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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94화 (94/113)

94화

라티가 깊이 잠에 들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티에게 한 스스로의 말이 내 발을 움직이게 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리하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와의 미래는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고, 나는 아직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난 아마도 평생 한 남자의 아내로만 사는 삶에는 만족할 수 없을 거였다. 그러니 샤하레로서 그의 옆에서 살아가는 건 할 수 없을테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를 지금 당장… 좋아하지, 아니,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라티에게 내가 한 말은 옳았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지금 당장… 당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심이 서자마자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구두 뒷굽을 부딪혔다. 탁, 탁, 탁. 마력이 구두에서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속삭이듯이, 분명한 어조로 나는 말했다.

“이리하의 옆.”

어떤 결과가 나오든 후회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고 나는 눈을 감았다. 바람같은 마력이 내 몸을 감싸고 나를 이동시키는 게 느껴졌다. 긴장이 되고, 떨려서… 도저히 제대로 서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손이 저절로 흔들리고, 다리가 후들거려서 온 몸에 힘을 주고 섰다.

“……젠장.”

술 냄새가 났다. 그리고 낮은 음색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리하의 갈라진 목소리도. 아주 천천히 테라스의 안에 내려앉는 나를 그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욕설을 뱉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우리 둘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까 고민하며 입술을 떨고 있었고, 그는 나를 바라보다가 얼굴을 손에 파묻었다.

“…안 온다고 했잖아.”

나는 고개를 숙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안 온다고 했잖나, 라시아. 왜… 왜 거짓말을 해. 왜 나한테, 나한테 정말 왜 이래, 당신.”

나는 그가 이토록 무너진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지독하게 연약한 모습은 낯설었다. 붉어진 눈가를 그가 누르면서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더없이 크기만 했다.

“술… 드셨네요.”

“안 온다고 했잖아. 나한테… 당신이, 나를 버리고, 그렇게 갔잖아. 우리를 버리고. 나를 좋아하면서, 당신을 좋아하는 나를 버리고….”

그는 몹시 두서없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보였다. 어쩌면 나를 환상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떨리는 나 스스로를 저 안으로 숨기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대는 뭐가 그렇게 쉬워… 왜 그렇게 쉬워. 나는 하나도 쉽지 않은데… 그대를 떠나는 것도, 그대를 잡는 것도 난 힘들었어. 나라고 모를 줄 아나. 그대를 나라고, 그 자리에…”

묶어두고 싶은 줄 아냐고,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를 숙였다. 안타깝고, 미안하고… 그리고 슬펐다. 내가 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몰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이렇게까지 실감한 적이 없었다.

“나도 알아. 그대는 그런 자리에 있기에는 아까운 사람이야. 모든 자유를 거머쥐고, 다 가졌지. 이제 떠날 차례인 것도… 알아, 아는데…”

이리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연약해보였다. 그제서야 그가, 내 또래처럼 느껴졌다.

“나한테 잡혀줘. 제발, 제발 잡혀줘, 라시아.”

손을 뻗어서 그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이리하를 내가 얼마나 강하게 보고 있었나. 이 사람이면 내가 뭘 해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내 마음 한 켠에서 그렇게 정해놓고 있었나보다.

내 이성적인 판단에 응해줄 거라고. 똑똑한 사람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니까. 세상 그 누구보다 단단하게, 황제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니까….

“괜찮을 줄 알았어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천천히 떼어서 소리를 냈다. 내 목소리도 너무나 깊이 잠겨있어서, 스스로에게조차 낯설었다.

“이성적인 분이시니까…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결국에는… 제가 옳은 걸 알고, 우린 결국 각자의 길을 갈 거라고….”

그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내 손 끝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가 틀렸어요.”

웃고 싶은데, 웃어지지가 않았다. 이리하는 내 손을 잡아 그의 뺨에 갖다대었다. 그는 내 손바닥에 키스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조금 울었다.

“당신한테는…”

내 손가락 끝을 꽉 쥔채로,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나는 감히 소리를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이리하를 바라보기만 했다.

“당신한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줄 알았어. …우리 사이가, 지금… 내가 당신이랑 함께 느끼는 이게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줄 알았어.”

결국 울음이 터졌다. 눈을 감고 고개를 저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눈을 세게 감기만 했다.

“아니에요.”

“미래를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닐까봐.”

그가 나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허리를 숙여 내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올리고, 그 또한 고개를 숙였다.

“무서웠어.”

울음 소리가 흑, 하고 났다. 엉엉 울고 싶기도 하고, 조금도 울고 싶지 않기도 했다. 어떤 말을 하는 것도 소용이 없겠지만, 그래도 해야하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 안의 모든 용기를 쥐어짜 두 손을 뻗어 그를 잡았다.

“미안해요.”

내가, 당신이, 아니, 그리고 우리가. 전부 다.

“나도… 나도 무서웠어요.”

그가 고개를 들어서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 이건, 내 꿈인가?”

웃음이 났다. 고개를 저으면서 눈물을 삼키고 그를 끌어안았다. 그가 나를 으스러져라 껴안으면서, 내 정수리에 코를 파묻고 말했다.

“그러면 이건 그대의 꿈인가보군….”

그가 나를 떼어냈다. 그러더니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아주 조심스럽게 맞닿았다. 나는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그를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의 목에 천천히 내 팔을 감으면서, 나는 속삭였다.

“사랑해요.”

이리하는 그 날, 나를 가졌다. 내가 그를 가진만큼, 꼭 그만큼 공평하게.

============================ 작품 후기 ============================

일부러 자른 것은.. 여러분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섭니다설마 이런 전개일 줄은 몰랐겠지.

용량이 짧은 것도 모두 계산된..!! (아니다)이 부분 넘 적고 싶었어요! ^ㅅ^ 신난당얘네 다음 화는 노블인데 저는 그런 걸 적는 작가가 아니므로 (공저는 제외해주시죠!) 없는 것입니다.. 얘네 자는 거 뉘앙스 알아채셨져?

못 알아챘으면 후기에서 알아채시는 것으로.

폭풍 연참으로 몹시 피곤해진 저는 잠을 자러... 내일부터는 또 신나는 겨울 왕국 렛잇고렛잇고 하는 느낌의 연재가....될 것 같습니다!

진짜 돌고돌아서 연애가 시작된.... 연애만 시작된.... 여러분 빵빠레를 울려주세요! 신난다 신나 (그만 해)코멘을 달라........ 코멘을.....(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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