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 1화 (1/14)

러브 어택(Love Attack) 1권

준비.

고리짝 시절 영화 속 주인공은 스물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 굴고는 했다. 하지만 세월이 변한 건지, 감정이 메마른 건지. 아니면 그런 감상을 느낄 여유가 없었던 건지. 그런 주인공들과 달리 나는 정작 서른을 찍고 넘어서는 그 순간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렇게 한 해, 또 한 해를 보내고 서른하나의 마지막 날. 퇴근길 편의점에 들러 네 캔에 만 원 하는 맥주를 사 와 시상식을 보며 막 한 캔을 끝냈을 때, 갑자기 낯선 조급함이 밀려들었다. 이제는 서툴고 허튼짓을 해도 더 이상 귀엽게 봐 줄 수 없는 나이가 되는 건가? 하고.

불쑥 솟아난 조바심과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집을 뛰쳐나와 클럽으로 향했던 건 실수였을까, 아니면….

1.

확실히 한 해의 마지막 날은 달랐다. 클럽 안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풍요 속의 빈곤이었다. 저 많은 사람 중 마음에 드는 사람 하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서 시상식이나 볼걸, 하고 후회하며 바(Bar)에 앉아 맥주나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 또 말을 걸어왔다.

“안녕?”

해성은 이번에도 영 아니다 싶으면 그냥 집에나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해성이 말없이 저를 보며 눈만 끔뻑이자 남자가 검지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아, 반말은 별로예요?”

“아니.”

“그래? 그럼 나, 다섯 번째 도전잔데 어때?”

자신이 다가온 남자들에게 퇴짜 놓는 것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해성은 남자의 뒤, 저 멀리에서 킥킥거리며 흥미롭게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무리에게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만하면 괜찮지 않아?”

“친구들이랑 내기했어?”

“응. 그리고 그쪽이 마음에 들기도 하고.”

해성은 남자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큰 키에 넓은 어깨, 딱 봐도 단단한 몸. 새까만 짧은 머리카락과 적당히 그을린 피부. 나이는 아마도 스물대여섯쯤.

“너 커?”

무례한 물음에 남자는 입술을 기울였다.

“당연하지. 만져 볼래?”

느긋한 웃음과 당장이라도 손을 끌어가 쥐여 줄 것 같은 기세.

“나가자.”

올해의 마지막을 보내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모텔에 들어가자마자 달라졌다.

씻고 할까, 라는 말을 건네기도 전에 남자는 해성을 안고 침대로 엎어졌다. 입 안을 휘젓는 혀에 몸이 녹아 남자를 밀어 내려던 손을 목덜미에 둘렀다. 그러자 남자는 입술을 더욱 깊게 겹치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혀를 세게 빨아들였다. 점점 숨이 몰리고 아랫배가 단단하게 뭉쳤다. 해성이 낮게 신음하며 고개를 기울였을 때였다. 니트 안으로 들어온 손이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가 등으로 미끄러졌다. 그러고는 습관처럼 얕게 팬 등 중앙을 쓸었다.

쪽. 젖은 살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짜증스러웠다.

“너 남자 처음이지?”

“응.”

“하아….”

해성은 이마를 짚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간혹 이런 놈들이 있었다. 객기인지 지랄인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게이 바로 들어와 재미 삼아 남자와 한번 자 보려는 미친놈들이.

“왜, 뭐가 문제야.”

남자는 해성의 니트를 끌어 올리고 가슴에 입술을 붙인 채 웅얼거렸다.

“남자한테 서 본 적은 있고?”

한껏 잘난 척을 하고 있지만 본 게임에 들어가면 세우지도 못할 게 분명했다. 괜히 시간 낭비만 했다. 집에나 있을걸. 남자를 밀치고 일어나려는데 남자가 위로 올라타 해성을 다리 사이에 가뒀다.

“뭔데?”

“나 벌써 섰는데?”

“…뭐?”

인상을 쓰고 남자를 쏘아보던 눈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가 크게 뜨였다. 남자의 중심이 두툼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 위로 드러난 윤곽이 아까 남자가 보인 자신감을 이해하게 만들었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남자는 그런 해성을 보며 피식 웃고는 버클을 풀고 천천히 지퍼를 내렸다.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해성의 얼굴을 눈으로 핥은 남자는 위로 솟은 성기를 잡고 느긋하게 흔들며 혀로 제 입술을 적셨다.

“소프트하게 하는 거 좋아해, 하드하게 하는 거 좋아해?”

후드득, 후드득. 떨어지는 물소리에 눈이 떠졌다.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아 앞이 흐릿했다. 눈을 깜빡여 시야를 확보하며 일어나 앉았다.

“아으….”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엉덩이 사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체력으로는 어디 가서도 뒤지지 않는 자신이 나가떨어질 정도로 남자는 밤새 무식하게도 박아 댔다. 그런 와중에 저 역시 몇 번이나 사정했다.

해성은 반투명한 욕실 문을 노려보다 바닥에 널브러진 속옷을 찾아 다리를 끼워 넣었다.

“시발….”

일어서 바지를 입던 해성이 입술을 악물었다. 안에서 새어 나온 정액이 속옷을 적셨다.

“돌겠네, 진짜.”

겨우겨우 옷을 챙겨 입고 코트를 주워 들었을 때 물소리가 끊겼다. 해성은 화들짝 놀라 서둘러 모텔을 빠져나갔다. 때마침 앞을 지나는 택시를 타고 곧장 집으로 올 수 있었던 게 새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대체 얼마나 싸지른 건지 안에 남은 정액을 긁어내는 데 한참이나 걸렸다. 찢어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전신이 욱신거려 새해 첫날은 이불 속에서 요양만 하다 지나갔다.

역시, 이런 짓은 더 이상 별로 귀엽지 않다.

일이나 해야지.

짧은 연휴를 끝낸 어른의 감상이었다. 해성은 익숙한 골목을 지나 아파트 단지 옆, 손때가 덕지덕지 묻은 4층 건물 안까지 들어갔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아무래도 멍한 정신을 깨워야 할 것 같았다. 커피를 살 요량으로 털레털레 1층 슈퍼 출입구로 걸어가던 해성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다 멈췄다.

아.

긴 빗자루로 슈퍼 앞에 쌓인 눈을 치우던 장신의 남자 역시 해성을 알아보고 빗질을 멈췄다.

이런.

“이게 누구야?”

짧게 헛웃음을 터트린 남자는 이내 한쪽 입꼬리만 당겨 웃었다.

“먹튀 신데렐라 아니야?”

먹튀라는 말에 순간 울컥했지만 한참이나 어린 애의 도발에 넘어갈 정도로 나이를 주둥이로 처먹지는 않았다. 해성은 남자를 지나쳐 슈퍼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 냉장고로 가 보이는 대로 아무 커피나 골라잡고 계산대로 가니 어느새 그 너머에 선 남자가 싱글거리며 해성이 입고 있는 도복을 쭉, 눈으로 훑었다.

“와, 사범님이셨구나.”

해성은 슬쩍 패딩을 여며 도복을 가리고 카드를 내밀었다.

“계산요.”

“여기 4층에 태권도 학원 있던데, 거기?”

헛소리를 해 대는 남자를 무시하고 카드를 돌려받으려는데 남자가 카드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졸지에 카드를 두고 힘겨루기를 하는 꼴이 되었다.

“…놔라.”

“이름 알려 주면.”

“내가 왜?”

“그럼 내 이름 알아 가.”

“싫어.”

“김한별.”

“….”

“이름은 김한별이고 나이는 스물세…엣이 아니라 스물넷 됐네, 이제. 당분간 이 슈퍼에서 일할 거야. 오늘 나올 때까지만 해도 더 일할 생각 없었는데.”

남자는 해성의 목에 붙은 커다란 파스를 보며 씩 웃었다.

“아, 그건 미안. 내가 깨무는 버릇이 있어서.”

팟! 남자의 손에서 카드를 뽑아낸 해성은 실실거리는 낯짝을 보며 덤덤히 말했다.

