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며칠 뒤, 이른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겨울 내내 모두를 괴롭혔던 건조한 공기가 어린 새싹을 응원하는 봄비로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봄이었다.
분명히 따스했고, 세상은 빛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세상이 달라지는 걸 보고 있자면 내가 닿아있는 현실이 아득하게 느껴지고는 했다. 시간표도 다 정해지고, 천천히 방학 전의 일상을 모두들 찾아가고 있었다.
그 막연한 행복함과 초록빛이 내 열 여덟 번째 봄 속에서 번져가고 있을 무렵, 불행은 예고하지 않고 내 발치에 떨어졌다.
새벽녘, 거친 바람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잠옷 차림으로 겨우 침대에서 빠져 나오자 창문이 열려있었고, 그 열린 창문 앞에 오페가 서있었다.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널브러져서 있었는데 아마도 오페의 마법에 걸려 기절했는지, 자는지 알 수 없었다. 차림새를 바로 하고 나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저 서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오페.”
단 한 번, 나는 그와 만났다. 나는 그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친근하게 여긴 적도 없었으며, 그를 지인으로도 여기지 않았다. 다만 나는 리콜라티를 알 뿐이었다.
“……”
그런데도 그가 어떤 말을 할 지 알고 있다는 것은, 내가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일테지. 붉은 눈의 드래곤은 거센 봄비에 푹 젖은 모습이었다. 아마도, 비를 막을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들고 있는 것 같은 천뭉치 같은 것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감기에 걸리겠어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내 침실의 창문 안으로 봄비가 쏟아져 내렸고, 이제 갓 아버지가 된 남자의 머리카락에도 물이 떨어졌다.
“리콜라티는…”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놔둔 채 욕실로 가 의례 놓아두고는 하는 면포를 꺼내 그에게 다가갔다.
“내 아내는.”
그는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를 무시했다. 그의 품안에서 아이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태어난 지 얼마 되었을까, 아주 작은, 핏덩어리였다. 작고, 쪼글쪼글하고, 그리고 몹시 야위었다.
“이렇게 어린 아이는 감기에 걸리기 쉬워요.”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방금 태어난 걸까. 그러면, 리콜라티는 어떻게 된 걸까. 알고 싶기도 했지만, 당장 여기에서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알고 싶지 않은 답이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
“이름이 뭐예요?”
오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라티….”
“예쁜 이름이네요. 엄마 이름을 따서…”
나는 조심스럽게 쌕쌕, 숨을 몰아쉬며 울지도 않는 아이를 천에서 꺼내, 면포로 조심스럽게 닦아주기 시작했다. 분명 아이의 것이 아닐 피가, 천에 묻어났다. 울음을 터트리고 싶기도 했고, 이 상황이 몹시 무섭기도 했다.
“리콜라티를 놔두고 왔어.”
그는 머저리같이 말을 더듬었다. 붉은 눈을 담고 있는 눈매가 덩달아 몹시 붉었다.
“숨을 거둔 아내의 배를 갈라서 저 애를 꺼냈어. 그리고는, 도저히 거기에 있을 수가 없어서….”
왜 하필 나를 찾아왔는 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리콜라티 쪽의 지인이라서 그런 걸까. 나는 차분하게 아이의 몸을 전부 닦아준 후에 깨끗한 천을 찾아서 그녀를 새로 감쌌다. 얌전하고, 비록 말랐지만 예쁜 아이였다.
“리콜라티가 이제 없다니. 그러면, 나는, 이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오페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무릎을 꿇었다. 한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게 되다니. 이런 사랑이 있구나. 단지 상대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방향을 잃고 무너지게 되는, 그런 사랑이…. 오페는 그 상태로 엎드려 엉엉 울기 시작했다.
억울하고, 분통하다는 듯이 길을 잃은 남자는 그렇게 울었다.
“라티는 엄마를 닮을 거예요.”
한참을 아이처럼 우는 남자를 위로하기 위해 내가 꺼낸 말은 조악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가끔은 조악함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 법이다.
“라티가 커가면서 당신에게 가르쳐 줄 거예요, 태어나야만 했던 이유들을….”
당신은 이제 이 소녀와 해가 뜨는 것을 볼 것이다. 해가 뜨는 찬란함과 해가 지는 아련함, 그리고 비가 오는 날의 공기와 손가락 끝에서 녹아버리는 눈의 감각. 여름의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가을 날, 떨어지는 나뭇잎 너머의 하늘을 볼 것이고, 풀숲에서 코를 파묻고 클로버를 함께 찾아주게 될 거다.
