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시아-69화 (69/113)

69화

<안네>

이제 혼자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누군가 없이, 나 홀로 샤펜가를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그렇게 울었던 걸까.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혼자고, 결국 내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나 홀로 책임져야 하는 거니까.

그래, 나는 결국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도 되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맞는 일을 했으니까. 후회하지도, 결정을 번복하지도, 그리고 그리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끝이 왔으니 끝을 냈을 뿐이다.

헤어지고 나서도 딱히 변하는 게 없었다. 그 때 이후로 만날 일이 별로 없었으니까, 혼자 지내는 게 익숙해졌기 때문이겠지. 샤펜공작이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사라졌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가 납치를 당한 것이 분명하다는 의견으로 기울어지는 것 같았다.

하긴 내가 봐도 이 자리를 버리고 사라질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납치를 당한 이상 굳이 내가 나서서 그를 찾았다가 괜한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 애정이 있는 사이도 아니고.

어쨌거나 공작의 대리인을 찾기로 한 황실은, 적임자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황녀파로 간신히 돌아온 가문과 문제가 생기기를 원하는 황가 사람은 없을테니까 말이다.

사실 나로서는 누가 오든지 말든지 별 관심이 없었는데, 집안을 수습하는 동시에 샤펜가의 기밀 서류를 모두 빼돌리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호랑이가 없으니 기도 죽여볼까 하는 마음에선지 뭔지, 샤펜가에 대한 감사가 시작되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집안이 없는데다 황가의 비밀도 여럿 가지고 있으니 빼돌려두어 나쁠 것 없었다. 믿을 놈 하나 없는 게 정치판이라고.

“아가씨, 대리인 관련 자료입니다.”

한창 이것저것 마법으로 폐기하는 와중에 제프리가 하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어떤 분이시래요, 안네 프리앙 샤펜은?"

“일단 촌수로는 5촌, 즉 아가씨의 할아버님의 남동생의 따님 되시지요. 소국 얀의 실질적 왕인 국주(國主)의 부인으로 샤펜가를 떠나셨습니다. 불행히도 국주가 일찍 죽는 바람에 미망인이 되셨지만, 덕에 국주로서도 5개월간 소국을 통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전대 국주의 동생에게 직위를 반납하고, 지금 고향으로 돌아오는 와중이라 딱 타이밍이 맞았지요.”

듣기로는 우선 적당한 사람인 것 같아서 고개를 대강 끄덕이고는 손을 내밀자 제프리가 내게 몇 가지 편지를 가장한 서류를 건네주었다. 편지에는 안네 프리앙 샤펜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와, 그녀가 와서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대강의 신변조사 같은 것도 말이다.

읽어봐도 특별히 걸리는 점이라고는 남편이 독살로 의심된다는 점이었지만, 그거야 뭐… 한 나라의 왕이 독살 안 당하면 뭘로 죽겠는가 말이다.

“고마워요. 오래 계실 분은 아니더라도, 알아둬서 나쁠 건 없겠지.”

“알아서 잘 해내실 분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아가씨.”

“…왜요?”

“안네님과 아비게일 아가씨는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닙니다. 또한, 안네님은… 조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 말에 좀 놀랐다. 제프리는 누구에게도 쉽게 조심하라는 말은 하지 않는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아비게일의 입시 때부터 샤펜가에 근무하던 사람이라 안네에 대해 자세히 알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말이 더 의외였다.

“…어째서, 그런 말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우리의 대화가 끊겼다. 제프리가 나서서 문을 열었고, 나는 미심쩍은 마음을 애써 외면하면서 가만히 들어오는 시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셔서… 안네님께서 곧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뭐? 내일 도착이라고 하셨잖아.”

나는 재빨리 마법도구에 안네에 관한 서류를 집어넣어 파기해버렸다. 그녀가 앞으로 쓸 집무실에 그녀에 대한 조사 자료를 넘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니까. 당장 내일 올 거라는 생각도 급하게 느껴졌는데, 지금 도착할 예정이라니. 일단 집무실을 대충이나마 정리하게 하고 샤펜가의 모든 식솔들을 입구에 정렬시켰다.

모두들 긴장된 기색이 역력했다. 그나마 어제 집을 대충이나마 정리했으니 망정이지.

가장 큰 문이 열리는 장치에 불이 들어오고, 점차적으로 문이 열리는 불빛들이 반짝거렸다. 샤펜가의 마지막 저택문이 열리고, 가마의 문이 열렸을 때, 나는 숨을 몰아 삼켰다.

“안네님.”

샤펜 저택의 집사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샤펜이라는 혈통서에 대한 증명 같았다.

밤하늘을 닮은 남색 머리카락, 고양이 같이 우아하게 내려 깐 은회색 눈동자… 샤펜공과 닮은 듯 닮지 않은 그녀는 몹시 나른하고 요염하게 움직였다. 느긋하게 자신의 한 쪽 귀걸이를 매만지더니, 픽- 하고 미소를 짓고 천천히 걸어서 저택을 둘러보았다.

