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시아-98화 (98/113)

98화

이리하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닥거리고 있다가 시계를 보고 깜짝 놀라서 여관방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교수님은 과제도 다 안 끝내고 놀러간 나쁜 제자라며 나를 혼내셨고, 라티는 나도 데려갔어야 했는데 가지 않은 나쁜 이모라며 나를 혼냈다.

잘못했다고 한참을 빈 다음에야 둘은 나를 용서해줬고, 우리는 사이좋게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은 하루 종일 놀고, 바로 레디데일 수도로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기왕 특등석까지 왔기 때문에 좀 편하게 가려나했는데, 삼일 동안 타는 열차에서 이틀은 쉬게 두시더니 기차를 둘러보신 교수님은 미니 버전을 그대로 만들어, 하루 온 종일 특등석 의자에 등 한 번 못 기대게 마법 운용을 그리게 하셨다. 교수님… 살려주세요. 족히 스무 번을 그리고서야 겨우 교수님 마음에 찰 정도가 되었다.

교수님은 세세하게 이 마법이 어떤 마법인지, 또 어떻게 발동하는 건지를 물어보셨고, 나는 더듬더듬, 열심히 말했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이 마력을 보는 능력은 그저 보는 것일 뿐이라면 상당히 의미가 없는 능력이었다.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마법이 어떻게 전체적으로 맞물려 움직이는지, 그리고 이걸 깨려면 어떻게 하는 지를 알아야하니까 말이다.

교수님께 한창 부가적인 설명을 듣고 복습을 하고 있자니 멀미가 나려고 했다. 내 얼굴이 창백해지자 라티가 말했다.

“선생님, 이제 그만해요! 이모 멀미하잖아요!”

“곧 휴간데 좀 하면 어떠니.”

“지금도 휴가잖아요, 이모는… 선생님 그렇게 욕심내면 안 돼요.”

라티의 말에 교수님은 쓰고 계신 안경을 주르륵 손으로 끌어내리시더니 약간 기운 빠진 얼굴을 하시더니 말했다.

“그런가… 그래, 욕심내면 안 돼지.”

교수님의 말에 괜히 씁쓸해져서 웃으면서 말했다.

“…조금만 더 하고 덮을게요.”

“아니야, 됐다. 아프면서까지 할 건 아니니까.”

교수님은 가벼운 손동작으로 내 책들을 죄다 움직여 가방 안으로 넣어버리셨다. 괜찮은데, 한숨 쉬듯이 말하자 라티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더니 말했다.

“아니에요! 이제 좀 있으면 라티는 간단 말이에요! 나랑 더 많이 시간 보내야죠!”

그 말이 일리가 있어서 나는 라티를 내 무릎 위에 앉혔다. 레디데일의 수도인 디보타에서 기차여행을 마치고 우리는 헤어지기로 했기 때문이다.

라티도 돌아가야 하지만, 나 또한 방학 중에 오를레아에게 초대받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약속을 깨트리기도 힘들고, 어차피 라티 또한 오페를 퍽 그리워해서 디보타에서의 계획은 취소했다.

“그럼 이모랑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으음~ 거의 이모가 다 해줬는데.”

“아니야, 아직 못 해준 거 많을 거야. 잘 생각해 봐, 라티야.”

“아녜요! 이모랑 밥도 먹었고, 쇼핑도 했고, 게임도 하고… 썰매도 타고! 그리고 야시장도 가고, 뽀뽀도 하고, 목욕도 하고, 군것질도 하고, 또…”

손으로 하나하나 라티가 꼽아가며 함께 한 일을 나열하는 걸 듣고 있자니, 정말 뭔가를 많이 한 것 같았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 정말 추억이 괜스레 떠올라서 나는 라티를 꼭 껴안으면서 말했다.

“보고 싶으면 언제라도 좋으니까 찾아 와, 알았지?”

작고 통통한 손으로 나를 꼭 껴안은 라티가 힘껏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졌다.

“이모, 보고 싶을 거예요.”

“…나도.”

교수님이 나와 라티를 빤히 바라보시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거의 질겁한 표정으로 교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난 끌어안고 그런 거 필요 없다.”

