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그 수업이 어찌나 무섭던지 끝나자마자 코라와 나는 살인범한테 쫓기는 여자들처럼 강의실에서 빠져나왔다.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록진이 내게서 책과 가방을 받아들었다.
슬슬 이 사람이 있는 게 너무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누가 내 가방을 들어주나싶을 지경이었다. 딱히 호위무사도 아니고 이건 완전 짐꾼이야… 그런 생각에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코라가 창백한 얼굴로 나를 꾹꾹 누르며 밀었다.
“뭐하고 서있어, 빨리 가야지. 죽는 줄 알았네.”
"수업은 즐거우셨습니까?"
우리는 동시에 몸서리를 쳤다. 록진은 우리 둘이 소름끼쳐하는 것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수업이었길래… 귀신이라도 나왔습니까.”
“귀신… 그렇죠, 귀신이죠. 록진이 물리쳐 줘요.”
그러자 그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무리입니다.”
“… 농담이니까 정색하지 말아요.”
코라가 우리 둘을 보더니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버나드 교수님 알아요? 되게 유명한 작간데."
"…혹시 레싱엄 버나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사람 베스트셀러를 언급하려고 하는 거라면 하지 마요. 대체 그게 어떻게 적힌 글인지 알고 싶지도 않을 정도니까."
코라가 학을 떼면서 하는 말에 괜스레 딴청을 부렸다. 솔직히 난 그 글들 다 좋아하니까… 실제로 성격이 약간, 아주 약간 다르긴 해도.
“아뇨. 저와 교류가 있었던 분이라.”
"어? 버나드 교수님이랑요?"
의외네. 놀라서 그를 바라봤더니, 그가 가방을 고쳐 들더니 천천히 우리를 복도로 에스코트했다.
"네. 제 고향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고 싶다고 한 번 찾아오신 적이 있습니다."
"어머, 정말요?"
"아버님 어머님이 허락해주지 않으셔서 소설은 쓰지 못하게 됐지만, 버나드교수님은 마음에 들어 하셔서 저희 형제들의 과외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 대가로 저희 자치령을 마음껏 여행할 수 있게 해주셨지요. 숙식도 제공하고요."
록진이 대체 어떻게 저 버나드교수의 수업을 들었을지 심하게 궁금해서 그의 옆에 섰다. 코라와 눈빛을 교환하자 코라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다른 쪽 옆에 섰다. 그는 당황한 듯이 살짝 걸음을 멈췄다. 우리는 그의 양 팔짱을 끼면서 물었다.
"버나드 교수님이랑 어떻게 수업 했어요~?"
"교수님 연세 어느 정도에 만났어요~?"
그는 아예 뻣뻣하게 굳어서 우리의 팔을 빼려고 노력했다. 예전에 한 번 나한테 저 사람이랑 지내기 불편하다면서 내게 투정을 부렸던 코라에게 여자에 대한 면역이 없을 뿐, 이라고 장담했던 내 말을 믿지 않던 코라는 내가 그의 팔을 잡자마자 뻣뻣해지는 것을 보고서 깜짝 놀라며 그를 놀려댔다.
그 이후로 우리는 록진을 털어 먹을 때 이런 일을 자주 했다.
“이런 것 좀 하지 마세요. 거북합니다, 엄청.”
하지만 이런 부분을 보면 참 하나도 안 귀엽다니까. 거북하다면서 얼굴도 안 붉히고. 사실 난 부끄러움이 많아! 라는 티가 좀 더 났으면 훨씬 놀리는 재미가 있을텐데.
"어떻게 이 나이 될 때 까지 이렇지? 여자 형제가 하나도 없구나, 그죠?"
"예. 삼형제입니다."
"라젠이 둘째예요?"
록진이 자연스럽게 코라를 지나가는 학생들에게서 보호하면서 대답했다. 코라가 의외라는 얼굴로 그를 봐서 오히려 웃겼다. 아니, 호위무사잖아.
"예. 형님 하나, 동생 하나입니다."
"그 놈의 삼형제 가르치느라 내 늑골이 90도까지 벌어지는 줄 알았지. 내 생애 저 정도로 맹탕한 놈들은 처음이었어. 넘어가기 싫어서 숨을 몰아쉬고 살았어, 그때."
