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우리들의 결별>
눈을 뜨자마자 일어났더니 신관이 보여서 바로 록진을 찾았다. 여사제는 내게 록진의 상태가 나쁘지 않으며, 지금 충분히 진정된 상태임을 강조했지만 직접 보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 부탁해 록진이 있는 방으로 갔더니 그는 편안한 표정으로 잠을 자고 있었고, 나는 그제서야 안심하고 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을 잃는 줄 알았다.
내 손길에 그가 잠에서 깼는지, 천천히 눈을 떴다. 나는 그를 바라보고 바보같이 웃었다. 그러자 그가 웃으면서 내 손을 꽉 쥐어주었다… 그에게 이런 따뜻한 체온이 있는 걸 지금에서야 나는 알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그 말에 결국 울음을 왈칵, 쏟아내고 말았다. 어떻게 당신은 그 말이 나오지, 어떻게 하면. 나는 지금, 시드 때문에 겪게 된 이 모든 사건들에 대해 그를 죽도록 원망하고 있었는데, 당신은…
“미안해요.”
울음을 겨우 참으면서, 나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미안해요, 내가… 나 때문에, 이런 일을 겪어서, 나는… 나는 당신한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단 한번도… 좋은 사람으로,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었는데, 그랬는데, 당신이 나랑 괜히 엮여서, 내가… 내가…”
그가 내 말에 몹시 단호한 목소리로, 내 손을 틀어쥐고 말했다.
“살린 것도 당신입니다, 라시아. 알아들으셨습니까?”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니야, 이건 다 내가… 내가 시드와 어울렸던 탓이다.
내가 당신을 드래곤과 엮이게 한 탓이야. 아엘라인, 그 여자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시드가 말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시드와 친하지 않았더라면… 생각이 자꾸만 위로, 위로… 근본을 알 수 없는 곳까지 타고 올라갔다. 아무것도 바꿀 수 있는 게 없는데 나는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지킨 것은,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당신 탓이 아니라, 재난이었어도 나는 그렇게 했을 겁니다. 나는 어디에서도 다칠 수 있었어요. 그 날 샤펜의 후계자를 노린 자객이 왔을 수도 있고, 아니면 뜬금없이 번개가 내리쳐 당신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수도 있습니다.”
록진은 자신을 보라며 자꾸만 나를 채근했다. 나는 울면서 고개글 젓고만 있었다. 마치 그의 말이 하나도 안 들리는 어린애처럼, 그저 그렇게하면 내 죄를 잊지 않을 수 있을 것처럼.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어, 라시아.”
그가 내 손을 꽉 쥔 채로, 울기만 하는 나를 붙잡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어도, 나는 너를 지켰을 거야.”
알아들었어? 그렇게 말하며, 록진은 나를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아주었다. 나는 자꾸만 바보같이 울면서 그의 옆구리에 파고들어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런 지킴은 필요 없다고, 그냥 죽지 말라고,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그는 한참을 내 등을 두드려주다가 엉망이 된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더니 물었다.
"정말 아무데도 다친 곳 없으시죠?"
그 와중에도 얼굴을 보이기가 부끄러워서 그의 허리에 고개를 파묻고 웅얼거리면서 괜찮다고 말하자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면 됐습니다."
나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 아래에서 나는…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좋아해요."
록진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잠시 멈추고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소독약 냄새가 풋풋이 나는 그의 체향을 맡으면서 겨우 말을 이었다.
"정말 좋아해요."
약한 사람이다. 사실은 몹시 약할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이렇게나 마음이 강할까.
“죽지 말아요, 록진. 날 두고, 죽으면 안 돼요.”
내 말에 그가 다시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조용히 말했다.
“네. 죽지 않겠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울음을 멈추려 몇 번이고 딸꾹질을 하며 숨을 몰아쉬다가 웅얼거렸다.
"함부로 나서지 말아요."
"이렇게 예쁜 애인을 안 지키면 어쩌겠습니까, 제가."
"닭살이야."
나는 조용히 말하면서 그의 손길을 가만히 받으면서 진정했다. 쿵, 쿵, 쿵. 그의 심장소리가 나를 몹시 안정시켰고, 나는 딸꾹질을 겨우 멈추고 한참을 울어서 뜨거워진 얼굴을 록진에게 기대고 있었다.
"꼬꼬댁."
