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요즘 리이 클레이만과 많은 시간을 보내신다고 들었습니다."
약혼녀인 케이틴은 진한 청색 눈을 가진 얌전하고 조심스러운 여자였다. 그녀가 약간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잡았다. 고운 손이 미미하게 떨리는 것이 이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의 고통을 알게 해주었다.
“그렇습니다.”
케이틴은 나를 사랑했고,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 분명한 의사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감내하고는 말했다.
“어째서 하필이면, 그녀지요?”
왜 하필 그녀였는가. 나 스스로조차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그녀는 물었다. 왜 하필 그녀와 시간을 보내냐는 질문은, 사실 모두가 내게 하고 싶어 하는 질문이었고, 나조차 가끔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임에도 단순히 그림 때문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까닭은 뭘까.
만나서 하는 일은 모두 정해져 있었는데. 그저 그림을 그릴 뿐이다. 최대한 섬세하게 그녀의 모든 특징을 잡아내려했다. 그녀의 완벽한 비율이나, 혹은 살결같은 것들을 그대로 그려내고 싶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2시간이고 3시간이고, 허공을 보거나 나를 보며 그냥 보냈다.
“그 여자는 코르티잔이잖아요.”
케이틴은 경멸 섞인 어조로 그렇게 그녀를 정의내렸다. 누군가의 완벽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다. 리이 클레이만은 출신 때문에 나 스스로에게도 당당하지 않은 여자였고 타인의 안에서는 경멸이 되고는 했다.
“…그건 당신이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 말에 케이틴은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조금만 덜 좋아하면, 우리는 분명 좋은 부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 모든 걸 아는 아내는 필요 하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것은, 샤펜가의 위명에 어울리는 위치에 있는 여자니까.
"아버님께서 만나고 싶어하세요."
"무엇 때문입니까."
케이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케이틴은 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혼의 기간이 퍽 오래되었다 하시네요."
"아."
그의 말 대로였다. 케이틴과 나의 결혼은 평균적으로 이 시기에 준비가 이루어져야했다. 하지만, 결혼준비를 시작하면 분명 바빠질 것이다. …그림은 어떻게 하면 좋지?
“조만간 뵈러 가겠습니다.”
케이틴은 약간 조급하게 일어서서 내 볼에 용기를 내어 비쥬했다. 나는 그녀에게 떨떠름하게 비쥬한 다음 그녀를 배웅하라고 하녀를 불렀다. 하녀가 오기 전, 갑작스레 풀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자박자박, 노래하는 듯한 리듬을 타고 다가온 여자가 웃었다.
"좋은 오후네요, 디트리히."
그녀에게 이름을 허락한 적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토를 달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부르는 내 이름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과 다를 게 하나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어머, 케이틴양도 계셨군요, 반가워요."
케이틴은 우아하게 고개를 까딱하더니 내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약간의 당혹을 숨기고 그녀를 그녀를 바라보자 케이틴이 간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먼저 방에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그러자 클레이만은 여유있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처음 나타났던 것처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손 끝에 걸리는 나무와 풀들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멍청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케이틴이 하녀와 사라지는 것을 마중해주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케이틴 양은 돌아가셨나요?”
“예.”
저택의 응접실에서 가벼운 태도로 그림을 구경하고 있던 클레이만이 내가 들어오자 속삭이듯이 물었다.
“그녀는 절 싫어하죠, 그렇지 않나요?”
“…모든 여자들이 당신을 싫어하지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딱히 뭘 잘못하고 사는 것도 아닌데.”
발랄하게 말하면서 그녀는 응접실 탁자에 올라간 책을 팔락거렸다. 나는 나 자신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그녀를 상처 입히기로 결심했다.
“당신은… 코르티잔이니까요.”
그러자 그녀는 놀란 눈을 하더니 삐뚤어진 입매를 하더니 말했다.
“아, 제가 코르티잔이라서. 그렇다면 그녀는 황실이 후궁을 두는 데에도 반대를 하는 사람인 게 틀림없군요, 공께서도 그렇고.”
왜 그런 말이 나오는 지 몰라 당황한 얼굴로 머뭇거리자 그녀는 내 쪽으로 다가오면서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코르티잔이란 결국 귀족의 애인이지요, 돈을 받는.”