“아이의 손을 잡고, 당신은 이제 부모가 되어갈 거예요.”
꺽꺽 거리며 우는 남자의 앞에 아이를 끌어안은 채로 주저 앉았다. 나는 나오는 뜨거운 숨을 삼키고 말했다.
“라티가 이제, 모두 가르쳐 줄 거예요.”
어째서 리콜라티와 당신에게 이렇게 무거운 선택을 하게 하면서까지, 태어났어야 했는지. 당신에게 이런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당신은 라티를, 그리고 라티와 함께 하는 세상을 전부, 하나도 빠짐 없이… 사랑하게 될 거예요, 오페. 그러니까 돌아가서 리콜라티를 수습하고, 아이에게 엄마를 알려주세요.”
오페는 엉망이 된 얼굴로 나를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 좋은 아버지가 될 거라고 나는 멋대로 생각했다. 그는 내게서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받았다. 아이는 아빠의 품에 들어가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서러운 울음소리에 오페는 뻣뻣한 손가락으로 아이의 뺨에 손가락 하나를 올리고 말했다.
“아빠야….”
울지 말아, 아가야. 오페는 한참을 그렇게 아이를 달랬다. 둘의 모습이 가여워서 나는 그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잘 컸으면 좋겠다. 사랑스럽게 커서, 오페를 구원해줬으면. 그러면 좋겠는데.
빗방울이 거세졌다.
둘이 돌아가고 나서도 나는 잠이 오지 않아 꼬박 밤을 새웠다. 눈이 뻑뻑한데도 잠이 안 와서 결국에 잠을 청하던 것을 그만두고 침대에서 일어나 어두운 색의 드레스를 꺼냈다. 조의 정도는 표하는 게 맞는 일인 것 같아 꺼내 놓은 드레스를 보고 있자니, 애니가 나를 깨우러 들어와서는 놀란 얼굴을 했다.
“웬 검은 옷이세요? 오래간만에 비도 내려서 하늘도 맑은 봄인데.”
“그런 기분이네. 그보다, 편지 온 건 없니?”
“하나 왔어요. 씻을 물 준비해드릴게요, 잠시만요.”
애니가 내게 편지 봉투를 건네주었다. 나는 발신인을 확인하고 바로 힘을 줘 편지 봉투를 찢고 편지지를 꺼냈다. 기다렸던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설레거나 기쁘지 않았다. 상실을 앞에 두고 나는 침착했다.
편지에는 많은 내용이 적혀있지 않았다. 그저 만나고 싶다고, 찾아와주었으면 좋다는 내용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에 만족했다. 만약 그가 이별을 편지로 고했다면, 그와의 좋았던 모든 일들이 심하게 변색될까봐 두려웠다.
어두운 색의 드레스를 입기를 잘했다. 애니의 시중을 받으며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 나는 답장을 썼다.
날짜와 시간을 통보하고 편지를 보내자 지금까지 그를 기다렸다는 것이 문득 허무해졌다.
이른 준비에 시간이 남아 1층으로 내려가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불안정해보이는 얼굴에 다들 아닌 척 하지만 수군거리는 모습이 낯설어 빠르게 걸어내려가자 제프리가 침착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수도로 가셔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의아해서 그를 바라보며 묻자 제프리가 내게 편지지를 건네고 내가 편지지를 열자마자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 아비게일은요?”
“지금 하녀가 깨우러 갔습니다.”
“학교에 연락해요. 당장 짐 싸고.”
“하지만 아가씨, 지금 가셔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아가씨나 아비게일 아가씨는 정식 후계자가 아니고, 그러니 가셔도….”
“수도의 샤펜 저택을 비울 수는 없어요.”
단호하게 말하고 의아한 얼굴로 가운을 입고 내려온 아비게일에게 말했다.
“수도로 갈 준비를 하셔야겠어요.”
“…그게 무슨, 왜?”
“샤펜 공작께서 행방불명이에요.”
아비게일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본인의 의지로 사라지신 건지, 납치 당하신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수도 저택을 비워둘 수는 없으니, 저택을 정리해주세요. 페드윈과의 일은 제가 처리할테니까.”
“아버지는 그냥 사라질 분이….”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내가 그녀의 파란 눈을 쏘아보자 아비게일은 입술을 꾹 깨물더니 말했다.
“집사, 시녀장.”
그녀가 둘을 부르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한스를 불러 마차를 탔다. 아직 부슬비가 내려서 말을 타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탓이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학장실로 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서류를 작성했다. 휴학을 각오했는데 학장님께서 편의를 많이 봐주셔서, 이후에 돌아온 사정을 봐서 처리해주시겠다고 했다.
