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멍하니 눈을 뜨자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빛이 보였다. 눈을 깜빡거리면서 몸을 뒤척이다가 문득 지나치게 침대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하얀 돌이 내 침대 곁을 뱅글뱅글 돌면서 빛을 뿌리고 있는 게 보였다. …신석이네. 기력 회복에 도움을 주는 신성력을 담은 돌이었다.
“기절했더군.”
유리잔을 탁자에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에 몸을 일으키다가 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떠올랐다. 아. 이리하를 불렀지, 참….
“몸은 어때?”
그가 천천히 걸어서 내게 물 컵을 건넸다. 호박색 액체를 쥐고 있기에 그건 뭐냐고 물었더니 내게 건넸다. 컵을 받자마자 올라오는 향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술이잖아요.”
“왜 그래, 술 안 마셔본 사람처럼. 진을 주고 싶은데, 사실은.”
기력을 회복하는 데에 주로 마시고는 하는 술 이름을 대었지만 나는 물이면 된다고 말하고 끙, 하고 소리를 냈다.
“분명히 배가 아팠나, 아니… 흉부가 아팠던가. 그래서 왔는데.”
“나한테 온 이유가, 아파서라니.”
그가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내가 누운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침대가 워낙 넓어서 멀게 느껴졌지만.
“생각이 나던걸요.”
여전히 욱신거리는 배에 인상을 쓰면서 매만지기 위해 손으로 대충 건드려봤지만,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겠고 영 불편하기만 했다.
“아픈가?”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미약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잠깐?”
그가 손을 뻗으면서 물었다.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가 침대 위로 아예 올라왔다. 어, 이건 좀 위험한 것 아닌가?
“어, 바닥에서… 아니면 의자라도.”
내가 어색해하는 것이 신경 쓰이지 않는지, 이리하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과 태도로 내 오른쪽 갈비뼈 아래를 만졌다. 숨을 들이키자마자 너무 아파서 저절로 소리가 나왔다.
“아-! 아야!!”
그가 약간 놀란 얼굴을 하더니 인상을 찌푸리면서 손에 힘을 더 주고 고통을 주는 근원을 찾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나는 아파서 그를 밀어내려고 그를 쳤지만, 그는 끄떡도 안 하고 내 갈비뼈 밑을 세게 눌렀다.
“여긴가?”
“아, 진짜 아파요!!”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가 자신의 다리 사이에 나를 가두고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내게 조용히 물었다.
“울어?”
“아프니까… 울죠! 정말, 비키세요.”
괜히 서럽기도 하고, 누른 부위가 어쩐지 울 때 움직이는 그, 횡경막과 관련된 것 같아 히끅거리는 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리하는 작게 미소를 짓더니 내 손목을 모아 한 손으로 쥐고 내리 눌렀다.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심홍색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한 번, 웃었다.
“지금, 이게 무슨….”
내가 이 사람한테 너무 방심한 걸까. 지금 이 상황은, 아무리 봐도-. 나를 내리누르는 이리하에게 놀라고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 몸이 저절로 떨렸다.
“울어, 라시아.”
“…네?”
내가 뭘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하며 그를 올려다봤더니 이리하는 내 손목을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내가 아파하는 부분을 꽉, 하고 내리 눌렀다.
“아-!”
그의 긴 머리카락이 내 시야를 가리고, 심홍색으로 빛나는 눈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리하의 입술에서 새어나온 숨이 닿는 순간 그가 속삭였다.
“울라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요구야, 하며 반항하기 위해 입술을 벌리는 순간 그의 숨이 내 입 속으로 쑥, 하고 들어왔다. 메마른 입술이 내 입술을 찍어눌렀고, 다음은 그 자신의 나라와 같은 건조한 숨결이었다.
너무 황당하고 억울해서 그 때부터는 정말, 울음이 저절로 나왔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지금, 이렇게. 아비게일도, 샤펜 공작도, 안네도… 심지어는, 당신까지 나한테 왜 이러냐고, 엉엉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하자 이리하가 내 손을 놓더니 내 위에서 내려가 내 옆에 누웠다.
“왜, 왜 나한테… 나한테, 왜 이래요… 흑, 히끅….”
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웅크리며 울자 그가 등을 돌린 내 몸을 돌려 제 가슴으로 내 얼굴을 끌어당겼다. 버석한 그의 옷감에 고개를 파묻고 엉엉 우는데, 그가 눌렀던 갈비뼈 아래가 짓누르듯이 아팠다.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울고 나서야 그가 내 엉망진창으로 헝크러진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뭐 하세요.”
“장난.”
