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시아-62화 (62/113)

62화

<정리>

샤펜가에 도착하자마자 헤이텔을 불러내 오켈뷔르로 가 뒷정리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이 내 짧은 머리카락에 어찌나 놀라던지, 엘큄에게 미안한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다.

책임져라…. 아무튼 얼떨떨한 샤펜가의 가신들에게도 제대로 이종족들을 돌보고 증언을 받아내라고 당부한 후에야 대륙어를 못하던 여자 생각이 났다.

“참, 대륙어 못하는 아가씨가 하나 있거든요. 그 아가씨 어디서 왔는지, 어떤 사람인지 좀 알아봐주세요.”

“그러려면 언어 선생이 필요할텐데, 붙일까요?”

“음, 그러도록 해요. 짐작하기로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 웬만하면 샤펜가에 적을 두게 해주세요. 어디 못 가게 하시고, 친하게 지낼만한 사람들도 붙여두는 게 좋겠어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서류를 냉큼 내미는 모습이 무척 얄미웠지만, 어쨌거나 이것저것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 건 사실이니까 일단은 집무실로 가서 급한 서류는 처리해버렸다.

“잠깐 그리고 자리를 비울 거예요. 한 세네시간 정도?”

“억. 그러시면 곤란합니다, 아가씨.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세네시간 동안 별 큰 일 없을 거예요. 안 죽어요, 안 죽어. 여차하면 샤펜 공이나 황자전하께로 허락 받으면 될 거예요. 나도 뒷정리하러 잠깐 오켈뷔르로 가야하니까.”

“헤이텔도 보내셨잖습니까.”

“그러니까 가는 거예요. 제대로 도착했나 보려고.”

그 말에야 할 말이 없는지 제프리가 입을 다물었다. 빨리 오셔야 한다며 어찌나 비장하게 말하는지, 누가 보면 전쟁터라도 나가는 줄 알겠다.

나는 몇 번이고 알겠다고 말하고 승마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보니 록진이 저번에 긴 머리 여자가 예쁘다고 한 적이 있는데. 괜스레 머리를 죽죽 잡아당기다가 한숨을 푹, 쉬고 로브도 썼다.

…아냐, 역시 오랜만에 보는 건데 화장은 하고 가야지. 급하게 애니를 불러 머리도 정리하고 화장도 가볍게 하고 나자 그제서야 좀 사람 같았다. 휴. 사실은 제대로 드레스를 입고 가고 싶었는데, 혹여나, 괜한 걱정이 들어서 승마복을 고수했다.

나중에 추문이라도 돌면 어떡해. 구두를 부츠로 바꾼 후에 얼른 굽을 부딪쳤다.

“록진이 있는 곳!”

환한 빛 너머로 황량한 들판이 펼쳐졌다. 순간 말을 잃었다. …록진 고향은 원래 이렇게 생겼나.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 사람이 산단 말이야?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마자 소리를 지를 뻔해다. 사람이 죽어있었다.

“이게, 대체….”

순간 소름이 끼쳐 뒷걸음질을 쳤다. 전염병이라도 돌았나? 왜 멀쩡한 마을에 이렇게, 사람이 죽어서 있는 거지. 일부러 그 쪽에는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했다가 시체의 옷에 매달린 국기를 보고서야 알았다.

여기는 전장이구나.

비정상적인 고요에 숨을 삼켰다. 대체 왜, 록진이 여기있지. 구두가 미쳤나, 아니면… 최악의 경우, 록진의 형이 죽어 그가 전장에 나선 걸 수도 있었다.

일단 어떤 방향으로라도 걸어가자 싶어서 깃발이 보이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러다 화살에 맞아 죽는 것 아닌가.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하지만, 그가 전장에 있다는 걸 안 이상 나는 돌아갈 수 없었다.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은 알면서도 확인하고 싶었다.

'두두두두두두!!!!!!!!'

말이 달려오는 소리. 나는 고개를 들어서 앞으로 달려오는 말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리고 몹시 당황했다. 앞뒤로 말이 달려들고 있고 어딜봐도 서로가 적인데, 그냥 빠져 나오면 의외로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구두굽을 부딪치려는 순간이었다.

“하.”

그 순간 두려울 것이 없었다. 내게 달려오는 자가 석궁을 들고 있든, 마법을 쓰든, 검을 쓰든, 나는 정말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내 앞에 선 자가 칼을 크게 휘두르더니 나를 가볍게 안아 올려 그의 뒤에 태웠다. 칼에 맞은 자의 말이 발버둥쳐 탄 자를 떨어트리는 것을 보고서 나는 말에 나를 올린 자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르안.”

“여기서는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인데,”

말을 돌려 그가 진영으로 돌아가면서 내게 핀잔을 주었다.

“전쟁터에 온 사람치고는 행색이 가볍군. 칼이라도 들고 와야하지 않나?”

“전장에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요. 록진을 만나려고 한 건데, 이리로 구두가 데리고 왔어요.”

“이런.”

이리하는 더 이상의 대답을 하지 않고 말을 몰아서 진영에 도착했다. 그가 먼저 내리고, 나를 안아서 내려주려 할 때 막사에서 록진이 나왔다.

