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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72화 (72/113)

72화

안네는 기어코 나와 아비게일을 사냥용 별장으로 데리고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도, 아비게일도 사냥과는 거리가 먼데 어째서 사냥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주 적은 인원만 데리고 별장으로 떠났다.

그나마 지금까지 미뤄둔 일이 해결됐으니 떠날 수 있는 거지만 사실 그렇게 반갑지 않은 일정이었다. 신나기에는 행방을 알 수 없는 샤펜공작이 걸렸고, 또 안네가 무슨 짓을 꾸미는 건지, 걸리는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날씨가 참 좋구나."

안네의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어쩐지 좀 소름이 돋았다. 날씨는 청명하고, 우리는 사냥터에 서있었다. 낮의 사냥터에 기어코 우리를 끌고 온 그녀는 기분이 몹시 좋아보였다. 그리고 안네의 밝음에는 사람의 몸이 선뜻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지못해 그렇다고 대답하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활을 좀 쏠 줄은 아니, 라시아?”

“약간이라면 쏠 줄 알아요.”

다니엘이 약식으로나마 가르쳐 줬다. 나는 활에 대해서는 상당히 재능이 있는 편이었고, 꽤 재밌기도 했다. 물론 동물에다가 쏘는 취미는 전혀 없었지만.

“저런, 잘 쏘는 게 좋을텐데. 유용하게 쓰이거든, 활이란.”

어디에? 의문을 그저 삼키고 애매하게 웃어버렸다. 이 여자의 머릿속이 어떤 지 알 수 있으면 정말로 좋으련만.

“그나저나, 아비게일.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마.”

그녀가 이토록 활달하고 밝은 목소리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개 그녀는 노래하듯이, 읊조리듯이 나른하게 말하는 편이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소녀가 된 듯한 목소리로 얼굴을 일그러트린 아비게일에게 재잘거리듯이 말했다.

“너는 네가 라시아를 샤펜가에 데리고 왔다고 생각하겠지.”

내 얼굴이 굳어지는 게 스스로 느껴졌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단 한번도, 내가 아비게일에 대한 생각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내 후계자 일과 관련해서 어떻게 받아들일 지 단 한 번도 고려하지 않았다니. 아비게일은 내 창백한 얼굴과 행복해보이는 안네의 얼굴을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 아비가 널 너무나 사랑해서, 네 소원이라면 어리석건 아니건, 가리지 않고 받아주는 거라고… 그렇게 터무니없는, 창녀의 딸도 데리고 와서 후계자 교육을 시키는 거라고 말이야.”

그 말에 부정은 없었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때아니게 혀에서 쓴 맛이 느껴졌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말하면 누가 다치나. …그리고 코르티잔은 창녀라기에는.

“그런데 어쩌니, 아가.”

안네가 은회색 눈을 가늘게 접으면서, 몹시 다정하게 아비게일에게 웃어주었다. 나는 이 예견된 불편을 외면하기 위해서 고개를 살짝 돌렸다. 왜 이걸, 내 앞에서 말 하나.

“네 아비는 널 단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었어. 디트리히, 그 자가 사랑했던 건 리이 클레이만- 그 코르티잔 뿐이었지. 디트리히는 저 애에게 그 자신과 평생을 함께 한 집사를 줬고,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주기 위해 아등바등했지. …너는 네가 원해도 공작위를 가질 수 없었단다, 아비게일.”

“말도 안 되는 소리…!”

안네가 상냥하게 웃었다. 악의가 담겨있는 웃음이었다. 그게 아니라는 말을 해주기에는, 나는 샤펜 공작을 잘 알지 못했다. 그가 내 어머니를 정말로 사랑했는지, 어째서 나를 위해 이 공작위를 준비했는지…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저,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는 것뿐.

“정말, 단 한 번도 네 아비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니? 네가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그가 화를 내던? 묘하게… 반가워하지 않던?”

아비게일은 혼란스러워보였다. 안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비게일에게 천천히 다가가서 그녀의 다갈색 머리카락 한 줌을 쥐어 매만졌다. 끼어들어야 할까. 아니라고 말 해야 할까? 하지만, 정말 아닌지 나는 알 수 없는데.

“만약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나뿐인 딸이 후계를 맡아주기를 기대, 하고 있지 않았을까…? 오, 너한테는 기대를 하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지. 네가 후계자가 될 거라고는 오히려 생각하지도 않았을 거야.”

