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휴가>
아비게일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은 몹시도 분명했다. 그 태도가 얼마나 분명하던지, 식솔들이 불편해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안네와 거의 비슷한 태도로 나를 무시했으며,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은 식솔들에게는 몹시도 가차 없는 태도를 보였다. 샤펜공작은 이 상황에서 딸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내게 잘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아비게일이 나를 시답지 않게 괴롭히는 것에는 그래도 지쳐서, 부디 학교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금이 딱 중간고사 기간이라 돌아가봤자 좋을 것 같지 않아서 중간고사 직후에 돌아가기로 했다.
“아비게일이 너를 귀찮게 하니, 일주일 동안 여행이나 다니는 게 어떠니.”
내 개인 서재에서 공부를 하던 중에 공작이 불러 내려갔더니 그가 의외의 제안을 했다. 반가운 제안에 놀라서 그를 빤하게 바라보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인 후에 말했다.
“그러면 좋겠지만….”
“가고 싶은 곳은 있니.”
어디다 정해놓고 그리로 가라고 할 것 같은 분이 이렇게 질문한 게 굉장히 의외였다. 안네의 일이 비단 아비게일 뿐 아니라 당신도 바꾼 걸까.
“딱히 없지만, 자유 여행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이니까….”
“그래, 그러면 필요한 것과 경비는 집사한테 말하거라.”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서려는데 공작이 머뭇거리다가 그렇게 말했다.
“원하지 않는다는 걸… 몰랐단다.”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멎었다. 굳이 뭘 몰랐다는 건지, 꼬치꼬치 캐묻지 않아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내 아버지는 내게 공작위를 강요하셨지. 나는… 너한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건 줄 몰랐어. 그저 다른 사람에게 주기 싫었을 뿐이야.”
변명처럼 나오는 말이 위로가 되었고, 이해의 기반이 되었다. 몸을 머뭇거리면서 돌리고 그에게 말했다.
“아비게일에게 한 일에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아마 평생 이해하지 못할 거고요. 하지만, 무슨 일이라도 할 정도로 엄마를 사랑했다는 건, 엄마 때문이었다는 건… 알겠어요.”
그 말에 샤펜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더니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넌 네 엄마를 많이 닮았어.”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그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입을 열어 뜻을 전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샤펜에 남는 걸 보고 싶기도 하고, 이 진창에서 나가는 걸 보고 싶기도 하구나.”
나와 퍽 닮은 남자. 엄마를 사랑한 남자. 세상에서 가장 잔혹하고, 의미 없는 복수를 위해 지금까지 살아남은 남자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그를 불렀다.
“아버지.”
그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너무 흔들려서 나는 그 혼자 무슨 지진이라도 겪는 줄 알았다.
“저는 샤펜가에 남고 싶지 않아요. 세상 무엇보다 간절하게, 저는 자유롭고 싶어요.”
그러자 샤펜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네가, 세상에 태어나길 아주 오래 기다렸어. 네가 건강하게 태어났다는 소식에, 안심하고 몹시 기뻤단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더니, 그 답지 않게 몹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딸.”
나는 그가 우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십년이 훌쩍 넘는 세월동안 단 한번도, 나는 그를 아버지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당신이 내 아버지고, 내가 당신의 딸임을…
“네가 원하는대로 살아라.”
내가 그러지 못했으니, 너라도. 그가 그런 말을 덧붙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껴안아야할까 고민했지만, 그럴 용기는 차마 나지 않아서 그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와 내 손으로 문을 닫았다. 만약, 좀 더 빨리 만났거나, 아니면 조금만 더 늦게 그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랬으면 나는 나와 어머니를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고, 엄마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은 그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 …과연, 그랬을까.
허무한 질문을 뒤로하고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이 저택에 계속해서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간단하게 대충의 짐을 쌌다. 옷이야 가면서도 살 수 있는 거니, 굳이 짐을 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벌정도만 챙겼고 대충 돈을 챙기니 바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선 학교는 졸업해야겠지. …그러고보니 공작위는 내가 안 잇고 싶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가씨, 제프리입니다.”
“들어와요.”
제프리가 방에 들어와서 놀란 눈을 하고 내게 물었다.
“여행가신단 소리는 들었는데, 벌써 짐을 다 싸셨습니까?”
“벌써 소문이 퍼졌어요? 딱히 준비할 게 없어서요. 일주일이고 뭐 가면서 살 수 있는 건 그냥 사려고요.”
“…경비로 얼마 필요하실 것 같냐고 여쭤보려고 했는데. 가시려는 곳은 어디십니까?”
