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아이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갈피를 잘 잡지 못했다. 그렇게 단순하게, 사귀어 볼까, 할 수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지나치게 많은 걸 바라는 걸까란 생각도 들었고, 그러면서도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복잡하고, 어렵고…. 그와 관련한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일부러 다양한 일에 참가했고, 다른 일을 생각하고 싶지 않아 다시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성적은 전년도와 비슷하게 잘 나왔다.
3학년은 보통 진로를 고민하고 결정하는 시기라 인턴쉽 제의나 단기 학생 근무제의서가 나에게도 날아오기 시작했다. 페드윈은 진로와 관련해서 다양한 커리큘럼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본인의 적성을 정확히 알아야 각국에서 인력 낭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지원이 잘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와 관련해서는 제대로 된 상담을 받을 기회가 없었는데, 2학년 때는 적응에 관련한 상담만으로 바빴고, 이번 년도에는 샤펜 공작일로 반을 날린데다 밀린 학생회 일 때문에 도무지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진로가 이미 정해져있었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한참 고민에 빠져있었다. 방학동안 뭘하지, 하는 것 때문에 말이다.
“그러면 아비게일은 이미 떠난거야?”
앨런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 앉았다. 내 앞으로 온 제안서들을 친구들이 봐준다고 하기에 하인을 시켜 집에서 들고 오게 시킨 참이었다.
“국무부의 단기 근무를 신청하셨더라고. 전형적인 선택이라서… 너는 뭐할 거야?”
“이번 방학엔 얌전히 집에서 영지관리 방법이나 배우려고. 지금까지 너무 열심히 산 거 같아서, 좀 쉴 필요가 있어.”
그녀의 말에 민디가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어이 없다는 얼굴을 했다.
“보석이 나오는 영지를 관리하는 건 전혀 노는 게 아니거든? 신탁도 있는 애가 왜 이렇게 일 하는 걸 좋아해. 그냥 놀러나 다녀!”
“…싫어… 어색하단 말이야….”
“어색해서 못 노는 사람 난 진짜 너밖에 못 봤어.”
민디가 투덜거리면서 자신의 찻잔에 설탕을 더 넣었다. 오를레아는 민디가 불만스러워하는 것을 깨끗이 무시하고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잘 됐다! 나도 그런 거 배우거든… 이렇게까지 대단한 남자랑 결혼하게 될 줄은 몰라서, 규모가 좀 무서운데 앨런 너희 집도 비슷하니까 안심이야.”
앨런네 집안이 유난한 부자기는 하다. 부모님 두 분 다 수완이 좋으시니까. 오를레아는 속성 대공비! 코스를 완주하고 있는 중인데, 우리 중에 누구도 영지나 세정관리를 배워야하는 사람이 없다보니 오로지 혼자서 공부해야 하는데, 그게 아쉽고 싫은 모양이었다.
“그러면 민디 너는 뭐 할건데?”
내가 의아해서 쿠키를 반으로 쪼개면서 묻자 민디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상단에서 일하게 될 것 같아.”
“어, 이중취업이야?”
민디의 가족은 몹시 드물게도 부모님 모두가 프라옐 국의 비밀정보국인 디라이크의 정예대원이고, 그래서 그녀 본인도 거의 디라이크에서 근무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기밀입니다아.”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힘내라며 응원해주었더니 민디는 너 밖에 없다며 나를 붙잡고 우는 척을 했다. 머리를 쓱쓱 넘겨주면서 장난을 치고 있자니 하인이 내 앞으로 온 제안서들을 들고 왔다.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
“아, 고마워요.”
건네받은 제안서들은 하나같이 묵직했다. 이걸 다 읽어봐야 한다니,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오. 꽤 많은데?"
“하나같이 어찌나 양이 많은지, 다 보려니까 벌써부터 질려….”
“좋은 일인데 도대체 왜 하기 싫다는 거야. 나 같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읽는다. …오를레아가 말 안 했으면 언제까지 미루려고 한 거야.”
앨런이 그녀 특유의 깐깐한 태도로 나를 나무랐다. 드물게도 대꾸할 말이 없어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있자니 오를레아가 괜찮아, 지금부터 하면 되지, 라고 나를 위로하면서 한가득 쌓여있는 종이봉투를 개봉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샤펜공작님께서는 어떤 언급은 없으셨고?"
"응. 하고 싶은 것 하라고 하셨어. 그런데 방학 끝나고 다른 애들이 뭐했냐고 물어보면 휴양, 이라고 말하기엔 학교 분위기가…. 그래서 적당히 할 일 없나 찾아보는 중이야."
“이 제의서 어디에도 적당히 놀면서 일하세요, 라는 분위기는 없는데.”
“그래서 찾기 싫었던 거라고….”
"아~해. 라시아. 시나몬 애플 롤."
투덜거리는 나를 달래려는 듯이 애교가 잔뜩 담긴 민디의 말에 얌전히 입을 벌렸다. 다 먹자마자 앨런이 와,하고 감탄을 해서, 다들 먹는 걸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나 여기서 인턴 제의하는 것 처음 봤어. 덱센타야."
"덱센타?"
민디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제의서를 건네받더니 읽기 시작했다. 덱센타는 베노암의 디라이크였는데, 제국 치고는 규모가 작다고 알려진 정보기관이었다.