그렇게 울고나자 정말, 정말, 정말로 부끄럽고 창피했다. 도대체 얼마나 운 거야. 이제 고개도 못 들겠다. 왜 키스한 거며, 왜 울라고 했는지 물어보는 게 먼저여야 할텐데, 그가 내게 아무 짓도 안 할 거라는 걸 막연히 깨닫자 그저 부끄럽고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 울었나?”
“…몰라요.”
그가 울기 전까지만 해도 아팠던 부분을 다시 눌렀다. 이번에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제서야 내가 아픈 부분이 심하게 울면 아파지는, 그 부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안 아프지?”
이리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키자 그가 내 얼굴을 보더니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자리에서 일어나 제대로 앉자 그가 그런 나를 누운 채로 바라보더니 말했다.
“의사 말로는 그대가 기절한 데에 원인이 없다고 하더군.”
얌전히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그가 천천히 일어나 내 옆에 앉고는 말했다.
“샤펜 공이 행방불명이라지.”
침대 옆에 있던 술잔을 그가 내 몸 위로 손을 뻗어 들고 오며 말했다. 나는 그가 들고 있던 술잔을 빼앗아 단숨에 마시고 나서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거 도수 왜 이렇게 높아요?”
“…나 마시라고 들고 온 거라서?”
그가 건네주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이리하는 자신의 잔을 아쉬운 듯이 바라보더니 말했다.
“자네 나한테 술 빚졌어.”
“…한 잔가지고 치사하게.”
“한 잔이라도 줘보고 말씀하시죠, 아가씨.”
그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술 한 잔으로 성추행을 잊어드리면 고마워하셔야지요.”
이리하가 낄낄거리고 웃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잔을 빙글빙들 돌리면서 대답했다.
“그것도 그렇군.·”
“다음에 이리하께서 아픈 일이 생기셨을 때 아픈 부분을 눌러드릴게요. 기대하세요.”
이리하가 그 말에 침대에 자신의 손을 얹고 그의 몸무게를 실었다. 내가 고개를 살짝 돌려 이리하를 바라보자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보더니 말했다. 술기운이 순식간에 올랐다.
“그대는 나한테 키스 하나를 빚지겠군, 그 때.”
닿을 듯 가까운 얼굴에 나는 손을 뻗었다. 정말로 취한 걸까. 그가 황제라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뺨에 손을 천천히 올리자 그의 심홍색 눈이 천천히 감겼다. 내 안 어디에 이런 잔혹성이 있었을까. 이 사람을 단숨에라도, 부숴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부숴서… 그의 턱을 당겨 내 가까이에 당겨 잡았을 때 그가 눈을 뜨고는 말했다.
“키스해 줄 건가?”
짙은 갈색의 속눈썹 사이의 붉은 빛. 나는 입술을 올리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뇨.”
천천히 그의 볼에서 손을 떼어내자 그가 미소를 지었다.
“아쉽군.”
이리하가 손을 뻗어 가까이 다가온 내 얼굴을 잡아당겼다. 나는 그저 그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당신 방금, 아주 다른 사람 같았어.”
나를 아래에 두고, 그가 신기한 것을 바라보는 얼굴을 했다. 어깨를 으쓱, 움직이고 말했다.
“여자는 여러 모습이 있는 법이에요.”
“…알고 싶어지는데.”
잠긴 듯 나른한 목소리는 색을 담고 있었다. 더 이상 지속해봤자 좋을 게 없어 분위기 쇄신을 위해 고개를 돌려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는 두 손을 살짝 들고, 내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샤펜 공께서 지금까지 저한테 공작위를 물려주기 위해 노력하셨다네요.”
내 말에 이리하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나한테 좋은 소식은 아니군. 그래서, 그게 나쁜 건가? 그대는 공작이 되고 싶어 했으니.”
“아니오. 저는 공작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저, 그게 계약 조건이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손목에 묶여있는 끈을 풀어서 머리를 올려 묶으면서 거울을 봤다. 심하게 울었는데, 눈 주변과 코가 붉어졌을 뿐 그리 추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계약이라.”
“네. 그냥 계약이요. 그 사람이 날 샤펜저택으로 데리고 왔을 때, 그는 후계자가 되라고 했어요. 이유는 아비게일이 결혼을 다른 공작가 후계자와 하고 싶으니, 그 대타로 내가 필요하다는 거라고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 모든 일들이 내게 주어지는 호의가 아닌, 단순히 그도 나를 도구로, 나도 그를 도구로 볼 수 있는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고요.”
묶인 끈이 그나마 탄력이 있어서 제대로 묶였다. 올림머리를 해 목을 드러내자 더웠던 목이 시원해졌다. 침대에 걸터 앉은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의 앞에 서서 말을 이었다.
