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수업을 도저히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양호실로 가서 조퇴증을 끊었다. 이런 저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바로 괜찮냐고 선생님께서 물어주셔서 거짓말을 하고 학교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집에 가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는 골목골목을 한참 걷기만 하다가 눈에 보이는 카페에 자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뭘 시켰는지 기억도 나지 않고, 그저 피곤했다.
…뭔가 해볼까 생각했지만, 머리속에 자꾸만 드는 생각은 그저 원망과, 그에 대한 비난뿐이었다. 정말 이런 생각하기 싫은데, 어째서….
‘우웅, 우웅, 우-’
한참 영상구슬을 바라보고 있다가 느릿하게, 구슬을 켜자 이리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시아.”
“……….”
그의 목소리가 반가움을 담고 있었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어떤 말을 꺼내야하나.
“…라시아? 괜찮나?”
목소리를 들으니 비참했다. 눈물이 나서, 참지 못하고 연락 구슬을 꽉 쥐고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한참을 숨을 고르고 있자 그가 물었다.
“…당신… 울어? 누가 울렸어?”
당신. 당신이 날 지금 이렇게…
“이리하.”
눈물로 번진 숨을 숨기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불렀고 이리하는 내 부름에 응, 하고 작게 대답했다. 나는 말을 거두고 그저 숨을 죽였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내 아가씨가 이렇게 우울해하지?”
다정한 목소리에 점점 더, 나 스스로가 처참했다. 어떻게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어떻게 당신이 나를, 세상에서 날 가장 이해한다고, 나와 비슷하다고 스스로를 여기는 당신이, 나를….
“가도 돼요?”
눈물이 목소리를 깊은 물속으로 잠기게 했다. 속삭이듯이 한 말에 답은, 단순했다.
“와. 당장 와. 시간 비워둘 테니까, 어서 와.”
연락 구슬을 끄고 나서,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울었다. 내가 방금 한 생각을 믿을 수 없었다. 당신이니까 나를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거겠지. 당신이 나를, 내가 당신을 너무 사랑하게 되어서, 그래서… 그래서 적법하게 황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마사를 질투하게 하고, 그리고.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바래왔던 모든 걸 버리고, 그냥 당신의 여자로만 살고 싶게 만드는 거겠지. 어리석고, 바보 같이. 지금까지의 모든 나 자신을 버리고…. 그냥 샤하레만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순간이라도 하게 만들었겠지.
…내가 싫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그 모든 기반을 사랑 하나로 버리게 만드는 내가 싫었고, 그렇게 나를 만드는 이리하도 원망스러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나 스스로의 가치나 능력을 버리고 싶어 한 적이 없었다. 창녀로 살아야 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빠져나가거나, 더 나은 길을 나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공작이 되라고 했을 때도,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경우에도, 나 스스로가 라시아 내 자신이 아닐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지금, 이 순간. 단순히 한 남자와, 한 번의 사랑 때문에 … 지금, 내 이름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비참함에 몸을 가눌 수 없어 그저 한 없이 울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이, 자기 자신 때문에 비참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 나를 이렇게나 실망시킬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저, 아가씨….”
누군가의 손수건이 내게 조심스레 다가왔다. 나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고맙습니다, 하고 그것으로 눈물을 닦은 후에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여성이 당황한 얼굴로 가지라고 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몇 번 말한 후에 값을 치르고, 미안하다고 사과 한 후에 가게를 나섰다. 얼굴을 가다듬을 생각도 하지 않고, 나는 그저 구두굽을 부딪혔다.
가슴 속에 연기가 가득 차, 몹시 갑갑했지만… 나는 마음을 정했다. 이렇게는…
“이리하의 개인 응접실.”
눈 앞이 어지럽게 흐려지더니 곧 빛이 번쩍였다. 천천히, 그와 곧잘 만나던 응접실이 보였다. 그리고, 지나치게 사랑해버린 사람의 얼굴도.
심홍색 눈동자. 그의 뒤의 태양이 아찔한 빛 무리를 뿌리고 있었다. 그가 빛나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얼굴이 왜 이래.”
스스럼없이 이리하는 내게 다가와 내 팔을 잡았다. 닿은 온기에 마냥 힘이 빠졌다. 그저 이렇게 주저앉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도저히 그러지는 못해서, 나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줘 버티고는 말했다.
“이리하.”
그가 내 얼굴을 당황하고, 안쓰럽고,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몹시도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과는 함께 할 수 없어요.”