사실 덱센타든 디라이크든 뭘 하는지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어서 규모가 크니, 작으니 말해봐야 소용이 없었지만. 무슨 일을 하는 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한 번 발 디디면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뜯어보지도 않은 제의서였다.
"라시아, 이거… 조건이 엄청 좋긴 하다."
"응? 받아들이라고? 덱센타를?"
“뭐, 물론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졸업하자마자 부서장정도는 확정인 요직인데다,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돈도 잘 벌수 있고. 그리고 굉장히 아찔한 모험과 함께 할 수 있는 장점이… 그리고 우리 엄청 자주 볼 수 있을 걸?!”
나는 그녀의 귀엽긴 하지만 전혀 끌리지 않는 제안을 웃으면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미안. 난 그런 쪽으론 관심이 없어서.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나 이 제안서 가져도 돼?"
"응, 난 상관없어."
이렇게 쉽게 줘도 되나, 하는 걱정이 살짝 들었지만, 진짜 중요한 거라면 나한테 일대일로 제의했겠지, 이렇게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음, 나 일단 국가 공무원 쪽은 빼고 봐줘.”
"상단에서 일하게? 국가 공무원 쪽이 직장 구할 때 훨씬 편하잖아."
“뭐, 내가 할 일이 국가 공무원을 거쳐서 더 좋거나 하지는 않으니까.”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오를레아가 하긴, 하고 말하면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말했다.
“네 능력 때문에 덱센타가 너한테 관심을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럴지도 모르지.”
우리 중 제일 열심히 제안서들을 살피던 앨런이 말했다.
“굳이 그… 네 능력을 안 살려도 충분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거야 기쁜 일이지만… 앨런이 건네준 몇 가지 제의서는 정말로 솔깃해질 정도로 좋은 조건이었다. 사실 조금 흔들리기도 했는데, 만약 이 제안서를 받아들이면 분명히 사는 내내 아비게일과 부딪힐 것이다. 그녀가 나를 걸고 넘어지면 보통 귀찮은 게 아닐테니까 별로 끌리지 않았다.
"그보다 나랑 앨런은 내일 모레 쯤 알트라에서 벗어나는데, 오를레아랑 라시아, 너흰 어떻게 할 거야?"
"난 알트라에 좀 더 머물거야. 오를레아 너는 언제 가, 그러고보니?"
"나도 그 쯤 가. 음… 저기, 라시아."
어쩐지 볼도 붉어지고, 여러모로… 뭐랄까, 긴장한 모습에 만약에 오를레아가 남자였다면, 나는 지금 얘가 나한테 고백하는 거라고 생각할지고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웃어버렸다. 그러나 오를레아는 전혀 웃어주지 않고,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저기, 시간이 난다면… 짧은 기간이라도 좋으니까 나랑 페이님과 함께, …음, 페이님 영지에서 보내지 않을래?”
응? 페이님이 누구야, 하다가 순간 먹고 있던 쿠키를 뱉을 뻔 했다. 그러고보니 전 황자이자 현 대공 성함이 페이셨지. 친한 친구가 출세해서 대공작 이름을 막 부르는 걸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아무튼 초대 자체는 무척 기꺼운 것이어서, 나는 오를레아의 긴장을 풀어주고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렇게 긴장해, 내가 감사할 일인데!"
"아니, 그래도 너는 네 계획이 있으니까… 휴. 아무튼 안심이야."
정말로 안도했는지, 얼른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그녀를 보고 민디와 앨런은 오를레아를 놀렸다.
"그나저나 너무하네. 나는 한참 전에 초대해놓고. 나는 쉬워 보인다 이거지?"
앨런이 입술을 비죽이며 말하자, 오를레아는 정말로 편안한 얼굴로, 응. 사실 그래. 하고 대답해 앨런의 원망을 한참이나 들어야했다. 내가 늦게 초대받은 것에 대해 사실 조금 섭섭하기도 했지만, 오를레아가 한참 후에야 내가 대공전하와 있는 게 불편할까봐 그랬다고 설명하는 걸 듣고 마음을 풀었다.
하긴 나랑 사이가 그리 특별히 좋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너랑 못 지내면 스스로가 지나치게 실망할 게 무서워서 못 물어봤다는 설명도 기분이 좋았고 말이다.
어쨌거나 날짜를 정하고 친구들이 떠난 지 3일 째 되는 날, 의외의 손님이 나를 찾아왔다.
============================ 작품 후기 ============================
리메이크 다 따라잡았네요..(슬픔) ㅠㅠㅠ실타..
저랑
그 동생을 쓰신 조코피아님이랑 함께 로맨스를 썼어요! 현대 로맨스물이고, 아마.. 좀 느낌이 다를 것 같아서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즐겁게 썼습니다.
아저씨x소녀 물이고요! 치유물? 입니다. 잔잔하고 조용하고 그런 소설이에요! ㅇㅅ
그산우울님이 여기서도 보이고 키스미에도 보이셔서 굉장히 말씀드리고 싶었던 ㅋㅋㅋ..
아무튼 관심이 있으시면 봐주세요! 재밌...재밌어요...(눈치_++ 감성적인 온도님 감사합니다!! 오타 많이 고쳤어요 ㅠㅠ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