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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109화 (109/113)

109화

첫 번째 결혼이 끝나고 나서부터가 진정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소박한 결혼이 끝나자마자 안 소박한 결혼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할 게 얼마나 많던지…. 그나마 오를레아의 약혼식과 아비게일의 약혼식을 진행하는데 도움을 줘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아주 죽는 줄 알았을 거야. 정식 결혼식은 거의 몇 달간 진행해야 정상인데, 이리하도 나도 반년 간 결혼식만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고, 만약 기다린다면 내 위치가 이미 평범한 샤하레로 자리 잡을 게 분명해서 그럴 수는 없었다.

다행히 곧 오르엘 여신을 기리는 축제가 있었고, 조금 보안상의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계획했던 것과도 잘 맞아떨어지고 시기도 적절해 그 축제의 시작 일에 공식 발표 겸 결혼식을 치르기로 했다. 결혼식 준비하는 와중에 혜현도 불러서 연습도 해보고, 교수님께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릴 것도 하나 있어서 부탁드리고 하다 보니 끝나지 않을 일이 어설프게 끝나, 어느 새 내 두 번째, 공식적인 결혼식 날이 됐다.

“긴장돼?”

이리하가 가마에서 느긋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며 눈으로 웃었다. 내가 불안함을 애써 감추기 위해 창밖으로 모여드는 수많은 사람들만 바라보는 게 그는 재미있나보다.

“긴장 되죠, 그럼.”

그게 얄미워 톡, 하고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가 피식, 웃으면서 내 손가락을 가지고 놀면서 말했다.

“앞으로 이것보다 더 많은 거짓말을 해야 하는데 이 정도로 힘들어하면 어떻게 해.”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하는 그의 모습에 약간 당황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첫 번째로 했던 거짓말 기억나세요?”

내 물음에 이리하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였어요?”

“나의 아버지 아이작 레완 페르게네스가 어젯밤, 명을 다해 죽었다. 슬픔을 뒤로 하고 적법한 후계자인 나 이리하 셀리이아 페르게네스가 오르안으로 즉위한다. 오르엘의 축복과 샤하레 일리아라 야노 셀리이아의 축복을 함께 받은, 오르에 축복 있으라.”

“…즉위식이었어요?”

“음. 저기에 거짓말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 깜짝 놀랄 걸. 아이작은 명을 다해 죽은 것도 아니고, 난 슬프지 않았어. 게다가 난 엄격하게 말하면 적법한 후계자라고 말하기도 힘들지. …어머니인 일리아라는 오르제국을 싫어했어. 죽을 때 오르, 란 말만 들으면 치를 떨었지. …참고로 지금까지 이걸 말하지 않은 건, 그대가 안 할래요, 하고 도망치기 위해서였어.”

사기 결혼 당한 거 축하해, 하며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는 웃으면서 대꾸했다.

“지금까지 말 안 해줘서 고마워요. 일찍 말했으면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 못할 뻔 했네.”

그가 약간 감동받은 얼굴로 몸을 내밀어 내 입술에 쪽, 하고 뽀뽀를 하고선 말했다.

“이래놓고 나중에 오르라면 치를 떠는 거 아냐?”

“당신이 못하면 그렇게 되겠죠?”

“잘 할게.”

그와 말을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려서 느슨하게 웃을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새삼스럽게 이 모든 긴장과 부담감을 홀로 견뎌낸 그가 대단해보이기도 했고, 안쓰럽기도 했다.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거 알죠?”

“당연하지. 내가 그대를 여기까지 끌고 왔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다른 면으로도요. 대단한 사람이 되어줘서 고마워요. 당신이 몹시 대단해서, 내가 덜 힘드네요.”

그의 손을 꼭 잡아주자 이리하가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대 없이 못 살게 되면 어떡하지?”

“제 계획이 통한 거죠, 뭐!”

이리하가 크게 웃더니 그래, 하고 내 손을 마주 잡고는 가마가 멈출 때가 된 것을 확인한 후에 가마의 문을 직접 열었다. 문을 열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사람이 놀란 눈을 했고, 그는 그 사람을 완전히 무시한 후에 먼저 내려서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라시아.”

사람들이 침묵으로 나를 기대하는 것이 보였다. 가만히 다들 서서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모습이 부담스러웠지만,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그의 단단한 손을, 결혼식 때처럼 잡고 사뿐히 가마에서 내려 허리를 펴자 온 거리가 사람으로, 그리고 붉거나 파란색의 천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내려쬐는 빛에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과 열기에 압도되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자 다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커다란 눈망울의 아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귀여워 웃어주며 손을 작게 흔들자 아이가 놀라서 움츠러들었다.

