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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70화 (70/113)

70화

내 불길한 예감은 완전히 맞아떨어져서 안네가 온 지 일주일만에 저택 분위기는 완전한 대립 구도로 변해버렸다. 아비게일파, 안네 파, 그리고 중립. 안네는- 정말 노골적으로 아비게일을 무시했다.

아비게일은 일단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녀 또한 안네를 만만치 않게 무시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최대한 이에 휩쓸리거나 감정적으로 나오는 가솔들이 생기게 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솔직히 잘 되지 않았다.

그나마 샤펜 공작이 돌아올 경우의 수가 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작에 안네 쪽으로 죄다 사람들이 움직였을 것이다.

"아가씨, 저녁 드실 시각입니다."

애니의 말에 한숨을 쉬면서 공부하던 것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저택에서 언제는 안 그랬냐만은, 유달리 요즈음의 식사시간은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그나마 내 위장이 튼튼하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열댓번은 더 체했을 것이다. 식당으로 가 자리에 앉자 아비게일과 마주보게 됐다.

공작을 찾는 것은 아무런 소식도 없고, 협박 편지도 없고… 아마 그녀의 속도 말이 아닐 것이다.

“먼저 와 있었구나, 둘 다.”

여전히 완벽하고 나른한 태도로 식당에 들어온 안네는 나와 아비게일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손을 흔들어 우리의 인사를 막은 후, 자리에 앉았다. 나와 아비게일 또한 자리에 앉고 나자, 주방장과 몇 명의 하녀가 나와서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피곤해보이시는군요."

웬일로 아비게일이 먼저 입을 뗐다. 무슨 일이지 싶어서 둘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안네는 별로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비게일에게 별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요리에 집중했다.

"잠자리가 바뀌니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하는 일 아니겠니."

“본디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앉으면 불편한 법이니까요.”

너무 놀라서 들고 있던 샐러드 포크를 떨어트릴 뻔했다. 아니, 왜 굳이 긁어 좋을 것도 없는 사람의 속을 긁는단 말인가. 당장 자리에 일어나서 가정교사처럼 아비게일을 혼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녀는 내 손윗사람이었다. 동생이었다면 내가 아주….

“…그렇구나.”

의외로 안네가 웃으며 그 대답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녀의 인내가 그 비꼼에 가만히 넘어갈만큼 바다같지는 않다는 것을, 며칠간의 접점으로 알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초조하게 샐러드를 포크로 찍었다.

"집사."

안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집사가 식탁 가까이로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마님."

"방을 옮길까 해. 아비게일이 아주 친절하게도, 나와 공작부인의 방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해주지 뭐야. 그러니, 공작의 방을 비우게."

"당신이 감히, 감히 어떻게!!"

아비게일이 안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리를 질렀다. 안네는 짐작하고 있었다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샐러드 포크를 떨어트리고는 말했다.

“깜짝 놀랐잖니. 그런 버릇을 어디서 배웠는지 몰라. 집사, 이 댁 첫째 딸은 예의를 좀 알아야 할 것 같군.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아비게일에게는 저녁식사는 주지 말게.”

“예?! 예.”

집사가 자신도 배를 곯을까봐 걱정이 됐는지 마지막에 재빨리 목소리를 낮췄다. 나는 안네의 첫 번째 명령에는 사실 놀라지 않았지만, 두 번째에는 확실히 놀랐다. 아니, 밥을 굶기다니. 이게 무슨 황당한 명령이란 말인가.

신데렐라가 따로 없네. 황당하면서 당혹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아비게일을 바라보자 그녀 또한 놀랐는지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게. 아비게일에게 앞으로 저녁식사는 없어. 어떤 간식도 허용하지 않을 거고.”

세상에 이렇게나 치사할 데가. 먹을 것 가지고 이렇게 할 줄은 정말로 몰랐다. 일견 유치해보이면서도 몹시 잔인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둘을 더듬더듬 바라보다가 곧 표정을 가다듬었고, 안네는 그런 내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비웃듯이 아비게일에게 말했다.

“네가 진정 하잘 것 없이 여기는 자가 네 인생을 틀어쥐고 있다는 사실을 넌 좀 알아야겠구나, 아비게일.”

위염 생길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있는 내내 이 모양이었다. 아비게일이 안네를 건드리거나, 안네가 아비게일을 건드린다. 그러면 그 상대방은 기다렸다는 것만큼 독설을 쏘아붙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안네가 아비게일에게 벌을 지우고 끝내는 것이다.

나는 이 공방이 몹시 지겹고, 고통스럽고, 이에 이력이 났다. 중간에 끼인 나만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특히 이럴 때 말이다.

"명을 받잡을텐가?"

집사는 잠시 안네와 아비게일을 보았다. 그러더니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래, 고용인들은 곤란할 때 이렇게 나를 찾았다.