“영수증은 됐습니다.”

슈퍼를 나와 건물 안으로 들어간 해성은 계단을 오르는 대신 엘리베이터를 탔다. 건물의 나이만큼 오래된 엘리베이터가 아주 느리게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쿵쿵. 해성이 벽에 머리를 박을 때마다 엘리베이터도 같이 덜컹거렸다.

“잠이나, 처, 잘, 것이지. 왜, 기어, 나가서.”

언제나 뒤늦은 후회와 함께하는 한 해의 시작이었다.

* * *

대체 무슨 생각으로 헤테로랑 잔 걸까? 평소 같았으면 헤테로란 걸 안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텔을 빠져나왔을 것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고 해 봐야 숱한 날 중 하나일 뿐인데, 무슨 특별한 날이라고 안 하던 짓까지 했는지 모르겠다. 연말 분위기에 지나치게 취했었나.

게이와 잔 헤테로들의 반응은 대부분 두 가지로 나뉜다. 개뻘짓을 후회하며 그 일을 인생에서 지워 버리는 부류와 호기심에 경험한 새로운 맛을 잊지 못해 어쩌다 한 번씩 그 별미를 즐기러 오는 부류. 아까 남자의 행동을 보아하니 두 번째인 모양이었다. 차라리 첫 번째였으면 피차 편했을 텐데.

“아, 골 아파.”

“오셨어요.”

“어? 어. 안녕.”

해성은 도장으로 들어가며 먼저 나와 청소를 하고 있는 지민과 인사를 나눴다.

하필이면 1층 슈퍼에서 일할 건 또 뭐지? 뒤로 넘어졌는데 코가 깨진 격이었다. 남자와 잔 걸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분이 영 꺼림칙했다.

관장실로 가 패딩을 행거에 걸어 놓은 해성은 얇은 가벽에 직사각형으로 난 창문 밖, 도장을 바라보았다.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한 자신에게 먼저 일자리를 제안해 준 박재관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했다. 그래서 몸을 풀고 싶을 때에도 일부러 두 시간이나 떨어진 곳으로 갔던 건데.

“하아….”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터덜터덜 관장실을 나가는데 덩치가 곰 같은 박재관이 도장으로 들어섰다.

“나해성. 웬일로 일찍 왔냐.”

“저 원래 일찍 일찍 다닙니다.”

“오셨습니까.”

“어, 지민이.”

관장실에서 나오며 툴툴거리는 해성의 어깨를 툭 치며 껄껄 웃은 박재관은 지민에게 손을 흔들고 관장실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해성은 다시 터지려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사실 1층에 있는 슈퍼는 슈퍼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애매했다. 우선 1층 전체를 다 사용할 정도로 큰 규모였고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정육 코너까지 운영했었다. 이름조차도 ‘별 마트’라 도장을 다니는 학부모나 아이들 모두 별 마트, 별 마트 했다.

하지만 해성에게는 그냥 큰 슈퍼였다. 다양한 물건을 싸게 파는 큰 슈퍼.

아무튼 별 마트는 해성이 가르치는 도장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아래층 피아노 학원과 수학 학원, 그리고 그 아래층 영어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과 학원 선생님들의 방앗간이었다.

해성도 출출하거나 바깥 공기를 쐬고 싶을 때면 괜히 별 마트로 내려가서 초콜릿이나 커피, 아이스크림 같은 걸 사 먹고는 했다.

반듯한 미간에 줄이 생겼다.

성가신 일이나 복잡한 일은 딱 질색이었다. 해성은 되도록이면 자신의 삶을 간단하게 유지하고 싶었다. 당연히 인간관계도 포함이었다. 친구나 연인 같은 개념의 관계 역시 지양했다. 외롭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집에 고립되어 혼자만의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돈 벌고 살면 됐지, 이 정도 사회생활이면 된 거 아닌가. 그리고 하루에 아이들과 학부모를 비롯하여 도장 사범들까지 만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수년을 평탄하고 조용히 잘 살고 있었는데.

“하….”

“사랑합니다! 사범님!”

창틀에 기대앉아 한숨을 내쉬던 해성은 우르르 도착한, 제 허리 정도 오는 아이들을 보며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아직 운동 시작도 안 했는데 상기된 동글동글한 얼굴들을 보고 있자니 그래도 웃음이 났다.

오늘 집에 가자마자 뻗게 만들어 줄게, 어린이들아.

하루 종일 도장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괜히 밖에 나갔다가 또 그 남자를 마주치게 될까 봐.

해성은 패딩을 걸쳐 입으며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아르바이트생 같던데 이렇게 오래 근무를 하진 않겠지.

해성은 힐끗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쯤이면 알바생이 퇴근을 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해성은 지퍼를 턱 끝까지 올리며 관장실을 나와 박재관에게 인사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너, 밥은 먹고 다니냐?”

“뭐야. 그거 어디 영화에서 나오는 대사 아니야? 들어 본 거 같은데.”

매트 정리를 하며 잔소리 시동을 거는 박재관에게 해성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살이 또 빠진 거 같아서 그래.”

“형이 뚱뚱한 거야.”

“통통이거든?”

“퉁퉁이겠지. 몰라, 간다.”

“술 먹지 말고 밥 먹어! 너도 이제 삼십 대야!”

해성은 성의 없이 손을 휘휘 젓고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낡은 엘리베이터가 덜컹거리며 아래로 향했다.

여기저기서 주워듣기로는 이 건물의 주인 할머니가 알아주는 땅 부자에, 건물 부자라던데. 엘리베이터 교체나 좀 해 줬으면 좋겠다. 엘리베이터 안 조명도 어두컴컴하고 문이 열고 닫히는 것도 느릿느릿하고. 오래된 것에 비해 화장실도 깔끔하고 건물 관리도 잘 되어 있는데 이 엘리베이터만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며 머리를 한 번 흐트러트린 해성은 역시나 느릿느릿 열리는 문을 보며 짧게 혀를 차고 틈 사이로 빠져나왔다.

“하….”

그리고 건물 현관 맞은편 담벼락에 기대서 있는 인영을 보고 다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를 보며 싱글거리는 얼굴에 입술을 씹던 해성은 유리문을 열고 나가 바로 몸을 틀었다.

“와, 여기 사람 있거든요?”

그랬더니 남자가 뒤를 졸졸 따라왔다. 그러든 말든 해성은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갔다.

“언제 나올지 몰라서 화장실도 못 가고 기다렸는데 너무하는 거 아니야?”

“….”

“그날 잘 들어갔어?”

“….”

“그렇게 도망갈 것까지는 없었잖아.”

“….”

“내가 게이 아니라서 그래?”

혼자 떠들던 남자가 제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이는 말에 해성의 걸음이 뚝 멈췄다. 바투 다가온 남자에게선 시원한 향수 향이 났다.

빤히 올려다보자 남자는 씩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캄캄한 좁은 골목길 위에서 비범한 덩치를 가진 남자가 껄렁하게 웃는 모습은, 그리 호감이 가는 광경은 아니었다. 해성은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티 내지 않고 남자를 향해 차분히 말했다.

“저기요.”

“응.”

“그냥 평생 해 왔던 대로 여자 친구랑 재밌게 사세요.”

“갑자기 왜 존댓말이야?”

“….”

“그리고 나 여자 친구 없는데.”

어쩌라고요, 라는 말이 목까지 치밀었지만 해성은 꾹꾹 안으로 눌러 넣었다.

“여자 친구 있는데 막 다른 사람이랑 자고 그러는 쓰레기는 아니지, 내가.”

“…그러시든지.”

말든지. 작게 중얼거리고 다시 걷기 시작하는 해성을 남자가 집요하게 따라왔다.

“여기 살아?”

“아….”

남자를 무시하는 데 온 신경을 기울이다 보니 집 앞까지 온지도 몰랐다. 무의식적으로 3층짜리 다세대 주택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해성이 침음을 흘렸다.

“나 올라가도 돼?”

