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연참. 앞편 확인하세요.
* * *
어린애처럼 울고 나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자 부끄럽기도 하면서도 몹시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었기 때문에 올 수 있는 무력감을 건강해진 록진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그렇게 좋고 편했던 시간은 유난히 빠르게 흐른다.
벌써 2주가 지나, 아쉽게도 사관학교 생들이 돌아가는 시기가 됐다. 마지막으로 학교 강당에서 해산식을 끝마치고 나서 섭섭하고 허전한 마음에 그를 학교까지 배웅해주고 싶어서 함께 학교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 전에 옷 좀 갈아입고 가요. 좀 더 제대로 된 옷을 입고 가야 덜 창피할 것 같아서…”
나름대로 애인의 학교인데,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말을 꺼낸 건데, 록진이 몹시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그 교복으로 충분히 시선이 집중될 겁니다.”
“응? 어째서요?”
“사관학교에 가보시면 압니다.”
뭐 그렇다는데야 할 말이 없어서 졸졸 따라갔더니 과연, 록진의 말대로 엄청나게 따라붙는 시선이 많았다. 당황해서 록진에게 이유를 묻자 그가 약간 한숨을 쉬면서 대답해줬다.
"아가씨가 제대로 된 아가씨라서 그런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사관학교에도 여학생이 있잖아요.”
“다 단발이거나 머리로 한 뭉텅이로 묶고 다니고 바지를 입고 다니면서 목숨을 위협하는 여자를 여자로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아가씨처럼 불면 날아가고 잡으면 깨질 그런 레이디가 없으니 단순히 신기한 거죠.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구나, 하고는 가볍게 대답한 후에 웃어버렸다. 그런 여자는 또 그런대로의 매력이 있는데, 알아주지 않다니 아쉬울 따름이다. 여성스러운 것만이 매력은 아닌데.
"그나저나 이제 록진이 없어서 저 가방 어떻게 들고 다니죠? 팔이 부러질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는 여성스러운 매력으로 승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록진에게 장난스럽게 엄살을 떨자 그가 더없이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제가 수레라도 만들어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웃음이 터져 나와서 한참을 웃었다. 그게 뭐야!!!
"그거 농담이죠? 제발 농담이라고 해요!"
록진이 작게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당연히 농담이지요. 매일 아침 같이 등교 할 건데 팔이 부러질 염려는 왜 하십니까?"
"…이것도 농담이죠?"
"아닙니다. 사관학교가 멀면 얼마나 멀다고 저랑 따로 등교를 하려고 하셨습니까. 데려다 드릴 겁니다."
록진과 있으면 유일하게 편안했다. 코라와의 관계는 이제 엉망진창이었고 시드는 페드윈 수업에 들어와도 내 부탁대로 나를 피해 다녔기 때문에 볼 수 없었다.
제프리와 아비게일,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러 명과 약혼준비는 계속 진행 중이라 학업과 병행하기도 몹시 힘들었다. 중간고사도 다가오는 와중에 일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 록진이 내 숨구멍이었다.
"고마워요."
록진이 위로하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또 바보같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반쪽이 되고 계시는 것 아십니까?"
"…그래도 예쁘죠?"
그래도 못나 보일까 걱정되는 마음에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 자리가 위태로우니까 노력하십시오."
"나 말고 누구 있는데요!"
순간 고개를 들었다. 록진이 그렁그렁한 내 눈 밑을 쓸어내리더니 말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웃는 아가씨요."
그 말에 남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고 그를 끌어안았다. 이 시기에 나한테 있어줘서, 다정해서,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서… 나는….
"고마워요."
“오늘 시드군을 만나러 가시지요?”
“네.”
그의 품에서 살짝 떨어지면서 대답하자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내 손을 꼭 잡았다.
“사실은 만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필요한 일이겠지요.”
“음… 사과 할 게 있으니까요.”
“같이 가드릴까요?”
“아니에요. 저 혼자 잘 해낼 수 있어요.”
록진이 그 말을 듣고 물가에 내 논 애 같은 표정을 하더니 말했다.
