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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107화 (107/113)

107화

겨우 울음을 수습하고 나서 나는 다니엘의 손에 이끌려 로드리고들에게 끌려갔고, 그들에게서도 눈물을 죽죽 뽑히고 나서야 겨우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내가 누구와 결혼하는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다 말하지는 못했지만 얼마 후면 모두가 다 알 일이니 그저 기다리라고는 말해두었다.

대충 주변인들을 정리하고 나서 나는 내게 특별했던 교수님 몇 분께 인사를 드렸고, 마지막에서야 반데라스 교수님의 방을 두드릴 수 있었다.

“…교수님, 저 들어가요.”

문을 조심스레 열자 반데라스 교수님께서는 한참 티타임을 즐기고 계셨던지, 한 손에 찻잔을 들고 계셨다. 눈높이에 딱 맞춰서 둥둥 떠다니는 책에 마법사가 처음으로 조금 부러워졌지만, 아마 저건 교수님 특수일테니까.

“음, 소식 들었다. 학교 그만둔다고?”

“어… 생각보다 담담하시네요.”

“다니엘인가, 너랑 친한 학생이 찾아와 말리라며 나한테 징징대던걸.”

…오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더니, 여기 와서 진상을 부리고 있었구나…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지야. 약혼 축하한다.”

“그것까지 말했어요?!”

“대충 빼 놓은 거 없이 다 말하던데. 자기는 네가 학교는 마치고 결혼할 줄 알았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말했다느니, 후회막심이라느니, 뭐라느니.”

“…어쨌든 교수님께 따로 말씀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찾아뵌 건데. …정말, 거듭 죄송해요. 오빠가 여기 와서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어요.”

그 말에 반데라스 교수님은 대수롭지 않는, 오히려 조금 재밌어하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 하고 움직이시더니 앉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자리에 앉자마자 교수님은 마법으로 내 자리에 착, 하고 찻잔과 간식을 내려놓으시고는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재밌는 아이들과 지내더구나.”

“…감사합니다. 그, 음….”

찻잔을 달그락거리면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누구랑 약혼하는지는 안 물어보세요?”

“네가 선택한 사람이니 좋은 사람이겠지.”

느긋한 얼굴로 본인의 차를 한 모금 들이키는 교수님의 모습에 약간의 안도와, 그리고 조막만한 심술이 돋아나려고 하는데,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드래곤만 아니기를 바란다. 드래곤은 질색이야.”

리콜라티 때문이구나, 하고 나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드래곤은 아니에요.”

“다행이구나. 조언하는 건 질색인데, 네 상대가 드래곤이라면 해야 했을테니까.”

“조언하는 걸 안 좋아하세요? 보통 나이 많이 들면….”

그 말에 교수님은 코웃음을 치더니 찻잔을 내려놓으시고는 말씀하셨다.

“나이가 늙은이를 넘으면, 자연히 조언은 그만두게 된단다. 사람 인생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 많은 사람 중에서 누구도 한 사람과 똑같은 인생을 살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내가 그런 상태에 있어봤으니 말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겠냐. …그러니 난 조언 안 한다.”

“조언을 하셔도 잘 먹혀 들어가지 않았을 거예요, 교수님.”

너 나 우습게보냐, 하고 반데라스 교수님이 눈을 치켜뜨고 나를 노려보셨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젓고, 조용히 말씀드렸다.

“위로해드리는 거였는데.”

“그게 무슨 위로야, 이 못된 녀석.”

그렇게 말하는 교수님께서는 그러나, 몹시 편안해보이셨다. 돌려 말씀드린 거지만, 교수님이 분명히 알아들으셨을 거라고 확신했다. 리콜라티는 오페를 아주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아마 교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셔도 듣지 않았을 거다. 실제로 오페도 리콜라티를 설득하는 데에 실패했으니까.

한참을 편안하게 차를 마시다가 나는 결국 내가 해야할 말을 하기 위해 자세를 고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죄송해요, 교수님.”

“뭐가 죄송하나.”

“저, 이리하와 결혼해요. 그러니까, 음… 샤하레인데 황후 역할까지 하는 걸로…."

“마치 예약이라도 하는 말 같구나.”

교수님의 농담에 생글생글 웃으면서 반지를 낀 오른손을 착, 하고 내밀었다.

“…대강 예약이구만.”

내 손을 받아들고 한참을 바라보시던 교수님께서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내게 말씀하셨다.

