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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93화 (93/113)

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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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라티가 평생 살 곳을 고르는 건데 오페와 같이 하지 않아도 되나, 좀 걱정스러웠지만 당장 필요한 게 아니라서 그냥 유람 비슷한 거라는 말에 안도했다. 아무래도 아이 성장을 종잡을 수 없으니까 라티가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쪽에 초점을 맞췄다는데도 이렇게 예의바르고 예쁘게 자라줘서 고맙다고 할까… 교수님 말로는, 드래곤조차도 종잡을 수 없는 생명체인데다 애교가 많아 드래곤들이 예뻐 죽는다고 한다.

…하기사 나라도 그랬을 거니까.

어쨌든간에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지나가는 길에 동굴을 발견해서, 이쯤 하고 좀 쉬기로 했다. 불을 피우자마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나는 기절하듯이 쓰러져 잠들어버렸고, 그 길로 꽤 오래 잤던 것 같은데…

눈을 뜨고 기지개를 피며 일어나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동굴의 입구 근처로 가니 누구의 침범도 없었던 것 같은 하얀 눈밭이 펼쳐져있었다. 반짝거리는 태양에 눈부시게 빛나는 흰 색에 넋을 잃고 풍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순결하고 고요한, 그리고 곱다고밖에 할 수 없는 세상의 모습에 마음이 평화로워 멍하니 서있자니 누군가의 한 손이 내 눈을 감싸서 시야를 가렸다.

"…교수님?"

"계속 바라보면 눈이 상해서 심하면 잠시 동안 실명할 수도 있다. …너도 라티도 어지간히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얌전히 눈을 감고 있다가 장난기가 솟아 일부러 열심히 눈을 깜빡깜빡 거렸다. 그러자 교수님께서 엄한 목소리로 그런 장난하면 좋니, 하고 간지러우신지 내 눈을 꾹 누르다 떼어냈다. 나와 교수님이 장난을 치는 게 재미있어 보였던지, 라티는 나도 해줘요! 하고 스승님을 밀쳐내고선 내 속눈썹에 닿도록 제 손을 내 얼굴에 댔다.

작은 손에 딱 눈을 붙인 채 열심히 눈을 깜빡거리자 라티는 재미있고 신기한지 꺄르르 웃으면서 좋아했다. 사실 내 속눈썹보다 라티의 속눈썹이 길고 예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도 해볼래, 라며 하나도 안 보이는 라티를 더듬어 라티의 눈을 덮었다.

"라티도 엄청 길어. 느껴지지?"

정말! 신기해! 신이 난 우리 둘을 교수님의 목소리가 비웃었다.

"바보들, 서로 눈 가리고 자-알 하는 짓이다."

라티가 내 손에 눈이 덮힌 채 큰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은 속눈썹이 짧아서 만져지지도 않아서 질투하는 거죠?"

그러자 교수님이 몹시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씀 하셨다.

"못된 소리를 하는 아이는 간식 없다."

그 말을 듣자마자 깜짝 놀라 손을 움찔한 라티는 재빨리 쪼르르 교수님께 달려가서 말했다.

"선생님, 잘못했어요. 라티가 뽀뽀해줄게, 용서해주세요. 간식 좋아."

그러자 교수님은 흥! 하는 얼굴로 간식만 좋아해서 은근슬쩍 빠져나가려고 하는 건 안 통해, 라고 말씀하시며 내 쪽으로 다가와 너무 오래 잤으니 문제가 없는지 보자며 열을 재셨다.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하다가 피식 웃으면서 고민에 빠진 라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열심히 입모양으로 힌트를 알려주자 라티는 오호! 하는 얼굴로 교수님께 뽈뽈뽈 다가와 그의 옷자락을 주욱 잡아당기더니 말했다.

"선생님도 좋아요!"

교수님은 흐음, 하는 얼굴을 하더니 내 얼굴에서 손을 떼고서는 고동색의 마법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배열에 꼼꼼히 바라보고 있자니 내 몸으로 마력들이 하나 둘 들어왔고, 나른한 온기가 지나가기도 전에 교수님이 물었다.

“이게 무슨 마법이지, 라시아?”

“힐링이요.”

그러자 교수님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시더니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시고는 안절부절 못 하는 라티를 바라보다가 정말? 이라고 다시 물었다. 라티는 그야말로 고개를 붕붕 끄덕이며 선생님이 제일 좋아요!, 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다가 스승님의 능글맞은 표정에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서 선생님은, 심술 꾸러기여요! 하더니 내 품으로 뛰어들어 제 얼굴을 숨겼다.

웃음을 겨우 참으면서 나는 내 허리를 꼭 껴안고 약간 우는 라티를 달랬다. 아무튼 오페를 만나서 애를 어떻게 이렇게 키운 건지 육아법을 물어야지, 안 되겠다. 어쩜 이렇게까지 애가 귀여운가 몰라.

교수님이 마법으로 동굴을 마치 여관처럼 꾸며서 우리는 상당히 안락하게 지낼 수 있었는데, 밥까지 먹고 장작까지 피우자 그야말로 동굴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가 소환한 가구 중 하나인 소파에 그는 얌전히 누워 있었고, 라티는 내 무릎을 베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 정확히는 라티를 위해 책을 읽어주고 있었는데, 라티는 열심히 듣고 있었지만 교수님은 웬일로 눈을 얌전히 감고 잠에 빠진 듯 보였다.