“왜 놀라는 거예요?”

이리하가 내 손을 당기면서 먼저 걸어갔고, 나는 그의 옆에서 걸어가며 물었다.

“예쁘고 지위 높은 여자 처음 보나보지, 뭐.”

무심한 대꾸에 모른 척 옆구리를 꼬집으니 그가 아, 하면서 내 손을 콱, 세게 잡더니 말했다.

“긴장이 아주 다 풀리셨어, 응?”

“…다 풀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뭐….”

조용히 속삭이면서 그의 딱딱하게 굳은, 무심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참 나랑 있을 때랑 다르네, 하고 혼자 작게 미소를 지었다. 대외용 얼굴은 참 엄하다니까. 천천히 붉은 색 꽃잎이 뿌려져 있는 길을 한참을 걷는데, 정말로 조용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조용할 수 있다는 데에 놀랐고, 무서울 정도로 내게 집중된 시선에 점점 부담감이 쌓여갔다.

“…곧 도착이네. 이제 시작인데, 괜찮나?”

높은 단상 위로 올라가기 직전, 그가 물었다. 자, 이제 내가 할 일만 남았다. 나름대로 여러 번 연습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몇 번이나 스스로를 안심시킨 후에 고개를 끄덕이자 곧 저 멀리서부터 비명이 들려왔다.

“꺄아아악!!!”

“전하, 피하십시오!!”

예상했던 소리긴 하지만 실제로 들려오니 몹시 긴장됐다. 고개를 돌려 비명이 들린 쪽을 바라보니 과연 재규어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의식용에 보통 쓰는 아이들인데, 철장이나 엄격하게 관리되는 사람들에 따라 움직이는 평소와 달리 제 멋대로 날뛰고 있는 중인 것이다. 나와 이리하가 지시한 것이긴 해도 확실히 달려오는 모습이 지나치게 무섭기는 했으니까.

“…괜찮을 것 같나?”

“아뇨.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지나치게 흥분한 것 같아요. 여기 계세요.”

이리하가 어깨를 으쓱, 하고 위치에 올라갔고, 나는 지나치게 흥분해서 달려오는 재규어들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예쁜이는 그나마 괜찮은 상태였지만, 다른 숲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어린 재규어들은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을 위협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 한 남자가 섣부르게 진정시켜보겠답시고 한 재규어 앞에 나섰다.

“잠깐만, 그러지…”

퍽, 하고 소리가 났다. 이런. 얼굴을 찡그리면서 뛰어갔지만 이미 재규어는 남자 위에 달려들어 위협하듯이 이를 벌렸고, 남자는 미친 듯이 허우적거리면서 소리쳤다.

“악, 살려주세요, 살려…!”

이렇게까지 위험한 일이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입술을 깨물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다가 말했다.

“쉬, 그만.”

손을 뻗어 재규어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올리자 꼬리가 휙, 하고 움직였다.

“…그만해, 착하지?”

귀를 살짝 매만지자 재규어는 으르렁, 하고 소리를 작게 내더니 몹시 천천히, 그러나 누워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떨어져 나왔다.

“착하다.”

남자에게서 완전히 떨어진 재규어가 약간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다가 내가 콧잔등을 쓰다듬자 킁, 하고 소리를 내더니 까슬한 혀로 내 손바닥을 핥았다. 간지러워서 약간 웃은 후에 남자에게 일어나라고 말을 걸었다.

남자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뒤로 천천히 기어가듯이 사라졌고, 나는 재규어의 목을 쓰다듬어주다가 속삭였다.

“실라누스.”

예전 조인족이 줬던 팔찌에서 물이 흘러나왔다. 퐁퐁퐁, 솟아나는 물에 목이 말랐던지 재규어는 혀를 내밀어 물을 한참 마셨고, 곧 예쁜이가 다가오더니 물에 관심을 보였다.

“…너희 다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왔니…?”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을 수 없어서 결국 다리를 굽히고 쪼그려 앉은 후에 세 번 더 말하자 물이 점점 더 많이 나왔고, 혜현을 바라보자 혜현이 아, 하더니 다가와서 내가 만들어낸 물을 움직여 내 주변에 커다란 원을 만들었다. 음, 사실 이런 이벤트를 계획한 건 아니지만, 대충 성공한 것 같기도 하고.