“어,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도 대충 휴가 느낌으로 다녀오려고 해요. 휴양지로 유명한 바닷가나, 뭐….”
“여름이니 바닷가도 좋겠네요. 오시는 길에 선물 잊으시면 안 됩니다.”
“조개 주워서 올게요.”
“…아가씨 도대체 센스는 어디에다 팔아오셨습니까?”
“내 집사가 기념품 사오라고 할 때요.”
제프리는 약간 삐친 표정을 하더니 지금 바로 떠나시게요? 하고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아비게일 양이 워낙 귀찮게 해서요. 남아있어봤자 좋을 것도 없고. 바로 학교로 갈 거니까, 다음에 볼 때는 아느완이 아니라 알트라에서 보겠네요.”
“맞는 말씀이긴 합니다만, 행동력이 참 무서울 정도시네요. 머물 곳이나, 예약은 안 해도 꽨찮으시겠어요?”
“엄마 닮아서 그래요. 자유여행인데 뭐하러 그런 걸 챙겨요. 그냥 마차 준비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한 두시간 내로 나갈 것 같으니까.”
“이동 마법을 쓰시려고요?”
고개를 끄덕이자 제프리가 아쉽다는 얼굴을 하더니 금방 마차를 준비시키겠다며 내려갔다. 대충 짐을 다 싸고 빼놓은 것 없는지까지 확인을 한 후에, 바로 집사에게 내려가 내 소속의 사람들은 전부 알트라로 먼저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괜히 아비게일에게 호되게 당할 필요는 없으니까. 다행히 집사는 내 요구를 쉽게 들어주어서 나는 퍽 안심한 채 마차에 올라탈 수 있었다.
일단 이동마법진까지는 타고, 대충 휴양지에 내린 다음에 구두로 우선 이리하한테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어쨌거나 여러 가지 일에 휘말려 줬는데, 그 정도 이야기는 들을 권리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마음 먹은 대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서, 나는 귀족가 휴양지로 유명한 비엥에 도착하자마자 이리하의 궁으로 움직였다.
지금 딱 오수시간이니, 혼자 계실 것도 같은데. 짐은 내려놓을 것을 그랬나,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거고.
“…여전히 타이밍이 좋군.”
바닥에 땅이 닿기 전에 들리는 말에 고개를 드니 이리하가 차를 마시는 와중이었는지, 찻잔을 한 손에 쥔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오수 시간이지요?”
“음. 잠들기 전에 도착했더군. …몇 시간만 전이었어도 신료들 앞에 그대가 도착한 걸 자랑할 수 있었는데 말이야.”
“그러게요. 제가 타이밍이 좀 좋네요. 오수라도 혼자 안 계실 수도 있는데.”
그가 찻잔에 남은 차를 한 입에 들이키고는 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여기는 또 무슨 일이시지, 내 운명도 아닌 분께서.”
“비아냥 거리시기는. 저번에 왔던 일이 뭐 때문인지 아시고 싶어 할 것 같아서요.”
내 말에 이리하는 다정하고도, 몹시 가벼운 태도로 차를 권하면서 말했다.
“잘못 알고 있군, 그대는.”
“…뭘요? 그나저나 찻잔이 하나뿐인데.”
“난 그대나 보고 싶은거지, 그대 주변의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네.”
그는 자신이 입을 댔던 찻잔에 차를 따르더니 내게 내밀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차가 마시고 싶었던 건 아니라서 고개를 저으며 애매하게 미소를 짓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 하더니 내게 물었다.
“그래서, 내가 누구한테 이 기쁨을 빚졌지?”
그가 앉은 자리 앞에 조심스럽게 치마를 정리하고 앉으면서 리본을 풀어 모자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는 턱을 괴고 내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나서 입을 열었다.
나는 그가 내가 현재 몸을 담고 있는, 묘하기 그지 없는 상황에 대해 어떤 말을 할지, 그 말이 내게 혹여나 상처를 줄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대는 이제 샤펜 가의 후계자가 안 될 수도 있다, 이거로군.”
그 와중에 자기한테 유리하고 즐거운 소식만 꺼내서 들은 이리하 때문에 기운이 쭉 빠져버렸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네, 그야 그렇죠. 그렇다고 제가 샤하레가 될 마음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가능성이 생기는 건 기쁜 일이야, 안 그런가?”
“예에. 그걸 보고 희망고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 걸 아실 때가 됐는데.”
그 말에 그가 쓴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난 정말 상 받아야 해. 하나도 안 먹히는 데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니까 말이야.”
“…그렇죠, 상 받으셔야 해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한테 노력하셔도 안 불쾌하게 만들 줄 아는 사람한테 주는 상.”
