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시아-60화 (60/113)

60화

그 뒤로는 뭔가 특별한 일이 없었다. 지나치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서 무사히 타딘을 팔아넘기고 관람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적당한 가격으로 한 명 사면 증인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이종족을 고르는 와중이었다.

갑자기 직원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헤이텔과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폭발음이 들렸다.

“꺅!!!!”

저 비명을 필두로 여기저기서 욕설과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곧 중앙 무대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헤이텔, 아는 거 있어요?”

“전혀 모르겠습니다. 일단 일이 틀어진 것 같으니 빠져나가죠.”

그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와 헤이텔은 중심 근처에 있어서 더욱 위험한 상황이었고, 실내의 아수라장에서 우리 둘 모두 당황했다. 다들 가면이고 뭐고 떨어트리고 달려가는 중이라 나는 가면을 오히려 단단하게 고쳐서 매고 헤이텔을 불렀다.

“헤이텔.”

“예, 왜요?”

뛰어가면 오히려 위험할까봐 빠른 걸음으로 가는데 졸부 치마가 얼마나 무겁던지, 이가 절로 갈렸다. 헤이텔이 고개를 돌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누군지 파악해서 보고서 나중에 올려요!!!”

“아가씨는 제가 만능으로 보이십니까!!!”

“뭐라도 훔쳐서 나중에 추적하면 되잖아!! 도둑이었다며!!!”

욱해서 반말로 소리를 질렀는데도 헤이텔은 시비를 걸지 않았고, 오히려 아, 하는 얼굴을 했다.

“그건 할 수 있죠.”

그렇게 말하더니 뒤로 쏙 빠져서 정신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뭘 손짓을 열심히 했다. 헤이텔이 이렇게 훌륭한 도둑이길 바란 적이 없었는데. 뒤에서 불이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폭발에 불이 빠져서야 쓰나. 슬슬 진짜로 목숨의 위협을 느껴서 이제부터는 뛰어서 극장을 빠져나왔다. 극장은 거의 반쯤 불타고 있었고, 빠져나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마차들이 줄줄히 서있었다.

나 빠져나온다고 몰랐는데,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타딘이. 겨우 숨을 고르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아까와는 수준이 다른 굉음이 들리는 동시에 건물이 무너지는 게 눈으로도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무너지는 모습에 말을 잃고 멈춰서있자 헤이텔이 나를 확, 하고 잡아채서 물었다.

“아가씨, 다친 곳은 없으세요?”

“아, 멀쩡해요… 헤이텔은요?”

“저도 멀쩡해요.”

“다행이다, 그럼 금품은요?”

“…그걸 먼저 물어보시지 그러셨어요. 멀쩡해요. 적어도 너덧명은 증인석에 세우실 수 있겠네요.”

헤이텔은 어느 멍청한 놈이 가문의 인장까지 떨구고 갔더라고요, 라며 킬킬거리고 웃었다. 그 때 헤이텔과 나를 지나쳐서 몇몇이 급하게 건물 쪽으로 뛰어갔다. 저 멍청이 들이 분명 다시 볼 멍청이들이겠지. 얼굴을 기억해뒀다.

“그럼 극장 내부에 어떤 일이 발생한 건지는 모르는 거죠, 현재 상황으로는?”

“전혀 모르겠네요. 일단 화재가 좀 진압되어야 파악이 가능할 것 같아요.”

무너져내리는 극장을 답답한 마음으로 보고 있는데 뜬금없이 극장내부에서 강한 물이 뿜어져 나왔다. 나와 헤이텔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불 때문에 도망쳐 나온 거 아니었나…?"

“제 기억에도 그렇기는 한데 말입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조금씩 건물 쪽으로 다가가고 있는데 갑자기 창문이 툭, 하고 열리더니 곧 펑, 하는 폭발음이 들렀다. 깜짝 놀라서 헤이텔과 나는 다시 한참 멀리로 도망을 쳤다.

“…방금 뭐였죠?”

“창문을 열어서 그런 것 같은데요…”

“아니, 그것보다는,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거잖아요?”

“물줄기가 나올 때부터 사람은 있었죠. 그보다 머리카락 끝이 조금 그슬리셨네요.”

“…나중에 조금 쳐내야겠다.”

