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노예상 일로 메이가가 처벌을 받고 나자 일이 순식간에 마무리 되었고, 그 때부터 나는 오를레아의 약혼식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황실에서 몹시 반가워하는 약혼이니만큼 화려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과연 황가는 황가인지 내가 예상했던 범위를 훌쩍 넘기는 화려함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이 돈이 많으면 이런 짓도 하는구나, 뭐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어릴 적부터 이런 부를 겪지 않은 나는 사실 규모에 상당히 당황했는데, 다니엘이나 로드리고들은 당연하다는 식이라 신기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당일의 오를레아는는 그녀의 고전적인 미모를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황태후의 약혼반지를 물려받았는데,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공주님처럼 아름다워서 나를 흐뭇하게 만들어줬다. 약혼 내내 황자와 오를레아는 함께 많은 이야기를 하는 듯 보였고, 약혼이 끝나고도 나와 만났을 때에 서로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여 몹시 재미있었다. 그래도 둘이 서로를 좋아한다는 것이 매우 분명했는데, 특히 황자는 약혼녀의 방 문지기가 짜증을 낼 정도로 그녀의 방에 왔다갔다 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 팔불출을 예감하게 만들었다.
이 둘의 행복은 그러나 방학이 끝나감에 따라 위험에 처했다. 황자는 그녀가 페드윈에 돌아가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오를레아는 졸업을 하고야 말겠다고 끈질기게 주장했기 때문이다.
둘의 싸움이 예상보다 길어져서 불안해질즈음, 오를레아가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황자는 오를레아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나로서는 오를레아와 가능한 한 오래 학교를 다니고 싶었기 때문에 그게 몹시 반가웠다.
모든 것이 참 잘 풀린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페드윈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벌써 페드윈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2주 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산 옷도 많고, 어쩌다보니 짐도 너무 많아져서 짐 가방에 드레스를 넣었다 뺐다, 모자를 넣었다 뺐다, 화장품을 넣었다 뺐다하는, 그렇게 행복한 고민을 하던 와중이었다.
“아가씨.”
제프리의 부름에 고개를 들고 의아한 얼굴을 하자 그가 다가오더니 내게 편지를 내밀었다.
“응? 집무실에 두지 왜 굳이 들고 왔어요?”
건네받으며 내가 여상스럽게 하는 말에 그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기다리셨을 것 같은 편지라서 들고 왔습니다.”
누구한테 왔기에 이런 반응인가 싶어 편지봉투를 뒤집어 보낸 사람을 확인하자마자 그가 왜 굳이 들고 왔는지 알 것 같았다. 록진의 편지였다.
하필 전쟁터에 있었을 때 구두를 썼던 것이 불안했는지 록진은 구두의 사용을 자제했으면 좋겠다고 편지를 보냈고, 그 이후로는 계속 이렇게 편지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는 했다. 그 때 어째서 록진이 전장에 있었는지 궁금했는데 형이 위독했기 때문에 임종의 경우를 대비해 록진이 전쟁터로 간 거라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의 형은 살아있었고 고향에서 회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고마워요. 어, 음… 나가봐요, 다들.”
연인의 편지를 어쩐지 모두가 있는 곳에서 읽는 것은 부끄러워서 함께 있던 시녀들과 제프리를 물렸다. 다들 나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침대에 앉아 편지 봉투를 성급하게 찢자 하얀 종이가 나왔고, 그리고 록진의 다정한 글씨가 …
‘라시아 아가씨.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형님이… 어젯밤, 명을 달리하셨고 저는… 어떤 말을 당신에게 드려야 할지, 아직도 정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했던 말, 우리의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지나쳐가서 당장 당신의 곁으로 달려가고 싶다가도, 형님의 유언이 떠올라 몹시 괴롭습니다. 형님께서는 제게 가문과, 가족을 맡기고 숨을 거두셨고, 저는… 라시아,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떤 선택을 해야 옳은 것일까요.’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이런 날이 올 수도 있다고 둘 모두 알고 있었다. 그의 형은 위독했고, 나는 샤펜 공작위를 버릴 수 없고… 그리고.
“하….”
최악을 상상했지만 결국 기대했던 것은, 그의 형님이 병석에서 일어나 그가 내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기대하고,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리고는 이기적인 바람을 품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렇게 내게 물었다. 나는 그러니 답을 해야했다.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저 참담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다 발목에 옷자락인지, 이불인지가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굴러떨어지다 접지른 손목이 아팠다. 손목이 아프고, 찍힌 무릎이 아팠고, 그리고나서는…
아파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당신한테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하나요. 가장 필요로 했기 때문에, 자신이 있어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됐다는 당신에게, 내가 뭐라고….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할까.
내가 당신을 덜 필요하다는 것이 왜 이렇게 슬픈 일이 되어야 하나. 내가 괜찮으니, 우리의 관계가 더 나아지고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그게 맞는 일이라고, 이렇게 좋아질 때까지 기다려준 당신에게 고마워할 때라고 생각했는데….
