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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74화 (74/113)

74화

<코르티잔과 예술가>

그 해를 내 평생 잊을 수나 있을까. 그녀를 만났던 그 때 나는 어렸고, 철이 없었으며, 스스로가 예술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으리라.

<코르티잔과 예술가>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오월, 그녀의 생일 파티에서였다.

리이 클레이만을 모르는 귀족은 없었다. 그녀의 모든 것이 유명했으니까. 별 달리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나조차도 그녀만은 예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었다.

클레이만은 눈결처럼 하얀 피부에 금색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어두운 파란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마치 유리구슬 같이 사람을 비추는 눈 앞에서 사람들은 넋을 잃고는 했다.

어디에도 그녀와 같은 존재를 찾을 수 없었고, 혹은 그 어디에서나 그녀의 존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만한 존재감을 찾지 못해 모든 예술가들은 그녀에게 허덕이고 그녀를 갈구했다. 어쩌면 나 또한 그랬을지도 몰랐다. 시선을 빼앗는 여자에게 심장을 빼앗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일을 축하합니다."

남의 생일 선물에 이렇게 신경을 써본 적이 있었을까 싶었다. 리이 클레이만은 그녀와 함께 있는 남자를 왕으로 만들었다.

그를 통해 그녀는 후궁으로서의 즐거움을 톡톡히 누릴 수 있었고, 남자들은 그녀 자체의 아름다움과 그녀가 선물해주는 독특한 감각을 잊지 못했다. 세상 어떤 남자도 그녀를 단순한 창녀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선택하는 것은 결함이 있는 자였고, 그녀는 그 결함을 채워줌으로서 대가를 받았다. 그래, 제일 처음 그녀가 상인의 손을 잡고 파티에 등장했을 때부터, 그녀는 남자를 선택해서 ‘혜택’을 베풀어주는 사람이었다.

“고맙습니다, 샤펜공.”

잔잔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서 퍼져나갔다. 그래,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해서 좋을 것이 없으니. 그녀의 눈을 그대로 닮은 듯한 푸른 꽃다발을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어쩌면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마치 아주 예쁜 조각상을,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으로 치장했다는 그런 만족감을.

“…꽃다발밖에 못 줘서 미안합니다.”

그녀에게 꼭 어울리는 꽃다발이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으리라. 그런데도 그 말을 하고 만 것은 어째서일까. 말을 꺼내놓고 순간 스스로가 바보 같아졌다. 굳이 왜 그녀의 앞에서 스스로의 선물을 욕되게 하는지.

“아니오, 이걸로….”

하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내 선물은 그저 초라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그녀가 웃으며 조심스럽게 꽃다발의 향을 맡았다. 아마도 당신에게 수많은 사람, 수많은 밤, 수많은 꽃다발이 왔을 것이다. 그들 모두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세상 어디에 당신처럼 음악이, 꽃이… 예술이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세상만큼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을까.

“제가 당신의 이번 춤을 가져도 될까요?”

춤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잘 추지도 않았다. 나는 그녀가 내게 한 놀라운 제안에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오.”

그녀가 약간 놀란 얼굴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나는 긴장한 채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이 클레이만, 저와 춤을 춰주시겠습니까?"

그녀에게 손을 내밀자 그녀가 웃으며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내 손을 잡은 그녀를 데리고 나서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잡는 순간, 그녀도 나도 숨이 잠시 아주 멎은 것만 같았다. 내 생애 그토록 길고, 아름다운 노래를 들은 적이 있었을까.

"그림을 그리시는군요."

나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클레이만은 살풋하게 웃더니 노래가 끝나자 내 뺨에 조심스레 비쥬했고, 그녀의 왕 옆으로 가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다. 만약, 그녀를 이 세계에 데려온 것이 상인이 아니었다면. 이 세계에 그녀를 데려온 것이 공작이거나, 황족이거나, 하다못해 대단한 예술가였다면… 그랬다면, 나는.

나는 그림을 사랑하는 것으로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림 그리기를 사랑했으나, 내 스스로의 한계는 잘 알고 있었다.

내 그림은 메말랐고, 삭막했다. 사람들이 그린 그림의 따스함과 아름다움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색으로 보자면, 회색. 내 세계는 단지 그 뿐이었다. 내 그림도 그러지 않은 그림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녀를 만나고 온 날은 그러지 않았다.

그 황금색 머리, 장밋빛 뺨, 부드러운 살결을 모두 표현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색감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모든 색을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가 내 안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련님."

종이를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있던 나는 집사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내가 이 방 안에 있으면 내게 다가오지 않았고, 나는 그의 배려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 그러지?"

“클레이만양께서 오셨습니다."

초대한 적이 없는 손님의 방문에 짜증나야 할텐데, 이상하게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응접실에 그녀를 모시라고 하고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했다.

셔츠차림의 스스로가 한심해서 욕설을 내뱉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다급하게 응접실로 내려갔다. 응접실 문 앞에서 다시 한 번 스스로를 가다듬고 하녀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하녀가 문을 열었다.

응접실은 예술 작품의 집결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을 호가하는 태피스트리, 벽지, 가구… 그리고 빛이 쏟아지는 가운데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은 한가롭게 창문을 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신은 왜 그녀에게 이런 아름다움을 주고 그녀를 창녀로 만드셨나.

“샤펜공?”

