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아비게일과 다니엘, 그리고 공작위>
학생회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아 한참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데 다니엘이 지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나를 휴게실로 불러냈다. 아비게일과의 일을 물을 셈인가 싶어서 솔직히 기분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는데, 다니엘은 내가 휴게실 소파에 앉자마자 물었다.
“아까 일은 유감이다.”
“…네.”
뭔가 더 말을 할까 하다가 말았다. 그가 먼저 묻지 않는 이상 말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제 머뭇거리다가 아까는 무슨 일이냐고 묻겠지, 약간 착잡하게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데 다니엘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물었다.
“그래서, 교수님은 뭐라셔? 건강에는 문제가 없는 거래?”
“…네?”
잠깐 내 귀를 의심하고 그를 빤하게 바라보자 그가 염려를 가득담은 얼굴로 내 쪽으로 다가와 앉으며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병인거야?”
그 때서야 그가 내가 보는 것을 몹시 진지하고, 그리고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하게 변명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전혀 아니에요. 그냥, 특이한 체질이라고 하셨어요. 그냥 예민자 중에 굉장히 드물게, 저처럼 마력을 보는 사람이 있는 거라고요.”
열성적인 목소리로 말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표정도, 자세도 미동하나 없이 나를 빤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음… 당신께서 가르쳐 주시고 싶으시다네요, 제 능력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요.”
“아니, 건강에는 이상 없냐고.”
“…없…는 것 같아요.”
“제대로 묻지도 않고 왔어?!”
그가 목소리를 높이고 나를 혼냈다. 나는 찔끔, 놀라서 확실히 없다고, 진짜로 괜찮다고 몇 번이고 강조해 그를 설득했고 다니엘은 나를 불신어린 눈으로 보다가 나중에 홀튼 교수님께 찾아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런 걸로 혼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약간 놀라기도 하고, 시무룩한 상태로 얌전히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으고 있었다.
“뭘 시무룩한 얼굴이야. 얼른 일어나, 들어가서 마저 일 해야지.”
“…어, 용건은 그게 전부인 거예요?”
“그럼 또 뭐가 있는데?”
다니엘은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나는 그 쯤 되어서는 의아해져서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니, 아까 일은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실 줄 알았어요.”
“내가 궁금할 게 뭐가 있어. 오히려 궁금하려면 네가 해야지. 왜 싸웠는지, 뭐 그런 거.”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뭔가… 내가 물어도 되는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입을 다물자 다니엘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내가 앉은 소파 앞의 탁자에 조용히 앉고는 말했다.
“아비게일이 나한테 물었어. 너인지, 자기인지.”
“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질문이에요?”
“그러니까. 이상하잖아, 갑자기 그런 걸 묻고.”
게다가 둘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좋아서 이뤄진 사이는 아니었다. 둘은 좋은 친구, 정도는 되는 것 같아 보였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일방적인 짝사랑인 게 뻔히 보였던 것이다. 다니엘은 그녀를 몹시 예의 바르고 친밀하게 대했지만, 그녀에게 노골적으로 구애하는 잉그럼에게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왜 물었는지는 알 것 같기는 해요.”
“그래? …뭐 아무튼, 그런 질문이 어디 있냐고 다투다가 혼자 화내고 울고… 엄청 당황스러운 와중이었는데 너랑 마주친 거야.”
“왜 그렇게 대답하셨어요? 당연히 아비게일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셨어야죠. 그런 질문이 어딨냐는 건 제가 우선이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 없잖아요.”
무슨 바보 같은 짓이냐며 그에게 타박을 하니 그가 몹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
“제가 뭐라고 무슨 거짓말까지가 필요해요. 당연히 저보다는 결혼할 약혼녀가 중요하지.”
내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하자 다니엘은 엄청나게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마주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너 내 말 기억은 하니?”
뜬금없이 나온 말에 황당해서 그를 바라보자 그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하면서 한숨을 쉬고 머리를 쓸어올리더니 내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건, 나는 널 우선할 거라고 했잖아.”
그 말이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오르제국에서 돌아왔을 때, 선물을 주자 다니엘은 그런 말을 했기는 했다. 무슨 일이 있건, 나를 일순위로 삼겠다고. 그 때 진심이라고 여기기는 했지만, 당연히 그런 것은 퇴색되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네가 그걸 잊냐, 엄청 진지하게 한 말이었는데. 오해의 여지 하나 없이.”