그들 사이에서 내게 의지하면 빛이 보이리라는 이상한 분위기가 생성된 건지, 이 집에서 나는 이상한 중재자로 자리하게 됐다. 앞으로야 이런 분위기가 내 입지에 도움을 주기는 할테지만, 당장으로서는 몹시 곤란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집사를 눈치 챈 안네가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래, 라시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이게 지나치다고 생각하니?"

나는 최대한 아비게일을 외면하고 집사에게 말했다.

"그대가 조금이나마 오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나을 것 같군요."

그러자 집사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명을 받잡겠습니다, 마님."

아비게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조용히 말했다.

"저도 일어나겠습니다."

"어머, 더 먹지 않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허락하신다면 일어나고 싶군요."

안네는 환하게 웃더니 천천히 자신의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앉으렴, 허락하지 않겠다. 저녁은 꼭 먹어야지. 식사를 건너뛰어서는 안 돼. 건강에 해로우니까…그다지 유쾌한 식사는 아니겠지만."

그 말은 마치, 아비게일의 건강이 해로와지길 바란다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등줄기가 약간 선뜻해져서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웬만하면 나는 그녀의 뜻에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비게일이 나한테 점점 더 많은 불만과 반감을 가지고 있음이 보였으나, 그렇다고 당장 아랫사람들에게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수도 없었다.

나 자체도 그들의 무의미한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고.

“라시아, 사냥은 해 본적 있니?”

"사냥…이요? 아니오, 한 번도. 동물을 살상하는 건 어려워서요."

취미 생활로의 사냥은 매우 비싼 취미인데다 무엇보다 유난히 동물과 친했던 엄마와 나는 사냥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에 관심조차 가진 적이 없었다.

“하기사 동물 사냥은 본디 졸렬한 것이니.”

특히 봄에 하는 것이 그랬다. 봄에는 대개 잡히는 것은 새끼들인데다 한창 평민들이 곤궁한 시기에 재미로 사냥을 하는 건 고상하지 못한 행동이다.

본디 초봄은 몬스터들도 생식을 시작하는 시기라서 아직 어린 몬스터들을 사냥하기 위해 기사들이 사냥을 나서고는 한다. 그리고 이 용맹한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일부 귀족들이 동물들로 타겟을 돌렸고 이게 아가씨들에게 용맹함을 증명하는 하나의 행사가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안 그래도 먹이 사슬에 애매하게 끼인 입장인 동물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평민들에게서 불만의 목소리와 귀족 자체도 고기 먹기 힘들어졌다.

이로 인해서 국제법으로 취미용 동물 살생이 금지됐고, 현재는 그냥 음식용으로 평민들이 사냥하는 정도에 그친다.

“하지만, 라시아. 졸렬한 일이 필요할 때가 있단다. 더러운 일, 피곤한 일… 신께서 세계를 창조했을 때, 그런 것을 왜 굳이 놔두었겠니?”

안네가 화사하게 웃으며 와인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나는 그녀의 의도를 가늠해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은 더럽고 피곤하며 졸렬한 일을 이용해보겠다는 건가.

“곧 사냥을 나가자꾸나. 재미있을 거란다.”

나는 말을 하지 않고 음식만을 깨작거렸다. 그녀의 재미있다, 는 말은 도대체 공감할 수 없을 때가 많았으니까. 애초에 내게 상냥하게 대하는 이유 또한 짐작할 수 없을 뿐더러, 이상하게 내게 상냥하게 대하는 그녀에게서 진정한 호의를 느낄 수 없었다.

그래, 마치… 그저 내가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막연한 불안감에, 나는 숨을 죽였다.

거의 음식을 먹지 않고 식당을 빠져나오자마자 제프리가 내게 소화제를 건네주었다. 나는 얌전히 그것을 받아들고 물을 꿀꺽 삼킨 이후에 그를 내 침실로 불렀다. 제프리는 곤란한 얼굴을 했지만, 어쩐지 각오한 것 같기도 했다.

“아는 건 다 말해요.”

내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명령하자마자 제프리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더니 입을 열었다.

“저도 다는 모릅니다.”

“아는 것만 다 말하라고 했지, 모르는 걸 말하라고 하지는 않았어요.”

그 말에 제프리가 몹시 난처한 얼굴을 하다가 억지로 학교에 끌려온 애 같은 태도로 말을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당시 샤펜가의 후계자 후보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분은 현 샤펜공작이시고, 다른 분은 안네님이시지요. 그 당시 샤펜공께서는 항상 어딘가 위태위태해 보인다고 치면, 안네님은 그런 게 없었지요. 아주 확고하고, 본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샤펜공의 위태로움을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는 나로서는 도대체 그의 유년시절을 상상할 수 없었지만, 딱히 궁금하지 않아서 캐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위태로운 샤펜 공작이라니, 날고 있는 거북이, 그런 말 만큼이나 이상했다.

