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다니엘이 그와 어떤 대화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몸 상태가 나아지자마자 정중한 초대장이 도착했다. 당연히 오르제국으로 오라는 이리하의 초대장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알트라의 한 레스토랑의 저녁 식사 초대장이었다.
그것도 다니엘의 이름으로 온 초대장말이다. 왜 이걸 이렇게 보냈는지, 왜 그가 알트라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당일 날 준비를 하고 그를 만나기로 했다.
레스토랑 그란치아는 몹시 품격 있는 곳으로 이름이 높았고, 드레스 코드가 엄격하게 정해져있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연한 보랏빛이 도는 수국색 귀걸이를 하고, 흰색 바탕에 기하학적 패턴이 검정색으로 그려진 드레스를 입고 높은 구두까지 신는 정성을 보이자 하녀들은 몹시 신이 난 것 같았다.
“오랜만에 이렇게 차려입으니까 정말 예쁘시네요, 아가씨.”
“오랜만인가?”
“그렇죠, 요즘 파티도 없고 했으니까.”
화장까지 하고 나서 거울 앞에 서니 그야말로 다 갖춰 입은 거나 다름없었다. 치마가 종아리의 반 정도를 드러내기는 하지만, 요즘은 이게 유행이니까. 애니가 모자와 파시미나를 건네주었고, 모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거절하고 뽀얀색의 파시미나만을 받아 어깨에 걸쳤다.
“괜찮아?”
“완벽해요! …그런데 이렇게 입고 어디 가시게요?”
“음… 저녁식사?”
“혹시 데이트하세요?! 세상에!”
수선을 떨면서 화장을 고치려고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데이트면 정말 좋겠지만, 헤어질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헤어졌는지, 아닌지… 서로에 대한 확신이 없는, 서로의 마지막을 만나러 가는 길. 향수를 뿌리고 저택을 나서 마차를 타니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만난다고 해서 그리움이나, 안타까움 같은 것이 사라질 수 있을까. 이번에는 성공적인 이별을 해낼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성공적인 이별이라는 것이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나를 몹시 괴롭혔다.
“아가씨, 곧 그란치아에 도착합니다.”
한스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내릴 준비를 하고 있자 곧 마차가 멈춰 섰다. 숨을 고르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자니 마차의 문이 조용히 열렸고, 그라치아의 웨이터가 내가 내리는 것을 도왔다.
“즐거운 저녁입니다, 레이디.”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요. …저녁 초대를 받았어요, 다니엘 이셀리아 요르펜 이름으로.”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긴장한 것이 역력했는지, 보통이라면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넸을 웨이터는 아무런 말없이 곧장 특실로 나를 안내했다. 나도 사실 특실까지는 요구를 해본 적도, 들어올 기회가 있던 것도 아니라 특실은 처음이었다. 하기사 이리하 정도의 손님이 특실을 이용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겠지만.
“…문을 열어드릴까요?”
“아니오…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렇게 대답을 하자 웨이터는 내게 간단한 목 인사를 하더니 나갔고, 나는 특실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그도 이미 내가 도착한 것을 알고 있을 거고, 내가 망설이고 있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재촉하지 않고 그저 내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려주는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나는 끈질기게 문 앞에 서서, 나 스스로를 설득했다. 만약 내가 이 문을 열지 않는다면, 그 또한 잔인한 끝일뿐이고, 제대로 된 끝이 아닐 거라고. 인생 내도록, 제대로 깨끗하게, 웃으며 그를 보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할 것이라고.
“……….”
그래서 나는 문을 열었다.
“…안 들어올 줄 알았어.”
이리하는 그리고, 문 앞에 가만히 서있었다. 이리하를 떠올리면 언제나 처음 그를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위협적이고, 키가 크고, 강인해 보였던 사람. 내 또래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여유롭고, 느긋했던.
“하지만 왔군.”
하지만 일년 반 동안 내가 봐왔던 건, 아니… 내가 사랑에 빠진 남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약하고, 다정했다. 말도 안 되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나를 좋아하게 된 사람. 나를 이해하고, 옳은 길로 이끌어주려 하는 사람이었다.
“오랜만, 이에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끄집어 내 그에게 인사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부디 용서해주길 바란다는 듯한 태도로 내 손목을 조심스레 잡아 특실 안으로 인도했다. 내가 어설픈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내 손목을 놓았고, 문을 닫았다.
“…오랜만이군.”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변하지 않은 눈, 얼굴, 당신.
만약 그와 헤어져야한다면, 어떤 말을 할까 나는 많이 고민했다. 완벽한 말을, 그에게 미래를 빌어주면서 지금까지 우리의 일들을 아름답게 포장해줄 수 있는 말을… 그런 말을 찾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 단 한마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야 했어요.”