“그게 아직도 해당되는지 몰랐죠, 저는…”
다니엘이 내 눈을 관통하는 듯이 똑바로 쳐다보듯이 말했다.
“언제나, 언제나 그럴 거야.”
그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름다운 초록색 눈, 마치… 마치 처음 그를 봤던 그 순간이 지금 내 인생을 다시 스쳐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뜬금 없이 이리하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는….”
다니엘은 가만히 나를 보다가 말했다.
“다신 잊지 말아. 언제나 기억해야 해.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어떤 고난을 만나든지, 난 네 편이야. …알았니?”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깜빡이자 시간이 순식간에 움직였다.
나는 고맙습니다, 그렇게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언제나, 무슨 일이 있어도. 조건이 없이 내 편일, 나를 지지해줄 사람이 내 눈 앞에 앉아있었다.
그건… 몹시 특별한 일이었다. 부모님도 하기 힘들 일을, 나와는 전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람이 매우 진지하게, 그리고 열성을 다해 내게 맹세하는 것을 나는 가만히 보다가 용기를 내서 그의 손을 잡았다.
“…저는 다니엘을 아주 좋아해요, 그건 아시죠?”
그와 나는 함께 많은 일을 겪었다. 언제나 이 사람이 나를 사건으로 이끌었고, 내가 구렁에 빠져있을 때마다 새로운 길로 인도해주었다.
내 능력을 알아봐주고, 지켜봐주었다. 나는 첫 눈에 그에게 반했었고,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은 그런 내게 똑같이 보답해주고 싶어서 노력해 준 사람이었고, 또…
“그래서 저는 다니엘이 혹시라도, 아주 혹시라도 운명의 상대를 만나신다면.”
그가 그럴 일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려는 게 보였다. 나는 엄격하게 그를 바라보면서 쏘아붙였다.
“저도 안 믿었는데, 사랑에 빠졌잖아요. 그리고 그 사랑에서,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조차 만났어요, 다니엘. 그러니까 함부로 코웃음 치지 마세요.”
“…내 마음 읽니, 너.”
그가 의심스런 얼굴을 했다. 나는 그의 말에 작게 웃음을 지었다. 또, 그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나와 잘 맞는 사람일 것이다. 생각하는 것, 좋아하는 것이 비슷했고, 이야기 하는 것도, 세상을 사는 방식도… 정말로 나는 그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만약에 만나신다면 말이에요.”
그의 부드러운 손을 꽉 쥐면서 말했다.
“저 때문에 놓치시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아요.”
이제 나는, 옛날과는 다른 방식으로 당신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맹세는 철회하셔도 좋아요.”
선선히 웃으면서 말하자 그가 약간 충격 받은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충격 받을 구석이 없는데, 꽤 흔들리는 얼굴이라 사실 좀 당황스러웠다.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놓고 한참을 그의 반응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다니엘, 하고 부르니 그는 그제서야 표정을 가다듬고, 약간 말을 더듬으면서 알았다고 했다.
“저, 먼저 들어가요?”
뭔가 사람 상태가 이상한데 싶어 가만히 바라보다 물으니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굉장히 심각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일 하기 싫어서 저러시나. 얌전히 부실로 돌아와 한참 일하고 있자, 그가 돌아와서 평소와 똑같은 태도로 일을 진행했다. 그제서야 나도 안심할 수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몇 시간을 일하고 집에 가려는 와중이었는데, 통신구슬로 나한테 급하게 연락이 왔다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다른 사람은 먼저 보내고 안내실로 갔더니 샤펜공작에게서 온 것이었다.
좀 긴장한 채로 대충 가다듬고 자리에 앉아 영상구슬을 켰더니 그가 언제나와 똑같은 얼굴로 내 인사를 받았다. 긴장했던 게 바보같아 질 정도로 똑같은 모습이라, 김이 좀 샜다.
“어쩐 일로 연락하셨어요?”
“아비게일이 방금 연락이 왔는데, 네가 알아야 할 소식이라서 연락했다. 아비게일이 알아 좋을 일이 아니니 따로 연락하기엔 이 쪽이 낫기도 하고.”
“아, 네.”
얌전히 그의 말을 기다리니 그가 과연 거두절미하고 본론을 꺼냈다.
“네 의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어서 묻는다. 공작위를 정말로, 물려받고 싶지 않느냐?”
