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시아-73화 (73/113)

73화

그녀의 손에 이끌려 정신없이 샤펜저택으로 향하는 마차를 탔던 것 같다. 마차에 타자마자 긴장이 풀렸던지 잠에 빠져들었고, 혜현이 날 깨워 내 방에 들어가서 애니의 도움을 받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몹시 피곤하고 지친 상태였지만, 이 상황에서 샤펜공을 보고 설명을 듣지 않을 수가 없어서 결국 서재로 내려갔다. 아비게일은 어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신경이 쓰기가 힘들었다.

지키는 사람이 없기에 스스로 문을 두드리자 누구냐는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시아입니다.”

“들어오너라.”

서재를 정리하는 중이었던지, 그는 서류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 그에게 목례하자 그가 자리를 권했고, 나는 무거운 걸음으로 서재의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어디에 계셨어요?”

마치 짠 듯한 타이밍이었다. 도무지 그가 납치 되었다가 타이밍 좋게 돌아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내 질문에 샤펜공은 가만히 의자에 앉아 책상 너머로 나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황궁에.”

“…안네를 일부러 부르신 거예요?”

“안네와는 청산해야할 게 있으니까.”

“…청산해야 할 일이요.”

그의 말을 되풀이하는 내 목소리가 몹시 건조하게 들렸다. 샤펜공은 책상을 두어번 손으로 두드리더니 말했다.

“모종의 일로, 나는 안네를 내 복수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어머니의 일에 대한, 복수였나요?”

“…그래. 안네는 잘못 한 게 없었지만, 안네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케이틴과 결탁했고, 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단다.”

자신은 무엇 하나 잘못 한 것이 없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의 그 무감각한 얼굴에 소름이 돋았다. 엄마를 죽이려고 한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무고한 사람을 이용한 당신.

“왜 사라지셨어요?”

“내 복수가 끝나려면 그녀가 필요했거든. …그녀에게도 기회를 줄 필요가 있었고.”

“무슨, 복수를… 이미 하셨잖아요.”

“아니. 단 한 명이 남았다.”

“안네를 통해서 하셨다면서요. 안네를 통해서…”

“그걸 사주한 사람이 남았지 않니.”

엄마를 가장 죽이고 싶어했던 것은, 아비게일의 어머니인 케이틴이었다.

샤펜공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을 때, 나는 그제서야 그가 망가져있었음을 알았다. 무감각한 얼굴,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온…

“…18년동안, 당신의 딸로 지냈던 사람이에요.”

이 상황을, 그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나는 애원하듯이 목소리를 쥐어짰다.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난 케이틴이 죽을 때 기뻤다. 그녀에게 내 모든 결심과 미래를 알려줬을 때, 짜릿하기까지 했지.”

샤펜 공작은 천천히, 아주 느리게 술잔에 술을 따랐다. 황금색 액체가 흘러 잔을 채웠다.

당신한테, 도대체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길래.

엄마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아비게일은 공작위도 받지 못할 거고, 케이틴 그녀가 원하는 대로 순수하게, 아름답게… 그렇게 사랑받고 크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말했지. 그리고 때가 왔으니, 아비게일도 알아야하지 않겠니.”

“무슨 때가…”

“가장 행복할 때. 그 애도 제가 원하는 걸 말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아주 오래 기다렸어.”

샤펜공은 무표정한 얼굴로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18년 동안, 딸이라고 키운 아이를 이렇게 잔인하게….

“당신, 사람은 맞아요?”

입 밖으로 뱉은 내 말에는 경악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샤펜공은 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아주 멀리, 어딘가 닿을 수 없는 곳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니. …네 엄마가 나한테 저주를 걸었지.”

그가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처음으로 내게, 아주 작게 웃어보였다.

“사랑스러운 여자였어.”

샤펜 공의 눈동자 안의 내가 지독하게 어머니를 닮아있었다. 그가 나를 어머니와 겹쳐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제야 나는 알아챘다. 그에게 나는, 그녀와 그의 증거이자, 그녀의 마지막 조각과 같은 것임을.

