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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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온 몸이 뻐근하고 아래가 당겼다.
부스스 이불 속에서 빠져나가자마자 공기가 낯설게 내 가슴에 닿았다. 추운 것보다 허전해서 시트를 끌어 옷에 감자마자 눈 앞에 아이보리 색 천이 보였다.
이리하 옷이구나. 일단 끌어당겨 대충 몸에 걸치자 이리하 냄새가 나서 민망하기도 하고…. 그보다 이 옷은 도대체 어떻게 고정시키는 건지 모르겠다. 이걸 대충 묶으면 되는 건지, 뭔지.
옆을 살펴보자 이리하는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이 사람 참 잘 자네, 곤하게… 약간 때려주고 싶어서 심술궂은 얼굴을 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단 덜 아팠다. 깨우기 민망해서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오자 옆에 자던 그가 움찔, 하고 잠에서 깨어났다.
“…벌써 깼나.”
“주무세요.”
놀라서 그에게 속삭이자 그가 아냐,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반라의 그가 잠에서 덜 깬 표정으로 눈을 비비더니 크게 하품을 했다.
“왜 일어났어, 더 자지.”
“이제 가야죠.”
내 옷을 주워들면서 말했다. 씻고 싶지만, 돌아가서 씻는 게 맞겠지. 그는 내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말했다.
“앉아봐.”
“…옷 입고 바로 가야해요.”
“알아. 일단 앉아봐.”
떨떠름하게 다가가서 무릎 위에 얌전히 옷을 내려놓고 이리하 쪽으로 고개를 고정하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가 입고 있던 그의 옷을 벗겼다.
“악!”
시트로 급하게 몸을 가리면서 가야한다니까! 하고 눈을 부라리자 이리하가 웃으면서 말했다.
“안 해, 안 해. 많이 했어.”
당연하지. 인상을 찌푸리고 그에게서 멀어지자 진짜야, 하고 이리하는 내가 입었던 그의 옷을 대충 걸치더니 내가 수습도 못했던 끈을 능숙하게 묶어 원래 그 자신이 입고 있던 모양 그대로 갖춰 입었다.
“다음에 오르제국 옷 입는 법을 알려주지.”
“…왜요? 입을 일도 별로 없는데.”
이리하는 그가 밤에 던져뒀던 내 옷을 제대로 수거하면서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숨기지도 않으며 말했다..
“어떻게 입는 지 알아야 벗기지. 다음엔 그대가 벗겨줬으면 좋겠거든. …끈도 제대로 못 풀 줄은 몰랐어.”
“…그거 참 죄송하네요….”
민망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시트 속으로 더 단단히 숨자 그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내게 다가와서 이마에 키스를 하고는 말했다.
“좋은 아침이야.”
부드러운 목소리가 하얀 시트보다 더 포근했다. 얌전히 좋은 아침이에요, 하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뒤돌아봐.”
“왜….”
“옷 입혀주려고.”
뭐라고요, 하면서 웃었더니 이리하가 어서, 하면서 내 옷을 흔들었다. 왜 저러신담, 하며 한숨을 쉬고는 얌전히 시트를 엉거주춤 끌어안은채 등을 보이자 그가 손, 하고 내 오른 팔을 잡아 끌었다.
이렇게 된 거 협조해야지, 하고 손을 뻗으니 브래지어 한쪽 끈이 쑥, 하고 들어왔다. 인형 옷을 입히는 데에 신이 난 사람처럼 다른 쪽 팔도 입히시더니 내가 제대로 모양을 잡자 머리카락을 슥, 넘기시곤 단단하게 뒤에서 묶어 쪽, 하고 소리가 나게 키스를 했다.
“…재미있으세요?”
“응.”
그가 내 금발을 왼쪽 어깨로 한번에 넘기더니 목 뒤에 키스를 하면서 웃었다.
“이리하.”