“조금이라도 힘들면 찾아오세요.”
“응. 알았어요.”
“당신이 저를 필요로 할 때, 기분이 무척 좋으니까… 주저하지 마시고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민폐라고 생각 안 해요?”
“안 합니다. 절대 그런 생각 안 해요. 저는… 다음에 자세히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지만, 제 자리를 찾기 위해서 지금까지 방랑하고 있었습니다.
차남이라 후계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딱히 검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요. 그래서 나라를 떠나 페드윈까지 흘러오게 된 거고요. 그런데 아가씨께서 저를 필요로 해주셔서…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바람이 살랑 살랑 불고, 록진의 얼굴이 다정하고 차분하게 빛에 빛나고 있었다. 산들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봄날 같이 따스한 사람. 이 사람이 없으면 어떨까, 정말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언제든 와주세요. 제 자리를 만들어주세요, 라시아.”
이렇게 다정하게, 지치지 않고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이라서 죄책감 없이 기댈 수 있는 것은, 내게는 무척 큰 축복이었고 나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록진은 나무 같아요.”
“피톤치드가 나옵니까?”
…그건 또 어디서 주워들어가지고. 웃으면서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시드를 만나기로 한 장소로 걸어갔다. 사관학교 지리를 잘 몰라서 록진에게 지도로 교육을 받고 걸어가는 거라 어렵지 않았다. 한참을 걷자 점점 인적이 드문 곳이 나왔고, 조용한 정원같은 곳에서 나는 시드를 아주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다.
“안녕.”
그 말에 시드는 몹시 어색한 표정으로 서서 내게 말했다.
“어… 안녕. 오랜만이다.”
“응. 찾아오지 않고 기다려줘서 고마워.”
“당연한 거지, 뭐….”
그리고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걸 정리해야해서 시간이 지체된 거니, 내가 먼저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미안해, 그 때 때려서. 많이 아팠지?”
“어? 아, 아니….”
시드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휙휙 저으면서 그렇게 대답했지만, 나는 내게서 나오는 가시 돋힌 말이 그에게 가시로 다가가지 않음을 알았다. 록진이 내게 못 된 소리를 한다면, 아마 나는 세상 그 누구에게 어떤 소리를 듣는 것보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변명이지만 하자면… 내 앞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서, 그리고 네가 원인같이 느껴져서 많이 속상했어. 다시 생각해보니 잘못한 건 그냥 그 아엘라인이라는 용인데… 너한테 화를 내서는 안 됐는데… 뭐 그런 후회를, 많이 했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말했다.
“미안해, 진심으로.”
제대로 허리를 숙이고 사과할 때 시드가 내 쪽으로 말리기 위한 제스츄어를 취했는데,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서 그에게서 물러났다.
“…방금도, 미안. 그런데 그, 용이…”
“알아, 알겠어.”
그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용은 내게 더 이상 하늘을 날게 한 즐거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게나 쉽게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죽일 수 있는, 인간을 가볍게 생각하는 종족일 뿐이었다.
“나는 록진이… 나를 만나서 이 모든 일을 겪는 걸 보고, 나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어. 내 잘못이라고. 그런데 록진이 그러더라. 살린 것도 나라고… 맞는 말이야. 네 탓이 아니었어. 그저 친구에게 말한 게 이렇게까지 큰 파장으로 돌아올 지 너 조차 몰랐겠지.”
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몰랐다는 얼굴에 나는 좀 더 안심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친구…인 거야?”
그 불안한 얼굴에는 그러나, 나는 긍정의 대답을 줄 수 없었다.
“…미안해. 너와 나는, 이제 친구일 수 없어.”
그래도 내 목소리가 차갑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침착하게, 그러나 충분히 다정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제 나한테 너는…. 좋은 기억과 이을 수 없는 사람이 됐어, 시드. 널 보면 아엘라인이라는 용이 생각 나. 무서워지고, 엮이고 싶지 않아져. 그리고 코라도… 코라도 생각이 나고.”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에게 미안했지만, 결정을 무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야?”
