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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아-63화 (63/113)

63화

혜현은 생각보다는 잘 지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배우는 게 빨랐고, 함께 붙여둔 헬리아라는 아이와도 정을 붙이는 듯 보였다.

헬리아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어 세상에 던져진 아이답게 몹시 싹싹하고 눈치가 빨랐다. 열 두어살 된 아이가 벌써부터 제 위치를 알고 행동하는 것은, 기특하고 편하긴 했지만 가끔은 안쓰러울 때가 많았다.

헬리아는 나를 주인아가씨, 라고 부르며 곧잘 따랐다. 애니가 데리고 있으면서 가르치는 모양으로, 시녀로 들인 건아닌데 시녀가 되려나 보다.

하기사 나름 괜찮은 직업이기는 하니까. 쉽게 되기도 힘들고, 은근히.

“그나저나 혜현은 상태가 어때? 이제 적당히 말할 수준인가?”

그 이후로 사실은 거의 혜현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막연히 잘 지내겠거니 하는 거지, 나로서도 워낙 바빠서 말이다.

급하게 진행되는 오를레아의 약혼도 들여다보고, 그런 도중에 이종족 사건도 마무리 하고, 메이가도 처리해야 하고… 이리저리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방학도 얼마 안 남아서, 알트라로 돌아갈 준비도 슬슬 해야 했고 말이다.

“말을 배우는 게 아주 빠르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쯤 대충은 대화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일단 시도라도 해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긴, 그녀도 상당히 불안한 상태일테니까. 오늘 만나러 간다고 전해줘.”

그 말에 애니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물었다.

“지금 만나시면 괜찮지 않을까요? 오늘 시간 내시기도 애매하시고.”

“아. 그럴까.”

생각해보니 지금 아니면 시간을 내기도 애매했다. 한 번 집무실에서 업무를 시작하면 중간에 빠져나오기 힘드니 말이다.

“그럼 지금 말을 전해줘. 그 아가씨는 시간이 되려나?”

“아가씨가 가시면 시간을 내야지요.”

그 말에 조금 놀랐다. 당연한 말인데도 순간 어쩐지 당황해서 애니를 바라봤더니 애니가 말했다.

“…왜 그러세요?”

“아니. 그냥… 당연한 말인데 좀 놀랐어.”

“아가씨는 샤펜가에서는 이제 가장 높은 분이신걸요. 새삼스럽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새 이렇게까지 높이 자리했나, 싶어 기분이 영 어색했다.

“그러면 알리고 올게요.”

“응.”

방에서 아침을 끝내고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자니 곧 애니가 도착했다. 혜현의 방까지 앞서 내가 걸어가고 애니가 뒤를 따라왔고, 손님방 중 하나인 혜현의 방에 도착했다.

애니가 내 뒤에서 조심스레 나와 혜현의 방 문을 두드리고 라시아 아가씨입니다, 하고 고했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혜현이 나를 반가운듯, 두려운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꽤 그럴듯한 인사말이 나와서 웃었다.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말을 쓸 수 있구나, 싶어 꽤 안심했다.

"오랜만이에요, 혜현."

그녀는 내 말에 조금 안심한 얼굴로 나를 제 방안으로 들였다. 나름대로 한달 간 지낸 방이라 사람 사는 방 같았다.

“음, 고향이 어디에요? 출신, 같은 것?”

그래도 내 질문에 대비하려고 가신들이 상당히 노력했는지, 혜현은 스스로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상당히 능숙한 편이었다.

“여기 사람, 아닙니다.”

“아, 베노암 사람이 아니라고요?”

“아니. 이 세계 사람 아닙니다.”

순간 너무 현실감 없는 대답이 나와서 당황했다. 내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서 있던 애니도 황당한 얼굴을 숨길 수는 없는지 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이 세계 사람이 아니니까, 혜현이 이세계인이라는 걸 주장하고 싶은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 그렇군요."

싸늘한 정적이 방안에 내려앉았다.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꿈에서라도,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한 적 없는데.

"내 세계, 달 둘. 태양 둘."

…이쯤되면 이 사람이 미쳤거나, 아니면 진짜로 다른 세계에서 온 거였다. 나는 일단 멀쩡해 보이는 사람을 믿어보기로 하고 애써 말을 이었다.

"…어, 음. 우리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해요, 그… 낯선 분."

"고맙습니다."

사실 반쯤은 농담이었는데, 이렇게 고마워하면서 대답하자 오히려 내가 미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그러면. 바보가 된 기분에 일단 이마를 손으로 누르면서 말했다.

"어, 그렇군요. 그러면, 그쪽 세계에서는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직업?"

"하는 일이요."

"아! 통역가!"

"그래서 언어를 배우는 속도가 빨랐군요. 몰랐네요."