“…록진…!”

그가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다가와 이리하의 말에서 나를 내려 주더니 말했다.

“대체 여기는 어떻게 아시고… 그 구두를 빼앗아 왔어야 했는데.”

“당신이야말로 여기에 왜 있는 거예요? 전장에 간 지는 아예 몰랐잖아요.”

그러자 그가 나를 품에 정말 우겨넣듯이 하고 내 머리를 꽉 움켜줬다. 조금 아팠지만, 그의 품이 좋아서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를 안았다.

“…내 앞에서 지금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이리하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나는 록진에게 안긴 채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배실, 웃으니 그가 얼척 없다는 듯이 날 보더니 결국은 웃어줬다. 록진이 나를 아주 조금 떼어내더니 약간 민망한 얼굴을 하고 오르안에게 예를 취했다.

“뭐 여러가지 잔소리를 하고 싶지만, 그건 록진이 할 테고… 30분정도 줄테니 그 안으로 정리해. 그 후에 작전 재개한다.”

그렇게 말한 후에 만나서 반가웠네, 라고 담백한 인사를 한 이리하는 자신의 막사로 들어갔다. 그가 돌아가고 난 이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텁텁하게, 우리의 입이 두서없이 막혔다. 서로 할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서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 모든 상황이 몹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보고 싶었습니다.”

“알아요.”

겨우 꺼낸 말이라는 게, 이것뿐이었다. 알아요. 좀 더, 다른 말을 꺼낼 수 있지 않을까. 나도 보고 싶었다든가, 왜 여기에 있느냐라든가. 혹은, 혹은….

“다치지는… 않았어요?”

“멀쩡합니다. 아가씨는… 방학 잘 보내셨습니까?”

“네, 그럭저럭….”

그리고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잘 해볼 거라고, 잘 할 수 있을거라고 말했던 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는데. 내가 오켈뷔르에 있었을 때 당신한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여기에 서있고, 내게는 또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

“머리를 자르셨네요.”

“…아. 사고가 좀, 있어서.”

우리는 어째서 이렇게 서로를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걸까. 만나지 못했을 때 느끼지 않았던 외로움이, 만나서야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 어째서일까.

“…왜, 여기에 있어요?”

그제서야 우리의 본론이 나왔다. 전장 한 가운데에서, 나는 후드로 가려져 있고 당신은 그래서 나를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그래도 록진과 나는 닿아있었다. 머뭇거리면서 내민 손을 그가 잡아주었다.

“…형님이, 위독합니다.”

“….”

그 때의 바람은 무거웠다. 발끝에 채이는 바람은 그 누구의 유령이었던가.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끝을 낼 수는 없는데.

나는 아직도, 당신과 함께 해야할 시간이 많았다. 하고 싶은 게 많았고, 함께 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러면, 우리는.”

목이 탔다. 깔깔한 모래가 내 목 안에 침잠하듯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내 목소리 같지 않은 아득한 목소리가 나왔다.

“우리는… 어떻게 되나요?”

마치 그는 답을 아는 사람처럼 그렇게 물었다. 그도 답을 몰랐던 것이 분명한데도, 나는 언제나 그라면 모든 답을 알 것 같았다. 내게 있어서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바라지 않던 답을 내주었다.

“형님이 살아남으시면….”

그리고 인간은 어째서 최악을 상상하는가.

“만약에, 반대라면요?”

“…….”

당신과 함께 하는 미래를 꿈 꾼지는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아니 우리는 좌절했고, 실패했고, 한 번 헤어진 사람들이었다.

“그 때는….”

나는 그의 입에 내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저 대고만 있었다. 닿은 것은 당신의 입술인데, 어째서 이렇게나 멀게 느껴질까.

“약속해요.”

그의 입술에서 내 입술을 아주 천천히 떼어내고, 나는 숨을 몰아 삼키면서 그렇게 부탁했다.

“나랑 약속해요, 록진. 만약에, 형님이 돌아가신다면… 그 때, 단 한 번이라도 요한이 가문을 잇는 걸 생각하겠다고.”

“그렇지만, 요한은…”

“요한은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입양이라든가… 방법은 찾을 수 있어요, 록진.”

그가 강 바닥을 바라보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난 진심이었다.

“단지 아이가 없기 때문이라면, 지금까지 온갖 불임이었던 부부들은 어떻게 가문을 이어왔겠어요. 록진, 부탁이에요.”

한 번만, 고려해달라고. 나는 그렇게 애걸했다.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고려해보고도, 우리에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때는.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그를 껴안고 속삭였다.

“내가, 당신을 아주 많이 좋아해요. 아주 사랑해요.”

이것밖에 못해주는 내가 미안하기도 했고, 이렇게라도 함께하고 싶어하는 우리가 예쁘기도 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세게 안아주었다.

“항상…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필 당신이었기 때문에, 행복하고요.”

“나도 그래요.”

다음에 또 보자,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다음을 기약했다. 나는 괜스레 몇 번이고 돌아보게 되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해주고, 구두굽을 부딪쳤다.

