 뺨을 쓸고 현관문을 밀었다.

아씨.

스크래치가 난 검은 SUV 문짝에 기대고 서 있는 남자는 검은 트레이닝복 세트에 허리까지 오는 검은 패딩을 입고 있었다.

남자는 미간을 좁히고 팔짱을 끼더니 저번 옷차림에 비해 과하게 차려입은 해성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 뭐야.”

“뭐가.”

“심장 터지는 줄 알았잖아.”

“…꺼져.”

딱 봐도 놀리는 어투에 유치한 대꾸가 튀어 나갔다. 바로 자괴감이 엄습했다. 해성은 속으로 욕을 내뱉고는 조수석으로 갔다.

“은근히 사람 설레게 한다니까?”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한 남자를 무시하고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맸다. 해성을 따라 차에 탄 남자가 액셀을 밟으며 해성을 흘끗 보고는 피식 웃었다.

“너 그때 회색 추리닝 입은 모습도 완전 귀여웠어.”

트레이닝복도 아니고 추리닝이라니. 저 어린놈이 진짜.

“저번에 너무 막 입고 나온 거 같아서 신경 쓰였어? 안 그래도 된다니까. 넌 그딴 추리닝 입고 있어도 존나게 섹시하거든.”

“…조용히 가자.”

“귀엽기는.”

창밖을 보고 있던 해성은 순간 발끈해 얼굴을 구기고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야.”

“응.”

“내가 너한테 귀엽다는 소리 들을 레벨은 아니지 않냐?”

“왜? 네가 나보다 여덟 살 많아서?”

저렇게 말하니 자신이 꼭 나이 가지고 유세 떤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해성의 입이 샐쭉하니 다물어졌다.

“귀여운 데 나이 있나?”

“….”

“좀 놀라긴 했어. 내 또래인 줄 알았는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라.”

“진짠데? 근데 하도 애늙은이인 척하길래 나보단 좀 형인가 하긴 했지. 한 두세 살 정도?”

애늙은이라니.

남자의 말이 이어질수록 해성의 얼굴은 더욱 구겨졌다.

“그랬는데 여덟 살이라니.”

“그래. 그러니까 가서 네 친구들이나.”

“더 매력이 느껴졌달까?”

가서 네 친구들이나 만나, 라는 말은 저번처럼 기가 차 다물린 입 속에 갇혀 버렸다.

해성은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따뜻한 차 안에서 새파란 하늘 아래로 내려치는 햇살을 보고 있자니 벌써 봄이 온 듯했지만 겨울은 아직 한창 진행 중이었다. 차에서 내린 해성은 저를 향해 맹렬히 달려드는 겨울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또 뭐 하려고.”

“축구나 한판 하자.”

“축구?”

“응.”

“둘이?”

“당연히 아니지.”

남자는 해성을 보며 씩 웃다가 다시 미간을 좁혔다.

“축구 하기에는 바지가 너무 섹시한데….”

“하아….”

진지한 얼굴을 한 남자 때문에 해성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하지만 딱히 갈아입을 만한 옷이 없었다. 그나마 운동화를 신고 나온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어! 한별이 오랜만이야!”

“네.”

펜스가 처진 실외 축구장 안으로 들어간 남자는 몸을 풀고 있는 중년 남성 두 명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한별이 군대 다녀오고는 처음인가?”

“네.”

“오랜만이라 긴장이 되는구만.”

“엄살이 느셨네요?”

껄껄 웃으며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는 중년 남성의 모습이 마치 어느 도장에 서식하는 어떤 불곰 한 마리를 떠올리게 했다. 그렇게 약간 떨어져 대화를 나누는 남자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세 남자의 시선이 해성에게로 쏠렸다.

“오늘은 저 친구랑?”

“네.”

“못 보던 친구네?”

“네. 저도 오랜만이라 떨려서 숨겨진 고수를 데려왔어요.”

“으, 무서워!”

“근데 저 복장으로 할 수 있겠어?”

“고수니까요.”

남자는 무협 영화에 나오는 포권 자세를 하며 말했고 중년 남성들은 또 좋다고 파안대소를 했다.

웃음도 많은 사람들이네.

“형.”

“….”

“이리 와요.”

어색하게 서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해성은 저에게 손짓하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결과는 2:3.

거칠게 차 문을 닫은 해성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옷만 아니었으면 분명 이길 경기였는데!

“아예 문을 부수려고? 나야 좋긴 한데.”

“야.”

“응.”

“축구장 데리고 올 거였으면 미리 말을 하든가. 그러면 내가 이런 옷을 안 입고 왔잖아.”

남자는 아예 해성 쪽으로 돌아앉아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안,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어. 다음에는 꼭 미리 말할게.”

“당연하지! 저 아저씨들이랑 꼭 재시합.”

와다다, 쏟아지던 말이 뚝 끊겼다.

“응. 조만간 다시 재시합 일정 잡을게. 그때는 오늘의 수모를 꼭 설욕하는 거야. 아자!”

남자는 해성의 손을 잡아 자신의 손등 위에 올리고 위로 쳐 내듯 들어 올린 후 해성이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뭐야, 이거.

차는 꽤 오래 달렸다.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했고 차가 멈췄을 때는 이미 사위가 어두워진 후였다. 하지만 도착한 곳은 장식해 둔 조명으로 아주 환했다.

“운동했으니까 단백질 먹어야지.”