그녀는 그 말을 많이 들었는지, 몹시 뿌듯한 얼굴을 했다. 나는 일단 내 궁금증을 해소하기로 했다. 이계인이든 뭐든 내가 그녀에게 관심있는 것은 그녀의 능력이니까.

"그 때의 그 능력은 뭐예요?"

"술사예요. 물, 불, 다루기 가능입니다."

점점 더 알 수 없는 말이 나오는 것 같아서 등 뒤로 진땀이 흘렀다.

"물이랑 불을 다룰 수 있는 거군요. 하긴 거기는 지하 감옥이었으니 습기도 많았을 거고, 횃불도 있었으니까…. 혹시 좀 보여줄 수 있어요?"

그 말에 혜현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물컵에 물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런 건 또 처음 봤다.

정령술도 아니고, 마법도 아닌 힘이었다. 마법이면 내가 마력을 봤을테니까. 정령술은 정령이 보여야 하니, 완전히 물 자체를 다루는 힘인 것 같았다.

어느 정도까지 다룰 수 있는 지 물어봤더니 예상했던 것 보다 큰 범위가 나와서 몹시 만족스러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혜현은 달리 갈 곳도 없었으므로 좋다고 응했다.

특이한데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은 데리고 있어서 나쁠 것이 없으므로, 적당한 계약금과 월급으로 계약을 맺었다.

정식으로 가신으로 집에 머물게 됐으니 방도 이동시킬 필요가 있고, 저택 구경도 하고 싶다길래 기념으로 함께 다니기로 했다. 사실 나도 수도의 샤펜 저택은 잘 모르니까. 제프리의 안내를 받으며 나와 헬리아, 헤현 셋이서 움직이자 사람들이 꽤 재밌는 조합이라고 여기는지 눈길을 줬다.

하기사 예비 시녀, 예비 가신, 예비 후계자가 함께 다니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여기는 지금까지 대대로 물려내려온 가주의 집무실입니다. 라시아 아가씨께서 후에 일하게 될 공간이지요."

여긴 내가 요즘 매일 들락날락하는 공간이라 별로 흥미가 없었는데, 다른 두 사람은 아닌듯 몹시 신기해했다. 그 외에도 서재니 손님방이니, 응접실이며 하녀들이 머무는 공간까지 싹 뒤져보고 나서야 둘은 만족하는 얼굴을 했고, 나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나로서는 이렇게까지 둘러볼 필요가 있나 싶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화장실이나 욕실을 왜 모두 돌아보고 싶어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라니까.

"여기 어디야요? 궁금하다입니다."

지나가던 길에 작은 방이 있었는데, 나는 별 관심이 없는데다 뭐 별거 아니니 안내하지 않은 거겠지, 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 방이 궁금했던지 혜현이 물었다. 별 게 아니니 대충 대답해줄거라고 생각했던 제프리는 갑자기 약간, 내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음, 이 곳은 현 공작님의 개인적인, 공간입니다."

"… 집무실이 아니고요?"

그 말에 놀라 물으니 제프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난처한 얼굴을 했다.

"아닙니다. 이 곳은… 공작님께서 누구도 못 들어가게 하는 곳이지요. 청소도 마법도구를 통해서 하시지, 하녀나 하인들을 들이지 않으십니다. 잘 들어가시지도 않고요."

"뭐하는 곳인데요?"

"아무도 모릅니다."

그 말은 꽤 의외였다. 내가 아는 샤펜공작은 개인적인 일을 비밀로 삼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그렇게 숨기고 싶어하는 일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그는 마치 공작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같았고, 공작 이외의 그 누군가가 되는 것마저도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심지어는 그 스스로가 되는 것도 거부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궁금하다."

혜현이 못내 아쉬운 얼굴을 했다. 호기심이 많은 성격인가보다. 하지만 나는 딱히 그의 개인적인 공간이 궁금하지도, 아쉽지도 않았으므로 그냥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다음에 만나면 여쭤보세요."

"그래도 되나요?"

"그러세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물어볼 수 있으면 물어보고 알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대답에 제프리가 더욱더 난처한 얼굴을 하더니 나를 말리고 싶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공작님께서 불편해하실 수도 있다는 점을 아셔야 할 것 같아요."

내가 응접실 쪽으로 걸어가며 덧붙이자 혜현이 헛갈린다는 얼굴을 하더니 갑자기 물었다.

"저, 혹시… 라시아 아가씨는 공작님의 딸이 맞다, 인가요?"

"… 맞아요, 딸이에요."

"그런데 왜, 그, 아빠 틀립니까?"

그 말에 나는 웃고 말았다. 딱히 할 말이 없기 때문에 웃었을 뿐으로, 그다지 지적받고 싶지 않았던 일이었으니까. 내가 웃음으로 그녀의 질문을 무시하자 헬리아가 재치있게 나섰다.

"많이 돌아다니셔서 피곤하시겠어요! 이제 업무 시간도 다 되시지 않았나요?"

