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시아-90화 (90/113)

90화

“주인님께서 허가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가십니까?”

제프리가 인상을 찌푸리고 겨울 옷 차림의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겨울 장갑을 낀 손으로 라티를 꼭 잡고, 웃었다.

“걱정 말아요. 이래보여도 라티는 대단한 마법사고, 또 위험한 여행은 안 되도록 그냥 정석적인 관광루트를 밟을 거니까.”

증거로 라티는 꽁꽁 껴입은 겨울 옷을 입고 있는데도 나를 하나도 덥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라티는 앙증맞은 밝은 색 털모자에 긴 머리카락은 끝에만 살짝 웨이브를 넣은 채, 검은 색 무릎까지 오는 코트를 입고 목도리는 흰색으로 예쁘게 리본을 묶은 채였다.

안의 원피스는 부드러운 공단으로 된 검정색의 단정한 레이스가 들어간 거였고 검은 스타킹에 반짝거리는 검은 신을 단정하게 신고 있은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상단 화보에 들어가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라티가 사랑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지, 하녀들도 신이 나서 라티를 꾸몄다. 하지만 이 귀여운 애가 보이지도 않는지, 제프리는 그저 한숨만 팍팍하게 쉬고는 빨리 돌아오셔야합니다. 아셨죠? 하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정확하게 2주 뒤에 돌아올게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있어요, 알았죠?”

“…가서 기념품이나 많이 사오세요.”

라티와 나는 말을 아주 잘 듣는 아이들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작별인사를 했다. 라티는 주머니에서 지팡이를 꺼내더니, 앙증맞기 그지 없는 손으로 휙, 하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옅은 금색의 마력들이 천천히, 안정감 있게 우리를 감싸더니 순식간에 우리를 레디데일로 인도했다.

눈을 나도 모르게 감고 있었나 보다. 뺨을 간질이던 여름의 바람이 순식간에 북풍의 그것으로 바뀌고, 크게 숨을 쉬자 어느새 심장까지 뻣뻣해지게 하는 차가운 공기가 내 코 속으로 들어왔다.

“우와.”

눈앞은 그야말로 눈 천지였다. 세상이 너무나 하얘서, 땅과 하늘의 경계가 불분명해 보일 지경이었다. 얼어붙은 호수에 빛이 선명하게 번뜩여서,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라티를 내려 보았다.

“라티, 춥지 않니?”

빤히 괜찮을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아이라서 걱정이 되었다. 라티는 까르르, 웃으면서 괜찮아요. 하고 말하고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예쁘다, 그렇지? 하고 물었다.

“엄마, 무겁죠. 이거 내가 다른 곳에 넣어둘게요.”

그녀의 마력이 피어올라 우리의 짐 가방을 어딘가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은 고요함과 차가운 빰, 그리고 선명하게 손에서 바스라지는 눈들이, 내가 정말로 레디데일에 온 것을 알려주었다.

“예쁘다….”

나무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처럼 서 있는 그 곳, 나는 겨울 왕국에 도착했다.

얼굴이 뻣뻣해지는 듯한 칼바람에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예쁜 건 예쁜 거지만, 진짜 얼어-죽겠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라티는 여기서 조금만 더 걸으면 레디데일이에요, 라고 말하며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나는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지나치게 비현실 적이라, 어느 새 추위에 붉어진 뺨을 한 손으로 문지르고 라티를 졸졸 따라갔다.

라티는 정말로 하나도 추워 보이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녀가 몹시 걱정이 되어서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서 그녀의 옷 매무새를 매만져주었다. 신발을 부츠로 갈아 신겨야겠어, 애 발이 다 얼겠네.

“라티, 정말로 안 추운 거 맞지?”

그녀는 고개를 다시 열심히 끄덕이고 엄마는 추워요? 하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사실 많이 추웠고, 발은 꽤 축축해 얼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이를 걱정시키느니 거짓말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고 또 반쯤은 이 추위가 반갑기도 했다.

이렇게 추운 나라는 나도 처음이니까. …이리하는 이런 눈은 본 적이 없겠지. 가능하다면 언젠가 한 번 쯤 이런 곳을 보여주고 싶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사막의 왕이니까 이런 광경은 흔하게 보는 게 아닐테니까.