코라와 나는 순간 멈추고 고개를 뻣뻣하게 굳힌채 재빨리 록진의 손을 놓았다. 어째서 강의실 앞에서 계속 얼쩡거리고 있었단 말인가!!! 일단 인사해야겠지…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최대한 우아하게 절을 한 후 말했다.
"오늘 수업도 무척 유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입이 찢어져도 유쾌, 혹은 즐거웠단 말은 안 나왔다. 버나드교수님이 지팡이를 쿵! 하고 내리찍더니 코라를 노려봤다. 코라는 얼른 언제나 잘 듣고 있습니다, 라고 인사했다. 록진이 기사의 예를 갖추면서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스승님."
"스승이라고 부르지도 마라, 이 망할 놈아!!!"
복식호흡으로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레싱엄 교수님을 바라봤다. 이 분 정정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는 성큼성큼 걸어서 록진의 앞으로 걸어왔다. 코라는 겁을 먹고 얼른 그에게서 떨어졌다. 나는 피하기가 애매해서 그냥 서있었다.
"내가 니 놈 새끼들 가르치느라 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심장이 선덕선덕한다!! 요한이랑 래현이는 어쩌고 있어? 니 놈이 사관생도 할 나이냐? 몇 학년이야?!"
"21세이고, 지금 3학년입니다."
"앞의 질문은 어따 팔아먹었어?!!"
록진은 잠깐 생각하는 척 하더니 대답했다.
"뭘 여쭤보셨지요?"
"알면서 뭘 또 물어보는 척이냐?"
“여전하십니다, 스승님.”
그가 얄미울 정도로 느긋하게 작은 미소를 지었다. 레싱엄 버나드는 그대로 지팡이를 휘둘렀는데 가만히 있으면 안 맞았을텐데, 그가 엉겁결에 나를 보호한답시고 움직여서 그 지팡이에 팔을 얻어맞았다.
"괜찮아요?!! 왜 피하길 피해요, 레싱엄 교수님 얼마나…"
맞을 줄 몰랐는지 레싱엄 교수가 눈을 크게 뜨고 록진을 바라보았다. 일단 얻어맞은 부위가 어딘지 몰라서 얼른 나를 보호하는 듯이 감싼 록진을 올려다보았는데, 아파서 인상을 찌푸릴 줄 알고 있었는데 웬걸, 이상하게 웃고 있다.
왜 이러나 싶어서 가만 쳐다봤더니 갑자기 정색하더니 윽, 하는 몹시 작위적인 소리를 냈다. 아하.
“록진, 많이 아파요?!!”
얼른 목소리를 높여서 그가 쓰러지는 척 하는 것을 도왔다. 레싱엄 교수가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자식이 별로 아프지도 않으면서 왜 장난질이야? 괜찮냐?"
레싱엄 교수님도 생각보다 상냥하신 분이구나. 덩달아 놀랐는지 코라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일단 양호실로 갈까요? 라젠, 많이 아프면…"
록진이 갑자기 레싱엄교수님께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멀쩡합니다만, 지팡이 그만 휘두르라고 배웅할 때도 말씀드렸잖습니까. 나이도 지긋하신데 그만 하십시오."
"이 놈의 자식이 스승님을 놀려!!!!!!"
록진이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뭐랄까, 록진이 이렇게 레싱엄 교수를 놀리는 걸보니 기분이 참 묘했다. 핏발을 세우며 화를 내는 레싱엄교수 자체도 의외였고 말이다. 이 분 이렇게 다혈질인 면모도 있으시구나. 그나저나 록진 저 사람은 장난질 하다가 어디 하나 부러져 봐야 정신을 차리지.
"래현형님은 약혼하셨고 요한은 오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팔은 괜찮으냐?"
레싱엄 교수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코라는 분위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 끼어드는 게 좋겠다고 판단이 서서 재빨리 코라 옆에 섰다.
"부러진 것 같습니다, 스승님."
"내 힘이 얼마나 된다고 니 멀쩡한 팔이 부러지겠냐.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늙은이 그만 괴롭혀, 이 놈의 자식아."
