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이 일로 어쩔 수 없이 학장실을 들러야했다. 내게는 당연히 아무런 영향이 없었고, 오히려 정중한 사과를 받았다.
리디아는 이걸로 에트왈의 자격을 박탈당했고, 앞으로도 에트왈은 될 수 없다는 처벌과 동시에 교내봉사 이수를 해야 했다. 몹시 부끄러운 일이고 타인들의 시선을 받으며 해야 하는 교내봉사의 특징상 평생 망신 중의 망신으로 남을 것이다.
1학년의 빈 에트왈 자리를 그리고 우습게도, 남은 반 학기동안 데이 오휘나 아드린양이 맡기로 했다고 한다. 어쩄거나 형평성 있게 일이 끝난 것 같아서 다들 조용히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리디어가 에트왈 자격을 박탈당할 줄은 몰랐어."
“그래? 난 그것보단 아드린양이 에트왈이 된 부분에 더 놀랐는데.”
“…하긴 그것도 그렇다. 그래도 퇴학이 아닌 게 어디야. 사람을 왕따를 시키고 공개적으로 공작가 딸을 모욕했는데.”
“뭐, 입장상 양녀니까 공작가 딸이긴 하지, 내가.”
항상 이 말을 들으면 웃기다. 얼마나 닮은 친척이어야지 나같이 닮은 사람이 나오는 거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거짓말을 꾸민 거야.
"그런데, 학장실에서는 어땠어? 리디어 막 화내던?"
“난리도 아니었어. 록진더러 자길 위협했다느니 어쩄느니… 그냥 봤으면 폭행이라도 당했는 줄 알았을 걸..”
“록진이 징계를 안 당해서 다행이다.”
“호위무사 자격이니까 징계를 당하면 이상한 상황이지.”
그렇게 대답하고 과자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코라는 그렇긴 하지, 하면서 검지로 볼을 살짝 긁더니 머뭇머뭇 내게 물었다.
“…그리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내가 본 게 있긴 하지만… 너 혹시 록진이랑….”
코라는 나와 록진이 손을 잡았을 때는 봤을테니 록진과 내 사이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녀에게 확실하게 말을 안 해줬다니, 그녀가 섭섭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미안, 먼저 설명을 안 해서….”
“아냐, 네가 누굴 만나는 지는 네 선택이지, 뭐. …그런데 왜 그 사람이야?”
“응? 어… 그게.”
그 앞에 숨겨진 말이 시드가 아니라, 라는 것은 너무 빤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지금까지 제대로 묻지 않고 나를 기다려준 그녀가 고맙기도 하고, 중간에 애매하게 낀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기도 해서 말을 좀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이런 말 하면 웃기기도 한데… 시드는 남자로 안 느껴졌거든.”
그 말에 코라가 마시던 음료수를 켁켁거리면서 뱉었다. 그래… 내가 이해한다.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면서 차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딱히 록진이 엄청 좋거나, 결혼을 생각하고 있거나… 뭐 그런 건 아닌데, 음… 뭐라고 해야 하나. 나 그 사람 옆에 있으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코라가 손수건으로 입 근처와 쏟아진 찻물들을 닦으면서 말했다.
“그게 다야?”
“응. 그게 다인데? 그 사람 옆에 있으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사람과 오래오래 지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뭔가 심장이 떨린다거나.”
“그건 기본이지. 안 그랬으면 안 사귀었어. 남자로서 매력이 있으니까….”
그 때 록진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중간 점검을 위해 사관생도끼리 모였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는 잽싸게 입을 닫고 코라에게 당부했다.
“음, 어쨌든 나름대로 비밀 연애야.”
“하긴 호위무사랑 사귀는 건 좀 그렇지. 아랫사람이랑 연애하는 거라 금지되는 거니까… 뭐, 사관생도로 돌아가면 그 때서야 좀 자유롭긴 하겠다.”