“안 추워. 라티 손은 정말 따뜻하네, 깜짝 놀랐어.”

라티는 부끄러운지 볼을 붉히더니 헤헤헤, 하고 웃으면서 내 손을 더 꼭 잡았다. 아무튼 이렇게 뺨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데도 고사리 같이 작은 잡은 손이 따뜻하다니 신기한 일이다.

손을 꼭 잡고 걸은 지 얼마나 됐을까, 레디데일을 나타내는 표지판이 보였다. 다 와가네, 라티야. 하고 말하려고 했는데, 라티가 갑자기 멈추더니 나를 불안한 듯이 올려다보았다.

“응? 왜 그래?”

“어… 엄마, 실은… 저기…”

그리고 바람사이로, 고동색의 마력이 피어올랐다. 아하, 교수님이 잡으러 온 걸 알아챘구나. 모른 척 웃고 있자니, 라티가 머뭇거리더니 갑자기 줄줄 울기 시작했다. 나는 솔직히 그녀가 울 줄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얼른 안아 올려서 한 팔로 끌어안고 한 손으로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기 바빴다.

“…뭐야, 얘, 왜 우냐.”

반데라스 교수님은 검은색의 긴 코트를 잠그지 않은 채 입고 긴 목도리를 대충 두르신 채, 한 손으로는 모자를 잡은 채 옆에 서계셨다. 나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저었다.

교수님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내 발을 향해 마법을 쓰셨다. 아, 눈치 채셨구나. 나는 조금 부끄러워져서 살짝 볼을 붉혔지만, 그래도 날씨가 추우니 티는 안 나겠다 싶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라티는 엉엉 울면서 나를 껴안았는데, 나는 그녀를 얼른 껴안아주면서 왜 그래, 왜 그래… 하며 끙끙대었다. 교수님은 한숨을 내쉬더니 징징대며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아이를 단숨에 내 품에서 떼어내시고 당신 품에 안으셨다.

“저이가…어마!!! 어마…!!”

아, 어떻게 하면 좋아.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자 교수님이 나에게 고개를 흔들더니 내가 모르는, 아버지 같은 얼굴을 하시며 라티를 몇 마디로 달래셨다. 라티는 훌쩍대면서 몇 번이고 코를 풀었다.

교수님은 그걸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시는지, 대충 라티의 모자를 벗겨서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셨다. 나는 라티의 모자를 쥔 채, 겨우 그친 아이를 안도하며 바라보았다.

“일단 오페한테 허락은 받았다. 대신, 내가 감독 하에 여행하는 게 조건이야. …꼬마 봐준다고 고생 많았다.”

“아뇨, 전혀… 재미있었어요. 라티는 예쁘고 착하니까.”

그러자 빨개진 얼굴로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정말? 하는 눈으로 라티가 나를 바라보았다. 귀여워, 정말 귀엽다…! 손수건을 손가방에서 꺼내서 라티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울긋불긋한 얼굴로 끙끙대며 교수님의 품에서 벗어나서 내게 안기려 하는 것이 어쩐지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안아주려 했는데, 교수님이 휙, 하고 몸을 돌리더니 말했다.

“라시아는 나나 르웬이나 오페랑은 달라. 널 오래 안고 있으면 지친단 말이다.”

“괜찮아요. 아이는 원래 이 정도는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하는 걸요. 이리와, 라티. 나한테 안기자.”

라티는 흥, 하고 교수님을 약간 비웃는 듯한 웃음을 짓더니, 냉큼 내게 안겼다. 아, 역시 아기라 그런지 무척 따뜻해.

“엄마, 내가 울면 미워요?”

“아니, 귀엽다고 생각해. 웃는 것도 귀엽고 우는 것도 귀엽고… 우리 라티는 커서 누가 데려가려나!”

벌써 시집갈 것 생각하니 아쉽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나만 따르고 귀엽던 애가 쑥 자라서 친구나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겠지… 내가 뭐라고 이런 생각을 하나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나를 좋아하니 어쩌면 당연한 생각이기도 했다.

“정말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웃음이 절로 났다. 세상에 이렇게 귀여워서 어떡하면 좋아.

“거짓말이다. 못생긴 얼굴에 콧물은 줄줄 흐르고. 못난아.”