남자는 느릿느릿 걷는 해성을 따라 느리게 걸으며 말했다.

남자가 데려온 곳은 야외 고깃집이었다. 넓은 잔디를 기준으로 양쪽에 천막이 늘어서 있었고 중앙에는 벤치와 해먹이 놓여 있었다. 해성은 전구가 둘러진 나무와 잔디 위를 뛰노는 아이들, 먹고 마시고 웃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걸었다. 이번에도 미리 예약을 해 둔 것인지 남자는 자연스럽게 천막 중 하나에 자리 잡았다. 천막 안은 이미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내가 고기도 잘 굽는다고 말했나?”

캠핑 의자에 앉아 집게를 들고 저를 보며 웃는 얼굴이 퍽이나 다정했다. 하룻밤 인연으로 만나 몸으로 엮인 상대에게 보여 주는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시선에 해성은 말문이 턱 막혔다.

“뭐 해? 앉아.”

남자가 갑자기 엄습한 뜻 모를 감각에 어쩔 줄 몰라 멍하니 서 있는 해성을 불렀다. 들고 있는 집게를 딱, 딱 부딪치면서. 못해도 고깃집 서빙 알바 경력 3년 차는 되어 보이는 그 모습에 왜인지 맥이 풀렸다.

“대체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

해성이 남자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으며 묻자 남자가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감이 없을 이유가 있나?”

“…그래, 뭐.”

대답을 듣기 위해 물은 것도 아니어서 해성은 그냥 대충 대꾸하고 젓가락으로 생고기를 집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남자가 집게로 젓가락을 쳐 내지만 않았어도.

“야.”

“젓가락으로 고기 굽는 거 아니다.”

저건 또 무슨 개소리인지.

해성이 눈을 일자로 뜨고 바라보자 남자는 보란 듯이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물가에 내놓은 애기 같아서는.”

남자는 일부러 ‘애기’라는 부분에 힘을 주었다.

“정말 운동만 하고 산 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고기 굽기의 기본도 모르고.”

“…까분다.”

틀어막혔던 목구멍이 이번엔 버석거리며 말라 와 해성은 사이다를 따서 병째로 벌컥벌컥 마셨다.

“박력 있어.”

해성이 병을 든 채로 쳐다보자 남자가 입술을 깨물고 웃었다. 선이 굵직한 남자다운 얼굴이 마치 원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천진해졌다.

“형이라고 하든지.”

“응?”

“너라고 하든지, 노선을 좀 확실히 해 줬으면 좋겠는데.”

해성의 말에 남자가 웃음을 거두고 흐음, 하며 해성을 훑어보았다.

뭔데, 왜 저래. 또.

“노선이라는 말을 쓰는 모습에서.”

“….”

“확실히 연륜이 느껴지긴 하는군.”

뭐야… 요즘은 안 써?

해성은 약간 당황했다.

매일 박재관에게 최지민과 동급 취급을 받으며 지내서 몰랐는데 이제는 정말 좀 아저씨의 느낌이 나는 건가?

“귀엽게 생겨서 그런 말 쓰니까 진짜 미치게 귀여워.”

“…고기 탄다.”

해성은 남자의 장난에 잠시나마 심각하게 고민했던 자신을 발로 차 버리고 싶은 걸 참으며 말을 돌렸다.

“나 고기 잘 굽는다니까. 걱정 마. 미디엄? 웰던?”

남자는 돼지 목살 구우면서 진지한 얼굴로 미디엄, 웰던 같은 소리를 해 댔다. 해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짝 구워. 돼지는 바짝 익혀 먹는 거다, 애기야.”

해성의 말에 고기를 뒤집던 집게가 허공에서 멈췄다.

“하.”

짧게 코웃음을 치는 남자의 모습에 드디어 한 방 먹인 건가 싶었다. 해성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오르려는 찰나, 남자가 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알았어, 애기야.”

“….”

“바짝 구워 줄게. 나만 믿어, 애기야.”

역시, 미친놈은 섣불리 도발하는 것이 아니었다.

약간 짜증이 날 정도로 남자는 정말 고기를 잘 구웠다.

“맛있지?”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해 주기는 싫어서 해성은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작은 반응에도 남자는 뿌듯해하며 해성의 앞에 고기를 산처럼 쌓아 주었다.

“너도 먹어.”

“그럼, 당연하지.”

그러면서 또 집게로 고기를 들고 요리조리 살핀 후 해성의 그릇에 놓았다. 말을 해도 어차피 듣지 않았다. 해성은 남자를 보며 고기를 우물거리다가 사이다를 마시며 시선을 돌렸다.

패딩을 입은 아이들은 영하의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잔디 위를 뛰어다니며 놀았다. 거의 채워진 천막들 안에는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온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고 있었다. 적당한 소음이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주었다. 난로가 만들어 내는 훈기에 몸도 마음도 느슨해졌다.

평화로운 밤 풍경을 둘러보며 휘어지려던 입꼬리가 서서히 경직되었다.

그 속에서 해성은 마치 자신이 낯선 나라에 뚝 떨어진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혹은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분에 넘치고 과분한 화목함.

들고 있던 종이컵이 힘 빠진 손에서 벗어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당황해서 허둥지둥하던 해성이 급히 떨어진 종이컵을 주우려는데 빈손에 커다란 손이 들어찼다.

“이봐.”

“….”