“아느완의 사거리.”

환한 빛에 괜스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미래를 약속하고, 새로운 방향을 보여줬다.

다른 가능성을 봐놓고도 나는 어째서 이렇게 우울하고, 마음이 안 좋은 건지 몰랐다. 이유도 알 수 없는 씁쓸함을 겨우 갈무리하고 샤펜가로 향했다.

제프리가 헤이텔은 일을 잘 하고 있냐고 묻기에 대충 대답해놓고 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었다. 세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채 한 시간도 함께 하지 못했다.

좀 더… 오래 있을 것을.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모르는 척, 눈치 없는 척. 그 자리에 좀 더 버티고 있을 걸.

“아가씨, 옷 다 갈아입으셨어요?”

“아…응. 나갈게.”

탈의실에서 나오자마자 애니가 얼굴색이 나쁘다며,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별 일이 없었다고 대답하면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맘에 자꾸만 담아두시면 아파요.”

“…고마워, 애니.”

웃어주고는 방을 나서 여자를 만나러 갔다. 물론 말도 안 통하겠지만 그래도 시도해 볼만은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손님 방에 따로 그녀 혼자 내버려뒀더니, 상당히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여자는 방어적으로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

일단 말이 없지만 확실하게 반응하고 있는 걸로 봐서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어쨌든간에 구해준 것이 나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적어도 공격하지는 않을 거고. 웃으면서 내 소개를 계속했다.

“저는 라시아 클레이만 샤펜이라고 해요.”

“저는 라시아…?”

“라시아.”

검지로 나 스스로를 가리키고 말했다.

“라시아, 클레이만 샤펜. 라시아.”

“라시아.”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가리키자 그녀가 꽤 자신있는 말투로 말했다.

“혜현. 안 혜현.”

이름의 느낌이 록진과 비슷했다. 혹시 록진 쪽에서 왔나? 그런 거라고 해도, 대륙어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할텐데. 혹시 말도 안 되는 깡촌에서 올라온 건가?

“음… 혜현. 갈 곳은 있어요?”

그녀는 전혀 못 알아들은 눈치였다. 전혀 언어가 안 통하는 상대와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라 나도 많이 당황한 상태였다. 일단 알 수 있는 것만 알아두자 싶어서 나이를 밝혔다.

“열여덟.”

그러자 그녀가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끙. 손으로 열개를 만든 후, 팔을 만들자 그녀가 아! 하더니 자기도 똑같이 했다.

“스물…일곱.”

결혼하고도 남았겠네. 아니, 애초에 왜 노예상한테 팔린 거지? 이종족인가? 일단 가야할 곳이 있다면 아등바등할텐데 그런 것도 없고, 기본적인 형식인 샤펜저택도 낯설어하는 걸 보니 뭔가 보통 일을 겪은 건 아니겠구나 싶었다. 일단 이 정도면 됐다 싶어서 나름대로 안정을 취하는 게 좋겠다는 둥의 몸짓을 해보였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을 나서서 난처해하는 가신에게 일렀다.

“기왕이면 선생을 빨리 구하는 게 좋겠네요. 좀 묘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저기, 그것도 있지만…. 이종족 사이에 애가 하나 껴있습니다.”

“인간이에요?”

“네. 덤 같은 걸로 넘겨주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일단은 애가 똑똑하긴한데, 부모도 없고 고향도 없는 모양이더군요.”

“… 저 안의 여자랑 혹시 아는 사이예요?”

“팔려서야 알게 됐다고 합니다. 적당히 친한 모양이던데요.”

“그럼 같이 붙여둬요. 식객 두 명 있다고 샤펜가가 망할 리는 없으니까. 대신 도망가지 않게 잘 감시하세요. 먹을 것 잘 주고, 잠도 푹 자게 하고요. 원하는 건 가능한 한 해주세요.”

“네, 아가씨.”

대충 처리하고 나서 제프리가 부른다기에 내려갔더니 산만큼 쌓여있는 서류로 그가 나를 인도했다. 이건 다 못한다고 말하자 할 수 없는 시련은 신이 내려주지 않는다는 헛소리를 해서 그럼 제프리가 하라고 아웅다웅 다퉜다.

결국 집무실에 가 앉으니 그가 과자와 차를 잔뜩 내오고서는 문을 잠궜을 때는 정말로 어이가 없었지만, 방 안에 혼자 남아있자니 생각도 정리할 수 있고, 어쨌건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록진의 형이 죽은 죽지 않든… 관계의 결과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므로.

============================ 작품 후기 ============================

결말이 보이는 연애란 참 슬프죠. ㅇㅅㅇa 는 연애 안 해봐서 잘 모르겠네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여러분 참. 내용은 안 달라졌는데, 좀 요약본?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하셔서 59화의 노예시장 해결건은 좀 바꿨습니다. 대화가 들어가구.. 그냥 별 거 없어여. 수정했다고 알림드립니당.

이 앞으로 넘 달라져가지고 쓰는게 고역이네요.. 리메 죽어라... 2년전의 나 죽었으면 ^^ 선추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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