진짜 가야한다니까. 난처함을 담아 불렀더니 알았다며 만세를 시키기에 번쩍, 손을 들었더니 또 귀엽다며 난리다. 같이 잔 사람이 새삼스럽게 이렇게 예쁘다고, 귀엽다고 혼자 난리를 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하기도 하고, 쑥쓰럽기도 하고, 참….
“자, 이쪽 팔.”
“네에.”
얌전히 시키는 대로 했더니 또 금세 드레스까지는 입을 수 있었다. 뒤의 단추와 리본을 매주면서 그가 말했다.
“보통 옷이 다 이런 디자인인가?”
“…음, 보통은 그렇죠?”
“어제 찢을 뻔 해서… 입을 때 안 불편한가?”
“안 찢어졌죠, 설마?”
“당연하지.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인내심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그의 말에 섞인 성적인 농담에 아 정말, 하고 그를 째려봤더니 그가 유쾌한 얼굴로 내 입술에 쪽, 하고 뽀뽀를 하면서 말했다.
“좋은 아침이야.”
“아까 인사 했잖아요.”
“또 하고 싶어. 계속 계속, 매일 매일….”
그가 약간 씁쓸한 얼굴을 하고 그렇게 속삭이면서 내 턱을 잡아 당겨 키스했다. 나는 그게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걸 알았지만, 굳이 말을 꺼내 지금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그도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기를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의 뺨을 두 손으로 잡으면서 말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응, 하고 그가 눈을 감았다. 나는 그의 입술에 키스해주었다. 그가 가만히 내 키스를 받다가 내가 그의 입술을 깨물자 눈을 천천히 뜨더니 진지한 듯, 장난스러운 듯 말했다.
“그래서, 내가 속옷을 마저 입혀줄까, 아니면…”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게 해주세요, 제발.”
그 말에 그가 아쉬운데, 하며 웃었다. 겉옷까지 모조리 입고 나자 지독하게 더웠다. 내가 옷 입는 걸 빤히 바라보던 이리하는 내가 모자를 쓸 때쯤에야 다가와서 말했다.
“…자주 오게. 알았지?”
“연락할게요. 연락하고, 그리고 나서 올게요.”
그러자 그가 한숨을 쉬더니 잘 도착했는지 알려달라고 하며 내게 쪽, 쪽, 자꾸만 뽀뽀를 했다.
“더운데.”
“더위도 이기는 사랑을 보여줘.”
“…옷 바꿔 입으시면 생각이 달라지실텐데.”
퉁명스러운 말에 이리하가 무드가 없어, 하며 나를 타박하고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쉽군.”
“저도 그래요. …금방, 금방 올게요.”
놓고 싶지 않은 게 너무 분명한 손이 아주 천천히 떨어졌다. 나는 다가가 그의 입술에 키스를 짧게 하고, 구두를 발동시켰다.
“…안녕.”
“다녀와.”
그의 말에 미소를 지으면서 라티의 옆, 이라고 속삭였다.
라티는 곤하게 자고 있었지만 교수님께서는 벌써 일어나 신문을 읽고 계셨다.
“이제 오냐.”
“…어… 벌써 일어나계셨어요?”
“나이 들면 아침 잠이 없어져.”
안경을 끼고 신문을 읽던 교수님의 모습이 좀 웃겼다. 삼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데 저런 말씀을 하시면서 무슨 돋보기 같이 생긴 안경을 끼고 계시니까 너무 안 어울렸기 때문이다.
“왜?”
시선을 느끼셨는지 불퉁한 목소리로 나를 바라보시기에 아니에요, 하며 웃었더니 교수님이 어깨를 으쓱하시더니 손으로 오른쪽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샤워는 저 쪽.”
“아, 감사….”
거기까지 말하고 소름이 쫙 끼쳤다. …뭐지. 어떻게 아시는 거지? 혀 끝에 어떻게 아시냐는 말이 대롱대롱 달렸다가 쏙 들어갔다. 그래, 물어봤자 좋을 게 없어. 그냥 나도 모른 척, 얌전히 샤워를 하러 갔다. 깨끗하게 씻고 나오자 교수님은 내 머리를 마법으로 단숨에 말려주시더니 내게 말했다.