“이거 자랑하고 싶어서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냐.”

“그러게요.”

쏙, 손을 빼서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놓고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저 아주 바빠질 것 같아요.”

교수님께서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시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나 담대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저런, 그거 안 됐구나.”

고개를 살짝 숙인 그의 얼굴의 우울과 실망감이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어떤 체념 같은 것이 익숙하게 자리 잡은 것 같기도 했고.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의 기대를 무너트리고 이리하와의 삶을 선택했는데.

“…죄송해요.”

“라시아.”

다정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교수님을 바라보자, 그는 몹시 담담하고 다정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네 인생을 선택한 것에 대해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지 마라. 그럴 필요는 전혀, 없으니까.”

그 당연한 말에 감동 받은 것은, 내 선택으로 인해 그가 얼마나 큰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용기를 끌어 모아서, 몹시 조심스럽게 자리에 일어나 책상을 돌아 교수님께 다가가 손을 뻗었다.

“뭐 하자는 거니?”

그가 몹시 의심스러운 태도로 고개를 뒤로 쭉 뺐고, 나는 벌린 양 손을 살짝 흔들고는 그에게 조금 더 다가갔고, 결국 교수님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나를 몹시 어설프게 끌어안으시더니 말씀하셨다.

“그래서 언제 죽는다고?”

“죽을 때만 이렇게 안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네가 죽을 사람처럼 구니까 그렇지. 못 만나는 것도 아니잖니.”

그 말은 맞지만, 하면서 교수님의 어색한 등 두드림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한 번 교수님을 꼭 끌어안고 말씀드렸다.

“그래도 재가 할 수 있는 한 도와드릴게요. 정말이에요.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교수직 그만두고 오시면 제가 지낼 곳도 준비해드리고, 그러면 제가 쉬는 시간에 언제나, 도와드릴 수 있으니까….”

그 말에 교수님은 이제 됐어, 하면서 나를 아예 주욱, 밀어서 떨어트리셨다. 하여간 스킨십에 정말로 약하시다니까.

“심심하시면 라티 데리고 놀러오셔도 좋고….”

“아, 알았다니까.”

“쑥스러워하시긴.”

“늙은이 그만 놀려.”

투덜투덜 거리시는 모습이 웃겨 목안으로 웃다가 뵙고 싶을 거예요, 그렇게 말씀드리니 교수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 하고 웅얼거리셨다.

“저 즉위식 때도 오시고, 결혼식 때도 오시고… 그리고 즉위식 때도 오시고, 애기 태어나도 오세요, 아셨죠?”

“애라면 지긋지긋하다, 나는.”

“라티 좋아하시면서.”

뚱한 표정으로 서계시는 교수님께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제 아이 보모도 해주셔야죠.”

“아주 늙은이를 부려 먹어라, 부려 먹어. …필요한 거 있으면 너도 말하고.”

“네, 교수님.”

나는 다시 한 번 교수님을 끌어안으려다가 격하게 거부당했고, 결국 비쥬로 인사를 마무리하고 말았다.

한 사람 한 사람, 인사를 하고 나니 정말로 이젠 남은 사람이 없었다. 너무 이르게 인사를 했나 싶지만, 급하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학장님과도 긴 상담을 통해서 자퇴는 잘 처리됐고, 이제 남은 건 샤펜 저택에서 짐을 싸는 것뿐이었는데, 이 와중에서 제프리와 애니들이 얼마나 울던지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함께 가면 정말 좋겠지만, 오르제국과 베노암 제국 어디도 황실은 일하기 쉬운 곳이 아니고, 무엇보다 대우가 몹시 다를 거라….

“아가씨, 이거는 챙기실 거예요?”

“음, 아니. 그냥 두고 가려고. 웬만한 건 다 버리고 가야 편하….”

“흑… 이거, 제가 매일 욕조에 한 방울씩 넣어드렸던 아로마 오일인데… 우리 아가씨, 이제 가시면 사막이라… 매일 샤워도 힘드실 거고…”

주저앉아서 엉엉 우는 애니를 보며 당황해서 누가 좀 달래보라고 고개를 돌렸더니 다른 시녀들 모두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가면서 울고 있었다. 내가 무슨 노예로 팔려가는 것도 아니고.

“아니, 나 이래봬도 황제랑 결혼하는 건데 설마 그러겠어…?”