식솔들이 모두 허리를 숙이고 반기는 등장에 기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샤펜가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펜테에라… 그리운 이름이었지."

그녀가 나른하게 자신의 귀걸이를 다시 한 번 만졌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의 습관이지도 몰랐다. 펜테에라는 샤펜 저택의 별명이었다. 아비게일이 약간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인사를 했다. 둘 사이가 껄끄럽다더니, 정말이었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모님."

"그래, 아비게일. 아주 오랜만이구나. 그럭저럭 미인이 되었네. 하긴 너희 어머니도 어울리지 않게 미인이기는 했지."

나붓한 태도와는 반대로 싸늘한 목소리로 안네는 빈정거렸다. 아비게일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다가 자신을 갈무리하는 듯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네는 느긋한 태도로 가솔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듯이 둘러보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너는."

그녀의 새빨갛게 칠한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네가 라시아로구나. 안네라고 부르렴. 얼굴은 의외로 디트리히를 닮았구나. 하지만 분위기가… 그리고 네 머리카락은, 의심할 바 없이 '그녀'로구나. 조금 더 크면 디트리히를 닮았단 얘기는 듣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건 좋은 일이지."

킥킥, 하고 안네는 웃었다. 어째서인지 그녀는 내게 부드럽게 굴었다. 직계인 아비게일에게 부드럽게 굴지언정, 종친들은 내게 부드럽게 굴지 않았는데도. 나는 솔직히 많이 당황했지만, 최대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오시는 데 편안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험한 길이었을텐데."

“견딜 만은 했다. 하지만 피곤한 건 어쩔 수 없구나. 내 방은 어디지?”

아비게일이 조심스레 나섰다. 내가 대외적인 일로 바빴던만큼, 그녀가 안네의 맞이를 준비했다.

"공작부인 방을 준비해두었답니다. 특별히 준비해뒀으니 편안하실 겁니다. 집사, 고모님을…"

그녀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면서 상냥하고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의문을 표했다.

"내가 왜 공작부인의 방을 써야하지?"

아비게일은 그 질문을 듣자마자 분개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몹시 어이없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그러듯이 말을 잇지 못하는 아비게일의 모습에 결국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상 그녀의 말이 맞았다. 현재 납치든, 자진해서 사라졌든, 어쨌든 대리인까지 움직인 상황에 안네는 공작의 방을 쓸 모든 권한이 있었다.

공작이 돌아올 거라고 믿는 아비게일이야, 그런 상황이 더없이 불쾌하겠지만.

"죄송합니다, 안네. 저희는 당연히 안네가 좀 더 화려하고 우아한 방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공작부인의 방은 좀 가망이 있었지만 아버님의 방은 촉박한 시간 내로는 힘들 것 같아서요. 우선 공작부인의 방을 한 번 보시고 마음에 안 드시면,“

안네는 내 말을 우아하게 한 손으로 저어 막고는 비죽이 웃었다. 그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아 나는 내심 안심했다.

"네 혀 놀림이 어미와 꼭 닮았구나. 좋아. 안내해봐라. 마음에 들지 안 들지는 보고 결정해야겠지."

겨우 저택의 분위기가 풀어졌다. 본인의 영향력을 아주 잘 알고 있고, 이를 이용하는 데 주저함도 없는데다 샤펜공 마저 신경 쓰지 않는다…. 아주 까다로운 상대였다. 한 손으로 저택의 집사를 부르자 집사가 얼른 다가오는데, 안네가 오른 쪽 손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아니. 아비게일. 네가 안내하렴."

아비게일은 몹시 치욕스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혔지만, 곧 입술을 깨물고 네, 고모님. 이라고 대답했다. 안네는 대답을 다 듣지도 않고 내게 말했다.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자, 라시아.”

그녀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자신의 방을 향해 올라갔다. 아비게일이 그녀의 뒤를 따랐고, 어쩐지 내게 한 인사가 순전히 아비게일을 무시하고 싶어서 한 것 같아 목이 좀 탔다. 아니, 둘이 뭐 싸우기라도 했어? 왜 이래? 골치가 아파 한숨을 푹푹 내쉰 후에 집사에게 말했다.

"새로 들어온 아이들이나 전용이 아닌 사람들은 아예 그녀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는 게 좋겠어요. 웬만큼 괜찮으면서 까다로운 주인을 모셔본 사람들은 전부 당고모님 쪽으로 돌려버려요. 그리고-,“

나는 말을 이으려다가 입을 닫아버렸다. 일이 무척 이상하게 돌아갈 것 같았다. 나는 그들에게 너무 권력의 편에 서지 말라고 충고하려다가, 그만뒀다. 그래… 오래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지, 충직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는 애니에게만 따로 몇마디 충고를 하고 그만두었다.

============================ 작품 후기 ============================

설날.. 설날 때문에 쓸 시간이 없습니다 ㅠㅠ 전 이미 시골이에요.. 엄마가 강제 소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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