하지만 안네는 진정으로 악마 같았다. 달콤한 목소리로 악의에 찬 말들을 아비게일의 귀에 쏟아부었다. 아비게일은 그게 아니라고 중얼거리면서도, 확신이 없는 목소리를 했다. 그녀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 나는 오히려 당황했다.

“네 아버지가, 네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 너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알다시피 네 어미와 아비는 조금도 사이가 좋지 않았지… 안 그러니?”

“그만해!!!”

아비게일이 거세게 안네를 밀쳐냈다. 그녀는 모욕당한 것처럼 보였고, 분노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공작 부부가 생전에 사이가 나빴나? 나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비게일은 안네를 거의 증오에 차 노려보았고, 나는 나 스스로의 혼란을 숨기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무례한 아이로구나, 당고모를 밀쳐내고 말이야.”

안네는 화사하게 웃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밤 사냥을 하자꾸나. 아주 재미있을 거야.”

아비게일은 그녀가 알고 있는 몇의 욕설을 내뱉더니 자리를 떴다. 안네는 저런, 하고 혀를 찼지만 전혀 곤란해보이는 얼굴이 아니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사냥터에 온 지 첫날, 나와 아비게일은 사냥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밤에 사냥이 그리 안전해 보이지 않았다.

“오, 걱정 마라, 라시아. …모두 그렇게 배우는 법이니까.”

그러더니 안네는 덧붙였다.

“내 남편이 생전에 나한테 그렇게 가르쳤거든.”

마치 즐거운 듯이. 비단 위로 솟아난 송곳처럼 껄끄럽게 느껴지는 말을 가만히 입 안에서 굴리던 안네가 내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만 너도 가보렴.”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안네에게 인사를 하고 아비게일의 방으로 가서 노크를 했지만, 아비게일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나와 아비게일에게는 몹시 불편했던 시간이 흘러, 어느 덧 오후 여덟시 이십분이었다. 기사가 나를 데리러 와서 나는 가벼운 승마복 차림으로 방을 나섰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려가 작은 저택 문 앞에 당도하자, 내 뒤를 따라 아비게일이 나타났다. 웬일로 평소에 입던 여성스러운 스타일이 아닌, 가벼우면서 실용성을 추구한 옷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네가 한 말을 모두 믿는 건 아니시죠?”

“…….”

그녀는 말이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었다.

“내가 너라면, 네 적의 말보다는 널 지금까지 키워준 사람의 말을 믿겠어.”

아비게일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안네가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밝은 표정을 하고 가벼운 걸음으로 아비게일에게 먼저 떠나라고 했다. 아마도 이 셋 중 가장 먼저 떠나선 안 될 사람일텐데. 나는 불안해져서 그녀를 보았지만, 아비게일은 이미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숲 속으로 사라지자 마자 안네가 말에 올라탔다.

“타렴.”

그녀의 명령에 따라 말에 올라 탔다.

“네 어미도 그랬지… 동물이랑 뭔가가 있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네는 그녀의 말을 움직였고, 나 또한 말의 배를 발로 살짝 조였다. 말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이었고, 바람은 차가웠다. 한참 그녀를 따라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왜, 나를 이리로 데리고 가는 걸까. 괜스레 구두가 신경이 쓰였다. 여차하면.

“사냥하기 좋은 날이구나.”

안네는 싱긋이 웃었다. 달빛이 어렴풋이 그녀를 비추었다. …차가운 달빛 속, 그녀의 은회색 눈동자가 저주받은 짐승처럼 빛이 났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마, 라시아."

그 시작은 아비게일과 같았다. 나는 침을 삼켰다.

“네 어머니한테는 지병이 있었지. 아마 그것 때문에 죽었을 거야.”

안네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마치 나를 위하는 것처럼.

“죽을 병이 아니란다, 초기에 잘 잡으면.”

줄무늬가 있는 드레스에 빳빳한 재질이었던, 우아한 챙 넓은 모자와 단정한 보라색 브로치를 단 그녀는 가벼운 가방을 들고 저택 문가에 서있었다. 나는 기억한다. 그 날 그녀는 내게 다녀올게, 라고 노래하듯이 말했을 것이다. 엄마의 향수 향이 기억이 난다. 은은한 꽃향기.