해성은 대문을 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남자에게 ‘너 완전 섹스 매너 개똥이야.’라고 하고 싶었지만 주택 안 사람들이 들을까 봐 참아야 했다.

“따라와.”

대신 해성은 대로변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타.”

뒷문을 열고 말하자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올라탔다.

“OO동이요.”

해성의 말에 택시는 해성과 남자가 전에 섹스를 했던 모텔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패딩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시트에 늘어져 응시하는 까만 창 위로,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머리를 괸 채 저를 보고 있는 남자가 비쳤다. 이상하리만치 시선을 잡아끄는 흐릿한 형체에 해성은 눈을 감아 버렸다.

* * *

모텔로 들어가자마자 카운터 앞에 선 해성의 뒤에서 불쑥 손이 내밀어졌다.

“계산은 이걸로요.”

해성은 지갑에서 반쯤 뽑히다 만 카드를 도로 밀어 넣고 직원에게서 키를 받아 엘리베이터로 갔다. 남자는 군말 없이 해성의 뒤만 졸졸 따라왔다.

계단으로 갈 걸 그랬나.

남자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엘리베이터에 탄 해성은 곧 작은 후회를 했다. 남자의 키와 덩치가 쓸데없이 커서 좁은 엘리베이터에 함께 있는 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옆에서 생글거리며 계속 저를 쳐다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직선으로 쏟아지는 시선에도 해성은 고집스럽게 시시각각 변화하는 숫자판만 응시했다. 그래도 학원 건물 엘리베이터보다는 빨라서 다행이었다. 하긴 그 엘리베이터보다 느린 엘리베이터는 대한민국에 없을 거다.

카드 키에 적힌 숫자를 한 번 더 확인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곧 같은 숫자가 적힌 방문 앞에 섰다. 슬쩍 고개를 들자 남자가 보란 듯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모습에서 어린 티가 났다. 입고 있는 패딩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할 정도로 깊은 한숨을 내쉰 해성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게이 섹스가 입맛에 좀 맞았나 봐.”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 침대로 던지고 돌아보자 팔짱을 낀 남자가 벽에 기대서 해성을 보고 있었다.

“너 정도면 알아서 달려들 애들 많을 텐데 뭐 하러 이런 수고를 해?”

“게이 섹스가 아니라 너랑 한 섹스가 마음에 들었다면?”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근데 나는 너랑 계속 섹스할 마음이 없거든.”

“그래?”

“어.”

일자로 다물린 입술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아, 그래서 한 번 더 상대해 줄 테니까 먹고 떨어지라고 데려온 거야?”

“어. 역시 영 멍청하지는 않네.”

남자가 제법 눈치가 빠르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반짝이는 눈에는 총기가 가득했다. 물론 총기만 가득한 건 아니었다. 해성은 남자의 중심으로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대체 뭘 했다고 벌써 발기한 거야?

남자의 왼쪽 허벅지 위가 살짝 부풀어 있었다.

해성은 약간 아연실색했다. 남자와 이 방에 들어와 나눈 것이라고는 짧은 대화가 다였다. 그것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변태인가.

“처음이라 상대 찾는 게 껄끄러운 모양인데 대부분 입 무거운 편이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게이들이라고 다 나 게이다, 떠벌리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무작정 들러붙어서 귀찮게 하는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야. 너 정도면 그냥 전에 나 만났던 클럽에 앉아만 있어도 알아서 다가올 거야. 그중 마음에 드는 사람 골라서 적당히 즐기면 돼.”

기본적으로 헤테로들은 게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오히려 무시하고 뻗대다가 자존심이 상한 남자가 원치 않는 돌발 행동을 할 수도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그런 유형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고 조용히 넘어갈 수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게 좋았다. 괜히 성가신 일을 만드느니 한 번 정도는 더 상대해 주는 것이 나았다. 남자도 저와의 우연한 재회가 아니었다면 그날 일은 이미 잊고도 남았을 거다. 어차피 한때의 일탈, 호기심에 불과한 행동에 자극을 더할 필요는 없었다.

“너처럼?”

“….”

“너도 그때 마음에 드는 사람 기다리고 있었던 거잖아. 그리고 나 마음에 들어서 같이 나간 거고.”

“정확하게는 네 껍데기가 마음에 들었던 거지.”

해성의 말에 남자는 씩, 웃으며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웃는 뺨 위로 인디언 보조개가 나타났다.

“껍데기는 마음에 드셨다?”

“응.”

“근데 왜 나랑 섹스하기는 싫다는 거야?”

“너랑 한 섹스가 별로였으니까?”

“거짓말.”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제 말을 부정하는 남자 때문에 해성은 웃음이 났다. 당연히 헛웃음이었다.

“뭐,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너랑 한 섹스, 재미없었고 만족스럽지도 않았어. 그러니까.”

“너 그날 몇 번 쌌는지는 기억해? 내가 안쪽 찔러 주니까 눈물 줄줄 흘리면서 정액도 줄줄 쌌어. 나중에는 멀건 물만 맥없이 쏘아 댔고. 내가 좆 빼내려고 하면 쥐어뜯듯이 조이고 매달리면서 계속 박아 달라고 애원했으면서.”

“…내가 섹스할 때 원래 그래.”

실실 웃는 낯으로 하는 말은 제법 신랄했지만 해성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거지 같은 섹스 할 때도 좋다고 매달리고, 질질 싸고 그런다고. 그러니까 네가 잘한 거라는 착각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

“아무튼 오늘 봤다시피, 그 건물에 내 직장 있고 그 근처에 내 집 있어.”

내내 무감하게 남자를 바라보던 해성이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들어 올렸다.

“슈퍼에서 잠깐 알바하는 너 때문에 내가 일을 그만두거나 이사를 가는 건 좀, 말이 안 되잖아?”

“….”

“그러니까 나랑은 오늘로 끝내.”

“시작도.”

무어라 중얼거린 남자가 순식간에 해성의 앞으로 다가왔다.

“안 했는데 뭘 자꾸 끝내자는 거야.”

이어 허리를 감싸 안고 입술을 부딪쳤다. 반사적으로 남자를 밀어 내려던 해성은 옆으로 쭉 뻗은 어깨를 잡고 있던 손으로 잔뜩 힘이 들어간 목을 끌어안았다. 그날도 느꼈지만 남자는 키스를 잘했다. 그리고 많이 했다. 섹스를 하다가도 키스했고 사정을 하면서도 입술을 물고 빨았다. 하룻밤 상대에게 이렇게 키스를 받는 일은 꽤 드문 일이었다.

입 안으로 굴러들어 온 혀가 순간 움찔거리며 물러나는 혀를 낚아챘다. 남자의 손이 도복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 속으로 기어들어 왔다. 이번에는 얕게 팬 등 대신 날갯죽지 쪽을 손바닥으로 어루만졌다. 뜨거운 손바닥의 열기가 피부로 옮겨 와 해성까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풀썩, 침대 위로 넘어졌다. 그 순간에도 남자는 해성의 머리를 감싸고 입술을 깊게 찍어 눌렀다. 뾰족해진 혀가 입천장을 긁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해성은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남자의 입술이 뺨을 긋듯이 미끄러졌다.

“하아… 하….”

고작 키스 하나에 숨이 급해졌다.

“분명히, 말할게.”

“뭘?”

남자는 해성의 기다란 목을 가리고 있는 파스를 응시하며 모르는 척 되물었다. 그 목을 가볍게 움켜쥔 남자가 엄지로 파스 위를 쓸며 눈을 맞춰 왔다.

“오늘이 끝이야.”

내내 실없는 웃음을 매달고 있던 남자의 눈이 까맣게 가라앉았다. 목에 들러붙은 파스가 아주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남자는 시선만 내려 아직 그날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은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그놈의 끝이라는 소리.”

“싫으면 비키든가.”

“….”

“그거 아니면 너랑 또 잘 일 없어… 읏.”

“이러고 나가겠다고?”

