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얄미울 정도로 멋있게 선서하는 모습에 빈정이 약간 상했지만…. 이것저것 다 떠나서 정말로 멋있어서 곧 마음을 풀었다. 담담하고 강인해보이는 모습에 어쩐지 마음 한 켠이 뿌듯하게 차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선서를 하고, 전대 학생회장인 록산느와 악수를 한 후 학생회의 직인을 넘겨받는 의식이 참 새삼스럽게 느껴져서…. 이제 내 주변의 3학년들이 4학년이 되었고, 4학년들은 이제 더 학교에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록산느와 애론은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던 학생회의 사람들이라 졸업식과 학생회장 취임식의 감회가 남다르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와 그녀의 이별사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 받았고, 몇몇은 눈물도 흘렸다. 1년만에 저렇게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남으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할까.
졸업식에서는 4학년 음악 동아리가 마지막으로 웅장한 음악을 깔았고, 교장선생님께서는 직접 학생들을 위해 졸업장을 적어 하나씩 전해주셨는데, 교수님들께서 이름을 한명씩 불러주었다. 나도 언젠가 저 단상 위에 서겠구나. 그 미래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또는 더없이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기분이 참… 많이 묘했다.
황족들은 식이 시작하기 전에 도착했는데, 이리하께서는 아무래도 마법보다는 직접 말을 타고 오는게 편하신지 정식절차를 밟아서 정문으로 들어오셨다. 그의 무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간단하고 기동력이 있었고, 그 스스로도 흑마를 타고 왔는데 의장차림이 아닌, 몹시 가벼운 오르제국의 기본 복식이라 무척 인상적이었다.
식 진전에야 가볍게 등장한 그와 페레일라 황태녀는 완전히 반대였다.
그녀는 마법진을 통해 등장했는데, 그야말로 일대의 등장이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정식예복을 입은 그녀는 그녀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시원한 색의 드레스를 입고 왔다.
우아한 티아라를 머리에 올리고 악세서리를 빠짐 없이 한 화려한 모습이 오르제국과 확연한 대비를 이뤘다. 작정하고 이렇게 하고 왔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오르안이 어쩌고 올지야 몰랐으니 우연이겠지만 말이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그가 도착하자마자 오르 제국민들은 절을 시작했다. 그의 옷자락에 입맞추고 싶어하는 모습은 신기하기도 했지만, 일견 거룩하게 보이기도 했다.
오르안이 지나가는 곳마다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모두들 조용히 숨을 죽이고, 매무새를 가다듬고, 그를 향해 절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인상적이었으며, 사람들의 기를 죽였다.
이와 반대로, 페레일라 황녀는 화려한 등장과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람들이 이리하의 길 앞에 조심스레 꽃을 바친다면 페레일라 황녀에게는 꽃을 안겨다 주거나 뿌렸다. 그녀가 가는 길에는 수십의 사람이 모였고, 축하드린다는 북적한 말들이 모였다.
이리하는 조용히, 그리고 담담하게 그들을 하나하나 둘러본다면, 페레일라는 환하게 웃으면서 그들을 하나하나 반겼는데, 이를 통해서 베노암과 오르가 얼마나 다른 지도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졸업식이 끝났고, 로드리고들은 모두 모여서 졸업하는 선배들을 축하했다. 아비게일의 약혼식이며 뭐며 해서 굉장히 바빴을 때 나를 도와준 그들이 고마워서 졸업선물겸, 감사인사겸 해서 선물을 준비해 그들에게 주었더니 엄청나게 감동해서 오히려 좀 민망했다.
그럴, 그럴만한 선물은 아니었는데…. 앨번과 애론, 데릭 모두 나를 안아줬는데, 그동안 지낸것이 무색하게 어색해 죽으려고들 해서 나는 실컷 웃음을 터트렸다.
"약혼녀를 두고 떠나서 어쩌면 좋아~"
앨번이 그러게. 너희가 내 약혼녀를 잘 챙겨주어야하며 어쩌고 저쩌고 장난섞인 잔소리를 하자 로드리고들이 으아~ 하면서 질색해댔다. .
"라시아, 잠시만."
다니엘이 떠드는 그들 사이로 나를 잠시 불러냈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생각해봤어?"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기에 한숨을 쉬고 약간 미소를 지었다.
"샤펜공께 물어보긴 했어요."
"그리고?"
그가 몹시 기대된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잠깐만, 다니엘. 혹시 허락하실것 알고 있었어요?"
"내가 허락을 받아뒀는데 그럼 당연히 알지."
"아니, 그러면 대체 왜… 그냥 허락 받았다고 생각해보라고 하시지."
"직접 물어볼만큼 관심이 있다는 게 중요한거니까 그렇지. 그럼 네가 내 부회장이다."
"단, 조건 하나가 있어요."
"아비게일은 학생회 구성에 넣을 생각없어."
"…수업 수만 안 줄어들었으면 절대로 안 받아 들였을 거에요."