라티는 충격!!!! 이라는 얼굴로 재빨리 마법을 써서 자신의 얼굴을 깨끗하게 만들었다.

“왜 그러세요, 교수님. 뭘 해도 예쁜 애한테.”

“애 먹이는 꼬마가 예쁘기는 무슨... 안 무겁냐.”

“안 무거워요. 우리 라티 레디데일 도착하면 맛있는 거 많이 먹여야겠다. 이렇게 가벼워서 요정이 귀엽다고 잡아가면 어떡하지?”

교수님이 하! 하는 소리를 내었다. 정말 얄미워서… 나는 그를 째려봤지만, 교수님은 전혀 알아채지 못하시고 성큼 성큼 걸어가기 시작하셨다.

“라티야, 교수님 말 듣지마. …그런데 아까는 왜 울었어?”

라티는 약간 부끄러워하는 듯이 우물우물 하다가 말했다.

“반데라스 선생님이… 엄마랑 떨어지게 할까봐…”

“선생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응… 엄마는 교수님이라고 불러요?”

“응. 교수님이 어,음, 엄마한테 공부를 가르쳐주시거든.”

“라티는 반데라스 대부님이 선생님이라서 선생님이에요.”

“그러니까 라티한테 마법도 가르쳐주시고, 숫자랑 글자도 가르쳐 주시는거야?”

“응. 선생님 좋은데 엄해요. 저번에도 곱하기를 5단까지 못 외우니까 내가 좋아하는 걸 안 가르쳐주셨어요. 참, 나는 마법이 제일 좋아하는데, 엄마는 뭐가 제일 좋아요?”

“엄만 특별히 좋아하는 과목은 없어. 대신 특별히 싫어하는 과목도 없지.”

스스로를 엄마라고 칭하다니, 무척, 무척, 무척,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어쩌면 좋아. 엄마라니. 내가 엄마라니!

“엄마도 곱하기 할 줄 알아요?”

“응. 할 줄 알아. 엄마는 9단까지 할 줄 안다?”

“거짓말!!”

라티의 놀란 얼굴을 보며 나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교수님이 나를 약간 한심한 얼굴로 바라봐서 사실 조금 부끄러웠지만, 그까짓 것쯤이야. 엄마가 어렸을 때, 나보고 어디서 이렇게 예쁜 게 튀어나왔지, 하고 몇 번이고 내 얼굴에 뽀뽀를 해주었는데, 내 아이도 아닌데 이렇게 공감될 줄이야.

교수님이 굼벵이같이 굼뜨게 걸어오는 우리를 보고 답답하셨는지 다가오셔서 라티를 번쩍 들어 안아 내 품에서 빼내셨다. 라티는 교수님께 호들갑스럽게, 엄마는 9단까지 할 줄 안대요! 선생님 엄마는 9단까지 외운대요! 하고 몇 번이고 이야기했다.

교수님은 의외로 열심히 그 모든 호들갑을 받아주셨는데, 나는 둘을 쿡쿡대면서 졸졸 따라갔다.

아휴, 귀여워.

*

레디데일은 작은 왕국이지만, 그래도 이주안에 모두 돌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현재 와있는 곳은 레디데일의 가장 북측, 히얀테인데, 일년 내내 눈보라가 그치지 않는 가장 추운 작은 지방이었다.

사람도 별로 살지 않았고 보이는 것은 커다란 곰과 순록들… 그리고 거대하고 아름다운 북의 산맥, 카리페니아가 자리한 곳이었다.

“그런데 왜 북쪽으로 온거야? 보통 남쪽에서 올라가는 루트를 선택하잖아.”

“응, 왜냐면요. 저 용이니까… 레어가 필요하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음, 저 얼음 쪽이 계열이 잘 맞기도 하고, 또 엄마가 고향이 이 쪽이라고 해서요.”

내 고향은 여기가 아닌데… 나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하는 말에, 라티가 이번의 '엄마'는 내가 아닌 리콜라티를 말하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도 일단은 알고 있기는 하구나. 내가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점을… 다행이다.

“그래서 여기 레어를 만들게? 카리페니아에?”

“응. 엄마는 그러고보니 고향이 어디예요?”

