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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76화 (76/113)

7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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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있느냐?"

아무 말 없이 그의 앞에 서있었다. 내 아버지는 똑똑한 자였다. 그는 모든 면에서 나보다 뛰어났고, 앞일을 보는 통찰력도 있었다.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네 약혼녀를 두고 지금 누구와 놀아나는 건지 아느냐? 벌써 몇 달째 그 여자와 놀고 있는 건지 스스로 잘 알고 있겠지. 넌 이제 결혼해야 할 몸이다, 디트리히. 케이틴 양의 아버지에게서 혼인 추진 이야기가 나오는데, 네가 무슨 생각인지 나는 전혀 모르겠구나. …쓰잘데기 없는 그림이나 그려대고… 공작이 될 마음이 있긴 하냐?!"

차가운 얼굴의 그가 하는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생각 없이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케이틴과 결혼해. 만약 네가 그 창녀와 계속 놀아난다면, 너는 샤펜공작위를 받을 수 없을뿐더러 더 이상 내 아들도 아니다!! 네깟 놈에게 주느니 안네에게 주겠다!!!”

그 순간 어째서인지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내 아버지는 안경 너머로 나를 노려보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완전한 샤펜공작이었다. 내 아버지는. 아마 태어날 때부터 당신께서는 그 하나를 보고 크셨을 것이고, 그래서 나를 이해하시지 못 하는 걸테지.

“그래야지, 그러면.”

“…아니오, 공작위를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저는….”

공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처음으로, 나를 보고 놀랐다. 그게 뜬금없이 기분이 좋았다. 당신이 내 아버지였던 적이 있었고, 내가 당신의 아들이었던 적이 있었나. 나는 당신에게, 그저 후계자였을 뿐이지 않나.

“저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공작은 주먹을 떨고는 손에 닿은 책을 잡아 내게 던졌다. 나는 일부러 피하지 않았고, 책이 나뒹구는 소리가 크게 났다.

“나가!!!!”

나는 뒤돌아 방을 나왔고, 가슴 속이 이상하게 시원했다. 집을 나와 생활하는 것은 의외로 마음이 편했다. 거짓말 같을 때가 있을 정도로. 나는 이미 백작이었고, 사실 그다지 명예욕이나 정치에 대한 야욕이 있는 스타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이렇게, 그녀와 평생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한 달, 그녀와 함께 지내는 한 달은 마치 꿈과 같았다. 그녀는 몹시 충실하고, 대단히 깐깐한 아내와 같았다. 나는 진지하게 혼인신고를 하려고 하고 있었고, 그 전에 프로포즈를 제대로 하고 싶어서 고민을 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나, 당신한테 할 이야기 있어요.”

“…내가 오늘 나갈 때 당신한테 키스를 안 했던가?”

“아뇨.”

“그러면 양말을 거꾸로 벗어놨다던가.”

“아니에요.”

“어… 그러면 당신 먹으라고 사온 케이크가 마음에 안 들었어?”

“아니라니까요. 자,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듣기나 해 봐요.”

그녀가 장난스럽게 내 등을 때리고 내게 말했다.

“나, 임신 했어요.”

머리를 그녀가 세게 쳤어도, 아니, 아느완 신전 종이 내 머리를 두들겨 팼어도 이것 보다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입술이 저절로 떨려서 손으로 입을 가리다가 그녀를 붙잡고 말했다.

“당신 지금, 진지한거야?”

“이런 것 가지고 장난 안 쳐요!”

“세상에! 잠깐만, 지금, 어, 나 아빠가 되는 거야?!”

“…당신 아니면 신이 절 수태시킨 건데, 그럼 곤란하죠. 아직 성자를 낳을 준비는 안 됐다고요.”

“세상에! 당신 내가 사랑하는 것 알지?! 세상에, 세상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얼굴 전체에 키스를 해주고 그녀를 끌어안자 리이는 그녀 특유의, 노래하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이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어요, 사실 긴장 많이 했는데.”

“장난하는 거지? 내가 어떻게 당신과 나 사이의 애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오, 여자였으면 당신을 닮아야하고 남자아이면 당신은 절대로 닮으면 안 돼!”

“…남자애면 왜요?”

“남자애가 예뻐서 뭐해.”

그녀의 배에 수십번 키스를 하면서 나는 기뻐했다.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의 기분이 이럴까. 문득 키스를 하다가 떠오른 게 있어 이럴 게 아니다 생각하고 재빨리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설마 당신,”

“응. …리이 클레이만. …리이 클레이만, 샤펜이 되어주겠습니까?”

그녀는 말을 잊고 입을 벙긋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말이 나와도 울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 그런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다 눈물을 보여서 나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고 말했다.

“왜, 왜 그래. 내가 잘못했어. 반지를 가져와야했는데, 오, 제발 울지 마.”