“식사는 라티 일어나면 하자꾸나.”
“네.”
다시 소파에 앉아 신문을 한참 읽으시기에 괜히 눈치를 보다가 자는 라티 옆에서 교수님이 과제로 읽으라고 시킨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참 그렇게 모닥불 타는 소리만 탁, 타닥, 그러다가 라티가 다 잤는지 배고프다면서 나를 끌어안으면서 애교를 부렸다.
“헤헤헤.”
귀여워서 꼭 끌어안아주면서 잘 잤어? 그렇게 물으니 라티가 고개를 붕붕 끄덕이면서 나를 꼭 껴안았다.
“이제 저, 음, 뭐라고 불러요?”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티를 바라보았다. 교수님도 그 말이 의외였는지 가만히 라티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계셨다.
“상냥하고 예뻐서… 계속 계속 엄마라고 하고 싶지만 그러면, 진짜 엄마가 섭섭해할지도 모르니까….”
라티가 더듬더듬 한 말이 기특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서운하기도 해서 라티를 세게 끌어안자 라티는 내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못내 본인도 아쉬운지 울먹울먹 하는 게 느껴졌다. 반데라스 교수님은 가만히 그런 우리 둘을 보다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둘이 알아서하고, 난 밥이나 차리러 가마. 라티 너는 반숙이냐 완숙이냐.”
“…난 완숙이요.”
“라시아 너는.”
“저는 반숙….”
이 말을 하는데 어찌나 웃기던지. 나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고, 라티도 나한테 기대어서 한참을 웃고는 말했다.
“선생님 무드 없어. 이모야는 안 줄 거예요.”
아, 이모인건가. 그럭저럭 맞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난 리콜라티와 친분이 있었으니까. 내가 납득하고 있자 교수님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몹시 담담하게 대꾸했다.
“너네 이모야는 이미 임자가 있어요.”
“…누군데요?”
나는 식은땀을 잠깐 흘리면서 말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라티 거 아닐까?”
그러자 라티가 정말? 하면서 내 품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얏, 하고 아이를 안아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교수님이 상을 차리는 걸 라티와 돕고 자리에 앉으니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나저나, 들리고 싶은 곳이 한 군데 있는데.”
“응? 어디요?”
“카리페니아 산맥 마을인 캄톤.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동물이 있단다.”
라티가 윽, 하고 인상을 팍 찌푸리면서 내 쪽을 향해서 웅얼거렸다.
“선생님은 동물 너무 좋아해요.”
“정말?”
“응. 나보다 동물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심각하게 말하는 라티의 얼굴이 웃겨서 킥킥거리면서 난 라티가 더 좋아, 라고 말했다. 라티는 사실 선생님도 절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하면서 속삭였다. 요 앙큼한 아가씨 좀 봐.
“그보다 카리페니아 산맥에 마을이 있어요?”
“음. 드물게 눈보라가 약한 곳이 있기도 하고… 그나마 살만한 곳이 있단다. 대부분이 삶의 방식이 특이한 부족들이지. 산맥 자체가 험준하니까 세금도 안 내고, 레디데일에 속했다고 보기도 힘들고 말이야. 다만 영토문제도 있고 여러가지 문제가 겹쳐서 '일단은' 레디데일 국에 포함하긴 한다만.”
“그런데 무슨 동물이에요? 귀여워요?”
라티가 포크로 완숙 달걀을 찌르면서 물었다. 나는 조심조심 라티가 먹기 편하게 음식을 잘라주었고, 교수님은 조심스럽게 계란을 통째로 빵 위에 올리시더니 말했다.
“너랑 비슷한 크기야. 귀엽다.”
“나랑 비슷한 크기의 동물인데 귀여워요? 엄청 무섭겠다!”