“바로 그것 때문에 경멸이…”
“하지만, 그게 뭐가 잘못 된 거지요? 내 생각에, 나는 웬만한 후궁보다 열심히 일 하고 있는데요.”
“…일 이라는 건,”
“일 이라는 것은, 섹스를 제외한 모든 것을 말 하는 거예요. 당신 생각에는 내가 섹스하는 인형처럼 보이나요? 나는 그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해요. 나는 내 가치를 높여서, 나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들을 중요한 사람처럼 만들어주죠.”
그녀는 화병에 있는 꽃 한 뭉치를 꺼내 들더니 그것을 카페트 위에 뿌리고 짓밟았다. 장미가 덧없게 그녀의 발 밑에서 뭉그러졌다.
“난 유행을 읽어야 하고, 디자이너와 친해야 하고, 말을 나눌만큼 멍청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해요. 심지어는 나와 함께 하는 남자의 안목을 높아보이게 하기 위해 파티를 주선하고, 그 사람의 옷, 예술품, 심지어는 내가 가고 나서 만나야 할 사람들까지 골라준다고요.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요?”
나는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당신은 다른 남자와 자잖소.”
“한 사람과만 섹스하는 게 그렇게 질색할 일인가요? 그렇다면 황제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자겠군요, 수많은 여자와 자니까!”
“…나는, 그런 식으로는….”
“후궁이 하는 일이 뭔가요? 그저 정치간의 결탁이고, 결국 그 여자는 하는 일 없이 후궁전에 들어앉아서 아이를 낳겠죠. 심지어 그 아이를 자기가 키우지도 못하고요. 오! 누가 나한테 섹스만을 위해 있는 여자가 나쁘다고 했더라?”
그녀는 점점 더 빠르게 다가와 나를 태울 듯이 노려보았다. 이 여자의 눈 안에 들어있는 것은 유리구슬이 아닐지도 모른다. 파랑 불꽃. 산소가 닿지 않아 뜨겁게 타오르지 못하는 그녀의 눈을 보고 나는 말을 잃고 서있었다.
“그러니 내가 당신들을 그저 웃기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후궁은 되는데, 코르티잔은 안 돼요? 그것 참 대단한 혈통주의네요.”
그녀가 내 넥타이를 잡아채고 그녀의 시야에 맞춰 나를 끌어내렸다.
“겁쟁이.”
가까이서 바라본 그녀의 눈에 숨이 막혔다. 입을 열어 그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 단순한 혈통주의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몹시도 싫었다.
“다음에 뵐게요, 샤펜공자.”
조롱하듯이 내게 속삭이던 그녀는 내 옷을 놓더니 방을 나가려고 했다. 나는 급하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아마 당신 말이 다 맞을 겁니다. 당신은 창녀가 아니고, 나는 그저 당신을 혈통주의적 관점에서 내려깔고 있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녀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초조하게 말을 다듬으며 입술을 축이다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단순히 그저 당신이 그래서가 아니라, 그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점점 힘이 빠졌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손목에서 힘을 빼면서 웅얼거리다시피 하며 내 마음을 고백했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못난 자가 지금 나일 것이다.
“나는.”
리이 클레이만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거의 놓은 채로 말했다.
“질투가 난 것 뿐입니다.”
그 말에 그녀가 놀란 눈을 하고 조그맣게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오.”
“…미안합니다.”
그녀는 몹시 당혹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질끈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
“무례할 정도로 화를 내서 미안해요.”
“당신에게는 화를 낼 모든 권리가 있습니다.”
담담하게 말하자 그녀가 약간 민망하다는 얼굴로 웃더니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음… 함께 있기에 좋은 날이 아닌 것 같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게, 당신에게… 실례가 됩니까?”
그러자 클레이만은 놀란 눈을 하더니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와서 내 뺨에 손을 올리고 그녀 쪽으로 잡아 당기더니 속삭였다.
“아니에요. 그런 건 절대로, 절대로 아니에요.”