“난 수도 쪽이야. 그래서 이렇게 추운 곳도 처음이라서, 라티가 여기에 데리고 와줘서 무척 기뻐.”

라티는 정말요, 정말요? 하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웃으면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우리는 얌전히 밖에 서서 교수님이 여관을 잡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남자들이 자꾸 흘끔 흘끔 쳐다보는 것이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튼 구두로는 역시 무리가 있어서 털이 안에 들어간 부츠를 하나 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티도 이걸로는 무리고… 라티와 함께 조근조근 이야기를 하다가 물었다.

“라티 교수님 나오시면 같이 털 부츠 사러가자, 알았지?”

“정말요? 쇼핑 좋아요!”

라티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 하고 생글생글 웃고 있자니, 갑자기 한 남자가 쓱, 다가오더니 웃으면서 물었다.

“부츠를 사려고 하십니까?”

…이렇게 작은 마을인데 장사꾼이 손님을 끌어들이기도 한단 말이야? 하고 놀라서 남자를 바라보고 나서 얼른 아, 네. 하고 대답했다. 꽤 잘생긴 장사꾼이네. 하긴 밖에서 손님을 끌어당기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안내해드릴까요?”

나는 라티를 내려다보았다. 라티는 별 생각이 없는지,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길래 조금 난처해져서, 일단은 일행이 있다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입을 열었다.

“음. 감사한데 제가 지금 일행을 기다리고 있어서요. 가게 위치를 알려주시면, 꼭 그리 갈게요.”

그러자 남자는 놀란 얼굴을 하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아, 저는 장사꾼 같은 게 아닙니다. 저는..”

“뭐지?”

어느 새 다가왔는지, 교수님이 뒤에 서계셨다. 나는 웃으면서 방은 예약하셨어요? 하고 물었다. 교수님이 라티를 안으면서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 두 사람은 내 보호 아래에 있으니, 관심 가지지 말고 저리 꺼지게.”

“엄마한테 갈래.”

라티가 안겨 있는 상태에서 교수님의 목 뒤로 고개를 쏙 빼고 내게 손을 뻗으면서 말했다. 나는 응? 알았어, 잠시만… 하고 남자에게 그럼 왜 부츠 사겠냐고 했냐고 물으려고 하다가 교수님이 한 손으로 나를 막아서 그냥 가만히 뒤에 서있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다가 어머, 하고 깨달았다. 나한테 작업 건 거구나!

하긴 생각해보면 나는 북쪽에서 엄청 먹히는 얼굴이었다. 나 스스로 이렇게 생각할 날이 정말 드물었기 때문에, 조금 쑥쓰러웠지만 어쨌든 나 여기서는 엄청 미인이구나! 오를레아랑 같이 안 오길 잘했다… 아니, 오를레아랑 같이 왔으면 더 신났을텐데. 내가 방실방실 웃고 있자 교수님은 피곤하다는 듯이 나를 팍, 하고 째려봤다.

“…왜, 왜 그러세요?”

“미인이랑 여행하는 게 얼마나 피곤한지 까먹고 있었다. …라시아 너, 외모를 좀 바꿔볼 생각은 없느냐.”

나는 라티를 받아 안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미인 취급당하는 게 얼마나 드문 일인데요. 인생에서 별로 있지도 않은 기회인데, 즐겨야죠.”

그러자 교수님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넌 대부분의 공간에서도 제일 예쁜 여자인데 굳이 이 귀찮음을 감당해야겠니.”

이 말에는 라티도 놀랐다. 우리 둘이서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교수님은 그러나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이 인상을 쓰면서 왜 그러냐? 하고 물을 뿐이셨다.

“선생님 바람둥이. 엄마 꼬시지 말아요.”

나는 웃음이 터졌고, 교수님은 뭐!!!?!!! 하고 소리를 지르다시피 했다. 교수님은 꼬시다니, 너 어디서 그런 말 배웠냐, 하고 라티를 혼내기 시작했는데, 나는 솔직히 다른 부분에서 아니라고 발뺌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의 부분에서 예민하게 구시는 구나, 하고 웃어버렸다.

하긴 교수님이 날 여자로 보시긴 좀 무리가 있지.

“어느 미운 입이 그런 말을 해, 응?!”