“전 샤펜공작께서는 그리고, 안네님을 더욱 아끼고 그 분을 후계로 삼으시려 했습니다. 안네님을 몹시 예뻐하셨지요. 샤펜공께서는 당시 또… 클레이만 양과 연애를 하시던 중이라, 전대께서 몹시 언짢아하시기도 했고요. 결국 헤어지셨습니다만.”

엄마의 이야기가 나오자 좀 불편했지만 의외로 이해가 가기도 했다. 나는 둘이 어떻게 연인 사이가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의 샤펜공작을 봐서는 더욱 그랬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남자라면,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엄마가 사랑한 그 때의 샤펜 공작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미약한 궁금증을 애써 외면하면서 나는 제프리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 이후로 샤펜 공작께서는 후계자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인물로 변하셨고, 그렇게 후계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 제 할아버지셨던 집사님께서는 은퇴하셨고요. 그리고 샤펜공께서는 안네님을 얀국의 국주의 처로 보내셨지요."

여기까지 들어서는 그다지 껄끄러운 일이 없었다. 물론 후계자로 경쟁했던 샤펜이 그녀의 혼처를 알아봐주었던 것은 좀 위험하다 싶긴 했지만, 딱히 그녀가 샤펜에게 해를 준 것도 없는데다 국주의 처라면 나쁜 자도 아니었으니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1년 쯤 지났을 때, 편지가 왔습니다. 안네님이 곤경에 처했다고 도움을 청했던 것 같더군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 공작님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게 아비게일과는 무슨 상관이….”

“막연히는… 아마도, 가장 소중한 것을 부수고 싶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아비게일양에 대한 샤펜공의 애정은 남다르다고 소문이 났으니까요.”

그래, 초록 피의 공작이라고 불릴 정도로 차가운 그가 아비게일에게만은 더없이 상냥하게 굴었다. 도대체 안네는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서도 돌아와 앙갚음을 하는 걸까.

“그 곤란이, 뭔지는… 아나요?”

“저로서는 모릅니다, 아가씨.”

일단은 알 수 있는 힌트는 모두 얻었다. 나는 가만히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다가 고개를 들어,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제프리, 당신은 왜 이걸 알고 있어요?”

제프리는 내게 집사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그는 아비게일의 입시 때 가문에 들어왔으므로, 이 일들을 알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알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져 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시간에 따라 자연히 켜지는 마법등에 그의 얼굴 위로 빛이 울렁거리더니 그가 입을 움직였다.

“…당신과 함께 했던, 당신이 마지막을 지켜주었던 집사 할아버지는….”

내 손이 저절로 떨렸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알 수 없는 기분, 정의 내릴 수 없는 기묘함에 나는 몸을 뒤로 젖히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샤펜 공작께서 당신에게 보낸, 나의 할아버지입니다.”

숨을 잠시 멈출만큼, 나는 놀랐다. 그가 나에게, 아니 내 어머니에게 집사를 보낸 이유가 뭐란 말인가.

“어째서….”

“그리고 저는 당신을 위해 준비해온 집사이고요. …당신께서 모르는 많은 일들이, 당신을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가씨.”

혼란스러웠다.

“샤펜가는 당신을 후계자로 맡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와 나는 말을 잃고 제프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샤펜 공께서는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멈췄다.

“나가요.”

“아가씨.”

“나가라고 했어요.”

더 이상,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찌르듯이 아픈 배에 인상을 찌푸리면서 난감한 얼굴의 제프리에게 소리를 질렀다.

“나가라고!!”

손이, 손이 떨렸다. 배가 아프고, 머리가 쑤셨다…

안네는 아비게일을 싫어한다. 아비게일은 안네를 싫어한다. 나는 록진과 헤어졌다. 샤펜 공작은 사라졌다… 그리고, 제프리는 할아버지의 손자이고, 그리고, 그리고… 샤펜 공작은, 그는… 내, 아버지는.

배가 찢어지는 듯이 아팠다. 흉부 아래께에서 숨을 막는 느낌에 저절로 고통스러운 소리가 났다. 왼쪽손으로 가슴을 꽉 누르고 숨을 몰아쉬었다. 어지럽고, 머리가 아프고, 세상이 빙글 빙글 도는 것 같았다.

무너지듯이 쓰러졌다가 겨우 기어서 구두를 찾았다.

구두굽을 세 번 부딪혔다.

어디로.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그 순간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나는 정신을 잃을 것처럼 뱃속을 태우는 고통에 씹어뱉듯이 이름을 뱉었다.

“이리하….”

눈부신 빛이 내 시야를 덮쳤다.

============================ 작품 후기 ============================

기다리시던 분이 나왔습니다. 연참이니 전편을 확인해주세요!

여러분 킹스맨 ;; 최고예요;;

콜린 퍼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분이시기는 한데 오 갓,세상에..

하,. 최고예요.. 꼭 보세요 ㅠㅠ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생ㅅ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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