그 말에 이리하가 기분 좋은 얼굴로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굉장히 기분 좋은 칭찬인데.”
“저한테 특수일 수도 있으니까 너무 좋아하지는 마세요. 이리하랑 저랑은 닮았고, 그래서 제가… 좀 더 친근하게 느끼는 것도 있으니까. 게다가 저한테는 워낙 잘해주시기도 하셨고.”
“그게 사랑이 안 된다니,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라니까.”
“사랑으로 하신 일이 아니니, 저한테 부담이 안 오는 거 아닐까요?”
가볍게, 정말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그 말에 이리하의 표정이 미세하게,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스스로도 흔들릴 줄 몰랐던 것처럼, 몹시 미세하게.
“…그런가.”
“……이리하?”
그는 약간 불안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곧 나를 안심시키려는 것이 분명한 태도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놀러간다고?”
“어…네. 사람이 드물고 동물을 좀 많이 볼 수 있는 곳에 가고 싶어서, 이리하만 뵙고 바로 이동하려고요.”
“사람이 드물면 지내기 힘들지 않겠나?”
“별로요. 구두도 있고, 괜찮아요. 그리고 사람에 치여서 지친 거라서 솔직히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해서.”
손에 모자를 쥐고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하자 이리하가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내가 적당한 장소를 아는데.”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이리하께서요? 하고 물었더니 그가 울컥하는 얼굴로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그대는 내가 궁이랑 오르밖에 모르는 자인 줄 아나.”
“공무로는 많이 다니셔도 혼자 여행 다니실 일은 없으시잖아요.”
그 말은 맞는 말이라 다른 말 없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책장으로 가 뜬금없이 지도를 들고 와 펼쳐 한 군데를 짚어 내게 보여주었다.
“…여기가 뭐하는 곳인데요?”
“사람은 없고 동물은 많으면서 지내기는 그리 나쁘지 않은 곳.”
무슨 속셈인가 싶어서 빤히 그를 바라봤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숲이라 물도 풍부하고, 나무도 많고. 나쁘지 않을거네.”
하기사 밑져야 본전 아니겠는가. 별로면 그냥 나오면 되는 거고. 나는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리하가 알려주는 좌표를 외웠다. 이 구두도 결국 마법 도구니까, 좌표로도 움직이겠지.
“감사합니다. 잘 지내다 갈게요.”
“…또 보지.”
그가 산뜻한 얼굴로 가볍게 인사했다. 또 보기야 볼테지만, 왜 저런 산뜻한 미소에 기분이 묘해지는 걸까. 어딘가 찝찝한 기분을 뒤로 하고, 나는 구두를 가동했다.
시야가 환하게 밝아지고, 다음으로 보인 것은 갈색의 나무로 만들어진 벽이었다. 여기서 지내라고 이 곳 좌표를 알려주신건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들어 공간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쾌적하고 깨끗한 집이어서 지내기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느긋하게 모자도 벗고 짐가방을 내려놓았다.
작은 규모의 부엌에는 지내는 동안을 위해서인지, 보존마법이 걸린 음식들이 있었다. …정말 지내기 편할 것 같은 기분이…. 심지어 이거 상당히 잘 만들어진 음식 같은데. 괜스레 왔다 갔다하다가 아직 배고프지 않으니까, 일단 물려놓고.
“깨끗하네.”
뒤져보니 그다지 작지도 않고, 없는 것도 없고, 공간활동도 알차게 되어있는 걸 보니 어느 귀한 사람이 머무는 곳인가 싶기도 하고… 바깥도 한 번 보자 싶어서 문 앞으로 나섰더니 종이가 있었다. 마법 주문이 걸려 있는 돌 너머로 가면 목숨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최대한 부드럽게 써져있어서 잠깐 내 눈을 의심했다.
…대체 날 어디로 보내신거지.
문을 열고 나서서 한참을 걷자 돌이 보였는데, 사실 돌보다 더 먼저 엄청난 규모의 마법진이 먼저 보였다. 엄청나게 세밀하게 짜져있고, 주문도 복잡하기 그지없는데 아마도 보호의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제대로 읽지는 못하지만. 내가 마법용 언어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진짜 크다.”
게다가 엄청나게 튼튼한 것 같았다. 나갈 수는 있나? 슬쩍 한 걸음 걸어보니 나갈 수는 있는 모양이었다. 들어가는 것도 무리는 없어 보이고… 그런데 대체 뭘로부터 이걸 지키는 거지?
'그르르…'
…… 내 귀가 잘못 됐나. 뻣뻣하게 굳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리를 확인하자마자 소름이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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