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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81화 (81/113)

81화

며칠간은 정말 바쁘게 지냈다. 학생회의 일이 어찌나 많은지 정신도 없고, 학교 축제는 다가오고, 말 그대로 일이 산처럼 쌓여서 밤샘 철야는 물론이고 밥을 먹을 시간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한 풀 꺾여서 정상 궤도로 돌아와서 모두들 정상적으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 수준으로 돌아오자마자 다니엘은 나를 끌고 에데일락 홀튼 교수님에게로 갔다.

그는 몇 번이고 제대로 이야기하라고 상담날짜까지 잡아주고, 교수님 방 문 앞까지 데려다 주면서 자기가 같이 가줄까, 하며 안달복달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몹시 묘했다. 걱정해주시는 게 고맙기도 하고, 참….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무슨 일인지 다녀와서 꼭 말하고. 알았지?”

“네에, 네에.”

그래놓고 갈 생각을 안 하기에 도끼눈을 뜨고 손을 저어 쫓아보내도 자꾸만 이 쪽을 쳐다봤다. 저 분도 딸 낳으면 큰일 날 분이시네. 어쨌거나 기왕 잡은 상담을 안 하는 것도 웃겨서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느긋하게 자리에 앉아있는 반데라스 에데일락 홀튼 교수님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음. …자네가 상담 신청해서 좀 놀랐는데. 일단 앉게.”

거절하지 않고 얌전히 걸어가 자리에 앉았더니 교수님은 차를 내오셨다. 차 끓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으신 게, 꽤 즐겁게 차를 마실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됐다. 느긋하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고, 수업 얘기도 하고 내가 무사히 치른 성적에 대한 이야기도 좀 하다보니 시간이 정말로 훌쩍 갔다.

내게 호의를 가지고 계심이 분명한 반데라스 교수님은 정말로 좋은 대화 상대였다. 화제가 몹시 풍부하고, 정말로 모르는 것이 없으셔서 무슨 이야기를 꺼내도 흥미로운 이야기로 이어졌다.

나도, 그도 몹시 즐거워서 한참을 떠들다가 그가 나를 훌륭한 학생이자 대단히 즐거운 대화상대, 라고 평가를 내린 데에 보답하고 싶어서 쑥쓰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교수님이야말로 대단하신걸요. 이렇게 모든 걸 알고 계신 분은 처음 뵈어요. 굉장히 재밌어요, 저야말로.”

“내 나이쯤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거지. …어린 나이에 이 정도의 식견만으로 충분히 훌륭한 걸세. 나와 말이 잘 통한다는 데에 가산점이 좀 붙기는 했지만.”

그가 작게 웃으면서 윙크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자제하지 못하고 크게 웃었더니 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물었다.

“자, 교과서 이야기에서 질문이 나올 줄 알고 그런 쪽으로 대화를 끌어갔는데, 아직도 질문이 안 나오는 걸 보니 그 분야는 아닌 것 같고.”

아, 완전히 까먹고 있었네. 들어올 때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별 것 아닐 수도 있는데, 다니엘이 반드시 이야기를 해봐야 한다고 해서요.”

“그렇군.”

그가 침착하게 나를 기다려주었고, 나는 말을 고르다가 결국 대수롭지 않은 표정과 말투를 하고 말했다.

“제가, 그… 마법이 구현될 때, 어떻게 구현되는지 보이거든요. 저는 지금까지 예민자는 다 이런 건 줄 알았는데, 다니엘이 아니라고 하기에 좀 놀랐어요.”

그러자 반데라스 교수님은 몹시 놀란 눈을 하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안경을 고쳐쓰고는 말했다.

“잠깐만, 정말 보이나?”

“네, 확실하게요.”

그가 약간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초조한듯이 탁자를 몇 번 두드리고는 말했다.

“그러면 내가 똑같은 마법을 여러 번 구형하면, 그걸 그려볼 수 있겠나?”

“그림 솜씨가 좋은 편은 아닌데, 괜찮으시면 해볼게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그가 가볍게 여러 장의 종이를 한 장씩 들어올리는 걸 빤히 바라보면서 종이에 대충이나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간단한 마법이지만 참 정교하면서도 쉽게 하신다니까.

“다 그렸어요.”

말이 끝나자마자 반데라스 교수님은 평소보다 약간 급하게 다가오셔서 내가 그린 그림을 한참을 보시다가 잠시만 기다리라며 책장에서 오래된 책을 하나 꺼내시더니 한참 내것과 그 책을 번갈아 바라보시다가 말했다.

“그렇군. 자네는… 예민자군.”

“예, 그렇죠.”

