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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91화 (91/113)

91화

앉은 상태로 이동하다보니, 자연히 엉덩방아를 찧게 됐다. 아… 이 아픔, 오랜만이네. 나는 나를 어안이 벙벙해서 내려다보는 이리하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사막이라 무척 더울 줄 알았는데, 건조한 나라라 밤이라 그런지 열을 보관하질 못해서 밤에는 유난히 추운지라, 오히려 적당히 포근하고 좋았다. 이리하는 민망해 하는 내게 손을 내밀어서 내가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감사합니다. …음, 죄송해요, 늦은 시각에.”

이리하는 내가 잡았던 손을 바라보고 있다가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네?”

그는 나를 보다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는 건, 적응이 정말 안 되는군.”

역시 실례구나… 부끄럽고 당황스러워서, 얼굴이 빨개진 채로 죄송해요, 라고 속삭였다.

“죄송해요, 역시 민폐죠… 음… 어, 죄송해요. 저는… 저는 이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황급하게 절을 하고 몸을 돌렸는데, 그가 내 손을 잡았다. 이리하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는 나를 바라보더니, 조금 붉어진 얼굴을 한 채, 내게 중얼거리듯이, 그러나 분명하게 그 낮은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내가 적응이 안 되는 것 중에 가장 사랑하는 게 이거야… 그러니,”

그가 내 팔을 잡은 손을 천천히 내려, 내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말했다.

“그러니, 가지 마.”

잡힌 손이 안타깝고, 이상하게 떨렸다. 부단히 충동적으로, 나는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면서 말했다.

"안 갈게요.”

이리하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고 말했다.

“차 한 잔 주실 수 있으세요?”

“…준비시키지.”

이리하는 나를 방 한 쪽에 숨겨주시고 사람을 불러 준비를 시켰다. 사람들이 물러나고 나서 그가 의자를 권했고 그 자리에 앉아 그가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들고 향을 맡았다. 카모마일 향이 유난히 향긋했다. 한 모금 마시고 가만히 차를 들고 벽에 기대어 서있는 이리하를 바라보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무릎 걷어차러 왔어요.”

“…진짜로 와 줄 줄 몰랐어.”

그는 내가 진짜로 왔다는 것에 몹시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약간 후회하는 얼굴을 하더니, 조용히 물었다.

“그 때 몰아쳐서… 미안했네.”

순간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다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서 말했다.

“그래도 마음에는 변화가 없으시죠?”

“…나는… 그래. 그대를 순간이라도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할 거야. 그대가 아무리 헤어지는 게, 미래가… 세상 전부가 무섭다고 해도, 나는… 나는 그럴 수밖에 없어.”

그저 그를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그가 찻잔을 내려놓더니 나를 외면하면서 말했다.

“그대가 틀렸어.”

뭐에 관해서? 재촉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자 그는 조용히,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것 같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사랑을 몰라. 그대를 모든 아픔에서 구해주고 싶지는 않아. 나는… 그대가 아프건 말건, 나와 지금 당장 있기를 원하고, 그리고 만약 그런게 사랑이라면, 나는…”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뜨거운 습기가 내 몸 안에서 가득 차는 걸 견딜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소리 없이 조금, 아주 조금 울었다.

“아니에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당신이 상처받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와 나는 다른 사람이고,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좋아하니까, 아니 어쩌면…

“당신은 사랑을 알아요, 이리하.”

굴러 떨어지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받아내면서 나는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사랑을 알아요…”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정적 사이로 나는 숨을 쌕쌕 몰아쉬면서 조용히 덧붙였다.

“제가… 너무 무서워서, 무서워서 그래요.”

공포에 질린 목소리를 그가 알아 들었을까. 그래, 나는 무서웠다. 그를 사랑하게 될까봐, 사랑하게 되어서, 나 스스로를 전부 잃어버리고 그저 그의 한 부분이 되어버릴까봐. 내가 되고 싶었던 나 자신을 모두 잊고, 변해버릴까봐… 죽을 만큼 무서웠다.