남자가 무릎으로 해성의 중심을 뭉근하게 문질렀다.

“밖에 나가면 변태 새끼들이 아주 환장해서 달려들겠는데?”

“너는, 하, 아닌 것처럼 말하네?”

“아, 들켰다.”

습관처럼 입매를 위로 당긴 남자의 얼굴에서는 그다지 여유가 느껴지지 않았다.

“너, 지금 나한테 박고 싶잖아. 그러니까, 오늘 네 좆 꼴리는 대로 처박고 끝내자고. 읏!”

남자는 별안간 벌건 울혈을 콱, 깨물었다.

“야!”

이제 좀 흐려지나 하던 참이었는데!

여유로운 척하던 해성은 저도 모르게 꽥,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목덜미에 고개를 처박은 남자가 어깨를 떨며 웃었다. 실실거리면서도 손은 재빠르게 판판한 가슴을 거머쥔다. 엄지로 톡, 튀어나온 작은 젖꼭지를 이리저리 굴리며 혀로 목덜미를 핥은 남자는 상체를 세우고 패딩을 벗어 침대 위, 해성의 것과 함께 바닥으로 내던졌다. 이어 후드티까지 탈의하고는 버클을 풀었다.

“얼굴 믿고 너무 이기적이야.”

“싫으면 꺼지라고 했어.”

“나한테도 기회를 줘야지.”

“좆 까.”

좆 까라는 말에 드로즈를 끌어 내린 남자가 퉁, 튀어 오른 성기를 내밀며 눈썹을 까닥였다.

“말 잘 듣지?”

“하. 이거 완전 꼴통 새끼네.”

“섹스가 별로라니. 내 평생 그런 모욕은 처음이야.”

상체를 둥글게 말고 한쪽 팔꿈치를 해성의 귀 옆에 댄 남자가 다른 손을 도복 바지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으….”

“안은 이렇게 다 적셔 놓고. 설마 벌써 싼 건 아니지? 그것도 귀엽긴 한데.”

“닥…쳐라.”

아까부터 감질나게 무릎으로 성기를 쳐 대는 남자 때문에 쿠퍼액이 흘러 속옷 안이 끈적했다. 남자는 성기를 쥔 손을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적당히 압박을 가해 왔다. 해성은 두 손으로 남자의 손목을 잡고 눈을 찡그렸다.

“시발, 존나 섹시하네.”

남자가 해성의 도복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끌어 내렸다. 늘씬한 하얀 다리가 허공에서 흔들렸다. 한쪽 발목을 잡아 제 어깨에 걸친 남자가 손에 속도를 더하기 시작했다. 찌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빨간 입술 사이에서 밭은 숨이 터져 나왔다. 남자가 해성의 허리를 두른 검은 띠를 풀어내자 해성이 도복과 티셔츠를 목까지 들어 올렸다.

“아…. 하… 하으, 읏!”

성마른 손이 귀두를 터트릴 듯이 조이자 늘씬한 허리가 위로 튀어 올랐다. 동시에 정액이 후드득, 들썩이는 가슴과 복부 위로 흩뿌려졌다. 어딘지 멍한 눈으로 해성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이게, 눈앞에서 사라지질 않는단 말이지.”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남자를 무시하고 해성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네가… 하… 뭘 어쩌든…. 나는 오늘로 끝이야….”

“그래. 넌 끝 해. 난 시작할 테니까.”

기어코 도복 상의와 티셔츠까지 벗겨 낸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젖꼭지에 달려들었다. 무슨 원한이라도 맺힌 사람처럼 밋밋한 가슴을 물고 빨고 씹고 짓이기던 남자가 피부 위에 입술을 찍으며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너, 뭐 하는…!”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한 해성은 불안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성기 바로 위 아랫배를 강하게 흡입한 남자는 해성을 향해 시선을 들고 입을 벌렸다.

“아…!”

성기가 빨려 들어가듯 남자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후들거리던 팔꿈치가 힘을 잃으며 등이 침대 위에 닿았다. 단숨에 뿌리까지 머금은 남자는 목구멍으로 성기를 조이며 압박했다. 처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숙했다. 남자의 어깨를 짚은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땀이 밴 손안에서 시트가 엉망으로 구겨졌다. 방금 전 사정을 했음에도 성기는 퍼부어지는 자극을 어쩌지 못해 다시 발기해 꿈틀거렸다. 남자가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자 허리가 절로 튕겨졌다.

“하읏! 으… 아, 읏!”

정돈되지 않은 신음을 두서없이 내지르던 해성은 결국 굴복하듯 사정해야 했다. 몰아치듯 연달아 정액을 쏟아 내고 축 늘어진 해성을 올려다보며 남자는 목구멍을 타고 들어오는 정액을 남김없이 삼켰다. 그러고는 느릿느릿 성기를 뱉어 내고 허벅지 안쪽을 빨아들여 자국을 만든 후 위로 기어 올라왔다.

“더 좋아 죽게 해 줄 테니까, 정신 좀 차려 봐.”

간신히 숨을 가다듬고 눈을 뜨자 입만 웃고 있는 자신만만한 얼굴이 보였다.

“…누가 정신을 잃어?”

“그래? 그러면 계속 잃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려.”

“그냥, 빨리 박고 흔들고 싸고 꺼지라고.”

“과격한 게.”

남자의 음습한 눈이 진득하게 해성을 훑었다.

“굉장히 섹시해.”

남자는 보기보다 더 미친놈인 것 같았다. 말귀를 알아들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 실수였나. 아니다. 그날 클럽에서 남자와 나간 것이, 아니, 헤테로인 걸 알았을 때 바로 모텔에서 뛰쳐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 애초에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고 충동적으로 클럽에 갔던 것이. …시발.

“아! 야!”

이로 입술을 짓이기며 후회로 점철된 지난날을 회상하던 해성이 인상을 쓰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해성의 고환을 쥐고 손에서 굴리던 남자가 검지와 중지로 회음부를 세게 긁어내린 탓이었다.

“읏!”

미끄러진 손가락은 당연하다는 듯이 구멍 안을 쑤시고 들어왔다. 검지와 중지를 한 번에 찔러 넣은 남자는 내벽을 누르며 추삽질을 해 댔다. 좆만큼 손가락도 길고 두꺼워서 고작 손가락 두 개에 내벽이 꽉 찼다.

“하아… 손가락 물어뜯는 것만으로도 쌀 거 같아.”

남자가 새빨개진 귓바퀴를 빨며 귓가에 숨을 불어넣었다.

“너, 좆질까지 해 놓고, 으, 딴말하면, 죽인다.”

“지금도, 죽여 주고 있는데?”

“이, 미친, 새끼… 하읏!”

사실 남자와의 첫 섹스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 남자가 처음인 헤테로 중에는 본 게임에서 상대에게 같은 게 달린 걸 보며 대놓고 역겨워하거나 경멸하는 눈으로 엎어 놓고 허리만 흔드는 놈들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제법 신사적으로 해성을 대했다. 심지어 낯간지러운 키스를 하며 목과 가슴을 애무하기도 했다. 마치 이전에 이성과 섹스를 할 때 했을 것처럼. 옷을 벗어 던지고 한 5분 정도까지만.

본격적으로 분위기가 고조되고 행위에 몰두하자 남자는 눈이 돌아서 달려들었다. 남자의 범상치 않은 성기를 보고 기겁해 팔꿈치로 침대를 밀며 뒤로 도망치자 발목을 잡아 가볍게 제 쪽으로 당겼다. 질질 끌려가던 해성이 어디에 박아야 하는 줄은 아냐고 묻자 엉덩이 살을 벌려 구멍을 찾아내고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절대, 절대로 그건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발버둥 치는 해성을 품에 가둔 남자는 기어코 꾸역꾸역 성기를 뿌리까지 욱여넣고 무식하게 박아 댔다.

그래, 그때 이미 미친놈인 걸 알았는데. 그 미친놈에게 회유와 설득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왜 몰랐을까.

“자꾸 사람 자존심 상하게 하네.”