새삼스러운 말에 얌전히 대답하자 그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예민자들은 보통 굉장히 막연한 감각으로 마력이 구동되는 걸 느끼지. 보통 그다지 쓸모는 없어. 그냥 마법이구나, 하는 게 다니까. 가끔 귀로 듣거나,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이 저리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아주 드물게, 자네같이 그게 눈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극하게 예민한 사람들이 있지.”

“혹시 이거 위험한 건가요?”

“아니! 당연히 아니네. 몹시 좋은 일이야. 아주, 아주 특별한 능력이야. 몇가지 훈련만 통하면 자네는 매우 대단한 능력자가 될 수 있다네.”

어쩐지 말도 안 되게 운 좋은 전개에 약간 의심하는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어떤 훈련이요?”

“동체시력을 좋게 해야지. 그리고 기본적인 마법진에 대한 이해도도 늘려야하고. 그리고 마력의 성질과 응용등을 깨우치면 좋아.”

“꽤 많네요. 잘 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들기도 하고….”

“세상 모든 사람이 원하는 능력은 아니더라도, 평생 갑부로는 살 수 있을만한 능력으로 만들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자네가 가진 능력은 몹시, 아주 특수한 능력이네, 다시 말하지만. 자네는 마법진을 해체하고, 설계하고, 그리고 더 효율적인 마법 사용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지. 마법사들에게는 빛이요 소금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네.”

거기까지 듣고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딱히 되고 싶지 않은데, 빛이나 소금. 하지만 어쩐지 반데라스 교수님이 무척이나 신이 나 보여서 뭐라고 말씀을 드리기가 참 그랬다. 그는 하지만 곧 신이 난 얼굴을 부드럽게 갈무리하더니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원하는 경우에만.”

“…강요하지 않으세요? 드문 경우라고, 방금.”

그는 웃으면서 그건 사실이지, 라고 말하더니 안경을 벗어서 탁자 위에 내려놓더니 조용히 말했다.

“자네 능력은 말할 것 없이, 몹시 드문데다 발견되기도 힘든 거야. 아마 100년은 커녕 300년에 한 번 나타날까말까한데다, 보통 그냥 예민자구나 하고 넘어가고 말거든. 게다가 전문적인 교육을 받기엔 자료가 드무니까 힘이 들고 말이지. …하지만 그걸 고려하고서라도…자네에게 이런 말 하기 쑥스럽네만, 나는 몹시 마법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야.”

“말 하실 필요가 없이, 무척 자명한 일인걸요.”

내가 그린 그림을 장난스럽게 가리키면서 말하자 그가 슬쩍 웃더니 말했다.

“그래, 난 소위 말하면 하늘이 내린 천재 쯤 되지. 하지만 그래서 내게는 다른 길이 허용되지 않았네. 난 좋아하는 다른 많은 걸 모조리 포기해야했지. 그리고 그건 내 평생에 후회와 오점으로 남을 걸세.”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내가 얼마나 변해도,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난 그럴 거야. 그가 말을 이으면서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세월이 아주 지난… 몹시 마모된 어떤 바위나, 산 같은 것처럼 보였다.

도저히 어쩔 수 없이 그저 낡아버리고 단단하고, 굳건한, 어떤 것. 나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지만, 감히 물어볼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그러니 난 자네한테 강요하지 않겠네. 어떤 길을 선택하든, 무슨 삶이든… 그건 결국 라시아, 자네의 삶이야. 자네는 그에 관해서는 모든 권리가 있으니.”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모든 권리가 있다는 말은 몹시 당연하고, 다정한 말이었으나 더없이… 그저 무서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누구도 내 삶의 방향을 정해주지 않고, 이제 나 혼자서 가야 한다는 것이 갑작스레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생각해보고, 나한테 말해주게.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지.”

그의 산뜻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털고 일어서다 문득 궁금해서 물었다.

“혹시 이 일을 하게 되면, 프리랜서로 일할 수 있을까요?”

그 말에 그가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프리랜서가 편하긴 할 걸세. 마법사들 봐주고, 결계 세워주고, 충분히 할 수 있긴 해. 하지만 목숨은 좀 걱정해야할걸세.”

“어째서요?”

“그 결계를 깨려는 놈들이 자네 납치해서 당장 풀라고 하면 설계도를 내줘야 하잖나.”

“으음, 결국 공무원으로 일 하는게 편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공무원으로 일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국왕 침실을 노린답시고 또 귀찮게 굴겠지.”

안 배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했다.

“돈은 많이 벌걸세.”

“그, 목숨값으로 충분할 정도로 벌 수 있을까요…”

“적당히 경호원을 붙여두거나,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아티팩트 같은 걸 설계하면 되지 않겠나?”