“가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내 처지가 비참하긴 했어도, 기본적으로 난 괜찮았어요. 그런데, 샤펜공이 만약 나를 딸로 생각한다면.”
이리하가 나를 반듯하게 바라보았다. 그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 지 궁금했다. 가만히 그의 눈 안에 비친 나를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안 되나?”
나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눈앞이 순간 어지러웠다. 정말 취했나보다.
“안 돼요.”
“왜 안 되지?”
왜냐하면. 입 속에서 까끌까끌, 맴돌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를 머뭇거렸다. 내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 내가 그를 간절히 찾지 않는 이유. 어째도 좋다고 생각하고 안네에게 복종하는 이유.
왜냐하면, 나는.
“난 그를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 엄마를 다시 살려오지 않는 한.
아니, 심지어 그렇다해도.
“그러니 그는 나한테 용서를 빌어서도 안 되고, 나를 기다려왔어도 안 되고, 그 어느 부분으로도 내게 계약자 이상의 감정을 가지게도 해서는 안 돼요.”
“하지만 그가 이미 그대를 위해 뭔가를 했잖아.”
“그렇다해도 내가 용서할 필요는 없어요.”
그 말을 할 때 내 목소리가 흔들렸던 것 같다. 만약 정말로 내가 용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면, 나는 이렇게 스트레스 받지 않았을 거였다. 그래, 나는 샤펜공이 지금까지 나를 위해 준비해왔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용서해야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 지도 몰랐다. 이유도 모르고, 납득도 되지 않으면서.
…그게 고작 도덕 때문이라는 것이 분하고 억울했다. 그는 엄마와 나를 버려두고 있었어. 변하지 않는 사실이야, 그건. 그런데 기껏 도덕이랍시고, 그가 내게 뭔가를 해줬다는 이유로 흔들리는 내 자신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내 말에 이리하는 아무 말 없이 한참 나를 바라보고만 있다가 손짓을 하며 말했다.
“이리 와봐.”
그리 내키지 않았지만 걸어갔다. 이리하는 자신의 옆을 툭툭 두드렸고, 나는 얌전히 그 옆에 앉았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며 고민하는 얼굴을 하던 그가 말했다.
“당신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말할 순 없을 거야. 아마 그 누구도. 나도 마찬가지고. 사실 나도 아버지나 어머니나, 뭐… 난 내 부모의 어느 쪽도 이해하지 못 했고, 내 아버지는 특히 용서하지 못했지. 그가 어머니를 강간해서 낳은 게 나니까, 이해할 수 있을 리도 없고.”
가만 가만, 그의 목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무거운 이야기와는 달리 그는 몹시 가볍고 편안한 자세였다. 장난을 치듯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에 오히려 내가 심각해졌다.
“그리고 난 상당히… 거기에 집착하고도 있었어. 당신을 가지고 싶었던 것도 그래서였잖아, 처음엔. 다니엘을 위해서 내 어머니는 놀라운 일들을 했지. 그녀의 사랑은 놀라울 정도였어. 나도 정말로 받고 싶었어, 그런… 희생이라고 할까. 그래서 다니엘을 위해 당신이 한 모든 일을 보고 당신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고.”
이리하는 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면서 말했다.
“그리고 현명한 여자가, 과거를 바꿀 수 없다고 말해주더군.”
고칠 수 없었다. 지나친 세월을 돌릴 수 없을 거라고, 그 점에 대해서 그에게 알려준 것은 나였다. 가만히 그가 내 얼굴을 돌려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는 슬퍼보이기도 했고, 자랑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대도 마찬가지야, 라시아.”
이 사람을 보고 나는 사자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길고 진한 갈색의 머리카락, 날카로운 눈매 속 태양처럼 번뜩이는 심홍색 아름다운 눈. 곧은 코와 다물어진, 단호한 입술…. 강인한 얼굴이 반듯하게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대가 뭘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과거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거야. 그러니 그대도… 옛날이 그대를 망치게 놔두어서는 안 돼.”
“그게 절 망치지는 않아요.”
내 말에 이리하는 냉정하게 대꾸했다.
“기절할 정도로 스트레스 받았잖나. 그게 그대에게 영향력이 없어 보이지 않아.”
틀린 말이 아니라서 입을 그저 꾹 닫았다. 그는 다정하게 내 손을 잡아주면서 말했다.
“바꿀 수 없는 건 놔둬, 라시아. 내가 그랬듯이, 아버지는 아버지야. 그대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어. 그러니 그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주었건, 그대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건, 아무것도 상관할 필요 없는 거야. 알았나?”
흔들리지 마. 그가 작게 덧붙였다.