그의 입에서 늙은이 소리가 나오다니 엄청나게 의외였지만, 일단은 정말 큰일이라도 났을까봐 걱정이 되어 인상을 썼더니 록진이 담담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저는 괜찮습니다만, 아가씨는 다친 곳 없으십니까? 스승님 매는 매섭습니다."
"덕분에요… 그나저나 그만 장난쳐요, 교수님께."
"저놈 자식은 저게 매력이야. 내버려둬. 일단 넌 나 좀 따라와라, 강 록진."
"안 됩니다."
레싱엄 교수가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러더니 지팡이로 나를 척, 하고 가리켰다.
"제군이 이 자식의 주인인가?"
"예, 그렇습니다."
"제군의 호위무사를 내가 한두 시간 빌려도 그 넓은 배포로 받아주겠지?"
"물론입니다."
레싱엄 교수는 이제 됐지? 따라와! 하고 지팡이로 바닥을 탕! 하고 쳤다.
"데려다 드리고 에스코트해드려고 했는데."
"3학년 내내 다닐 동안 한 번도 인사드리러 안 온 것 같은데… 시간 좀 보내세요. 2,3시간 동안 제가 괴한의 습격을 받을 일도 없고."
그의 손에서 내 가방과 책을 빼앗듯이 해서 내가 짐을 들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하고 코라의 손을 잡고 얼른 그 곳을 빠져나왔다.
거리가 좀 떨어졌다 판단이 서자마자 코라가 바로 내게 말했다.
“진짜 의외다. 라젠이랑 레싱엄 교수.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면서… 의외로 죽이 잘 맞네. 레싱엄 교수님이 저렇게 확확 반응하시는 것 나 처음 봐.”
“나도. 저 분 저렇게 화낼 줄 아는 분이셨구나.”
"그런데 아까 라젠을 이상하게 부르더라? 로그..진?"
"아, 그거? 라젠은 오르제국이나 대륙 식으로 발음한 이름이고 록진은 고향에서 그를 부르는 이름이래."
"그렇구나… 난 라젠이라고 불러야겠다. 발음이 어려워. 록-찐."
“본인은 아무거나 상관없다니까 상관없을 거야.”
“그나저나 레싱엄 교수님이 상인이라고 말씀하신 게 좀 걸리네.”
“음… 그건 나도.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듣긴 들을 것 같아서, 괜찮겠어?”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하자 코라는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지, 뭐. 내가 뼛속까지 상인인건 사실이니까. 그보다 이제 너 무슨 시간이야?"
"아, 나? 이제 2시간 연강 듣고 그 뒤부터 도서관 가려고 해."
“그렇구나. 그럼 오늘은 여기서 헤어지겠네. 난 오늘 이걸로 끝이라서… 근데, 라시아.”
“응?”
등을 돌려 앞으로 걸어가려던 코라가 내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머뭇거리며 물었다.
"진짜 시드는 안 돼?"
그녀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싶어서 뭐라 입을 열었다가 그냥 닫았다. 나는 표정을 가다듬고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코라는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어차피 네 마음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 나도 아는데… 미안, 이런 거 물어봐서."
"아니야. 너로서는 당연히 물어봐야 하는 질문이지. 각오하고 있었어."
코라가 망설이다가 입을 다물고 그럼 난 가볼게, 하더니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 수업을 들으러갔다. 시드를 받아주면, 모든 게 행복하게 끝날까?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그건 행복이라고 할 수 있나. …여전히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하는 게 진짜 행복한 건지.
복잡한 마음을 애써 추스르고 들었던 수업이 끝나고 자습실로 향하던 길이었는데 도무지 자습실 쪽으로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결국 로드리고 관으로 향했다. 잠이나 한숨 자야지. 하필 책도 많이 들고 온 날인데 꼭 이렇게 안 가게 된다니까. 괜히 우울해지는 스스로가 싫어서 빠른 걸음으로 로드리고 관 쪽으로 다가가는 길에 누군가와 엉겁결에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예요. 제가 앞을 제대로 안 보고 다녀서…"
내가 부딪힌 상대 또한 굉장히 책을 많이 들고 있었는지, 엉망으로 책이 떨어져버렸다. 아… 좀 제대로 보고 다닐걸.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고 쪼그려 앉아서 내 책과 상대의 책을 줍는 와중에 문득 상대방의 얼굴을 봤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데… 아 맞다.