“그것만 기다리는 거지. 아, 맞아. 방학동안 판닐에 다녀왔다면서?"
"어? 어떻게 알았어?"
"앨번이 얘기하던데. 나한텐 한 마디 말도 없고."
"너한테 말하기 껄끄러운 주제라서 그런 거야!"
그녀가 으으- 하는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의자를 끌어서 테이블 가까이에 당겨 앉았다. 덩달아 의자를 당겨 앉자 그녀가 말했다.
“그…. 앨번이랑 단 둘이 다녀온 거야.”
"뭐?!!!!"
나도 모르게 엄청나게 큰 소리가 나서 소리 낸 내가 더 놀랐다. 록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야!!! 조용히 해, 좀!!!!"
"미, 미안.“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어, 네. 잠깐 깜짝 놀랄 소리를 들어서요. 어… 록진, 잠깐 뭐 마실 거 사오세요, 같이 마셔요.”
대충 둘러댔는데도 눈치가 이럴 때는 비상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음료수를 고르러 갔다. 카페에서 주문을 하는 데, 호기심이 많은 지 나보다 뭘 고를 때 오래 걸리는 남자라 나는 안심하고 코라를 졸랐다.
“어떻게 된 거야? 제대로 말해봐.”
“그냥 판닐에 계약 때문에 잠깐 들렸는데 거기 앨번도 있더라고. 둘이 놀다 오라길래 그냥, 뭐….”
세상에, 세상에. 나는 몇 번이나 감탄사를 내뱉을 것을 꾹 참고 침착하게 물었다.
"그래서, 몇박 몇일 이었는데?"
"…2박 3일."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반면 나는 꽤 신이 나서, 짓궂은 목소리와 표정을 하고 그녀를 은근슬쩍 놀렸다.
"너희 혹시 방도 같이 썼니?"
미쳤어, 미쳤어!! 하면서 코라가 내 팔을 퍽퍽 때렸다. …친구야, 진짜 아파. 뭐, 약혼 사이라도 언제든 틀어질지 모르는 상황인데 쉽게 잠자리를 허락할 코라도 아니지만 그 형제들이 앨번을 얼마나 마음에 들어하는 지, 또 얼마나 믿고 있는 지 알 수 있긴 했다.
“그러나 저러나, 너야말로 앨번이랑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그러자 코라가 음, 하고 망설이며 눈을 동그랗게 굴리더니 말했다.
“뭐 나쁘게 되어갈 게 있나. 그냥 음. 잘 지내고 있어.”
나는 의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뭔가 행복하다, 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잘 지내고 있는 얼굴임을 확신하고 약간 장난스러운 어조로 그녀를 놀렸다.
“뭐야, 꽃이 피었잖아, 얼굴에.”
코라가 재빨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놀리지 마! 하고 내게 소리질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깔깔거리며 웃고 있자니 록진이 케이크 세 개와 커피 한 잔을 들고 우리 테이블로 와 앉았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 하십니까.”
“아, 여자들 사이에 흔한 비밀 이야기요. …그런데 뭘 그렇게 많이 사와요?”
“고르려다가 결정 장애가 생겨서요.”
“매일 이렇게 많이 시키고. 이거 다 먹는 건 나잖아요. 자기는 한 입씩밖에 안 먹으면서.”
“다양한 맛을 즐기고 싶은 욕망의 발산이랄까요….”
심각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내게 건네주는 록진을 힘껏 째려보다가 포크를 받아서 입에 넣었다. 오늘은 블루베리네. 매일 카페에 앉아서 노닥거리다보니 요즘 동네 카페의 케이크 중에 먹어보지 않은 게 없을 정도였다.
“캘리 아가씨도 드시죠.”
록진이 코라에게 포크를 건네자 그녀가 얼결에 받더니 가볍게 말했다.
“둘이 사귀는 티 너무 많이 나는 거 아니에요?”
“응?”
