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연참, 앞편 확인바랍니다 ! >
내 복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우리는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한 후에 파티장에 들어섰다. 나는 황자전하를 뒤로 하자마자 그녀에게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황자전하를 만난 기분이 어때?”
“초상화로만 본 인물이 실존한다, 에 대한 놀람과 초상화에서 미화를 엄청 시켰다는 배신감?"
냉정한 코멘트에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미화를 좀 시켰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꽤 미남이었다. 과연 황가의 엄청난 핏줄이랄까. 검은 머리카락의 냉정하게 생긴 그는 마치 소설에 나오는 왕자님 같았으니, 적당히 좋은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와, 냉정하다, 오를레아. 미화를 감안하고라도 잘 생기지 않았어?"
내가 일부러 그녀에게 말하자, 그녀는 애매하게 웃더니 말했다.
"뭐 그렇긴 한데… 그래도 바다같이 깊은 눈동자에 세상에 다시 없을 듯한 콧대를 가졌다는 묘사를 믿었던 나한테는 가슴 찢어지는 얼굴이 아닐 수 없어서."
순간 웃음이 터져서 부들부들 떨었다. 겨우 표정을 가다듬고 오를레아에게 말했다.
“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유쾌한 혀를 가진 여자야."
그녀가 감동받았다는 표정을 하더니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귀여운 뚜쟁이야."
우리가 서로를 향해 장난스런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어째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물빛의 눈망울이 애처롭게 아름답고 세상에 다시 없을 듯이 아름다운 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행동 하나하나 연약하고 아름답다는 묘사를 믿었던 나에게는 가슴 찢어지는 혀가 아닐 수 없군."
오를레아와 나는 뻣뻣한 몸동작으로 고개를 돌려 황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몹시 즐거운 목소리로, 하지만 비틀린 것이 빤히 티가 나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들으셨군요."
"아, 잘 들리던데."
그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주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후 말했다.
“제비 꽃 레이디라는 별명은 그대가 지어준 거지? 친구 사이의 우정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과찬이군.”
“안타깝게도 제가 지은 별명은 아니랍니다.”
“독사 같은 레이디라면 모를까.”
그의 말에 오를레아는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그에게 대꾸했다.
“진정 독사같은 제 모습은 보지도 못하셨으면서 쉬이 말씀하시는군요.”
이러다 싸우겠다 싶어서 재빨리 끼어들어 그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꽃다운 아가씨와 춤을 추기 꼭 좋은 곡이 흘러나오는군요, 저하.”
그가 내 말에 어깨를 으쓱, 하더니 오를레아를 바라보고 말했다.
"글쎄, 꽃 같은 아가씨가 춤을 추실 수 있으실지."
"아, 원래 독사는 춤을 잘 추니까요."
오를레아의 톡 쏘는 말에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더니 말했다.
"물어뜯기지 않도록 조심하겠네."
“그러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리고 둘은 홀 가운데로 나섰다. 오를레아가 무슨 마법을 부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연달아 3곡을 내리췄고, 내게 돌아온 오를레아는 춤을 춰서 약간 붉어진 얼굴로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내게 샤펜가의 힘이 중립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아주 정치적인 의도로 내게 황궁의 온실에서의 소풍을 제안했다. 나는 거절하고자 했지만, 그는 오를레아마저 초대했고, 나는 어쩔까하다가 거절하는 모양새도 나쁠 것 같아서 일단 좋다고 대답했다.
얻을 것을 얻은 그는 깔끔한 태도로 오를레아에게 인사했고, 오를레아도 그에게 미소로 답했다. 이번에야말로 그가 저편으로 사라지는 걸 확실히 확인한 후에 나는 오를레아에게 물었다.
“어땠어?"
“재밌었어. 내가 숨겨둔 힌트도 놀랄 정도로 잘 잡아내더라. 과연 황자전하, 라고나 할까. 센스도 있으시고, 농담도 잘 하고. 재밌었어, 정말로."
“너랑 저 분이 연애하면 나랑 정적이 되는 걸까….”
내 중얼거림에 오를레아는 깜짝 놀란 얼굴을 하더니 말했다.
“네가 불편하고 싫으면 가지 않을게. 너랑 배척하면서까지 벗어나고 싶지는 않아.”
그 말에 나는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제발, 날 생각해서라도 그 결정은 번복해주라. 내 친구 집에 놀러갈 때마다 고문당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아. 그 가금류랑 얼굴을 맞대야한다니, 그것도 친구 남편으로… 진짜 최악이야.”