남자가 어리광을 부리듯 해성의 목덜미에 이마를 문질렀다.

“왜 나 앞에 두고 딴생각해? 설마.”

안에서 손가락이 단번에 뽑혔다. 일부러 그런 건지 모르고 그런 건지,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내벽을 자극하는 바람에 해성은 몸을 떨어야 했다.

“만나는 사람이 있거나 그런 거야? 그래서 나한테 여자 친구 어쩌고 한 건가?”

“야, 야!”

어딘지 푹 꺼진 음성으로 중얼거린 남자가 무작정 귀두를 처박았다. 두툼한 귀두가 뻑뻑한 구멍을 빠듯하게 벌리며 들어찼다. 일순 엄습한 고통에 해성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보아하니 경험도 꽤 있는 것 같은 놈이 한 톨의 여유도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고통으로 숨만 색색 내쉬는 해성을 보던 남자가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로 손을 뻗어 비치된 젤을 집어 들고 결합된 부위에 쭉 짜냈다. 그래 봤자 다 겉으로 흘러내려 별다른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하…. 그냥, 해. 새끼야….”

“있어?”

“뭐가….”

“있어도 상관없어.”

“닥치고 그냥….”

“너 같은 남자, 이렇게 방치하는 거 보면 별 볼 일 없는 새끼인 거 분명하니까.”

남자가 힘으로 성기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잘게 경련하던 허리가 크게 휘어졌다. 해성은 저도 모르게 남자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아…파.”

남자의 좆같은 좆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커서 해성은 답지 않게 엄살을 부리듯 중얼거렸다.

“미안, 조금만 참아 봐.”

“좋아… 죽게 해 준다더니. 이 시발놈이….”

해성이 부들거리며 말을 씹어 뱉자 남자가 목을 울리며 웃었다.

“섹시한데 귀엽기까지 해.”

“입…다물어… 으!”

남자가 허리를 거세게 튕겨 해성이 느끼는 부위를 찍어 눌렀다. 허벅지 근육이 팽창하고 아랫배가 수축하며 내벽이 오그라들었다. 남자에게 강약 조절이란 없었다. 남자는 해성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그리고 거칠게 허리를 치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해성의 머리를 감싼 채 개처럼 목을 핥고, 밭은 숨을 내쉬느라 바쁜 입술 사이를 혀로 헤집었다.

고통이 휘발되는 것은 순식간이었고 그 자리는 빠르게 강렬한 쾌감으로 메워졌다. 남자의 성기가 워낙에 커서 뿌리까지 처박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벽이 죄다 눌려 등줄기가 저릿했다. 그 상태로 한 부위를 귀두로 찍어 대는 통에 눈앞에서 별이 번쩍였다.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안달 난 신음이 듣기 싫어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정작 손은 남자의 등에 손자국을 남기느라 바빴다. 남자가 시선을 내려 두 복부 사이에 갇힌 해성의 성기를 바라보았다.

“남의 좆 보고, 꼴릴 줄은, 몰랐는데.”

“그냥, 계속, 모르고 살아…!”

“그럴 순 없지.”

남자는 호흡이 엉켜 헉헉거리면서도 지지 않고 말을 받아치는 해성을 보며 피식 웃고는 한 손으로 품 안의 몸을 들어 올렸다. 탄탄한 허벅지 위에 앉혀지자 성기가 더욱 깊숙이 안을 찔렀다. 뒤로 넘어가려는 해성을 자신에게 기대게 한 남자가 퍽퍽, 허리를 쳐올렸다.

전신을 휘도는 쾌감에 해성은 이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할 지경이었다. 남자가 땀에 젖은 새까만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얽고 두피를 어루만지다가 뒤로 당겼다. 남자의 어깨에 뺨을 비비고 있던 해성이 미약한 고통에 새침한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표정 따위는 말끔히 지워 낸 얼굴이 조급해 보였다. 이런 어린애한테 휘둘리다니.

잔뜩 허세를 부려 보았지만 조급한 건 해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을 채운 체액이 성기의 움직임에 따라 밖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난폭하게 안을 찧어 대던 남자가 마른 등을 어루만지다가 손을 내려 발기한 채 흔들리고 있는 해성의 성기를 거머쥐었다. 기둥을 둥글게 쓸어 올리는 손길에 부푼 귀두에서 정액이 터졌다. 동시에 강하게 허리를 추어올린 남자 역시 사정했다.

“너…. 하… 또 안에다가.”

남자는 허물어지는 해성을 받아 눕히고 얼굴 곳곳에 키스를 퍼부으며 웅얼거렸다.

“미안, 미안. 이따가 빼 줄 테니까.”

“뭘….”

“안에 싼 거. 그거 손으로 직접 긁어서 빼 줘야 한다며.”

해성이 남자의 어깨를 밀어 냈다. 그러자 순순히 밀려난 남자가 입술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날 도망친 거야? 내 섹스 매너가 개판이라?”

“….”

“처음인데 그 정도 실수는 봐줘야지. 아량을 좀 베풀어 봐.”

가만히 남자를 바라보던 해성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쌌으면 비켜.”

해성이 저를 옭아매고 있는 몸을 벗어나려고 용을 써 보았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야, 이거 진짜 미친놈 아냐?”

남자는 버둥거리는 해성을 옭아매듯 안고 빤히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멍멍 한번 해 볼래?”

“….”

“강아지 같아서 그래.”

그렇게 말한 남자는 허리를 뒤로 빼 어느새 발기한 성기를 반쯤 빼냈다.

“이, 미친…!”

헛소리에 열을 낼 새도 없이 퍽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성기가 다시 처박혔다.

기어코 세 번을 연거푸 사정한 남자는 성기를 빼지 않고 뭉개다가 해성의 힘없는 주먹질에 엄살을 부리며 허리를 뒤로 물렸다. 그러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체액을 집요하게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집어넣고 안을 긁어냈다. 꺼지라며 질색을 하는 해성을 몸으로 찍어 누르고는 제법 착실하게 손을 움직였다.

“갑자기 왜 이러는데? 그냥, 두고 샤워나 처하러 가.”

“몰라서 그랬다니까, 몰라서.”

“모르긴 개뿔. 섹스할 때 콘돔은 기본인 거 몰라? 남자라서 그냥 막 안에 싸질러도 된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야!”

늘어져 주절주절 섹스의 기본 예절에 대해 설명하던 해성은 눈을 치뜨고 자신의 엉덩이를 깨문 남자를 바라보았다.

“엉덩이도 존나 이뻐. 운동 전공이야? 그래서 그런가?”

남자와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해성은 비적비적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씻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모텔을 나갈 필요는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고. 혹시 몰라 욕실 문을 잠그고 싶었는데 용도가 분명한 모텔 욕실에 잠금장치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물만 끼얹다시피 해서 신속하게 샤워를 끝낸 해성은 욕실을 나와 덜 마른 몸에 옷을 껴입었다.

“앞으로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었으면 합니다. 부탁 좀 드릴게요. 네?”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저를 보며 싱글거리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해성은 이번에도 혼자 모텔을 빠져나왔다. 섹스가 만족스러웠던 건지 다행히 남자는 해성을 따라 나오지 않았다.

어두운 모텔촌, 은밀하게 북적이는 골목을 걷던 해성은 등을 돌려 왔던 길 위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평소와 다름없는 출근길에 약간의 긴장감이 깔렸다. 살짝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모퉁이를 돈 해성은 한산한 슈퍼 앞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게까지 말했으면 알아들은 척이라도 하겠지. 피차 오다가다 마주치는 건 피할 수 없을 텐데 그럴 때마다 어색하고 불편할 필요는 없으니까.

달달한 커피나 하나 사서 도장으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당분간 별 마트 방문은 자제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되도록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다 보면.

“커피 한잔할래?”

“악!”

한 손은 패딩 주머니에 꽂고 다른 한 손으로는 뺨을 긁적이던 해성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펄쩍 뛰어올랐다.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자 자신의 어깨까지 오는 빗자루를 들고 선 남자가 쭉, 입술을 위로 당기며 말했다.