“미워하고 싶으면 미워해. 싫어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아.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괜찮아. …당신 심장이 시키는 대로 해.”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손에서 내 손을 뺐다. 당신이 만약에 황제가 아니었다면. 내가 만약에, 공작의 후계자가 아니었다면. 조심스럽게 팔을 벌려 그를 꽉, 내가 할 수 있는 한 힘껏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과거가 내 발목을 잡게 하지는 않으리라. 용서하지는 못하더라도, 내 선택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을 연관 짓게 하지는 않겠다. 단단한 이리하의 등을 끌어안고 있자니 이리하가 내 정수리에 머리를 올리더니 말했다.
“…별 말씀을.”
조심스러운 손길이 내 등을 쓰다듬었다. 가만히, 한참을 끌어안고 있다가 몸을 풀자 그가 장난스러운듯, 진지하게 내게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공작이 되고 싶어?”
환하게 웃으면서 그에게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또 샤하레라도 되라고 하시려고요?”
“왜, 안 되나?”
나 또한 뼈를 숨기고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어렸을 때는 코르티잔의 딸이었고, 커서는 아버지에게 묶여 있고… 제 인생에서 어떤 것도 선택한 적이 없으니까, 만약 공작의 후계자에서 벗어난다면, 이번엔 제 맘대로 선택 해보고 싶어요. 그러니, 당분간 제 꿈은 방랑가랍니다.”
내 대답에 그가 씁쓸한 얼굴을 해보이다가 웃었다.
“안타까운 일이군. 그대는 좋은 샤하레가 될 수 있을텐데.”
“글쎄요. 멍청한 아내로서의 인생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샤하레는 오르안의 선택이었다. 천민도, 평민도, 귀족도, 심지어는 타국의 왕족도 될 수 있지만 오르안의 아내 이상은 되지 못했다. 황후가 가지는 내정에 대한 권력도 없었고, 후계자를 낳지 않는 한 이후에 궁궐에 남아있지도 못했다. 황제도, 샤하레도… 둘 모두의 사랑만으로 만들어진 자리였다.
로맨틱했지만, 내가 원하는 인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대가 내 운명처럼 보일 때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해.”
나는 그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운명이라니, 그와 내가? 환하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기분이 이상하게 짜릿했다. 키스할 것처럼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까이 붙이고, 나는 속삭였다.
“운명이었다면 나는 코르티잔의 딸이 아니었을 거고, 당신은 황제가 아니었을 거예요, 사랑스러운 분.”
나는 구두굽을 세 번 부딪혔다. 그가 허탈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희대의 요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샤펜 저택의 내 방.”
눈 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의 얼굴에 닿았던 손바닥에 열기가 그대로 남았다.
============================ 작품 후기 ============================
라시아는 취하면.. 어... 좀 쎄집니다. 유혹도 잘 하고, 터치도 과감해집니다. 왜냐고요?!! 우리 라시아는 !! 상 알파니까!!! 알파!! 알파다!!!
얘네 둘이 붙어두면 분위기가 좀.. 항상 묘한듯. 야하거나 케미 쩔거나... 머..그런...
1.라시아가 샤펜공작에게 가면 안 되냐?
A.기타 특기가 없는 라시아는 만약 샤펜이 납치당했으면 무슨 꼴을 당할 지 모릅니다. 굳이 좋아하지도 않는 샤펜에게 그정도의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어요.
2.정부가 굳이 왜 대리를 세웠나?
A. 전전편에 나왔습니다만... 베노암은 법률이 우선입니다. 아비게일은 이미 약혼이 되어있으니 자연 탈락이고, 라시아 같은 경우는, 우선 방계라는 게 걸림돌이 됩니다.
후계자 교육이 하나도 안 된 상태라고 보는 거죠. 어렸을 때부터 직계에서 후계자 교육을 해왔거나 페드윈 졸업을 해야 공작위는 이을 수 있습니다. 둘 중의 하나 조건이 채워지고 나서도 성인이 되어야 공작위를 받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베노암은 상당히 분권이 잘 된 나라고, 현대의 기업? 과 같은 체제를 갖추고 있으므로 공작위는 상당한 책임과 막중한 업무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면 내릴 수 없어요.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셨거나 하면 대리가 맡습니다.
라시아가 공작위를 맡으려면 즉, 페드윈 졸업 + 성인이 되어야 하는 거죠. 성인 이 조건은 능력만 갖췄다고 하면 황제가 특별법을 통과시켜서 패스할 수 있긴한데, 라시아는 방계라서 그것도 힘들어요. 자격을 증명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건 내용 상으로 설명하기가 좀 힘들어서 후기에다 적었네요!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