“잘못한 게 아니야, 시드. 그냥 넌 서툰 것뿐인데… 네가 너무 서툴러서, 내가 많이 다쳤어.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우리 관계가 망가져버린 거야. 만약 내가 좀 더 괜찮은 사람이고, 그리고 널 아껴주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네게 하나하나 가르쳐 줬을 거야. 어떻게 행동하는 게 나를 배려하는 거고, 좋아하는 사람을 아껴주는 방법인지… 그런 것들을.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는 속이 좁고, 겁이 많아서….”
말이 점점 길어지는 게 무서워서, 나는 입을 곧 다물다가 그에게 말했다.
“미안해.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 우리는 그래서… 여기까지야.”
그가 고개를 숙이고 서있었다. 한참을.
“나는 네가 전부 처음이었어.”
그의 말을 아주 어렴풋이, 나는 이해했다.
“나는 그냥 드래곤이라서… 인간을 이해하지 못했어. 항상 강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주위 사람을 덜 신경 쓸 수 있었고…. 나는 드래곤으로서 지금까지 유희 해왔어. 인간인 줄 알았는데, 그냥 드래곤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인간들 사이에서 어우러져서 살아간 적이 없었고, 사람들의 감정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시드의 연청색 눈에서 또르륵, 하고 눈물이 굴러 나왔다. 소년 같은 얼굴로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금은 후회해…. 너무나도, 너무나도….”
나는 그런 그를 위로하지도 못하고, 도와주지도 못한 채로 서있다가 겨우 말 한마디를 꺼냈다.
“그래도 너는 내게 좋은 친구였어.”
나를 좋아하는 사람으로는 나빴고, 드래곤으로는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그래도….
“친구로서 너는 완벽했어.”
나를 배려해줬고, 굳이 챙겨줬고, 신경 써주었다. 그걸 고마워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내가 학교에 들어와서 적응할 때 큰 도움을 줬고… 언제나 그 점은 고마워하고 있어.”
그가 허무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말했다.
“미안해.”
“…아엘라인의 일이라면, 됐어. 괜찮아.”
“아니야.”
그가 울면서 말했다. 선량한 얼굴에 든 죄책감에 의아해서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니 시드가 말했다.
“내가… 했더 모든 행동들 중에서, 네게 다니엘의 비밀을 알려준 거… 나는 네 친구가 아니었어. 나는 그 때 드래곤이었어. 리콜라티에게 부탁해서, 힌트를 주라고도 했고….”
그제야 수수께끼가 풀린 기분이 들었다. 오페가 했던 그 말들. 힌트를 준다고 했던 말이 번개처럼 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리콜라티가 굳이 내게 다니엘의 일에 대해 해준 말. 시드와 만났을 때 그가 위험할 때는 멀어지는 게 답이라고 했던 말들….
“…왜…, 왜 그런 짓을 했어?”
“네가 다니엘을 좋아하는 게 보였어, 그래서…”
“멀어지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 때 나는, 드래곤이었어. 내 마음대로… 네가 가는 방향을 조정하려고, 그랬었어.”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도대체 이 애는, 내 앞의 이 사람은 누구지.
“미안해. 정말로… 나는, 너한테 미안해.”
“난 진짜, 너를…”
너를 이해할 수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경악한 눈으로 그를 그저 바라보기만 헀다.
“용서하지 마, 라시아.”
그러다가 굳이 이 말을 꺼내는 시드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다시 돌아갈 끈을 만들지 않기 위해 하는 말이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끝낼 필요가 있었니?”
굳이 이런 방식으로, 우리 모두는 망가져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나는 그에게서 걸음을 돌려 멀어졌다. 천천히 멀어지고, 방향을 달리해서… 아마도 우리는 다시 겹치지 않는 길을 가게 될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 * *
중간고사가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정신 없이 시간이 흘렀다. 어쨌든 그렇게 나쁜 성적은 안 받을 것 같으니까 다행이라고 할 수 있나…. 아비게일의 약혼은 정말로 차곡차곡, 그러면서도 몹시 빠르게 진행되어서, 정말 코앞이구나 싶을 정도까지 왔다.