"데이 오휘나 아드린양 맞으시죠?"
"아… 저, 절 아세요?"
"지나가는 결에 한번 뵌 적이 있어서 알고 있답니다."
최대한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책을 재빨리 땅에 내려놓고 그녀에게 충고했다.
"음… 치마에 흙먼지가 다 묻으니, 무릎을 땅에 대지 않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제가 주울테니까 일단 매무새를 다듬으세요."
그러자 그녀가 안 그래도 빨개진 얼굴을 더 붉게 물들이며 얼른 일어나 치마를 털었다. 왜 줍고 있는 쪽에 터는 거지. 이 사람 나에게 불만이 있나? 빤히 그녀를 바라보자 털다가 깨달았는지 힉, 하는 소리를 내고 얼른 다른 곳에 막 터는 걸 보니 그냥 요령 없는 사람인가 보다, 싶어서 그냥 웃고는 책을 반쯤 들었다.
"음… 손이 모자라서 그러는데 좀 도와주시겠어요? 아드린양의 책이랑 제 책이 섞여서 일단 분류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여기서는 좀 그렇고, 아 그렇지. 로드리고 관에 잠시 들릴까요? 저 앞이거든요."
"아,아니에요! 저기, 그냥… 그냥…"
"그냥 어떻게 못하는데다, 가장 가까운 곳이 로드리고 관이라서 그래요. 아, 혹시 남자들이 지내는 공간이라서 좀 그러시면… 지금 시각에는 사람도 잘 없는데다, 꽤 깨끗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저기, 그, 제가 가면 실례잖아요."
"딱히 실례는 아니에요. 저 팔도 너무 아픈데,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자 화들짝 놀라면서 얼른 나머지 책을 들고 나를 따라온다. 무지 작은 동물 같은 여자애네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 데이 오휘나 아드린은, 내가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아가씨는 아드린 집안의 서녀로, 남작가의 사생아라 지위도 낮은 편이다.
아드린 남작이 20대 때 집안의 하녀의 손을 잡고 도망간 일이 있었는데, 그 상대 하녀가 낳은 아이라고 한다. 당연히 아드린 남작은 5달 만에 집으로 끌려오게 됐는데, 얼마 전에 제대로 실권을 붙잡고 나서야 몰래 뒤를 봐주던 아이를 집안에 데리고 올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부인의 반대는 엄청났을테고, 집안은 수치의 기억이라고 악착같이 반대했지만, 실권을 잡은 남작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첩실로 들어앉은 하녀가 그렇다고 딱히 한 몫 잡아보자 파는 아닌데다 데이가 여자아이라 요즘은 조용해졌다고는 하지만, 이 데이라는 아가씨는 영 귀족과는 거리가 먼 아가씨다.
꼭 제 어미인 하녀 같다는 게 세간의 평으로, 당연히 상당히 무시받고 있다. 게다가 나름대로 신분이 비슷해서 나의 대척점으로 여겨져 더욱 괄시받는 모양이라 나는 이 아가씨에게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한참 걷는 와중에 멀리서 록진이 걸어오는 게 보여서 손을 들자 그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서 내게서 짐을 받아들었다.
“가볍게 다니시지.”
"어쩌다보니까 이렇게 됐네요. 잘 만나고 왔어요, 스승님은?"
“예. 가방도 주십시오.”
그에게 가방까지 건네주고 소개를 시켜줘야겠다 싶어서 아드린양에게 말했다.
"이 쪽은 라젠 강이에요. 오르제국 출신이고, 사관학교에서 잠시 제 호위무사를 해주러 오신 훌륭한 무사랍니다."
"손이 비어있지 않아 정식으로 인사드리지 못함에 죄송합니다. 라젠 강입니다."
그가 고개를 약소하게 까딱, 하고는 말했다. 무심한 표정 어디에 도대체 죄송이 적혀있는 건가 싶어 뚫어져라 보다가 포기하고 말했다.