아비게일도 마찬가지로, 만약 한 한기 통으로 쉬게 된다면 모르지만 일단 한 학기 안으로 돌아오면 어떻게든 해보자고. 호의에 감사하면서 학생회실로 가서 다니엘과 오를레아, 그리고 여럿에게 일단 새로운 사람을 구해보라고 말을 꺼냈다.
다니엘은 그러나 공작가의 후계끼리는 결혼을 할수 없는 상황이니 내가 후계자가 되는데, 현재 20살도 채 안 된 데다 페드윈 졸업도 못한 방계에게 황제가 특별법 시행을 해줄리도 없으니 대리가 올 거라고 예상했다. 대리만 있으면 페드윈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반학기 까지는 버텨보겠다고 말하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다른 분들에게도 찾아다니며 죄송하고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 그런 말을 드렸다.
오를레아에게는 민디와 앨런에게 인사를 전해달라고 하고 다니엘에게 다시 가서 로드리고에도 인사를 부탁드렸다.
학교를 빠져나와서 저택으로 돌아가 아비게일에게 친구들과 인사하고 오라고 말하자 그녀는 편지로만 해도 된다고 했다. 하긴, 나보다 그녀가 더 정신도 없고 그럴 기분이 아닐테니까. 저택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도둑이 들었다고 해도 믿겠구만.
“우리 떠나고 나면 정리하느라 며칠은 정신 없겠네요. 잘 부탁해요.”
내 장난스러운 말에 시녀장이 갑자기 눈물을 보이려고 해 깜짝 놀랐다.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어쩌면 좋아요, 아가씨….”
훌쩍이는 그녀를 달래주면서 괜찮을 거라고 하는데 다들 눈시울이 붉었다. 공작이 후계자도 없는 상황에서 사라졌다.
심지어 현 상태에서는 마땅히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도 없다. 누가 현 상황에서 샤펜 대리를 할 지도 모르고, 최악의 경우 자신의 사람으로 아랫사람을 갈아치울지도 모르니 걱정이 되는 거겠지. 아예 샤펜 자체가 갈갈이 쪼개질지도 모르니 걱정이 될만도 했다.
“걱정말아요, 시녀장. 최악의 경우는, 정말 최악일때나 생기는 거니까. 황녀전하가 있는 한 아마 별 일 없을 거예요.”
그녀의 손을 꽉 쥐어주고 더 할 일이 없냐고 묻자 아비게일과 나를 각자의 방으로 올려보내면서 다들 쉬라고 했다. 이제 계속 바쁘실 건데, 좀 쉬시라고. 그 말도 맞는 말이라 방으로 올라가다가 제프리에게 한 시간만 자리를 비우겠다고 했다.
이제 말 그대로 짐을 싸는 것만 남은 상황이라 내가 할 일이 없어서, 한 시간 정도는 괜찮다고 해 나는 구두굽을 부딪히고 바로 록진이 있는 곳으로 갔다.
언제 만나겠다, 약속 장소를 써서 보낸 게 무색하게 되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밝게 변하는 세상에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
눈을 뜨자 록진이 멀리 보였고 나를 확인하자마자 그가 놀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할 말이 있죠, 나한테?”
“…왜, 지금….”
“록진. 시간이 없어요.”
“저는, 이 가문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라시아.”
“아무리 해도 나를 선택할 수는 없었던 거군요.”
막연한 예상이 들어맞은 것에 씁쓸한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 당신의 선택에 대해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죄송합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나를 선택하지 못했던 이유 말이에요.”
아주 오래, 오래 기다려온 대답이었다. 그가 내게 달려왔을 때, 나는 몹시 기뻤다. 나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어떻게든 오래 오래 이끌어가려는 모습에 나는 감동 받았고, 나 또한 그와 함께 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형님께서 부탁하신 것을,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을, 언제나 끝나고 나서야 기억해내고야 마는 이유는 무엇일까.
“죄송합니다, 아가씨."
죄송할 이유가 없는데, 그는 자꾸 사과를 했다. 우리가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은, 당신 때문이 아닌데. 그저 그렇게 된 것일 뿐이었다. 내가 당장 샤펜을 버리고 그에게 오지 못하는 것처럼, 그도 그랬을 뿐이었다.
"나는 당신이 연락을 너무 안 해서, 그래서 그냥 그렇게 끝난 줄 알았어요."
그러니 나는 당신에게 미안하지도, 당신도 내게 미안할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나는 그에게 고마울 일이 참 많았다. 나를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그리도 많이 해줬나 싶을 정도로.