“물가에 내놓은 애기 맞다니까.”

나른한 목소리와 다르게 악력은 거셌다. 손등과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강한 압박감에 해성은 기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서 거칠게 잡힌 손을 빼냈다.

집으로 가고 싶었다. 고요하고 적막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저만의 공간으로 당장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 남자가 화를 내면 어떻게 하지. 만약 도장까지 찾아온다면….

또다시 시작된 도돌이표를 따라가던 해성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한심한 짓 하지 말고 정신 차리자.

애써 차오른 숨을 고른 해성이 남자를 보며 말했다. 다행히 목소리가 떨림 없이 흘러 나갔다.

“갑자기 손을 잡고 그러냐.”

“애기 손에 힘 빠진 거 같아서 마사지 좀 해 주려고 했지.”

“넌… 진짜.”

“우리 애기 손이 많이 차네.”

걱정스럽게 묻는 말에 힘이 쭉 빠져서 캠핑 의자에 늘어졌다.

“야.”

“응?”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에도 남자는 태연히 눈만 깜빡거렸다.

“너 정말 왜 이러는데?”

“음….”

해성의 말에 남자가 생각하는 척 눈알을 굴렸다. 그 가증스러운 모습에 해성이 주먹을 부들거릴 때였다.

“넌 계속 모른 척해.”

“….”

“겁먹어도 되고, 모른 척해도 되니까. 도망가고 싶으면 도망가도 되고.”

자신만만한 눈이 한 치의 틈도 없이 해성을 향했다. 그 순간 해성은 그 눈빛에 압도되고 말았다. 저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남자에게. 그저 한때의 장난질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섹스로 만나 밥 몇 번 먹었다고 이렇게 쉽게. 한심하게.

안 되는데. 이런 건 더 이상은.

해성이 동요하는 마음을 남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였다.

“비 온다!”

잔디를 뒹굴던 남자아이가 벌떡 일어나 자신의 가족이 있는 천막으로 달려갔다. 해성의 눈이 잔디를 적신 빗방울로 향했다.

하나, 둘,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쏴아아-.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겨울비가 세상을 적시기 시작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해성은 상박이 붙들려 일으켜졌다. 남자의 손에 이끌려 천막 안쪽으로 들어간 해성은 남자와 마주 보고 섰다.

“…무슨 겨울에 소나기냐.”

“그러게. 우리 애기 감기 걸리게.”

“하아….”

지칠 줄 모르는 남자 때문에 해성은 이마를 짚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넌 진짜.”

하지만 눈을 들어 담담한 얼굴로 저를 살피는 남자를 보았을 때 하려던 말은 갈 곳을 잃고 흩어졌다.

“차로 가자.”

남자는 해성의 얼음장 같은 손을 감싸고 입김을 불었다. 그러고는 패딩을 벗어 해성의 머리 위에 씌운 후 어깨에 팔을 두르고 뛰기 시작했다. 해성은 엉겁결에 남자와 보조를 맞춰 달렸다.

야외에 주차되어 있던 차 안의 온도는 바깥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춥게 느껴졌다. 남자는 차에 타자마자 히터를 틀었다. 해성은 패딩을 끌어 내린 후 정전기가 일어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렇게 또 재밌는 추억을 만들었네?”

“재밌기는.”

손으로 패딩에 맺힌 빗물을 털어 내며 툴툴거리는 해성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한 손으로는 조수석 시트를, 다른 한 손으로는 차창을 짚은 남자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쑤셔 넣었다.

하루 종일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키스는 급박하고 난폭했다. 혀가 목구멍까지 뚫어 버릴 기세로 맹렬히 입 안을 휘저었다. 굳은 혀 위를 긁고 볼 안쪽을 찌르고 천장을 훑어 올렸다.

서늘하던 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달궈졌다. 해성은 남자의 단단한 어깨에 손을 얹고는 그를 밀어 내야 하는지 당겨야 하는지 확신하지 못해 갈팡질팡했다.

해성이 어떤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예고도 없이 달려들었던 입술은 다시 기습적으로 떨어져 나갔다.

“하아… 하….”

그새 호흡이 가빠졌다.

“가자. 집에 데려다줄게.”

남자는 할딱이는 해성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물러섰다. 해성은 황급히 그런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남자가 해성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뜨거운 손이 닿은 손등이 간지러웠다.

“빚은 받아 가야지.”

“….”

“넌 네 방식대로 받고.”

“….”

“난 내 방식대로 갚고.”

해성의 말에 남자가 말없이 해성을 응시했다. 마치 속을 헤집는 듯한 눈빛을 피하지 않기 위해 해성은 패딩을 쥔 손에 힘을 주어야 했다.

“굉장히 유혹적인 제안이긴 한데 말이야.”

남자가 뒷말을 잇기 전에 해성은 남자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중심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그 위를 살살 문질렀다. 그러자 남자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창피함과 수치심에 해성의 목덜미가 빨개졌다. 입술을 깨물고 남자의 손목을 놓아주려 할 때였다.

“읏!”

막 힘을 받기 시작하는 해성의 성기를 옷째로 강하게 움켜쥔 남자가 동그란 귓바퀴를 혀로 핥고 이로 잘근잘근 씹으며 귓속에 말을 흘려 넣었다.

“…내가 또 유혹에 약한 편이긴 하지.”