공식적으로 혼자 다니게 된데다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빠져 반쪽이 된 내 얼굴을 보고 로드리고들은 틈만 나면 뭘 자꾸 먹이려고 했다. 집에서 간식 도시락을 싸와서 내게 주기도 하고, 마주치기만 하면 매점에 끌고 가서 이것저것 사줬다.
로드리고 관은 내가 자고 있으면 쥐 죽은듯이 조용해지기도 했다. 상냥한 사람들이어서, 무척 고마웠다.
언젠가 보답을 해야지… 일단 다음에. 지금은 보답하는 것 마저 일처럼 느껴져서 무리였다.
거의 마지막에 치달은 약혼 준비에 짬이 좀 생겨서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들어왔다. 제프리가 일감을 들고 왔나 해서 바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더니, 의외의 인물이 서있었다.
"다니엘…."
"피곤하지?"
아, 의외의 인물은 아닌가. 요즘 상의할 게 있으면 이 사람과 만나고 했으니까. 무슨 일이 터졌나?
“메이드한테 부탁하지, 왜 굳이 들고 오세요. 무슨 일 생겼어요?”
“일 시키려고 온 거 아냐! 앉아, 얼른.”
어… 일 아니면 왜 오셨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일단 자리에 앉았다.
“일 아니면 왜…?”
“아니, 내가 못 만날 사람 만나러 온 것도 아니고. 단 둘이 얘기 한 지 오래라서 한 번 들어온 거야.”
그러고보니 단 둘이 남아서 사적인 얘기를 한지가 무척 오래 전 일처럼 느껴졌다. 틀린 말도 아니라 긴장을 풀고 그가 건네주는 차를 한모금 마셨더니 기분이 꽤 좋아졌다.
“표정 풀어진 거 보니까 좋네. 요즘 표정이 어두워서 나까지 기분 안 좋았는데.”
“아… 죄송해요.”
“뭘 죄송할 게 있어. …요즘 코라랑 안 좋다면서?”
마시던 차에 입맛이 딱 떨어져서 찻잔을 내려놓고 곤란한 표정을 하며 대충 둘러댔다.
“음, 그냥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흠. 다니엘이 의자에 몸을 기대더니 다리를 쭉 펴면서 말했다.
“본인이 힘들어서 너랑 못 놀겠대?”
대번에 나온 말에 좀 놀랐다. 그렇게 코라가 나와 있으면서 힘들어했나?
“코라가 저랑 놀면서 힘들어했어요?”
"뭐 힘들었다, 아니다 그건 본인 기준이니까 내가 뭐라고 할 말은 아닌데. 코라가 여러가지 소문에 시달린 건 사실이야."
“어떤… 소문이요?”
“아무래도 돈만 많은 졸부집안이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고, 본인도 딱히 귀족적인 성격이 아니다보니 스스로한테 압박을 심하게 하거든, 캘리양이. 노력파다 보니 더 그렇고… 그러다보니 스스로나 남에게나 매일 붙어있는 너랑 비교하면서 많이 피곤했을 거야.”
“제가 잘못 한 걸까요?”
그러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는 거야, 이 사람. 싶어서 인상을 썼더니, 내 손을 툭툭, 두드리고는 그가 가볍게 말했다.
“아가씨, 세상은 잘못이다 아니다로 구분되는 게 아니네요. 특히 친구 사이엔 말이지. 너도 참 애가 특이하다니까. 어떻게 네가 너 다운 걸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어?”
“그건 그렇지만, 친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건….”
그가 의자를 당겨서 내게 좀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살다보면 네 존재 자체가 상대방에게 괴로운 일이 될 수도 있는 거야. 그건 너 스스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지. 나와 이리하를 봐서 알 수 있지 않니."
“왜 그렇게 밝게 말씀하세요. 좋은 일도 아닌데….”
“나쁜 일일 건 또 뭐야. 해결 방법이 간단한 일인데.”
해결 방법이 있어? 그 말에 반색하며 뭐냐고 물었더니 그가 가벼운 태도로 찻잔을 들면서 말했다.
“안 만나면 돼.”