내 팔을 잡은 이리하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입술을 깨물고, 독을 담아서, 그에게 속삭이듯이 저주를 내뱉었다.
“당신이 황제인 이상, 나를 절대로 가질 수 없을 거예요. 내 머리카락, 몸… 심지어 내 마음을 가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래도… 당신도 나를 평생 완전히 가지지는 못할 거예요.”
울음 섞인 단호한 내 칼에 찔린 그의 얼굴이 천둥같이 어두워졌다. 나는 그에게 속삭였다.
“이제 절 놓으세요.”
그만 나를 떠나라는, 내가 떠나게 해달라는 말에 이리하는 분노했고, 좌절했다.
“그대에게 나는 도대체 어떤 존재야? 그렇게 쉽게, 이렇게나 뜻밖에 이별을 고할 수 있을 정도로 그대에겐 내가 쉬운가?”
그 싸늘한 말에 나는 허무하게 웃었다. 아니야, 당신이 쉬워서 이별을 고하는 게 아니야. 내가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그래서…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나를 잃어버릴 것 같아서.
“…이리하. 저는… 당신의 샤하레는 될 수 없어요.”
“그게 지금 왜 나와!!!”
거친 목소리가 터져 방을 울렸다. 그가 내게 소리를 지른 것은 처음이었다. 이리하는 자신의 반응에 나보다 놀라 단박에 내게서 멀어져 등을 보였다.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가만히 서있는 그에게 나는, 잔인하게도….
“나올 때가 되었으니까요. 지금까지 행복하게 지내셨던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왔으니까요.”
“…어째서, 지금이야?”
허무한 웃음이 내 속에서 빠져나왔다. 스스로에게 가장 소중한 나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입힐 수 있게 된 내가 우스웠다.
“언제까지 모른 척 하실 건가요, 이리하.”
“…뭘?”
“언제까지, 숨기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그가 등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햇빛이 내 등뒤에서 반짝거렸고, 나는 비참했다. 그는 절망하고 있을 것이다.
“조금 이르지만, 약혼 축하드려요.”
“…그대가….”
어떻게 알았냐고 말씀하시려는 걸까. 웃음이 나왔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떤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알아야 할 것보다 제가 더 일찍 알았나요?”
내 말에 그는 몹시 담담하게, 그리고 어설프게 변명을 했다.
“말 하려고 했네.”
“왜 안 하셨는데요?”
“…그대가 그대로 우리를 버릴까봐.”
그 말에는 정말로 황당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럼 이리하께서는 제가 이런 식으로 알아채면,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그게 아니야, 나는 그러려고 했던 게…"
"어리석으셨어요."
내 앞으로 어둠이 졌다. 이리하의 얼굴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최악의 방법이셨어요. 다른 거라면 괜찮았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이건 아니에요."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어! 밀어내지만 말고, 내 입장도 좀 생각해…"
"만약 제가,"
그저 허무하고 비참해서,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이때만큼은 내 은회색 눈이 차가워 보이기를 신 앞에 빌었다. 부디 차갑기를. 얼음보다도, 겨울 송곳보다도 차갑기를.
"만약에 제가 지금 당장 약혼해야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했겠어요?"
"……"
"그 소식을 당신 국정 회의에서 듣게 되었다면, 당신은 내게 어떻게 하셨겠어요. 이리하."
내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을 것이다. 그의 얼굴만 보면 그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그 잔인한 진실이 그의 심장을 할퀼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진실이었다.
"그랬다면 당신은 제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겠어요?"
그는 주먹을 움켜쥐더니 말했다.
"당신과 나는 달라. 나는 황제잖아. 나는 당연히…"
"저는요?"
차갑게 묻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저보다 당신이 더 중요한 사람이니, 당신에게 다 맞춰야 하는 거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겠지요. 이리하께서는 황제시니까요. 황제라는 이유만으로, 저와 당신의 관계에서 지금 우위를 점하셨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그게 우리 둘에게 더 쉬운 길이라고 생각했네.”
"아니요. 이건 쉬운 게 아니에요, 이리하. 이기적인 것이지요. 제 의견은 묻지도 않으시고, 마음대로 우리의 길을, 혼자 정하셨네요. 그러면, 그 길은…“
목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 같았다. 이런 걸 설명하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내가, 이 남자를… 이런 걸 알아채지 못하는 남자를.
“그 길은 제 길이 맞나요? 제 길이라고 할 수 있나요?”