“교수님 주무신다.”

그 말에 라티가 제 입을 합, 하고 막더니 웃음을 참는 소리를 냈다. 우리는 가만히 교수님이 잠든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키득거리는 소리를 겨우겨우 참으면서 그냥 웃고 있다가 책장을 넘겨 첫 줄을 읽으려 하자 라티가 말했다.

“엄마는… 있죠.”

“응?”

의아한 얼굴로 라티를 내려다보니 라티가 처음 만났을 떄와 비슷한, 몹시 불안한 얼굴로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엄마는, 아빠가… 나를 낳아서 후회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 말에 숨이 콱, 하고 막혔다. 나는 라티의 손을 꽉 잡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라티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

“이건 비밀인데… 음, 나 미워하면 안 돼요, 알았죠?”

고개를 끄덕이면서 약속할게, 하고 속삭이자 라티는 몹시 머뭇거리다가 약간 눈물을 글썽거리다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엄마가 날 낳다가 죽었대요.”

그 소리는 어디서 들은 걸까.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라티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속삭였다.

“안 미워해. 누구도 라티를, 그걸로 미워하지 않아.”

그러자 라티가 고개를 붕붕 젓더니 내 쪽으로 좀 더 다가와 내 몸에 찰싹 달라붙더니 내 배에 얼굴을 파묻고 약간 훌쩍거렸다.

“아빠는 엄마를 많이 사랑했대요… 정말, 엄청 많이….”

허리를 꼭 감은 아이의 보드라운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왜 라티가 집을 나왔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나를 가졌을 때, 죽을 걸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아빠가 나를 없애라고 그랬대요…. 어른들이 나 없는 줄 알고, 그렇게 말했는데, 지금은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그랬는데…”

아이의 눈물이 몹시 뜨겁게 느껴졌다. 흐느끼면서 우는 라티를 도저히 울지 않고 바라볼 수가 없었다. 뜨거운 것이 자꾸 치닫고 올라와 겨우 삼키고, 조용조용히 말했다.

“오페는 라티를 아주 많이 사랑해.”

“그치만, 나, 엄마를…”

“라티는 리콜라티가 남기고 간 유일한, 아주 소중하고 소중한 단 하나뿐인 아이야. 오페는 라티를 아주 많이 사랑할 수밖에 없단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는 울지 않기 위해서 눈에 힘을 주고 말을 이었다.

“네 아빠는 길을 잃었었어. 이제 살 수가 없다고 했었단다. 리콜라티가 없어서, 도대체 어떻게 살 지 모르겠다고 했었어. 그리고 내가 너에 대해서 말했더니, 오페는 그러면 너를 위해 살겠다고, 그렇게…”

그렇게 말했어. 그 용에게는, 너 밖에 없단다. 그렇게 말하자 라티는 울먹이는 얼굴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빠가 후회하지 않을까요? 나만 없었으면, 아빠랑 엄마는…”

“라티. 너를 가졌을 때 리콜라티는 행복했어. 어떤 미래가 오든, 리콜라티는 널 사랑하고, 오페를 사랑하고, 그리고… 무슨 결과에도 신경 쓰지 않고 너와 네 아빠를 선택했단다. 네 아버지도 마찬가지야. 오페는 인간인 리콜라티를 사랑했어. 분명히 리콜라티가 먼저 죽을 걸 알고 있으면서도 리콜라티를 선택하고,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단다.

너도….”

나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라티를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너는 사랑할 만한 아이야. 세상 누구보다도 그래. 누구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과 선택을 통해서 태어난 아이야, 라티. 아빠랑 엄마, 그리고 나랑 교수님, 또 르웬이랑… 네가 아는 모든 존재들이 널 사랑해. 네가 어떻게 크고, 언제 성장하고, 언제 죽을지 몰라도… 난 널 만난 걸 후회하지 않을 거야.”

정말이야, 하고 라티를 꽉 끌어안으니 라티가 그제서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 아이의 삶은 앞으로도 얼마나 힘들까. 누구도 성장 속도를 가늠하지 못하고, 어떤 병에 걸릴지도, 언제 죽을 지도 아무도 모른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삶은, 이 작은 아이에게 얼마나 큰 무게였을까.

“나는 라티를 너무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몇 번이고 속삭이면서 아이와 함께 울었다. 어떤 미래가 오든지, 나는…

“라시아, 라시아… 엄마…!”

눈물 범벅의 라티를 꼭 끌어안았다. 지금 안지 않으면 놓쳐버릴 것 같아서. 지금 안아주지 않으면, 이 아이가 내 사랑을 모를까봐.

그렇게 될까봐.

============================ 작품 후기 ============================

헤...(눈치)

슬프네요 누가 라티를 괴롭혔나몰라(외면 슬슬 제 속도를 여러분들이 감당 못 하실까봐 걱정이 되는 군요.. (....) 반성.

ohOh 9등 ohOh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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