“넌 내 첫 아이고, 너는 다음 샤펜의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는 아이야. 네가 마땅히 올라야 하고.난 네가… 그리고 리이가 그걸 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몹시 담담하게, 그가 믿고 있는 사실들을 말했다. 나는 도저히 이 사람의 생각과, 믿음과, 이상을 따라갈 수가 없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오.”

내 몸 안 어디에서 그런 뜨거운 정열이, 지옥같은 증오와 불신이 태어난 건지 모르겠다. 내 엄마는 당신에게 그런 걸 원하지는 않았을 거야. 나 또한, 당신에게 그딴 걸 바란 적 없었어.

“그건 당신이 원하는 거예요.”

나는, 엄마는… 당신의 복수도, 당신의 자리도. 단 한 번도 원한 적이 없었다. 다만, 언젠가는 와주기를 바라고 있었을 뿐이다. 언젠가, 당신이 문을 열고 돌아오기를…

“엄만 그런 걸 원한 적이 없었어요. 엄마는 복수도, 후계자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요.”

차가운 경멸을 담고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나는 그에게 저주하듯이 말했다.

“나도 원한 적 없고요.”

몸을 돌려 방을 나서자마자 토기가 올라왔다. 제일 가까운 화장실로 뛰어가 토했지만, 나오는 것 없이 괴로울 뿐이었다. 내 피의 반이 이다지도 잔인할 줄은. 이렇게나 참혹한 짓을, 도대체 왜….

그저 복수를 하려고 아이를 행복하게 키우고, 지금에 와서 안네의 입으로 진실을 듣게 하다니. 이게 그렇게나, 가치있는 일이야?

“아가씨.”

언제 왔는지 모를 집사 내 등을 두드려줬다. 자리에서 비틀대면서 일어나 입을 헹구고 그가 건네는 수건을 받아서 입가를 닦았다. 눈가가 붉었고, 표정도 엉망진창이었다.

“…죄인이 찾습니다.”

“…죄인?”

거울 너머로 그를 노려보듯이 바라보자 그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는 말했다.

“…안네 프리앙 샤펜이….”

하. 저도 모르게 한숨같은 비아냥이 튀어나왔다. 이 집안들이, 나를 아주 잡아 먹으려 작정을 했다는 생각에 독기가 생기려고 했다.

“왜 나를 찾는데요?”

날카로운 어조에 더더욱 난감한 얼굴을 한 집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셔야 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아주 끝장을 보겠다, 이거지… 이 샤펜 년놈들, 내가 다….”

입 속에서 튀어나오는 거친 욕을 누르면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스스로가 도무지 자제가 되지 않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거울을 똑바로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전부 알게 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안내 해요.”

수건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화장실을 나오자 집사가 허리를 깊이 숙이더니 나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어렴풋이 어떤 품위같은 것을 간직한 안네가 살풋이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묶여 있었고, 세명의 기사가 그녀를 감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녀를 잠시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려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몸은 괜찮니?"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으니, 괜찮다고 말씀드릴 수는 있겠네요. …왜 부르셨나요, 당고모님.”

“날 여전히 그렇게 불러주다니, 다정하기도 해라.”

그녀가 화사하게 웃는 모습에 어쩐지 기운이 쭉 빠졌다. 내가 힘없는 짜증을 부리는 것이 보였던지 안네는 지체 없이 용건을 꺼냈다.

“대충은 들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마 디트리히 그 새끼가 날 이용한 거겠지.”

안네의 말에 솔직히 경악했다. 아니, 알고 있으면서도 돌아오다니, 제 정신이란 말인가.

“그러면 왜 돌아오셨어요?”

“…그래, 그게 너와 나, 그리고 너와 샤펜의 다른 점이지. 돌아와야했어. 내게 기회가 생겼잖니… 복수할 기회가.”

“그딴 복수가 뭐라고, 대체…!”

안네는 갑작스레 내게 다가와 얼굴을 가까이 하고는 속삭이듯이 경고했다.

“그딴, 복수가 아니란다, 라시아.”

그녀가 천천히 손을 올려서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길을 따라 솜털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기사들이 긴장해 칼을 만지는 것이 느껴져서 나는 그들을 손을 들어 막았다.