그 담담한, 다정한 말에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웃는 소리에 그가 내 정수리에 키스해주면서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우는 얼굴도 예쁩니다.”
"…훌쩍… 진짜요?"
"뻥이라니까 자꾸 믿으시는군요."
나는 그를 세게 때리려다가 입만 내밀었다. 이런 때까지 장난질이야, 이 남자는. 흥, 하고 재빨리 그를 밀어내고 탁자 위의 거울을 보며 대충 정리하며 그에게 말했다.
“이런 시국에 장난을 치고 싶어요?”
그러자 그가 웃으면서 귀여우니까, 라는 분하게도 잘 통하는 핑계를 대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한숨만 내쉬고 말았다.
"아가씨."
"왜요."
“하던 일은 마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던 게 뭐였지, 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그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 소녀만 아니었어도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가씨에게 뽀뽀할 수 있었을텐데.”
그의 말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닭살스런 소리 한다고 뽀뽀해줄 줄 알아요?"
그 말에 그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내게 다가오더니 속삭였다.
"꼬꼬댁?"
저절로 웃음이 나와서 피식, 하고 웃자마자 그의 입이 내 입술에 닿았다. 약간 거친 입술 너머로 그의 웃음이 내 입으로 들어와 나를 간질였다. 그게 간지럽고 부끄러우면서도 몹시 따뜻해서, 나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손에 깜짝 놀라서 그를 밀어내며 변태! 라고 외치자 그가 말했다.
“제가 뭘 했다고…”
“허리! 허리 만졌잖아요!!”
“가슴이라도 만져야 변태 소리 들을 때 억울하지라도 않는데….”
그의 느긋한 표정에 쉬기나 하라며 소리를 지르고 그의 방을 빠져나와서 두근두근 거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켰다. 아니 지켜준다는 건 거기에 포함도 안 되나.
“아무튼간에, 방심하면 안 되는 사람이야.”
얼굴을 문지르면서 걸어나오다가 되돌려 생각하니, 더 이상 내가 집착적으로 엄마와 할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나름대로 긴장을 풀어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록진도 남잔데 무슨 개뿔, 하고 그냥 넘겼다.
그가 내게 어떤 일이 있었어도 그렇게 했으리라고 말해주어서, 내 마음은 훨씬 가벼워질 수 있었고… 그가 내게 준 많은 것들을 생각하다가 문득, 시드 생각이 났다.
그 애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테지. 그 자신만 만나지 않았더라도, 내가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거라고… 그런 어리석은, 벗어날 수 없는 생각을.
“사과… 해야겠지.”
생각난 김에 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아니, 나는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미안하다고, 네 탓은 아니라고. 때려서도 미안하고, 네 탓이 아닌 걸 알고 있다고….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그런데 깨끗한 감정으로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시드를 보면 아엘라인이 생각날 것 같았고, 원망이 쏟아질 것 같았다.
정말로 그 여자가 그럴 줄 몰랐느냐고, 너를 사랑하는 드래곤이던데, 정말로 나한테 어떻게 할 줄 몰랐냐고. 그런 불신에 찬 소리가 튀어나오기만 할 것 같았다. 왜 하필 그 여자한테 말을 했는지, 왜 하필, 왜 하필… 끝없이 이어지는 꼬리를 무는 원망에 나는 차마 그에게 갈 수 없었다.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이제 나는 내 사람을 구해준 너마저 무서워졌다. 시드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나를, 시드 또한 언젠가는 죽일 것 같이 느껴졌다.
그는 드래곤이니까… 나를, 인간으로서의 나를 무시하는 오만한 자의 공포를 겪고나자 그 또한 그렇게 보인다면, 역시 나는 이기적이고 못된 사람인걸까….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를 믿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에 대한 신뢰를 아직 제대로 복구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런 일이 생겨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결국은 우선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우선, 록진은 하루정도 신전에 있게 하고, 그리고 나는 샤펜가로 돌아가야지. 기계적으로 일을 하나하나 처리하고 나서 기운을 내 록진에게 인사하고 샤펜가로 돌아가자마자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무척 피곤해 머리를 대자마자 잠 들고 나서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그러고보니 어제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록진과 놀았으니 망정이지, 큰일날 뻔 했네. 비일상의 어제를 끝내고 일상의 아침을 맞으니 기분이 몹시 묘했다. 어쨌거나 내 불행이 세상을 멈출만큼의 대단한 것이 아님은, 씁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되는 일이기도 하다.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 제프리가 의례 배웅하러 나왔기에 신전에서 시드에게 쓴 편지를 부탁했다.
