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다음 날 아침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나를 본 오를레아가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내게 당장 침대로 돌아가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누워봤자 오지도 않을 잠인데, 그냥 차나 마시면서 오를레아에게 황궁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물어보기나 하자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못마땅한 얼굴을 했지만, 내가 우울한 생각에서 빠져나와야한다고는 생각했던지 순순히 얘기를 해주었다.
“안내하러 나온 시종이 급했는지 아니면 초보였던지는 모르겠는데 길을 잃었어.”
무슨 이런 등신같은 일이. 내 어이없다는 얼굴을 보고 오를레아도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그 분 만나는 날에는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거 같기도 하고… 무슨 이런 경우가 있나, 황당해서 한참 거기 서 있었더니 시종이 미안해서 죽으려고 하는데 둘 다 해결책도 없는 상황이고… 그러고 한참을 있었더니 황자전하께서 찾으러 오시더라.”
“…뭐야, 그 로맨스 소설같은 전개는. 공주님 구하러 오는 왕자님 이야기 같잖아.”
그 말에 오를레아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얼굴 붉히라고 한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그녀가 얼굴을 붉혀서 좀 소름이 돋았다.
“왜, 왜 얼굴을 붉히는데? 그 분이랑 너 무슨 일을 한 거야?”
오를레아가 질색하는 얼굴로 아무 일도 없었어! 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찻잔으로 얼굴을 가렸다.
“…너 서로 좋아하는 거지? 너만 좋아하는 거 아니지?”
그녀 답지 않은 순진한 반응에 좀 걱정이 되어서 물었더니 오를레아는 아, 그런 거 아니라고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내게 말했다,
“별 일 없었어. 그리고, 그… 일단 내가 생각하기로는, 우리는 서로에게 호감이 있어.”
“너 혼자 홀려서 착각하는 거 아니지? 너 이렇게 순진한 반응 하는 거 처음봐서, 나 불안해 죽을 거 같아.”
“누굴 이런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확실해. 막, 엄청 좋고… 그런 건 아니더라도, 호감이 있어. 확실해.”
도대체 황자가 내 친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에 시덥잖은 짓을 했다면 가만 두지 않으리라. 춤 출 때 발이라도 밟아 줄 거다.
“왜 그렇게 못 믿는 얼굴을 해! 나 그렇게 이 부분에 신뢰도 없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뭐어.”
“좀 믿어주라. 진짜 쌍방향이야.”
뭐 내가 사실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이 쪽이 이렇게나 열심히 쌍방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럴 리가 없어! 하고 나설 일도 아니니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기로 하고 물었다.
“그나저나 웬 오페라야?”
“아 그거. 너 혹시 오페라의 유령 알아?”
“오페라 가수가 스토커에게서 벗어나는 이야기?"
“…음, 뭐, 그렇게 보자면 그런 이야기지만…."
“그런데 그건 왜?”
“나랑 그 분이 취미가 비슷하거든. 고서적 좋아하시고, 오페라 그런 거 좋아하고. 그래서 이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같이 가지 않겠냐고 말을 꺼내주셔서 그러겠다고 했어. …만약에 그 분이 제안 안 해주셨다면, 나 혼자서라도 보려고 했어!”
그, 혼자서라도 보려고 한 부분이 그렇게 중요한가. 하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고 오를레아에게 중요한 질문을 했다.
"네가 간다고 한 이후에 날 초대할거라고 했어, 아니면 샤펜양과 갈 거라는 말을 하시고 난 이후에 가겠냐고 물었어?"
“당연히 나한테 먼저 물어보셨지. 네 이야기를 먼저 물었다면, 그냥 정치적인 약속이라고 생각했을 거고 이렇게 기뻐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묘하게 안심이 됐다. 그럼 이 정도는 생각해야 철저하기 그지없는 내 친구지.
“그보다 라젠 경은?”
"사절사 겸 온 거라 일단 황궁에 갔어. 북방 민족들과 전쟁하는 걸 알려야 하니까."
“그렇구나. 그 이후로, 음… 이야기는 해봤어?”
“…응. 해봐야지.”
그러나 나올 말은 모두 정해져있었다. 우리는 이제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와 마주쳤을 때 나는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우리는 서로를 대했다. 그렇게 하면 문제가 전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나는 그에게 내가 오페라에 초대 받았음을 이야기하고, 함께 가기를 권했다.
그는 알겠다고 했고, 그래서 아느완의 첫 우리의 데이트는, 오페라를 감상하는 게 됐다.
오페라는 규모가 큰 만큼 엄청난 투자자금이 필요해서 각국의 수도에서나 가끔 열리는 큰 행사였다. 자연히 공연의 가치가 높았고, 각본이며 배우의 질도 높은 것으로 유명했다.
록진은 베노암제국의 옷을 입은 채 우리와 합류했다. 황자가 오를레아를 신경 쓰는 것은 너무 자명해서, 과연 이 남자 눈에 내가 제대로 보일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말 이 사람이, 오를레아를 선택할 수 있을까. 오를레아를 선택한다면, 그가 황제가 되기 위해 누구보다 강력하게 쓰일 세력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일텐데. 내가 바랐던 것이 너무나 큰 일이 되어버려서 조금 당황했다.