“아모해어여… 어마 도와죠…”

잡힌 입 때문에 말도 제대로 못하는 라티가 귀여워서 그냥 웃고만 있었더니 교수님이 나를 똑바로 보고는 말했다.

“나 꼬시는 거 아니다.”

“알아요, 교수님."

“난 그냥 객관적인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것도 알아요.”

생글 생글 웃으니, 교수님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여자 둘이서 늙은이를 놀리는구나.”

“선생님, 늙은이 아닌걸? 라티가 뽀뽀해줄까? 잘못 했어.”

오냐, 해보렴. 하고 교수님이 다가와서, 라티가 교수님의 뺨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 사실 교수님도 보기로는 30대 초반으로밖에는 안 보여서, 이렇게 하니 딱 그냥 부녀의 모습이었다.

“나도 해줘, 나도.”

장미 꽃 같은 입술로 쪽, 하고 뽀뽀를 받는 것이 부러워서 말해봤더니, 라티가 얼른 내 입술에 쪽, 하고 뽀뽀를 해줬다. 보들보들해! 귀여워!

정말로 선뜻, 해주었기 때문에 엄청 감동받았다. 나는 라티가 예뻐서 나도 모르게 볼에다가 뽀뽀를 다시 한 번 해주었는데, 라티는 꺄, 하고 소리를 지르듯이 웃어버렸다.

“귀여운 녀석들.”

교수님이 피식, 하고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결국 라티에게 부츠를 사주고 나는 구두를 변형했다. 새 신을 사서 신이 나 팔짝팔짝 뛰는 아이의 손을 잡고 가까운 식당으로 가서 자리를 잡자 식당 주인이 교수님의 이름을 묻고 얼마간 잡담을 하더니 나를 홀튼 부인, 이라고 불러서 깜짝 놀랐다.

내가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하려고 했는데 교수님은 뭔가 생각이 드셨는지, 나를 만류하셨다.

“왜 아니라고 말 못하게 하셨어요.”

“너한테 들러붙는 남자를 하나하나 다 떼어놓느니, 그냥 유부녀라고 생각하게 놔두는 게 훨씬 편하다. 어차피 반쯤 유부녀잖니. 애가 딸렸는데.”

“일부러 그렇게 소문을 내신 건 아니시죠?”

“…상식적으로 나랑 네 연배에 남녀가 애를 데리고 다니는데, 애가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면 그걸 뭐라고 보겠느냐, 우매한 제자여.”

나는 결국 입을 다물고 라티는 뭐 먹을래? 하고 물었다. 라티는 심각한 얼굴을 하더니 어린이 세트는 뭐예요? 하고 물었다.

나는 어린이 세트에 적힌 레디데일어를 열심히 번역해서 적당히 알려주었다. 라티는 결국 끙끙대며 이것저것 고민하더니 어린이 세트로 좋다, 고 말했다.

괜히 설명해주고 나니 나도 이거 먹어보고 싶다는 철없는 생각이 들었지만 양도 안 맞을거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전통 요리를 시켰다.

“그럼 일단 카리페니아 산맥을 좀 뒤져보고, 꼬마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집을 하나 만들자꾸나. 그러고 나서 히얀테의 명물인 순록 썰매를 타고 바로 밑 지방의 타프로 건너간 후에 거기서 기차라는 걸 탄 다음에, 레디데일의 수도인 디보타로 가는 게 어떠니.”

어느새 그런 걸 다 정하셨대, 나는 놀라서 교수님을 바라봤다. 관광루트를 따라가겠다고 사실 말은 해놨지만, 상당히 무계획적인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별 생각이 없었는데. 라티가 가고 싶은 곳대로 아무데나 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계획이 생기니 마음이 놓이기는 했다.

“라티는 어때? 좋으면 이대로 가자.”

라티는 어린이 세트라는 신세계가 감동적인지, 굉장히 신나는 얼굴로 열심히 얼굴에 다 묻히면서 암냠냠, 먹으면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쯧, 하고 교수님은 혀를 차더니 얘한테 예의범절을 가르쳐야하나, 하고 진지하게 내게 물었다.

“뭐, 나이가 차면 배울건데…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는 것도 아닌데, 아직은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런가.”