남자는 붉어진 뺨에 입술을 비빈 후 몸을 뒤로 물리고 액셀을 밟았다. 지체 없는 동작에서는 어떤 여유도 느껴지지 않았다.

* * *

이번엔 모텔이 아니었다.

“뭘 이런 데까지 와.”

무슨 섹스 한번 하겠다고 비싼 호텔까지.

반짝반짝한 로비를 가로지르는 남자를 따라가며 해성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남자가 멈춰 서 웃음기 없는 얼굴로 해성을 바라보았다.

“싸구려 모텔이 취향이면 맞춰 줄 수 있어. 근데 그런 거 아니라면 난 더 이상 너 그런 데서 벗겨 먹고 싶지 않아. 그동안 장단 맞춰 준 걸로 충분하잖아.”

웃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자가 얼굴에서 웃음기마저 거둬 내니 그러고 싶지 않아도 절로 몸이 굳었다. 해성은 얼음장 같은 손을 말아 쥐었다.

그래도 그렇지. 한참이나 어린 놈한테 쫄다니.

말없이 노려보고 있자 남자가 피식, 웃으며 해성의 주먹 쥔 손을 힐끔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깍지라도 끼고 걷고 싶은데.”

남자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슬쩍 뒷짐을 쥐었다. 그러자 남자가 또 귀엽기는, 하고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했다.

“너 사람들 있는 데서 조금이라도 티 내면 기겁하는 거 아니까 걱정 말고.”

건조하게 이어지는 말에 해성의 심장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러고 보니 남자는 처음 박재관과 함께 만났을 때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었다. 도장으로 찾아오는 일도 없었고 늘 퇴근길, 골목이 빈 시간에만 해성을 기다렸다.

그게, 일부러 그랬던 거라고?

해성은 입술을 기울이고 돌아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휘둘리지 말자.

도장과 집을 오가는 평온하고 무난한 삶을 어떻게 하면 잘 지켜 낼 수 있을지 그것에 집중해야 했다. 남자는, 남자도 결국엔 같을 것이다. 꿀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벌의 신세를 다시 반복할 수는 없었다.

남자와 멀찍이 떨어져 있던 해성은 체크인을 마치고 저벅저벅 걸어오는 남자의 눈을 피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룸으로 들어오자마자 남자는 해성을 끌어안고 입술부터 부딪쳤다. 고개가 뒤로 젖혀진 채 남자에게 혀가 빨리면서 떠밀리듯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마치 꾹꾹 눌러 담았던 것을 터트리기라도 하는 듯했다.

이러면서 축구 하고 고기나 구우면서 여유 있는 척을 했단 말이야?

왜인지 그런 남자가 얄미워서 입 안을 헤집는 남자의 혀를 깨물었다. 제법 세게 깨물었는데도 남자는 혀를 거두지 않고 목을 울려 웃었다. 그러더니 혀끝으로 해성의 볼 안쪽을 쓱쓱 문질렀다. 일순 소름이 쭈뼛 돋아 해성은 고개를 틀어 입술을 떼어 냈다. 그러자 남자가 혀를 내밀어 이번엔 뺨을 죽 핥았다.

“사정할 뻔했잖아.”

“너…. 진짜… 변태냐?”

“네가 날 변태로 만들어.”

“보아하니 타고난 거 같은데 왜 내 탓을 해?”

“내가 타고난 재능이 몇 가지 있긴 한데. 오늘 제대로 발휘해 볼까?”

일부러 가벼운 목소리를 내서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도 심장이 불규칙하게 두근거렸다. 그건 아마도.

“그러면 내 이름 좀 불러 주려나?”

남자의 눈에 담긴 까맣고 끈적한 집념을 읽어 냈기 때문일 것이다.

“응? 해성이 형?”

남자가 해성의 골반을 잡아 고정하고 크게 허리를 튕겼다. 옷 속에 있는 남자의 성기는 이미 완전히 발기해 있었다. 해성도 슬슬 열이 올랐다. 허벅지 안쪽부터 단전, 그리고 가슴팍까지 간지러운 열기가 기듯이 퍼져 나갔다.

“잠, 잠깐.”

남자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해성은 남자를 밀어 내며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자 남자는 오히려 해성의 엉덩이를 쥐고 바짝 당겨 두 성기를 더 세게 마찰시켰다.

“하아…. 씻… 씻을래.”

자꾸만 힘이 풀리려는 다리에 간신히 힘을 주며 말하자 남자가 해성의 목덜미에 입술을 처박고 웅얼거렸다.

“깔끔쟁이.”

운동한다고 몸도 많이 움직였고 비도 맞았다. 몇 번의 섹스로 해성은 남자가 얼마나 집요하게 온몸을 물고 빨고 핥고 깨물고, 아무튼 별 지랄을 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질척해질 몸이지만 그래도 샤워가 간절했다.

“좀, 비켜 봐….”

하지만 아무리 밀어 내도 돌덩이 같은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야….”

밀어 낼수록 더욱 강하게 힘을 주어 해성을 껴안은 남자가 해성의 허벅지를 감아 들었다.

“야!”

순식간에 남자에게 매달린 꼴이 된 해성이 소리를 지르자 남자가 쪽, 소리가 나게 입술에 키스했다.

“같이 씻어.”

“싫어!”

“왜에. 같이 씻자. 넌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된다니까.”

“싫다고 했다.”

“같이 씻자고 했다아.”