그러자 리이가 고개를 젓더니 내 목을 힘껏 끌어안고는 말했다.

“결혼, 그런 건, 못 할 줄 알았어요.”

평생, 단 한번도. 그렇게 소곤거리는 그녀를 마주 안아주면서 말했다.

“결혼식날까지 그런 소리를 하면 안 돼.”

그러자 그녀가 울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철없는 부부였다. 철이 없고, 사랑스러운… 수십년이 지나도 나는 그녀와 나를 그렇게 기억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누구도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얼마나 쉽게 깨어졌나.

그녀의 임신 소식 이후로 우리의 관계는 더욱, 더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돈독해졌다. 나는 그녀를 무서울 정도로 사랑했다. 다른 말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랑했고, 다른 어떤 말로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했다.

우리의 곧 태어날 아이를 그렇게 사랑했고, 그 애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하루하루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황궁에서 일하고 있던 내게 전갈이 왔다. 집에서 온 전갈에 놀라 내용을 살펴보고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곧장 일을 내팽겨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리이는 의식이 없었고, 집안의 얼마 안 되는 식솔들은 모두 창백한 얼굴을 하고 나를 맞았다.

“누가, 이런 짓을.”

내 사랑하는 당신에게, 누가 감히.

“…상태는, 상태는 어떻지?”

“지금은 좀 안정 되었습니다만, …아이의 생명은….”

그 순간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없어 의사의 멱살을 쥐고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다시 말해봐.”

“…독이었습니다. 그나마 처리가 빨리 되어서 다행이지만….”

의사의 멱살을 놓고 리이의 앞으로 다가갔다. 마치 잠에 든, 동화속의 공주 같다. 왜 당신이, 어째서.

“아이가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살아있습니다. 백작님. …최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버티시면….”

아이가 살아있다는 소리에 나는 리이의 뺨을 몇 번이고 쓸어내리며 감사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이렇게 진득한 마이너스적인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을까. 어지러울 정도였다. 의사의 말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고, 숨을 멈추고 그저 리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당신과 우리의 아이를 모두 건강하게 살릴 수만 있다면 나는, 나는…

얼마나 오랜시간 빌었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는, 지옥같은 시간들.

“백작님.”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나와 어릴 적부터 함께 한 샤펜가의 집사가 나를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동안 이러고 계신 겁니까.”

“…모르네.”

“…곧 깨어나실 겁니다.”

“고맙네만, 자네는… 여기 웬일인가.”

더듬더듬, 리이의 손을 매만지면서 말하자 집사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 말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샤펜 공작과 원로께서….”

그가 내게 자료를 건네주었다.

누군가의 완벽이, 누군가에게는 독이 된다. 내가 해둔 생각을, 나는 어째서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가.

케이틴, 밀러 블란체.

나의 약혼녀. 나를 사랑하는 여자.

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잊고 있을 수가 있었지.

떨리는 손으로 자료를 쥐고, 내 분노가 이 증거를 상하게 할까봐 힘을 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당신을 죽이고 말거야. 아니, 죽이는 것보다 더 괴롭게 해주겠어.

“…디트리히?”

아스라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손에 들었던 자료를 전부 내팽겨치고, 그녀에게 다가가 키스를 퍼부었다.

“리이, 리이.”

어린애같은 목소리로 당신에게 매달린 채 우는 나를 리이가 힘없는 팔로 끌어안다가 말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케이틴, 내 전 약혼녀가, 샤펜공작과 함께 당신을 독살하려고 했어.”

나는 마치 어미에게 고자질을 하는 아이처럼 그녀에게 말했고, 리이는 그 순간 무서울 정도로 굳은 얼굴을 하고 입술을 떨며 말했다.

“내 아기는요?”

“…아이는.”

나는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아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리이만 살아나면 된다고, 아이는 또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억지로 납득시켜왔기 때문이다. 둘 모두 살리려다가 둘 모두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한 사람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게 내 아이였을 뿐이다.

“…의사를 불러와요, 디트리히.”

집사가 문을 나서 의사를 데리고 왔다. 그는 한참동안 진찰을 했고, 나는 방 문 앞에서 한참을 왔다갔다 하며 초조하게 입술을 뜯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의사가 나오자마자 그를 붙잡고 상태를 묻자, 다행히 태아에 영향을 줄 정도의 양은 아니었고, 리이는 몇 가지 부작용 이외에는 멀쩡할 것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나는 이제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난 떠나야 해요, 디트리히.”

그녀가 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어째서, 왜…”

병을 이겨내고 그녀는 바로 짐을 쌌다. 아마 평생 어딘가가 불편할 것이고, 임신 내내 몇 가지 약초를 조심해야하며, 앞으로 평생 조심해서 살아야 한다는 조언이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시는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아요, 디트리히. 나는… 나는 절대로 이런 일은 다시 겪지 않을 거예요. 난 평생 내가 결혼도, 아이도 못 가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당신은 그 두가지를 내게 모두 선물해주었고요.”