“믹스 죽이는 거 들어왔는데.”

커다란 눈만 끔뻑끔뻑하던 해성은 삐거덕거리며 남자를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 *

도장 문이 열릴 때마다 해성의 고개가 휙휙 돌아갔다. 해성은 등허리를 빳빳하게 세우고서 날카로운 눈초리로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도장 입구를 쏘아보았다. 혹시라도 남자가 도장으로 찾아올까 봐서였다. 수업을 하다가도, 잠깐 쉬고 있을 때에도 해성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뜻하지 않게 벌써 두 번이나 겪어 본 남자는 상식적인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도 아주 농후했다.

수업도 하고, 중간중간 도장을 찾은 학부모들과 상담도 하고 그러면서도 내내 1층 별 마트에 있는 남자를 신경 쓰느라 하루가 끝날 때쯤에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차라리 운동장에서 뺑이 치는 게 낫지, 정신력을 소모하는 것이 해성에게는 더 곤욕이었다.

계속 이렇게 지내야 하는 건 아니겠지?

터덜터덜 관장실로 들어간 해성은 어깨를 늘어트리고 힘없이 패딩에 팔을 끼워 넣었다.

“피곤해….”

“나해성이 피곤하다는 말을 다 해?”

“나도 나이 들었나 보지, 뭐.”

“인마, 형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어.”

팔짱을 끼고 관장실 문을 막고 선 박재관이 팍, 인상을 썼다. 저러고 있으니 겨울철 산속에 먹이가 없어서 도시로 탈주한 불곰이 따로 없었다.

“뭐래. 그래 봤자 형이랑 나랑 세 살밖에 차이 안 나거든?”

“하, 이 쪼끄만 게 이제 막 덤비네.”

자신이 쪼그만 게 아니라 박재관이 지나치게 큰 거였다. 그러고 보니 별 마트 알바생도 키가 이 정도 됐었다. 쓸데없이 키만 커서는.

해성은 황급히 머리를 털어 눈앞에 떠오른 실실거리는 낯짝을 날려 보냈다.

“비켜. 갈 거야.”

해성이 다가가자 박재관이 몸을 틀어 길을 터 주었다.

“조만간 지민이 데리고 회식 한번 하자.”

“뭔 회식이야.”

“그 핑계로 너 고기 좀 멕여야겠다.”

“웃기네. 형이 먹고 싶어서 그런 거면서.”

“그래! 내가 먹고 싶어서 그러니까 회식 날 어디 토낄 생각하지 말고!”

“형이나 무리하지 말고 빨리 집에 가. 형도 이제 삼십 대 중반이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간다.”

또 도장에 혼자 남아 운동을 하려는 박재관에게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박재관이 곧장 발끈했다. 해성은 그런 박재관을 지나쳐 도장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탈까 하다가 그냥 계단으로 갔다. 센서 등이 혜성을 졸졸 따라왔다. 1층으로 내려와 건물 현관으로 가려던 해성은 잠시 멈칫했다.

설마….

어제처럼 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해서 조심스레 입구를 쳐다보았는데 다행히 유리문 밖은 비어 있었다.

하긴 멀쩡한 헤테로가 게이인 자신에게 계속 집착할 이유는 없었다. 굳이 뭐 하러. 어제는 하지 말라니까 자존심에 오기를 부린 것 같은데 그런 것도 다 한때였다.

“후….”

해성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털레털레 건물을 빠져나가는 걸음이 가벼웠다.

“읏, 추워.”

하지만 겨울바람은 매서웠다. 해성은 화급히 패딩 지퍼를 턱 끝까지 채우고 작지만 아늑한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 * *

“나해서어어엉.”

오늘도 어김없이 같은 시간, 같은 곳으로 향하던 해성은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눈가를 구겼다.

“빨리빨리 좀 다녀라. 관장이라는 사람이.”

“은행 갔다 오느라 그런 거거든? 네 월급 주려면 정기적으로 은행이라는 곳을 방문해야 한단다.”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그런 거라면 얘기가 다르지.

해성은 패딩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 모으고 공손히 인사했다.

“오냐.”

“그럼 오늘도 지민이가 1등이네.”

“어린놈이 아주 성실해.”

“맞아. 누구랑 다르게.”

“씁. 까분다.”

“길 미끄럽다. 조심해라. 형 나이에는 뼈도 잘 안 붙는다.”

“너랑 나랑 세 살밖에 차이 안 나거든!”

어제 해성이 했던 말을 똑같이 쏘아붙이며 콧김을 뿜던 박재관이 도장 건물로 들어가려는 해성을 잡아끌었다.

“뭐, 왜?”

“별 마트 잠깐 들르자.”

“뭐? 싫어!”

별 마트라는 말에 해성이 펄쩍 뛰었다.

“애들 간식 떨어져서 그래. 이따 지민이 먹을 것도 좀 사고.”

“아, 혼자 가.”

“무거워.”

“뭐래?”

박재관은 어이없어하는 해성을 가뿐히 무시하고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려 앞으로 쭉쭉 밀었다.

“아, 진짜!”

굶주린 불곰을 힘으로 이기기는 힘들었다. 해성은 내동댕이쳐지듯 별 마트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십니까!”

손님을 맞는 인사에 활기차게 답한 박재관은 곧장 젤리와 초콜릿이 있는 진열대로 갔다.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해성은 진열대 사이로 사라진 박재관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설마 박재관이 있는 데서 아는 척을 하지는 않겠지. 그러면 박재관은 또 어떻게 아는 사이냐며 해맑게 캐물을 것이 뻔했다. 그러면 귀찮아지는데.

입술을 깨물고 있던 해성은 저도 모르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가 빙싯거리며 저를 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해성아! 나해성!”

그때 안쪽에서 저를 찾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남자는 이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남자에게 아직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었다.

박재관. 저 곰탱이를 진짜.

해성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번에 애들이 잘 먹던 게 이거 맞지?”

대용량 초콜릿 봉지에 코를 박을 듯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댄 박재관이 심각하게 물었다.

“…맞아.”

“오케이.”

박재관은 품 안 가득 초콜릿 봉지를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한숨을 폭 내쉰 해성은 박재관이 떨어트린 봉지를 집어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아이고. 어머님들이 말씀하신 새로 온 알바생이신가 보다.”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났어요?”

“그럼요! 별 마트가 환해졌다고 아주 좋아들 하십니다.”

“제 덕에 많이 환해지긴 했죠.”

박재관의 말에 남자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으하하아! 성격도 좋으셔, 아주!”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꼴을 지켜보던 해성은 살짝 옆으로 물러났다.

“수고하십쇼!”

박재관은 남자가 계산을 마치기도 전에 비닐봉지를 챙겨 들었다. 그러고는 해성에게 카드를 받아 오라 말하고 저 혼자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사이 다른 손님들이 카운터 앞에 줄을 서 남자는 순순히 해성에게 카드를 건네준 후 담배를 찾는 손님에게 인사했다.

엉겁결에 카드를 받아 든 해성은 능숙하게 손님을 맞는 남자를 한 번 힐끗 보고는 별 마트를 나왔다.

괜히 과하게 반응했던 건가.

쌓아 올린 매트 위에 앉아 믹스 커피를 마시던 해성은 허공을 응시하며 눈가를 좁혔다. 별 마트 앞에서 다시 만났을 때 아는 척을 하면서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에 강한 수를 써서 남자를 끊어 버리려고 했던 건데, 요 며칠 남자의 행동을 보자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을 것 같았다. 남자는 도장을 찾아오지도, 더 이상 해성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냥… 무시할걸.

참고 조금만 더 상황을 두고 보았으면 알아서 해결될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살짝 후회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뭐, 이 정도 선에서 잘 정리된 것 같았다. 매트에서 내려온 해성은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지고 쭉, 기지개를 켰다.

당분간은 클럽도 가지 말고, 술도 마시지 말아야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된다.