그 말에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러나 분명한 말투로 말했다. 내게 선택권을 주겠다는 말이 진짜였구나. 새삼스럽게 그게 실감이 났다. 내 인생 최초의, 어떤 선택을 내가 지금 하고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라고 감격스럽기도 했고 말이다.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공작위에 전혀, 어떤 관심도 없어요. 과거에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그는 그저 차분하게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말하고 나서야 손이 조금 떨렸다. 처음 그가 나를 샤펜가를 데리고 갔을 때, 샤펜 저택의 대리석에 발을 들이자마자 나는 깨달았다.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그래서 샤펜가는 내 집이 아니었다. 펜테에라나 샤펜에 내가 속한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으며, 그 곳에서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면 됐다. 아비게일이 하겠다고 하니, 잘 됐군.”
긴장한 것에 비해 샤펜공의 말은 단순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쉽게? 당황해서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약간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러면, 약혼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러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비게일 스스로 포기한다고 하더구나. 내 뜻대로 되게는 놔두지 않겠다고 하던걸.”
몹시 느긋하고 별 일 아닌 것처럼 말하는 그의 자세에서,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아버지의 상을 봤다면 너무 과장일까. 복잡한 마음을 뒤로 하고 입술을 꺠물다가 말했다.
“제프리가, 제 집사 할아버지의 손자라고 들었어요.”
그는 내 질문에 처음으로, 어떤 회한과 같은 감정을 드러냈다. 그리고 약간의… 정말 놀랍게도, 약간의 애정이 있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고 말이다. 나는 그것이 너무도 어색하고 이상해 나도 모르게 치마를 구겨 잡았다.
"임신한 리이를 돌봐줄 사람으로 가장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으니까."
그 눈이 나를 향한 게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서, 손에서 힘을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그러나 나를 조금도 신경쓰는 눈치는 아니었고, 세월을 더듬는 듯한 눈을 하고 조용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좋은 분이셨어. 그 분 덕에 리이는 몸조리를 잘 할 수 있었고, 너도… 건강하게 태어났지.”
뭔가 말이 이상했다. 엄마는 샤펜공이 결혼하기 전에 헤어졌다고 했는데, 그러면 아비게일과 나의 나이차는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런데 아비게일이랑 제 나이 차는…”
“리이는 네가 괜한 소리를 듣게 될까봐 몹시 걱정스러워했다고 들었다. 게다가 네가 내 아이인 걸 들켰다간 위험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그 자신의 위치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너를 다른 사람의 자식처럼 보이게 했지.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이었어.”
그는 엄마와 관련된 일만 되면 말이 길어지고, 몹시 감정적인 얼굴을 했다. 이 남자의 맹목적인 내 '엄마'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줬는지, 그리고 얼마나 허무하게 남았는지 생각해보면, 참… 참담한 일이다.
어떻게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걸까? 씁쓸한 입 안을 무시하고 있자니 그제서야 그가 은회색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네가 아비게일보다 5개월 정도 먼저 태어났다. …그리고, 얼마 전에야 네 엄마를 내 두 번째 부인으로 했으니, 이제 누구도 공식적으로 널 서녀라고 말하지는 못할 거다. 정식 입양 절차 중에 아이의 죽은 어머니를 부인으로 삼는 게 있으니까.”
그가 여상스럽게 말하는 내용 때문에 많이 놀랐다.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어쩌면 나를 불러온 것도 이를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의 사랑은 내게 어떤 소름끼치는 것으로 자리잡아버렸다.
“…널 데려온 건 그 이유만은 아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짐작했을까, 그가 내게 가만히 말했다. …뭔가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알겠습니다. 다음에 또, 하고 예의바르게 인사하자, 그가 영상석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모르겠다. 나와 그의 관계는, 언제나 몹시 어려운 것으로 남아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도 내가 샤펜공과 어떤 방식으로건 남아있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겠지….
나는 '어머니'의 삶과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그 무엇과도, 어떤 역사와도 관련되지 않d은 채, 그 과거에 손 끝 하나도 매이지 않은 채, 그저 자유롭게.
과거에 매인 자들의 삶은 그저 지긋지긋하고 슬프기만 할 뿐, 어떤 것도 남기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안네는 가르쳐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음이 무서울 정도로 가벼웠고, 숨을 크게 들이키는 그것마저도 다르게 느껴졌다.
반데라스 교수님에게 찾아가, 배워봐야지.
그에게 내 능력을 활용하는 방법을 배우면, 새로운 방식으로… 순수하게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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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 주 오일;;; 죽을 것 같은;;;
오늘 무리하게 적네요 ㅠㅠ 다음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