케이크를 입에 넣으면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한 게 없는데 무슨 소리야.
“티 나는 거 같습니까?”
“네, 그것도 엄청. …뭔가 분위기가 핑크예요. 베이비 핑크색.”
당황해서 맛도 안 느껴지는 케이크를 제대로 씹지도 않고 삼키자 록진이 내게 손수건과 차를 밀어주었다. 잽싸게 받아서 마시고 기침을 약간 하자마자 코라가 가늘게 눈을 뜨면서 말했다.
“안 들키는 게 이상하겠구만.”
“보통 호위무사는 이렇게 안 해?”
코라는 코웃음을 치면서 케이크를 크게 한 입 떠먹으면서 포크를 휘둘러대며 말했다.
“호위무사는 아가씨 옆에는 앉지도 않는 거야, 원래.”
그 말에 록진이 아, 하고 그제야 눈치 챘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됐어요, 너넨 이미 글렀어. 잉그럼한테나 들키지 마라.”
“윽.”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우웅, 하고 진동이 느껴졌다. 뭐지, 하고 록진과 내가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부르십니까?”
“어…네.”
“응? 뭐야?”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는 우리를 코라가 바라보고 의아한 표정을 했다. 나는 버튼을 눌러 진동을 죽이면서 그냥 웃었다.
“별 거 아냐. 음… 이만 일어나자.”
커피는 테이크 아웃이니까 괜찮겠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종업원이 건드리지도 않은 케이크를 포장해주겠다고 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기다리면서 그녀가 이 일에 관심을 가지는 걸 바라지 않기 때문에, 나는 다른 이야기로 그녀의 관심을 돌렸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종업원이 케이크를 포장해준 것을 들고 계산까지 하고 밖을 나오자 시간이 꽤 흘러있었다. 코라에게 케이크를 선물하고 인사를 한 후에 집으로 향하면서 그에게 물었다.
“…역시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남자 호출을 받고 가는 건, 좀 그렇지요?”
그러자 그가 약간 망설이는 얼굴을 하다가 말했다.
“아니라고는 말을 못하겠군요.”
“좀 걱정 돼요.”
“…어떤 게 말이십니까.”
언제나 차분하게 길을 걷는 그의 보조에 맞춰서 걸어가면서 나는 말을 골랐다.
“음, 만약에 록진에게 피해가 가면 어떡하나. 혹시 변덕을 부리셔서, 저를 베노암에 요구하시면 어쩌나… 뭐, 그런 생각들이 자꾸 나네요.”
나를 어째서 가끔 부르는 지 나는 사실 잘 알 수 없었다. 내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그것을 응하는 그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그저 닮은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은 것일 것이다.
단순히 비슷한 처지의 사람에게 해주는 것으로는, 과하게 내게 친절을 베풀어 준 분이었다. 정의 내리지도 못한, 아직 설익은 이 관계에서 내가 발을 뺀다고 말하면, 그는 과연 뭐라고 말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록진이 조심스럽게 내 손 끝에 그의 손을 닿게 하더니 이내 꽉, 하고 내 손을 붙들었다. 골목길에 사람이 없었고, 저녁노을이 안온하게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그 편안함에 붙들려 포근하게 가라앉혀졌다.
“그 분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확신에 찬 눈에 나는 그를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어떻게 알아요?”
“…진실로 싫다면 누구에게도 강요하거나, 집착하지 않으려고 하시는 분입니다. 전례가… 있으니까요.”
록진도 알고 있는 걸까. 그의 손을 잡고 한참을 타박타박, 걸음에 맞추어 걷다가 나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나는요. 날 아주 안심시켜줘서 록진이 아주 좋아요. 같이 있으면 세상에서 제일 든든하고, 제일 따뜻하고….”
그러자 그가 웃었다. 영광입니다, 자그맣게 내 손등을 매만지는 손길에 웃음이 나와서 나도 배시시 웃었다.