“사랑합니다, 사범님!”

다시 한번 자신의 신조를 마음에 되새기던 해성이 힘겹게 도장 문을 열고 들어와 씩씩하게 인사하는 작은 아이를 보며 몸을 바로 세웠다.

“어? 시율아.”

“사범님!”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아직 첫 수업까지 두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오늘 지민이 볼일이 있다고 해서 해성이 먼저 나와 조금 일찍 문을 열어 둔 참이었다.

“오늘 할머니 병원 가셔서, 혼자 집에 있는데 심심해서 빨리 왔습니다!”

제 발목까지 오는 패딩을 걸친 시율은 한 손에 조립형 로봇을 들고 해성에게 달려와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웃었다.

“사범님.”

찬 공기에 달아오른 통통한 빨간 뺨과 도복 안에 껴입은 구름이 그려진 내복을 보자 해성도 웃음이 났다.

“그래. 잘 왔다.”

시율은 맞벌이하는 부모님 때문에 낮에는 할머니가 육아를 책임지고 계셨다. 시율의 아빠는 일 때문에 지방에서 지내고 있는데 고사리 같은 손에 들린 저 로봇이 저번에 시율의 아빠가 집에 왔을 때 직접 조립해 준 시율의 보물이었다.

해성은 관장실 창문을 통해 매트 위에 앉아 로봇을 가지고 놀고 있는 시율을 보며 휴대폰 너머 걱정과 미안함이 가득한 목소리를 안심시켰다.

“아닙니다. 시율이 없어져서 걱정하실까 봐 전화드린 거예요. 네, 네. 걱정 마세요, 할머님. 제가 잘 데리고 있다가 운동도 열심히 시키고 영어 학원으로 내려보내겠습니다. 네. 네. 들어가십시오. 네.”

통화를 마친 해성은 도장 휴대폰에 충전기를 꽂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관장실을 나가 시율의 앞에 앉았다.

“이시율.”

“네, 사범님!”

“할머니한테 말하고 나왔어, 안 하고 나왔어?”

“쪽지 썼습니다!”

“쪽지?”

“네! 메모지에 태권도 간다고 써서 식탁에 두고 왔어요!”

“잘했군.”

“네!”

“밥은.”

“….”

“어허. 체력은?”

“국력이다!”

“체력은 어디서?”

“…밥에서….”

해성이 일부러 엄한 눈으로 바라보자 시율이 로봇을 쥔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일어나.”

“사범님….”

그러다 벌떡 일어나는 해성을 보고는 금세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시율.”

“네에….”

그러면서도 주춤주춤 일어섰다.

“오늘은 밥 대신 빵이다.”

“네에…?”

“대신 오늘만이야, 알았지?”

“네!”

해성이 장난스럽게 웃자 시율도 방긋 웃었다.

그래, 뭐. 여기서 일하는 동안 별 마트를 아예 안 갈 수는 없었다. 별 마트란 이 건물, 아니 이 동네 유일한 마트가 아니던가. 어차피 남자도 이제 흥미를 잃은 것 같은데 저 혼자 굳이 불편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해성은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작은 손을 잡고 비장하게 별 마트 간판을 올려다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하지만 나름의 각오가 무색하게 카운터에 있는 사람은 남자가 아니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뭐야… 오버했네.

“사범님! 이거 먹어도 됩니까?”

조금 머쓱해서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해성은 카운터 옆 빵 진열대에서 초코빵을 골라 들고 저를 보는 시율에게 다가갔다.

“이거 먹을 거면 우유는 흰 우유 먹어야 된다.”

“…네에….”

입술 삐죽거려도 안 봐준다, 어린이야.

계산을 마치고 나오다가 입구에 세워진 기다란 빗자루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이거 지난번에 그 남자가 쓸던 빗자루 아닌가? 아니, 이렇게 긴 빗자루도 판단 말이야?

미간을 좁힌 해성이 비범한 길이의 빗자루를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으… 으아아아앙!”

갑자기 들려온 울음소리에 해성의 고개가 돌아갔다.

“시율아!”

한 손에 초코빵을 달랑달랑 들고 가게를 뛰쳐나간 시율이 별 마트 맞은편에 주차된 차 옆에 대자로 엎어져 있었다.

“사… 흐읍…. 사버엄…니흐음….”

“괜찮아, 괜찮아.”

“흐응… 음… 흐엉….”

해성은 눈길에 무릎을 꿇고 앉아 조심스럽게 시율을 일으켜 세워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얼굴은 다치지 않았는데 손바닥이 까져 피가 났다. 초코빵이 저 멀리 날아갔지만 그 순간에도 시율은 로봇을 꼭 쥐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시율 어린이.”

“네에…. 흐어… 으… 네에….”

아무래도 녹은 눈을 밟고 미끄러진 모양이었다.

“도장 가서 약 바르고….”

눈과 흙으로 지저분한 패딩과 도복을 털어 주던 해성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약을… 바르고….”

그리고 시율의 뒤로 향한 눈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약을….”

아니, 왜 이런 차가 이 골목에…. 그리고 왜 차 문짝에 저런… 저… 저… 스크래치가…?

수억 원대의 SUV가 왜 별 마트 앞에 있으며, 그 차 문짝에 왜.

불안한 시선이 시율의 로봇에 묻은 검은 페인트 자국 위로 떨어졌다. 입을 벌리고 망연히 로봇을 보고 있던 해성의 곁에 누군가가 다가와 쭈그리고 앉았다.

“이야…. 이거 기스 제대로 났네? 그쵸, 나해성 씨?”

훅 끼쳐 드는 청량한 향에 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생글거리며 해성을 보고 있었다.

* * *

“네 차야?”

당황한 해성의 입에서 대뜸 말이 튀어 나갔다.

“응.”

좆 됐다.

시원하게 답하는 남자를 보며 입술 안쪽을 이로 씹던 해성은 별안간 상박이 붙들려 일으켜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흠칫 몸을 떨며 쳐다보자 남자가 턱으로 해성의 젖은 무릎을 가리켰다.

“무릎 나가겠다. 운동하는 사람은 몸이 생명, 뭐 그렇지 않아?”

“…됐고.”

해성은 팔을 돌려 남자의 손을 털어 냈다.

“너….”

“응.”

“부자구나….”

예상치 못한 상황을 연달아 맞이해서 그런가 자꾸 멍청한 소리가 나왔다. 이렇게 또 이 남자와 엮이게 되다니.

“응.”

“…그래. 그… 어쨌든 죄송하게 됐습니다.”

반말을 했다가, 존댓말을 했다가, 엉망인 해성의 사과에도 남자는 실실 웃으며 해성만 바라보았다.

“수리비가…. 그, 견적을… 내야 할…. 도색도…. 하.”

정돈되지 않은 말을 되는대로 내뱉던 해성은 거칠게 뒷머리를 흐트러트리고는 시선을 들었다.

“견적 나오면 도장으로 연락 줘.”

이미 엎어진 물,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율을 도장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흐윽…. 흐… 사범니임….”

오가는 대화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로봇을 끌어안은 시율이 해성의 패딩 끄트머리를 잡은 채 훌쩍거렸다. 해성은 허리를 숙여 시율과 눈을 맞추고 손등으로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을 닦아 준 후 살살 시율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 시율아, 가자.”

“네에….”

“흐음, 이거 꽤 심하게 긁혔는데.”

일부러 저 들으라고 하는 듯한 말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차 문을 살피고 있는 남자 쪽으로 은근슬쩍 눈동자가 굴러갔다.

“…문짝 갈아야 하는 건 아닌가 몰라? 응? 수리하는 동안 대차도 받아야 할 거 같은데…. 이를 어쩌면 좋아….”

해성은 팔짱을 끼고 한껏 심각한 척을 하는 남자에게서 억지로 몸을 돌리고 천근만근인 발을 옮겼다.

정작 진짜 심각한 건 해성이었다. 해성은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휴대폰으로 남자의 차를 찾아보고는 기함했다. 비싼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러다 정말 자신의 작고 소중한 적금마저 깨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몰랐다.