나는 식탁 옆에 서서, 하려고 했던 말을 찾지도 못한 주제에 섣부르게, 입을 열어버리고 말았다.
“당신의 다른 모습을 몰랐어야 했어요.”
다정한 모습이나, 웃는 얼굴이나, 그리고…
“강인하고 위압적인 오르안의 얼굴 외에, 다른 것을… 다른 것을 알아서는 안 됐어요.”
연약한 얼굴, 어린애 같은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알아선 안 됐던 것은…
“사랑스러운 모습을 알아서는,… 그래서는 안 됐는데.”
나는 고개를 숙여서 눈물을 숨겼지만, 잘 되지 않았다. 꼴 사나울 정도로 우는 모습을, 마지막까지 보여드려서는 안 되는데.
“저한테, 보여주셔서… 감사했어요.”
결국 참지 못하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울어버렸다. 당신의 약한 모습을 봐서, 사실은 기뻤다.
“누구보다 저를 이해해주셔서, 항상 좋은 길로 가게 해주셔서… 정말로 기뻤어요.”
울고 있는 나를 이리하는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이리하의 걸음은 무거웠고, 내게 뻗는 그의 손 또한, 너무나 많은 걸 담고 있어서 나는…
“울지 마, 라시아.”
이리하는 나를 끌어안지도, 달래지도 않고 그저 내 손만을 잡고 있을 뿐이었다. 예전과 다르게 그저 어색하게만 나를 잡은 그의 손에서 우리의 거리를 새삼스레 깨닫고, 상처받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일인데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어째서일까.
“…혼자 모든 걸… 그렇게 쉽게 끝내려고 하지 마.”
기대하지 않은 말이 나와서 나도 모르게 울고 있던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늘진 그의 얼굴은 때 아닌… 지금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언뜻 고통스러워하는, 그리고 슬퍼하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줍어 보이기도 해서 나는 당황하고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벙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이리하는 내 손을 몹시 어색하게 잡더니 말했다.
“나는, 그대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던 어떤 것을, 빼앗고 싶어서 이 자리로 찾아왔습니다, 라시아 클레이만 샤펜양.”
그는 일국의 황제답지 않은 진지한 풋풋함과 초조함을 가다듬지 못한 상태로 말을 이었다.
“우리를 끝내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이 아닌 걸, 먼저 분명하게 주지할 필요가 있겠군요.”
“…이리하? 말투가….”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고, 나는 뻣뻣하기 그지없이 머뭇거리는 그가 낯설어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말을 꺼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아마 그대는 모를 겁니다.”
이 분 이 말들 설마 외워오셨나? 내 얼떨떨한 표정에 이리하는 쑥스럽다는 얼굴을 하더니 결국 원래의 말투로 돌아왔다.
“그대가 거절할 것이 무서워 말을 못했던 게 변명이지만, 역시 그대 말이 맞았어. 나는 쉽게 봤어, 당신을… 당신이 우리를 위해서 희생해야한다고, 쉽게 생각했어.”
미안해, 그렇게 말하며 그는 용기를 내 내 손을 꼭 잡았다.
“미안했어. 그건 당신 길이 아니었고, 당신의 길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내게 의해서 강요된 길이었지. 어쩌면 우리 관계는 처음부터 틀렸는지도 몰라. 나는 당신을 보러, 사귀게 된 이후로는 한 번도 알트라에 방문한 적이 없었으니까. 당신이 오는 게 더 편하다고, 그렇게 생각하기만 했고….”
그는 좀 더 용기를 내서, 내 손가락을 잡았다.
“쉬운 거였는데, 미안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알지 못했던 내 섭섭함을 짚어준 당신이 고맙고, 신기하고…
“지금에서야, 조심스럽게, 내 인생에 다시는 없을 떨림을 가지고 그대에게 묻겠습니다. 라시아 클레이만 샤펜.”
나는 놀랍게도 그의 그 다음 말이 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숨을 몰아쉬고, 그대로 나는 멈췄다.
“나와 결혼해주겠습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놀라서 손을 움찔거렸고, 이리하는 내 반응을 예상했는지 내 손을 깍지를 껴잡았다.
“반지는, 주머니에 있는데…”
그가 나를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반지를 꺼냈다. 다니엘이 그에게 전해줬던, 그의 어머니의 반지였다.
“지금, 진짜로…?”
“가짜로 청혼할 정도의 남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약간 웅얼거리며 말하더니 잠시 초조한 듯 머뭇거리다가 무릎을 꿇으려고 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 …”
“거절하기 전에, 분명히 말해두지. 이건… 황족의 결혼을 요청하는 게 아니야. 분명하고, 확실하고, 세상 어느 누구의 결혼보다 이상적인 형태의 결혼을 청하는 청혼을 하는 거네, 그러니까… 그대도 나도 결혼하고 나면 애인을 가질 수 없고, 어떤 형태로든 결혼을 할 수 없는, 그런 것.”