“이거 에드가 가로 좀 부탁할게요.”
내용은 별 것 없었다. 그저 미안하다고, 널 볼 자신이 지금은 없으니 좀 진정하고 만났으면 좋을 것 같으니 일주일 뒤에 만나지고 말이다.
너한테 사과할 수 있게 시간을 달라고 적어둔 편지가 이렇게도 구차해보일수가 없었다. 씁쓸한 표정이 들통이 났던지 제프리가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가 약간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공작각하께서 알리실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이른 시각에? 나는 애니가 건네주던 장갑을 물리고 응접실로 향했다. 이미 와서 앉아있는 아비게일도 영문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제프리가 영상석을 탁자위에 올려두고 곧 샤펜공작의 차가운 얼굴이 떠올랐다.
"아침부터 미안하다만, 급한 용무라 연락했다."
인사도 생략한 그의 말에 아비게일과 나 모두 놀란 상태였다. 예의와 격식을 중요시 하는 그 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러 일을 고려해봤을 때, 샤펜가는 앞으로 황녀파가 되는 게 낫다는 결정을 내렸다. 특히 아비게일, 네 약식 약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황제폐하께서 2,3년 내에 황위를 물려주겠다는 선언을 하셨으니 자연히 더 후계싸움이 치열해질 거다. 둘다 처신을 똑바로 해야한다. 그리고 라시아.”
"네."
"네가 아비게일의 약혼을 추진하는 동시에, 샤펜공작의 후계자 자리를 물려받는 것을 공식화할 준비를 해라."
“네.”
얌전히 대답을 하면서 남은 학기가 몹시 바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속이 갑갑해졌다.
"그리고 아비게일. 시간이 거의 없을 테니 네 약혼은 알트라에서 적당한 시기를 잡아서 진행하도록 해라. 나와 요르펜가가 그 시기에 맞춰 어떻게든 움직여 볼테니."
아비게일이 순간 환하게 웃으면서 네! 라고 대답했다. 행복한 얼굴을 보니 내 상황과 비교되어서 배알이 뒤틀리기 직전이었다. 어쨌거나 그녀로서는 잘된 일이니까… 샤펜공작이 차분하게 그러면, 하고 몇 마디 더 당부를 한 후에 통신을 껐다.
"그럼, 오늘 요르펜 공자와 상의한 후에 집에서 상의하도록 하자."
분명히 들뜬 목소리로, 그녀가 내게 말을 건넸고 나는 네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얌전히 대답했다.
"네."
친구에게 소식이라도 전하고 싶었는지 그녀가 응접실을 조급하게 빠져나갔다. 애니가 내 기분을 살피며 장갑을 들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로 연락을 하신 거예요?"
“여러가지 사안에 대해서 공작께서 결정을 내리셨어. 아마 앞으로 퍽 바빠질 것 같아.”
그러자 애니가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영양식을 준비하라고 할게요.”
그 엉뚱하고 진지한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리면서 그래주면 고맙지, 라고 가볍게 대답했다. 아침부터 이런 저런 명령을 들어서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는데, 애니의 말로 이상하게 기운이 났다. 학교에 갔다가 점심시간에 록진에게 잠시 들려야겠다.
“아가씨, 아비게일 아가씨께서 마차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프리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아비게일이 진짜 기분이 심하게 좋거나, 내 고마움에 대해 오늘따라 절절히 느끼는 걸지도 몰랐다.
둘다 나로서는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으니 떨떠름한 얼굴 밖에는 내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것이 예의겠지. 얌전히 마차에 올라타서 얼마간 앉아있으니 다행이도 불편한 시간은 금세 끝났다. 마차가 도착하자마자 나는 반 타이밍 정도 빠르게 마차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어쩐지 코라가 거의 기다렸다는 듯이 걸어오더니 내게 인사도 하지 않고 아비게일에게 대충 인사를 한 후에 다짜고짜 말했다.
"캘리상단에서 약혼 일을 추진하고 싶습니다, 아비게일양."
"…소문이 빠르군, 캘리는. 과연,이라고 해야 할까?"