“…알아.”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세 걸음이면 닿을 우리의 거리가 순식간에 너무나 멀어졌다. 내 발목, 그의 발목을 누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우리는 움직일 수 없었고, 우리 위의 공기는 지독하게 무거워지기만 했다.

“… 잘… 지내나?”

그의 질문에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었고, 좋은 사람이었고,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이렇게 계속 우울하게 있고 싶지 않았다. 마음 속 한 켠으로는 계속해서 도망가라고, 이제 됐다고, 그만 하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네. 아는 분의 딸이 놀러 와서 함께 여행하는 중이에요.”

“여행이라. 그대 방랑벽도 못 말릴 수준이군.”

“방랑벽까지는 아니에요. 제 첫 여행이 오르로 온 건데, 이리하가 초대하신거고….두 번째는 일 때문에 오켈뷔르로 간 거니까 엄밀히는 여행이 아니고, 세번째가 지금 하는 건데… 애초에 이리하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여행 다니고 싶어지지도 않았을텐데.”

내가 애써 농담을 하자 그가 내 탓인가, 하고 눈썹을 내리깔고 작게, 속으로 깊게 울리는 웃음을 지었다. 오르의 황궁은 밤에 마법 등을 많이 키지는 않는지, 아니면 이리하의 사적인 방이라 그런지 호롱불이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것 뿐, 다른 빛은 없었다.

예쁘다. 아름답기보다는 강해보이는, 사자 같은 사막의 황제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동화속의 장면 같아서, 나는 다리를 모아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리하, 몰랐는데, 꽤…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유혹적이시라고 해야 하나. 섹시하다고 해야하나, 아무튼 그러시네요?”

내 말에 그는 딱딱하게 굳어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적당히 그치겠지 했는데, 도대체 그칠 생각 없이 혼자 바닥을 두드리고 난리시다, 이 분.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아하핫! 그…”

그는 한참 그, 그…만 반복해서 말하다가 겨우 진정이 됐는지 눈물까지 닦으며 차를 마시더니, 다가와 내 앞에 앉았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가 당황스러웠다. 언제 무거웠나 싶을 정도로 단순하게 변한 분위기에 안심이 되기도 했고, 우리 둘 모두가 황당하기도 했다.

“미안하네. 당황스러웠지?”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 이렇게까지 실컷 웃으시다니, 예의에 한참이나 어긋난다구요, 하며 잔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튼 나보다야 훨씬 높고 잘난 분이시니 곧이곧대로 말하기가 뭣해서 그냥 괜찮습니다, 전하. 라고 대답했더니, 심홍색 눈이 가늘게 이지러졌다.

“삐쳤나.”

“안 삐쳤어요. 뭐가 그렇게 재밌으시길래 그렇게 신나게 웃으셔요?”

이리하는 똑바로 좌정하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난 한 번도 그런 식의 수식은 받아본 적이 없었거든.”

“이리하께서, 단 한 번도요?”

“내 나라에서는 내 외모를 두고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어떤 평가나 묘사가 금지되어 있거든. 타국에서도 감히 내 얼굴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칭찬이라든지 할 만한 위치에 있는 자가 없고. 그렇다보니 억지로 끈질기게 물어서야 대답을 들을 수 있는데, 보통 여자들은 내게 잘생겼다거나… 뭐, 그저 그런 흔한 오르안용 수식어를 붙이지. 남자들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당신이 날 섹시, 와 연관시킨 유일한 여자야. 게다가 그 타이밍에 이런 소리가 나올 줄은, 하하, 전혀 몰랐어.”

생각해보니 정말 뜬금없이 한 말이기는 했다. 약간 부끄러워서 달아오른 뺨을 식히기 위해서 괜히 손 부채질을 하다가 말했다.

“걱정 마세요, 만약 이리하가 학생이었다면 장담하는데 여학생들이 애인후보로 줄을 섰을 거예요.”