라티가 아냐, 선생님도 필요해요, 하며 교수님의 소매 끝을 당겨 꼭 끌어안았다. 반데라스 교수님은 몹시 불편하고, 매우 어색한 얼굴로 어설픈 손짓으로 내 등을 툭, 툭 두드려주셨는데, 2주 뒷면 학교에서 만나 뵐 분에게 이런 걸 받자니 기분이 참… 사실 나도 교수님을 끌어안고 싶어서 이런 건 아니었는데.

“킁, 배고파요.”

조심조심 서로에게서 손을 떼자마자 라티가 어른스러운 척, 눈물을 쓱쓱 닦더니 말했다. 디보타 열차의 특등석은 따로 요리사가 있을 정도로 귀족과 돈 많은 자들의 특권 같은 것이라, 벨을 울리자마자 접객원이 우리 칸으로 와 메뉴를 보여줬다.

고르고 나니 금방 식사는 도착했고, 코스 요리를 라티까지 챙겨 먹이면서 먹고 나자 슬슬 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기차여행은 먹고 자고,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하품을 하면서 말하자 라티도 하품이 옮았는지 하아암, 하고 입을 크게 벌린 후에 내 옆에 살짝 기댔다.

“먹고 자고 마시고, 겠지.”

교수님은 그리고 무슨 열차에 술을 드시러 오신 것처럼 즐겁게 와인이니, 특산주니 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시키셔서, 접객원은 지친 나머지 병째 한 병씩을 가져다주었다. 옆에서 몇 잔 마시다가 정말 취하는 건 둘째 치고 술맛에 질린 나는 술만 보면 이젠 지긋지긋한데, 교수님은 주당은 주당이신지, 몹시 즐겁게 술을 마시고 계셨다.

안 취하시는 게 신기해.

“그만 드세요, 무슨 술을.”

“늙은이의 즐거움이다.”

“선생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거예요!”

라티의 말에 교수님은 코웃음을 치시더니 말씀하셨다.

“그래, 그럼 나의 즐거움이다.”

“라티는 저런 거 닮으면 안 돼, 알았지?”

“응. 안 닮을게요!”

“얼씨구.”

투덜거리는 교수님을 술에서 떨어트리고 싶어서, 나는 중간의 탁자 위에 열차 내에 구비되어 있는 보드게임 판을 꺼내 올렸다.

“게임이나 해요. 더 잤다간 진짜 뚱뚱이가 되겠어요.”

“라티도 뚱뚱이는 싫으니까 할래요!”

“우리 둘이서 하면 재미 없으니까 교수님도…”

교수님이 한창 즐거운 표정으로 잔에 술을 따르시다가 내 눈을 보시자마자 인상을 팍 찌푸리면서 안 한다, 라고 하셨다.

“이잉, 해요.”

라티가 이잉, 하고 내는 소리가 귀여워서 웃었더니 교수님은 어쩔 수 없지, 하는 30살 후반의 외모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손주 보는 표정을 하시더니 술을 치우시고는 자리에 바로 앉으셨다. 몇 번의 보드게임을 아무리 하고, 하고 또 해도 결국 나와 라티는 교수님을 이길 수 없었고, 나중에 라티는 완전히 삐치고 나 또한 살짝 아주 살짝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서 그냥 담요를 덮고 잠을 청했다.

…교수님은 계속 술을 드시고.

*

“…아, 라시아.”

작게 나를 흔드는 손에 번뜩 눈을 떴더니 교수님의 진파란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

“내릴 준비 하자꾸나, 거의 다 왔다.”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더니 과연 열차의 속도가 찬찬히 느려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디보타에도 윗 지방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확실한 눈덩이가 차곡차곡 내리고 있었고 날씨는 꽤 추운지 불을 피운 곳 앞에서 말을 나누는 사람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라티를 바라보니 세상 모르고 잘 자고 있어서 내가 조심조심 아이를 깨웠다.

“우응….”

“라티야, 우리 이제 내려.”