"고마웠어요, 지금까지…. 이렇게 얼굴 보고 헤어지자고 한 것도 고맙고, 또… 나는 당신 때문에 많이 행복했어요. 힘들 때 내 곁을 지켜줘서 고마웠고, 그래서 쉽게 버틸 수 있었어요."
"저도 아가씨와 있어서 좋았습니다. 제가 도움을 드렸을 때, 많이 행복해하시고 기뻐해주셔서 저도… 행복했습니다."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나름대로 잘 읽을 수 있고, 그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웃었다. 사람이 헤어지는 게 이렇게나 쉽고, 간단하고…
"그리고, 미안해요."
나는 이 사람이 참 아쉬웠다. 좀 더 다른 길이 있지 않았을까, 어떻게든 우리가 함께 갈 수 있을까, 그렇게 몇 번이고 생각하고 아쉬워하고… 아마 그래서 그도 그 때 그 먼 길을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아가씨가 미안하실 게…."
"필요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리고 이제 나는 그렇게는 이어질 수 없는 게 우리 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에게서 필요 이상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필요로 하지 않아도 그가 내 옆에 있었으면 했고, 그에게 내가 필요하지 않아도 언제나 내가 옆에 있기를 바랐다.
"록진이 미안할 일이, 정말로 아니에요. 당신이 만약 나를 선택한다고 했어도, 우리는 오래가지 못했을 거예요. 사랑에 대한 생각이 우리는 너무 다르니까요. 나는 록진, 내가 당신이 필요하다고 해서라든지, 당신이 나를 필요해서라든지, 그런 이유로 당신이 좋았던 게 아니에요."
마지막으로 용기를 내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래, 나는 그런 이유로 당신을 좋아한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당신이 나를 지켜준다고 해서 좋았어요. 나한텐 그런 사람이 없었거든요. 아마 평생 난 날 지켜주겠다고 한 사람한테 끌릴 거고, 그런 분이 좋을 거예요.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해보여서, 약해 보여서 내게 끌렸다는 당신처럼, 나도 그래요."
그의 손가락은 나보다 뜨겁게도, 차갑게도 느껴졌다. 그래도 첫 연애 치고, 당신은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다가는 당신의 다른 점이 좋았어요. 자상하다든지, 책임감이 있다든지. 의외로 유머감각이 있다거나, 귀엽다거나, 애교가 있고, 그리고 몹시 어른스럽다든가…. 그런 당신의 많은 점이 점점 보이고, 그래서 나는 록진이 점점 더 좋아졌어요. 당신이 분명 많은 모습을 보여주고, 내게 충실하게 노력해주었기 때문일 거예요."
록진은 내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의 얼굴을 나는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상냥하고 다정하게 나를 위로해주고 안아주었던 사람. 나를 지켜주려고 노력했고, 나 때문에 정말로 많은 일에 휘말렸던 사람.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필요 이상의 사람이 되지 못했어요. 그건, 내게는 사랑이 아니에요. 나는 당신이 다른 소중한 사람이 당신을 필요로 한다고 해서, 그렇게 나를 버리고 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아니, 그런 건 다 제외하고서."
록진의 손을 놓고 챙겨 온 반지를 그의 손위에 올려두었다.
"나는 당신에게, 필요 이상의 의미로 남고 싶었어요.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한다는 점보다, 더 많은 것들로 당신에게 기억되고 싶었어요."
그 점에서, 나는 실패했다. 그 점을 인정하고 나자 그제서야 그와 나의 끈이 끊어졌음을, 더이상 어떻게 해도 이 연애를 지속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에게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결과는 달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가 선택해야 했던 시기가 이미 지났고, 나 또한 마음을 정리할 시기가 왔다.
"지금까지, 내가 많이 당신에게 폐를 끼쳤어요. 내 목숨을 여러 번 살려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나는 이제 마치 한달동안의 씀씀이를 정리했던 것처럼, 당신과의 일들을 정산하기 시작한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는데, 언제나 항상 나를 도와주고 내게 힘이 되어주었어요. 당신이 지금 겪고 있는 상실을 내가 위로하고, 당신이 내게 했던 것처럼 해줘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미안해요."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불안정해보였고, 위태로워 보였다. 이런 얼굴은 처음 봤다. 언제나 다정하고, 흔들림 없는 사람이었는데. 아니, 당신이 내게 이별을 고했을 때 이런 얼굴이었던가. …모르겠다. 지금 내 앞에 선 남자가 나는 참 낯설었다.