일단 그러면 출구를 찾는 걸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건물을 나름대로 뒤지기로 했다. 어설프게나마 헤이텔이 왼쪽을, 내가 오른쪽을 살피고 있을 때 헤이텔이 외쳤다.

“아가씨!!! 이 쪽으로 나와요!!”

당장 뛰어갔다. 가장 첫 번째로 나온 것은, 불에 약간 그슬렸다 뿐, 평범하게 생긴 여자였다. 나이는 20대 후반으로 보였고 굉장히 특이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내가 알기로는 어느 곳의 복식도 아니었다. 일단 피부색은 밀색으로, 중남부계의 사람 같았지만.

“…저기, 혹시 타딘 못 봤나요?”

그녀는 내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한 표시를 해보이고는 그냥 내 옆을 지나쳐갔다. 무례한 사람이네. 조금 불쾌해졌지만 그녀 뒤를 따라오는 타딘과 어린아이의 모습에 금세 그녀를 잊었다.

“타딘!!!”

“죽는 줄 암. 불 망함. 우리 불 싫음.”

하긴 새니까 불이 무섭기도 하겠지. 그가 안고 있는 아이는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초록색 머리카락을 가진 귀여운 조족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인사했다.

아이는 오들오들 떨면서 타딘의 품에 꼭 안겨있었다. 타딘의 뒤에는 엘프 몇과 드워프 몇이 따라오고 있었고, 다들 상당히 아연한 얼굴이었다.

나는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말했다.

“라시아 클레이만 샤펜입니다. 여러분을 구해드리러 왔어요.”

그들은 모두 경계하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사람이기 때문인지, 제일 먼저 나온 여자의 뒤에 쪼르르 서서 당장이라도 날 공격할 것처럼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한숨을 쉬고 말했다.

“베노암 국에서 파견 나왔습니다. 판닐과 협조를 했다는 것은 이쪽의 사람이 증명할 거예요. 헤이텔.”

헤이텔이 판닐의 증표를 꺼내서 건네주었다. 그들 모두 확인한 후 안심되었는지 내게 조금씩 다가왔다.

“정확한 정황은 나중에 듣기로 하죠. 일단…”

이들을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물었다.

“혹시 마법사 없으신가요? 정령사라도.”

그러자 그들이 고개를 젓더니 다리를 내보였다. 하나같이 굵은 무언가를 발목에 달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말을 막고 있는지 그들은 입만 뻐끔댈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마 저것 때문에 마법도, 정령도 다룰 수 없는 듯 했다.

“그럼 헤이텔, 잠깐 기다리고 있어. 내가 마차를 잡아올 테니까.”

나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달려간 후 오페의 구두를 써서 마차가 모여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마부들은 좀 놀란 것 같았지만, 내가 마차 5대가 필요하다고 말하고는 돈을 꺼내자마자 아무 말하지 않고 마차를 몰았다.

겨우 도착해 그들을 모두 태우고 이동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간 후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샤펜공작가로 보냈다. 헤이텔을 같이 보내 사정설명을 시키기로 했다.

타딘과 아이는 따로 빼뒀고. 타딘과 아이와 함께 여관으로 돌아오고 난 이후에 구속구를 풀기 위해 샤펜가로 가는 것이 어떻겠냐 물었지만 타딘은 엄격하게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날개 곧 돋음. 들키면 망함.”

“그러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방법이라도 있으세요?”

그러자 타딘이 아무렇지도 않게 뚝, 하고 자신 발에 있는 구속구를 풀어버렸다. 아연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 나는 게 있어서 뚱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그러면 거기서 다른 쪽들도 풀어주면 좋았잖아요.”

“우리는 전설의 종족. 다른 자가 한다면, 할 필요 없다.”

그 냉정하지만 합리적인 말에 입을 그냥 다물었다. 사실 샤펜가에서 풀 수 있는 것을 굳이 그가 풀어줄 필요는 없었다.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닌데 제 능력을 드러내서 일족의 안위를 위태롭기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니까. 그는 훌륭한 족장이었고, 나는 그래서 그를 원망하는 어리석은 짓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나저나, 일단 설명 좀 해주실래요?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그러자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자리에 앉았다.