“록진은 내가 왜 좋아요?”
“…약해서.”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그렇게 말했다. 얼굴의 옆선이 몹시도 잘 보이는 잘생긴 얼굴이 내뱉는 의외의 말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약해서요?”
“네. 예쁘고, 똑똑하고 능력도 좋고… 논리적이신데다 이성적이라, 가장 합리적인 길도 잘 찾으시고… 공작감이시지요, 아가씨는.”
뜬금없이 나온 칭찬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기만하자 그가 멈춰서더니 말했다.
“그런데 감정에 약하세요. 가끔 약한 부분이 건드려지면, 꽃잎의 보드라움같은 당신의 연약함이 너무 잘 느껴져서…, 그래서 지켜주고 싶어졌습니다.”
처음, 그를 봤을 때 참 무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내기 힘들 것 같다고, 워낙 말이 없고 반응이 없어서. 그런데 아니었다. 이 사람은 정원사 같이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약할 때나, 건강할 때, 항상 지켜보고 내게 필요한 것을 주는…
“록진은 정원사 같네요.”
“튼튼하게 커주세요.”
그러더니 그가 작게 웃었다. 많이 웃으면 좋을텐데, 하고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는 오늘 사관학교의 기숙사에서 자기로 해서, 나를 샤펜 저택에 데려다주고 떠났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옷을 갈아입고 오페의 구두로 신을 갈아신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달이 크게 떠오르고, 짙은 어둠이 깔렸을 때야 나는 구두의 뒷굽을 부딪히면서 말했다.
"이리하의 방."
빛이 검은 어둠을 없애듯이 빛나고, 다시 어둠이 눈 앞에 펼쳐졌을 때 스르륵, 하고 내가 천천히 땅에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고 어두운 방안을 밝히는 빛을 바라보았다. 이리하는 그 옆의 의자에 앉아있었다.
"일찍도 왔군."
"늦어서 죄송해요."
“엄청 늦었어. 시간 개념이 엉망진창이로군, 아가씨는.”
그의 능청에 웃고 나서 그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 옆자리에 앉아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 말을 전해야할까, 나는 그렇게 한참을 그를 바라보다가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을 피해버렸다.
"… 좋은 소식을 들고 온 건 아닌 것 같군."
그 말을 듣자마자 저절로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눈치가 빠르시네요.”
메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서 손에 올렸다. 당신의 친절으로, 나는…
“제게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저는… 당신의 친절으로, 제 상처를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어요. 돌아올 곳도 생긴 기분이 들었어요.”
목걸이를 팔아 언제든 오라는 말에는 구원이 담겨있었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리고, 안착할 누군가가 모두 죽어버린 내게 그 말은 기쁨이었고, 감동이었다.
“그런데… 저는.”
“…….”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만 바라보았다. 나는 이어지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끄집어 올렸다.
“저는 제가 머물 사람이기를 바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이 제가 돌아갈 곳이 되기를, 노력해볼 생각이에요.”
그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덧붙이고 말았다.
“그리고 만약 당신께서 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계셨다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내가 이렇게 말을 못 했나. 나는 더듬더듬, 내 인생 처음으로 말을 해보는 사람마냥 말을 꿰어나갔다.
“저는 당신의 수많은 후궁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아요.”
이리하는 한참을 나를 바라보더니 입술을 달싹이다가 내가 건네는 목걸이를 받아들고는 말했다.
“샤하레가 된다면….”
“제 어머니를 아시잖아요.”
엄마는 평생 단 한 번도 온전히 샤펜공작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샤펜 공작을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약혼녀가 있었고 엄마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바꿀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결국 사생아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엄마는 그저 수많은 여자 가운데 하나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저는 단 한사람을, 온전히 가지기를 원해요. …이리하, 당신도 아실 거예요.”
그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샤하레였던 일리아라를 완전히 소유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녀 마음 한 줌조차도 가져보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내게 유언을 남기셨어."