그 말에야 커다란 눈을 느리게 끔뻑이던 라티가 하품을 하면서 기지개를 폈다. 나도 뿌드드한 몸을 풀고 나니 교수님께서는 걸어뒀던 코트와 목도리, 모자들을 마법으로 움직여 내려주셨고, 내가 코트를 입는 것도 매우 매너 있게 도와주셨다.

“라티도 이리와, 입자.”

코트를 입고 단추를 잠그자마자 라티를 끌어와 코트를 입히고 모자를 씌운 후에 목도리까지 두르자 아주 인형이 따로 없었다. 어쩜, 리콜라티를 쏙 뺐어.

“목도리 갑갑해요.”

“근데 목도리가 하얀색이라서 너무 귀여워, 라티야.”

“…그럼 참구.”

뾰족, 입술을 내밀면서도 귀엽다는 소리는 마음에 들었나보다. 그런 점도 예뻐서, 나는 쪽쪽, 라티의 볼에 두어 번 뽀뽀를 한 후에 모자를 썼다.

교수님이 건네주시는 목도리도 두르고나자 아무래도 기차 안이라 퍽 더웠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 했다. 우리가 옷을 다 갖춰입으실 동안 교수님은 영 미련을 못 버리시겠는지, 남은 술들을 측은한 표정으로 보고 계셨다.

“…교수님 뭐하세요?”

“…이제 옷 입어야지.”

나는 위에서 교수님의 코트를 선반에서 내려서 그에게 펼쳐주었다. 교수님은 손을 한 쪽 넣으시면서 다른 쪽 손으로는 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대셨고, 나는 어, 어! 하면서 그의 잔을 빼앗아 내려놓고는 다른 쪽 손을 넣을 수 있게 했다.

교수님은 말 안 듣는 애처럼 시무룩한 표정으로 코트를 입으신 후에 목도리를 목에 감기 시작하셨다.

“버튼 안 잠그셔도 돼요?”

“음, 귀찮아.”

“아, 정말.”

이 할아버지가, 나는 교수님의 코트의 단추를 잠그면서 잔소리를 참았다.

“모자는 안 쓰셔도 돼요?”

“…모자는 좀 봐주게. 있지도 않아.”

어쩔 수 없어서 라티를 품에 안았더니 교수님이 라티를 내게서 받아 안으셨다.

“어, 라티는 제가 들게요. 짐 가방 들으셔야지.”

“…늙은이한테 무거운 걸 시키는군.”

“짐 가방에 아무것도 안 들었잖아요. 라티가 더 무거울 걸요?”

“그래, 그런데 왜 자네가 들려고 해?”

“보기가 나쁘잖아요.”

“…그냥 걸어갈까요?”

라티의 말에 나는 재빨리 교수님에게서 라티를 빼앗듯이 안고는 교수님께 짐 가방이요, 라고 말했다.

“끙.”

교수님이 손을 휘둘러 마법으로 가방을 내리시고는 양 손에 들었다. 기차에서 차례로 내리자마자 찬 바람에 몸이 다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교수님은 가벼운 마법으로 우리를 따뜻하게 만들어주셔서, 곧 그런 건 느끼지도 못했지만. 역에 내려서 한적한 곳으로 말없이 한참을 걷고 나서야, 나는 라티가 훌쩍거리는 것을 눈치챘다.

“…이모는 이제 라티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흑, 라티는, 끄흑, 어떡해요?”

아이의 따끈따끈한 몸을 끌어안고 있자니 괜히 눈물이 나려고 했다. 평생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만나려면 만날 수도 있는데. 정말 괜한 건데.

“보고 싶을 거야, 라티야.”

결국 참지 못하고 라티의 머리에 얼굴을 기대자마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라티도 내 눈물 때문인지 더 크게 울기 시작했고, 나도 괜히 눈물이 더 많이 흘렀다.

“흑, 흑… 이모… 이모가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나도, 나도 라티가….”

“이모 때문에, 나는… 이모가 말해줘서,…”

꼭 끌어안고 한참을 울다가 교수님이 한숨을 내쉬더니 우리를 어색하게 끌어안아주셨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따뜻했다.

============================ 작품 후기 ============================

토/일 안 옵니다! ^0^ .... 아오 맘에 안들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