“너 나 팜. 서류 작성 끝. 마력 측정하고 족쇄 채움. 내 힘 금지 못함. 마력 아님. 거기 있는 자들에게 알 물음. 알 훌륭히 태어남. 겁에 질려있는 것 빼고는 정상. 애를 챙기고 있음. 한 남자가 갑자기 그 여자를 데리고 옴. 그 여자 정신 없음. 경매 시작해서 한명씩 나감. 그런데 그 여자가 눈을 뜸.”

“잠깐만요, 그 여자가 누구에요?”

“제일 처음 나옴.”

“아!”

“눈 뜨더니 여기가 어딘지 묻는 눈치였다. 인간, 보통 노예. 마력이 측정해봤더니 전혀 없는 듯해서 그냥 집어 넣은듯함. 근데 이 쪽 말을 못함.”

“…어, 대륙어를 못한다고요?”

“못하는 눈치. 혼란 그 자체. 노예 대충 눈치 챈 듯. 그 여자 갑자기 불을 일으킴. 불 막 질러댐. 아기새 망함. 걔 말린다고 나는 더 망함.”

마력을 쓰지도 못하는데 그런 힘을 만들어 냈다고?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나중에 따로 한번 만나봐야겠다.

“이쪽 말을 전혀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다른 말을 쓰는 거예요?”

“희한한 말 씀. 난 못 알아들음. 난 대륙어 어설픔. 다른 소수부족 말은 망함. 두 번 망함. 불 잘 못 다룸. 덕분에 더 망함. 아기새 기겁. 다들 당황하고 소란이 위에서 시끌시끌. 그 여자 더더더 당황해서 다짜고짜 물 폭발. 덕분에 이차 폭발. 망함. 그래도 불은 좀 꺼짐. 그리고 출구 찾아서 나옴.”

일단 일은 어떻게 일단락된 것 같았다. 뭐 이것저것 틀어지긴 했지만 일단 관련된 손님들을 잡을 수 있을테니 그걸로 묶다보면 관련자가 밝혀질 거고, 줄줄이 엮어지겠다 싶어 솔직히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떻게든 엮을 수 있긴 했으니 일단은 안심이다.

“일단 잘 됐네요, 어쨌든.”

“나도 그렇게 생각. 그럼 우린 돌아감.”

네에- 하고 손을 흔들다가 말했다.

“제가 타봐서 아는데 그 바구니는 사람이 탈만한 게 안 된다니까요. 오늘 마차 보셨죠? 하다못해 그런 재질로라도 만드세요.”

“바구니 충분. 그런 재질 무거워서 못 듬. 아무리 너라도 돼지로 됨. 망함.”

그냥 몇 명이서 더 들면 되잖아… 하지만 사실 이 일 이후로 그 부족에 더 이상 손님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내려오면서 깨달은 건데, 보통 사람이 함부로 갈 곳이 아니었으므로. 능력이 있는 놈이 손님으로 찾아가겠지, 뭐.

“…사례함. 같이 감?”

“…사례 안 하신다면서요, 전에?”

“뭐 어쨌든 너 일 망함. 미안함 조금 있음. 원한다면 사례.”

나쁠 것 없겠다 싶어서 받겠다고 하자 그가 내게 아기새를 안기더니 말했다.

“그럼 얘 좀 엘큄 옆으로 이동한다.”

“…저기요?”

그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너 구두 이동 봄. 아기새 예민. 함부로 업고 다니기엔 애가 작음.”

“…절 지금 이동수단으로 이용하는 거예요?”

“사례함.”

“……타딘?”

“사례 함.”

한숨이 푹 나왔다. 결국 이동수단 값으로 사례하겠다는 말이잖아요. 어쩔 수 없이 안은 아기새는 정말, 정말 정말 작았다.

커봤자 얼마 안 되는 아이니까 작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작을 줄이야. 좀 세게 만졌다가는 진짜 부서지겠네. 또르르, 하고 낯도 안 가리고 방싯방싯 웃는 아기가 귀엽기도 하고, 난처하기도 하고….

“그럼 나 알아서 감. 너는 제대로 아기새 챙긴다. 안 하면 망함. 사례 망함. 너도 망함.”

“그럼 저한테 맡기지를 마세요…”

그는 못 들은 척 하더니 여관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아기새를 조심스레 껴안고 구두굽을 세 번 부딪히고 말했다.

“엘큄의 옆.”

============================ 작품 후기 ============================

연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