나는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목걸이를 꽉 쥐면서 내게 말했다.
"네 아비에게서 나온 너는 저주의 씨앗이라고.. 언젠가는 내 아들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러 올 거라고 말이야. …그녀는 죽어가면서 힐더를 찾았어."
아버지는 결국 힐더를 죽이지 못했지. 그녀의 아이였거든. 그가 가볍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대가….”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아무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나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리도 구질구질한 운명이란 말인가.
“그대의 말대로야. 난 그대가 나를 구원해 줄 거라고 믿었어. …힐더를 버리고 내게 오기를 바랐어. 다른 상황임에도…"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무릎위에 손을 올렸다. 도무지 이 사람을 위로할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다니엘에게 가는 건 아니에요."
"그럼 누구한테 가는 건데?
"제가 남자 복이 많은 가봐요. 이리하께서 반한 여자니 오죽 인기가 있겠어요, 제가?"
그러자 그가 희미하게 웃더니 물었다.
"그럼 누군데?"
"질투하시기 없어요. 분노도 안 되고, 보복도 안돼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록진이요."
"…그 개자식이."
그는 당장이라도 그 놈의 목을 베라고 할 기세였다. 웃음이 나왔다. 그가 힘을 빼고 자리에 앉았고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이 남자는, 분명 세상에 다시 없을 강건한 왕이 되겠지.
“나는 그대와 … 더 많은 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이리하께서 나쁜 것도 아니고, 매력이 없으신 것도 아니에요."
그가 나를 심홍색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대는 나를 선택하지 않는군.”
나는 그의 무릎에서 손을 떼고, 그의 가장 낮은 옷자락에 입을 맞췄다.
“사랑은 눈에서 생겨. 바라볼 수록 자라나고… 그러고는 죽고 마는군.”
나는 그가 내게 준 호출기를 내려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번에 그가 했던 말이 그제서야 사랑이 어디에서 생기느냐, 라는 말임을 깨달았다.
“그대를… 사랑하기도 전에, 이렇게 죽어버리는군.”
그의 담담한 말에 나는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작별의 키스라도 해주지 그러나.”
그 말에 희미하게 웃었다. 그도 내게 웃어주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어질 수 없는 상대고, 그저 마음도 아닌 무언가를 거절하는 것 뿐인데도. 일어서서 뒤꿈치를 두드리려하자, 그가 갑자기 일어나 재빨리 내게 다가오더니, 입이 부딪혔다.
오르안에게는 그만의 향수가 있었다. 은은하다고, 평소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급작스레 다가온 향이 독하고 진하고, 강했다.
"후회해야해."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내게 경고했다. 나는 맞닿은 입에서 떨리는 숨결을 죽이면서 그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드시, 후회해야해, 라시아."
향이… 지독했다.
"내가 널 완전히 가지고 싶었어. 네 마음을 온전하게 가지고 싶었다, 나는."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에서 멋지거나, 좋은… 그에게 해줄법한 말이라고 생각해온 것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를 껴안았다. 뒷꿈치를 세번 부딪혔다.
“방으로….”
그의 품에서 내가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빛으로 흐릿한 시야 사이로, 그가 스스로의 눈을 가리는 것이 보였다.
============================ 작품 후기 ============================
이리하 더 자체강화.
이리하의 대사 중 일부분은 존 키츠의 시 입니다.
사랑이 생기는 곳은 어디인가요 - 존 키츠사랑이 생기는 곳은 어디인가요?
마음속인가요, 머리속인가요?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자라는지 대답해주세요, 대답해주세요.
사랑은 눈에서 생긴답니다.
바라볼수록 자라지요
그러고는 죽고 말아요.
사랑이 누워있는 요람 그 속에서 우리 모두 울려요, 사랑의 종을, 내가 먼저 울리지요. 뎅그렁, 사랑의 종을.
'ㅆ' 원문을 밝힙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