그러더니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는 듯 하다가 눈을 감았다. 우아하게 감기는 황금색 속눈썹을 정신없이 바라보다가 몹시 떨면서, 나는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숨이 맞닿은 순간, 내 세상이 놀라울 정도로 변했다.
유난히 환한 달빛 아래 테라스에 그녀는 테라스에 비치된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고,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그리고 있었다. 달빛 아래에 그녀는 눈이 부시게 빛났다.
은은한 빛이 그녀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어루만졌고, 나는 조심스럽게 붓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달빛 아래의 그녀는 매혹적이었다.
“당신은 참, 색감이 풍부한 사람이야.”
“…내가요?”
“응. 내 그림에 자꾸만, 색을 불어넣어. …세상 어떤 것도 그러지 못했는데.”
“예뻐서?”
“그거 모욕적인데, 내가 예쁜 거에 그냥 홀라당 넘어간 것처럼 느껴지잖아.”
그녀가 하얀 시트 사이로 다리를 드러내면서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내 옆에 앉았다.
“아닌 사람처럼.”
“…얼굴 보고 반한 거 아니야.”
“그럼 뭘 보고 반했는데요?”
“똑똑하고, 매력이 있고, 또… 이런 말 하면 당신이 날 비웃을테지만.”
그녀가 눈안 가득 장난기를 담고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말했다.
“안 그럴게요.”
“맹세해?”
“음. 맹세해요.”
나는 그녀의 코에 키스하면서 말했다.
“운명이라고 생각했어.”
“…오.”
그건 좀 비웃고 싶은데, 하는 얼굴로 그녀가 내게서 살짝 떨어졌다. 나는 재빨리 리이의 손을 잡아 당기면서 말했다.
“이제 못 물러나!”
“비웃지만 말라고 했지 도망치지 말라고 맹세한 적은 없었잖아요.”
“겁 먹었어?”
“그, …조금?”
“기분 좋은데.”
리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왜 기분이 좋아요?”
“내가 당신보다 더 사랑하고 있잖아. 그런데도 당신이 도망가려고 하지 않는 건 좋은 거지.”
“…방금 날 잡았잖아요. 그래서 못 가는 거지.”
뚱한 표정의 그녀를 잡아 당겨서 입에 키스하며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진짜로 도망가겠군.”
그러자 그녀가 약간 놀란 얼굴로 가만히 내 입술에 키스해주었다.
“안 그럴게요.”
“…다행이네.”
“…그러게요.”
새벽 별이 빛나는 밤. 그 찬 공기 속에서 당신은 내 여신이었고, 뮤즈였고, 사랑이며, 연인이고…
내 마법사였다. 나는 덫에 걸린 사람처럼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내 인생의 사랑. 단 하나의 운명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코르티잔이란게 참 어려운데, 일단 제가 컨셉으로 잡은 코르티잔은 거의 남자를 변신? 시켜주는 ?? 그런 느낌입니다. 베노암에서는 황후가 황실 살림을 다스리고, 후궁은 걍.. 인질..느낌이 강합니다. 인질+애낳기 용.
대신 후궁이 있음으로서 국제가 안정되지 않느냐, 하는 말에는... 개인의 일과 국가의 일의 중요도에 대한 차이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될 의견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어려운 문제져. ㅇㅅ< 다만 로맨스, 에 치중해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샤펜공의 경우 질투 + 천한 출신이쟈나 ㅠㅠ 천한 일 하쟈나 ㅠㅠ 라고 생각해서 리이를 무시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납득한 거니까요!
이 외전을 지금 넣은 까닭은.. 여러분이 샤펜을.. 징그러운 새끼;;;라고 생각할 확률이 넘 높아서..(침묵) 입니다.
그리고 상당수 부분이 이 미친 콩가루 집안, 이라고 생각하셔서 지금이 적기!! 나이스 타이밍!!!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샤펜공작이 리이를 너무 사랑했어요. 진짜로.. 마니... 다음 편이 외전 완결이구, 본편으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 리메이크된 작품이 투베에 올라와 있어서 넘 기뻐요 ㅠㅠㅠ 조코피아님의 그동생..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으신 분인데, 완결까지 잘 내셨음 좋겠습니다...!!
엌. 연참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