코라가 싱긋이 웃더니 어디로 연락드리면 될까요? 하고 물었다. 아비게일이 시간약속은 집사 쪽에 잡도록 해, 라고 말하고는 나를 힐끗 한 번 바라보고 난 후 우리를 지나쳐서 학교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내게 인사도 하지 않고 바로 아비게일에게 간 것이 약간 섭섭해서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내가 가문의 후계자가 될 것을 아는 사람이 나를 무시하고 아비게일의 의사를 묻는 것도 불편했고, 그보다 먼저로는 그녀가 친구인 나를 우선하지 않았다는 섭섭함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도 눈인사정도는 했으면 좋잖아.
짧은 어색함이 흐르고 코라가 내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쏘아 붙이듯이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너 시드 때렸어?"
이 말이 바로 나올 줄은 몰라서 당황했지만, 일단은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코라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니가 때린 줄은 알았는데… 왜 그랬는지 말해달란 거야. 걔가 나한테 말을 안 해줘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내가 말하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그냥 여기서 말을 못 한다고 자르는 게 맞는 걸까.
“미안… 너한테 말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
그녀가 몹시 충격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일을 설명하고자하면 시드의 정체부터 밝혀야했고, 그리고 이건 그의 첫사랑과 관련한 문제였다.
대상인 내가 함부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고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한편으로는 당황스럽기도 했다.
이런 표정까지 지을 정도로 충격받을 일인가.
“말 해줄 수는, 없어…?”
"네가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일거야."
코라는 정말로 상처 받은 것처럼 보였다. 입술을 깨무는 그녀의 모습에 초조해져서 나도 꾹,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에게 모든 걸 말하고 싶었지만, 어떤 것도 말할 수 없었다.
"미안해. 정말 다 말해주고 싶은데…"
내 뻗은 손을 탁, 하고 쳐내더니 코라는 숨을 몰아쉬고는 말했다.
“너희 둘, 정말 이상해. 그거 알긴 하지?”
그렇게 말한 후에 그녀는 내게서 등을 돌려 학교 안으로 걸어가버렸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기는 했다.
시드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그 때부터, 어쩌면 이럴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거절한 걸로 모든 게 잘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다시 우리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나보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첫 수업을 듣기 위해 떨어지지 않는 발을 뗐다.
"오늘은 나이에 관련한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잉그리트 벨렉 교수님은 철학자란 모두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삶에 대해 고민한다는 일반적 통념과는 딴판으로, 그는 몹시 세련된 남자여서 인기가 한참 많았다. 잘생기고 키도 큰데다, 세련되기까지 한,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젊은 교수님! 여론이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았다면 오히려 내가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뭐 어쨌든 그런 철학자로서의 삶을 살던 교수님은 페드윈에서 뜬금없이 정치(ⅱ) 강의를 맡으셔서, 철학같은 이야기로 시작해 결론은 정치학으로 이끌어나가는 점이 재미있었다.
"나이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삶을 살아가면서 사실 나이에는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여러분만 해도 나이가 아닌 학년이나 직급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으니까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학생, 제가 몇 살로 보이죠?"
그가 미소를 지으며 가장 앞자리에 앉은 로잘린에게 물었다. 로잘린은 거의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는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녀는 잉그리트 벨렉 교수의 팬이었다.
"서른 초반 정도…. 아니신가요?"
"그렇게 젊게 봐주다니 기쁘군요. 이번년도엔 제가 처신을 잘 했나보네요. 이제 4학년 되는 학생들은 절 40대쯤으로 봐서 좀 충격이었습니다. 흠. 좋아요. 나이란 것이 쓰일 때는 잘 없습니다.
특히나 한 두살 차이에서 나이는 큰 의미가 없는 거죠. 하지만 제가 중요하지 않은 걸 이렇게 강의할 리가 없겠죠. 인생에는 여러가지 시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크게 어떻게 나누어지는지 말해볼 사람 있나요?"
여럿이 손을 들었다. 이것은 그가 최초로 생성해낸 개념으로, 그를 이 교수직에 앉힌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네, 앨런양."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중년기, 노년기로 나누어집니다."
"아주 정확합니다. 앉아도 좋아요."
그가 앨런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었다. 앨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지더니 얼른 자리에 앉았다. 앨런은 다른 과목은 말 그대로 쥐약과 같은데, 이 철학 과목만큼은 놀랄 정도의 점수를 받는다. …이런 걸 뭐라고 하지? 사랑의 힘?