“흑,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엉엉, 우리 아가씨… 어쩜 이렇게 매정하셔…”

이젠 숫제 아로마오일 병을 끌어안고 우는 애니를 보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끌어안고 달래줬다. 이게 벌써 네 번째라 이젠 이골이 났다고나 할까. 다들 이런 분위기였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아비게일을 빼고 제프리나 한스, 요리사 베이커도 전부 내가 뭘 하기만 하면 아련한 눈으로 얼굴을 돌리거나 도망쳐 버렸다. …슬슬 진짜 내가 죽으러 가는지 의심이 들기도 하고.

“괜찮다니까. 가끔 들릴게.”

“허어엉- 우리 아가씨 어쩌면 좋아…!”

날 부여잡고 우는 수십 명의 하녀들 가운데에서 나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울어라 울어.

“이제 나랑 지낼 날이 정말 얼마 안 남았는데, 이렇게 자꾸 울다간 내 얼굴도 기억 못 하겠어.”

그 말에 그럴 수는 없다며, 더 챙겨드리겠다며 뭘 주섬주섬 하나씩 챙기는 모습에 저절로 진땀이 났다. 글쎄 그렇게 짐을 많이 챙기지는 않을 거라니까.

“아가씨 자주 오셔야 해요, 아셨죠? 저희 다 진짜 뵙고 싶을 거고….”

“알았어, 알았어.”

“그리고 이거는, 아가씨가 평소에 좋아하시던 과자세트인데요… 멀리 가면 맨날 그립고 그럴 거니까 준비했고요….”

주섬주섬 하나씩 하나씩 선물을 내려놓는 모습에 기분이 좋았지만, 상당히 당황스럽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잘해준 적은 없는데.

“나 이렇게나 받아도 돼? 그렇게 잘 해준 적이 없는데….”

“그런 말씀 마세요, 아가씨 계시면서 저희가 얼마나 편하고 좋았는데! 지시도 딱딱 내려주시고, 문제 생길 것 같으면 알아서 피하게 해주시고…”

“휴가도 잘 챙겨주시고, 본가 저택엔 아가방도 만들어주시고….”

“보너스도 잘 주시고, 평소에도 칼퇴근 시켜주시고.”

이것저것 나오는데 얼마나 절절하면서 현실적인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러나 이 때가 내 고마움을 진심으로, 그리고 정식으로 전할 몹시 적합한 때라는 것을 깨닫고 겨우 숨을 몰아쉬고 애니의 손을 잡고 모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오히려 잘 봐줘서 고마워요. 나야말로 부족한 사람인데 그 동안 예뻐해주고 챙겨주려고 해서 고마웠어요. 나는 그런 대접을 어디서든 받아본 적이 없어서, 많이 번거롭고 귀찮았을텐데….”

“아니에요, 아가씨이-!”

그야말로 울음바다였다. …친정 엄마가 수십 명이 생긴 기분에 기분이 좋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엄마가 있었다면, 어떤 말을 해줬을까. 뭐라고 하면서 나를 보내주고, 뭐라고 하면서 돌아오라고 했을까.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모두다.”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모두 안아주면서 어쩔 수 없이 결국 조금 울어버렸다. 나한테 이렇게 의미있는 사람들이 많았나.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하면서, 내가 잃어버린 사람들이 아쉬웠다. 엄마, 할아버지가 참 아쉽고… 슬프고, 그랬다. 그래도 곧 내게는 새로운 가족이 생길 거니까, 또 어떻게든 행복해질 수 있겠지.

이리하와의 결혼식이 곧이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이 종장을 얼마나 늘리고 싶어하시든...

얼마 안 남았다눙....

다시 한 번 말씀드릴게요 ! 완결 나고 일주일 쯤 안에 습작으로 돌릴 거예요.

저도 퇴고는 해야지. 소장본도 안 할 거라 빨리 돌리게 될 것 같아요 ㅎㅎ..

그동안 잘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처음부터 끝까지, 코멘트 달아주시고 사랑해주시고, 반응 안 하셔도 되는데 해주셔서 즐거웠어요.

소소하게 저와 함께 손잡고 걸어주신 기분이라 즐거운 봄날의 산책을, 당신들과 너무나 오래, 즐겁게 해왔습니다. 정말로 행복했어요.

저도 이 작품이 정말로 끝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ㅎㅎ....

자세한 이야기는 후기에서 쓰고 싶지만, 라시아가 감사 인사를 주변인에게 할 때 저도 하고 싶어져서요! 감사해요.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조금만 더 함께 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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