역시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해성은 눈을 꼭 감고 몸을 늘어트렸다. 힘을 빼서 무게를 더하고자 하는 유치한 수작질이었지만 남자에겐 먹히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게 남자에게 덜렁 들려 가다가 어딘가에 앉혀졌다. 슬쩍 눈을 뜨자 욕조 안이었다.

“해성이, 옷 벗자.”

“…적당히 해라.”

맞은편에 앉아 손을 뻗는 남자에게 나직이 경고한 해성은 훌렁훌렁 옷을 벗고 욕조 바깥으로 던져 버리려다가 멈칫했다.

욕조에서 얌전히 씻기만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자칫하다가는 옷이 다 젖을 수도 있었다. 속옷까지 탈의한 해성이 옷더미를 안고 고민하고 있자 남자가 홀랑 옷더미를 가져가 던져 버렸다. 욕실 바깥으로 내팽개쳐진 옷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넌, 진짜….”

거침없는 행동에 낮게 한숨을 내쉬던 해성의 입이 다물어졌다. 일어선 남자가 해성에게 시선을 박은 채 옷을 벗기 시작했다.

검은 트레이닝복을 욕실 밖으로 던져 버린 남자는 검은 드로즈 차림으로 허리를 굽히고 물을 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드로즈를 끌어 내렸다. 튕겨져 나온 성기가 단단하게 조여진 남자의 복부를 때렸다.

딱 봐도 아플 정도로 발기한 상태여서 해성이 먼저 빨아 줘야 하나 고민될 정도였다. 아무렇게나 드로즈를 내던진 남자가 해성에게 가깝게 붙어 앉았다. 그러고는 이제 겨우 욕조에 고이기 시작하는 물을 퍼내 해성의 어깨에 끼얹어 주었다.

“너 뭐 하냐….”

“애기 씻겨 주는 중.”

“미쳤냐, 진짜?”

해성이 사납게 쏘아봐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와 목, 팔과 등에 물을 묻히며 살살 문질렀다. 흉흉하게 성기를 세우고 있으면서도 피부를 문지르는 손은 조심스러웠다. 그 손길에서 뜻밖에도 애정이 묻어나서 해성은 또 목구멍이 콱 틀어막히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너 말이야.”

남자의 얼굴이 기울어졌다.

“되게 이상한 거 알아?”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 묻는 말에 해성은 본능적으로 남자의 뒷말을 막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네가 더 이상해….”

그래서 일부러 더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러자 남자는 소리 없이 웃고는 등을 어루만지던 손을 뺨으로 옮겼다.

“게이 바에서 하룻밤 상대를 찾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 섹스를 하는 것에는 아무렇지도 않으면서. 전희도 없이 거칠게 쑤셔지고 다뤄지는 것에는 어떤 반감도 갖지 않으면서. 그따위 싸구려 모텔은 익숙하게 드나들면서.”

“….”

“이런 호텔은 처음 와 본 듯이 굴고.”

뺨을 감싸 쥔 남자가 엄지로 눈가를 쓰다듬었다.

“고작 이런 손길 하나에는 뺨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어쩔 줄 몰라 해.”

“….”

“내가 이럴 때마다 너.”

남자는 가만히 해성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엄청 겁먹은 얼굴 하는 거 모르지?”

“….”

“지금처럼.”

남자의 입술이 덫에 걸린 짐승처럼 할딱이는 해성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해성은 틀어막혀 있던 숨을 간신히 내뱉었다.

“그래, 맞아.”

그리고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간신히 눈을 맞췄는데 심장은 부서질 듯 뛰어 댔다.

“좋아.”

“….”

“나도 좋다고, 너랑 자는 거. 너… 정도 되는 파트너 찾기 어렵거든. 근데 거기까지 해. 거기까지만 해.”

해성의 말에 남자가 입꼬리를 당겼다.

“거기까지, 라.”

“그래.”

“왜? 내가 선을 넘으면 흔들릴 거 같아?”

해성은 가지고 있는 패를 들킨 사람처럼 눈을 떨었다.

“말했잖아. 모른 척하고 싶으면 모른 척하고 겁나면 물러나도 돼. 도망가고 싶으면 도망가도 되고.”

뺨을 쓸던 손이 목덜미를 거머쥐었다.

“내가 거기까지 따라갈 거니까.”

“….”

“네가 어디로 가든 끝까지.”

목덜미가 거칠게 당겨지고 남자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물어뜯었다.

정말 물어뜯겼다. 해성은 거칠게 남자를 밀어 내고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다가 눈썹을 구겼다. 손등에 피가 묻어났다.

“야.”

“아팠어?”

“그걸 말이라고.”

“미안. 내가 책임질게.”

“….”

“너 아프게 했으니까 내가 책임져야지.”

농담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남자는 엄지로 상처 난 입술을 쓸었다. 해성은 그런 남자의 손목을 붙들었다.

“너 정말 왜 이러는데?”

그러고 싶지 않은데 말끝이 떨렸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충분히 어울려 줄 수 있었다. 데이트라는 명목으로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지 않아도 원한다면 기꺼이 잠자리 상대가 되어 줄 수 있었다. 굳이 망가진 차를 들먹거리지 않아도 되었다. 잔잔한 자신의 호수에 어떤 파동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약속만 한다면.

그런데 남자는 자꾸만 그게 다가 아닌 듯 굴었다. 섹스가 목적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왜. 그럴 필요 없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해성은 이런 것에는 면역이 없었다.