그 말에 오를레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정을 내리고,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네 친구야. 애초에 내 본 목적은 널 그 끔찍한 가금류에게서 구해주려고 한 거야. 네가 선택한 상대가 내게 이용가치가 없는 사람이든 어떻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그녀의 손을 작게 두드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 스스로를 위해서, 한껏 이기적인 결정을 해도 좋아.”
어떤 형태든, 그녀와 나의 우정은 지속될 거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만약 그녀가 황자편에 서서 나의 정적이 되더라도, 어떻게든 우리는 친구의 형태를 지닐 수 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고, 그녀 또한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내가 정말로, 이기적인 결정을 해서 저 분과 이어지더라도…”
그녀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래도 우린 친구일거야,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너 내 마음 읽니?”
괜히 놀란 척을 하자 오를레아가 웃었다. 나는 잡힌 손에 꼭, 힘을 주었다.
파티가 끝난 다음 날, 황자에게서 오를레아와 나를 초대하는 초대장이 왔고, 나와 오를레아는 그 날까지는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와 만나기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당일이 되어 적당히 차려입고 집을 나서서 마차를 탔다. 대충 있다가 나는 일이 있다고 빠져나와야겠다, 뭐 그런 결심을 하고 황궁 앞에서 경비병에게 얼굴을 보이자 그들이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더듬더듬 내 신분을 확인했다.
“어, 레이디. 수십번쯤 이미 들으셨겠지만…"
"샤펜 공작님을 닮았겠죠, 알아요."
그들이 얼굴을 붉히고는 황급히 덧붙였다.
"예, 그렇습니다만… 상당히 다른 분위기가 나십니다. 아주, 어…."
내가 진하게 웃자, 점점 그들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오를레아가 나를 엄한 표정으로 보더니 나서서 이만 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잽싸게 문을 열고는 우리의 뒤꽁무니를 한참 바라보았다.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하며 시종의 안내를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뒤에서 급한 실갱이가 벌어지는 것 같았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자 샤펜가의 하인이었다. 의아해서 다가가니 하인이 말해달라고 하셨던 분이 오셨습니다, 라고 내게 말을 전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안절부절 못한 채로 시종을 기다렸고, 시종이 나와 오를레아를 안내하자마자 황자전하께 사죄를 빌면서 먼저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그는 내 조급하고 절박한 태도를 보더니 허락을 해주었고, 나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궁 밖으로 나와 마차를 타고 샤펜가로 달려갔다. 도착하자마자 거의 마차에서 뛰어내려 모자를 벗지도 않고 응접실로 달려갔다.
내 예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응접실에서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날아가듯 달려가면서 외쳤다.
“록진!!!”
속도를 전혀 줄이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가는 나를 강한 힘으로 끌어당긴 그는 이상할 정도로 나를 오래 안고 있었다. 내 머리를 한 손으로 꽉 안은 그에게서 무언가 나쁜 느낌을 감지한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록진?"
“신년을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라시아.”
이건 그렇게 심각하게 말할 일이 아닌데, 그가 너무 심각해서 나는 멍하니 그의 품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오르안께서 제 형님을, 정벌의 대장군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전쟁. 30년만 해도 북방의 민족과, 그리고 몬스터에 남자든 여자든, 전쟁에 참여해야했다. 예외가 없는 잔혹함의 시간은 그러나 지나갔는데…, 무신들에게 이는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나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저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게 되었습니다.”
친형을 전쟁에 내보내는 기분이 어떨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부드러운 손바닥으로 내 뺨을 매만졌다.
“형님이 돌아가시면….”
그러면, 우리는. 그리고 그가 말이 없었다. 요한은 동성애자였다. 즉, 그는 후계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만약, 만약 록진이 형이 죽는다면 록진은…
“록진은, 그러면….”
“저는 당신과 함께 할 수 없게 됩니다, 라시아.”
이별이 너무나 급작스럽게, 가깝게 느껴졌다. 우리의 사이는, 이렇게나 급작스럽고 이렇게나 당연하게, 언제라도 멀어질 수 있었던 사이였던가.
그와 있었던 안온함이 이렇게나 급작스럽게… 나는 그에게서 떨어졌고, 그도 나를 놓아주었다. 내가 아는 당신이 맞는지, 나는 당신이 여전히 좋아하는 그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사이에 강이, 너무나 큰 강이 급작스럽게 생긴 기분에 나는 당황했고, 그는… 나는 그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만약, 형님이 돌아가신다면.”
“그러지 않는다면, 괜찮은 거지요?”