숨을 작게 내쉬고, 일부러 내 얼굴을 가린 베일을 천천히 걷어내면서 화려한 금발이 햇빛아래 드러내 신비감을 조성하도록 했다. 이제 시작이다.

“…이리하.”

고개를 들어 상단에 서 있는 그를 부르자 이리하가 천천히 내게 다가와서 손을 뻗었다.

“…여신이시여.”

나는 그 어색한 명칭에 약간 미소를 지었고, 이리하는 미리 이야기 한 대로 천천히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리하가 무릎을 꿇자, 모두들 천천히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엎드리기 시작했다. 그에게서 가까운 사람부터, 곧 모든 사람이.

시원한 물이 내 주변에서 반짝거리면서 빛났고, 재규어들이 내 주변에 있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이리하에게 다가갔다. 물이 한 방울 한 방울 사라지면서 나와 그의 사이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오르안, 고개를 들어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심홍색 눈으로 가만히 나를 한참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여신이시여, 어찌 내 샤하레로 오셨습니까.”

그 때 교수님께서 분명히 하셨을, 오르엘의 문장이 내 발 아래에서 물색이 섞인 금빛으로 번져나갔다. 나는 몹시 당황했지만, 겨우 티를 내지는 않고 조용히 실라누스, 그렇게 말했다. 혜현은 이미 있는 물 밖에 움직이지 못하므로, 내 팔찌의 주문 없이는 이 문양을 그대로 따라 만들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돌려받아야 할 것을 돌려받기 위해서 왔답니다.”

은은하게 웃으면서 손을 움직이자, 혜현이 타이밍 좋게 물을 움직여 내 발 밑에서 문양을 그대로 만들어 솟아오르게 했다.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는 것이 보였다. 몇은 오히려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도 했다.

“당신의 제국을 돌려받기 위해 오셨습니까?”

“시간이 왔어요.”

그들의 경전에 따르면, 언젠가 때가 되면 오르엘 여신이 그들에게 준 땅을 돌려받기 위해 돌아온다고 했다. 만약 정말 여신께서 계신다면, 분명히 난 죽어서 지옥에 가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뻔뻔하게 웃어보였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충분히 주었어요. 이 제국은 내 것이고, 당신들은 그걸 잊었어요.”

내 상냥한 경고에 이리하는 침을 삼키더니 말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여신 연기가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나는 꽤나 심취한 채로 내 금빛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서 햇빛에 빛나는 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샤하레는 나의 대리입니다. 그녀 외에 나는 어떤 사람도, 오르안 옆에 두라고 하지 않았어요. 이 아이는 내 딸이고, 나이며, 그리고 당신과 함께 이 제국의 반을 통치할 겁니다. …알았나요?”

이리하는 몹시 진지한 얼굴로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에게 손을 뻗어 이마에 키스 해주면서 말했다.

“축복을.”

내가 팔찌를 흔들자 곧 물이 사라졌다. 교수님이 문양을 천천히 지우시는 것이 보였고, 나는 더없이 완벽한 연기를 위해서 쓰러지는 척 했다.

“…라시아!”

그의 품에서 쓰러지면서 햇볕이 참 뜨겁다는 생각을 하고 눈을 느슨하게 감았다. 이제 나머지는 남은 사람이 다 잘 해주겠지.

“…마법이 아니었어.”

오르제국의 궁정 마법사가 경악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몹시 크게 들렸다. 그야 그렇지. 교수님은 무서운 실력자시니까, 웬만큼 예민한 마법 예민자가 아니면 알아보지도 못 할 거고.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리하가 나를 안아들고는 내 이마에 키스를 해주면서 나지막히 속삭였다.

“제국의 통치자가 된 걸 축하하네, 샤하레.”

그 말에 나는 미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분명 쉽지는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내게 모든 권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니, 분명 물, 문화, 뭐 그런 것부터 시작하겠지. …그리고 난 거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리하는 다른 여자는 내 즉위식 때 있었던 일을 핑계로 들이지 않을 거고, 백성들은 공식 석상에 내가 되도록 자주 나타나길 바랄테지.

길게 보고 시작한 일이다.

<完> : 라시아

============================ 작품 후기 ============================

새로운 시작처럼 완결을 냈네요. 이렇게 끝낸 건 처음이라 반응이 무섭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그러네요. 다음 편은 후기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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