나는 그저, 그녀가 적당한 사람과 만나서 파혼을 하기를 바랐을 뿐이었는데…. 오를레아의 선택이 이렇게 될 줄이야. 하지만 한 편으로는, 세상 어느 한 켠에는 좋은 신이라는 것이 있어서, 나를 오를레아와 만나게 해, 그녀를 이곳으로 이끈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황자와 그녀의 연을 닿게 해준 것이라고….
황자가 함께 오페라에 가니 전용부스를 주어서 그 점은 좋았다. 나란히 앉아 있다가 문득 황자의 시선이 록진에게 닿았다. 록진은 담담하게 황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그는 록진이 마음에 그리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오를레아와 황자는 한참을 내용을 설명하는 것을 읽고 있다가 둘이서 툭닥거리기 시작했다. …뭐, 시작하는 연인을 보는 것은 언제나 참 귀엽고, 마음이 따뜻…해…지지는 않고 빈정이 좀 상했다. 어휴 눈꼴셔. 아무튼 한참을 둘이서 소곤소곤하더니 황자가 두 손을 장난스레 들더니 말했다.
“알았으니, 그만하지. 휴전, 휴전. 어떤가?”
오를레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겼다! 라는 얼굴을 하더니 몹시 뿌듯한 표정으로 그의 손등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두어 번 톡톡, 쳤다. 천천히 그녀의 손이 그녀의 무릎 위로 돌아가는 것을, 황자가 낚아채 자신의 손 아래에 두었다.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데도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오를레아는 황자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고, 황자는 스스로 좀 놀란 것 같더니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굳게 다잡았다.
어딘가에는 좋은 신이 있어서… 좋은 구두처럼, 우리를 좋은 곳으로 이끌어준다고 나는 믿었다. 가만히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린 록진을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막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악단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래, 어쩌면 그에게도 나에게도, 그저 좋은 결말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 * *
오페라가 성황리에 끝나고, 막 연인으로서의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오를레아와 황자전하에게 따로 시간을 주고 싶기도 한 동시에, 우리 둘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각자 따로 저택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와 록진이 단 둘만 거리에 남은 상황에서, 록진은 내가 감기에 걸릴까 염려스러운지 코트를 벗어서 내게 입혀주었다.
"괜찮아요. 록진. 춥잖아요."
그가 미소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왜 이렇게 이 사람은 다정할까. 우리가 갈림길에 선, 이 시점에도 연인의 추위를 걱정해주는 당신의 모습이 오히려 원망스러웠다. 만약의 길에 대비할 필요가 없는데도….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당신이 내게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난다면. 나도, 그도 서로를 선택할 수 없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지금 나는 어떤 말을 해야 옳을까.
“사랑해요.”
그의 코트를 입은 채, 나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어쩌면 운명이 갈라놓아서, 우리가 더는 함께 할 수 없고, 시간이 흘러 당신이 나를 잊어버리고, 나도 당신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그래도 이 순간, 당신과 함께 한 순간에 나는…
“사랑해요.”
다시 한 번 말하는 순간, 눈에서 유리 구슬같이 차가운 것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만약 이런 결말을 알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래도 그 때 그 순간 당신을 선택했을 거야. 용기를 내서 당신에게 말을 걸었을 거고, 당신의 손을 잡았을 거야.
몹시 차가운 공기가 내 뺨에 닿아 온기를 가지고 가버렸다. 붉어진 볼로 그런 말을 하는 순간, 록진은 나를 바라보다가 내게 손을 뻗었다. 그가 내 팔을 잡아 당겼고, 다음에는 허리를, 다음에는 내 세상을 잡아당기듯이 나를 끌어안았다. 당신을 잡았기 때문에 내 인생에 벌어진 일들을 잊을 수 없을 거야.
“사랑합니다.”
당신이 함께 해서 정말로 좋았어. 당신이 나를 당연히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방심도, 그렇게 나를 믿게 했던 당신의 믿음도,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아.
“미안해요. 내가- 당신을 따라가지 못해서, 그런 미래조차 당신이 기대하지 못하게 해서….”
그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나무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그저 지켜주어야 하는 어린아이 이상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이 의지해주어서… 내가 얼마나 구원받았는지 모릅니다, 라시아. 당신이 나를 뿌리 내리게 해주었어요. 당신이 의지해주어서, 나는 더 강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와 맞닿은 뺨에서, 그의 눈물인지 나의 눈물인지 모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그에게 조금은, 아주 조금쯤은 도움이 되었음을 말해주는 그의 말이 기뻤다. 기쁜 동시에, 너무나도 슬퍼서…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 순간에 와서야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는 걸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토록 많았는데. 나는 그가 나를 아침마다 데려다 주었을 때, 그 벅차고 따뜻한 감정을 느꼈을 때 그에게 말했어야 했다. 내가 외로워 밤에 그를 찾아갔을 때 우는 나를 안아주었던 그에게, 그 순간 용기를 냈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저와 같은 사랑과 삶을 함께 하겠다고 해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고독마저 사랑할 수 있게 하십시오. 당신이 어딜 가시든, 함께 하게 하십시오."