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어째서 우리가 이토록 일어날 리가 없는 일에 떨고 있는 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건데, 어째서 이렇게 불안하고, 당신이 멀어질 것 같은가.
“그렇지 않으면, 그 때는….”
그 때는 괜찮은 거잖아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소매를 부여잡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아니 그와 나는 언제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영원을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만약 별 일이 없으면, 그러면 저는 당신의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 라시아. 내 가문을, 집안을 버리고 당신에게….”
나는 공작이 되고, 당신은 내 곁에서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건 우리가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은 없지만, 그러리라고 생각했던 당연한 미래상이었다.
“당신에게 오겠습니다.”
이렇게 이제야, 우리가 마주보고 미래에 대해 말하게 되었는데, 어째서 나는 이토록 버려진 기분이 들고, 당신은 이토록, 나를 멀리 두고 있는 걸까.
어째서일까.
* * *
그가 돌아왔는데도, 나는 행복하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오직 오를레아가 돌아와,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며 나는 멍하니 방 안에서 읽히지도 않는 책을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오를레아가 돌아왔고, 그녀는 오자마자 내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려고 내 방에 들어왔다.
“오를레아.”
“…너 얼굴이 왜 죽을 상이야? 있었던 일 얘기해주려고 왔더니, 나보다 네가 더 사연 있어 보이네.”
그런 말을 하면서 오를레아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대충 걸어두고 내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록진이… 나한테, 앞으로 계속 함께 하자고, 그렇게 말을 했어.”
그녀의 눈이 엄청 커졌다.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고 나를 바라보다가 약간 헛갈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랑, 애인…아니야? 좋은 소식 같은데, 왜 이런 표정을 짓고 있어?”
“북방민족의 정벌을 위해서, 오르에서 그의 형님이 장군으로 출정했어. 그래서, 만약 그 분이 돌아가시면….”
오를레아의 얼굴이 그제서야 굳어졌다.
“그럼 그가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파묻었다.
“록진은… 그 사람은, 뭐라고 해?”
“행복해 보이지는 않더라.”
내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그녀가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만도 하네. 형님이 전쟁에 나가는데, 살아나오기를 비는 게 단순한 가족애 때문이 아니라 가족에게서 벗어나 애인한테 가기 위해서,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좀 복잡해지지 않을까.”
맞는 말이었다. 나는 그가 어째서 처음 보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눈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연인이 사랑하고, 기쁜 존재에서 죄책감을 자극하는 존재로 변했을 거다.
“그리고 이런 말 하면 뭣하지만, 그거… 그렇게 말 한건, 이별 통보 아냐?”
그녀의 직설적인 말에 나는 손을 가볍게, 떨었다. 이불을 그러모아 쥐면서 나는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이라는 말은… 그럴 경우에는 너를 떠나겠다는 말이잖아.”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았다. 어딜보아서도, 그녀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그래도.
“어떤 조건이 없이 그저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이성적인 결론이었다. 맞는 말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가슴이 뜯겨나가듯이 고통스러웠다. 어쩌면 나는 바랐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심지어 믿었는지도 모른다. 무조건적으로 나를 지켜줄 거라고. 가장 괴로운 시기에 있어줬으니,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가 나와, 함께 있어 줄 거라고.
“맞는 말이야. 하지만 섭섭할 수 있다고 생각해. 순수하게 서로를 좋아하고, 그렇게 함께 해줄 거라고 기대한 거니까. 괜찮아, 라시아. 섭섭해 해도 돼.”
나는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우리의 간극을 느낀 것은, 단지 그가 한 선택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다. 만약, 만약 그의 형님이 죽고, 그가 후계자가 된다면.
그렇다면- 나 또한, 그를 위해 공작위 자리를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 또한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없었음이, 우리 사이에 그토록 큰 강을 만들어냈으리라.
“아 맞아, 황자전하께서 함께 오페라를 보러 가자고 하시던데.”
내 기분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오를레아가 애써 화제를 돌리기 위해 말을 했다.
"오페라? 너만?"
“아니, 우리 둘 다.”
“아… 그래?”
“응.”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내 옆에 앉아서 내 어깨에 살짝, 얼굴을 기댔다. 황자가 무엇을 위해 오페라에 나와 그녀를 초대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분석하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도 그의 이유가 있겠지.
…모두가 그렇듯이, 이유가.
이별통보를 담은, 미래를 약속하는 말에 나는 그 날, 밤을 새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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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했습니다! >ㅅ<
음.. 록진의 미래가 여기서 터닝해서 ㅎㅎ 빨리 쪄오고 싶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