"고마웠어요."
손을 뻗고 발꿈치를 들어올려 그의 뺨에 키스했다.
"정말로, 고마웠어요."
그가 그에게서 멀어지는 내 손을 꽉 쥐었다.
"미안해."
나는 미안하다는 그에게 웃어줬다. 더 어떤 말을 하고 싶지도, 어떤 말이 소용이 있다고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냥 그런 거구나, 이렇게 끝나는구나… 그렇게 담담할 수 있었다. 많은 연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다음엔, 더 좋게 봤으면 좋겠어요, 라젠경."
그의 손이 천천히 내게서 떨어져나갔다. 나는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걸었다. 한참을 걷고서, 구두를 부딛혀 저택으로 돌아왔다. 30분도 안 된 시간 동안, 한 사람과의 인연의 고리를 끊었다. 이 30분이 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이 모든 과정이 너무나 쉽다는 것이 우스운 면이 없잖아 있었다.
우습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이제 혼자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누군가 없이, 나 홀로 샤펜가를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그렇게 울었던걸까. 알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혼자고, 결국 내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나 홀로 책임져야 하는 거니까.
그래, 나는 결국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도 되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맞는 일을 했으니까. 후회하지도, 결정을 번복하지도, 그리고 그리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끝이 왔으니 끝을 냈을 뿐이다.
============================ 작품 후기 ============================
록진이랑 이별! ㅇㅅ< 잘가라 구남친.
어 생각보다 의외로 질문이 많이 들어왔네요? 이상타..
밤프님: @작가님 만약에 강에 치킨이랑 라시아가 빠졌으면 누굴 구하실 건가요?ㅋㅋㅋA. 치킨이요. 라시아야 다른 애들이 구해주겠져. 근데 치킨이 젖으면 맛이 없잖아요. 그럼 라시아 구해야하나... 치킨 쿠폰 이런걸로 바뀌면 무조건 치킨인데. ...어렵네여 뀨유 ㅠㅠ밤빵님 :@반데라스가 시드 말동무였을것같은 그런삘이 느껴져여. 시드가 그 미친드래곤하고만 친구이진 않았을것같은 애니까... 이렇게또 시드 등장하려나여. 이건 다 상상이지만여.
A.아하. 그쳐 반데라스랑 시드랑 아는 사이기는 합니다. 근데 리콜라티 이 분이 대박이세요. 좌 우 드래곤 1 반데라스. 지인인맥으로는 갑이신. 반데라스는 대단대단한 마법사입니당. 그치만 시드랑 막 친하고 그러진 않아요. 반데라스는 리콜라티를 몹시 아끼지만 드래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 인물 이름을.. 헥갈린 ㅠㅠㅠ 초 부끄럽네요 ㅠㅠ
Mine르님: 작까님 사랑해여... 너무 재밌어여ㅠㅠ[email protected]제발 꼭 완결 내주세여.
A: 노력해보겠습니다. 사랑도 감사합니다. 재밌으면 반응좀 줘라시우나님: @오오 이번에 시드처럼 어리숙한 드래곤이 아닌 연륜이 느껴지는 드래곤이네요! 실제로도 많이 도와주려나요? 예를 들어... 라시아가 마력관련으로 재능이있어서 알려준다던가? ㅎㅎㅎA:앗 드래곤 아니에여 ㅠㅠㅠ 반데라스 교수님은 아주아주아주 오래 산 마법사랍니다.
시드보다 더 나이 많아요! ㅇㅅ< 실제로 도움을.. 줍니다.... 떡밥을... 알아 ..채셨다..... 하지만 머 다 알아채셨을 떡밥...같으니... 헤헤labyrinth530님: @자까님 연참 생각 없으세여? 한 13연참정도?
A: 사람 살려
헤이리님 코멘이 많은 분들의 물음을 대신 답해드리는 것 같아서..
->오페가 아기 안고 만나러 온건 나중에 일어날일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 미래에 이러할 것이다라는 거죠 지금 시점에선 임신 중인 상태이니 아직 리콜라티는 죽지 않았습니다.
A. 오늘 죽었습니다. ....에또.
ㅎㅎㅎㅎ 네 저 열겨님이랑 대결해요 움치키 둠칫이번 편은 슬픈거 몰아넣었네요! 그리고 다음 편은 아마 월~ 화에 올라올 것 같습니다.
+++ 혹시 후작님 후작님 재고 찾으시는 분이 있을까봐 잠시. 여러분 아직도 팔고 있어여 ㅇㅅ< blog.naver.com/heese_may 를 참고해 주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