라티의 입에 묻은 것을 냅킨으로 닦아주니, 라티는 엄마 먹을래요? 하고 내게 포크로 고기를 찍어 주었다. 귀여워… 한창 맛있는 것에 욕심 많을 아이가 양보를 해주다니. 나는 얼른 받아먹고, 내 것의 맛있는 부분을 주었다.

순록고기찜은 아이에게 매력적일 단 맛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먹을 만은 할 것이라는 생각에 준 것이었다. 그런데 라티는 역시 자기 것이 훨씬 마음에 드는지, 약간 비장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엄마… 바꿔줄까요?”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라티한테는 그게 맛있고, 엄마한테는 이게 더 맛있는 거야.”

정말, 정말? 하는 울망울망한 얼굴이 귀여워서 고개를 끄덕이자, 교수님이 심술궂은 얼굴을 하더니 자기 걸 내밀었다. 라티가 신난 얼굴로 입을 열어 받아먹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애워어어어… 애워…”

애한테 뭘 준거야!!!! 나는 웃겨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교수님을 나도 모르게 찰싹 때리고, 라티에게 얼른 물을 먹였다.

“제자여, 스승을 때리는가.”

“애기 괴롭히지 좀 마세요. 뭐하시는 거예요, 정말.”

라티는 징징대면서 내게 안겼다. 나는 얼른 이것저것 매운 맛을 중화시킬 것들을 먹여주었는데, 라티는 선생님 미워, 하고는 팽, 삐졌지만 교수님이 얼음으로 된 과자를 4개 사주기로 약속하는 걸로 풀렸다. …먹을 거에 약하구나.

밥을 먹고 나서 라티를 데리고 나와 이것저것 군것질거리를 하려고 했는데, 역시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딱히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결국 예약한 여관으로 돌아와 라티와 함께 목욕을 했는데, 목욕이란 것을 처음 해보는지 어찌나 신나서 빨빨대는지, 솔직히 지쳐서 쓰러질 뻔했다.

기운이 넘치는 건 좋은 거지만… 다음에 목욕 오리라도 하나 사줄까? 좋아할 것 같은데.

뽀송뽀송하게 말리고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나서 우리 외에는 손님도 없는 여관의 응접실에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라티의 구구단 외우는 것도 도와주다보니 어느 새 시간이 꽤 늦었다. 그런데 해는 전혀 지지 않는 게 신기해 창밖의 풍경만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로 앞에서 교수님의 무릎에 앉아 놀던 라티는 지쳤는지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다.

혹여 추울까봐 담요를 덮어주자 꼬물꼬물하면서 교수님의 품으로 더 쏙 들어가는 게 작은 동물 같이 귀여웠다. 교수님도 졸리시는지 등받이에 머리를 편하게 기대고 있으셔서, 사실 라티가 잠든 김에 이런 저런 것을 묻고 싶었는데… 옹기종기, 다정하게 라티를 무릎위에 올려둔 채 내가 덮어준 담요를 덮고 있는 교수님과 라티는 정말로 그림같이 달콤해서, 망칠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뭔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포기한 채 타닥, 타닥 타오르는 장작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가면 실례겠지만, 분명히 그렇겠지만…

나는 발을 살짝 흔들고, 머뭇거렸다. 어쩌지? 가볼까? 나는 창밖으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턱을 괴었다.

발끝이 닿았다가, 다시 떨어졌다.

아냐. 지금 분명히 바쁘실 거고, 거기는 춥지도 않을 거잖아. 이런 차림으로 가봤자…

나는 탁탁, 바닥을 두번 정도 두드렸다가 다니 그래도, 하며 닿은 뒤꿈치를 얼른 떼어냈다.

그렇지만, 조금은 보여드리고 싶은 걸… 장작으로는 역시 부족한지, 차가운 공기가 내 코끝을 간질였다. 담요에다 얼굴을 파묻으면서 눈을 꼭 감았다.

“보고 싶다.”

그 순간, 우연히 내 뒤꿈치가 닿았다.

나는 앉은 채로…

“…라시아?”

가장 추운 나라에서 사막으로 와버렸다. …그의 곁으로, 말이다.

============================ 작품 후기 ============================

사실 내용 좀 바꾸려고 했는데 다음 편 이리하 강화가 너무 제대로라..

전 예고 살인마입니다.(당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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