묻긴 했지만 왜인지 답을 듣기는 싫었다. 그래서 말을 돌리려 할 때였다.

“몰라.”

성의 없다 느껴질 정도로 무심한 어투였다.

“…몰라?”

“어, 몰라. 그걸 알면 내가 이렇게 나 성가셔 죽겠다는 사람한테 죽자고 들러붙어 있지도 않겠지.”

“….”

“아. 물론 넌 그런 척하는 거지만.”

남자가 해성이 붙잡고 있는 자신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손에 힘을 주고 있던 해성이 죽 미끄러지며 남자와 가까워졌다. 남자는 고개를 기울이고 혀로 해성의 입술에 맺힌 피를 빨아 먹었다.

“너 내가 이러는 거 속으로는 좋아하잖아.”

또다. 남자는 이런 식으로 해성의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확언했다.

“…누가.”

“네가. 좋아해.”

“….”

“너, 좋아한다고.”

“…보이는 것만큼.”

“….”

“자의식이 상당히 강하네.”

해성은 아래로 손을 뻗어 남자의 성기를 쥐었다. 그러자 남자가 해성의 아랫입술을 살짝 문 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또 남자에게 말려들 것 같았다. 차라리 빨리 박고 박히는 것이 나았다. 그러면 이 혼란도 금세 증발할 테니.

“매번 이런 식으로 몸으로 해결하려고나 하고.”

해성의 의도를 읽은 남자가 물고 있던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지껄였다. 여유 넘치는 꼴에 해성은 뿌리를 세게 압박한 후 빠르게 기둥을 훑어 올렸다. 그러자 남자는 해성의 허리를 잡아 들어 아예 제 허벅지 위에 앉히고 해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섹시해 죽겠다니까.”

해성도 남자의 까만 눈을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그러면서 손에는 속도를 더했다. 이미 완전히 발기한 성기에서 맥동하는 핏줄이 손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해성은 부푼 귀두를 손으로 감싸고 엄지로 찍어 눌렀다. 그러자 이제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차오른 물이 출렁일 정도로 남자가 크게 허리를 움직였다. 이어 농도가 진한 정액이 해성의 손을 적셨다.

나해성.

남자는 사정을 하며 해성을 찾았다. 나른하지만 열기가 가득한, 들뜬 목소리로. 그 순간 해성은 기묘한 전율을 느꼈다.

“해성아.”

“형이라고 불러라.”

“형아.”

“…아, 빼라.”

“까다롭기는.”

해성은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뜨거운 목구멍을 식히려 애썼고 남자는 손가락으로 아주 느릿하게, 그런 해성의 등줄기를 쓸어내리며 나직이 속삭였다.

“너도 손으로 해 줘? 아니면 입으로?”

해성은 잠시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다 남자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왜인지 힘이 쭉 빠져 버렸다.

“하아….”

남자는 정말 이상했다. 너무 이상해서 같이 있으면 해성마저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귀엽게 좆 세우고 애교까지 부리면 진짜 곤란해?”

짐짓 엄하게 말을 하면서도 등과 옆구리를 매만지는 손은 간지러울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그날 너랑 나가는 게 아니었어.”

내내 반복하던 후회가 다시 입 밖으로 흘러 나갔다.

“그 말은 그날 나랑 나가서, 나랑 이렇게 엮여서, 내가 계속 신경 쓰이고 생각나서, 그래서 후회된다는 거야?”

그런데 남자는 해성의 후회를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 그야말로 제 좆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 너는 진짜.”

사람이 어이가 없어도 웃음이 나는 모양이었다. 헛웃음처럼 시작된 웃음은 곧 어깨가 떨릴 정도로 크게 번져 나갔다.

“미치겠다, 정말.”

“….”

“어? 야, 야!”

물먹은 빨간 입술을 벌리고 눈꼬리를 접으며 비식거리던 해성은 놀라서 황급히 남자에게 매달렸다. 남자가 갑자기 해성을 안은 채 일어섰기 때문이었다. 성큼성큼 걸어 샤워 부스로 간 남자는 저와 해성에게 아무렇게나 물을 뿌린 후 물기를 제거하지도 않고 욕실을 나갔다. 그러고는 해성을 안은 채 침대 위로 엎어졌다.

“야….”

“너 어디 가서 웃지 마라.”

“또 뭔 개소리야.”

“웃지 마. 아니, 그냥 밖에 돌아다니지 마.”

“미친놈.”

“미쳤지. 내가 봐도 미쳤어,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남자는 해성의 머리를 쓸어 넘기고 이마에 난 잔머리를 엄지로 문질거리며 해성을 불렀다.

“나해성.”

“….”

“넌 왜 이름도 나해성이냐.”

“…뭐래. 이 미친놈이.”

“왜 이름까지 나해성이야, 시발.”

“뭐… 남의 이름에 불만 있냐?”

“넌 내 이름에 불만 있어?”

“….”

“그런 거 아니면 좀 불러 주지?”

해성이 입을 꾹 다물자 남자가 해성의 뺨을 가볍게 깨물었다. 언제는 저더러 개 소리를 내 보라더니, 정작 개새끼처럼 구는 건 남자였다.

“또 웃어 봐.”

“웃지 말라며.”

“그래. 차라리 웃지 마.”

“너, 네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는 알고 있냐?”