내가 들어오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 유리 같은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약간 웃음을 참는 얼굴을 했다. 나는 그제야 꿈에서 깬 듯, 현실로 돌아와 그녀에게 말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아니오, 급작스러운 방문에 오히려 죄송해요. …그림을 그리다 오셨나보네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가만히 집사에게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이야기를 한 후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눈을 깜빡이면서 우아하게 찻잔을 든 그녀는 어딘가의 인형 같았다. 외출용 모자를 쓰고, 진한 크림색의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러워서 나는 거의 말을 더듬을 지경이었다. 맙소사, 내가 왜 이러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림 그리시는 것을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차를 내게 한잔 따라주었다. 마치 집 주인인 것 같은 그녀의 태도에 기분이 몹시 묘했다.

"매달 화구가 이리로 들어오는데 모를 리가 있나요. 공작가에 따로 후원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시고, 샤펜공작께서는 예술을 무시하시는 분이니 남은 사람이 샤펜공 빼고는 없지요."

“집사 편으로 시켰는데, 용케 알아보셨군요.”

"무엇보다 몇 번 스쳤을 때, 화구냄새가 은연히 났어요. 집사가 하루종일 당신과 붙어있는 것도 아닌데 냄새가 옮을 리 없으니까요."

나는 입을 열다가 지금 열었다가는 분명히 목소리가 어긋날 것 같아 숨을 참으면서 말을 골랐다. 완전히 당했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몹시 당혹스러웠기 때문이다.

“왜 찾아왔는지, 궁금하시지요?”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녀는 방긋이 웃었다. 입을 꾹 다문채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조금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제 초상화를 그려주세요."

"굳이 왜 제게 부탁하십니까."

그녀는 초상화를 엄격하게 금지했다. 그녀 앞으로 대가들이 무릎을 꿇고 단 한번만 그림을 그리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단 한 번도 그녀는 허락하지 않았다. 수십이 이미 완성된 그림을 들고 왔지만 모두 벽난로 속에서 운명을 마쳐야 했다.

“제가 원하는 초상화는 그렇게 화려하거나, 색감이 풍부한 게 아니에요. 지나치게 예쁘고 미화되어있어서 오히려 불편한 걸요.”

“…당신의 생김이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 말에 리이 클레이만은 물방울처럼 웃음을 터트리더니 화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을 하실 줄 아는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그런 표정으로요.”

내 표정이 어떻기에…. 얼굴을 쓸다가 말했다.

“제 그림을 우선 보시지 않고서는 움직이지 않으실테지요?”

“음.”

그녀가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우아하게 소파를 밀어올리고, 그녀는 장미꽃처럼 일어섰다.

“안내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결국 어쩔 수 없이 일어나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그녀는 마치 방금 기억난 사람처럼 손끝을 움직여 조심스레 모자를 벗었다. 모자를 고정하는 리본의 천이 매끄럽게 그녀의 목선을 타고 내렸다.

“제게서 눈을 못 떼시네요, 샤펜공.”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나보다. 조금 당황해서 멍청하게 서있다가 결국 솔직하게 말했다.

“확실히 그렇군요.”

“만족스러운데요.”

그녀가 눈을 접으며 우아하게 미소를 짓더니 방밖으로 마치 물고기처럼 나갔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데, 마치 물 속을 헤엄치는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그녀가 빈정거리는 말을 세 마디나 내뱉고 나서야 나는 내 방을 공개했다. 리이 클레이만은 아주 신중하게 내가 그린 그림을 몇 점 봤는데, 생애 처음 누군가가 내 그림을 보는 거라 나는 안절부절, 말도 못하게 내 스스로가 아니었다. 그녀는 한참을 바라보다가 하나를 골라 내게 말했다.

"전 이런 느낌이 좋아요."

"…저한테 정말 맡기시려고 하십니까?"

“네. 공께서 해주셨으면 해요. 다만 제 생각보다 너무 색깔이 없으셔서 좀 곤란하긴 하네요. 흑백도 재미는 있겠지만. 그리고 기왕이면 제 초상화 관련해서는 비밀로 해주세요.”

“그 점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당신의 집으로 갈까요?”

"화구를 들고 다니시면 들킬 것 같은데요.“

“…그러면 이리로 오시겠습니까?”

“당신께서 괜찮으시면, 그러고 싶은데요.”

그녀는 내 대답에는 관심이 없는지 곧바로 그럼, 다음에. 하고 손에 쥐고 있던 모자를 다시 썼다. 잠시 리본을 이리저리 묶으려 하던 그녀가 갑자기 나를 보더니 난감하다는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제가 이걸 제대로 하지 못하거든요. 죄송한데, 리본 좀 묶어주시겠어요?"

아무 말 없이 턱을 치켜든 그녀를 보다가 약간 고개를 숙이고 살짝 기울인 후 조심스럽게 리본을 묶었다. 괜스레 예쁘게 메지 못한 것 같아 다시금 모양을 잡는데 그녀가 내게 입맞춤했다.

촉, 아마도 그런 소리가 났던 것 같다. 얼굴 가까이에 다가온 향기에 놀라 몸을 굳히자 생긋 웃더니 그녀는 까치발을 하고 내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머금었다. 금빛 아래의 푸른 눈이 웃음을 머금더니 곧 내게서 멀어졌다.

"정말로 리본을 못 묶는 줄 아셨나요?"

눈웃음을 친 그녀가 능숙하게 모자를 고쳐쓰더니 들어왔던 때처럼 우아하게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멈춰 서있었다. 요정 같은 여자였다.

아, 아니다.

마녀같은 여자였다.

============================ 작품 후기 ============================

좀 늦었네여! 월~화에 온다고 해놓고 막판에 월요일에 온다고 적었는데 어제 글 쓰기 싫었쟌.... 뀨웅. 아마 삼부작? 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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