그가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그 말은 하겠다는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이 잘 부탁한다, 하고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악수를 위해 맞잡은 손이 단단했다.
"잘부탁드려요, 저야말로. 그런데 대체 왜 저를 굳이 부회장으로 만드려고 하세요? 다른 사람 많으신거 아는데."
자연스럽게 우리 둘의 손이 떨어졌다. 그가 유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네 편이 되겠다고 했잖아. 넌 사람들과 많이 어울릴 필요가 있는데다, 능력도 있으니까."
상부상조라는 거지. 다니엘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한숨을 푹 쉬다가 문득 약혼녀와 함께 해야하는 종강파티가 궁금해져 물었다.
"어땠어요? 저는 누구의 약혼녀도 아니라 참여 못했어서, 궁금했거든요 내심,"
"파티가 다 거기서 거기지. 무난했어."
"약혼자거나 애인이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니, 종강파티치고는 너무 소규모가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 날만 많이 사귀잖아. 너도 초대 꽤 받았을텐데, 이번에도 너희 집 집사라는 데 한표 던진다."
또 그건가. 집에 가자마자 제프리를 털어야겠다며 투덜거리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는데 멀리서… 다니엘과 똑같은, 그러나 훨씬 긴 머리카락이 보였다. 어쩌지, 하고 고민하다가 다니엘에게 저 잠시만. 하고 말하자 , 그가 나를 보더니 내 시선이 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때- 정말 우연이라고 말하기는 부끄러울 정도로 완벽한 타이밍에 이리하 또한 그가 서 있는 쪽을 봤다. 시선이 맞닿아 떨어지지 않았고, 다니엘이 소리를 냈다.
"…그는 어떤 자야?"
다니엘이 물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순간 당황해서 머뭇거리다가 어설프게 대답했다.
"훌륭한 황제이신것 같아요. 추진력도 뛰어나시고."
"…그래."
그가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일견 다정해보이는 미소를 지었고, 나도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걸로 됐다는 듯이, 그가 들어가자, 라고 말하면서 로드리고 관의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잠시 이리하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어서 나는 결국 다니엘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음… 잠시."
그가 힐끗, 이리하쪽을 바라보더니 내게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내가 말해둘게."
고마워요. 작게 말하고 이리하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내가 오는 것을 알아봤는지 천천히 내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표정이 미묘했다.
"이리하!"
가볍게 부르고 다가가자, 그가 말했다.
"…오랜만이군."
"그러게요. 반갑네요."
"힐더지? …그대가 함께 있던 남자."
"어, 네. 제 형부 될 분이시죠. 음…좋은 시간보내고 계신가요?"
잠깐 힐더라는 이름에 흠칫해서 이리하를 빤하게 바라보게 됐다. 그가 로드리고관으로 들어가는 다니엘을 빤하게 바라보는게 느껴졌다. 다니엘이 들어가려다가 잠깐, 아주 잠깐 이리하를 바라보는게 느껴졌다.
형제의 상봉이라기에는 너무 짧은 순간이었다. 분명히 둘은 눈을 마주쳤다.
다니엘이… 아니, 힐더가 더 정확하려나? 어쨌든 그가 대담하게 미소를 짓고, 이리하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손을 살짝 흔들었다. 내게 인사한건가 싶어 얼결에 손을 흔들자 다니엘이 웃음을 터트리는게 보였다.
왜, 왜 웃는거지. 당황해서 이리하를 올려다보자 이리하가 장난기 섞인 한심하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왜요?"
"내게 한 인사잖나."
순간 얼굴이 달아올렸다. 다니엘은 로드리고 관으로 들어가려는 듯이 발걸음을 옮기더니 곧 몸을 돌려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라… 진짜 오는 건가? 이리하가 긴장한듯이 표정을 굳혔고 덩달아 나도 어째야할지 모르고 서있다가 조심스럽게 이리하에게 말했다.
"저… 자리를 비켜드릴까요?"
그러자 그가 다니엘에게 시선을 떼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붉은 눈의 그가 나를 바라볼때면, 가끔 오싹할 때가 있었다. 보석같이 아름다웠지만, 가끔은… 뭐랄까, 인간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대가 있어줬으면 좋겠어."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자니 그가 눈을 깜빡, 하고 감은 후 떴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말했다.
"그대가 이 자리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제가 있는 다고 해서 뭔가 달라질 일도 없고… 게다가 다니엘은 당신에게 해를 끼칠 사람도 아니고요."
그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그대의 입을 어떻게 하면 닫게 할 수 있을지 난 궁금하네… 있으라면 그냥 좀 있어보지 그러나."
그 말에 결국 입을 꾹 닫고 얌전히 다니엘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무런 연관이 없는 내가 이렇게 떨리는데, 이리하는 오죽할까. 힐끗, 눈을 돌려 이리하를 보았지만 그는 몹시 단단하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이 사람도 어지간히 긴장했구나. 여기에서 긴장하지 않은 것은, 시원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다니엘 뿐인 것 같았다.