그 말을 들으니 또 해볼만도 한 것 같고. 일단 생각해보겠다면서 방을 나섰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거에 일단 혹하기는 했다.

어디에 소속되면 아무래도 이리저리 구속당하는 일이 많을테니까, 프리랜서가 좋기는 좋고… 딱히 다른 거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관심이 있는 분야도 없는데, 나만 할 수 있는 거라니 좀 끌리기도 했고 말이다.

“…어렵다….”

아직 졸업도 많이 남았고, 좀 더 진로에 대해서는 고민해보고 싶었다. 일단 미뤄두고 건강상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걸 걱정해준 다니엘에게 알리기 위해 학생회실로 걸어가는 와중에, 익숙한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렸다. 아비게일 같은데, 그녀가 무슨 일로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거지?

“…똑같아! 너도, 너도…”

“아비게일!”

심지어 다니엘의 목소리도 들려서,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는 기분에 일단 피해갈지를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다니엘이 화난 얼굴로 복도로 나오는데, 하필 눈이 딱 마주쳤다.

“어… 그, 상담이 방금 끝나서요.”

어설프게 변명 같은 말을 하고서는 나중에 뵙자고 걸어가려는데 눈가가 새빨갛게 변한 아비게일이 다니엘의 뒤로 튀어나오듯이 걸어나왔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처음봐서, 당황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일단 인사를 했지만 아비게일은 그런 내 모습에 오히려 더 화가 난 듯 나와 다니엘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

“또 너지? 언제나 너야.”

“…네?”

갑자기 나온 말에 황당해서 아비게일과 다니엘을 번갈아보자 다니엘의 얼굴이 참혹할 정도로 일그러졌다. 나는 그의 그런, 짜증스러운 얼굴도 그녀의 이런 얼굴도 처음 봐서 몹시 당황했다. 하지만 내 그런 당황을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그녀의 반응으로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또, 그렇게 모르는 척 하는구나. 언제나 너만 옳은 척, 잘난 척… 네가 대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넌 그냥, 그냥 천한 창녀의 딸이야!”

“아비게일!!”

다니엘이 나와 그녀의 사이에 서 내 시야를 가렸다. 그가 몹시 화를 참고 있다는 것이 분명했지만 나는 도저히 그 말을 듣고 묵과할 수는 없어서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살인자의 딸보다는 나을 것 같은데요.”

다니엘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뭐?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게 가볍게 웃어보이고는 말했다.

“아실 만한 일은 아니에요.”

그는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나는 그를 무시하고 말했다.

“전 이만 가볼게요. 두 분이서 해결할 거 하고 오세요.”

둘을 지나쳐서 걸어가려고 하는데 아비게일이 나를 잡아채고는 그녀의 매우 아름다웠던 눈에 독기를 품고 말했다.

“네가 모든 걸 갖게 두지는 않을 거야. 내가, 내가 가진 걸 모두 빼앗기지는 않을 거야…! 다니엘도, 아버지도, 그리고, 그리고…”

난 가진 적이 없는 것을, 그녀는 내가 빼앗았다고 말한다. 내가 베푼 것은 그녀에겐 정말로 아무 의미도 없는 거였을까. 내가 내 엄마를 죽인 사람의 딸인 그녀를 결국에는 살려준 것도, 내 최선을 다해 그녀가 하고 싶지 않았던 샤펜의 후계자의 직위를 훌륭하게 이으려고 공부하고, 노력하고, 생활한 것도, 그녀에게는 그저 감흥 없는 어떤 일일 뿐이었던 걸까.

“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천하고, 천한… 최악의 인간이야! 쥐새끼 같이, 남의 자리를 모두 빼앗고…!”

그녀의 울음소리가 복도를 엉망으로 울렸다. 나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다니엘이 그녀를 달래든, 욕을 하든, 조금도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망가지는 건, 참 잔인하고 허망한 일이다.

============================ 작품 후기 ============================

글 쓰기 좋은, 각도 조절이 되는 책상을 샀어요. 근데 언니는 잘하는데, 저는 이거 각도 조절을 못하겠어요 ㅠㅠ 어려워요 ㅠㅠ..

저번화의 댓글로 여러분들이 절 좀 귀여워해주시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멋진 작가.. 멋진작가의 타이틀이 갖고 싶다.

내일은 알바에 출동합니다! 이유는 바쁠 것 같아서!

내일 바쁘면 목, 금에 또 나갈지도 몰라요.

이 뜻은.... 글을.. 못 쓴다는...뜻입니다.

돌아오면 뭐, 음..... 안 바빴구나 생각해주시면 될듯요 ^0^찜닭은 존맛이었습니다. 여러분 진짜 .. 휴학 최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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