편지를 와르륵 구기고 한참을 끅끅거리며 울었다. 마음에 물기가 차올라 숨을 틀어막았다. 어째서라든지, 왜 라든지… 그런 말이 자꾸만 떠올랐고- 종내에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나만큼 소중한 사람이 생겨서, 그 사람이 당신을 필요로 하면 그 때는 어떻게 할 거냐고, 그에게 그 때 그 숲에서 물었어야 했다. 물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오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서럽지는 않았을 텐데. 당당하게 당신을 원망하고, 울면서 못 무른다고, 당신은 나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우길 수 있었을텐데. 이렇게나, 이렇게나 멀어진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됐었을텐데….
"아가씨, 괜찮으세요?"
문 밖에서 내가 걱정됐는지, 애니가 물었다. 하긴 혼자서 넘어지고, 울고… 온갖 소리를 다 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괜찮다고 더듬거리면서 말을 했지만, 우는 기색은 숨길 수 없었나보다. 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애니가 혼자 들어와 나를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 손수건을 받아들고 멍하니 그걸 쥐고 있다가 물었다.
"편지를… 편지를 써야해."
"예, 아가씨."
나를 애니가 잡아 일으키려 하며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의지에 따르지 않고 앉아있기만 했다.
"편지를 써서…."
뭐라고 써야하지. 나는 애니가 내 앞에 편지지와 잉크, 그리고 깃펜을 가져다 주고 난 이후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록진에게.'
이 이상 어떤 말을 해야할까. 노력하자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요한에 대해 내가 했던 말들이 생각났고, 그리고, 그리고 …
어떤 말을 하면 이 사람이 내게 돌아올까. 내가 가진 게 이렇게나 초라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그 어떤 말로도 이 사람을 움직이지 못할까봐, 나는 초조해지고 슬퍼졌다.
그래서 그냥, 그냥 적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펜을 움직여서, 그저….
'사랑해요.'
그 이외는 감히 어떤 말도, 할 수가….
* * *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는 그래서 반쯤은 체념하고, 반쯤은 기대하며 하루 하루를 보낼 뿐이었다. 이런 게 고문이구나. 하루에도 스물 네번씩… 돌아올 거라는 기대에 마음이 설레다가도,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이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컸던가.
사랑 하나가 떠나간다는 것이 나를 이렇게나 흔들 줄은 몰랐다. 사랑이 뭐라고 나를 이렇게 뒤흔드나, 싶어 자괴감이 들었다가도 그가 그래도 좋아서 나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시간은… 언제나 시간이 약이었다.
“준비 되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진을 통해 알트라로 떠날 예정이었다.
이미 알트라로 떠난 제프리가 나와 아비게일을 마중 나와있다고 한다. 2주가 무서웠다.
2주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는 남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찾아가기도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에… 그렇게 조금씩 나는 록진을 잃어버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마법이 발동 되었고, 그 너머에 제프리가 웃고 있는 것이 보일 때쯤 나는 웃어보였다.
“오셨습니까. 정확하시네요, 과연.”
“마법사가 노력한 덕분이죠. 잘 지냈나요, 제프리.”
아비게일이 제프리에게 안부를 물었고, 제프리는 그녀의 짐을 얼른 들더니 저야 그렇죠 뭐, 하고 대답했다. 내 짐도 한 하인이 들고 갔다.
딱히 들었다고하기도 민망할 정도였지만 어쨌든. 아비게일과 보조를 맞춰 걸어서 마차에 올라타자 알트라에 도착한 것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수도와는 다른 아기자기한 거리의 모습과 도착한 샤펜 저택의 모습이 반갑고도 낯설었다.
“방은 이미 정리가 다 되어있습니다. 오랜만의 알트라인데, 드시고 싶은 것이 따로 있으신가요?”
"딱히 없는데."
"나도 별로 그런 건 없어요, 제프리. 요리사 솜씨가 워낙 훌륭하니까 아무거나 잘 먹을 수도 있고요."
그러자 그가 웃으면서 요리사가 기뻐하겠다, 고 말했다. 저택은 금방이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고, 나는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혼자가 되고 나서야 한숨이 나오고 요즘 부쩍 제 멋대로 움직이는 눈물샘이 오작동을 했다.
거의 언제나 들고 다니게 된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나자 겨우 살만했다.
이런식의 이별은 싫다. 납득할 수 없다. 그렇게 어설픈 편지와 어떤 해명이나 선택도 보여주지 못하는 이별은-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 할 수 없었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나는 딱 한 주만 더 기다리겠다. 그러고도 그가 내게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 때는 내가 직접 찾아가서 그의 뺨이라도 한 대 때리고 물어보고야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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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입니다 ㅠㅠ 3시간 지날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녔어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