“라젠, 이 쪽은 레이디 아드린이에요. 데이 오휘나 아드린 양은 이제 1학년이시고, 아드린 남작가의 유일한 영애시랍니다."
아드린 양은 자기가 책을 들고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은 듯, 손으로 치맛자락을 잡고 정식으로 인사했다. 그러다 책들이 떨어지니까 놀라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어째 소설에 나오는 사람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존재할 줄이야. 신비한 동물 중에 하나인 줄 알았는데.
"저, 죄… 죄송해요. 저기. 저는…"
라젠이 책을 땅에 내려놓더니 아드린양의 주변에 있는 책을 하나씩 주워서 들었다. 아드린은 허겁지겁 책을 주워들기 시작해서 나는 그녀에게 조용히 충고했다.
"괜찮아요. 라젠이 하게 두세요, 아드린양."
나 혼자 서있고 이 아가씨와 라젠이 줍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참 묘했다. 엄청 악당이 된 기분이야. 내 말을 듣자마자 또 벌떡 일어나더니 치맛자락을 꼭 부여잡고 다시 죄송하다고 말한다. …보통 세간의 평에 동의하는 편이 아닌데, 그녀에 한해서는 취소해야겠다.
"라젠."
"예, 아가씨."
"무거운 책 몇 가지만 들면 나머지는 저희가 나눠서 들 수 있을 것 같네요. 좀 도와주겠어요?"
록진이 예, 하고 대답하고는 몇 권을 골라서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로드리고 관을 향하면서 이 아드린양을 초대한 게 어리석은 짓 같이 느껴졌다. 하는 행동 하나 하나를 교정해 줘야 한다니. 몹시 귀찮군.
"아드린양, 제 옆으로 오시겠어요? 호위무사 옆에서 절 따라오는 모습이 그리 좋게 보이지는 않는답니다."
"네,네!"
대답은 한 번만 하라고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내 옆을 졸졸졸 따라왔다. 이렇게 보면 좀 귀여운 것 같은데. 로드리고 관 문 앞에 서서 나는 3보정도 뒤의 록진에게 말했다.
"라젠, 잠깐 내 짐 들어주겠어요? 그러면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때 천천히 로드리고 관의 문이 열렸다.
"짐이 많아, 라시아? …어."
데릭이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나보다. 나는 그에게 웃어주면서 말했다.
"좀 도와주시겠어요, 미스터 로웰?"
============================ 작품 후기 ============================
뭐 사람마다 판단 기준이 다른 거니까 뭐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__'..... 헤에...
1.라시아는 철벽녀입니다. 시드에 한해서는 특히요. 왜냐면 지금 너무 행복한데 상황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지요.라시아는 유난하게 자유로움에 집착하는 아이기도 해서여.
음. 이해를 돕자면. 우리집에 나 좋다는 애가 씨씨티비를 설치해 놓고 아 보고 시퍼 보고시퍼 해서 살짝 틀어본 거져. 그리고는 사실 미아내.. 나 이거 봤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능력자고 뭐고 떠나서 소름;;;; 너머야;;;;; 미친;;;;;; 이 반응이져. 쌍뺨맞고 고자 안 된게 다행.
2.그리고 칼 같은 게 여지를 주는 거 보단 낫다고 생각합니다. 괜히 어설프게 난 좋아하지도 않는데 희망고문하는 취미 없습니다. 전혀 남자로 여겨지지 않으니까 이렇게 칼 같이 끊는겁니다. 언젠가 느껴지면 또 그 때 일이니까요. 이런 여자의 매력도 있는 법이잖아여? 솔직히 좋잖아여 다 알아.
3. 시드의 마음도 이해하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시드에게는 '드래곤'으로서의 사랑은 처음입니다. 그러니까 어... 보고 싶어서 막 무례인지 알면서도 막 찾아가고 남의 일기장 몰래 훔쳐보고 싶을 정도의 사랑? 그런 게 처음이란거죠.
일부러 라시아도, 시드도 이해할 수 있게 해놨습니다. 나중에 시드 마음이 좀 더 잘 보일 거예요. ^ㅅ^
heese_prl 트위터에 진남주가 있어요!