"처음 뵙습니다, 오르안이시여. 이번대의 페드윈 회장인 다니엘 이셀리아 요르펜이라고 합니다."
"그대가 선언하는 것을 보았지. …훌륭한 학생회장이 될 것 같더군."
"감사합니다, 오르안이시여."
둘 사이에 다정한 덕담이 오가는 데 어째서 나는 이렇게 시선을 둘 곳을 못 찾고 있는지 모르겠다. 잠깐의 침묵 뒤로 다니엘이 웃으며 말했다.
"…제대로 말씀을 한 번쯤은 드리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이리하."
다니엘이 대담하게 손을 뻗더니 이리하의 손을 잡았다. 이리하는 잡힌 손을 물리지도, 쳐내지도 못한 채 놀란 눈을 하고 서있었다. 그가 이렇게 놀라는 모습을 처음 봐 나도 놀랐다.
"라시아. 좀 도와줄래?"
"…네? 네, 뭘요?"
"오르제국에서는 아주 친하거나 친밀한 상대에게 특별하게 인사할 때나 맹세할 때, 혹은 기원할 때 손에 물을 적셔서 서로 마주대거든. 지금은 특별히 물이 없어서 네가 물인척 하고 있어줬으면 해서. 그냥 간단해. 손만 위에 올려줘."
힐더의 말을 따라 조심스럽게 그 둘의 손위에 내 손을 올렸다. 닮아보이는 손 위로 조심스럽게 내 손을 올리자 기분이 참, 묘했다.
"나는… 네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는 걸 안다. 좋지 않은 부모님 사이에서 컸을거고, 어머니는 너를 낳고 나서 몇년을 살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까. …그리고 나는 네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고, 아마 알 수도 없을 거야. 너도 마찬가지일 거고. 하지만 완전히 멀어지기 전에… 늘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이리하의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이 강인해보였다. 힐더의 말을 조용히 듣는 그의 심홍색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해보였고, 흔들리지 않는 단호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니엘의 아름다운 초록색 눈동자는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보기 힘든 진중한 다정함이 있었다.
"네가 어떤 상황을 겪었건… 누구도 그 자리를 네게서 빼앗을 수 없을 거다. 어떤 일을 겪었든, 어떤 일을 겪어나가든. 그건 변하지 않을 거야 …내, 음… 내 동생."
몹시 쑥쓰러운 얼굴을 하고 다니엘은 쉽게, 그 단어를 내뱉었다. 그들을 가족으로 묶는 단어가 그토록 자연스러울 수 있다는 점에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리하 또한 그래 보였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다니엘도, 나도 그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네게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비록 버려진 형제의 축복이지만, 네가 받지 못했을 단 하나의 축복을 내가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이걸 너에게 줘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어."
그렇게 말한 다니엘, 아니… 힐더가 이리하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
"너에게… 샤하레 일리아라 야노 셀리이아, 내 어머니이자 네 어머니의 축복이 항상 함께 하기를."
그들은 서로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머리색, 같은 배에서 태어나서 평생 단 한번도 마주하지 않았던 그들이 마주치는 순간.
그 순간에 내가 있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그대를 죽이려고 한 적이 없었다."
이리하의 말에 힐더가 자상한 얼굴로 웃었다.
"알고 있었어. 내가 너에게 위협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 때까지 네가 살려줬지. 단지, 내가 네 가족이기 때문에."
이리하는 아무런 표정 없이 힐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조용히 말했다.
"만나서 반가웠다, 힐더. 내…"
그리고 그 뒤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말이 나왔는 지는 모두가 알았으니, 그걸로 됐다.
"고맙다, 라시아."
다니엘이 잡은 손에서 천천히 힘을 풀더니 내 어깨를 두드리고 로드리고 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리하는 자신의 손을 꽉 쥔채로 한참을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
나 또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떤 말로 그에게 다가서야 할 지 몰라서 조족이 주었던 반지라면 정말로 물을 줄 수 있었을텐데, 그런 뒤늦고 때아닌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가 아주 천천히, 손을 폈다. 그리고 그 손에는 작은 반지가 있었다. 초록색 보석이 아름다운 금빛으로 장식되어 있는 반지였다.
다니엘의 눈 색과 닮았으니, 분명히 그 어머니의 것이리라…. 나는 이 반지를 본 적이 있었다.
"이리하."
그가 나를 보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 바닥에 내 손을 올려꾸욱, 반지를 누른 후 그의 주먹을 억지로 쥐게 한 채 중얼거렸다.
"…실라누스."
그 단어에 내 손바닥 너머로 차가운 물이 흘러나왔다. 그가 놀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여신께서 당신에게 함께 하시길 바랄게요."
이리하가 다니엘에게 있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그에게 준 반지가, 다니엘의 손을 거쳐 결국에는 이리하에게 돌아왔다. 이리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에게도."
차가운 물이 우리의 손바닥 사이를, 다정하게 매만졌다. 부디 그가 조금이라도 이 반지를 통해 위안받기를.
나는 단지 그것만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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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편 확인해주세요, 연참입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