"맞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럼 어느 시기시죠? …네. 청소년기입니다. 17살에서 23살쯤의 사람들을 이 단계에 분류하죠."
얌전히 필기를 하며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흠. 잘 와닿지 않는 개념이라 예시를 들어봅시다. 샤펜양?"
사실 이론서에 다 나와 있는 내용이라 멍하니 듣고 있다가 좀 놀라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옅은 금색 머리카락의 잘생긴 남자였지만, 사실 그에대한 내 감상은 딱히 없었다. 그냥 조각상의 느낌이랄까… 인간 조각상… 음.
"샤펜양은 지금 몇 살이죠?"
“18살입니다.”
“풋풋하고 좋은 때군요. 10대는 참 재미있는 시기입니다. 많은 것이 결정되고, 변화하고, 성장하는 시기죠. 그것도 고차원적으로요. 그런 만큼 무척이나 불완전해서 그 자체로 놀라운 시기이기도 합니다.”
대답해준 것이 고맙다는 양, 집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는 싱긋, 내게 미소를 짓더니 뒤돌아서 학생들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청소년기에는 보다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스스로를 확립하는 시기입니다. 보다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고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와의 충동을 일으키는, 몹시 변덕스럽고도 위태로운 시기지요. 이럴 때 남을 위하는 것은 보다 힘이 드는 일입니다.
자신을 모르는데 남의 정체성까지 파고들어야 하니까요. 페드윈에서는 매년 학교 축제에 평민을 직접 대하는 것을 종용합니다. 성적이 걸려있는 커다란 행사인데, 이 시기에, 왜 굳이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가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학생들 대개가 정신을 빼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조와 목소리에 그는 힘을 담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정치가가 되었다면 대단한 연설가로 권력을 휘둘렀을텐데.
“자신 스스로에만 함몰해서는 훌륭한 정치가가 될 수 없습니다. 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환경에서 컸음을 이해하는 것, 그것은 정치의 기본이자 사회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커왔고, 이 사람이 어떤 사상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 사람을 이해하고 나서야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팔을 크게 휘저으면서 거의 소리를 지르듯이 말했다.
“이 사람의 욕구! 필요! 능력! 이것들을 빨리 파악하고, 재빠르게 움직이고! 움직이게 만드는 능력- 그것이 여러분들이 뛰어난 귀족, 혹은 뛰어난 수완가가 될 수 있게 하는 주요한 것입니다. 이해하고, 이용하십시오. 스스로에 대해 알려면 타인과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이 경험을 통해 당신 스스로도 비추어 볼 수 있는 겁니다. 혼자 백날 사색해봐야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색하고, 그 다음은 무조건 행동하세요.”
그는 강단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두꺼운 종이들을 앞자리의 학생들에게 건네주었다.
“뒤로 넘겨주세요. 오늘 과제는 그래서 갈등의 해결입니다.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데, 이 일을 어떻게 현명하게 풀 수 있을지. 분량은 자유입니다, 이상."
모두들 종이를 받고 한참 자리에서 뜨지 못했다. 일단 그의 카리스마가 대단했을 뿐만 아니라 과제물 자체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코라는 이 정치Ⅱ과목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 중 하나였는데, 그것은 그녀가 시류의 흐름이나 상대방의 요구를 읽어낼 줄 아는 뛰어난 학생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는 아니지만, 아침의 일이 걸려서 나도 모르게 자꾸 코라 쪽을 바라봤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상하게도, 우리는 서로의 시선을 흘려버렸다.
============================ 작품 후기 ============================
리메 전에 무슨 쓸데없는 강의를 이렇게 길게 적어놨는지. 다 지우고, 싹 정리했네요.
음.. 이제 시드, 라시아, 코라, 이 세명의 친구 관계... 사춘기의 격동..!!
두근두근 시뮬레이션 친구와 함께하는 아카데미 생활ㅇ....의 막이 올...(질질질)
머 시드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데 그것도 제가 드릴 말씀이 딱히 없네여개인적으로 근데 그런건 하고 싶어여막.. 이게 약간 미연시? 스타일로 진행하면 재밌겠다 싶어서 ㅋㅋㅋㅋㅋ다음에 다니엘 루트 갈릴 때 농담 한 번 쳐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