지금에서야, 말이 안 되는 소원들을 우리는 빌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말해주십시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잖아요."
헤어지는 연인은 그제서야 내게 웃어주며 키스했다. 눈물 같은 눈들이 하늘에서 우리를 가만이 덮기 시작했다.
“……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는 내게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내 오른속 약지에 끼워주었다. 거짓말처럼 내 손에 꼭 맞는 반지의 모습에 나는 울면서도 웃었다. 예뻤다. 정말로 예뻤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까지 만들 수 있을 줄 몰랐습니다. 나를 이렇게… 다정한 사람으로, 어른으로 만들어 줄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몰랐다. 당신이 나를 지켜주겠다고 했을 때, 내가 또 그토록 어리석게도 영원을 바라게 될 줄은 몰랐다. 당신의 곁에서 커가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서- 당신을 포용해줄만큼 크고 싶었는데. …그랬는데.
“울지 마세요, 아가씨.”
나는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 얼굴을 감싸고 첫눈이 온 베노암의 길거리에서, 내 첫 연인과 이별을 했다.
“울지 마, 라시아.”
그러나 나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록진은 떠나는 날,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마치 영원히 있을 것처럼, 내게 약속을 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나를 영원처럼 좋아하고 사랑해주었던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고, 그에 나는 기뻤으므로.
우리는 만약 록진의 형님이 살아돌아온다는 경우에 대해서도, 죽어서 돌아온다는 경우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이별이란 것은, 앞으로의 일과는 관계없이 다가오는 것이니까. 그는 가족을 버리거나 책임을 외면할 각오로 나를 사랑하지는 못했고, 나 또한 그랬다. 그러니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저 단순하게, 그렇게… 그와 나는 헤어졌다.
내 사생활과는 별개로, 황자는 샤펜공작가의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오를레아와 만나기 위해선지 나와 만나기 위해선지는 정말 빤했다. 예의상 앉아있긴 했지만, 책이라도 읽고 있어도 둘 중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을 정도라 어린 연인의 행복이 불안해보이기는 했지만,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리 반길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느 샌가 샤펜가는 다시 중립 위치인가, 하는 말이 나올 수준이 됐으며 결국 나는 샤펜공작에게 불려갔다.
어떻게 된 일이냐는 그의 말에 나는 버티다 황자가 오를레아에게 반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좀 했더니, 그는 눈썹을 슬쩍 올리더니 아무 말 없이 나가보라고 했다. 뭔가 잔소리나 실컷 혼날 것을 각오했는데, 의외로 얌전한 반응에 좀 놀랐다.
어쨌거나 둘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만큼, 둘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싶어서 밤을 이루지 못하던 나는 결국 틈만 나면 오를레아에게 쳐들어가 둘의 러브라인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오를레아는 계속해서 곤란하다는 얼굴로 버티기만 했고,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채로 시간이 휭휭 지나는 것에 불안해진 내가 결국 어느 날 방문을 걸어 잠그고 그녀에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 너 나한테 뭔가 숨기는 거 있지.”
내가 눈을 부라리며 한 말에 오를레아는 정말로 난처하고 당황한 얼굴을 하다가 내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말했다.
“뭐얼-?”
“뭐긴 뭐야. 네가 자꾸 나한테 말 안 해주려고 버티는 게 다 보이는데. 좋은 일이면 말을 안 했을리는 없으니까 남은 건 나쁜 일인건데…. 무슨 일인데 나한테 왜 말을 안 해? 나는 록진이랑 있었던 일도 다 말해주고, 그랬는데….”
자못 섭섭한 목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일단 멈추고 오를레아를 노려보니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머뭇거렸다.
“네가- 헤어지라고 할 걸 알아서.”
============================ 작품 후기 ============================
남친과 헤어진 라시아......... 그녀는 도대체 어디로 향하는가..!! 빠밤.
1인칭 시점인데 왜 여주한테 이입을 못하시지...이럴 때마다 작가는 츄우기.
보통 사람은 본인의 고난과 힘듬에 예민하지 않나요? 다들 남 생각 먼저 하고 사시나 ㅠㅠㅠㅠ 나만 이런가 ㅠㅠㅠㅠ 저만 제 감정에 더 예민하고 제 상처에 더 날카롭게 굴고 그런가요..?
스포 싫다는 분도 있고 머 .. 그러셔서 일단 진남주 관련내용은 후기에서 다 삭제했습니다..... 'ㅅ'...
빠른 연재가 싫으신가ㅠㅠ 싶기도 하고.. 요즘마음이 영 복잡하네요.. ㅠㅠ 죄송합니다 징징대서. 힘내겠습니다 ..!! (파이팅)슬슬 날이 많이 풀리네요. 좋은 하루 되셔요! >ㅅ<+ 둘의 대사 중 일부는 오페라의 유령 ost 중 라울과 크리스틴의 노래 가사 발췌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