“몰라. 나해성이 내 정신 쏙 빼놔서 몰라. 억울해서 나해성 정액이라도 빼 가야겠어.”

남자의 궤변에 해성의 입이 멍청하게 벌어졌다. 벌어진 입에서는 이내 달뜬 신음이 흘러나왔다.

남자가 뭉근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두 중심을 마찰시키기 시작했다. 이미 달아오른 성기는 약간의 자극에도 안달을 내며 움찔거렸다. 남자는 해성의 머리를 잡아 고정하고 서서히 허리 짓에 속도를 높였다. 호흡이 절로 가빠지고 근육이 팽창한 허벅지가 남자의 몸을 감싸고 조였다. 늘씬한 허리가 파도를 타듯 오르내렸다.

뜨겁고 딱딱한 성기가 연신 쿠퍼액을 흘리며 안달하는 성기 위에 비벼졌다. 해성은 남자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입술을 겹쳤다. 혀를 밀어 넣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휘감아 쪽쪽 빨아 댔다.

“으… 으음….”

맞붙은 입술 사이에서 신음이 샐 정도로 쾌감이 빠르게 몸을 타고 돌았다. 마치 추삽질을 하듯 남자가 허리를 튕기자 해성이 사정했다. 사정 후 늘어진 해성의 성기가 마치 구멍이라도 되는 듯 그 위에 성기를 처박던 남자가 상체를 세우고 흉흉한 성기를 잡아 한곳을 겨냥했다. 이어 더운 숨만 색색 내쉬던 하얀 얼굴 위로 정액이 흩뿌려졌다.

다른 이의 정액을 뒤집어쓰고도 해성은 눈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빨간 혀로 입술에 묻은 정액을 핥아 먹었다. 그 모습이 마치 그러도록 훈련이라도 받은 사람 같았다.

멍한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본 해성은 차갑게 식은 남자의 얼굴을 보고 흠칫 몸을 떨었다.

“아….”

‘넌 타고난 걸레야. 그래서 이런 걸 좋아하는 거야.’

‘너 때문에 나까지 이런 변태 짓을 하게 되는 거잖아. 네가 좋아해서. 네가 원해서.’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해성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손이, 팔이, 몸이 굳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구멍을 벌름거리고. 남자 좆만 보면 환장해서는.’

조롱과 비아냥,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남자 구멍에 좆 꽂을 일은 없었을 텐데. 다 너 때문에.’

“아… 아….”

그래, 다 저 때문에. 다.

음습하고 끈끈한 목소리가 해성의 발목을 칭칭 감으며 타고 올라오려 할 때였다.

“나해성.”

단숨에 그 목소리를 거둬 낸 숨결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달싹거리는 입술 위로 퍼져 나갔다.

“나해성.”

단단한 팔은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몸을 단호히 안아 올렸다.

“해성아.”

해성은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흩어지려는 정신을 빠르게 수습해야 했다. 귀를 찌르고 들어오는 축축한 목소리도 죽을힘을 다해 몰아내야 했다. 이제는 구겨진 종잇장 정도에 지나지 않는 과거에 매몰되어 이 어린놈 앞에서 추태를 부릴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버릇없이 연장자 이름을 턱턱 부르는 놈인데. 더 우스운 꼴을 보이는 건 사절이었다.

해성은 자신이 필사적으로 남자를 끌어안고 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심호흡을 하며 불안정하게 박동하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나해성.”

“…이름 닳는다. 그만 불러라.”

“응, 형아.”

“….”

해성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는 걸 느낀 건지 남자가 응석을 부리듯 해성의 뺨에 제 뺨을 비볐다.

“해성이 형아, 이렇게 연약해서 어떻게 하지.”

시…발. 티가 났나…?

“연약해서 겁이 많은 거였구나. 그랬구나. 이렇게 여려서 정말 어떻게 해.”

“…조용히 하자….”

“내가 얼굴에 정액 좀 쌌다고. 몸을 막 부들부들 떨고.”

“야… 너도 얼굴에 정액 맞아 볼래?”

“싸 줄 거야?”

해성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들고 신난 얼굴로 해성을 바라보았다.

말을 말자.

경직되어 있던 몸이 축 늘어졌다. 남자와 대화를 하고 있으면 뇌가 물렁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냥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마저 들었다.

남자는 지친 얼굴로 눈만 끔뻑이고 있는 해성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사이드 테이블에서 휴지를 뽑아 와 해성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병 주고 약 주냐.”

“정액 주고 닦아 주기.”

한 마디를 고분고분 넘어가질 않았다.

해성이 가만히 쏘아보자 남자가 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입을 맞췄다. 그러더니 올라타 있던 몸에서 내려와 해성의 옆에 누워 품에 가두듯 해성을 끌어안았다.

“뭐 하는데.”

“잘래.”

“…안 해?”

“응.”

“안 할 거면.”

“졸려서 운전 못 해.”

눈을 감은 남자는 가증스럽게 하품하는 척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팔은 족쇄처럼 해성을 휘감고 있었다. 식기는커녕 여전히 뜨거울 정도로 발기한 채 허리춤을 툭툭 건드리고 있는 성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설마 나만 여기 두고 택시 타고 혼자 간다고 하지는 않겠지. 설마. 아무리 겁쟁이라도 그러지는 않을 거야. 여덟 살이나 어린 잘생기고 몸 좋고 좆도 크고 돈도 많은 연하를 섹스 안 해 준다고 버리고 튄다거나 하는.”