그러고보니 진짜로 그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헬리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고는 웃어주었다.

“안내 고마웠어요, 제프리. 혜현양을 새 방으로 안내 해줄래요?”

"예 알겠습니다, 아가씨."

나는 나를 따라오는 헬리아와 함께 둘을 뒤로했다. 딱히 할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와 함께 가는 길에 좀 더 상냥하게 하고 싶긴 해서, 말을 고르다가 물었다.

"배우는 것은 재미있니?"

"네, 혜현님과 배우는 것을 허락해주셔서, 언제나 감사하게 여기고 있어요, 주인 아가씨."

싹싹하고 눈치도 좋고. 훌륭한 시녀장의 재목이었다. 나중에 곤란한 손님이 있을 때면 이 아이를 전담으로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좀 웃었다.

"많이 배우렴. 많이 배워 나쁠 게 없단다."

"안 그래도 요즘 도서관에서 혜현양과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답니다. 글자를 요즘은 저도 제법 읽게 되었어요.”

"선생이 네 칭찬도 자주 하고는 하더구나.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학생이라고 하던걸."

그 말에 헬리아는 얼굴을 붉히면서 몹시 기뻐했다. 소녀의 순진한 기쁨에 나마저도 기분이 좋아져서 빙긋이 미소를 지었더니 헬리아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제가 아주 똑똑하고, 일도 잘 하게 되면은, 그러면 아가씨와 오래 있을 수 있나요?"

"응, 나와?"

"네. 목숨도 구해주셨고, 노예에서도 해방시켜주셨고… 주인아가씨는 제게 은인이세요."

"…그렇게 말해주니 무척 기뻐. 원하는대로 오래 있어도 좋단다, 헬리아. 넌 아주 똑똑하고 재능있는 아이야. 나도 너와 함께 오래오래 지내고 싶어. …원한다면 새 학기가 시작되어서는 알트라로 데려가줄게."

그 말에 기쁜 얼굴을 하는 헬리아가 귀여워서 웃어주었더니 얼굴을 발그레 물들였다. 헬리아 같은 아이라면 나쁘지 않았다. 귀엽고, 눈치도 있고.

"하지만 기왕이면 나는 네가 여기서 많이 배웠으면 좋겠어. 알트라에는 네 또래 친구들도 별로 없고 해서, 배울 걸 제 때 배우지 못할까봐 걱정이 된단다. 여기서 훌륭한 교육을 받고나서, 내 시녀가 되어주련?"

그 말에 헬리아는 뛸듯이 기쁜지 발까지 동동 굴리더니 말했다.

"네, 꼭 그렇게 할게요."

나는 기분 좋게 그녀의 뻣뻣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겨주고는 물었다.

"재밌는 일이 있으면 말해주렴. 집무실로 가는 길에 심심하지 않게."

그러자 헬리아가 한참을 고민하더니 아, 하고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별 일은 아닌데요, 혜현양이랑 공작님께서 만나신 적이 있었어요, 그 때 깜짝 놀랐는데.”

“…응? 어디서?”

그래서 혜현이 아까 샤펜공에 대해 물어봤었나? 의아한 얼굴을 하고 헬리아를 돌아보자 헬리아가 긴장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잠깐 들르신 모양이었는데, 그 때 혜현양과 제가 도서관에서 한창 공부를 하는 와중이었거든요. 시를 배우고 있는 중이었는데, 아무도 안 들어오는 줄 알고 입으로 소리를 내서 읽는 와중이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공작님께서 저희 쪽으로 오셨어요. 그래서 되게 놀랐어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뜻은 알겠는데 왜 그랬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왜…? 샤펜공이 뭐하러 그랬을까?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내가 흥미를 가진 것에 신이 난 헬리아가 말을 이어갔다.

“저 그런 얼굴의 공작님은 처음 뵈었어요.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셔서.”

“무슨 시였니?”

“음, 그게…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대충 이런 시였어요. 그건 매혹이었어요, 나는 압니다. 그리고 그건 시작되는 바로 그 때 끝날수도 있었어요. … 그 뒤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요.”

어디서 들었더라, 한참 기억을 더듬다가 문득 내 목에서 낮은 침음성이 나왔다. 헬리아가 아시는 시인가요? 하고 물어왔다.

“응. 알… 것 같아. 고맙다, 헬리아."

엄마가 좋아하는 시였다…. 나는 몹시 혼란스러워졌고, 마치 공중을 걷는 듯이 어지러워졌다. 그러다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가 어머니를 잊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 작품 후기 ============================

ㅇㅅㅇa 이번 편과 관련해서 외전이 있습니다만, 그거는 좀 뒤에 공개하도록 할게요. 오늘도 겨우 아슬아슬하게 일일연재에 성공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언제나 코멘트 열심히,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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