리이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보드랍고, 다정했지만 차가운 손이었다.

“특히 아이는, 디트리히… 나는 이 아이를 벌써 세상 어느 것보다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당신의 배경이 내게서 이 아이를 빼앗으려 한다면.”

창백한 얼굴, 아름다운 황금색 머리카락. 세상에서 제일 반짝거리는, 당신의 유리구슬 같이 청아한 푸른 눈동자.

“그러면 난 당신을 떠날 수밖에 없어요.”

아연한 얼굴로 나는 그녀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당신이, 나를 떠난다니. 이럴 리가 없어. 이건 꿈일 거라고, 몇 번이고 속으로 주장했지만, 단 하나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당신은 그림을 완성하지 않았지요, 디트리히. 내가 있으니 더 이상 이 색감을 그림에 둘 필요가 없다고.”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것밖에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었다.

“그림을 완성하세요. 그림을 완성하고, 그 안에 나를 가둬요. 나를 가두고, 우리의 사랑을 가둬버려요. 사랑을 잊고, 추억을 잊고, 나를 잊고…”

눈물이 우리 사이를 막았다. 리이는 그저 울면서 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당신 자신도 잃어버려요.”

당신 같은 사랑은 내게 없었다. 당신과의 몇 달, 아니, 어쩌면 몇 세기였을 지도 모르는 이 사랑을, 당신이 잊으라고 하다니.

“내 사랑.”

눈물이 내 뺨에 닿았다. 당신은 내 마법사였어. 나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도대체, 도무지 입 안의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울지 말아요.”

그 때서야 나는 내가 울고 있음을 알았다. 당신을 만나기 전, 내 세상은 무채색이었다. 아무 색도, 맛도, 눈물도 웃음도 없었다.

당신이 나를 웃게 했고, 나를 행복하게 했고, 내게 새로운 하늘을, 새로운 땅을, 바다를, 맛을, 세상을.

세상을 보여줬어.

“내가, 당신을, 지나치게 사랑했나.”

더듬더듬 나온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물방울 처럼 흐르던 목소리에서는 절망이, 이별이 묻어나왔다.

“부족함 없이, 과함도 없이… 마치 운명처럼, 사랑해주셨어요.”

그리고 당신이 다시 빼앗아가는군. 내 세상을, 미래를.

내 모든 색채를.

샤펜 저택으로 돌아오고나서 나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방에 처박혀 그림을 그렸다. 내가 아는 그녀를, 내가 아는 세계를….

그녀는 내게 단순히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내 신이었고, 내게 새로운 세상 그 자체였다. 미친 사람처럼 그림에 붙잡혀 완성하고 나자, 모든 것이 허무해졌고 나는 그대로 쓰러져 앓아누웠다.

일주일 후, 잠에서 깨자 내 세상은 거짓말처럼 어두워졌다. 세상에서 가장 밝은 조명을 꺼트린 듯이, 어둡고 침침했다. 색감이 하나둘 씩 껌에서 단 물이 빠지듯이 빠져나가고, 나는 그녀를 만나기 이전보다 훨씬 더 단조로워 보이는 세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혼식. 케이틴과의 결혼식은 급하게 진행되었다. 약식으로 진행된 결혼식에 케이틴과 첫날에 관계를 가졌고 그 잠자리로 그녀는 임신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아비게일,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는 아이라고 아이의 이름을 지은 것을 보고 나는 기뻤다.

당신도 겪어봐.

그렇게도 사랑하는 무언가가, 사라져버리는 고통을.

세상 전부가 어두워지는 지옥을.

그래, 당신도 겪어봐….

============================ 작품 후기 ============================

디트리히에게 리이는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 이게 아니었어요.

온도를 가져다주고, 사랑을 가르쳐주고, 그에게 빈 어떤 것을 모조리 따뜻한 걸로 채워줬죠... 보시다시피 아버지가 그리 따신 분은 아니라서....(먼산) 나올 일 없어 그런데 디트리히는 외동아들에, 아버지가 홀로 키우셨는데 자식교육에 인자하신 분은 아니지요!

이렇게 외전이 끝났습니다.

ㅎ...ㅎㅎㅎㅎㅎ.... 복수의 시작.

다음 편부터는 다시 라시아의 입장에서 쓸 거예요! ㅇㅅ< 사실 지형지물이나, 뭐 그런 여행기? 쓸 때는 사실 아빠 많이 닮았어여 라시아가.. 애가 예술적,,,ㄱ런 감동 같은 거 좋아함. 은근 시크한 구석이 있는 거는 엄마 판박이구여...

오랜만에 진퉁 로맨스 쓰니까 기분이 묘하네요! 이제 본편에서 뵈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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