“그럼 뭐해. 내 앞의 줄이 안 사라지는데.”

그러더니 그는 내 옆에 거의 눕다시피 앉더니 말했다.

“그래서, 무릎을 걷어차러 왔다고?”

고개만 살짝 기울여 나를 바라보는 그를 보고 차마,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이 안 나왔다. 그래서 그냥 성의 없이 그를 살짝, 아주 살짝 걷어차고 말했다.

“네.”

“생각보다 덜 아픈데. 이런 거면 한 번 더 해볼만한 걸.”

“설마요.”

남자치고는 긴 초콜릿색의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얌전히 그를 바라보자 심홍색의 인간 같지 않은 눈이 웃으며 나를 향했다.

“…보고 싶을 거예요.”

그러자 이리하는 인상을 쓰더니 몸을 일으키면서 턱, 내 손을 잡았다.

“왜 그런 말을 해?”

나는 잡힌 손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내 금색 머리카락이 천천히 늘어져서, 그에게서 나를 가렸다.

“라시아.”

말 없이 그의 시선을 피하고만 있자 그가 더욱 세게 내 손을 잡았다. 그런데도 아프지 않았다. 그저 잡힌 손이 뜨거웠다.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는 놔주지 않았다. 당황스럽고, 부끄럽고, 기쁘고… 그리고, 그리고….

“가지 않는다고 했잖아….”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아니, 이상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분명히 내가 더 이상은 그를 찾아오지 않으리란 걸 그도 알았을 것이다. 나도 알았다. 눈물에 가려서 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려했지만, 그는 더욱 세게 나를 잡을 뿐이었다.

“놔주세요, 제발… 저, 가야… ”

가야한다고, 놔달라고 우는 나를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아당기더니 말했다.

“좋아. 떠나. 하지만 약속해, 라시아. 내게 돌아오겠다고.”

그 말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빨개진 눈으로 그저 그를 바라보고 아무 말도, 어떤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왜 그런 약속을 하게 하냐고, 그를 다그치며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정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우리는 그저 끝없이 한 곳으로 돌아올 뿐이다. 그가 원하는 것도, 내가 원하는 것도… 결코 같을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자, 그가 내 손을 당기며 몸을 가까이 한 채 속삭였다.

“또 세상을 그 구두로 날아다니고, 온갖 사람과 온갖 경험을 하고 나면, 다시 내게 돌아와. 내게 돌아와서 이렇게 끔찍한 기쁨을 주고 떠나. 다시 떠나고… 떠나다가…”

그리고 그가 내 턱을 잡고 억지로 내게 키스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거다, 내게.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릴 준비가 되면… 나는,”

그의 숨이 내 눈가를 간질였다. 이리하의 눈은 무서울 정도로 단호했다. 어쩌면 사랑한다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입술 너머로 말을 삼키는 듯 하더니,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로, 그리고 몹시 단호하게 속삭였다.

“죽을 때까지 기다릴테니까.”

나는 그가 무서웠고, 사랑스러웠고, 그리고, 그리고… 도망치고 싶었다.

============================ 작품 후기 ============================

헤헤 제가 왔습니다. 빨리 왔다!!!

여러분 많이 음...그.. 기대하셔서 생각보다;;;;

별 거 아니에요.. 죄송해요..(시무룩)리메 전엔 다들 되게 이 편을 좋아하셨는데 지금은 어떠시려나 모르겠는...(외면)오늘 걱정스런 소식을 하나 들어서 마음이 안 좋네요 ㅠㅠ 힝....

<이리하_얀데레_루트_의 길이 열렸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위험!!>

그리고 생각보다 잘 아시네요. 제가 반데라스 교수님 덕입니다.. 중년..중년 사랑.

사실 진지하게 마지막 루트로 이 아자찌를 타볼까 생각한... 하지만 아니므로.. 안 된다...

으 진짜 한 명 한명 테크트리 다 타게 해주고 싶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답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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