“죽을 정도의 지병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지… 라시아.”

안네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왜, 지금까지 잘 해준걸까.

“정말로 공작부인이 네 어머니를 가만히 뒀다고 생각하니?”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안네의 남색 머리가 우아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미소를 짓고 있었던가.

“몇몇 병에는 치명적이기 때문에 그 병의 환자에게는 피해야 할 약초가 있는 법이지. 네 어머니의 병은 결국 아비게일의 어머니가 만들어낸 거란다… 그녀는 이혼을 무기로 내 아버지와, 그 외의 원로들에게 부탁했어.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뤄졌단다.”

안네가 극적으로 손을 벌렸다. 보름 달 아래,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너한테 기회를 주마, 라시아.”

그녀는 다정하게 내게 칼을 건넸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받아들였다.

“아비게일이 어디있는지는 저 자가 알려줄 거란다… 다시는 없을 기회야. 지금이 아니면, 복수는 할 수 없어.”

아비게일은 제 엄마를 꼭 닮았지… 그렇지 않니? 그녀는 웃었다.

나는 칼을 쥐고, 고개를 돌려 어느 새 다가온 남자를 봤다. 그는 얼굴을 숨긴 채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비게일을 죽이렴.”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둘 다 죽일 거니까.”

나는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내 목이 내 목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안네가 좋은 선택이구나, 하고 즐거운 목소리로 나를 칭찬했다. 남자를 따라 말을 몰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아비게일의 말이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일이 쉬워지겠군요.”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비명 소리가 들렸다.

"꺄아아아악!!!"

나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화살을 들어 남자의 목을 겨냥했다. 활은, 몹시 쉽게도 그의 목을 관통했다.

“으아아아!!!”

남자가 말 아래로 떨어져내리는 것을 나는 무감하게 바라보며 말을 몰아 아비게일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를 죽이려 하고 있는 남자에게 다시 한 번, 활을 쐈다. 아까의 운이 따라주지는 않았다. 화살은 빗나가 남자는 나를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나는 활을 다시 한 번, 쐈다. 아비게일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그의 얼굴을 꿰뚫었다. 피가 아비게일의 전신에 쏟아졌다.

“아아악!!!”

“입 다물어, 아비게일.”

나는 말을 멈췄다. 내게는, 아직 칼이 있었다. 만약… 만약 내가 지금 이 여자를 죽인다면. 칼을 꺼내든 나를 아비게일은 겁에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너, 지금… 지금 뭐 하는 거야?”

“…….”

만약, 내가 널 죽인다면.

보름달이 밝았다. 쓰러진 남자 하나와 그 옆에 피 범벅으로 쓰러진 여자 하나. 그리고, 칼을 쥔 나.

‘옛날이 그대를 망치게 해서는 안 돼, 라시아.’

그리고 그 때… 이리하의 목소리가.

…그래. 미친 짓이야. 나는 아비게일의 묶인 손을 칼로 잘라 풀어주었다. 만약 그녀가 묶여 있지 않았다면, 분명 변명하기 힘들었겠지.

“입 다물고 일어나, 아비게일. 여기서 나가야 해.”

피 범벅의 아비게일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말에 태웠다. 나간다면, 어디로 가야할까. 안네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있긴 한가? 말에 타고 나서 갈 곳을 생각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나가봤자 갈 곳도 없어.”

아비게일의 말에 나는 소리를 질렀다.

“생각해!!!!”

내가 히스테릭하게 지른 소리에 아비게일이 나를 노려보았다. 둘 다 죽게 생겼는데, 지금…

“…라시아 아가씨세요?”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면서 물었다.

“…혜현?”

불빛 너머로 혜현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해사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공작 저로 모시겠습니다. 샤펜 공께서 찾으셨어요.”

그 불 빛 아래, 내 옆에 서있던 아비게일의 눈이 담고 있던 감정은, 분명한 증오와 저주였다.

============================ 작품 후기 ============================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초 무거운....

이번 화 무섭다눙.. 우리 라시아 살벌한...;; (눈치)다음 화가 안네챕터 끝이구요. 그 다음에는 샤펜x클레이만 외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월요일~ 화요일날 뵈어요.

그런데 저는... 알바중에.. 댓글을 보고 싶은..(시무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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