라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내게 어떡해요,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웃으면서 라티랑 비슷하면 귀엽겠네, 하고 말해주었고 라티는 그런가? 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너 닮았단 소리는 안 했다.”
눈에 힘을 주고 교수님을 노려보자 교수님은 모르는 척 커피를 따라 마시기 시작하셨는데, 라티는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더니 말했다.
“선생님이랑 닮았을 거야. 얄밉고 크고!”
한숨을 푹, 쉬면서 교수님에게 말했다.
“애 놀리는 거 재밌으세요?”
“난 쟤가 저렇게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노려보면 귀엽더군.”
그 말에 라티가 흥, 하고 콧방귀를 세게 뀌었지만 교수님이 전혀 미동도 없자 다시 한 번 더 흥, 하고 소리를 냈다.
“식사하는데 코 푸는 거 아니다.”
라티는 이익, 하고 분해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내게 편을 들어달라는, 울기 직전의 얼굴을 해보였다.
“선생님 너무 미워요! 때려주고 싶어요!”
나는 어쩜 저렇게 애 같으실까, 하고 한숨을 내쉬다가 라티에게 말했다.
“교수님이 라티한테 캄톤에서 맛있는 거 많이 사주시고 싶으셔서 저러시나보네.”
“…응?”
“라티가 삐칠 때마다 과자 사주시잖아. 맛있는 걸 사주고는 싶으신데, 그냥 사주시기 민망하니까 저렇게 하시는 거야.”
교수님이 내가 언제, 하는 얼굴을 하시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얌전히 그렇군, 하고 꼬리를 내리셨다. 아주 애를 하루에 한 번은 울리셔야 마음이 편하시지.
“…정말?”
“정말.”
그제서야 기분이 풀린 라티가 교수님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나는 이게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고… 그렇게 줄줄이 먹고 싶은 것을 꼽기 시작했다. 교수님은 그래, 그래, 하고 성의없이 대답하시다가도 애교가 귀엽긴 하셨는지 피식피식 웃으셨다.
“다 사줄….”
나는 교수님의 정강이를 식탁 밑에서 세게 찼다.
“…하나만 사주마.”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나는 라티에게 웃어주면서 밥 다 먹어야 사주실거야, 하며 라티 분의 먹을 걸 그녀 쪽으로 밀어주었다. 반데라스 교수님은 걷어차인 정강이가 아프긴 한지, 식사 틈틈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다리를 쓰다듬으셨다.
============================ 작품 후기 ============================
왠지 이리하 애인으로 두고 반데라스랑 살림을 차린 것 같은....(침착)저는 오늘 마사지를 받고 왔는데, 어깨 아픈게 진짜 훨씬 나아졌어요! 최고!! ㅇㅅ<ㅋㅋㅋㅋㅋㅋㅋ 라시아는 망상이 많이 드는 소설이라,
각자 루트가 있어요
1. 다니엘 해피(아비게일 대신 약혼)/ 새드(라시아 공작되고 다니엘이랑 연애)
2. 시드 해피(방랑가 엔딩)/ 새드(리콜라티랑 비슷한 느낌 or 시드 집착)
3. 반데라스 교수님 해피(교수님 저주 풀어주고 구원)/ 새드 (저주 풀어주고 교수님 죽음)
4. 이리하 해피(->지금 이거 타고 있음)/ 새드(-> 얀데레 엔딩) 이렇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그리고 지금 다른 것도 ㅋㅋㅋㅋㅋㅋ 다 탈 수 있는 루트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긴장됨. 내 마음.. 바뀌지 마라.
그리고 현재 용량 줄이는 중이에요... 다른 소설에 비해서도 너무 길어서 ;;;
흑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반성하고 있습니다. 줄이고 만다.... 교정할 때 넘 힘들거 같아서요 (침묵)
오늘 그냥 미자도 볼 정도져? 헿. 섹드립 알아 들으신 분 있으시려나!
저는 그럼 이만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