“디트리히도 나도, 그걸 위해 지금까지 버텨온 거니까, 그런 식으로 말 하면 곤란해… 알겠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자 안네가 내게서 손을 떼어내고 빙긋이 웃었다.

“샤펜이라면… 절대로 잊지 않는단다. 우리는 그냥 잊지 않아. 마치 피를 타고 내려오는 법칙같은 거란다. …우린 잊지 않아. 그래서 디트리히도, 나도… 여기까지 온 거고 말이야.”

숨을 천천히 내쉬면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조금도 공감할 수 없었다. 내게 여전히 그들이 하는 짓은 그저 어리석음이자 이해할 수 없는 것일 뿐이었다.

“넌 그런 점에서 네 엄마를 많이 닮았어. 그녀는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무튼, 난 돌아와야했단다. 너와 아비게일, 둘 모두를 망칠 수 있는 기회에 오지 않으면 이상하지.”

“…저나, 아비게일을요?”

“아, 너는 실패했어. 그래도 아비게일에 관해서는 성공했지. 이제 그녀는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란다. 아버지를 뺏은 너라든지… 뭐, 무슨 이유를 붙이든간에 말이야. 사실은 난 네가 아비게일을 죽이기를 바랐는데.”

그러면 샤펜이 그토록 바라던 순수한 네가 죽는 거니까 말이야, 그렇게 안네는 말하며 웃었다. 그녀가 너무도 천연덕스럽고 순수하게 말해서, 나는 우리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디트리히는 단지 내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가 나를 가장 예뻐한다는 이유로, 날 얀국에 시집보냈지. 내 남편이 어떤 자인지 알면서 말이야. 내 남편은 말이다, 내가 죽였지만 정말로 죽어 마땅한 인간이었어. 국주 자리를 위해 내 다리를 벌리고 값을 매겨 팔았지. 그리고 그런 나를 경멸했단다. 재미있는 일이지 않니?”

하나도, 조금도,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내 손이 조금씩 떨려서 나는 치마를 뜯을 것처럼 잡았다.

“나는 디트리히에게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냈어. 그러자 그는 친절하게, 그 모든 일에 대해 써넣은 거절의 편지를 넣어주었고. …인간 사냥에 대해 들어보았니? 내 남편은 포주일 뿐만 아니라, 변태새끼이기도 했단다. 그래서 난 밤에 빛이 나는 표식을 목에 매고 사냥당해야 했어. 그런데 어떻게 내가 네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니, 라시아?”

그러더니 안네가 마치 비밀을 이야기 해주듯이 속삭였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네가 망가지길 바라지 않을 수가 있겠니.”

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네는 그 말까지 끝내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나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나는 곧 처형당할 여자의 말을 얌전히 따라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후에, 나는 그녀의 말이 현실로 이뤄지는 것을 목격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정직했던 아비게일은 간단히, 안네를 죽였다. 마시는 물에 독을 탄 그녀는, 굳이 그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안네는 그걸 빤히 알고 있었으면서, 한 번 웃고는 그대로 그 물을 마셨고… 그게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그 날로, 아비게일은 변했다.

============================ 작품 후기 ============================

비극은 참 재밌눈듯!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눈치)다음 편이 샤펜공작 외전이네요!!

와 댓글이 많아서 기분이 좋아요! 여러분 조르면 다 해주는 ..!! 그런 상냥한..!! (왈칵)개인지는 ㅎㅎ...ㅎ.ㅎ...ㅎ..ㅎ.ㅎ.ㅎ. 라시아는 개인지 생각이 없습니다 넘 길어여!

@달아주시면 리코멘 해드려요!

리메하고 캐릭터 살아났다는 말 들어서 기분이 엄청 좋았어요 ㅠㅠ 감사드려요!!

진짜 월요일날 올거에요 ㅠㅠㅠ 히잉 아 맞아 저 선작 7777잡으려구 노력하구 있어요 ㅠㅠ!! 혹시 우연히 보신분은 캡쳐해주셔요 ㅠㅠ 후에에 ㅠㅠ 놓칠까봐 넘 무서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