입술을 깨물고 나서, 뜨거운 숨을 뱉어내고 그에게 다가서서 말했다.
"제게 선택권이 없었는데, 그래도 그 길이 ‘우리’를 위한 길이라고… 말하실 수 있으세요?“
"그게 가장 쉬운 길이야. 그대는 이 제국을 통치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천천히 걸어가 팔을 들어올려 그의 뺨을 매만졌다. 따뜻한 뺨, 사랑스러운 얼굴.
“…설명 한 번 해주지 않으시고 감히 제게 이러라저러라 하셨어요, 이리하. 그리고 그건… 몹시 어리석은 일이세요.”
몹시 담담하게 충고를 하는 와중에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했다. 나는 억지로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바라보았다.
“쉬운 인생을 사려고 하셨으면, 저를 선택하셔선 안 됐어요, 이리하.”
이를 악물고 겨우, 말을 이어갔다.
“그 인생에서 저는 없을 거예요, 이리하. 대단한 통치자가 되실 거예요, 앞으로. 제게는 보여요. 최고의, 세상에서 제일 멋진 제국을 이끌어가실 거예요.”
결국 참지 못하고 한쪽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입술에 내 입술을 올리고, 몹시 조용히 속삭였다.
"그리고 최고의 통치자 그것 밖에는, 안 되는 인간일 겁니다."
천천히 그의 뺨에서 손을 떼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지금까지 즐거웠어요.”
다른 쪽 눈에서마저 흘러내린 눈물을 닦으며 그에게 웃어보이고 등을 돌리자 이리하가 말했다.
“왜, 왜 이해를 못해. 그대가 사랑에 빠진 존재는, 황제인 나야. 세상에 ‘이리하’라는 단독의 존재는 없어. 이리하 셀리이아 페르게네스만이 있을 뿐이란 말이다! 그대는 각오를 했었어! 나를 선택할 각오를 했고, 현재를…!”
그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고, 나는 그것에 분노하고 실망해 그의 손을 힘껏 뿌리치고 외쳤다.
“현재가 끝났잖아요!!”
내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비통한 목소리였다.
“이대로 당신의 샤하레가 되라고요? 그 자리에 나를 그저 앉혀놓기만 하면 당신은 만족하세요? 아무것도 안 하고! 내 이름을 잃어버리고! 그냥 그렇게, 누구나 될 것 같은 자리에 날 앉혀두려고 했어요?!!”
“나는 그것만큼의 가치도 못 하나?!!”
그가 소리를 질렀고, 그 뒤로 우리 사이에 세상의 모든 적막이 자리했다.
“뭐라고요?”
“당신 자유를 버리는 대가로 내가 세상을 준다잖아!! 세상을 주고, 내 사람으로, 당신은…”
그의 눈이 일그러졌다. 어쩌면 울 것 같은 얼굴로, 더 이상의 말을 찾지 못한 사람처럼 헐떡이던 그가 천천히 내 손을 잡고 섰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야, 라시아. 오르안인 ‘내’가 나란 말이다… 그렇게 견딜 수 없는 자리를, 내가 요구하는 게 아니잖아…. 모두가 원하는 자리를, 내가…”
평생 그의 이름은 그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었다. 그 점을 알고 있었다. 이리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심홍색의 보석같은 눈에서 흘러나온 투명한 그것은 비현실적인 결정과 같이 빛났다. 그의 눈물을 엄지로 닦아주며 말했다.
“아니에요. 이리하께서는 지금 저희 관계에서…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저는 그걸 받아들이지 못해요.”
울음이 터져나왔다. 사랑했다, 사랑하는데 어째서 이렇게나… 이렇게나 잔인해져야 하는 걸까. 내가 아무리 닦아도, 이리하의 눈물이 그의 턱을 타고 내려와 떨어졌다. 나는 울면서 그의 앞에 서있었다. 그의 말이 썼다.
“그렇다면 나는 한 줌도 가지지 못하겠군.”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내 손을, 아주 천천히 놓았다.
“그러나 그대는-,”
그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대 또한, 내 전부가 아니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할 거다.”
나는 애써 그의 떠나는 등을 보면서 이를 악물고, 어깨를 떨며 울면서 생각했다. 시작하기 전에 끝을 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 시작하고 오래 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맞는 일을 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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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연참해여 오랜만이네 연참은...(눈치)BGM은 Almost is never Enough- Ariana Grande입니다.
얘네 둘이 어떻게 될지 여러분 많이 궁금하실듯.. 하하하(기분 좋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