“하… 알았어. 알겠으니까 입 다물어.”

해성이 항복하자 남자는 눈을 감은 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는 낯짝에 약이 올라 해성은 남자의 입을 콱 꼬집었다. 제법 아플 텐데도 남자는 평온하기만 했다.

“진짜, 뭐 하는 놈인지.”

약간 신기하기까지 해서 중얼거리는데 그제야 남자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나?”

“….”

“나, 나해성한테 돌아 버린 놈이지.”

“…자라.”

“응. 잘 자, 형아. 나 자는 동안 어디 가면 안 된다.”

몸을 옥죄는 팔의 힘을 봤을 때 이걸 풀고 어딜 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해성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올까 싶었는데 몸도 마음도 이리저리 휩쓸려 다녀서 그런지 곧장 의식이 아득해졌다. 희한하게도 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팔이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새벽에 눈을 떴을 때 남자는 잠들기 전 보았던 그 자세 그대로 눈을 감은 채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혹시 자는 척을 하는 건가 싶어서 남자의 얼굴 가까이에 대고 손을 흔들어 보았는데 어떤 미동도 없었다.

남자에게 한껏 휘둘리고 있는 처지였지만, 이렇게 보고 있으니 남자는 정말 어렸다.

스물넷이라고 했었다. 스물넷의 남자는 모든 것에 자신만만했다.

스물넷.

자신의 스물넷은 어떠했더라.

그래, 마치 아주 길고 어두운 터널을 홀로 걷다가 중간쯤에 멈춰 선 기분이었다. 억지로 발을 움직여 겨우 그 끝에 도달한다 해도 이미 무너진 돌무더기에 출구가 막혀 있을 것을 알면서도, 차마 되돌아갈 수도 없었던 스물넷.

아마 남자는 경험한 적 없는, 앞으로도 결코 경험할 리 없는 그런 시간이 해성의 스물넷이었다.

계속 모르는 척하라고 했다. 겁나면 물러나라고도 했고, 어디든 쫓아갈 자신이 있으니 도망갈 테면 도망가라고도 했다.

어떻게 그 정도로 당당할 수가 있는 거지? 어떻게 그 정도까지 솔직할 수가 있는 걸까?

해성의 손가락이 굳게 다물린 고집스러운 입술 위에 살포시 닿았다. 그러자 간지러운지 남자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즉시 손을 떼어 내자 찌푸려졌던 눈가가 금세 스르르 풀어졌다.

저도 모르게 남자의 표정에 집중하고 있던 해성의 머릿속에 부질없는 가정이 스쳤다.

자신의 스물넷도 이럴 수 있었을까? 만약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니야.”

즉시 단호한 부정이 새어 나갔다. 그러지 않을 기회가 수없이 많았음에도 그 터널을 택한 건 자신이었다. 그러니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길게 숨을 내쉰 해성은 남자를 등지고 누웠다가 도로 몸을 돌렸다. 곤히 잠든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다시 잠이 쏟아졌다.

밤새 비를 퍼부었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고 화창했다. 호텔을 나와 남자의 차에 탔는데 남자는 집과는 다른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웬 가정집 같은 데서 차를 세운 남자는 의심스러운 눈을 하는 해성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앉자마자 음식이 나왔다. 막국수였다.

“안 그래도 이거 먹이고 싶었는데, 어제 또 기가 막히게 비가 내렸어?”

그 흔한 메뉴판 하나 붙어 있지 않은 가게 내부를 둘러보는 해성을 향해 남자가 말했다. 시선을 돌리자 씩 웃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우리 할머니가 인정한 가게 중에 하나니까 믿고 먹어 봐.”

남자의 할머니라면, 건물과 땅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그 부자 할머니?

베일에 싸인 그 건물주가 인정했다고 하니 불쑥 강한 호기심이 들었다.

해성은 겉보기에는 그다지 큰 특색이 없는 막국수를 세심히 관찰하다가 젓가락을 들었다. 이어 해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자는 그런 해성을 보며 작게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로 놀라긴 이른데. 너 나랑 갈 데 아직 많아.”

남자는 기어코 근처 카페에 가서 후식까지 먹은 후에야 해성을 집에 데려다줬다. 익숙한 골목에 차가 들어서자 안도가 몸 안으로 퍼져 나갔다. 꼬박 하루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이 집에 이사 오고부터 이렇게까지 집에서 떨어져 있어 본 건 처음이었다.

“아쉽다.”

대문 앞에 차를 세운 남자가 시트에 몸을 기대고 해성의 옷소매를 잡았다.

“점점 더 아쉬워진다.”

“….”

“나해성은 하나도 안 아쉬워 보이지만 괜찮아.”

불퉁한 목소리가 하나도 안 괜찮게 들렸다.

“다음엔 더 재밌게 놀 거니까 기대하고.”

해성은 옷소매가 붙들린 채로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리고 남자를 보며 인사했다.

“잘 가라.”

“냉정해. 나해성 피는 파란색인 게 분명….”

“김한별.”

투덜거리던 남자가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조심해서 가.”

해성은 재빠르게 차 문을 열었다. 남자는 붙들고 있던 옷소매를 맥없이 놓쳤다. 차 문이 닫히며 나는 둔탁한 소음을 등지고 대문 안으로 들어온 해성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부르라고 지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심장이 수선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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