“…그렇지만, 이리하께서는 오르안이시잖아요.”
“그게 그대가 청혼을 거절할 이유가 되지는 않아,”
“하지만, 그… 저런 결혼은 불가능한 몸이시고….”
“그래, 아마 전 세계의 축복을 받는 결혼은 아니겠지.”
그가 농담을 하는 건지 진담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고 이리하는 그런 나를 보다가 조금 더 용기를 내 내 양손을 잡았다. 그의 손에서 잡히는 동그란 금속의 감각이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그대에게 거짓말하지는 않겠네. 분명히 나와 그대가 거절한 그 길보다는 힘들 거야. 쉽지 않은 길일 거고, 그대는 그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앞으로의 인생 내내 끙끙거리게 되겠지. 난 최대한 그대를 도와주겠지만, 잘 되지 않거나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일도 많을 거고….”
나는 그제서야, 그가 몹시, 그리고 엄청나게 진지하게 이 제안을 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세상에.
세상에나!
“지금 저한테 청혼하시는 거예요?!”
“…지금은 아니고 아까 전부터 그러긴 했지.”
나도 모르게 그를 팍, 하고 치면서 농담하지 마세요, 하고 외치듯이 말했다.
“샤하레로요?”
“단 한 명밖에 없을, 내 아내로.”
“…진심이세요? 정말로요?”
“음, 진심이 아니라면 반지를 준비하지는 않았겠지. 그대가 이상하니까 그만두라고 했던 말투도 하지 않았을 거고.”
“외워 오신 거예요, 설마?”
“당연하지! 이래 보여도 청혼은 처음이야.”
약간 툴툴거리는 그의 얼굴이 붉어서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몇 분 전에는 울다가, 지금은 웃다가… 아주 미친 사람이 따로 없어. 그는 내가 웃는 걸 보고 부드럽게 미소를 짓다가, 내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말했다.
“그대가 웃어서 정말로 기쁘지만….”
그는 이 말을 하기싫다는 티를 아주 분명히 내면서 약간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그대가 이 요청을 받아들일 때 알아야 할 게 한 가지 더 있네.”
“…뭔데요?”
“내가 그대에게… 내 완전한 반을 주는 대신에, 나는 그대에게서…”
심홍색 눈이 불편과 안타까움을 담았다. 다음에 나올 말이 뭔지 알 수도 없었지만, 마음이 이상하게 편했다.
“…그대의 자유를 빼앗아야 해. 그대는 앞으로 아마 평생 여유로운 여행도 못할 거고, 하고 싶은 일도 대다수는 못 할 거고, 그리고….”
나는 잡힌 손을 부드럽게, 그러나 분명한 단호함으로 꽉 잡으면서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부딪혔다.
‘촉.’
가벼운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져나갔고, 그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리하. 제가 십 몇 년 동안 바라왔던 건 자유가 아니에요.”
“…뭐? 하지만 그대는 평생….”
“평생 남의 뜻으로 살아왔죠. 제가 바랐던 건 자유가 아니라, 선택권이에요. 제가 제 삶의 방향을 선택하고 노력하기를 바라온 거지요.”
우리 손 한 가운데에서 움직이는 반지를 빼내 내 손바닥 위에 올리고 나는 말했다.
“제가 당신의 반쪽으로 살기를 선택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내게 당신의 반쪽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모두 주시기만 한다면… 저는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나?”
그는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어쩌면 처음 보는, 한 방 먹었다, 혹은 바보 같은 표정에 나는 다시 한 번 터트리고 싶은 웃음을 꾹 참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저랑 사시면서, 많이 피곤하실 건데… 오히려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아마 마사를 선택한 것보다 훨씬 힘든 길일 거다. 나는 걱정을 웃음 속에 숨기고 물었고, 이리하는 내 뺨에 쪽, 하고 키스를 하면서 말했다.
“반지만 껴준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 같군.”
“반지는 끼워주는 거예요.”
“…이런, 처음 해보는 거라서.”
그는 내 내밀어진 오른쪽 손에 조심스럽게 그의 어머니 반지를 끼워준 후에 말했다.
“고생길로 들어온 것 축하해, 내 약혼녀.”
“당신도요.”
나는 손을 뻗어 그를 잡았고, 그도 나를 잡았다. 우리 둘 다 아마 십년 후에는, 이 선택을 몹시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십년 뒤 나에게 만약 그 때로 돌아가면, 어떤 선택을 할 거냐고 묻는다면, 그 때도 도리 없이 이 사람의 손을 잡았을 거라고. 십년, 어쩌면 이십년 이후에라도… 그래, 그럴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어..? 완결인 것 같은데요?;;
완결 같은데?
일케 완결 낼까..?
에필로그 한 챕터 남았네요...;;; 뭐야 진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