“…네?”
“안 만나면 된다고.”
이런 종류의 답이 나올 줄이야. 예에… 하며 의욕 없는 목소리를 냈더니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표정이 왜 그래? 완벽한 해답인데.”
“그게 무슨 완벽한 해답이에요….”
“코라의 문제는, 너한테서 열등감을 느낀다는 거야. 결국 너희는 안 어울리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노는 거란 말이다. 사자가 사슴이랑 우리 친구하자, 그러는 거랑 비슷한 상황이라고. 서로 만나서 두 사람 다 행복해야 진짜 친구지, 둘 다 괴로워서야 전혀 만날 필요가 없잖아.”
“…명쾌한 해답이기는 한데요, 그럼 저는 평생 코라랑 친구를 못 하는 건가요?”
그가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다정하게 웃었다.
“그 애가 본인에게 좀 더 그 부분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보다 여유로울 때… 그 때가 되어야 가능한 이야기지.”
씁쓸한 결론에 한숨을 푹, 하고 내쉬자 그가 혀를 쯧쯧, 하고 차더니 말했다.
“넌 여자애들이랑 좀 더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어. 코라 하나 없어졌다고 아예 같이 지낼 사람이 없다니… 혼나야 해, 아주.”
그 말에는 차마 반박할 수 없어서 얌전히 고개를 숙이자 그가 손을 뻗어서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네기 서녀라서 많은 사람들이 너를 차별할 거라고 생각해서 친구를 사귀는 데에 적극적이지 못한 거 같은데… 생각보다 세상은 좋은 곳이야, 라시아.”
“저, 그런 말 들을 정도로 비관적이에요?”
“지금은 약간?”
그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내 입에 초콜릿을 쏙, 하고 넣어주었다. 입안에 퍼지는 달달함에 당혹스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흠…어려워하는 널 위해, 이 선배님이 나서보실까. …어디보자, 괜찮으면 내가 한 사람 소개시켜줄까?"
그 의외의 말에 놀라서 그를 벙하니 바라보고 있자 그가 다시 한번 짓궂은 얼굴로 초콜릿을 하나 더 넣어주었다. 입안에서 겨우 녹여 먹이고 고개를 끄덕이자 다니엘이 좋은 선택이야, 라고 말하며 진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름은 오를레아 엘다 아를리오스. 나이는 너랑 동갑이고, 자작가의 셋째 딸이야. 상당히 매력적인 아가씨지. 매너도 뛰어나고…. 전형적인 북부의 미인상인데, 머리카락이 보라색 제비꽃 색깔이라 아마 한번쯤 봤을 것 같다. 별칭도 있을만큼 유명하니까."
왠지 어렴풋이 기억이 나서 인상을 찌푸렸다. 코라가 언젠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잠깐 말한 적이 있었는데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서 흘려들었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아, 혹시 제비꽃 아가씨라는…?"
"들어봤을 줄 알았지. 아버지가 검소의 극치인 하급공무원 비슷한 직위라서 말로만 자작가라 로디나에 들지 못했지만 입학부터 로디나에 가입할 거냐는 물음도 많이 받았어. 친하게 지내,"
그가 웃으면서 내 머리를 힘차게 흐트러뜨렸다. 나는 인상을 쓰면서 하지마세요! 라고 했지만, 내가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지 그는 그냥 허허 웃고는 말았다.
"아마 약혼 파티에 한번 들릴 거니까, 그 때 내가 소개시켜줄게. …둘이 서있으면 그림은 되겠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가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밥 잘 챙겨먹어, 알았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갑게 식은 차를 입에 댔지만, 마음이 따뜻해서인지 몹시 맛있게 느껴졌다. …그래, 주변에 아무도 없지는 않으니까 힘을 내야지.
============================ 작품 후기 ============================
사춘기 성장이 끝납니다. 다음 편은 다니엘과 아비게일의 약혼편이네요! >ㅅ<ㅎㅎㅎ우울한 파트가 끝나서 다행이에요. 연참!하지만 내일은 안 올것이므로..머.. 쌤쌤인듯.
선추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