아냐, 그래. 보험, 보험이 있잖아. 보험 처리를 하라고 하고. 잠깐 이런 경우에도 보험 처리가 되나?

“사범니임….”

한 줄기 희망을 품고 차량 보험에 대해 검색하던 해성은 저를 부르는 작은 목소리에 시선을 내렸다.

“응, 시율아. 어디 아파?”

“아닙, 흐응, 니다.”

“그래. 씩씩하다.”

“네에…. 그런데 아까, 그 형아랑 친구입니까?”

“…아니.”

“그러면은 왜 그 형아한테 반말합니까?”

“…그게….”

예의범절을 기본으로 하는 스포츠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차마 모르는 사람에게 너, 너 거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어린 제자 앞에서.

“…그냥, 아는 사이야.”

“네에…. 아는 동생….”

아니, 그건 아니고.

해성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바닥으로 눈가를 비비는 시율을 착잡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손으로 눈 비비지 말고.”

“네에….”

잔소리도 잊지 않으면서.

도장으로 올라오니 박재관이 와 있었다. 해성은 박재관에게 대강 상황을 설명한 후 시율의 치료를 맡기고 관장실로 들어갔다. 휴대폰에서 충전기 선을 빼내고 통화 목록 제일 위에 있는 이름을 터치한 해성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아이들에게 운동을 가르치다 보면 크고 작은 부상이 생기곤 했지만 오늘은 유독 마음이 무거웠다.

몇 번의 신호음 후, ‘네, 사범님.’ 하는 반가움과 걱정이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네. 할머님. 저 여기 푸름 태권도장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해성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시율의 할머니는 깜짝 놀라 아이 걱정을 하다가 곧 사과를 해 왔다. 그리고 이어 자신이 아이를 일찍 보내서 그렇게 됐다며 자책했다. 해성이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아니에요, 할머님. 제가 잘 돌봤어야 하는데. 그래도 시율이 많이 다치지 않았으니까 너무 걱정 마시구요. 네, 시율이가 영어 학원도 갈 수 있다고 하네요. 네, 아닙니다. 제가 죄송하죠. 죄송합니다. 네, 네.”

서로 죄송하다고 말하다가 통화가 끝났다. 해성은 차가운 손으로 제 뺨을 쓸었다. 차라리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애를 다치게 했냐며 저를 탓하고 다그치는 쪽이 더 대하기 편했다.

그래도 관장실 창 너머, 언제 울었냐는 듯 박재관과 신나게 놀고 있는 시율을 보니 딱딱하게 뭉친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아니, 시율이 어머님이 이 시간에 무슨 일로.”

막 5시부 수업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관장실에서 원비 내역을 정리하던 해성은 밖에서 들려온 박재관의 목소리에 바로 관장실을 뛰쳐나왔다.

“시율이 어머님.”

“사범님.”

“들어오세요.”

해성은 도장 입구에 선 시율의 엄마를 모시고 관장실로 들어왔다. 박재관이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오기에 손을 들어 안심시켰다.

“앉으세요. 커피라도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혹시, 시율이가 어디 크게 다친 건가요?”

“아휴, 시율이 멀쩡해요. 걱정 마세요.”

해성이 굳은 얼굴로 묻자 시율의 엄마가 손사래를 쳤다.

“시율이 오늘 밥도 두 그릇이나 먹고 영어 숙제하고 있어요.”

“네. 저… 죄송합니다. 제가 도장에 데리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런 말씀 마세요. 우리 시율이 잘 챙겨 주셔서 저랑 어머님이랑 얼마나 감사해하는데요. 오죽하면 이시율이 장염 걸려서 골골댈 때도 태권도 간다고 난리를 쳤겠어요.”

“그래도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더 신경 쓰겠습니다.”

“감사해요. 그런데 사범님.”

가볍던 말투가 조금 낮게 가라앉았다.

“우리 시율이가 아까 밥 먹을 때, 자기가 무슨 큰 차를 망가트렸다고 하던데. 그래서 사범님이 물어낸다고 했다구요.”

“….”

“그걸 왜 말씀 안 하셨어요.”

아이의 두서없는 말에도 엄마는 상황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제 불찰인걸요.”

“차 주인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차분한 요구에 해성은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사고를 쳐 놓고 남자의 연락처를 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락처도 알려 주지 않았다. 참 뻔뻔한 대처였다. 그런데도 남자는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던 거 같기도 한데.

“사범님?”

“저도, 연락처는 모릅니다.”

“네?”

“그게….”

별 마트에서 일하는 직원이라고 하자 시율의 엄마는 해성에게 지금 함께 별 마트로 가 줄 수 있냐고 부탁했다. 거절할 명분이 없는 해성은 어쩔 수 없이 시율의 엄마와 함께 별 마트로 내려가야 했다.

“…혹시, 저 차… 인가요?”

건물에서 나와 별 마트로 향하던 시율의 엄마가 멈춰 서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주차되어 있는 검은색 SUV를 보며 묻자 해성은 마지못해 답했다.

“…네.”

시율의 엄마가 나직이 ‘이시율…’ 하고 아들의 이름을 음산하게 불렀다. 그러고는 저벅저벅 별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남자는 시율의 엄마와 함께 나타난 해성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늘 그랬듯 입꼬리만 당길 뿐이었다. 시율의 엄마는 카운터로 가 침착하게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했다. 그러자 남자가 반갑다는 듯 인사했다.

“아, 시율이 어머님이시구나.”

언제 봤다고 시율이야.

해성은 속으로만 구시렁거리고는 시율의 엄마 뒤로 가서 섰다.

“죄송합니다. 수리비는 사범님한테 말고, 저한테 청구해 주세요. 우리 아이가 잘못한 일은 제가.”

“괜찮습니다.”

미리 준비하기라도 한 듯 줄줄 이어지는 말을 남자가 끊어 냈다.

“네?”

“시율이 많이 안 다쳤으면 됐어요.”

“아니… 그래도.”

놀라서 말을 더듬거리던 시율의 엄마가 아! 하고는 자신의 뒤에 선 해성과 카운터의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사범님 아는 동생이라더니.”

“아, 아니. 그게.”

“네. 맞아요.”

남자는 허공에서 양손을 휘적거리던 해성을 보며 활짝 웃었다.

“제가 해성이 형, 아는 동생이거든요.”

크게 안도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시율의 엄마를 배웅하고 도장으로 올라온 해성은 하던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관장실 책상에 앉았다. 하지만 집중도 되지 않고 머리만 지끈거렸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낮에만 해도 당장 견적서를 뽑아다 들이밀 것처럼 굴더니.

관장실에 처박혀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데 어느새 7시 부 수업을 마친 박재관이 관장실로 들어왔다.

“시율이 어머님이랑은 얘기 잘 된 거야?”

“어.”

“그래. 애 안 다쳤으면 됐지, 뭐!”

“어.”

“오늘 일찍 나와서 고생했는데 먼저 들어가라.”

“어.”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하던 차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해성은 너저분한 책상을 대충 정리하고 일어섰다. 마지막 수업을 들으러 온 성인부 관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도장을 나와 습관적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벽에 머리를 기대고 느릿느릿 변화하는 숫자판을 보다가 마찬가지로 느릿느릿 열리는 문틈 사이를 빠져나왔다.

수년간 학습되어 몸에 밴 대로 움직이던 다리가 우뚝 멈춰 섰다. 해성은 건물 현관 유리문 너머, 맞은편 담벼락에 기대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잠시 동안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남자와 대치하던 해성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문을 열고 나가 남자 앞으로 다가갔다.

“원하는 게 뭐야?”

“나랑 데이트해.”

“….”

“내 소개 다시 할게. 이름은 김한별. 나이는 스물넷.”

“….”

“이제 데이트 상대 이름 정도는 외워 둬.”

해성을 향하는 남자, 한별의 눈이 어두운 골목에서도 반짝이며 빛을 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